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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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리파스와 신관들 일행은 일리파스의 큰 외숙부가 거느린 나피다 부족의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나피다 부족의 영지로 가는 건 날 잡아 죽이라는 것과 같아서 일리파스와 작은 외숙부인 뷔유크가 거느린 병사들은 마디나를 빠져나가 인근의 작은 산마을로 숨어들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건 위험했기에 일행은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 야트막한 산등성이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병사들이 빠르게 천막을 쳤고, 신관들에게 가지고 온 식량과 물을 나눠 줬다.

질긴 육포와 굳은 빵은 먹기에 퍽퍽했지만 그래도 눈물 나게 맛있었다. 신관들은 귀한 육포를 나눠 준 뷔유크에게 감사하며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메타시여.”

병사들이 나눠 준 포도주까지 마셔서 뻑뻑한 음식물들을 식도 아래로 밀어내린 신관들이 눈물을 흘리며 메타를 찾았다.

“구해 준 건 나인데 왜 메타를 찾소?”

뷔유크가 비딱하니 묻자 시고르타가 얼른 그에게 예를 갖췄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피다 부족장. 메타의 큰 영광이 전하의 앞길을 비출 것입니다.”

“허허, 뭐 그렇게까지 감사할 건 없소. 일리파스를 구하는 김에 함께 데리고 나온 거지, 굳이 그대들을 콕 집어 구출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메타가 영광을 비춰 주고 싶거든 그동안 부족에서 낸 신전세나 좀 돌려주시지.”

“작은 외숙부, 뭐 말을 그리 정 없이 하십니까? 메타가 축복해 준다는데 축복이야 많을수록 좋지요.”

시고르타는 일리파스의 구원에 감사했다.

뷔유크는 일리파스의 모친의 남동생으로 부족에선 서열 3위 정도다. 부족장이 될 가능성이 낮아서 밖으로 떠도는 날이 많았는데, 부족 내 정치에서 제외된 까닭인지 입은 험하고 성격은 나빴다.

그에 비해 일리파스는 어떠한가. 용감하고, 담대했으며 심지어 의리까지 있었다. 저절로 일리파스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포도주를 나눠 주자 평신관들 사이에서도 긴장이 풀렸다.

일단은 지옥 같은 감옥에서 도망 나왔다는 안도감에 그들은 한편에 모여 꾸벅꾸벅 졸거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일리파스가 그 와중에 시고르타를 손짓해 불렀다.

“시고르타, 그대와 평신관들은 이제 어디로 갈 셈이오?”

“모르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까 싶긴 합니다만 제가 신관이 된 걸 고향에서도 아니 돌아가 봤자 곧 신고를 당하겠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금 카비르 전역의 신전이 반란 혐의로 감시당하고 있으니… 그런데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대신관들은 모두 어디 가고 평신관들만 잡혀 온 거요?”

일리파스의 질문에 함께 탈출한 평신관들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러게. 그들도 그게 불만이었다. 일리파스의 의문은 안 그래도 원망에 사로잡혀 있던 신관들의 아픈 곳을 세게 찔렀다.

“그게… 고위급 신관들은 탄압이 있기 전에 모두 도망쳤습니다.”

“으음?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이제 보니 진짜 반란 모의를 한 게 맞구먼? 그래서 들킬까 봐 평신관들만 남기고 도망친 거지?”

“아, 아닙니다! 결단코 신관들은 그런 모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건 에포메니 때문에…!”

“에포메니? 여기서 에포메니가 왜 나와?”

일리파스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자 시고르타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다른 평신관들 역시 불안한 눈치였다.

‘말을 할까 말까. 하지만 한 명이라도 진실을 알아야 우리의 억울함이 풀리겠지?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황제에 대한 반감도 형성될 테고….’

눈치를 보던 시고르타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적당한 선까지만 알려 주면 될 것이다.

“사실 이건 비밀입니다만, 1년 전에 저희 신관들에게 메타의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계시라니, 무슨?”

“현재 성녀의 순결이 위험하니, 그를 지키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저희가 메타의 뜻에 따라 성녀를 구출하려 했습니다만, 성녀는 도망쳐서 제 발로 자레스 황자에게 들어갔더랬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성녀는 유가 형님이 데려갔다 했잖아?”

“아닙니다. 성녀는 이 카비르 안에 있습니다. 괜히 유가 황자 전하 핑계를 대고 있는데, 아마도 현 황제가 데리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유가 전하가 납치했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지요.”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고말고요. 황제의 여자가 됐으니 이제 성녀의 순결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상황 아닙니까? 그래서 각 나라의 대신관들끼리 협의를 해서 새 에포메니를 찾아내기로 했지요.”

그 시점에서 이미 대신관들은 언젠가 신관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질 걸 짐작하고 있었다.

아넬이 쓰러질 텐데, 곧 그 원인이 신관들과 새 에포메니 때문이란 걸 알아낼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신관들까지 신전을 비우면 바로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 우리들은 남아서 신전을 지켜야 했지요. 그러다가 이렇게 잡혀 들어온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일리파스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계속해서 연기를 했다. 배우로 전직을 해도 손색없을 만큼 뻔뻔한 연기력이었다.

