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퀴나에가 자레스의 명 때문에 억지로 떠난 이번 여행에서 한 가지 잘한 점이 있다면 그래도 무하립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성실했고 듬직했으며 거의 모든 일에 유능했다.
잘못한 점이 있다면 무하립 말고 스에반도 함께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스에반은 자기도 오고 싶지 않았다고 항변할 테지만 어쨌든 ‘황제(皇弟. 황제의 동생)’ 라는 신분을 닭 벼슬처럼 머리에 이고 있는 스에반은 모든 면에서 방해거리였다.
“추워, 추워, 추워어어어어! 장작은 더 없어? 모피는? 천막은 어째서 이렇게 얇은 거야! 가죽 천막을 가져왔어야지!”
‘이 추운 곳에서 가죽 천막이라니요! 가죽도 무거운데, 눈이 쌓이면 습기를 머금어서 당장 찢어진다고요!’
그런 말이 입과 귀, 코를 비롯한 모든 구멍에서 비집고 나오는 걸 퀴나에는 간신히 틀어막았다.
자레스가 왜 하필 스에반을 데리고 가라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누구보다 마음이 급한 건 그일 텐데!
“여기는 북쪽입니다. 눈이 많이 온다고요.”
파들파들 떨다 겨우 그 한마디만 내뱉은 게 고작이었다.
퀴나에는 그러면서 곁에 선 무하립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무하립, 오늘 밤 제 주변에 날카롭거나 무거운 건 두지 마세요.”
“왜 그래야 합니까?”
“자다가 나도 모르게 저 인간을 죽여 버릴 것 같아서요.”
“…유념하겠습니다.”
나클 섬을 봤다는 사람들을 수소문하다 일행은 북서쪽 해안까지 올라왔다.
카비르는 비교적 더운 나라였지만, 국토가 워낙 넓은 까닭에 위도가 높은 곳은 꽤 추웠다.
볼타니아와 타네시의 국경과 가까운 지역까지 올라오자 봄인데도 불구하고 털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됐다.
밤에는 더욱 기온이 내려갔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화로를 피운 뒤 일행이 모두 한 천막에서 잤는데, 계속되는 스에반의 투정에 그 못지않게 까다로운 퀴나에는 요즘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살인 충동을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
하룻밤을 해안에서 노숙한 퀴나에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어촌을 찾아가 나클 섬에 대해 물었다.
이 추운 지역에서도 어부들은 고기를 잡고 생계를 이어 나갔는데, 나클 섬에 관해 묻자 늙은 어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떠도는 섬에 대한 전설은 이 근처 사람들이면 다 알지요. 그게 한 10년에 한 번 정도는 이 근처에 나타나지요.”
“10년에 한 번이라고요?”
“우리는 바다가 생업이니까 바다 어디에 섬이 있고, 암초가 있는지는 훤히 알지요. 그런데 10년에 한 번 꼴로 이 계절쯤에 꼭 안 보이던 섬이 나타나거든.”
“그래요?”
“그것도 하루아침에 나타나는 게 아니야. 저 멀리 동남쪽 바다에 나타났다가 매일매일 조금씩 가까워진단 말이오. 그러다 한 달에 걸쳐서 저 먼 앞바다를 지나가요. 그리고는 북동쪽으로 사라지지.”
그 말과 함께 어부가 단언했다.
“그 섬은 움직이는 섬이에요. 안 그러면 그렇게 위치를 바꿀 수가 없지. 바다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은 모두 그 섬을 아는데 우리끼리는 악마의 섬이라고 부르지요.”
“왜 하필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거요?”
“그 섬이 나타나면 물고기들이 죄다 도망을 쳐서 빈 그물로 돌아오기 일쑤거든. 그래서 섬이 나타날 때쯤 되면 우리도 아예 일을 쉬어 버린다오.”
“혹시 그 섬이 나타나는 곳이 어디쯤인지 알아요?”
“그건 왜 물으시오?”
하필 악마의 섬을 찾는 일행이 수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뭐라 둘러대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스에반이 나타나 해결해 줬다.
“어디서 감히 토를 다느냐? 황족의 명이니라! 긴말할 것 없고, 당장 배를 내다오!”
문제가 아주 간단하게 해결됐다.
겁을 먹은 어촌의 장로가 가장 큰 배를 내줬고, 퀴나에는 스에반이 아주 가끔은 쓸모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는 그냥 존재 자체가 민폐지만, 퀴나에가 혐오하는 그 민폐와 야만스러운 행각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촌에서 식량과 물을 비롯한 물자들을 가득 실은 배는 다음 날 아침 바다로 출발했다.
어촌에 오래 산 길잡이도 함께 태웠는데,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먼 바다를 향해 그들은 꼬박 이틀을 더 항해해 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자갈밭에서 콩알 찾기도 아니고, 이 넓은 바다에서 어떻게 그 작은 섬을 찾아요?”
사흘째가 되자 스에반은 물론이고 퀴나에도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나클 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꽤 있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요 앞바다’는 지나치게 넓었고 ‘지금 이맘때쯤’이라는 시기는 너무 애매했다.
퀴나에와 그 일행은 거대한 바다에 떠 있는 한 개의 바늘이 된 기분으로 망망대해를 헤맸다.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변수가 찾아왔다.
날씨.
그놈의 ‘지금 이맘때쯤’ 간혹 찾아온다는 봄 폭풍이 배를 덮친 것이다.
어촌에서 가장 크다는 배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낙엽처럼 흔들렸다.
스에반이 황족의 지위를 내세워 차지한 선장실 안에서 대야가 넘치게 구토를 해대는 동안, 선원들과 퀴나에 일행은 갑판에 실은 물자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사람 살려!”
