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27/33)

26.

타네시는 북방의 마지막 보루였다. 카비르만큼 크지는 않지만, 국토가 넓었고 국력 역시 강해서 카비르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정복당하지 않고 버텼다.

그런 나라였지만 유가를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는데 그 용기를 북돋운 건 카비르 황제가 성녀를 감금하고 있다는 유가의 제보였다.

이미 타네시의 정보망에도 들어와 있는 사실이었기에 확인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제 자레스가 황제가 돼 버렸으니 더 이상 납치나 약탈로 성녀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났을 뿐이다.

“메타의 영광을 위해 성녀를 탈환합시다!”

두말할 것 없이 정당한 이유가 생겼다. 타네시는 카비르와 국경을 맞댄 나라들과 더 멀리 있는 나라들에 사신을 보냈고, 그들은 곧 화답하였다.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절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뭉칠 수 없는 나라들이었다.

국력이 너무 약해 엄두가 안 나거나, 단독으로는 카비르를 칠 수 없거나, 아니면 타국보다는 카비르에 의지하는 바가 커서 나서지 않던 나라들이 성녀 탈환을 기치로 뭉쳤다.

각 나라가 타네시로 군사를 보내 연합군을 형성했고, 카비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나라들은 병력을 보내는 대신 물자를 제공했다.

만약 카비르가 승리할 경우 자신들은 강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재원을 제공했다고 발뺌할 요량이었다.

“연합군을 굳이 타네시로 모을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국경을 맞댄 나라들이 동시다발로 침공하면 카비르가 막아 내지 못하지 않을까요?”

처음엔 연합군이 타네시로 집결하는 데 반발도 있었다.

카비르와의 전쟁에 낄 수 있는 건 타네시와 탈라사, 오르타, 볼타니아 정도다.

오르타와 볼타니아도 작은 나라인데, 그보다 더 자잘한 나라들은 군사력이 너무 약해 연합군에 끼지도 못했다.

잘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을 데려와 봤자 군량만 축낼 뿐이라, 연합군도 그들의 참전을 원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결성되기 전 타네시의 장군이 이견을 제시했을 때, 유가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자레스 놈이 이미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걸 예견하고 있다는 거요. 카비르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니, 군사를 나누는 건 최악의 작전이 될 거요. 국경마다 군사를 보강해 대비해 놓으면, 침입하는 지점마다 각개격파될 뿐이요.”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타네시는 카비르와 국경을 맞댄 나라 중에서 국토가 가장 넓소. 타네시가 어디로 쳐들어올지는 카비르도 알 수 없지.”

유가가 지도의 어느 지점을 짚었다.

타네시와 카비르의 천연 국경 노릇을 하고 있는 자발 산맥이었다.

“이쪽으로 병력을 투입하면 자레스도 미처 예상하지 못할 거요.”

“그 험한 자발 산맥을 넘겠다고요?”

제정신입니까? 라는 말이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할 거라는 것 아니오. 설마 그리로 넘어올 줄은 모를 테니 방비를 하지 않았을 거요.”

“일리는 있습니다만….”

“넘기만 하면 자발 산맥에서 수도 카라까지는 한 달 반 정도 거리이니 파죽지세로 진격할 수 있지. 그리고 뭣보다.”

싱긋 웃은 유가가 말을 이었다.

“자발 산맥을 넘으면 카비르 안에서 전쟁이 터지는 거요. 국경에서 밀고 밀리는 것보다는 카비르의 상처가 훨씬 더 크지.”

지휘부에 속한 장군과 장교들이 일제히 서로를 쳐다봤다.

‘자신의 모국이 짓밟히는 건데, 전혀 거리낌이 없군.’

어차피 유가가 간교하든 자비롭든, 그들에겐 전혀 상관이 없었다. 작전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일 뿐이다.

“황자의 고견을 국왕 폐하께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카비르의 지리를 잘 아는 황자가 전쟁에 동참해 영명한 지혜를 더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청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오, 장군.”

우아하게 미소를 지은 유가가 덧붙였다.

“자발 산맥의 산길을 잘 아는 안내인을 수배하도록 하겠소. 아직 카비르 내에 내 인맥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니, 분명 협력자를 구할 수 있을 거요.”

배신자 유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간주했지만, 유가는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카비르는 원래 그의 것이었기에, 자신의 것을 부수든 말든 그건 주인의 마음이었다.

성녀를 내주기 위해 그가 이렇게나 희생해 주는데, 마땅히 연합군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유가는 오만한 미소를 흘리며 지휘부를 쳐다봤다.

카비르를 손에 넣으면 그다음엔 연합국 차례다.

카비르는 전쟁 한 번으로 망할 만큼 약한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카비르와의 전쟁을 위해 군사를 보낸 나라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을 테고, 그즈음엔 아직 기세가 살아 있는 카비르를 막아 낼 힘이 없을 것이다.

가장 약한 나라부터 집어삼키다 마침내 타네시 역시 잡아먹을 것이다.

세계가 그의 발아래 놓이는 미래를 꿈꾸며, 유가는 더욱 아름답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반 카비르 연합군은 진격을 개시했다.

***

고대하던 인물이 드디어 왔다.

자레스는 황궁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칼리크 교도들끼리의 점조직 중에서 최상위에 있는 자, 칼리크의 대제사장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이 땅에 닿도록 절하며 자레스에게 예를 표했다.