“그런데 에포메니와 성녀가 무슨 상관이요?”

그의 물음에 시고르타가 설명을 해 줬다. 원래 성녀가 성인식을 맞으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예비 성녀인 에포메니를 찾아낸다는 것.

에포메니가 성력을 많이 쓸수록 빠르게 성장해서 성녀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순결을 위협받는 성녀를 새 성녀로 갈아치우기 위해 에포메니를 찾아낸 것이지요. 지금 에포메니께서는 저희 신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꾸준히 성장하고 계십니다.”

‘성장이 아니라 노화겠지! 이 빌어먹을 놈들!’

그에 대해선 이미 자레스에게 설명을 들은 바가 있었다. 에포메니가 성력을 쓸수록 아넬이 기력을 뺏긴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놈들 때문에 지금 아넬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마터면 시고르타의 주둥이를 부숴 버릴 뻔한 걸, 일리파스는 간신히 참았다.

그 대신 일리파스는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성녀가 순결을 잃으면 안 된다고 자꾸 그러는데, 그놈의 순결을 잃으면 대체 어떻게 되길래 그렇게 막으려 드는 거요?”

“어…. 그, 그건.”

“그건?”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니 그들도 이유는 모른다. 단지 메타께서 막으라니 막는 것이다.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당연히 지켜 왔고 심지어 신이 계시까지 내려가며 막으라 하니 죽기 살기로 막는 것이지, 성녀가 남자에게 안기면 어떻게 되는지는 그들도 몰랐다.

“아니, 모르는데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요? 평생 결혼도 못 하고 남자도 못 만나는 성녀가 불쌍하지도 않소?”

일리파스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자 시고르타가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메타께서 그리 계시를 하셨으니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께서 직접 계시까지 내렸는데 인간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신관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일리파스는 자레스만큼이나 믿음이 얄팍했기에 분노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목표를 잊어선 안 된다.

하마터면 제 감정을 드러낼 뻔했던 일리파스가 억지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메타의 명이라면 당연히 지켜야지.”

“그렇지요! 황자 전하는 신실하신 분이군요. 폭군 황제와는 비교도 안 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황제가 신관들을 탄압하는 이유도 사실은 에포메니를 찾아내기 위해서란 것 아니오?”

“맞습니다!”

“에포메니는 누가 지키고 있소? 신전에서 따로 병사를 키우지는 않으니 신관들 몇 명이 딸려 있는 게 고작일 것 같은데?”

“전하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마디나의 대신관과 고위급 신관 몇 명이 함께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카비르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작은 시골 마을에 숨어 있다고 하는데, 언제 예니센이 쳐들어올지 모르지요.”

“그렇다면 더욱 우리 부족의 병사들이 필요하겠군. 시고르타, 마디나의 대신관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시오.”

“그, 그건 왜요?”

“내가 그대들 평신관을 그리로 데려다주겠소. 그리고 나피다 일족의 병사들을 동원해 새 에포메니와 신관들을 지키겠소.”

“정말이십니까?”

시고르타가 생각하기에 이건 좋은 기회였다.

신관들을 지켜 줄 병력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안전해질 터였다.

나피다 부족은 대제상과 유가의 부족에 이어 카비르에서 세 번째로 세력이 강한 부족이지만,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지 않은 탓에 유가 부족과 함께 핍박을 받고 있었다.

나피다 부족이 황제와 반목하고 있는 건 공공연한 비밀인 터, 도와주겠다는 의도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괜찮으시다면 허락을 먼저 구해도 될까요?”

“신관들은 죄다 잡혀 왔는데 무슨 수로 허락을 구한다는 거요?”

“우리 신전들은 봉화대처럼 일직선으로 연락할 수 있는 연락망이 있지요. 신전에 가면 각 신전에 보내는 전령새를 키우는 곳이 있습니다.”

“호오?”

“저희 일레시마 신전은 마디나로 전령새를 보내고, 마디나 대신전은 카비르 전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전령새를 보낼 수 있는 중계망을 갖고 있습니다. 마디나 대신전이 폐쇄되긴 했어도 아직 전령새는 남아 있을 테니, 다른 지역에 아직 폐쇄되지 않은 신전에 연락하면 그들 중에 누군가는 마디나 대신관이 숨은 곳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렇군.”

서서히 꼬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씩 웃은 일리파스가 바로 대답했다.

“그럼 마디나 대신전에 숨어드는 건 우리가 맡지. 나피다의 용감한 병사들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소. 시고르타 당신도 데리고 갈 테니 거기서 전령새를 보내 주시오.”

일리파스는 살큼 드러난 그 꼬리를 잡아챘다.

시고르타는 일리파스의 그럴듯한 제안에 넘어갔고 다음 날 밤, 마디나의 대신전에 숨어들어 타 지역의 신전에 전령새를 날렸다.

물론 자레스가 마디나의 대신전 침입을 일부러 방치했다는 건 몰랐다. 전령새를 받은 신전은 다른 신전에 이 사실을 알렸고, 숨어 있던 상급 신관에게 그 소식이 들어갔다.

