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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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급히 궁의를 불렀지만 아넬은 일어나지 못했다.

각성향을 맡게 하고, 자레스가 흔들어 깨워도 마치 잠든 것처럼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원인을 찾아내!”

자레스가 명령을 내렸지만 궁의도 방법이 없었다.

젊은 여자가 전조 증상도 없이 갑자기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는 건 머리로 가는 혈액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정말 그런 문제라면 고치기 힘들 수 있었다.

“일단 피를 뽑아 보겠습니다, 폐하. 머리로 가는 혈관에서 나쁜 피를 빼내면 효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원이 소뿔로 만든 부항단지 안에 술에 적신 솜을 넣어 불을 붙인 다음 뜨거워진 단지를 아넬의 뒷덜미에 붙였다.

이렇게 하면 단지가 차가워지고 수축하면서 붙인 부위에 울혈이 생기고 나쁜 피가 빠져나오게 된다.

하지만 사혈(瀉血. 치료 목적으로 환자의 몸에서 피를 빼내는 일)까지 단행했음에도 아넬이 깨어나지 않자, 자레스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아넬은 성녀이니 성력으로 제 몸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깨어나야 힘도 쓸 수 있는 건데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치유할 방법이 없었다.

“야슬리를 불러와!”

어쩌면 평범한 궁의보다는 야슬리가 성녀에 대해 잘 알지도 몰랐다. 자레스 앞에 늙은 대제사장 야슬리가 불려왔다.

“저도 알 수가 없군요. 성녀가 어떤 존재인지, 과거의 역사에 대해선 잘 알고 있습니다만, 성녀의 현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기대를 갖고 불러온 야슬리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성녀님들을 발견하고 키우는 건 칼리크가 아니라 메타의 신관들이었습니다. 저희가 성녀님을 뺏긴 사이에, 메타의 신관들은 성녀를 관리하는 요령을 알아냈을 것입니다.”

“관리라?”

그 말속에 메타의 신관들이 성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뼈 있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겉으로는 숭배하지만, 사실상 성녀는 거대한 신관 조직하에 있는 존재다. 메타의 상징일 뿐이지, 신관 조직을 다스리는 자는 아니란 뜻이다.

야슬리의 말대로 성녀는 신관 조직이 발아부터 수확까지 관리하는 일종의 씨앗이자 식물 같은 것이지, 순수하게 섬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야슬리의 입에서 그 같은 말이 나오자 분노가 더 확 불타올랐다.

“관리라. 그래, 그렇다면 신관들이 그 방법을 더 잘 알겠군.”

신관들을 불러들여 정보를 캐낼까?

하지만 녹록치 않았다. 성녀는 공식적으로는 유가 황자가 납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 없는 성녀에 대한 비밀을 토설하게 할 명분이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는 자레스에게 마침 좋은 소식이 왔다.

“폐하. 이렌시아에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아넬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불러들인 이렌시아의 시녀들이 도착한 것이다.

***

“아아아아악!”

아이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오늘은 신관들이 스비야티의 손목 동맥을 동강냈다.

출혈과 함께 빠르게 기력이 빠져나가자 아이가 울부짖었지만, 신관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도와주지 않았다.

“어서, 스비야티. 네 상처를 치료해야지. 살고 싶지 않느냐?”

처음엔 신관들 본인을 치료하게 했다.

마디나 대신관이 가장 먼저 치료받았고, 그 뒤로 꽤 깊게 병든 자, 가벼운 통증을 앓는 자, 생각지도 않은 병증을 갖고 있던 자들이 스비야티의 성력으로 치유됐다.

하지만 더 치유할 대상이 없어지자 그때부턴 다시 스비야티를 다치게 하기 시작했다.

신관들 말고 다른 이를 데려와 치료했다간 당장 성녀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날 테고, 뭣보다 신관들은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었다.

어서 스비야티를 에포메니가 아니라 성녀로 만들어야 했다.

“아프지? 고통스럽잖아! 어서 널 치료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꾸 그녀를 아프게 만드는 신관들이 원망스러웠다.

‘미워! 다들 죽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스비야티는 치료의 힘 말고는 아무런 완력이 없었다. 어린 스비야티는 신관들의 재촉대로 자신의 상처를 향해 성력을 집중했다.

“오오…!”

이젠 힘을 돌리는 요령을 알게 됐다.

호흡을 뱃속 깊은 곳으로 때려 박는 것처럼 깊게 들이쉬면서 단전부터 힘을 끌어올린다.