“야슬리라 하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옵니다, 폐하.”

“일어나시오, 야슬리. 노구가 상할까 봐 걱정되는구려.”

야슬리는 자레스가 만난 칼리크 장로보다 훨씬 더 늙었다. 안 그래도 작은 키에 허리가 굽었고,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서 툭 치면 그냥 가루가 돼서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이 늙은 노인이 몸 성히 폐하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나이다, 폐하.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옵니다.”

하긴, 선황 시절에 칼리크의 대제사장의 존재가 알려졌다면 아마 목과 몸이 따로 분리된 채 황제를 만나게 됐을 것이다.

야슬리의 뼈 섞인 말에 자레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칼리크의 점조직은 굉장히 치밀했다. 지역과 지역 간의 연계는 있지만, 상층부의 존재는 자기들끼리도 몰랐다.

지역의 수장인 장로들 위로 제사장들이 있고 제사장들 위로 대제사장이 있는데, 얼마나 비밀리에 숨겨 왔는지 장로들은 제사장의 존재는 알아도 대제사장은 몰랐다.

덕분에 남부에 숨어 있는 대제사장을 찾아내 데려오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실은 대제사장에게 묻고 싶은 것과, 털어놓을 것이 있소.”

“무엇이든 하문하십시오, 폐하.”

“털어놓는 것부터 먼저 해야겠군. 미리 말해 두지만, 야슬리. 나는 미치지 않았소.”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야슬리가 하도 처져 눈을 반이나 가린 눈꺼풀을 들어 자레스를 쳐다봤다.

“실은 이 아르드가 한 번 멸망했소.”

“아, 그렇군요.”

대단한 고백을 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심상했다.

허망해진 자레스가 야슬리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성녀님께서 가르쳐 주셨지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칼리크의 대제사장에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칼리크의 죽은 육신에서 붙은 최초의 영원의 불이었지요.”

“계속 말해 보시오.”

“대제사장들은 그를 신성한 불이라 여겼기에, 계속 연료를 넣어 가며 그 불을 태초부터 꺼트리지 않고 보존해 왔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 그 불이 재작년 9월에 꺼졌었지요.”

“……!”

“그때쯤 아마 성녀님에게 무슨 변고가 있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칼리크의 기운이 사라졌으니 곧 세상도 균형을 잃고 붕괴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요.”

“그게 세상이 멸망했다는 징조였던가?”

“그런 듯합니다. 그런데 그 불이 꺼진 직후에 저절로 다시 붙더군요. 처음엔 제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으음.”

“겨우 5초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불은 분명히 꺼졌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성녀님이 실종됐다는 소식이 들렸지요.”

칼리크의 남은 육신으로 이어지는 영원의 불은 아마 성녀의 생명과도 연결이 돼 있는 듯했다.

그래서 세상이 한 번 멸망했다는 말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상하진 못했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래서 그때 성녀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혹시… 죽었다 살아나시기라도 한 건지요?”

“비슷하오.”

그리고 자레스의 입에서 일의 전말이 흘러나왔다.

회귀 전에 있었던 자레스의 겁탈, 메타의 분노와 아르드의 멸망, 시간을 돌린 메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야슬리가 하늘을 쳐다보며 두 팔을 벌려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모든 게 칼리크의 은혜십니다.”

“뭐가? 메타가 세상을 멸망시킨 게?”

“칼리크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으니 메타가 시간을 되돌린 겁니다. 그래서 아르드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능히 칼리크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신을 믿는 자들은 참 좋겠소, 행운이든 불행이든 신의 뜻과 은혜로 갖다 붙이면 되니 죄책감은 하나도 없겠구려.”

메타든 칼리크든 신 앞에선 냉소적인 자레스의 입에서 독설이 튀어나왔다.

“털어놓을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젠 내가 묻겠소. 메타는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것 같소?”

“그 말씀은….”

“나와 성녀가 이미 만났소. 세상을 다 굽어보는 메타니 이미 그걸 알고 있을 거란 말이오. 그런데 왜 메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요?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소, 대제사장?”

골똘히 생각하던 대제사장이 한참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메타의 힘이 아주 약해진 게 아닐까요?”

자레스도 그렇게 짐작은 했다. 하지만 그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아무리 신이라 해도 시간을 되돌리는 건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 성녀님께서도 그렇게 들으셨다고 했지요?”

“그렇소.”

“심지어 메타는 한 사람의 시간을 돌린 게 아니라 이 아르드의 모든 피조물들의 시간을 한꺼번에 돌린 겁니다. 아무리 신이라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했을 듯합니다.”

“일리가 있구려.”

“그리고 고대서에도 메타가 칼리크를 쓰러뜨린 뒤 많은 힘을 소모하여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인간들끼리 싸우고 전쟁을 하는 동안 그 사악한 기운을 받아먹고 다시 힘을 회복했지요.”

“그럼 지금은 그때보다 더 약해졌다?”

“폐하께서는 사람을 두들겨 패 쓰러뜨리는 게 더 힘드십니까, 아니면 시간을 되돌리는 게 더 힘드시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요.”

“그렇다면 메타도 마찬가지겠지요. 칼리크를 쓰러뜨렸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쏟아부었을 겁니다. 제 추측에는 메타가 지금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짐승도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나면 쉬면서 체력을 회복합니다. 메타도 그럴 겁니다.”