상급 신관은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마디나 대신관에게 알렸다. 마디나 대신관은 일리파스와 신관들이 숨어 있는 산에 다시 전령을 보냈는데 그에 일주일 넘는 시간이 걸렸다.

시간은 많이 걸렸으나 효과를 보았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마디나 대신관이 나피다 부족의 보호를 수락했던 것이다. 일리파스와 부족원들은 전령을 따라 마디나 대신관이 숨어 있는 마을로 향하였다.

***

“숨결이 돌아왔습니다!”

그 시각, 아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이야가 외쳤다. 그 말에 블로자가 얼른 다가와 아넬의 코끝에 손을 댔는데, 정말로 아주 가냘팠던 호흡이 조금 강해진 상태였다.

눈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소리만으로 알아챌 수 있는 건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사이야가 아넬의 손발을 주물러 보더니 말했다.

“체온도 돌아왔습니다. 봐요, 손발이 좀 따뜻해졌어요.”

“…기력을 뺏기는 게 멈춘 것 같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그 말은 즉 새 에포메니가 성력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관들이 에포메니를 배려했을 리는 없고 어찌 된 이유인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성력을 지나치게 써서 쓰러진 걸까?’

성력을 써서 무리하게 성장을 시키면 뼈와 근육이 성장을 이기지 못하고 뒤틀린다.

아넬이 갑자기 성년의 몸으로 변화했을 때처럼 엄청나게 고통스러운데, 블로자는 그런 경우가 아닌가 추측했다.

‘갑자기 성장할 정도로 다그친 거라면, 분명 애를 다치게 한 건데…. 그게 옳은 일인가? 이게 메타께서 원하는 일이야?’

블로자는 새삼 회의가 들었다.

성력을 쓰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누군가를 고치는 것이다.

그런데 숨어 있는 처지에 환자를 데려다가 고쳤을 리는 없고, 아마도 가장 빠른 성장을 위해 에포메니 본인을 다치게 했을 거라고 블로자는 짐작했다.

잔인한 짓이다.

에포메니를 찾기 위해 아이들을 다치게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미 발견한 에포메니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아마 에포메니를 찾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통을 가하고 있을 것이다.

아넬이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게 그 증거였다.

‘가엾은 것.’

아직 만나 보지도 못한 에포메니와 아넬, 둘 다 불쌍해서 블로자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신이시여, 부디 이 두 아이를 지켜 주소서.’

차마 메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블로자는 그저 이 세계를 주관하는 미지의 힘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아넬의 손을 잡은 채 블로자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어나거라, 아넬.”

비록 정신을 잃었지만, 사람은 무의식중에도 남의 말이 들린다고 했다. 부디 아넬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를 바랐다.

“내 말이 들린다면 너도 깨어 있다는 뜻이야. 힘을 모으렴, 아넬. 네 성력을 발휘해서 너를 치료해.”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아, 그녀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넬을 사랑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지금은 그녀가 평생 섬겨 오던 메타보다 이 아이의 생명이 훨씬 더 중요했다.

신관들의 뜻을 따라야 할 그녀가 아넬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넬, 네 힘으로 깨어나거라. 제발…. 네 안에 있는 신의 힘을 널 위해 쓰거라.”

***

자레스는 그 시간에 재상들이 모이는 건물 콘페란스에 있었다.

이번엔 재상들 대신 군부의 장군들이 모였는데, 대장군 이암을 필두로 이번에 장군으로 승격된 새 지휘부들이었다.

“자발 산맥 아래쪽은 쓸 만한 수비군이 별로 없습니다. 산세가 험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준 덕분에 병력이 그리 많지 않지요. 수비선이 될 만한 지역이 어디 보자…. 뮤티셈이로군요.”

대장군 이암이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자발 산맥으로부터 현 수도 카라까지는 대략 한 달 반 정도가 걸린다. 대규모 군사를 이동시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텐데, 유가 군의 진격은 생각보다 빨랐다.

단 8일 만에 카라에서 한 달 정도 걸리는 위치까지 내려왔는데, 자레스가 중앙군을 결집시켜 이동시키기엔 시간이 급박했다.

전쟁이 카비르 안에서 일어날 거란 예상을 못 했기에 많은 병력이 국경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분산된 병력을 모아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뮤티셈은 북부의 요지이지요. 성벽 도시이기도 하고, 인근에 있는 작은 영주들의 군사를 모으면 대략 1만 정도가 될 겁니다. 성벽 안에서 농성을 하면 그나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뮤티셈 영주를 믿는 수밖에 없겠군. 일단 전령을 보내 뮤티셈 인근의 영주들에게 군사와 물자를 지원하라고 명하게.”

명을 내린 자레스는 다시 한번 지도에 집중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대충대충 그린 지도에 비할 수 없는, 훨씬 더 자세한 군략용 지도였다.

유가 군이 현재 머물러 있는 지역에 작은 보석 원석을 놓아 표시했는데, 자레스가 그 위치와 자발 산맥 사이의 거리를 손으로 재 보며 말했다.

“유가는 효율을 아주 중시하지.”