또 한 번의 큰 파도가 몰아치자 이번엔 선장실도 무사하지 못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면서 바닷물이 선장실 안까지 휘몰아 들어가자, 스에반이 구토물이 섞인 바닷물과 함께 뱃전까지 쓸려 나왔다.
“살려 줘! 떠, 떠내려간다! 우와아아아악!”
실제로 그때 무하립이 몸을 날려 스에반의 손을 잡지 않았으면 그는 바다로 떨어져 그대로 익사했을 것이다.
다행히 무하립이 그를 낚아챘지만 파도는 여전히 공평하게 배에 탄 사람들을 때리고 있었다. 스에반만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외친 무하립이 스에반을 하갑판에서 가지고 온 밧줄로 주 돛대에 묶어 버렸다.
용케도 파도가 몰아쳐도 떠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꽁꽁 묶은 뒤 무하립과 선원들은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몸을 배 위에 있는 고정된 것들에 묶었다.
이런 악천후엔 배를 조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계단, 선미의 난간 같은 것들에 자신의 몸을 연결한 선원들과 일행들은 바다에 운명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조타수는 아예 조타 장치에 자기 손을 꽁꽁 묶은 채 어떻게든 파도를 넘어가려 애를 쓰고 있었다.
파도를 측면으로 받아 내면 배가 뒤집힐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를 조종해 파도와 파도 사이를 파고들었는데, 뒷바람을 받은 탓인지 배의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그웨에에엑!”
그 와중에도 쓸개즙을 토해 내고 있던 스에반이 젖은 걸레 같은 몸을 비틀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비가 조금씩 멎고 있었지만, 차갑게 얼어 버린 몸은 추위에 넌 빨래처럼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아, 불티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따뜻한 국물이라도.
지금 그에게 뜨거운 야채수프를 내주는 사람에게 그의 영지 전체를 갖다 바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의 흐릿한 시야에 희끗한 점 같은 것이 잡혔다.
“저게 뭐지?”
스에반이 이마에 주름을 잡아가며 초점을 맞췄다. 파도 사이로 포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 것이 떠 있는 게 보였다.
배가 있는 지점에서 꽤 거리가 있긴 했지만, 그 흰 쟁반 같은 것은 물거품처럼 부서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위아래로 출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뒤집히지 않고 제법 평정을 유지하며 떠 있는 그것은, 정체는 몰라도 스에반이 보기에 안성맞춤의 피난처였다.
스에반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퀴나에에에! 저기! 저기 접시가 보인다아!”
‘저 양반이 파도를 처맞고 드디어 미쳤나?’
승강구에 붙은 손잡이에 자신을 묶어 놨던 퀴나에가 스에반이 바라보는 방향을 쳐다봤다.
솔직히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정말 바다에 접시가 떠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그 순간 퀴나에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정말로 바다 한복판에 커다란 접시가 떠 있었다. 그리고 퀴나에가 그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커다란 굉음이 그들의 머리 위를 갈랐다.
“우와아아아악!”
스에반이 기겁을 하고 머리를 숙인 그 순간 배의 주 돛대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배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복된 배는 죽은 물고기처럼 옆으로 누워 버렸다. 재수 없게 바다로 떨어지거나 오른쪽 난간 쪽에 자신을 묶어 놨던 자들은 그대로 익사하고 말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간신히 배에 한 척 남아 있는 보트를 내렸고, 갑판에 고정된 덕에 건질 수 있던 물자들을 보트에 싣고 섬으로 향했다.
접시 같다는 감상은 허언이 아니었다. 섬에 올라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상한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섬은 거대했다. 얼핏 눈짐작으로만 봐도 웬만한 호수만 한 크기였는데 믿을 수 없게도 거의 완벽하게 평평했다.
그 넓은 섬 한복판에 살짝 솟은 분화구 같은 언덕을 빼고는 구릉도 없으며, 심지어 풀 한 포기조차 없었다.
“이게 나클 섬인가요.”
고대서에 기록된 섬의 외양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평평한 팽이 모양의 섬. 그리고 마치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하얀색이었다.
섬 위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풀이나 꽃, 나무 한 그루도 없는 삭막한 섬이었지만 바닷길 오가는 길에 잠시 쉬어 갈 생각이었는지 바닷새들이 섬 여기저기에 앉아 있었다.
남쪽에서 올라올 때 얻어 탄 건지 깃 모양이 알록달록한 것도 있었는데, 심지어 어떤 것들은 깃털과 어디서 물어 왔을지 모를 나뭇가지를 엮어 알을 품고 있는 놈까지 있었다.
“움직이고 있는 게 확실하군요. 남국의 새까지 있는 걸 보니 대륙의 동쪽을 돌아 남부를 거쳐 올라온 것 같습니다.”
“그럼 기록대로라면 이대로 북쪽으로 가게 되나요?”
“그럴 것 같습니다.”
“참, 나. 하늘에 뜬 달도 아니고 어떻게 정확하게 대륙 주변을 빙빙 돌아갈까요? 섬에 눈이라도 달렸나?”
“해류의 영향이 아닐까요? 추측하건대, 섬이 대륙 주변을 도는 주기와 바람, 해류가 바뀌는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하, 완벽하게 대륙 주변을 돌 수 있을 정도로 매해 그런단 말이지요? 무하립. 차라리 이럴 땐 신의 섭리라고 주장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여요.”
물론 무하립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직은 메타를 믿고 있는 선원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추, 추워! 이러다 얼어 죽겠다아!”
하필 때맞춰 스에반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들렸기에 대화는 중단됐다.
아직 타네시까지 올라가진 않았고 막 볼타니아의 해역을 지나고 있었지만, 이곳 역시 꽤 추운 곳이다. 그의 말마따나 바닷물에 젖고 폭풍을 얻어맞은 일행은 모두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난파하면서 기름을 비롯한 어지간한 물자는 죄다 바닷물에 잠긴 상태였다.
