소설리스트

30. (31/33)

30.

밤이 너무 길었다.

맹세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넬은 깨어나자마자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문을 열자 자레스는 그야말로 미친 야수가 됐다.

밀어내도 소용없었다. 아프다고 울어도 물러나지 않았고, 그 대신 한동안 끌어안고만 있는 거로 나름 관용을 베풀었다.

카비르의 황제는 무자비한 게 맞았다. 아넬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레스는 몇 번이고 그녀를 안았고, 아넬은 새벽녘 어느 쯤엔가 기어코 기절하고 말았다.

그러다 간신히 깨어났을 때, 아넬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레스는 여전히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심지어 모로 누운 상태인 아넬의 밀부엔 여전히 그의 기둥이 꽂혀 있는 상태였다.

“깼으니, 나머지를 계속해야겠군.”

“자레스, 제발…!”

아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자레스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흣!”

빡빡하게 메말라있던 그녀의 안이 다시 매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이젠 자레스가 조금만 자극해도 애액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미 자레스가 숱하게 드나들어서 그에게 길들여진 곳이었다. 자레스가 빨갛게 달아오른 속살 속으로 단숨에 박혀 들어갔다.

“하아, 아넬!”

바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넬 역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달뜬 비명을 흘려댔다. 자레스는 드나들기 쉽도록 아넬의 한쪽 다리를 위로 올린 채 계속해서 자신을 꽂아 넣었다.

잠시 식었던 침실 안에 다시 열기가 가득 찼고, 속살을 가르는 찰박거리는 소음과 신음이 침실에 울려 퍼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숱하게 허리를 찔러 올리던 자레스가 돌연 몸끝을 빼내며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번엔 아넬을 바로 눕힌 게 아니라 그녀의 허리를 잡아 침대 위에 엎드리게 했다.

순식간에 자레스를 향해 엉덩이를 높이 들린 자세가 되자 아넬은 당황했다.

“뭐, 뭐 하려는 거예요?”

“사랑을 나누는 자세는 한두 가지가 아냐, 아넬.”

짓궂게 속삭인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하나씩 가르쳐 줄게.”

그 말과 동시에 이미 푹 젖은 그녀의 내벽에 자레스가 세차게 기둥을 찔러 넣었다.

지난밤 내내 꿀물을 흘려대던 아넬의 내부가 곧바로 그의 기둥을 빨아 먹듯 쑥 삼켰다.

“하아아.”

잡아먹을 듯 그를 조여 오는 그녀의 질 벽에 자레스가 밭은 한숨을 토해냈다. 짜릿한 전율이 연결된 부분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아, 아…. 아. 자, 자레스…. 아, 하으응!”

질 안에 끼워진 자레스의 기둥이 아랫배를 꽉 채운 것 같았다. 여성을 다 채운 것도 모자라 아랫배 깊숙이 박혀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강렬한 쾌감에 휘말린 아넬은 저절로 환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또다시 퍽 소리가 나도록 자레스가 치고 들어오면서 기어코 아넬이 울음을 터뜨렸다.

뒤로 들어오는 충격은 보다 더 강력했다. 몸이 쪼개지는 것 같고 그 갈라진 틈으로 희열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아넬이 울음과 함께 고개를 젖히자 자레스가 그녀의 치골을 지지대 삼아 붙잡으며 다시 한번 세게 부딪쳐 왔다.

퍽퍽, 계속해서 허리를 쳐대자 체액으로 푹 젖은 결합 부위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빨간 보석 같은 속살이 자레스의 기둥을 몇 번이고 삼켜댔다.

그의 단단한 중심이 엉덩이골을 가르며 그 사이로 박히는 걸 보는 건 색다른 즐거움이자 성희이기도 했다. 호흡이 가파르게 상승했고 쾌감 역시 고조돼 갔다.

침대에 얼굴을 묻은 아넬의 비명 역시 더 높아져 갔다.

올록볼록 튀어나온 젖은 속살 여기저기를 깊이 찌를 때마다 아넬의 비명은 한없이 커져만 갔다. 질척이는 소음 역시 빨라진 속도에 따라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한계가 머지않았다는 걸 느낀 자레스가 허리를 뺐다가 있는 힘껏 크게 박자 견디다 못한 아넬이 문을 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적당히 느즈막한 시간에 그녀의 시중을 들러 침실 앞으로 찾아온 블로자와 사이야가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아넬과 자레스의 신음을 듣고야 말았다.

“신이시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확인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설마 성녀가 내지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교성이 꽉 잠긴 문을 뚫고 들리자, 블로자는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났다.

반면에 함께 온 사이야는 그 귀신같은 청각으로 블로자보다 한발 먼저 두 사람의 교성을 알아듣고는 싱글싱글 웃으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드디어 칼리크의 뜻이 이뤄졌군요. 은총에 감사하나이다, 칼리크시여. 칼리크의 영광의 빛이 두 분의 침대 위를 비추길!”

“그, 그런 망측한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뭐가 부끄러워서 그러십니까? 남녀의 교합은 신성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요. 이, 이건 전혀 성스럽지 않습니다!”