그래서 이용할 수 있는 건 철저하게 이용하고, 버릴 건 인정사정없이 버린다. 자레스가 익히 보아 온 그의 습성이었다.

“효율을 맹신하다 보면 놓치기 쉬운 게 있지.”

생각보다 긴 자발 산맥과 유가 군의 현 위치를 짚자 이암이 바로 답했다.

“보급로 말입니까?”

“그렇소. 자발 산맥을 넘어온 작전은 훌륭했소. 하지만 그 경로로 군사는 들어올 수 있어도 보급 물자는 못 들어와. 병참이 없는 전쟁을 무슨 수로 진행하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게다가 산맥 아래쪽은 넓고 튼튼한 도로가 없어서 군수품을 이동시키기 어렵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대체 유가는 보급을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을까?

혹시 카비르에서 약탈로 해결할 생각이었다면 피해를 감수하고 유가 군이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보던 자레스가 다시 물었다.

“대포를 태운 군선이 북부 내륙으로 가장 깊이 들어올 수 있는 강이 어디요?”

“대포와 군사를 태운 3단짜리 전투선이라면, 하라스 강까지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레스의 의도를 눈치챈 이암이 북쪽에 있는 강 이름을 댔다.

하라스 강은 타네시에서 시작돼 카비르 내륙을 대각선으로 종단하다 바다로 나가는 강으로, 북쪽에 있는 강 중에선 제일 크고 깊었다.

하라스 강에서 나온 지류를 따라가면 유가 군이 이동하는 경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유가가 군사를 이동할 거면 넓은 공로를 이용할 거고…, 그러면 하라스 강에서 멀지 않은 도로를 지나게 될 거요.”

“그렇지요.”

“카라에 붙은 드니즈 내해에서 군사를 싣고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지. 그리고 강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가의 군사가 하라스 강을 지나거든 강으로 진입해 군사를 상륙시킵시다.”

“앞뒤에서 포위하고 공격할 생각이십니까?”

“아마 유가는 속도전을 전개할 생각이었던 것 같소. 자발 산맥은 군량까지 바리바리 짊어지고 올 정도로 녹록하지 않으니 아마 카비르 안에서 주민들을 약탈해 군량을 보급할 생각이었겠지.”

“그럴듯합니다.”

“뮤티셈과 지금 유가의 군대가 있는 지역 사이에는 북부 평원이 있소. 지금은 딱 가을에 뿌린 밀이 수확을 앞둔 계절이고.”

“설마 청야(淸野) 전술입니까?”

청야 전술은 말 그대로 들판을 깨끗이 비워 버리는 작전이었다. 공격에 맞서 아군이 후퇴하면서 적에게 이용당할 만한 자원은 싹 태우고 부숴 버리는 것이다.

적에게 보급 물자 고갈이라는 곤란을 주긴 하지만, 반대로 카비르의 피해도 막심할 터였다.

“북부 지역의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들판에 불을 놓아 밀을 다 태우라고 해. 그리고 가옥은 부수고, 우물에는 독을 타며 강 상류에는 오물을 쏟아부어서 유가 군이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시오.”

“폐하. 그러면 카비르 제국민의 피해도 심각할 텐데요. 전쟁이 끝난 뒤 그 피해 복구를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것도 무사히 살아남은 뒤에나 걱정할 수 있는 거요, 이암 장군. 굶어 죽으려면 한 달이 걸리지만, 전쟁으로 죽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해. 과연 어느 쪽이 나을 것 같소?”

백성들의 피해는 안타깝지만 자레스의 말이 옳았다. 약탈당해 죽는 것보단 천천히 인내하면서 제국의 도움을 기다리는 쪽이 나았다.

“하라스 강 북쪽까지 모든 물자를 다 없애시오. 유가 군이 빠른 속도로 남하하게 내버려 둬. 그러다 유가 군이 하라스 강을 넘어가면, 그때 대포로 유가 군의 후미를 공격합시다.”

“후열을 쓸어버린 뒤 군사를 상륙시키면 되겠군요. 그 시기에 맞춰 우리가 북부까지 밀고 올라가서 전면전을 벌이면 유가 군을 앞뒤에서 포위해 싸울 수 있겠습니다. 해군과 육군을 동시에 사용하는 작전이라, 훌륭하십니다!”

“결전은 결국 뮤티셈이오.”

자레스가 다이아몬드 원석을 지도 위 뮤티셈에 옮기며 말했다. 전선은 거기서 형성될 것이다. 유가와 자레스, 연합군과 카비르의 명운을 건 결전이 거기서 벌어질 것이다.

***

블로자는 새로운 에포메니가 성력을 지나치게 써서 쓰러진 거라 추측했지만, 사정은 그 반대였다.

스비야티가 성력을 쓰지 못한 건, 그녀가 사경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대신관이 초조하게 외쳤지만, 다른 신관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놈의 초조함이 일을 다 망친 거였다.

대신관은 스비야티가 더 빨리 성장하기를 바랐다. 성력을 더 많이 발휘하기 위해선 더 심하게 다치게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대신관의 닦달 때문에 결국 신관들은 스비야티에게 또 독을 먹였다.