말린 식량이 들어 있는 나무 상자와 기름 먹인 방수포를 몇 개 건져오긴 했지만 불을 피울 만한 재료는 없었다.
“배도 없고, 식량은 몇 상자가 다고… 날씨는 춥고.”
“그, 그럼 우리 다 얼어 죽는 거야? 카비르의 황족이 여기서 죽는 게 말이 되느냐!”
스에반이 벌벌 떨면서 외치자 퀴나에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안 그러려고 지금 알아보는 중이잖아요!”
“뭐야? 너 말버릇이 그게 뭐야? 내가 누군 줄 알아?”
“아, 알지요! 새 황제님께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겁쟁이 동생님! 하는 것도 없으면서 입만 산 민폐 황족!”
“감히 황족에게 겁쟁이라니! 내 당장 네놈의 목을 치겠…!”
“두 분 다, 조용히 하십시오!”
무하립이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퀴나에와 스에반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무하립이 코를 킁킁거리면서 말했다.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냄새라고요?”
퀴나에 역시 코를 벌름거렸는데, 무하립은 공기 중이 아닌 땅을 가리켰다.
“땅에서 이상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까는 우리 몸에서 나는 물비린내 때문에 미처 몰랐는데, 계속 서 있으니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 말에 선원들과 퀴나에가 땅에 엎드려 코를 댔다. 확실히 육지의 것과 다른 냄새가 났다. 마치 숯이나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 같은 냄새다.
“용암이 굳은 땅이라 이런 냄새가 나나?”
눈을 박고 들여다보니 섬의 지질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마치 흰 얼음덩어리처럼 보였던 섬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늘구멍처럼 작은 구멍이 숱하게 뚫려 있었다. 이상한 냄새는 그 구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무하립이 그 구멍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땅을 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방수포가 들어 있던 상자에 망치와 정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방수포로 천막을 치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명령에 무하립이 데리고 온 부하들이 망치와 정을 들고 섬의 바위 표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바위섬은 겉보기만 단단했지 생각보다 쉽게 부서져 나갔다. 마치 각질 더미처럼 돌을 깨며 아래로 파고 들어가자 곧 그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터져 나왔다.
“이건….”
무하립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외쳤다.
“이건 칼리크의 육신입니다!”
스에반과 선원들은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퀴나에와 함께 따라온 칼리크 교도 부하들만이 그 의미를 알아채고 구덩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칼리크의 육신이라면, 영원의 불의 원료?”
“정확히 말하면 그렇진 않습니다. 원료 중의 하나일 뿐, 여기에 저희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합해 낸 연료와 함께 섞어야 불이 붙습니다. 그런데, 제 추측이 맞다면….”
일어나서 섬을 돌아보던 무하립이 확신에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 섬 전체가 칼리크의 육신을 품고 있을 겁니다. 아마도 칼리크의 본체가 남쪽 바다에 떨어지고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된 용암이 본체를 감싼 채 바닷물 속에서 굳으며 이렇게 거대한 섬이 만들어진 거겠죠.”
“잠깐만, 잠깐만.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스에반이 또 끼어들었다.
“칼리크의 육신은 뭐고 영원의 불은 또 뭐야? 내가 좀 알아듣게 말해!”
“말하자면 이 섬이 거대한 영원의 불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하.”
무하립이 참을성 있게 설명해 주자, 퀴나에가 무릎을 쳤다.
“섬에 조합한 영원의 불의 연료를 끼얹고 불을 붙이면 이 섬 전체가 움직이는 화산섬이 되겠군요!”
“가능한 일이지요. 영원의 불은 물로도 흙으로도 끌 수 없습니다. 품은 연료를 모두 소진하지 않는 한 폭풍이 몰아닥쳐도, 북국의 추위에도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퀴나에와 무하립이 서로를 마주 봤다.
“얼음 섬을 녹여 붕괴시킬 수도 있을까요?”
“가능할 겁니다. 이 섬은 딱 봐도 꽤 넓습니다. 이 넓은 섬 전체에 영원의 불의 원료를 어린아이의 키만큼 쌓아 놓고 불을 붙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영원의 불은 겨우 호리병 하나에 들어 있는 양 정도로도 배 하나를 불태울 수 있을 정도로 화력이 강하다.
게다가 나클 섬 전체가 연료 중 하나이기도 하니, 아마도 한번 불이 붙으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꺼지지 않고 탈 것이다.
“섬에 불을 붙인 채 극북으로 들어가면 섬 전체가 녹아 붕괴될 수도 있습니다. 가라앉은 소대륙 타흐트처럼요.”
“그렇군요!”
비록 극북의 얼음 섬은 타흐트보다 큰 걸로 알려져 있지만, 섬 전체가 얼음덩어리라면 녹아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나클 섬은 항상 얼음 섬과 타네시 사이의 바다를 가로질러 대륙의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절대 얼음 섬 쪽으로 향하지는 않죠.”
“타네시 앞바다로 들어섰을 때, 딱 방향을 바꾸면 얼음 대륙에 부딪힐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떠다닐 정도로 가벼운 섬이라 해도 사람의 힘으로 방향을 바꾸는 건 불가능할 터다.
한편 두 사람의 열띤 대화를 선원들이나 스에반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몇 개 알아먹은 게 있다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섬의 흙에 불이 잘 붙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덜덜 떨고 있던 스에반이 외쳤다.
“내가 지금 얼음섬의 일부가 될 판이야! 뭐라도 좋으니까 불 좀 피워 줘!”
***
자레스는 전령의 첩보를 받고 흥분한 상태였다.
일리파스가 에포메니를 구출했다는 소식이었다. 보고를 받은 자레스는 바로 아넬이 누워 있는 내실로 향했다.