“비는 때와 장소에 맞춰서 내립니까? 풀과 꽃이 성스러운 시간을 골라서 피어나던가요? 블로자 님, 사랑은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는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평생 메타를 섬기며, 신관들의 설교가 가장 진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칼리크의 교리는 세상 모든 곳에 있었고 축복은 자연 속에 있었다. 어느 곳이든 칼리크의 진리가 없는 곳이 없었다.

“무르익었으면 터뜨려야 되고, 씨를 뿌려야 하는 법입니다. 두 분에게 드디어 그때가 찾아온 것이지요. 부디 칼리크의 빛이 성녀님의 자궁에 가득하기를.”

그렇게 말하며 사이야가 무릎을 꿇고 칼리크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마지막 말은 차마 듣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기뻐한다는 건 알겠다. 아넬의 앞날이 행복하길 기원한다는 것도.

사이야가 중얼중얼 기도를 읊기 시작하자, 블로자 역시 그 옆에서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올렸다.

메타를 찾을 수는 없었기에, 블로자는 나지막이 이름 없는 신을 불렀다.

‘아르드를 보살피는 신이시여, 부디 저 아이가 가는 길에 힘을 보태 주소서.’

메타든 칼리크든, 이 아르드를 사랑하는 신이라면 그녀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블로자와 사이야, 다른 신을 섬기는 두 여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했다.

***

퀴나에 일행은 다행히 얼어 죽지 않았다.

밤의 추위는 혹독했지만, 무하립이 파낸 ‘칼리크의 육신’에 부싯돌로 불을 붙이자 다행히 불이 붙었다.

영원의 불처럼 대단한 화력은 아니었지만 흙을 많이 퍼낸 덕에 일행의 몸을 녹일 수 있는 온기 정도는 건질 수 있게 됐다.

건져 온 식량 중에 절인 생선이 있어서 그를 불에 구워서 그럭저럭 배도 채웠다. 이대로라면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이 섬에서 버틸 게 아니라 내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른 카라의 황궁으로 돌아가 자레스에게 그들이 알아낸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돌아갈 배가 없었다.

“언제까지 섬에 있어야 한단 말이야! 얼어 죽는 건 둘째 치고 굶어 죽는 건 어쩔 거야? 이 섬에서 평생 죽치고 살 생각들이야? 엉?”

세 번째 문제는 이거였다. 빌어먹을 황족 놈의 투정. 퀴나에는 사실 이쪽이 제일 참기 힘들었다.

퀴나에는 소매 안으로 숨긴 주먹을 바르르 떨다 무하립 쪽으로 돌아서며 속삭였다.

“무하립. 혹시 스에반 님이 물에 빠져 죽어도 내가 민 거 아닙니다.”

“어째 예고를 하시는 것 같군요.”

“아니에요! 제발 아닌 거로 해 줘요. 모른 척해 달란 말이에요!”

“전하를 보호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고 스에반을 보호하겠다는 걸 보니 무하립이야말로 정말 성자 같은 위인이다.

“보트를 타고 내륙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어?”

투정을 하다 하다 지친 스에반이 또 그 말을 꺼냈다.

“여기는 먼 바다라서 보트로 해안까지 가는 건 무리입니다. 보트는 큰 파도 한 번 치면 뒤집히기 일쑤인데, 이 바다에서 물에 빠지면 살기 어렵습니다.”

무하립의 말은 퀴나에보단 무게가 있어서, 계속 징징거리던 스에반도 입을 다물었다.

기상천외한 말을 내뱉은 건 그때였다.

“그럼 이 섬을 배처럼 몰아가는 건 안 되나?”

“무슨 말이십니까? 이 큰 섬을 무슨 수로 조종을 한다고….”

“섬 전체가 영원의 불의 원료라며? 흙을 퍼냈더니 불도 붙었잖아. 섬의 왼쪽 후미에 불을 붙여 폭발시키면 섬의 방향이 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왜, 내가 예전에 2대륙에서 온 장난감 수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방식으로 수레 양옆에 화약 장치를 달아서 방향을 조절하더군.”

“……!”

이 섬의 칼리크의 육신이고 영원의 불의 원료 중 하나이긴 하지만, 완벽한 영원의 불의 연료를 쌓지 않는 이상 당장 섬의 방향을 틀 만한 화력은 없었다.

지금은 스에반의 제안대로 섬의 방향을 틀어 해안으로 가는 건 불가능했지만, 영원의 불을 가져다 불을 붙이면 방향을 조절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섬의 표면은 쉽게 불이 붙지 않으니 화력은 조절할 수 있다. 정확한 양은 아직 가늠하기 힘들지만 연료를 실어다 시험을 거듭하면 결국 적절한 양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퀴나에가 그토록 고민하던 문제에 서광이 비친 것이다.

“전하는 천재십니다!”