비유가 딱 맞았다. 자레스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메타의 신관들에게 아넬을 전하와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겁니다. 메타가 이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태라면, 굳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명했겠습니까?”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았다. 자레스의 추측은 이제 확신으로 굳어졌다.

팔걸이에 걸친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자레스는 이내 신중한 시선으로 한 자 한 자 힘을 줘 다시 물었다.

“메타가 아주 약해져 있다? 힘을 전혀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고 맹세할 수는 없지만, 제 생각엔 그렇나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메타를 해치울 적기로군.”

이번엔 야슬리가 깜짝 놀라 자레스를 쳐다봤다.

“인간이 신을 없앤다고요?”

감히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메타가 그동안 너무 강했다.

아르드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대한 신을 인간이 무슨 수로 없앤단 말인가. 인간은 기껏해야 저희들끼리 죽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힘없는 생명체였다.

“당신들 말대로 메타가 악의 신이라면 당연히 없애야지. 안 될 거라 생각하오?”

“외람된 말이지만, 그럴 거라 사료됩니다. 뭣보다 신은 실체가 없는 힘의 덩어리일 뿐인데, 감히 무슨 수로 없앤단 말입니까?”

“실체가 없다면 칼리크는 왜 소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겠소? 게다가 신이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아는 거요? 아무도 직접 신을 만난 자는 없지 않소?”

“그건….”

물론 아넬은 그 신을 직접 만났지만, 그때의 형체 없는 모습이 실제인지 아니면 그녀의 눈을 가리기 위한 환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어쨌든 신은 소멸할 수 있는 존재란 것이다.

“신을 죽일 방법은 이제부터 찾을 거요.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지.”

얼핏 무모하고, 터무니도 없는 말을 자레스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메타에 대한 단서는 먼지 한 톨까지 다 뒤지고, 다 찾아낼 거요. 머리를 맞대고, 온갖 지혜를 다 모을 거요. 그러기 위해서 대제사장도 모신 거요.”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나이다.”

“지혜를 빌려 주시오, 대제사장. 그리고 칼리크 교도들이 비장하고 있는 모든 자료를 내게 주시오.”

자레스는 비장하게 말했다.

‘인간은 신을 이길 수 없다고? 그렇지 않다는 걸 내가 보여 주지. 메타여, 네가 먹이로 삼던 인간들이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신이 사라진 뒤에서 인간들의 세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자레스는 그렇게 다짐했다.

***

“아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우으음….”

새로 들어온 시녀가 아넬을 반복해서 불렀지만, 그녀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요즘 들어 자레스와 쭉 한 침대를 쓰다 보니 체력을 보전할 틈이 없었다.

물론 진짜 결합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아직 그 경지까지 가 본 적이 없는 아넬은 밤새 자레스에게 시달리느라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실. 폐하께서 점심은 같이 드신다고 명해 놓으셨어요. 지금 안 일어나시면 시간에 못 맞추십니다.”

“가기 싫….”

저도 모르게 투덜거리다 아넬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초조해하는 시녀의 목소리를 보니 늦게 갔다간 아넬이 아니라 시녀들이 혼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넬은 억지로 침대에서 벗어났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책임감이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성실하던 아넬도, 자비롭던 그녀도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아넬은 간신히 시녀들에게 이끌려 아침 목욕을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입맛이 없어 아침은 거른 채였다. 어제 체력을 빨린 걸 생각하면 뭐라도 먹어서 보충을 해야 하는데, 자레스는 그럴 겨를도 안 준다.

아니, 이번엔 아넬의 게으름 탓이려나.

“초록색 카프탄 드레스로 할까요? 아실의 눈 색깔과 잘 어울리실 거예요.”

“화장은 옅게 해도 될 것 같아요. 워낙 피부가 희고 고우셔서 아무것도 안 발라도 돼요. 입술만 좀 칠할게요.”

“목걸이는 폐하께서 지난주에 보내 주신 핑크 다이아몬드로 맞출게요. 루비 팔찌랑 곁들이면 조합이 기가 막힐 거예요.”

시녀가 보석함을 열어 층층이 배열된 장신구들 중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꺼냈다.

레이스처럼 정교하게 얽힌 백금 세공 장식한 가운데에 가장 귀한 보석인 핑크 다이아아몬드가 박힌 화려한 목걸이였다.

아넬은 주렁주렁 무거운 장신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레스는 마치 길들이려는 것처럼 매주 새로운 보석을 보내왔다.

하지만 보석이 보내질 때마다 아넬은 시큰둥한 반응이었고, 시녀들만 꺅꺅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한 세트인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걸자 청초해 보이던 인상이 마치 만개한 장미처럼 화려하게 바뀌었다.

팔찌는 무거운 걸 싫어하는 아넬의 취향에 맞춰 가운데 진주가 달린 비단 리본으로 대신했다.

“아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이건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이 아니었다. 단장을 끝내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아넬을 바라보던 시녀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쯤 되면 황제의 눈에 들고 싶어 경쟁하고픈 생각도 안 든다. 그냥 무릎 꿇고 경배하는 게 옳았다.

정작 아넬은 온갖 찬양에도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귀한 선물을 해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마는데, 오만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들이 아는 물욕에 약한 귀족 여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아실께서는 원래 출신이 굉장히 귀한 분인 것 같아. 아무리 귀한 선물을 받아도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 거 있지? 당연하게 여겨서 그런 게 아니라 날 때부터 익숙해서 그런 것 아닐까?”