하지만 내실을 지키고 있던 블로자와 사이야는 자레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기력을 뺏기는 건 멈췄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에포메니가 더 이상 성력을 쓰지 않는데 왜 깨어나질 않아?”
“지금으로선 저희도 알 수가…. 송구합니다, 폐하.”
성력의 비밀을 알고 있는 블로자도 아넬이 깨어나지 않는 원인은 몰랐다. 초조함에 아넬이 누운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는 자레스를 향해 왠지 미안함만 느낄 뿐이었다.
처음엔 성녀를 타락시킨 야만적인 인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레스는 타인에게는 잔혹하나, 아넬은지나치게 사랑하는 게 흠인 약한 남자였다.
놀랍게도 그 흠 때문에 블로자는 자레스를 다시 보게 됐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됐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넬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는 자레스에게선 진실한 사랑 외에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성녀의 책무를 버린 아넬은 지금도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여자로서 이만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아넬은 오히려 성녀일 때보다 행복한 게 아닐까.
“메….”
습관적으로 그녀가 섬기던 신의 이름을 부르려던 블로자가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허망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블로자가 눈을 감았다.
‘아넬을 사랑하는 신이시여. 부디 이 아이를 깨워 주십시오. 당신의 힘을 담은 후예이기에 더욱 그 손길이 필요합니다. 힘든 길을 걸어온 이 아이가 이제는 행복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되뇌던 블로자가 문득 눈을 부릅뜨며 다시 천장을 쳐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남긴 아이니 당신이 책임지란 말입니다!”
***
아넬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이라고 하지만, 시커먼 무의식과 같았다. 아넬은 마치 관 속과 같은 꽉 막힌 어둠 속에 잠겨 있었는데, 의식은 계속해서 그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두려워서 비명을 질렀지만, 영혼이 핑 도는 듯한 현기증만 그녀를 감쌌다. 의식이 다른 세계로 빨려 나가는 것 같았고, 혼이 마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죽여 줘. 아아…. 힘들어. 너무 힘들어.’
의식 속에 한기가 스며들어 오고 공포가 그녀를 짓눌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어둠이 흐려지면서, 주변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잿빛의 세상이 이내 흑과 백으로 나뉘었다. 빛과 어둠이 섞였다가 흩어지더니 두 개의 덩어리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것이 각각 칼리크와 메타라는 걸 아넬은 깨달았다.
형태가 없는 것 같았던 두 덩어리에게 무기가 생겨났다. 얼음의 창과 불꽃의 칼이 부딪쳤다. 그때마다 우주가 흔들리고 별이 조각났다.
전장은 아르드로 바뀌었다. 푸른 대지 위에 산맥처럼 거대한 흰 소가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었다.
전투에 지친 칼리크가 흰 소 바카라의 젖을 빨고 기운을 회복하자 메타가 얼음의 창으로 흰 소를 찢었다. 흰 소가 흘린 정액에서 인간이 태어났다.
모든 역사가 마치 화살처럼 빠르게 그녀의 눈앞에서 흘러갔다.
인간들이 서로를 죽일 때마다 메타는 점점 커졌고, 마침내 얼음의 창을 칼리크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칼리크의 육신은 찢어져 대륙 여기저기로 뿌려졌지만 육신이 소멸하고도 근원의 힘은 남아 있었다.
메타는 그 힘을 작게 응축해 한 여자의 몸에 집어넣었다.
‘나와 닮았어.’
꿈속에서 아넬은 생각했다. 밝은 금발에 초록빛 눈을 가진 여자. 그녀를 사이에 두고 메타와 칼리크의 신도들이 싸우다 결국은 메타의 신도들이 성녀를 쟁취했다.
성녀가 죽자 새로운 성녀가 나타났다. 신전은 더 견고한 조직을 만들어 에포메니를 찾고 성녀로 만들기를 반복했다. 무수한 성녀가 죽고 숱한 에포메니가 끌려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넬이 나타났다.
아넬은 꿈속에서 겨우 세 살 무렵의 자신을 보았다. 순진무구한 소녀가 신관의 손을 잡고 이렌시아의 신전으로 들어간 순간 신전의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커다란 빛이 나타났다.
‘키리아 님?’
원래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신전에 들어오자마자 키리아를 만났는데, 열린 문 안쪽에선 키리아 대신 눈부신 흰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형체가 없지만 거기에 있는 그것. 성스러운 근원의 힘.
소녀 아넬과 성녀 아넬이 저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칼리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아넬. 나의 아이야.
“칼리크시여.”
- 지나온 시간들을 보았느냐. 무엇을 느꼈느냐…?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메타도 인간의 잔인함과 우매함 속에서 탄생하고 강대해진 것이니, 모든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탓이었습니다.”
- …때가 오고 있다.
칼리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빛도 조금 꺼져 가는 것 같았다.
마치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 같아서 아넬은 서둘러 칼리크를 향해 외쳤다.
“칼리크시여. 그 때는 무엇인가요?”
- 메타는 지금 잠들어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니라. 인간이 인간들만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간이 악신을 이길 방법이 있나요?”
- 나의 아이야…. 악은 악으로서 자멸하느니, 인간이 선함을 키우면 악이 자리할 곳이 없노라.
“칼리크시여….”
- 잊지 말아라, 아넬. 죽음은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찾아오지만, 생명은 다시 태어나 죽음을 이겨 내느니….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새로운 삶을 되풀이 하는 한 세계는 영원히 너희들의 것이다.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아넬이 그를 잡고 싶은 것처럼 빛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어느 순간 빛이 푹 꺼지면서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넬은 눈을 떴다.
“성녀님!”
낯익은 목소리에 아넬은 황망해진 시선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렸다.