퀴나에가 손을 번쩍 들더니 그토록 미워하던 스에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껴안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스에반을 왜 굳이 자레스가 데리고 가라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스에반이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더니,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황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스에반이 펄쩍 뛰며 밀어냈지만 퀴나에는 개의치 않았다. 무례하게도 스에반의 양 뺨에 입까지 맞추더니 그가 섬의 반대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신은 죽었다아아! 신은 죽었다아아아아! 내가 죽일 거다아아아악!”

드디어 미친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점잖은 무하립이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무하립은 물론이고 그가 끌고 온 수하들 역시 만세를 부르며 뛰어갔다.

섬 저편을 향해 퀴나에의 광기 어린 고함이 긴 꼬리를 남기며 멀어져 가는 걸, 스에반은 얼빠진 눈으로 지켜봤다.

***

“흐, 으으윽. 아응….”

하도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어 버렸다. 하지만 피하고 싶어도 자레스는 집요하게 따라붙었고, 아넬은 여지없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흐윽, 제발…. 자레스!”

아넬은 그의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길게 쭉 뻗은 자레스의 검고 단단한 몸 위에 아넬이 올라간 상태였고, 그녀는 자레스의 기둥을 품은 채 위아래로 얕게, 깊게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을 나누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며 자기가 다 가르쳐 주겠다더니, 자레스는 그 약속을 아주 잘 지켰다.

상상도 못한 체위에 아넬은 계속해서 당황해야 했다.

“흐읏.”

자레스가 강하게 허리를 찔러 올리자 아찔한 쾌감에 아넬이 허리를 뒤로 젖히며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몸이 넘어갈 듯 기우뚱거리자, 자레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아랫도리에서 바짝바짝 타오르는 작은 불꽃이 점점 커져 갔다. 하지만 써본 적 없는 근육을 혹사시켜야 하는 아넬에겐 이 자세가 고역이었다.

“으, 흐응. 아, …자레스. 히, 힘들어요….”

자레스가 얕게 허리를 뺐다가 깊이 쳐올리자 아넬이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놔달라고 간청했지만, 자레스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괜찮아, 아넬. 곧 좋아져…. 흐윽!”

그의 말이 옳긴 했다. 자레스의 말대로 그에게 맡긴 채 흔들리고만 있으면 언젠가는 거대한 희열에 몸을 떨게 된다.

문제는 한 번씩 그 파도에 휩쓸리고 나면 엄청나게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아넬이 지쳐서 깜빡깜빡 조는 사이 시녀들이 요리를 가져왔고, 자레스는 아넬을 안고 내려와 자기 손으로 음식을 집고 빵을 찢고 고기를 떠먹이며 아기 새 돌보듯이 일일이 먹여 줬다.

한때는 그게 좋았는데 이제는 또 한 번 안기 위해 체력을 보충시키려는 것처럼 보여서 얄밉기 짝이 없었다.

‘괜히 먼저 하자고 했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면 그때만 잠깐 멈출 뿐이었다.

한번 불이 붙은 자레스는 마치 영원의 불처럼 꺼지지 않았다.

아넬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던 그였지만, 이제는 그녀가 아무리 호소해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아넬이 울음을 터뜨렸지만 잠깐 멈칫했을 뿐이었다.

그가 여전히 그녀에게 기둥을 묻은 채 몸을 일으키더니 아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이건 또 뭐예요? 아…!”

놀랄 사이도 없이 자레스의 중심을 머금은 아넬의 여성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처음 접하는 자세에 아래쪽이 송곳에 찔리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미 푹 젖은 살을 가르며 뭉툭한 귀두가 빨려 올라가듯 삼켜졌다. 질 벽을 매끄럽게 타고 올라간 기둥이 막힌 내벽 끝을 찌르자, 이번엔 아픔이 아니라 쾌감이 그녀를 찔렀다.

“아, 아아앗!”

“흐, 아넬.”

자레스 역시 눈을 질끈 감으며 격한 희열에 잠겼다. 그녀를 안을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아넬을 탐닉할 때마다 점점 더 강한 쾌락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이제는 마음껏 안을 수 있다는 게 미치도록 좋아서, 이 중독을 끊을 수가 없었다.

“더 좋아질 거야.”

그와 함께 자레스가 엉덩이를 힘껏 쳐올리는 바람에 아넬은 바로 비명을 질렀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희열은 지금까지와 또 달랐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쾌감에 저절로 허리가 휘고, 고통 대신 환희에 찬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넬…. 아넬, 사랑해.”

자레스가 쉬지 않고 속삭이며 그녀의 젖가슴 끝을 물었다.

유두를 빨고 핥으며 끊임없이 아넬을 희롱하는 동시에 그녀의 허리를 잡고 위로 올렸다가 내려 앉혔다.

그녀의 질이 자레스의 기둥을 머금은 채 딸려 올라왔다가, 그의 것을 품으며 다시 찍혀 내려왔다. 그때마다 송곳 같은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면서 아넬의 입에서 비명 같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쾌감을 견디지 못한 아넬이 그에게 매달렸다. 자레스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꽉 끌어안자, 자레스가 그런 그녀의 허리를 내려 앉히는 동시에 엉덩이를 쳐올렸다.