그러면 그 힘이 몸 전체에 퍼지면서 아우라 같은 기운이 감돌았고, 그 힘을 상처 부위로 향하면 곧 아픈 것이 나아졌다.

오늘도 치유에 성공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기에 평소보다 배나 더 성력을 쏟아야 했는데, 치료가 끝나자 갑자기 신관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자랐다!”

스비야티의 갈색 머리가 길어지면서 키가 한 뼘쯤 더 커졌다. 평범한 아이라면 1년은 걸려야 할 성장이 단숨에 이뤄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라의 황궁에 있는 아넬의 기력은 한층 쇠해졌다.

***

“살이 내렸다!”

눈앞에서 아넬의 상태가 변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수분을 확 빨린 것처럼 살이 빠지는 게 눈에 보였다.

자레스가 초조함에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함께 상태를 들여다보고 있던 블로자 역시 안타까운 눈으로 아넬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원망했었다.

기껏 신전을 탈출해서는 누군가의 여자로 살아가고 있다니. 마치 아넬이 타락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카비르에서 온 사신이 그들을 초청했지만, 사실상 초청이 아니라 강제 차출이었다.

응하지 않으면 이렌시아에 쳐들어 올 것 같은 기세에 어쩔 수 없이 블로자를 비롯한 시녀들 몇 명만 억지로 따라온 것이었다.

만나면 감히 성녀의 의무를 저버린 아넬에게 따질 생각이었는데, 정작 그 상대는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린 아넬을 키운 건 사실상 블로자였다.

네 살에 에포메니로 뽑혀 신전에 온 아넬을 맡아 성녀로서 주된 교육을 시키고, 인간으로서 성장시켰으니 거의 엄마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선대 수석 시녀가 병으로 타개한 뒤 그녀가 아넬을 맡게 된 까닭에, 블로자가 키운 에포메니는 아넬이 전부였다.

미래의 성녀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겐 딸이나 마찬가지기도 했다.

‘어쩌다 이런 모양이 됐습니까. 기껏 달아났으면 행복하게 살기라도 해야지.’

성녀로 대하려 애썼다. 사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 생각해서, 일부러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쓰러진 아넬을 보니 가슴이 울컥했고 속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어째서 성녀께서 쓰러진 겁니까.”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넬을 들여다보고 있던 자레스가 밤새 한숨도 못 자 충혈된 눈으로 블로자를 돌아봤다.

“나도 모르겠소.”

블로자는 기이한 눈으로 자레스를 쳐다봤다. 키리아 성녀를 만나러 왔던 오만한 황자는 사라지고 사랑에 괴로워하는 청년이 여기 있었다.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었다.

“뱃놀이를… 했소. 오랜만에 외출한 거라 피곤하다 했지. 그리고 황궁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쓰러졌소.”

평소 성격 같으면 시녀에 불과한 그녀를 재상과 동격으로 취급해 줄 사람이 아니었지만 아넬을 살릴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자 저절로 격식체가 나왔다.

그의 입에서 띄엄띄엄 사정이 흘러나왔다.

“의원은 부르셨습니까?”

“의원도 원인을 알 수 없다 했소. 하지만 야슬리는 아마 메타의 신관이라면 이유를 알지도 모른다 했지.”

“야슬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요? 송구하지만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수석 시녀.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소.”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정말 알 수 없는 건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성녀를 납치하셨나요? 아니면 제 발로 폐하를 찾아가기라도 한 겁니까?”

“당신은 아넬을 원망하고 있구려. 사실은 왜 아무 말 없이 아넬이 떠났는지 그 이유가 제일 궁금하겠지. 수석 시녀, 그대는 그게 제일 섭섭한 것 같소.”

정곡을 찌르는 말에 블로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사실은 그래서 아넬이 미웠다. 성녀의 의무를 저버린 것보다 그게 제일 화가 났다.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 주지, 싫은 게 있으면 하소연이라도 해 주지. 어느 날 갑자기 쪽지 한 장 남기고 떠나 버렸다. 그러고도 1년 넘는 시간 동안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얼마나 미웠으면 그러나 싶어 눈물이 날 정도로 속이 상했고, 무슨 큰일이라도 당하지 않았나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고작 이런 꼴이 돼서 나타나다니. 애인이 황제씩이나 되면서, 제 여자를 구하지도 못하다니.

“그래서 말해 주려는 거요. 아넬이 왜 말없이 신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가 왜 만날 수밖에 없었는지.”

자레스가 손짓을 해서 블로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내보냈다.