“블로자… 님?”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기억이 실처럼 엉켰다가 풀렸고, 그러자 엉킨 실타래 안쪽에서 자레스가 이렌시아의 시녀들을 불렀다고 말한 기억이 났다.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과 함께 그동안 누르고만 있던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미안함, 수치스러움, 그럼에도 반가운 마음.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에 바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블로자 님. 나는….”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성녀님. 아니, 아넬.”
“블로자 님?”
처음 불려 본 이름이었다. 신전의 시녀들에게 그녀는 항상 에포메니였고 미래의 성녀였다. 한 번도 이름으로 불린 적은 없었기에, 아넬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블로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블로자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단다. 이 세상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고, 너에게만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어. 그러니 미안해야 하는 건 나란다, 아넬.”
알고도 묵인한 죄, 한 사람의 희생에 기대 평화와 안정을 누린 죄, 무지를 부인했던 죄. 용서를 구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너를 사랑한다.”
아넬이 어리둥절해 그녀를 바라보다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해받았다는 기쁨에 눈물이 펑펑 흘러나왔다. 늘 갈구하던 애정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감쌌다.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지만 블로자는 항상 그녀가 내민 손 저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엄격하고 완고한 그녀의 안에도 애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애정은 자레스가 퍼붓는 것과 또 달라서, 항상 목마름에 차 있던 그녀에게 단비 같은 해갈을 안겨 줬다.
“아실이 깨어나셨습니다! 황제께 어서 이 사실을 알리세요!”
몸을 돌린 블로자가 문 너머를 향해 외치자, 바로 문이 열렸다. 사이야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넬 쪽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깨어나셨군요, 아실!”
‘어떻게 냄새만 맡고도 깨어난 걸 아는 거지?’
놀란 블로자와 아넬을 뒤로한 채 사이야가 계단을 굴러 내려가며 시종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실이 깨어났습니다! 깨어나셨어요! 폐하! 아실이 깨어나셨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넓은 석조 건물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리고 채 5분이 되지 않아 자레스가 문을 벌컥 열며 나타났다.
얼마나 서둘러 달려왔는지 얼굴은 새빨개지고 숨은 턱에 차서 흔들렸다. 황제의 체통은 던져 버린 행동이었다.
그의 뜨거운 눈이 아넬에게 향해 있었다. 살짝 눈물이 북받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도 왠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블로자는 얼른 일어나 문을 닫으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는 사이 아넬이 자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레스.”
아넬은 이미 뺨을 적시며 울고 있었다. 얼른 그리로 달려간 자레스가 벅차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넬, 아넬…. 아아, 아넬.”
“자레스. 흐윽….”
무슨 말이 필요할까.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던 자레스가 혹시나 아넬이 힘들어할까 봐 그녀를 풀어 줬다.
그리고 아넬의 뺨을 만지고 아픈 곳이 없는지 안색을 확인하며 쉬지 않고 몸을 쓸어내리다가 이윽고 다시 힘차게 입을 맞췄다.
“자레스. 할 말이 있어요.”
“나도 있어. 아넬, 메타는….”
“잠들어 있죠? 나도 알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자면서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내다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아넬은 고개를 저었다.
“칼리크께서 알려 주셨어요.”
“칼리크라고?”
아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칼리크가 그동안 일어난 탄생과 전쟁의 역사를 모두 보여 줬고, 마지막으로 생명이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만 자레스에겐 추상적인 말일 뿐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제 아넬이 깨어났다는 것이었고, 더 이상 기력을 뺏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레스가 서둘러 에포메니를 구출했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 말에 아넬은 안도의 미소를 띠었다.
“아이는 건강한가요?”
“서서히 회복하고 있어. 성력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아직 몸이 온전하진 않지만, 의원이 열심히 약을 먹이고 치료한 덕에 많이 좋아졌다더군.”
“다행이에요. 얼른 나아서 그 아이를 봤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그렇게 말하며 자레스는 아넬의 안색을 살폈다. 오랫동안 누워 있었지만 아넬은 기력을 뺏기지 않은 며칠 동안 다행히 몸이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여전히 얼굴은 파리하고 힘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새파랗게 질려 죽어 가던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자레스는 몸을 쓸어내리던 손길을 멈추고 가만히 아넬의 뺨을 감싼 채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맑은 초록빛의 눈이 그를 담고 있었다.
새삼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벅차게 실감됐다.
당연히 그의 곁에 있어야 할 여자가 죽음에서 돌아왔다. 신을 믿지 않지만, 적어도 칼리크는 믿어도 되겠다는 마음이 격하게 치솟았다.
“자레스. 메타는 지금 잠들어 있다고 했죠?”
문득 아넬이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물었다.
“맞아. 메타의 신관들이 불었어. 1년 전에 내렸던 계시에서 메타가 스스로 밝혔다고 하더군.”
그런 자백을 하기까지 자레스가 얼마나 혹독하게 그들을 괴롭혔을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을 내려놓은 아넬이 곧은 시선을 들어 자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사랑을 나눌 수 있어요.”
뚝.
그녀에게 손을 붙잡힌 채로도 부지런히 아넬의 손을 지분거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뭐라고?”
믿기지 않는 시선에 아넬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되풀이했다.
“이제는 몸을 합칠 수 있다고요. 지금, 바로 당장이라도요.”
‘미쳤어?’라고 되묻고 싶은 마음과 ‘그러자!’라고 외치고 싶은 본능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싸워 댔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정말 무서운 건 이 와중에도 아래쪽은 벌써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아넬을 안을 수 있다는 기대에 몸이 짐승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의 반응은 그럴지라도, 그는 진짜 짐승은 아니다. 그래야만 한다.
무섭게 치솟는 기대를 억누르며 자레스가 무겁게 말했다.
“안 돼.”
“자레스.”