위와 아래에서 파고든 쾌감이 몸 안에서 부딪치며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해도 해도 사라지지 않는 지독한 갈증이 자레스를 움직이게 했다.

계속해서 찌르고 올라가던 자레스가 움푹하게 팬 곳을 세게 쳐올리자 아넬이 비명과 함께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압착되는 것처럼 한없이 그에게 안겨 들어오자, 그와 함께 아넬의 여성이 세차게 수축했다.

절정에 오른 것이다. 한없이 쥐어 짜인 자레스 역시 더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안에서 폭발했다.

“헉, 아넬…. 아!”

“자레스, 으응. 아핫…!”

절정은 단숨에 찾아왔다.

연결된 곳에서 폭발한 절정의 희열이 세찬 폭풍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폭풍이 사라지자 몸 안 여기저기서 자디잔 불꽃이 불티를 흘리며 타올랐다 이내 꺼졌다.

비록 아찔한 전율은 잦아들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결합을 풀지 않았다.

“사랑해.”

이윽고 몸을 뗀 자레스가, 눈물로 범벅이 된 아넬의 눈가를 닦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아넬이 축 늘어졌는데, 자레스는 그녀를 침대 위에 바로 눕히고 팔베개를 해주며 아넬을 꼭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지쳐 늘어진 아넬이 오늘따라 사랑스러웠다.

그의 사랑을 잴 수 있다면, 아마도 그 크기는 아르드를 덮을 수 있을 것이다.

한계를 모른 채 점점 커져 가는 이 애정의 깊이 역시 가늠할 수가 없다.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아넬을 안고 있고 싶었다. 잠시도 연결을 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사랑만 나누고 싶었다.

연료를 다 태워야 비로소 꺼지는 영원의 불처럼 자기 체력이 다 떨어져야 멈출 것 같았는데, 그의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전장에서 들려온 소식이 자레스를 멈추게 했다.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폐하! 급보입니다.”

“젠장.”

자레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텐데도 방해하는 걸 보면 급보란 건 분명 전쟁터에서 들려온 것일 터였다. 이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레스는 아쉬운 눈으로 아넬을 내려다보다 이윽고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몸에 덮어 주고는 침대를 떠났다.

“유가 군이 하라스 강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콘페란스에 참석한 재상들은 이제 반 카비르 연합군을 유가의 군대라 불렀다. 그런 명칭이 주는 반향은 꽤 컸다.

재상들은 카비르를 붕괴시키러 온 유가를 배신자로 보았다. 그것은 자레스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동시에 연합군과 유가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다.

유가 군으로 인해 오히려 카비르 내부는 결속했다. 반란으로 황제가 된 자레스에게는 외부의 적이 필요했는데, 유가가 스스로 그런 역할을 떠맡아 줬으니 고마울 뿐이었다.

‘성녀는 핑계일 뿐이고, 전쟁은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었으니.’

“그리고 새로운 보고가 있었습니다. 오늘 낮에 전령이 도착했는데, 하라스 강 쪽으로 북진하고 있던 해군이 낯선 배를 발견했다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가?”

“척후선을 보내 경로를 탐색하고 있었는데, 선수기(船首旗)를 달지 않은 배가 남하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3단짜리 거대한 캐럭(Carrack) 선이었고요.”

“포문은?”

“포문은 없다고 합니다.”

“대포가 없는 걸 보니 상선이나 수송선이란 뜻인데…?”

상선이라 해도 불필요한 해상 충돌을 막기 위해 선수기(船首旗. 소속 국가를 알리는 깃발)는 달았다.

카비르의 깃발을 달면 어지간한 해적은 접근하지 않는다. 그만한 규모의 상선이면 당연히 해적의 목표가 될 텐데 선수기를 달지 않는 건 수상했다.

게다가 그 거대한 배가 큰 바다로 나가지 않고 카비르의 연안을 타고 남하하고 있다는 건 더욱 이상했다.

해안에 가까울수록 암초가 많기 때문에 곧 상륙할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연안을 타고 내려오지 않는데, 배가 발견된 해역 근처에는 그렇게 큰 배가 들어올 만한 항구가 없었다.

“상륙하거나, 아니면 연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강으로 접어들거나.”

하필이면 하라스 강 인근에서 발견됐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배가 발견된 지점은 쭉 남하하면 하라스 강으로 접어드는 강어귀가 있다.

애초에 자레스가 보낸 군선도 그 지점을 목표로 북진하다가 문제의 캐럭(Carrack. 주 돛대가 3개가량 있고 삼각형 모양의 돛을 단 범선. 주로 큰 바다를 항해할 때 쓴다)을 발견한 것이다.

시점과 장소, 모두 수상하다.

“혹시 유가 놈도 하라스 강을 이용할 생각을 한 건가?”

막연한 감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라스 강으로 군사를 투입할 생각을 했던 것처럼 유가 역시 그런 계획을 했을지도 모른다.