그런데 이번엔 양을 조절하는 데 실패했던 모양이다. 딱 죽기 직전까지만 병들길 바랐는데 스비야티는 그 길로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었고 그 뒤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성력은 베푸는 당사자가 정신이 있을 때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스비야티는 제힘으로 자신을 치료할 수 없었고, 그제야 신관들은 낭패했다.

“양을 제대로 조절했어야지! 간신히 찾아낸 에포메니인데, 이렇게 죽어 버리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이다! 어쩌면 차대 에포메니가 아예 안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그럴 줄 알았으면 재촉을 하지 말았어야지!’

신관들은 불만스러워했지만, 스비야티를 깨워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다.

하지만 성력이 없으니 약을 동원해 스비야티를 살려야 했는데, 이 시골 마을엔 제대로 된 의원도 없고 약방도 없었다. 어디서 의원을 데려올지 방법이 없었다.

그럴 때 나타난 게 타 지역 상급 신관의 전령이었다. 일리파스 부족이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대신관이 잠시 고민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병력보다 필요한 게 스비야티를 살릴 약이었다.

마디나 대신관은 의원을 데려와 달라는 전언을 적어 전령 편에 보냈고, 일리파스는 열흘쯤 뒤에 의원과 함께 나타났다.

신관들에게는 메타가 내려 준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인가?”

시고르타와 전령이 안내한 곳은 마디나에서 사흘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앞으로는 나흐르 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고 그 강에서 나는 물고기들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곳으로, 한눈에 봐도 그리 풍요한 곳은 아니었다.

신관들은 그 마을에서도 좀 더 떨어진 외딴곳에 있는, 산그늘 아래 작은 집에 숨어 있었다.

다행히 이 마을 출신의 신관이 있어 그의 고향 집을 빌릴 수 있었고, 현재 이 집에는 대신관을 포함해 일곱 명 정도의 신관이 있었다.

그 작은 집 안마당이 시고르타와 함께 나타난 일리파스와 나피다 부족원들로 시끌시끌해졌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 전하. 메타의 광휘가 전하의 앞날을 비추기를!”

대신관이 신관들을 몸소 끌고 나와서 인사를 했다.

“아, 그러기를.”

성의 없이 인사한 일리파스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나를 에포메니께 안내해 주시오.”

일리파스가 데리고 온 병력은 반가웠지만, 그건 썩 내키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황자 전하. 에포메니는 소중히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그분을 보호하겠다고 내가 온 게 아니오? 설마 병사만 빌리고 얼굴은 보지 못하게 하겠단 건 아니겠지요, 대신관?”

카비르에선 체면을 대단히 중하게 여긴다.

그들을 지키러 왔다는 일리파스를 치켜세워 주지 않으면 그와 나피다 부족이 물러가 버릴지도 몰랐기에 대신관은 어쩔 수 없이 메르케즈를 앞세워 그를 스비야티에게 데리고 갔다.

보잘것없는 누옥이었지만 그나마 큰 방에 소녀를 눕혀 놨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스비야티를 본 일리파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녀는 해쓱해진 얼굴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는데, 마치 해골에 가죽만 씌워 놓은 것처럼 여윈 상태였다.

키는 컸지만 묘하게 관절이 부은 것처럼 보였고, 눈 밑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마치 죽은 아이를 산 것처럼 위장해 눕혀 놓은 듯했다.

“이 소녀가 에포메니요?”

“그렇습니다.”

“에포메니는 보통 서너 살 전후에 발견된다던데, 이 아이는 나이가 좀 먹어 보이는구려?”

“스비야티는 좀 나이를 먹은 후에야 성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에포메니보다 큰 겁니다.”

“이 소녀는 이미 열두 살은 돼 보이는데? 그럼 열두 살에야 발견됐다는 거요?”

“그건….”

할 말을 잃은 대신관이 잠시 주저하다 이내 대답했다.

“황자 전하. 신관의 일은 신관에게 맡겨 주시지요. 저희들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모든 건 메타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아, 그렇구려. 메타의 뜻. 그게 가장 중요하지.”

일리파스가 수긍하는 것처럼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스비야티 역시 어렸을 때 성녀 시험을 받았을 것이다.

에포메니란 게 밝혀지고 나선 강제로 성장시켰을 테고, 그러면 스비야티가 성장한 만큼 아넬도 나이를 먹은 것이다.

‘이 새끼들 모두 죽여 버려야겠다.’

그 순간 일리파스는 결심했다. 일리파스의 임무는 그냥 에포메니를 빼돌려 황궁으로 데려가는 거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방해하면 친다’에서 무조건 ‘죽인다’로, 일리파스는 계획을 수정했다. 그중에 저 가장 큰 개새끼는 반드시 목을 베리라.

일리파스는 그런 마음을 감춘 채 대신관을 향해 싱글싱글 웃었다.

“그런데 에포메니께선 어쩌다 이리 큰 병이 드신 겁니까? 의원을 찾으실 정도면 성력도 발휘하지 못하실 정도란 건데…. 다친 데는 없어 보이니 이게 어찌 된 거지요?”