상황이 역전됐다. 이제는 자레스가 아니라 아넬이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당장 안고 싶은 마음이 열화같이 치솟았지만, 자레스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넬. 내게는 당신의 건강이 먼저야. 이제 갓 깨어난 당신을 안을 수는 없어.”
“바보.”
카비르의 황제를 향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아넬뿐일 것이다.
“잊었어요? 나는 성녀예요.”
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용납이 안 될 뿐이다.
“성력을 쓰는 건 안 돼, 아넬.”
“자레스. 그럼 내가 자연히 몸을 회복하는 걸 기다릴 수 있어요?”
이번엔 자레스가 할 말을 잃었다.
못 기다린다. 아넬이 말하지 않았다면 인내했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알아 버린 이상은 절대 그러지 못한다.
가능성을 깨달은 몸은 벌써 달아오르고 있었고 지옥의 용암에서 천천히 녹아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짐승이 되긴 싫었다. 하지만 아넬이 그 인내심의 끈을 보기 좋게 끊어 버렸다. 자레스는 성녀의 가면을 뒤집어쓴 이 마녀의 손길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머릿속이 너무 뜨거워서 눈이 녹는 것 같았다.
자레스가 그 뜨거운 눈으로 아넬을 바라보자, 그녀는 맑고 투명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이윽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성력을 쓰고 있었다.
파리했던 안색이 돌아오고, 기운이 돌아오는 게 바로 느껴졌다.
어떤 면에선 안심이 됐다. 그녀를 안기 시작하면 도저히 한두 번으로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아넬이 미리 체력을 보충해 준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아넬은 자레스가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천진난만한 눈으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늘 했던 것처럼 뺨에, 코끝에, 그러다 입술에.
새처럼 가볍게 입을 맞추다 이내 자레스에게 빠져들어 가듯 푹 안겼다. 허리가 부러지라 그녀를 세게 끌어안은 자레스가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재상 회의를 할 시간이던가?’
사실은 콘페란스에 가던 중에 아넬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회의는 내버려 둔 채 달려온 길이었다.
대재상을 비롯한 나이 든 재상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레스는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아넬의 눈빛을 느끼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이미 여러 번 봐서 익숙해진 몸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중심이 더 크게 느껴졌기에, 아넬은 나신이 된 그의 몸을 보면서 뺨을 붉혔다.
거의 검붉게 물든 그의 기둥은 굵은 핏대가 솟아 있어 더욱 흉흉해 보였다. 저 커다란 것이 그녀의 몸 안에 들어온다 생각하니 기대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먼저 말한 건 아넬이었지만, 문득 회귀 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흉기 같은 저것이 침입해 들어왔을 때 얼마나 끔찍하게 아팠던가.
그동안 자레스는 그녀에게 기쁨만 줬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고통이 찌르르하게 퍼지며 아넬은 겁에 질려 잠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넬.”
그가 아넬의 뺨을 잡아 그에게로 돌리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공포를 이해했다.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과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은 별개였다.
아넬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기에, 자레스는 이불을 걷어 젖히며 그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얇은 침의 위로 양쪽 가슴 끝에 입을 맞추자 그녀의 몸이 흠칫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늘 그를 반기던 아넬이었지만, 곧 이어질 일을 알고 있기에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그 몸에 자레스가 키스를 이어 나갔다.
얇은 침의를 걷어 올리고 정강이에 입을 맞췄다. 조금씩 침의를 밀어 올리며, 그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허벅지까지 입술을 밀고 올라갔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아넬이 몸을 비틀었지만, 자레스가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내리누르면서 위로 올라와 속삭였다.
“사랑해.”
회귀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무자비하게 그녀를 점령하던 폭군. 힘으로 내리누르던 잔인한 약탈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회귀한 후의 아넬과 자레스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녹일 수 없는 뜨겁고 단단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란 걸 아넬은 알고 있었다.
“흐윽.”
아넬이 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은 몸은 이미 풀어져 있었으며, 뻗은 손은 다시 그를 향해 있었다.
침의가 머리 위로 벗겨졌다.
혼수상태인 동안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몸을 자주 닦았기에, 침의 아래로는 바로 알몸이었다.
벌거벗은 몸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레스는 그를 보며 거친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신이 된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맨몸을 겹쳤다.
아넬의 몸은 다시 크림처럼 부드러워졌는데, 그 말랑한 몸이 자레스에게 눌리며 짜부라졌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기분 좋은 압박이었다. 근육이 꽉 짜인 탄탄한 몸이 위로 올라오자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중심이 배에 닿으면서, 아넬의 몸에 짜릿한 기대와 긴장을 채워 넣었다.
“으음.”
자레스가 또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두툼한 혀가 아넬의 입안 여린 점막을 쓸고 지나갔고, 이어서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와 아넬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맞물린 입이 쉬지 않고 서로를 탐했다. 말캉한 살에 돋아난 자잘한 돌기끼리 서로 부딪치면서, 그때마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서로에게로 넘나드는 것 같았다.
“흑.”
간신이 입을 떼자 호흡이 달렸던 아넬이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는 사이 자레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아넬이 짧게 비명을 지르자, 그녀의 목에 당분간 지워지지 않을 새빨간 흔적을 남긴 자레스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아, 핫!”
자레스가 수풀을 헤치고 민감한 살에 혀를 대자 아넬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자레스가 자주 침범하던 곳이었다. 익숙한,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희열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며 그녀의 몸을 녹였다.
“아, 응. 흐으응!”
마치 크림처럼 녹아 버린 몸이 저절로 이리저리 흐느적거렸다.
자레스는 집요하게 새로운 방법으로 아넬을 희롱했다.