대신 퀴나에와 야슬리를 불러오게 했는데, 야슬리는 마치 나뭇잎처럼 바삭하게 마른 몸을 지팡이에 의지해 나타났고 퀴나에는 그가 자발 산맥의 지하 신전에서 찾아낸 고대서를 들고 왔다.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말이 진짜라는 걸 이 두 사람이 증언해 줄 거요.”

그 후로 시작된 자레스의 이야기가 밤이 이슥해지도록 계속됐다.

“지금 그걸 제게 믿으라는 건가요?”

블로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퀴나에는 너무 말을 많이 한 나머지 병째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고, 노구인 야슬리 역시 힘들어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기운이 남은 건 자레스뿐이었다.

“메타가 악의 신이고 칼리크가 선의 신이라고요? 두 신의 위치가 조작되었다고요?”

“안 믿어도 되오. 내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오. 가장 중요한 건 메타가 한 번 세상을 멸망시켰고, 아넬은 회귀해서 열아홉 살로 돌아왔다는 거지. 그게 바로 1년 전이오.”

“1년 전이라고요?”

“그래서 아넬은 성녀가 되면 결국은 나를 만나게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신전을 도망친 거요. 말없이 나온 건 그 때문이오.”

하지만 운명은 아넬을 자레스에게로 이끌었고 여기까지 왔다. 신의 섭리라는 게 있다면 그건 당연히 두 사람을 방해하는 데 여념이 없을 메타가 아니라 칼리크의 섭리였다.

“그러고 보니….”

신이 뒤바뀌었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가 걸렸다.

1년 전, 그러니까 아넬이 회귀했다는 그즈음 벌어졌던 이상한 일.

“에포메니가 갑자기 쓰러졌던 일이 있었죠.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오늘이 몇 년도인지 물었어요.”

“그날이 혹시 지난해 가을 아니었소? 아홉 번째 달, 스무 번째 날.”

야슬리의 물음에 블로자가 크게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시지요?”

“칼리크의 첩자가 신전에 숨어 있었던 건 아니라오. 수석 시녀, 그날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칼리크의 신성한 불이 꺼졌소. 그래서 칼리크의 힘을 담고 있는 성녀나 에포메니께서 혹시 죽었던 게 아닌가 짐작했었소.”

“……!”

블로자는 아넬이 갑자기 기절한 탓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자레스와 나머지 두 사람이 알려 준 사실은 쉽게 믿기엔 너무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어.’

아넬이 회귀를 했든, 아니면 칼리크와 메타가 바뀌었든 아니든, 중요한 건 아넬이 지금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블로자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허윽!”

하필 바로 그때 의식을 잃은 아넬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넬!”

자레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아넬의 낯빛이 무섭게 죽어 갔다. 안 그래도 흰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고, 입술이 갈라지면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넬!”

블로자 역시 달려가 아넬의 남은 한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다 불거질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그녀는 곧 죽게 될 게 틀림없었다.

미움과 사랑. 두 갈래 양가감정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왔다. 신전 시녀로서의 책임감과 개인적인 감정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입술을 짓이기며 잠시 망설이던 블로자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녀가 15년 가깝게 부모처럼 돌봐 온 아넬이 눈앞에서 죽는 걸 그녀는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건… 신관들의 짓입니다. 새 에포메니를 발견한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오?”

그렇기에 블로자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넬을 사랑했다.

성녀로서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그녀의 딸로서. 언제나 밝게 웃었던 상냥한 아이. 가끔은 수업이 따분해서 육지로 도망치던 말썽꾸러기.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그녀의 소녀.

블로자의 주름진 눈꼬리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에포메니가 치유력을 발휘할수록 성녀는 힘이 빠지고 늙게 됩니다. 그래서 신전에선 에포메니를 발견해서 데리고 온 뒤에는 절대 성력을 쓰지 못하게 막고, 성장을 제어하지요.”

그래서 아넬 역시 열아홉이 되도록 그렇게 왜소했다.

“그걸 아는 신관들이… 지금의 성녀를 죽이고 자신들이 좌우할 수 있는 새 성녀를 만들어 내려는 겁니다. 아마도 이 아르드의 어딘가에서 새로 발견한 에포메니에게 강제로 성력을 쓰게 하고, 성장시키고 있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복수를 위해 칼을 치켜든다면 딱 지금의 자레스와 같은 표정일 것이다.

분노가 너무 크면 웃음부터 나오는 것 같았다. 냉소적인 웃음을 터뜨린 자레스가 바로 명을 내렸다.