대체 이 남자가 왜 이리 꼬치꼬치 캐묻는 걸까?

대신관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목숨 줄을 쥔 거나 마찬가지인 일리파스의 질문을 쉽게 넘길 수는 없었다.

대신관이 눈짓을 하자 메르케즈가 얼른 나서며 대신 변명했다.

“독버섯을 먹었습니다, 전하.”

“독버섯?”

“예, 전하. 식량이 부족해서 인근에서 버섯을 따다가 스튜를 끓였습니다만, 그게 독버섯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뒤로 에포메니께서 정신을 잃으시고 이리되셨습니다.”

과연 그럴까?

독버섯을 먹었다면 에포메니만 혼자 사경을 헤매고 있지는 않을 텐데, 신관들은 모두 멀쩡했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의원!”

그가 눈짓을 하자 의원이 얼른 다가왔다.

사실은 평범한 의원이 아니라 자레스에게 부탁해 데리고 온 궁의 중의 한 명이었다.

유능한 의원인 그는 스비야티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혀와 몸을 살펴보더니 이윽고 대신관에게 물었다.

“이건 독버섯을 먹은 게 아닙니다.”

“그, 그 무슨 말이오? 에포메니는 독버섯을 먹은 게 맞으니 얼른 치료나 해 주시오!”

“이 소녀는 독버섯을 먹은 지 일주일은 지났다 했지요? 정말 독버섯을 먹은 거면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경증으로 깨어났어야 맞는데, 이 소녀는 이도 저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건 버섯마다 증상이 다른 것 아닙니까? 저도 에포메니께서 무슨 버섯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이보시오, 신관. 원인에 맞게 처방을 해야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병인이 뭔지 모른 채 약을 썼다간 에포메니께서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말하니 메르케즈는 실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은 그게… 에포메니께선 도, 독을 드셨습니다.”

그 독을 누가 먹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일리파스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이 죽일 놈의 새끼들!’

아직 어린아이였다. 열두어 살쯤 돼 보이지만 사실은 많아야 대여섯 살짜리였을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성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 독까지 먹인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도 아니다. 이런 개자식들이 성스러운 신관이라고? 그게 메타의 기준이라면, 메타부터 뜯어고쳐야 맞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손발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으나, 일리파스는 그의 성격치고는 정말 기적적으로 참아 냈다.

일단은 에포메니를 살리는 게 중요했다. 그의 신호에 의원이 왕진 가방을 뒤져 약재를 꺼냈다.

“이건 다크신산 해독제입니다. 다크신은 워낙 맹독을 가진 짐승이 많아 해독약도 아주 다양하지요. 독버섯은 식물의 독이라 별 소용이 없지만, 동물에서 추출한 독이라면 어지간한 것에는 들을 겁니다.”

의원이 소녀의 목을 뒤로 젖혀 기도를 확보한 뒤 도자기 병 안에 든 새빨간 액체를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콜록!”

스비야티는 한 시간쯤 뒤에 기침과 함께 깨어났다.

대신관이 나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경과를 보겠다며 고집을 부린 탓에 계속 일리파스와 의원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대신관은 그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깨어난 스비야티에게 가만가만 일렀다.

“에포메니, 정신이 드십니까?”

“…….”

스비야티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대신관을 쳐다봤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바로 새파랗게 질렸다.

일리파스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독버섯인 줄 모르고 스튜로 끓여 드린 저희들의 잘못입니다.”

대신관은 일리파스와 의원이 보지 못하도록 등을 돌린 채 스비야티를 무서운 눈으로 부라렸다.

‘독버섯이다. 그런 거로 해 둬야 한다!’

스비야티는 그 눈빛을 알아챘다.

냄새가 이상한 스튜를 그녀 앞에 내밀었을 때 보였던 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스튜를 끓여 온건 대신관이 아니라 메르케즈였지만, 먹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다치게 할 거라는 걸 뻔히 알았다.

독버섯이 아니라 독이란 걸 알아챘다. 스튜에선 다른 여자아이들이랑 신전에 있었을 때 신관들이 준 음식에서 흘러나온 것과 같은 아몬드 냄새가 났다.

아마도 신관들은 스비야티가 모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력을 가진 스비야티는 그때 이미 후각에 새겨진 독특한 냄새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먹었다.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아서. 죽도록 아픈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메르케즈가 준 스튜를 먹고 난 후에도 몰래 다른 신관에게 부탁해 남은 스튜를 다 달라고 했다.

그 신관은 스튜에 독이 있다는 걸 모른 듯했다.

먹지 말아야 할 한계치까지 다 먹어 치운 후에 스비야티는 환각 증상을 일으키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되살아났다. 그리고 소녀의 눈앞에는 악마보다 더 악랄해 보이는 대신관이 사악한 눈을 빛내며 또 치유를 강요하고 있었다.

“다행히 무사히 깨어나셨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에포메니, 모쪼록 성력을 발휘해 몸을 치유하십시오.”

“…….”