민감한 곳을 혀로 핥고 찌르는 것도 모자라 이 끝으로 아프지 않게 자근자근 깨물자 아넬이 허리를 뒤로 휘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잇새로 혀를 내밀어 꽃잎을 벌리며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꽃술을 건드리자 아넬의 아래쪽에서 왈칵 애액이 흘러내렸다.
따끈하게 적셔진 몸이 저절로 풀리면서, 아넬은 계속해서 파고드는 자레스의 혀 놀림 아래서 연신 신음을 흘렸다.
“아넬….”
다시 위로 올라온 자레스가 번들거리는 눈과 입술로 아넬을 들여다봤다. 붉어진 눈이 짐승 같았다. 실제로 짐승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오랜 시간 기다렸다. 기다리다 못해 화석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이 드디어 왔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몽롱하게 풀려 있던 아넬의 눈이 그를 향하더니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받았다.
안도한 자레스가 곧 아넬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입술에 키스하고, 젖가슴을 주무르다 곧 그가 곤두선 기둥 끝을 그녀의 질 입구에 가져다 댔다.
각오한 아넬이 질끈 눈을 감았다.
은밀한 부위끼리 닿는 건 처음이라, 긴장한 아넬의 엉덩이가 잘게 떨렸다. 자레스가 그런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손을 넣어 움켜쥐며 더 깊이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질 입구에 귀두 끝이 조금 박히자 아넬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귀두 끝을 문 질구가 빡빡하게 좁아 드는 걸, 급하게 자레스가 허리에 힘을 주며 파고들었다.
그 순간 아넬이 화들짝 몸을 굳히며 그를 멈추게 했다. 아프기도 했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아넬이 시선을 돌려 침대 밖의 천장을 바라보자 자레스도 비로소 그녀가 뭘 무서워하는지 깨달았다.
마치 그녀의 공포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그 찰나 자레스가 좀 더 깊은 곳을 향해 힘껏 자신을 밀어 넣었다.
“앗!”
아넬이 짧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 순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랗고 짜릿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드디어 몸을 합쳤다. 바라고 바라던 그곳에 닿았다. 아넬을 완전히 안았다는 기쁨이 그를 장악하면서, 자레스는 미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아…!”
하지만 아넬에겐 여전히 그는 돌출되고 낯선 존재였다. 커다란 이물감에 아넬이 깜짝 놀라 몸을 비틀었다.
아팠다. 고통은 둘째치고 신벌이 두려워서 그에게 몸을 맡긴 채로 귀를 기울였는데,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도, 세상을 향해 쏟아지는 얼음의 창도 없었다. 마치 그들을 위해 비워 놓은 것처럼 사방은 고요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이 멸망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으며 성력이 없어지지도 않았다.
성녀의 순결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악신인 메타만 없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넬이 안도한 순간, 자레스는 그녀가 방심한 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이 살짝 이완되는 틈을 타 그가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온 것이다.
“아, 아팟!”
하지만 아넬의 몸이 그를 거부했다.
자레스가 그렇게 열심히 긴장을 풀게 했는데도 몸 안의 벽은 여전히 그를 거부하고 있어서 그것이 고통을 불렀다.
“아, 아…. 아파!”
아넬이 몸을 뒤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거부하고 싶지 않았지만, 물리적인 통증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회귀 전의 기억까지 그 위에 덧씌워지면서 통증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큰 것처럼 느껴졌다.
“아파, 흐흐흑. 아파요…. 으흑!”
저절로 몸이 굳으면서 아넬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 넘어야 할 벽이었고, 여기서 물러나기엔 자레스도 지나치게 오래 참았다.
“아넬.”
자레스가 진땀을 흘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자레스가 진입을 멈추고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넬, 쉬잇.”
자레스라고 힘들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섰고, 타고나길 작게 태어난 아넬의 몸은 자레스의 이성을 더욱 고갈시켰다.
“괜찮아질 거야. 앞으로는 아프지 않을 거라고 맹세해.”
지금 당장은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진다. 자레스가 그렇게 만들 예정이었다.
“으, 흐흑. 거짓말. 거짓말쟁이!”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울부짖는 걸 보니 안쓰럽기보다 오히려 흥분이 됐다.
아넬은 그 사실을 알까. 그녀는 아프다고 그를 때릴 때마저 사랑스러웠다. 어깨를 세게 내려치자 되레 그의 굵직한 기둥은 더 커지고 말았다.
“아, 아앗!”
그 바람에 아넬이 또 허리를 젖히며 넘어갔다. 자레스는 이를 악물며 더 이상의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아넬이 조금 정신을 차리면 다시 움직였다. 아주 느리게. 마치 꽃잎이 피어나는 것 같은 속도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 아넬이 어느 순간 비명을 멈췄다.
“아넬…?”
“흐으윽.”
아넬은 여전히 벅찬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비명의 농도가 조금 달라졌다.
아프지 않았다. 자레스가 갑자기 들어올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통증보다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선뜩한 희열이 더 컸다.
그녀가 자레스의 목에 매달리며, 눈물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남자의 심장에 불을 지르는 방법은 여자마다 다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여자는 정말 천사의 탈을 쓴 요부라는 것이다.
아넬은 천진한 얼굴로 남자를 미치게 하는 방법을 안다.
문제는 그녀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자주 자레스가 그녀를 가둬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아.”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듯이 멈춰 있던 자레스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넬은 고통을 참아 내기 위해 이맛살을 찡그렸는데, 나중에야 자레스는 이때 아넬이 살짝 성력을 썼다는 걸 알게 됐다.
회귀 전에는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성력을 쓸 겨를조차 없었지만 이번엔 지혜를 발휘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자 놀라운 것이 찾아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조금씩 치받아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레스가 세게 허리를 찍어 올리자 곧 기둥이 끝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아넬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 닿았다. 안쪽을 찍는 저릿한 쾌감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으, 읏!”