“퀴나에!”

“저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크게 안 부르셔도 다 들린다고요.”

“마디나를 시작으로 전국의 신전들을 뒤져라!”

“하지만 명분이 없는데요? 안 그래도 신전세 폐지 문제로 독이 올라 있는데, 이유 없이 신전을 뒤지면 바로 종교 탄압이네, 어쩌네 하면서 시위를 할 거예요.”

“상관없다!”

“그렇게 우길 게 아니십니다! 카비르 제국민들도 동요할 텐데 무슨 명분으로 신전을 뒤집니까?”

“신관들이 역심을 품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해.”

퀴나에는 자레스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자레스에게 들어가는 정보 중에 퀴나에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게 없었는데 그런 정보는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

“결딴을 내기로 작정하셨군요.”

언젠가 벌어질 일이긴 했지만 시기가 너무 빠르다.

신전세로 목숨 줄을 죈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반란 혐의를 뒤집어씌우면 오히려 종교 탄압이라며 전 국민적인 반항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레스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는 것이다.

“본보기로 마디나의 신전부터 뒤져. 예니센에게 반란의 증거를 찾아오라고 해!”

“증거를 만들어 오라는 뜻이겠지요. 네에, 무하립에게 명을 내리겠습니다.”

신관들이 무더기로 잡혀 들어올 것이다. 치명적인 고문이 가해질 것이고 그들은 좋든 싫든 자신들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결국 자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면 전국의 신전을 뒤질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

카비르 전역이 뒤집어졌다.

신관들이 반역을 꾀했다는 소문이 났고 결정적인 증거도 나왔다. 타국에 조력을 구하는 편지들이 발견됐고, 신관들이 황제 시해를 위해 시종을 매수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모두 조작된 것이었지만 제국민들은 신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전은 이미 신전세 폐지 문제로 노골적으로 황제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몇몇 신전은 그 문제로 폐쇄되기까지 했고, 신관들이 조직적으로 저항도 하고 있으니 그들이 황제 시해를 도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짐작됐다.

의심은 백성들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신전을 탄압하기 위해 핑계를 댄다 생각하는 자도 많았지만 일단 그들은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망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국민들이 몸을 사리는 동안 무하립은 가장 유력한 마디나의 신전부터 뒤졌지만 마디나의 신전은 이미 폐쇄됐고 신관들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폐쇄된 신전이 몇 군데 더 있긴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교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에, 자레스는 마디나 신전이 가장 수상하다는 심증을 굳혔다.

숱한 신관들이 잡혀 들어와 고문을 당했다.

반란 음모를 자백하라는 고문이 아니었다. 에포메니를 찾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에포메니가 발견됐다면 어디로 데려갔는지를 대라는 고문이었다.

“저는 모릅니다! 에포메니가 발견됐는지도 몰… 으아악!”

팔다리가 비틀리고 부서지는 건 예사로 일어났다. 자백을 빨리 받아 내기 위해 더 지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한편으로는 사라진 마디나의 대신관 일행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추적이 시작됐는데 그 수색대장은 무하립이 아니었다.

자레스는 그 수색을 다른 자에게 맡겼다.

***

“나와라, 일리파스.”

자레스가 무칼라스를 대동하고 몸소 감옥 앞까지 행차했지만, 일리파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석에 깔아 놓은 천 뭉텅이 위에 웅크린 채 뒤돌아 누운 그를 향해 자레스는 인내심을 갖고 계속 말을 걸었다.

“아넬이 나에게 널 치료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었지.”

“성녀님께서? 나를 치유하기 위해 부탁까지 했다고?”

아넬의 이름이 나오자 완강했던 일리파스가 발딱 일어났다. 그 눈에 기쁨이 서리는 게 보기 싫어 자레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네게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넬은, 성녀는 운명의 부름에 따라 성력을 베푼다고 했어. 너를 살려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운명이 성녀의 힘을 부르는 거라고. 그래서 네게 성력을 베풀게 해 달라는 걸 허락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자레스가 다시 말했다.

“아넬이 가사 상태에 빠졌다.”

“뭐라고?”

“신관 놈들이 저지른 짓이다. 그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새 성녀를 만들기 위해 에포메니를 찾아내고 그 아이에게 강제로 성력을 쓰게 하고 있다.”

“에포메니랑 성녀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있다. 에포메니가 성력을 쓸 때마다 성녀는 그 아이에게 기력을 뺏겨. 에포메니가 성장하는 대신 성녀의 수명은 줄어들게 되지.”