“에포메니. 어서 성력을 쓰십시오. 기력을 빨리 회복하려면 성력을 쓰는 게 가장 좋습니다. 지금 몸이 말이 아닐 텐데, 얼른 나으셔야지요.”

대답하지 않자 대신관이 목소리를 낮추며 재촉했다. 할 수만 있으면 스비야티의 뺨이라도 갈기고 싶은데 하필 일리파스가 지척에 있었다.

아무리 일리파스가 그들을 돕기 위해 왔다 해도, 그에게 어린 소녀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엔 대신관에게도 체면이란 게 있었다.

“어서, 성력을 쓰십시오. 에포메니.”

목을 조를 것처럼 대신관이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이 악마의 명령에 따르면 또다시 고통만 뒤따를 뿐이다.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스비야티는 이제 그걸 알고 있었다.

몸은 이미 열두 살에 가까워졌지만 정신적인 연령은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스비야티는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는 본능만 남아 있었다.

이 방에 그녀와 대신관, 메르케즈 말고도 의원과 일리파스가 있었지만 소녀의 눈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어른들은 그녀를 괴롭힐 뿐이었다. 새로 나타난 어른들 역시 스비야티가 보기엔 한통속이 늘어난 거로 보였다.

“어서요. 에포메니, 지금 저를 곤란하게 하실 작정입니까?”

더는 참지 못하고 대신관이 위협조로 내뱉자 스비야티가 대번에 겁에 질렸다. 그 순간 스비야티의 눈에 의원이 가지고 온 왕진 가방이 보였다.

아가리가 반쯤 벌어진 가방 안에는 약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스비야티의 눈에 들어온 건 약초로 가지고 온 다와 풀이었다.

다와 덩굴은 마약이기도 하지만 적당히 혼용하면 마취제로도 쓰였는데, 스비야티는 그 사실은 잘 몰랐다. 그게 덩굴과의 식물이란 것만 알았을 뿐이다.

최근에 스비야티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치유의 힘뿐만이 아니라 식물을 성장시키는 힘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스비야티는 신관들이 한눈을 팔 때 자신의 힘을 시험해 봤고, 곧 힘을 쓰는 요령을 알게 됐다. 성력을 많이 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이에 비해 많은 경험을 하게 된 덕이었다.

두 번째로 알게 된 건, 그녀가 힘을 쓸수록 고통이 더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스비야티는 다시는 그런 짓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뭐라고요?”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대신관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스비야티가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건강해지면 또 나를 아프게 할 거잖아요. 그럴 거면 난… 더 살고 싶지 않아요.”

그와 동시에 갑자기 의원의 왕진 가방 안에서 초록색의 덩굴이 튀어나왔다.

대신관이 그게 성력이란 걸 깨닫자마자, 튀어나온 덩굴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일리파스가 허리춤에 꽂은 단검을 향해 날아갔다.

“이봐!”

일리파스가 잡으려 했지만, 한발 먼저 덩굴이 단도 손잡이를 잡아채 검집에서 뽑아갔다. 단도는 황망하게 날아가 스비야티의 침대 위에 떨어졌다.

대신관은 무사가 아니었고, 몸을 쓰는 자도 아니었기에 현실적인 판단력도 느렸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가?

라고 생각한 순간 스비야티가 단도를 집어 들어 제 목에 겨눴다.

무서웠다. 독을 마셨을 때와 같은 경직이 소녀를 덮쳤다.

죽고 싶은 마음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너무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교차하는 바람에 스비야티는 아주 잠깐 제 목에 칼을 꽂아 넣으려던 손길을 잠시 늦췄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일리파스가 날듯이 달려와 스비야티의 손에서 칼을 낚아챘다.

“아!”

단도는 너무나 쉽게 그의 손에 들어갔고, 소녀는 깜짝 놀라 일리파스를 바라봤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른, 무서운 남자. 소녀를 아프게 하는 사람.

감히 죽으려는 시도까지 했으니 이제 이 남자도, 대신관도 자신에게 무섭게 야단을 칠 것 같았다.

어쩌면 이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다치게 하면서, 스스로 죽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막아 버릴 것 같았다.

겁에 질린 스비야티가 그 순간 울음을 터뜨렸고, 거의 동시에 대신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황자 전하! 전하가 아니었다면…. 어?”

하지만 그 순간 일리파스는 뜻밖의 행동을 했다. 스비야티가 덮고 있던 이불을 집어 들어 소녀의 머리 위로 덮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리파스가 크게 단도를 휘둘렀다. 그 단도가 무엇을 벴는지, 대신관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개 같은 자식!”

지금까지 제일 악랄한 놈은 자레스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상엔 놈보다 더한 악마가 많았고, 제 목적을 위해 아이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메타의 신관 놈들은 그중에 제일 최악이다.

대신관의 목덜미가 깊이 베어져 나갔다. 어찌나 세게 베었는지 단도를 휘두른 건데도 목이 반쯤 잘려 나가 덜렁거렸다.

제게 일어난 상황을 깨달은 대신관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 순간, 대신관은 피를 분수처럼 흘리며 그대로 엎어졌다.

“화, 황자, 이 무슨 짓입니까!”