식사가 마련된 정원 테이블로 향하는 아넬을 뒤따라가며 시녀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런 아넬도 뒤늦게 나타난 자레스가 손수 내민 꽃다발엔 놀랐다.

“세상에!”

꽃다발에선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았다. 싱그러운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진귀한 것이라 선물이 여상했던 아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꽃다발은 생화가 아니었다. 금과 은을 일일이 얇게 펴서 많든 꽃잎에 꽃술은 하나하나가 보석이었다.

영롱한 다이아몬드, 청금석, 루비와 에메랄드가 꽃술이 있을 자리에 박혀 있었고, 꽃다발 한편엔 몸통은 핑크 다이아몬드고 날개엔 자잘한 유색 보석들이 박힌 나비가 앉아 있었다.

이 희귀한 선물엔 아넬도 놀랐다.

“너무 아름다워요!”

어지간한 선물엔 별로 좋아하는 기색을 안 보이는 아넬이었기에, 그녀가 반색하자 자레스는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아넬이 이 선물이 값지고 귀해서 좋아한 게 아니라, ‘아름다워서’ 기뻐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노력이 반밖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레스는 살짝 서운함이 커졌다.

‘정말 까다로운 아가씨야.’

“고마워요, 자레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까 손을 말아 쥔 채 꼼지락대던 아넬이 간신히 말했다. 사람들의 눈이 많아서 마음껏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대신 환한 웃음으로 고마움을 알렸다.

“이 꽃다발은 내실의 화병에 꽂아 장식해 주세요.”

‘저 귀한 걸, 보관함에 간직하는 게 아니라 장식을 해 두겠다고?’

시녀들은 내심 기함했다. 아넬은 세상에서 가장 값나가는 선물일 이 꽃다발을 정말 ‘예뻐서’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쯤 되면 수컷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고 봐야 했다.

‘폐하께서 화내시면 어떡하지?’

시녀들이 자레스의 눈치를 보자, 그가 무뚝뚝하게 명했다.

“아실이 명한 대로 행해라.”

얼핏 보면 너무 싸늘해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시녀들도 이제 알고 있었다.

음료수 잔을 가져다 대는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걸 시녀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의 신변을 살피는 데 능숙한 시녀들은, 그 순간 아넬의 드레스 밑 발이 자레스의 무릎 사이로 파고드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아넬의 ‘고마움’은 그런 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잔으로 가린 자레스의 입꼬리는 더욱더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시녀들이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고선 시녀들끼리 작게 소곤거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실이 이름을 막 불러도 상관없으신가 봐. 다른 나라에선 황후나 왕비도 함부로 주군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아실이 폐하께 욕을 해도 폐하는 다 받아 주실걸?”

시녀들이 보기에 아넬과 자레스의 관계는 참 불가사의했다.

자레스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게 별로 어색하지 않은 아넬이 특히나 수수께끼였고 그걸 받아 주는 황제 역시 이상하기 짝이 없다.

시녀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동안 아넬과 자레스는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는 항상 자레스가 주도했다. 그가 아넬에게 빵을 찢어 주고, 무화과잼을 발라 주고, 그러다 밀가루 반죽으로 만 고기 요리를 먹기 편하게 잘라서 그녀에게 건네줬다.

처음엔 괜찮다고 거절하던 아넬도 이제는 그냥 자레스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뒀다. 자레스가 화내는 지점을 잘 알게 된 덕이다.

“저기요, 자레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지?”

식사가 다 끝나고 자레스에겐 커피가, 아넬에겐 차가 나올 즈음에 그녀가 물었다.

“저…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왜 자꾸 나한테 헛된 돈을 쓰는 거예요?”

자레스는 기가 막힌 나머지 잠깐 동안 딱 굳었다. 어이없어 아넬을 노려봤지만,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악의 없는 저 얼굴이 이렇게 얄미울 줄이야.

“그대야말로 이상하군. 여자들은 보통 귀한 걸 좋아하지 않나? 당신은 왜 선물을 받고도 기뻐하질 않지?”

심지어 헛된 돈이라고까지 했다. 예전 같으면 격분했을 텐데, 아넬이 진지한 얼굴로 물으니 그도 이젠 궁금해졌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난….”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아넬이 목소리를 더 낮춰 대답했다.

“내가 지난 생에서 그런 선물들을 받아 보지 않았을 것 같아요?”

“……!”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귀한 성녀였다. 왕은 물론이고 황제도 감히 성녀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고, 손등에 키스하며 존경을 표했었다.

배례식 때는 물론이고 달마다, 날마다 각국에서 온갖 선물들을 보냈다.

배례식에서 아넬을 만난 왕이나 황제들은 더욱 그랬다.

원래도 성녀는 공물과 선물을 많이 받았지만 아넬은 정도가 특히 심해서 마치 구혼 예물을 방불케 하는 산더미 같은 선물들을 받곤 했다.

보석, 값진 장식품이나 진귀한 예물. 아넬의 키만 한 상자에 담긴 금화. 황금으로 만든 그녀의 전신상까지, 입이 떡 벌어질 선물들이 진상됐었다.