일리파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다음은 당연한 수순으로 광분했다.

일리파스는 벽을 발로 차고 쇠창살을 쥐고 흔들며 울부짖었다.

“더러운 신관 놈들! 어째서 성녀를 섬기는 신관이 오히려 성녀를 죽인단 말이냐! 죽일 놈들! 내 그놈들을 잡아다 사지를 찢어 버릴 것이다!”

“그 결심 아주 좋구나. 믿음직스럽다.”

자레스는 아넬이 일리파스를 살린 이유가 이거였을 거라 믿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일리파스를 구한 것이다.

자레스가 일리파스를 감옥에서 꺼내고 스에반과 함께 사라진 마디나 대신관을 찾게 한 이유의 대부분은 그것이었다.

나머지 이유 하나는 일리파스의 인맥이었다.

일리파스의 부족은 사실 그를 버리지 않았다. 자레스가 둘 사이의 소통을 막았기 때문에 일리파스의 모친과 그 부족은 그가 병사했다는 자레스의 거짓 전언을 받은 뒤 단념한 상태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살아 돌아왔다. 자레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선언한 일리파스는 그 길로 부족원들을 아주 알차게 써먹었다.

수면 위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예니센 대신 일리파스의 부족원들이 나섰다.

***

감옥에 갇힌 신관들의 불안은 극에 달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관들이 고문실로 끌려갔고, 한번 끌려간 자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갇힌 나흘째 되는 날에 드디어 살아 돌아온 자가 생겼다.

감옥 문이 열리고 경비병들이 얼굴 여기저기 멍이 든 자를 끌어다 처넣었다. 발에 걷어차인 사내가 휘청거리며 감옥 안쪽으로 쓰러지자, 신관들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함께 갇혀 있던 신관이 아니잖아?”

“이자는 누구지?”

신관들 중에 원래는 마디나에 살다 남서부 쪽으로 내려간 자가 있었다. 마디나 신전의 신관이었던 경력 덕분에 그가 가장 먼저 남자를 알아봤다.

“일리파스 황자!”

“뭐라고? 일리파스 황자는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신관들이 그를 둘러싸고 흔들어 깨우자 일리파스가 눈을 떴다.

“일리파스 황자 전하!”

“나를 알아보는 그대는 누구인가?”

“시고르타라 하옵니다. 한때는 마디나 신전의 신관이었습니다. 아쉬갈 황자의 명명식 때 축성을 하러 황궁에 찾아뵌 적이 있사온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몰라.”

모르는 게 오히려 일리파스 황자다웠다. 시고르타와 신관들은 일제히 일리파스 황자 앞에 엎드렸다.

일리파스는 자레스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가 병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레스의 적이면 그들의 동지였다.

“어떻게 살아 계셨습니까? 저희들은 모두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병 때문에 죽을 뻔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지. 충성 맹세를 거부했기 때문에 자레스 놈이 나를 계속 마디나 황궁의 지하 감옥에 가둬 놓고 있었어.”

여기까지는 반은 진실. 이다음부터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경비병 놈들이 방심하고 있는 새에 감옥을 탈출했다. 간수 놈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내가 목을 졸라 죽이고 감옥 열쇠를 뺏었지만 얼마 못 가 붙잡혀서 도로 끌려온 참이다.”

“그것 참 안타깝군요. 전하께서 탈출하셔서 새로운 희망이 돼 주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비록 붙잡히긴 했지만, 다행히 구황궁의 중정까지는 도망을 쳤거든?”

“그래서요?”

“비록 거기서 예니센인지 뭔지 하는 나부랭이들에게 잡혀서 더 경비가 삼엄한 여기까지 끌려오긴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끌려오기 전에 내가 살아 있는 걸 구황궁에 남아 있는 궁인들이 보기는 봤단 말이다.”

“오오, 그렇다면…!”

“내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퍼질 거다. 그러면 내 일족이 반드시 나를 구하러 올 거야.”

일리파스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이자, 신관들 역시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의 약속은 곧 실현됐다. 그날 밤 바로 일리파스의 부족이 쳐들어왔고, 그들은 너무나 손쉽게 경비병들을 쳐부수고 감옥 문을 열었다.

일리파스와 신관들이 함께 구출됐고, 신관들은 일리파스의 어머니가 마련한 비밀 장소로 이동했는데,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 과정에 수상함을 느낀 신관은 전혀 없었다.