아넬이 고개를 젓자 자레스가 또 멈췄다. 혹시 아픈 게 아닌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아넬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아넬은 아파서 신음을 내지른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 아넬은 약간 흐릿해진 눈을 들어 자레스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재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극받은 자레스의 움직임이 좀 더 빨라지자, 이제 그녀는 열락의 빛이 확연해진 채로 함께 흔들렸다.
“아, 아흥. 으으으윽!”
점점 빠르게 삽입과 후퇴를 반복하자 그녀의 비명이 높아졌다.
아넬이 몸을 쥐어짜듯 비틀며 신음을 흘리자 자레스 역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입이나 손으로도 기쁨을 누리긴 했지만, 진흙처럼 빡빡한 아넬의 내벽은 그를 숨도 못 쉬게 몰아댔다. 이 환희는 그동안 느꼈던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몸을 합쳤다는 충만한 합일감과 성희가 그를 단숨에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가누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타오르는 욕망과 소유욕에 숨이 점점 밭아져 갔다.
자레스는 신음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젓는 아넬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지지할 곳이 생기자 자레스가 허리를 한 번 뺐다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크게 박아 넣었다. 요란한 비명과 함께 아넬이 또 뒤로 넘어갔다.
“아, 응…!”
함께하는 기쁨이 곧 고통을 이겨 냈다. 성력을 쓰지 않아도 서서히 전율과 같은 저릿함이 몸을 채워 갔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것이 자레스가 늘 그녀에게 퍼붓던 쾌락과 희열로 바뀌어 가면서, 그 크기가 예전보다 퍽 커져 갔다.
처음 몸을 합치는데도 그의 중심이 속살 하나 빠져나올 틈 없이 아넬의 밀부에 끼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환희가 아닌 다른 것이 새어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아, 아넬…. 아넬.”
자레스 역시 희열에 차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남자에게 엄청난 환희를 불어넣었다.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에서야 그게 엄청난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고 보니 그는 욕망에 약한 남자였고, 아넬은 그를 유혹하기 위해 태어난 여자였다.
서로를 끌어안은 두 몸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자레스는 마치 사로잡힌 것처럼 아넬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녀를 점령해 나갔다.
“아넬, 이제 더 빨리 할 거야.”
깍지 낀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자레스가 속삭였다.
아넬의 질 벽이 너무 좁아서 그의 이마에서도 진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충분히 흘러나온 애액 덕분에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한쪽 손에 아넬의 다리를 걸어 어깨 위로 들쳐 메자 그녀의 다리 사이가 더 넓게 벌어졌다.
공간을 확보한 자레스는 곧 남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쥔 채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앗!”
아넬 역시 점점 커지는 쾌감에 젖어 허우적거렸다. 아직 아픔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성력을 쓸 수도 있었지만, 찌르는 듯한 통증의 끝은 희열과 연결돼 있었다. 그걸 짓뭉개고 경계를 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날카로운 감각이 척추를 찌르며 올라오면서, 아넬은 달뜬 호흡에 사로잡혔다.
계속해서 몰아치는 자레스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격한 울음이 터져 나오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인지 자레스의 움직임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자레스는 숱하게 속살을 가르고 들어가 젖은 질 안을 몇 번이고 찍어 댔다.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넬을 끌어안은 채 조금 더 깊게 그녀의 안으로 찌르고 올라가자 아넬이 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앗. 하, 응!”
아넬이 몸을 뒤로 젖히며 신음을 흘렸다. 자레스는 이제 그녀의 몸을 반으로 접어 짓누르며 위에서 아래로 기둥을 내리꽂았다.
굵은 기둥을 거의 끝까지 뺐다가 세게 찍어 내리자 아넬의 비명이 더 높아졌다.
죽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느껴 왔던 환희에 찬 감각보다 훨씬 더 크고 엄청난 것이 터져 나왔다. 마치 전염된 것처럼 자레스에게도 그녀와 같은 열락이 찾아오더니 몸 안에서 크게 부풀었다.
이걸 알고선 다시는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를 깨달은 자레스는 격정에 사로잡힌 채 계속해서 빠르게 몸 끝을 움직였다.
“자레스, 아아…!”
아넬이 다리를 더 크게 벌리며 엉덩이를 자레스 쪽으로 밀어붙였다. 결합이 더 깊어지면서 조이는 느낌이 확 커졌다.
아넬 역시 안쪽을 깊게 찔리면서 뱃속에서 불꽃이 터지는 느낌이 강해졌다.
아랫배 쪽에서 불꽃이 팡팡 터지고, 자레스의 살덩어리가 꽂힌 아래쪽에서는 강하게 찔리는 느낌이 연속해서 들어왔다.
자레스는 계속해서 끝없이 밀려갔다가 한없이 빠져나왔다. 아넬을 점령했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가 잠식되고 있었다.
아넬은 본능적으로 날씬한 다리를 돌려 자레스의 허리를 감았다.
발목을 교차해 그를 붙들어 매자 자레스가 아넬의 질구에 기둥을 꽂은 채 연속해서 네다섯 번을 퍽퍽 찌르고 들어왔다.
비명이 더 커졌다. 이젠 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는데, 그녀를 가둔 벽이 무너지면서 더 세찬 쾌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레스 역시 문을 부수는 충차처럼 계속해서 자신을 때려 박았다.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아넬의 위에서 물결처럼 허리를 움직였다.
마침내 두 사람 다 희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몰려 들어갔다.
찌르는 듯한 통증과 절정이 동시에 느껴지면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 하아아앗!”
더 갈 수 없는 곳까지 밀려 올라간 아넬이 몸을 휘며 그에게 정신없이 매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겹쳐진 두 사람의 몸에서 환희의 불꽃이 커다랗게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