“하지만 귀한 선물을 받아 봤자, 난 그걸 쓸 방법이 없었어요. 마음대로 신전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황금으로 만든 조각상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아무리 아름답게 꾸미고 진귀한 장신구를 몸에 걸쳐 봤자, 나 역시 신전에 갇힌 장식품에 불과한걸요.”

자레스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에게 더 소중한 건 한 번의 외출, 아름다운 정원, 계절마다 바뀌는 산과 들의 정취 같은 것들이었을 터다.

“난 먹지도 못할 보석이나 거치적거리는 옷보다는 디저트가 좋아요. 거리에서 파는 아몬드와 꿀이 잔뜩 들어간 과자도 좋고요, 당신이랑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하는 건 더 좋아요.”

그 말에 자레스가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단 걸 무척 좋아했지.”

“신전에 있을 때는 시녀들이 건강에 안 좋다고 단 음식은 절대 안 줬거든요.”

심지어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해야 한다며 식사도 제한했다.

몸에는 좋지만 맛은 없는 음식들만 먹고 산 그녀였기에, 자레스와 함께하게 된 뒤로는 난생처음 접하는 다디단 과자와 음료수를 접할 때마다 탐욕을 감추지 못했다.

자레스는 그런 아넬을 볼 때마다 의외의 식탐도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절절한 이유가 있었다.

“알았어.”

사실 이제는 아넬을 데리고 황궁 밖을 나가는 것보다 그냥 보석을 선물하는 게 더 쉬웠다.

하지만 아넬이 좋아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줘야지.

단, 아넬이 좋아하는 단 과자는 조금만 줘야겠다. 그게 건강에 안 좋은 건 사실이니까.

“그럼 이 선물은 당신이 기뻐할까?”

자레스가 좀 머뭇거리다 물었다.

“무슨 선물인데요?”

“이렌시아에 사람을 보내서 당신을 모시던 시녀들을 황궁에 초대했어.”

아넬이 놀라서 막 입에 넣으려던 호두와 헤이즐넛과 시럽을 잔뜩 넣은 디저트를 떨어뜨렸다.

“반갑지 않은 건가?”

왜 그렇지 않을까.

사실 많이 보고 싶었다. 갇혀 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인생 중 반 이상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수석 시녀 블로자는. 키리아가 스승이라면, 블로자는 그녀를 키운 어머니나 마찬가지라 아넬에겐 더욱 그리운 이다.

“그분들을 보면 무척 기쁠 것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의 여자가 된 나를 그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날 경멸할지도 몰라요.”

누가 감히 그녀를 경멸한단 말인가.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아넬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자레스는 내색하지 않았다.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부르지 않을게.”

“아니요. 아니에요.”

무슨 생각인지 아넬이 고개를 젓더니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경멸을 당하더라도 일단 내가 행복하다는 건 보여 드려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걱정하실 테니까요.”

그 대답은 무척 자레스의 마음에 들었다.

“로쿰을 가져오라 해야겠군.”

로쿰은 견과류에 설탕과 전분을 넣고 굳힌 디저트였는데, 탱탱한 식감과 극강의 단맛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마치 구슬처럼 알록달록하고 반투명한 로쿰이 접시에 담겨 나오자, 아넬의 눈이 다이아몬드처럼 번쩍거렸다.

***

“이 아이인가?”

마디나 대신관, 아니 전 대신관이었던 자가 그 앞에 끌려온 아이를 보며 물었다.

“네, 예하. 이름은 스비야티라고 합니다. 원래는 노예였고요. 3대륙 북쪽에 있는 크라니야에서 발견됐습니다.”

“이번에는 신분이 천하군.”

다섯 살쯤 됐을까. 스비야티라고 불린 여자아이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에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성녀는 대대로 미인이었는데, 스비야티 역시 크면 더 아름다워질 듯했다.

“보통 에포메니는 서너 살 즈음이어서, 그 나이 또래 아이들만 모아서 시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통 힘이 나타나지 않길래 다섯 살까지 범위를 넓혔더니 비로소 이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지요. 그러느라 시간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

일단 모아만 놓으면 금세 찾을 거라 믿었는데, 그런 이유로 새로 아이들을 모아야만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린 이유였다.

“이리 오거라.”

하지만 어린 스비야티는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상태였다. 대신관이 손짓을 했지만, 스비야티는 겁을 먹고 이리저리 시선만 돌릴 뿐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 전, 스비야티는 계속해서 신관들에게 시험을 당해야 했다.

그 시험이란 게 어린 스비야티의 손바닥을 칼로 베는 것이었다. 이미 교구 신전에 모인 서너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들은 모두 그런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본인이 성력을 쓰는 요령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적어도 두 번 이상, 심하면 열 번 이상 상처를 입어야 했다.

스비야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파서 울음을 터뜨렸더니, 신관들은 상처를 치료해 주는 대신 이번엔 팔뚝을 얕게 벴다.

“아파. 아파요! 엄마, 아빠아!”

스비야티가 엉엉 울었지만 신관들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스비야티의 몸을 다치게 했다.

상처의 강도는 점점 더 심해졌다.

정말 크게 아프거나 죽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을 때야 성력을 나타내는 아이도 있었다.

보통은 그 정도로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기에 신관들은 망설이지 않고 스비야티와 아이들에게 점점 더 큰 상처를 냈다.