군사적인 작전이나 음모, 반간(反間. 적의 첩자를 역이용해 적의 동정을 살피거나 그 일을 하는 사람)에 익숙한 신관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자레스가 ‘일부러’ 일리파스와 신관들을 풀어 준 그날 밤, 마디나 구황궁의 구석진 별궁에선 고위급 신관들에 대한 고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자들이 머물던 별궁 공간은 고문실로 이용하기 딱 좋았다. 이미 시녀와 노예들을 다 쫓아내 텅 비어 있을뿐더러, 외진 곳에 있어 아무리 고문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한때는 호화로웠던 라키사의 별궁은 그렇게 피의 공간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마디나 남쪽에 있는 알레시마의 고위 신관이 계속해서 지져 대는 인두 고문에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그는 고문으로 눈 하나를 잃었는데, 고문관은 그도 모자라 인두를 그의 허벅지에다 대고 꾹 누르고 있었다.

“으악, 아아아아악!”

“이봐, 신관. 계속 버티던 알레시마 평신관들은 죄다 죽은 것 알고 있수?”

“크흑, 크흐흐흑. 흐으으….”

“당신 같은 아랫것들이 미끼가 돼 주는 사이 대부분의 대신관들은 도망을 쳤지. 그게 무슨 의미겠냔 말이우.”

“크으….”

“당신들이 이렇게 말 안 하고 버텨 봤자, 대신관들은 당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아. 그냥 미끼가 돼서 허무하게 죽을 뿐이지.”

“후우, 후우…. 내가… 죽으면 메타께서 천국으로 나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오호, 그렇게 죽고 싶으면 소원을 들어줘야겠군.”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고문관은 바로 그의 목에 칼을 찔러 넣는 대신 새빨갛게 달군 인두를 그의 고환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하지만 쉽게 죽이면 재미없잖아. 일단 거시기부터 뭉개 놔야겠어.”

“으아아아아아!”

눈을 지지는 것도 죽음을 방불케 하는 고통이었지만, 남자의 고환에 가해질 고문은 그 크기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신관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고문관은 아주 효과적으로 그에게 고통을 가했다. 처음엔 강도가 얕던 고문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세게 높여 나갔는데, 그게 신관에게 더 공포를 가중시켰다.

고환 다음은 나머지 눈일 것이다. 성기를 태우고, 팔다리를 모두 녹이며 천천히 죽일 것이다.

뻔히 예상됐기에 더 두려웠다. 이렇게 될 걸 뻔히 알면서 ‘뒤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도망친 대신관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마, 말하겠소!”

“옳거니! 드디어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겠네, 그래. 얼른 말해 보우.”

“헉…. 흐윽. 하지만 나는…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소. 마디나 대신관이 어디로 갔는지는 정말로 몰라요.”

“정보의 가치는 폐하께서 평가하실 거니까, 일단 아는 건 다 털어놔 보시우.”

“흐윽…. 1년 전 가을 무렵에 아르드의 모든 신관들이 같은 꿈을 꿨소. 성녀의 순결을 지키라는….”

고문관은 칼리크 교도 출신이었다.

칼리크의 교리는 자비와 선이었지만, 정의를 위한 폭력은 허락해 주실 거라 믿고 기꺼이 고문에 나섰는데 그 정도 정보는 이미 교도들 사이에 모두 공유된 거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고깟 걸 알리면 폐하께서 바로 댁의 방울을 녹이라 하실 거유.”

“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메타께서는 계시를 내리면서… 허윽, 다, 당분간 잠들어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고문관이 관심을 보였다. 메타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계시까지 내린 거면 정말 확실한 정보가 되는 것이다.

추측과 확신은 그에 따른 작전의 질이 달라진다. 이건 아주 소중한 제보였다.

“메타께서 잠들어 움직일 수 없으니, 저희 신관들이 수족이 되어 성녀를 보호하라고…, 흐윽, 자레스 황자와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허어?”

“하지만 성녀는 황자의 여자가 됐고…, 마디나 대신관이 그에 따라 전 세계의 신전에 새 에포메니를 찾아달라는 협조를 요청했지요.”

“그리고 에포메니를 찾으면 마디나로 데리고 오라 했소?”

“그…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게 다입니다…. 흐윽, 무, 물. 물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드려야지. 한 동이라도 드리겠수. 이봐, 간수! 물 가져와! 그리고 고기 왕창 들어간 스튜와 빵도! 아참, 의원도 부르고!”

***

“일단 목표 하나는 확실해졌군.”

메타는 잠들어 있다. 아르드를 멸망시킬 파괴의 힘은 당분간 사라졌고, 세계를 굽어볼 감시의 눈길도 지금은 없다.