유가는 카비르인이고 제국의 지리를 잘 알았다. 자발 산맥을 이용할 생각까지 했으니, 하라스 강 역시 염두에 뒀을 수 있다.

“…자발 산맥을 넘어왔으면 물자는 물론이고 무기도 많이 가져오지 못했을 거야.”

재상들이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자발 산맥은 사람이 넘기도 힘드니, 무기를 실은 수레나 대포는 더욱 넘어오기 힘들었다.

“군사는 자발 산맥으로 보내고, 무기와 보급은 배를 이용할 계획인 걸까요?”

“보급을 현지의 약탈에만 의존하기엔 너무 위험하지. 아마 육군은 쾌속으로 진격하고, 해군이 물자를 보급할 생각이었을 거요.”

캐럭 선은 대량의 물자를 수송하기에 편하지만, 그렇다고 무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상갑판에 대포를 고정하고 쏴 댈 수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해적선은 격퇴당한다.

다만 문제는 상갑판에만 대포를 놓을 수 있기 때문에 화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군함은 다르지.”

자레스가 잔인하게 웃었다.

자레스가 북상시킨 배는 군함이었다. 애초에 하라스 강으로 진입해 후미에서 유가 군을 칠 생각이었기 때문에 군함에는 대량의 대포와 전투에 능숙한 해군이 실려 있었다.

군사와 물자를 나눈 게 패착이다.

자발 산맥을 넘어 급습하는 작전을 구상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육군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고, 해상으로 보급로를 확보한다.

의표를 찌르는 작전이라 생각했을 테고 실제로 그러하긴 했다. 하지만 적의 급소를 치는 게 반드시 유효한 작전인 것은 아니다.

유가는 자신의 뛰어난 머리를 증명하기 위해 무리수를 썼고, 그게 그의 패인이 될 것이었다.

“해상 재상. 가장 속도가 빠른 배를 이용하면 북상하는 함대에 명을 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리오?”

“캐러벨(caravel)을 이용하면 쾌속으로 항해할 수 있나이다. 육로로 가는 데는 빨라도 2주야가 걸리지만 소형 범선으로 가면 사흘이면 가는데, 이번에 보내온 전령 역시 그런 방법을 동원했다더군요.”

“잘 됐군. 그럼 함대에 다음과 같이 황명을 보내도록.”

잠시 말을 멈춘 자레스가 다시 힘주어 명을 내렸다.

“해안에서 캐럭이 하라스 강으로 진입하는지 지켜보도록. 만약 강으로 진입한다면 바로 함선으로 공격해 침몰시키도록 하시오.”

***

모든 상황이 안 좋았다.

유가는 타네시로부터 예상보다 수송선의 출발이 늦었다는 연락을 듣고 당황했다.

이 작전은 모든 일정이 빈틈없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했다.

육로로 쾌속으로 진격하는 동안 해상으로 물자를 보급할 계획인데, 물자만 오는 게 아니었다. 연달아 보내기로 한 수송선에는 대포 20문과 추가로 보내는 군사도 실려 있었다. 육로와 해로 양쪽에서 동시에 공략하는 양동작전이었다.

그런데 북부에서 시작된 봄 폭풍에 배가 묶이면서 수송선의 출발이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다.

배가 침수되면서 실어 놓은 화약이 젖는 바람에 화약을 다시 모아 출발해야 했고, 그러는 바람에 거의 일주일을 낭비했다.

그를 몰랐던 유가의 군대는 육상에서 너무 빠르게 전진하는 바람에 이미 하라스 강에 닿았다.

여기서 멈춰서 군량을 보급받아야 했는데 그 배가 오지 않으니, 슬슬 동나기 시작한 식량 때문에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해졌다.

“군량이 보름 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황자.”

군략 회의에 나온 연합군의 장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쟁의 절반은 보급전이다. 병참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들은 지금 그 보급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군사들에게 최대한 많은 군량을 짊어지고 오게 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부닥쳤다.

하라스 강과 자발 산맥 사이엔 이렇다 할 만한 식량 공급처가 없다.

험난한 지형 때문에 농사는 잘되지 않았고, 인구도 적었다. 약탈할 만한 대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유가 군은 진격만을 목표로 빠르게 진군했다.

1차적으로는 하라스 강 이북에 있는 북부 평원을 약탈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난관을 맞이하고 말았다. 가을에 심은 밀이 자라고 있어야 할 땅이 전부 초토화돼 있었던 것이다.

산지가 끝나고 평원 지대에 들어서자 유가의 눈에 보인 건 시커멓게 타오르고 있는 연기였다.

이미 대평원이 타고 있었고 하라스 강 인근까지의 곡창 지대가 전소된 상태였다.

“허어!”

북부에서 나는 밀은 북부와 중부 지역까지 이어지는 지역의 주요 식량원이었는데, 자레스는 그걸 모조리 태워 버렸다. 다음 해를 생각하지 않는 듯한 행보였다.

이미 주민들은 식량을 짊어지고 다 대피한 후였으며, 곡식 한 알 남겨 두지 않았다. 소와 말도 다 끌고 가서 약탈할 대상도 없었다.