그러다 신관들은 해선 안 될 최후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성력이 있다면 스스로 치유할 것이다.”

대신관의 명령이 내려왔다. 명을 받은 신관들은 마지막이라며 신전에 모아 놓은 아이들에게 별식을 내줬다.

“시험은 모두 끝났다. 내일이면 모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그 말을 믿었다.

가혹한 고문을 더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하며, 아무 의심 없이 생전 처음 맛보는 케이크와 고기 요리를 먹고 감초에 꿀과 설탕을 넣은 달콤한 음료수도 마셨다.

그날 저녁, 음식을 먹은 아이들은 스비야티를 제외하고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오직 그녀만 막판에 드러난 성력을 발휘해 살아남았다.

그런 마당이니 신관들은 너무 무서웠고, 그 신관들이 섬기는 대신관은 마치 악의 신이라는 칼리크처럼 느껴졌다.

“성력은 확실한가?”

“예. 한 번 성력을 발휘한 뒤로는 아플 때마다 치유를 했습니다. 시험 삼아 홍역에 걸린 어린아이를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아이를 바로 치료해 줬지요.”

“에포메니로군.”

대신관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스비야티를 안아 올렸다.

“미래의 성녀님을 뵙습니다, 에포메니시여.”

말로는 경배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성녀가 될 준비만 하시면 됩니다. 부지런히 성력을 쓰시고 얼른 자라십시오.”

아이가 보지 못하도록 작은 머리를 그의 어깨 위에 올린 채 천천히 걸어가는 대신관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악의가 흐르고 있었다.

***

아넬은 자레스의 손을 잡고 선착장 계단을 내려갔다.

카라의 황궁은 내해인 드니즈 해를 끼고 있었다.

황궁에서 30분 정도만 걸어 내려가면 드니즈 해로 나가는 선착장이 있었는데, 오늘 자레스는 아넬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 주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선착장에는 흰 돛을 단 작은 범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의 규모는 아넬이 예전에 이렌시아에서 카비르로 올 때 탔던 자레스의 배나 일리파스의 것보다 훨씬 아담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산뜻해 보였다.

“오늘 바람이 좋다고 해서 배를 준비시키라 했지.”

배에 오른 자레스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바람이 제법 세게 불고 있었다. 돛을 모두 펴자 바람을 안은 배가 빠르게 넓은 바다 쪽으로 나갔다.

흰 담비 털로 만든 모피 망토를 두른 아넬이 갑판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바람과 빠르게 변하는 바다 주변의 풍경을 즐겼다.

드니즈 해는 대해와 연결되긴 했지만 그 자체로는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 호수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바다였는데, 바다를 크게 둘러싼 해안엔 눈부시게 하얀 절벽이 쭉 이어져 있었다.

“아름다워요!”

진귀한 보석 꽃다발보다, 화려한 목걸이보다 이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진심으로 감탄한 아넬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자레스의 입가에도 웃음이 서렸다.

“절벽이 어쩜 저렇게 하얗게 빛날 수가 있죠? 혹시 눈으로 빚은 절벽인가요?”

“해안가의 지질이 석회암이라 그래. 거대한 파도에 계속 침식되는 바람에 저렇게 칼로 잘라 낸 듯한 단면을 갖게 됐다더군.”

자레스가 뭐라고 더 설명을 했지만 아넬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바람을 쐬니 너무 좋았다. 처음 느끼는 이 속도감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자기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바람을 즐기는 아넬의 모습에 자레스는 심통이 났다.

“그렇게 좋은가?”

“그럼요. 제가 이렇게 큰 배를 타고 넓은 바다를 항해한 건 이번이 처음인 걸요.”

“나와 카비르에 올 때 배를 탔잖… 아!”

그때는 아넬을 마르파에서 팔아 버릴 생각에 그녀를 배 밑바닥에 가둬 뒀었다.

아넬은 이렌시아 항구를 떠난 이후로는 바다를 구경도 못 했고, 자레스는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마르파 항구에 버리고 와 버렸었다.

‘마르파에서 카비르로 올 때는 일리파스가 가둬 놨다 했으니, 그때도 바다는 못 봤겠구나.’

이래저래 크든 작든 ‘배’에 관해선 좋은 기억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자레스는 새삼 뱃속이 불편해졌다.

자레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지, 아넬이 그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이렇게 좋은 구경을 하고 있잖아요.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자레스.”

“내 덕이 아니라 내 탓이겠지. 하여간 고생이란 고생은 내가 다 시켰군.”

아넬에게 면목이 없어 죽을 것 같았다. 그동안은 사랑해서 퍼부었지만, 이젠 미안해서라도 더 퍼부어야겠다.

“아니에요. 신전을 나오고 나서 알게 된 게 정말 많은걸요. 당신 덕분에 이젠 뱃멀미도 안 하잖아요. 배 밑바닥에서 하도 구토를 하느라 나중엔 멀미도 익숙해졌어요. 봐요, 지금도 멀쩡하잖아요.”

이 여자 웃으면서 등골에 칼을 푹 찔러 넣는다. 지금 등에 흐르는 게 식은땀이 아니라 피인 것 같았다.

자레스는 환하게 웃는 아넬의 눈을 피하며 얼른 무칼라스를 향해 손짓했다.

무칼라스가 배의 후미로 가서 신호를 했고, 그러자 해안 근처에서 닻을 내린 채 대기하고 있던 배들이 출발했다.