메타를 없앨 적기가 지금이다. 에포메니를 찾아내고 아넬을 깨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메타를 없애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문제는 방법이다.

자레스는 지금 그를 찾기 위해 퀴나에와 야슬리, 칼리크의 장로들을 총동원해 자료들을 찾고 있었다.

야슬리의 합류는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대제사장인 그에겐 칼리크의 육신에서 만들어진 신성한 불도 있었지만, 칼리크와 메타의 전쟁이 벌어진 태고부터 전해져 내려온 역사서도 있었다.

그 역사서는 읽을 수 없었다. 온크웰보다 더 오래된 고대어였기 때문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고대어에 대해선 자료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전혀 엉뚱한 도움이 나타났다. 태곳적부터 내려왔다는 역사서를 타네시어로 번역한 사서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카라 황궁에 오기 전에, 아르드 전역에 도움을 달라 요청한 야슬리의 명으로 타네시에 숨어 있는 칼리크 교도들이 고서와 자료들을 바리바리 실어 보낸 덕분이었다.

이 타네시어 사서와 야슬리가 가져온 역사서와 퀴나에가 자발 산맥에서 발견한 고대서를 삼중으로 대조 비교한 결과, 마침내 그동안 해독하지 못했던 고대어 인용구 부분을 읽어 냈다.

“최초의 전투는 불과 얼음의 싸움이었도다.”

너무 간단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건 고대서의 해독하지 않은 남은 한 부분이었다.

퀴나에가 그 부분을 짚었다.

“얼어붙은 섬광이 칼리크의 심장을 관통하니, 그의 사지가 조각조각 찢어져 땅에 흩뿌려지고 마지막 남은 육신마저 남쪽으로 떨어져 폭음과 함께 불타며 찢어지고 갈라져 다 녹아 없어졌도다.”

“잠깐.”

이 부분에서 자레스가 동요했다. 야슬리와 퀴나에 역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넬이 말하기를 회귀 전에 세상을 멸망시킨 건 흰 빛이었다고 했다. 빛의 화살 같은 것들이 세상에 떨어지면서 아르드가 소멸했다고 했지.”

메타는 빛이자 선의 신이라 믿었기에 아넬은 그게 빛의 화살이라 믿었다.

하지만 메타가 어둠과 악의 신이라 밝혀진 지금, 메타가 빛의 힘을 쓴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얼어붙은 섬광.”

퀴나에가 읊자 야슬리가 이었다.

“불과 얼음의 싸움. 불은 칼리크의 상징이니 아마 불은 칼리크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얼음이 메타의 힘이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빛의 화살….”

“빛이 아니라 얼음이었군요!”

퀴나에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하지만 자레스가 주목한 것은 그게 아니라 더 큰 것이었다.

“칼리크의 마지막 남은 육신이 남쪽으로 떨어졌다고 했지? 그리고 다 녹아 없어졌다고 했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생각을 모았다. 야슬리 역시 노회한 지혜를 모으다 두 사람이 마침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대분화와 함께 폭발해 사라졌다는 극남의 화산섬. 남서쪽 타흐트 대륙까지 침몰시켰다던 대폭발.”

“…혹시 그게 바로 칼리크께서 떨어진 지점일까요?”

“맞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요. 메타와 칼리크는 항상 반대의 성질을 가졌소. 빛과 어둠, 불과 얼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필 칼리크는 아라와트 한복판도 아니고 대륙의 최남단에서 사라졌소.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소?”

퀴나에와 야슬리가 얼어붙었다. 그러다 퀴나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칼리크가 남쪽을 상징한다면… 메타는 북쪽인 겁니까?”

“그렇지. 칼리크가 불타는 화산섬이라면, 메타는 얼어붙은 섬인 거다.”

모든 지혜를 모은 자레스가 결론을 내렸다.

“메타는, 지금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극북의 얼음 섬에 잠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신이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들키지 않고 숨을 수 있는 곳. 잠들어 무방비 상태인데도 아무도 침범해 올 수 없는 곳.

사람이 아예 들어갈 수 없는 곳이면 가능하다.

극북의 거대한 얼음 섬은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작은 나라를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한 섬이지만 용감한 탐험가도, 추위에 강한 타네시나 북방 민족들도 얼어붙은 폭풍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 해안을 멀리서 구경만 하다 돌아와야 했고, 상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목적지는 알아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군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에 숨어 있는 신을 어떻게 없앨 수 있단 말입니까.”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과연 살아서 메타가 있는 곳까지 간다고 해도 신을 무슨 수로 해치운단 말인가.