심지어 식수까지 오염돼서 유가 군은 어쩔 수 없이 강물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하라스 강 인근에서 멈추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는 동안 군량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배는 어디까지 오고 있는 거요?”

“일주일 전에 타네시의 마지막 항구를 출발했다는 소식 이후로는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은 하라스 강에 들어왔어야 해. 강어귀로 보낸 척후 쪽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는 거요?”

난감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 외에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유가로서도 드물게 불안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단은 하라스 강에 진을 치고 기다립시다. 어차피 카비르 군도 뮤티셈에 들어앉아서 나오지 않을 테니, 전선을 밀고 올라오진 않을 거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무기와 식량이 모두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 연합군의 수송선이 하라스 강에서 카비르 해군의 대포에 격침당해 침몰했다는 걸, 유가는 꿈에도 몰랐다.

단 일주일, 지체된 그 시간 때문에 만나지 말아야 할 카비르 군함과 만났고, 보급선은 그렇게 허망하게 하라스 강어귀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때부터 전장의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

자레스가 장시간의 국무 회의에 돌입한 덕분에 아넬은 잠시나마 놓여났다.

그 틈을 타 시녀들이 쳐들어왔는데 그녀가 깨어난 걸 축하하고 감사한 것도 잠시, 이내 그녀들이 아넬을 들어다 목욕통에 담갔다.

시트를 갈러 들어온 시녀들이 놀란 건 그때였다.

“이게 뭐야?”

하얀 시트 위에 피가 묻어 있었다.

평소라면 아침마다 시녀들이 시트를 갈고 침구를 새 걸로 바꿨겠지만, 자레스는 아넬을 한 시도 놓아주기 싫어서 침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무던히 흘린 땀은 물론이고 아넬이 처음으로 흘린 핏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자레스가 아넬과 매일 밤 한 침대를 쓰는 걸 아는 시녀들은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마…? 그동안 두 분이서 관계를 안 하셨던 거야?”

“에이, 그럴 리가. 폐하께서 아실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마디나에선 또 어떻고? 그때부터 함께 지내시지 않았어?”

“그럼 이 자국은 뭐야?”

처음이라 이런 걸 흘린 건 아닐 테고. 시녀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혹시 하혈하신 거 아냐?”

틀림없다. 밤이나 낮이나 그렇게 아실을 안고 놔주질 않더니 결국 출혈까지 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시녀들은 그 길로 사이야를 찾았다.

“택도 없는 소리! 폐하께서 아실의 몸 상태를 무시해가며 안으실 분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랬지만 사이야는 자레스를 변호했다.

적어도 왜 출혈이 있었는지 진실을 아는 사이야는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으나, 하필 바로 그때 목욕탕에서 아넬의 비명이 들려왔다.

“사이야. 사이야 님!”

목욕 시중을 들던 시녀가 달려 나왔다. 이번엔 정말로 큰일이었다.

“아실께서 피를 흘리십니다!”

소식은 바로 전해져서, 철야를 한 것도 모자라 낮까지 회의를 하고 있던 자레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의원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불같이 화를 낸 자레스가 곧바로 회의를 접고 내실로 갔다.

그런데 가면서 생각해 보니 이건 의원이 아니라 본인의 잘못이다. 아넬이 피 흘릴 일은 처음 한 번 말고는 없을 텐데, 오늘에서 또 하혈을 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이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 생각하자 머리꼭지가 도는 것 같았다.

대체 아넬이 힘들다 애원할 때 왜 그리 밀어붙였던가.

여자가 하혈을 할 정도면 정말 몸이 안 좋다는 건데, 자기 욕심에 미쳐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안아 버린 자신에게 극심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실은 무사한가!”

내실로 들어서자마자 자레스가 외쳤다.

내실에는 아넬이 푹신한 쿠션을 깐 장의자에 모로 누워 있었는데, 오늘따라 새빨간 카프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넬은 색이 강하지 않은 드레스를 좋아하기에, 빨간 옷을 걸친 건 처음이었다.

자레스가 나타나자 아넬은 드레스만큼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곁에는 의원 대신 블로자가 서 있다가 살짝 헛기침하며 불편한 내색을 했지만 흥분한 자레스에겐 그런 기색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른 아넬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은 자레스가 그녀의 두 뺨을 거머쥐었다.

“많이 아파?”

살짝 미열이 있는 것 같았다. 울었는지 눈가도 발갛게 부어 있었다.

아프냐는 물음에 아넬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하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아요.”

“혹시 나 때문인가?”

“아니에요! 저기 제가 조, 조금 당황해서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당신 때문은 아니에요. 처음이라 좀 놀라서…. 성력을 썼는데도 피가 멈추지도 않은 건 처음이라서 소리부터 질렀어요.”

“성력을 썼는데도 회복이 안 됐다고?”

그렇다면 정말로 큰 병이 아닌가. 혹시 성력이 듣지 않을 정도로 큰 상처가 생겼나 싶어 자레스는 공포에 휩싸였다.