자레스와 아넬이 탄 배는 돛을 모두 내렸다. 덕분에 속도가 줄자, 곧 뒤늦게 출발한 배들이 범선을 따라잡았다.

“저게 뭔가요?”

갑자기 배 왼쪽에서 기다란 갤리선(Galley. 주로 노를 젓는 방식으로 항해하는 배)이 나타났다.

좁은 갤리선 위에는 번쩍거리는 옷을 입은 남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무칼라스가 수신호를 하자 그들이 일제히 악기를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어머나.”

오늘은 감탄할 일이 정말 많았다.

아넬은 마디나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카라에 온 뒤에도 내실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카비르의 음악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 카비르의 음악이 해상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넬은 그 생경한 멜로디에 황홀함을 느꼈다.

이렌시아에선 악기는 목소리를 뒷받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생각하기에 음악이 단조로운 편이었는데, 카비르의 것은 무척 화려하고 풍성했다.

아홉 개의 찰현 악기가 정교한 멜로디를 연주하면 두 개의 쌍둥이 북을 가진 연주자가 타악으로 리듬을 고조시켰다.

거기에 피리 연주까지 더해지면서 음악이 더욱 화려해졌는데, 솔직히 이와 같은 카비르 특유의 연주는 실내에서 들으면 매우 시끄러웠다.

하지만 탁 트인 바다에서 듣기엔 딱 좋을 정도라 아넬은 즐거워하며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왼쪽에서 갤리선보다 좀 더 큰 범선이 나타났다.

그 배엔 상체는 딱 달라붙고 하체는 아슬아슬 속이 비쳐 보일 정도로 얇은 드레스를 걸친 여자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베일을 써서 얼굴은 모두 감추고 있었지만, 걸친 옷만 봐도 여자들이 아주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들인 게 보였다.

그 여자들이 연주자들의 음악에 맞춰 빙빙 돌아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팔을 여러 각도로 꼬고 비틀다 한 바퀴를 돌거나 앞뒤로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는데, 특히나 허리의 움직임이 아주 요란했다.

허리를 한쪽으로 쳐올리고, 반대쪽으로 쳐올리는 동작을 반복하다 음악이 최고조로 빨라질 때는 마치 번개에 맞은 것처럼 가슴과 엉덩이를 일제히 와드드드 떨어 댔다.

처음 보는 신기한 춤과 음악에 아넬은 입이 떡 벌어지고 뺨에는 홍조가 떠올랐다.

“우와, 우와아! 우와아아아!”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도 안 나오고 감탄사만 나오는 것 같았다.

정작 악사와 무희들을 데려오게 한 자레스는, 그들은 안 보고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탄성만 반복하는 아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넬보다 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아름다운데 귀여울 수도 있구나.’

자레스가 그동안 봐 온 여자들은 주로 고혹적인 여자들이었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를 유혹하기 위해 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려 애를 썼고, 그래서 자레스는 여자들의 매력은 한 종류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성녀 그 자체인 것 같았던 아넬은, 그 책임을 등에서 내려놓은 지금은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워졌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아넬을 내실에 가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또 치밀어 올라왔다. 얼굴을 가려도 미모는 베일을 뚫고 나왔고,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스러웠다.

아넬과 마주치는 남자들이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

지금만 해도 함께 배에 탄 호위병들이 홀린 듯이 아넬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음 같아선 저자들을 모조리 바다에 빠뜨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아넬이 화를 내겠지.’

자레스는 순전히 그 이유로 충동을 참아 냈다.

아넬을 기쁘게 하기 위해선 이 죽일 놈의 질투심과 터무니없는 수준의 소유욕도 억눌러야 했다.

뱃놀이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선착장에서 출발한 게 이미 오후였기 때문에 음악과 춤을 즐기는 동안 주변이 어두워졌다.

“이제 귀환한다.”

자레스의 명령에 악사와 무희들을 태운 배들이 물러갔다. 아넬은 아쉬워했지만, 아직 쌀쌀한 저녁 바람에 옷도 얇은 무희들이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에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또 궁으로 초대해서 볼 수 있을까요?”

“…카비르 음악은 실내에서 들을 게 못 돼.”

그런 핑계를 대면서 자레스는 앞으로 여자 악사들을 많이 양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여자 악사, 여자 의원, 여자 신관.

절대 남자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살면서 아넬이 마주치게 될 모든 분야에 여자를 진출시킬 것이다.

이후 카비르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별 평등에 가까워진 계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신호에 따라 범선이 다시 돛을 올렸다.

바람은 아직 역방향이었지만, 20여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돛들 중 어느 것을 올리느냐에 따라 선회와 전진을 수월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속도가 좀 느린 게 탈이지만, 이제부터 보여 줄 중요한 구경거리는 오히려 배의 속도가 느려야 더 멋질 것이라서 자레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펑!

때맞춰 자레스가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이 출발했다.

커다란 소음에 아넬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배가 달리고 있는 근처 해안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불꽃놀이다. 아넬은 바로 알아보았다.

단조로운 신전의 생활에서 제일가는 낙이 새해를 알리는 불꽃놀이였다. 이날만큼은 성녀의 위신도 있고 해서 신전에서도 아낌없이 돈을 썼다.

하지만 불행히도 돈은 있는데 기술이 없었다.