메르케즈가 사색이 되어 외쳤지만 이번엔 더 날이 큰 환도가 날아와 그의 가슴팍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메르케즈 역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자, 일리파스가 죽은 그의 머리를 걷어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네놈들은 신관이 아니다! 네놈들 야욕을 이루려고 어린애의 목숨을 위협하는 놈들이 무슨 신관이야! 모두 지옥에나 가 버려, 이 개새끼들아!”

그것이 신호가 됐다.

일리파스가 문을 벌컥 열며 나오자, 시고르타를 비롯한 신관들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그가 움켜쥔 환도에 묻은 피를 본 시고르타가 경악하였으나, 그것이 나피다 부족원들에겐 신호가 됐다.

일제히 칼을 빼 든 부족원들이 신관들에게 그를 겨눴다.

“저… 저희를 도와주러 오신 게 아닙니까?”

시고르타가 벌벌 떨며 묻자 일리파스가 코웃음을 쳤다.

“작은 외숙부, 이것들을 굳이 살려 둬야 하겠습니까?”

“병사로 쓸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밥만 축내는 것들이면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지.”

뷔유크가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게다가 우리 나피다는 현 황제를 아주 싫어하지만 말이야, 그보다 더 싫어하는 치들이 있다. 나피다는 아이를 괴롭히는 놈들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아.”

“역시, 외숙부는 저와 뜻이 통하십니다! 사나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일리파스가 기분 좋게 웃으며 피 묻은 환도를 높이 쳐들고 신호했다.

“다 죽여라!”

***

피 냄새가 너무 짙어 토할 것 같았지만, 스비야티는 이불 아래서 숨을 죽이고 참았다.

다 죽이란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를 이미 알아 버린 소녀였지만, 지금은 일리파스의 명령이 너무 기뻤다.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없애 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일리파스는 스비야티의 마음속에서 영웅이 됐다.

아이는 이불 안에서 엉엉 울었다. 무서워서 흐느끼다가 좋아서 울고, 그러다 다시 겁에 질려 귀를 막는 동안 어느새 작은 시골집을 가득 채웠던 비명과 절규가 잦아들었다.

누가 이긴 걸까?

이불 아래서 스비야티는 그런 생각을 했다.

몸은 이미 열두 살에 다다랐지만, 영혼은 다섯 살짜리인 소녀는 고작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저벅저벅,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친 호흡이 들린다.

신관들의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신전에만 살아서 왜소하고 체력도 약해진 신관들은 이렇게 건장한 숨소리를 내지 못했다.

우리 편이 이겼다!

스비야티가 기쁨에 젖어 이불을 들추며 일어나려 할 때,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를 짓눌렀다.

“지금 나오면 못 볼 걸 본다.”

일리파스는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만들어 놓은 광경이 아이가 봐선 안 될 것이란 건 알았다.

이불째로 스비야티를 둘둘 만 일리파스가 소녀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오고서야 비로소 뒤집어쓴 이불을 벗겨 내줬다.

이불 아래서 나타난 소녀의 눈망울은 처음 그녀를 접한 한 시간여 전보다 훨씬 더 맑게 변해 있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소녀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나쁜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어. 내가 다 죽였다.”

이 어린아이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으면, 사람들이 죄다 죽었다는 말에 이렇게 기쁜 얼굴을 할까.

“정말이요? 정말 다 죽었어요? 이제 칼에 찔리거나, 다리를 잘리지 않아도 돼요?”

“뭐라고?”

일리파스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독약을 먹였다 했을 때도 분노했지만, 이건 사경을 헤매게 한 것보다 더 나빴다.

어느새 일리파스는 아넬이 기력을 뺏긴 것보다 아이가 다친 상처에 더 분노하게 됐다.

“그 개자식들을 쉽게 죽이는 게 아니었어.”

일리파스가 분통이 터져 외치자 스비야티가 겁먹은 눈으로 물었다.

“스비가 뭘 잘못했나요? 아… 아저씨도 절 칼로 벨 거예요?”

“이런 젠장!”

아이는 이런 걱정을 하면 안 됐다.

가난한 아이들이 내일의 밥을 걱정하고, 그날그날의 어려움에 괴로워할 수는 있어도, 어린 소녀가 자신의 팔다리를 잘릴까 봐 걱정하는 건 말이 안 됐다. 빌어먹을!

“넌 이제 안전하단다, 꼬맹이.”

일리파스가 무릎을 굽혀 스비야티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어린 소녀가 자신을 전하가 아니라 아저씨라 부른 건 용서하기로 했다.

솔직히 분노한 부분은 오빠도 아니고 ‘아저씨’라 부른 부분이었지만, 그는 이미 스물일곱이나 됐고, 소녀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젠 아저씨가 널 지켜 줄게.”

일리파스가 단언했다.

얼어붙고 상처받았던 아이의 마음이 금세 치유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없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여전히 세상은 무섭고 어른들 역시 무서웠기에 스비야티는 일리파스가 친절히 내민 손에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체력이 그 순간 마치 꺼지듯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에, 어린 소녀는 그대로 허물어지듯 일리파스의 품 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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