“크흠!”

그때 블로자가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폐하. 성녀께서는 아파서 피를 흘리시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성녀께서 첫 월경을 하신 겁니다. 월경은 여자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다친 것이 아니기에 성력으로도 치료가 안 된 거지요.”

“월경이라고?”

아넬의 얼굴이 거의 석류처럼 새빨개졌다.

하지만 블로자는 거리낌 없이 할 말을 다 했다.

“에포메니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성력을 제어당합니다. 당연히 월경도 하지 않지요.”

그러고 보니 아넬과 한 침대를 쓴 뒤로도 그녀는 월경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게 워낙 익숙해진 나머지 그녀가 달거리를 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겨 본 적이 없는데, 건강한 성인 여자라면 당연히 월경을 해야 맞는 거였다.

“성녀께서 몸이 변화하고서도 달거리를 하지 않은 건 아마도 한꺼번에 몸이 성장하는 바람에 여성으로서의 능력이 따라잡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말하자면 성녀께서는 이제야 완전히 여자의 몸이 된 것이지요.”

아마도 잠들어 있던 여자의 생리가 남성을 만나면서 비로소 깨어난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을 일일이 확인하는 게 불편했지만, 블로자는 침음을 삼키며 일어난 사실을 인정했다.

“성녀께서는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셨습니다.”

그 말에 자레스는 잠시 멍해 있었고, 아넬은 더더욱 얼굴이 빨개져 거의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먼저 깨어난 쪽은 자레스였다. 잠시 얼떨떨해서 사리분별을 못했는데, 블로자가 한 말의 의미가 비로소 머리를 두드리고 등뼈에 새겨졌다.

그러니까 아넬과 그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결실이 맺어진다는 것.

자레스는 후계자가 생긴다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갑자기 밀려온 벅찬 기쁨에 자레스가 벌떡 일어나며 아넬의 가냘픈 허리를 그러안았다.

“아넬!”

아넬이 그를 피해 몸을 웅크렸지만 자레스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자레스는 곁에 블로자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아넬을 끌어안고 그녀의 이마와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아넬을 얻었을 때 세상을 다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로 인해 열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레스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게 마치 구원의 기도라도 되는 듯이 계속해서 아넬의 이름을 불렀다.

아넬은 빨개진 얼굴로 자꾸 그를 피하다가 결국은 자레스를 받아 주고 말았다. 여전히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가 이렇게 행복해하니 그걸로 됐다.

자레스가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녀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추고, 아넬은 그에 응하는 사이 블로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슬슬 뒷걸음질을 쳐 내실을 빠져나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딸이 남자를 데려왔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자레스가 아넬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모습이 마치 맹수가 연약한 사슴의 목을 물어뜯고 마지막 숨을 끊어 내는 것처럼 보였다.

“나쁜 놈.”

혼자 손부채질하며 얼굴을 식히던 블로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이야가 들었다면 또 신의 섭리가 어쩌고 하면서 한바탕 설교를 할 텐데 그 소리는 또 듣고 싶지 않았다.

재빨리 자리를 떠난 블로자는 그 뒤로 한동안 자레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

유가는 전령이 들고 온 보고에 흙빛이 됐다.

군량과 무기를 싣고 오던 수송선이 카비르 해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됐다는 소식이었고, 이건 유가에게 결단을 재촉하게 했다.

하라스 강은 카비르의 해역이기 때문에 타네시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해상으로 물자를 공급받는 건 불가능했다.

북부 평원도 초토화되어 식량을 구할 길이 없으니, 이젠 아무 공격도 못 해 보고 돌아가든가 아니면 뮤티셈을 공격해 성을 장악하고 거기서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느냐, 빠르게 전진하느냐.

‘불명예를 뒤집어쓸 순 없지.’

돌아가면 수치밖에 없다. 그의 입지는 줄어들 것이고, 군비만 낭비하게 된 유가는 타네시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싸웠다가 지는 한이 있어도 한 번은 격돌해야 한다.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건 확실했다.

아직 기회는 있었다. 빠르게 진격해서 뮤티셈을 짓밟으면 된다. 뮤티셈 인근의 병력을 다 끌어모아 봐야 1만밖에 안 되는 반면 연합군은 10만 명에 달한다.

다만 수로는 우세하지만 식량이 거의 떨어져 간다는 게 문제다.

공성은 수성보다 훨씬 어렵고, 식량이 부족한 연합군은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 빨리 점령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뮤티셈으로 진군한다!”

유가는 명령을 내렸다.

병력을 갈아 넣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공병대가 함께 왔기에 성의 기초를 부술 병력은 있었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영원의 불의 연료 역시 꽤 대규모로 가져왔다.

뮤티셈 성이라고 영원의 불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화력전을 예상하고 대포 대신 영원의 불을 대량으로 가져온 연합군보다는 적을 것이다.

“이길 수 있다.”

유가는 진심으로 그를 믿었다. 그의 명 아래 하라스 강변에 묶여 있던 연합군은 다시 빠른 속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즈음 퀴나에와 스에반 일행이 카라로 귀환했다.