밤톨만큼 작은 나라인 이렌시아엔 뛰어난 불꽃놀이 기술자가 없어서 고작해야 대나무 통에 화약을 담고 점화해서 하늘로 쏘아 올리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화약이 적다 보니 터지는 불꽃의 크기도 적었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아넬은 그런 걸 보면서도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정도도 좋았는데 카비르의 불꽃놀이는 그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하고 규모가 컸다.

첫 불꽃이 터지자 배가 나아가는 속도에 맞춘 것처럼 연달아 불꽃이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카비르의 불꽃놀이는 화포에 화약을 재서 발사하기 때문에 불꽃이 터지는 크기가 훨씬 거대했다.

하늘 높이 올라간 작은 불꽃이 가장 높은 상공에서 확 터지면서 별이 퍼지는 것처럼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말 그대로 불꽃, 하늘에서 불로 된 꽃이 활짝 피어났다가 비처럼 죽죽 흘러내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해안을 따라 차례대로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고,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에 은색과 금색의 화려한 꽃이 연달아 피어났다.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불꽃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터졌다. 마치 아넬과 자레스가 돌아가는 길에 불의 길이 열린 것 같았다.

황궁으로 향하는 바닷길 위로 하늘에서 펑펑 터진 불꽃의 불빛이 반사돼 하늘과 바다, 아래위로 화려한 수를 놓았고, 아넬은 마치 별들의 한복판을 항해하는 것 같은 착각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느새 눈꼬리에서 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언제나 환영이지.”

자레스가 뒤에서 살포시 아넬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넬, 이게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야. 진짜 보석 대신, 하늘에 흩뿌린 보석.”

그의 말이 맞았다. 보석함을 꽉 채운 수십 개의 보물보다 지금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불꽃이 그녀의 마음속에 영롱히 빛났다.

불꽃은 사라져 재가 되고 말겠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 가장 귀한 보석이었다.

“매일 이런 선물을 줄게. 몸에 걸치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길 선물을.”

아넬이 그를 향해 웃을 수 있도록. 지금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뻐할 수 있도록.

아넬이 그의 선물에 감격하면 그게 자레스에겐 제일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고마워요.”

아넬이 뒤로 돌아 그에게 매달렸다. 자레스가 그녀에게 이마를 맞대자, 아넬이 다시 속삭였다.

“사랑해요, 자레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레스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불꽃이 꽃다발처럼 폭발했고, 마치 대낮처럼 바다 위를 환히 비췄다. 축복하듯 그들을 비추는 환한 빛 아래에서 자레스는 아넬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

선착장에는 이미 가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로 가도 되지만, 선착장에서 궁까지 가는 길이 계단으로 돼 있어서 아넬에게 굳이 노예들이 이는 사인교를 타게 했는데 아넬이 보기엔 굉장히 불필요한 짓이었다.

‘계단이 끝나면 마차를 타도 되는데….’

계단을 다 올라오면 평지고, 그 평지에서 황궁까지는 걸어서 20분이나 걸린다. 그런데도 자레스는 굳이 덜커덩거리는 마차에 타게 할 필요가 없다며 그녀를 가마에 태웠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심한 과보호였다.

그렇게 해야 자레스의 마음이 편할 것이기 때문에, 아넬도 이제는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오랜만에 바깥에서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상당히 피곤하기도 했다.

‘몸살이라도 오려는 건가?’

몸이 힘들다는 걸 인식하자, 피곤함이 배로 더 심하게 느껴졌다.

내실로 돌아왔을 때는 아넬의 안색이 상당히 나빠져서 자레스도 알아차릴 정도가 됐다.

“얼굴이 왜 그러지?”

“뭐가…요?”

“눈 밑이 새까매. 낯빛은 창백하고. 아넬, 어디 아파?”

“아니에요. 그냥… 오랜만에 외출을 했더니 피곤한 것 같아요. 괜찮아요.”

괜찮을 일이 아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넬은 언제나 그렇듯 참고 넘길 것이다. 그렇다고 성력을 쓰게 할 수는 없으니, 자레스는 바로 시종장이 된 샤이크를 불렀다.

“궁의를 불러라! 그리고 당장 아실에게 드릴 약차를 가지고 와!”

“자레스. 의사를 불러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하룻밤 쉬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안 돼, 쉬더라도 진찰을 받고 약을 먹은 다음에 쉬어.”

이 정도면 그냥 성력을 쓰면 된다고 말하려다 아넬은 포기했다.

사실 큰 병도 아니고 체력을 회복하는 정도면 성력을 써도 별 티가 나지 않았다. 굳이 수명으로 따지자면 한 1분 정도가 단축되는 것뿐이다.

자레스는 그녀의 수명이 1초라도 줄어드는 걸 질색하기에 일부러 힘을 쓰지 않고 있지만, 귀찮게 궁의를 부르는 대신 아넬은 슬쩍 성력을 써야겠다 마음을 먹고 있었다.

“자레스.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아넬은 핑하며 머리가 도는 걸 느꼈다.

순식간에 시야가 깜깜해지면서 사방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마치 발밑에 까만 구멍이 있어서 그리로 체력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아넬?”

그녀가 갑자기 휘청거리자 깜짝 놀란 자레스가 아넬을 안기 위해 달려왔다. 그가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 내는 것과 동시에, 아넬은 정신을 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