창으로? 불로? 화살과 검으로?

대포를 끌고 간다고 해도 신에겐 지푸라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퀴나에와 야슬리가 메타를 공격하는 주체를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자레스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

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퀴나에. 네가 흥미롭다 떠들었던 섬에 대해 기억하는가?”

“나클 섬 말입니까? 그게 왜요?”

“그 섬이 떠도는 섬이라고 했지.”

신중히 말을 고르던 자레스가 다시 물었다.

“왜 그 섬이 움직이게 됐는지에 대해 혹시 알아봤나?”

“아니, 언제는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라 해 놓고선 갑자기 왜요!”

황제 앞에서 감히 언성을 높이며 따지는 퀴나에를 야슬리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새 황제는 여러모로 희한한 사람이었다. 자기 사람에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고 적이라 생각되는 자에겐 냉혹하다 못해 악마 같다.

야슬리가 흘흘 웃으며 재밌는 구경거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퀴나에는 정말로 화가 난 상태였다.

“그런 거에나 매달리고 있으면 나흐르 강에 던져 버리겠다면서요! 그런데 갑자기 웬 나클 섬이에요?”

“칼리크가 죽으면서 땅에 떨어진 육신이 영원의 불의 원료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 나클 섬 역시 칼리크의 죽음과 함께 탄생한 걸 수도 있지 않은가.”

갑작스러운 논리 전개에 야슬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고대서에선 나클 섬이 아라와트가 생겨난 지 한참 뒤에야 기록에 나온다고 했다.”

“…예전에 이 늙은이가 어릴 적 바닷가에 살았던 적이 있었지요. 제 조부는 어부였고 그래서 물질을 하러 자주 바다에 나갔습니다. 바다 구석구석을 잘 아는 분이셨는데, 그분의 말에 따르면 수중에서 화산이 터지면 용암이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 순식간에 굳으면서 돌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돌은 물 위에 뜬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칼리크의 죽음과 함께 화산섬이 가라앉았고, 바다 깊은 곳에서 분출된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면서 새로운 섬이 생겨났다면?”

“그렇다면 물에 뜨겠지요. 비록 크기는 섬처럼 크더라도 해저에 뿌리를 내린 게 아니라 용암이 굳어 생긴 가벼운 섬이기 때문에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움직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 나클 섬이 그래서 떠돌아 다녔구나!”

퀴나에는 새로운 발견에 신이 나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시간 야슬리는 무릎을 꿇고 다시 기도를 올렸다.

“칼리크의 육신이 또 있었군요. 이 늙은 것이 새로운 진리를 또 발견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칼리크의 섭리이자 은혜입니다.”

“칼리크의 섭리라.”

기어코 칼리크의 후예인 성녀를 만난 걸 보면, 신을 믿지 않던 자레스라도 섭리란 걸 믿게 된다.

“그 신의 섭리가, 바다를 떠도는 칼리크의 육신이 메타를 부수는 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자레스가 반문하자 비로소 퀴나에와 야슬리가 그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게 뭔지 알아차렸다.

퀴나에는 처음으로 자레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아르드 스케일로 미쳤다.

‘아니,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지금 이 인간이 나한테 엄청난 일을 시키려 하고 있어!’

“섬의 궤적을 인간이 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모르지. 우린 나클 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알아내 와, 퀴나에.”

그의 예감이 맞았고, 퀴나에는 절망적인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금 나클 섬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해. 그리고 섬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내. 크기, 면적, 모습. 뭐로 이뤄져 있는지, 섬 위에 뭐가 사는지, 안 산다면 이유는 뭔지, 다!”

하지만 불행은 사람이 겪어 내기 쉽도록 순서대로 찾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자레스가 새로운 희망의 끄트머리라도 낚아채려 애를 쓸 때, 무칼라스가 나타나며 급보를 전했다.

“폐하! 타네시 군이 국경을 침범했다!”

“타네시의 동향은 주시하고 있었을 텐데? 어디로 나타난 거냐?”

연합군이 모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타네시 쪽에서 침공할 것도 예측하고 있었고 군대는 빈틈없이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타네시에 첩자들도 심어 놨는데, 국경 쪽으로 군대가 이동한 정황은 없었다.

“연합군이… 자발 산맥을 넘어왔다!”

“뭐라고!”

이건 자레스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모든 운명이 나락을 향해 한꺼번에 구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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