***

“죽다 살아났습니다, 폐하. 배를 빌려 줬던 어촌 마을에서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으면 나클 섬 위에서 굶어 죽을 뻔했어요!”

“굶어 죽을 뻔한 것치고는 입이 아직 살아 있군그래. 그 입을 한번 제대로 놀려 봐. 나클 섬을 발견했다니, 뭔가 알아낸 게 있을 테지?”

“네, 알아낸 게 많습니다. 가장 먼저 알아낸 건 스에반 님도 살아생전에 한 번은 쓸모가 있다는 거였죠.”

“그건 진짜 놀라운 발견이군.”

반은 비아냥이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순전히 아넬 때문에 스에반을 무리에 끼워 보낸 건데, 그가 활약을 했다니.

이어서 무하립과 퀴나에가 번갈아 가면서 알아낸 걸 보고했다.

나클 섬 전체에 칼리크의 육신이 가득하다는 것. 영원의 불의 원료를 섬에 가득 실으면 그대로 거대한 화산섬이 될 수 있다는 것.

자레스는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스에반 님의 말대로 연료의 양과 장소를 정해 폭발시키면 섬이 움직이는 방향을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마지막으로 퀴나에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단언했다.

무하립이 동의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자레스는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있었다. 물리적인 현실성 외에도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크는 죽은 뒤에도 메타와 싸우는 셈이군.”

“그러합니다. 칼리크의 육신이 불타는 칼이 되어 메타를 관통하게 되는 겁니다. 이야말로 태고의 전투를 재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잠시 말을 끊은 무하립이 벅찬 표정으로 외쳤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입니다.”

칼리크의 본체가 굳어 만들어진 나클 섬. 조각난 그의 육신으로 만들어진 영원의 불.

그 두 가지로 신을 죽이려 하는 자레스는 칼리크의 힘을 담은 아넬로 인해 그 창을 메타에게 겨누게 됐다.

자레스도 이제는 운명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비르 전역에서 영원의 불의 연료를 모아들이려면 얼마나 걸릴까?”

“전국 단위로 가면 석 달은 걸립니다. 게다가 지금 유가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화력을 그쪽으로 집중하기도 해야 하고요.”

“나클 섬을 꽉 채울 정도로 모으려면?”

이번엔 무하립이 대답했다.

“북부에 칼리크 교도들의 작업장이 있습니다. 거주지이기도 하고 동시에 연료를 만들어 저장해 놓는 곳이기도 하지요. 타네시와 북부 지역에서 쓰는 영원의 불의 연료는 대부분 거기서 만듭니다.”

“나클 섬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비축돼 있나?”

“가능할 겁니다.”

때가 왔다. 자레스는 짐작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북부의 칼리크 교도들에게 연락해서 모든 연료를 나클 섬에 싣고 가라고 해. 배로 나클 섬을 따라가다가 섬의 이동 경로가 얼음 섬에 접근할 때 나클 섬의 후미 오른쪽을 폭파시키도록.”

“알겠습니다.”

“폭파 양을 점점 늘려 가면서 방향을 틀다가 정면으로 얼음 섬을 향하게 되면, 그때 모든 연료를 섬에 옮겨 싣고 불을 붙여.”

섬에 적재한 연료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발휘할 것이다. 섬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연료라면 그것만으로도 눈 쌓인 산 하나 정도는 녹이고 태워 버릴 정도로 강하다.

거기다 섬의 표피층을 녹이고 그 밑에 있는 칼리크의 육신에 불이 붙으면 그다음은 얼음 섬의 혹한에도 꺼지지 않는 움직이는 화산이 된다.

“마지막으로 캐럭 선에도 연료를 가득 채우고 불을 붙인 뒤 얼음 섬으로 진입시키도록. 5단짜리 캐럭선의 갑판부터 맨 하갑판까지 모두 연료를 채워.”

50여 척 정도만 돌진시켜도 혹시나 나클 섬이 태우지 못한 부분까지 남김없이 녹여 버릴 것이다.

“나클 섬이 북부 바다에 진입하기까지 얼마나 걸리겠나?”

“속도로 보자면 한 달 반 정도 걸릴 거예요. 북부로 올라가면 해류가 빨라지니 더 앞당겨질 수도 있고요.”

“카라와 이 인근의 연료를 모조리 긁어모아서 배에 실어 이동시키도록. 그리고 해안 일대의 카비르 제국민들은 모두 높은 곳으로 대피시켜. 한 달이면 대피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의 명에 따라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가의 군대는 뮤티셈을 향해 진군했고, 전령조의 연락을 받은 북부 지역의 칼리크 교도들은 영원의 불의 연료를 모아 자레스가 보낸 군선에 실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제 막 정점을 향해 올라섰다. 이젠 목표를 향해 굴러 내려가는 일만 남았고, 자레스는 그 수레를 세게 걷어찼다.

마침내 인간이 신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었다. 칼리크라는 신의 이름을 빌린 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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