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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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아직도 영지에서 소식이 없나요?”

카에티가 초조하게 물었지만, 제임은 흙빛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다. 우스라는 지방 귀족이다.

영지가 있긴 했지만, 수도에서 멀어 거기서 군사를 보낸다 해도 마디나까지 오는 데 한 달은 걸린다.

그것도 이동이 포착되지 않았을 때 이야기인데, 영지에 돌아가 있는 아버지에게 아무 소식도 없는 걸 보면 이미 전령의 움직임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벌써 자레스가 황위에 오른 지 한 달이나 됐는데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지원군이 올 리 없었다.

그 대신 다른 것이 왔다. 자레스가 보낸 새 근위대, 예니센의 병사들이 카에티의 저택에 쳐들어온 것이다.

예니센의 병사들 대부분은 칼리크 교도들이었고, 자레스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다. 귀족들의 숙청과 첩보를 담당하는 예니센은 현재 카비르의 새로운 권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여인의 내실에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카에티는 베일도 쓰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항변했지만, 예니센의 대장은 코웃음을 쳤다.

“죄인 카에티, 무릎을 꿇어라!”

“내가 죄인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에티가 뻔뻔하게 되물었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녀가 황궁에 전염병을 퍼뜨린 건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라키사에게 보냈던 노예는 이미 죽였고, 노예상은 노예를 죽인 즉시 카비르를 떠나게 했다. 지금 그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심증은 있을지 몰라도 증거가 없었다.

“이미 네 휘하의 시녀들이 모든 사실을 진술했다. 어디서 발뺌을 하려 드느냐!”

이어지는 호령에 카에티의 낯빛이 살짝 질렸지만, 그런다고 그냥 물러날 그녀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대체 뭘 안단 말입니까? 아마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시녀들에게 돈을 쥐여 주었겠지요. 그리고 거짓 진술을 이끌어 낸 겁니다!”

“그건 황제 폐하와 재상들이 판단할 것이다!”

“뭘 판단한단 말입니까? 증인은 셋 이상이어야 하되, 소속이 같은 자들의 증언은 하나로 칩니다. 내 시녀들 말고 다른 증인이 더 있단 말입니까?”

“있지.”

예니센 대장이 바로 답했다.

“후궁 라키사의 아들이 가장 먼저 발병하였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 라키사 궁의 시녀들이 네가 보낸 노예가 들른 이후로 아쉬갈 황자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연입니다!”

“우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우연을 포착해서 네 주변을 파고드니 바로 노예상이 나오더군.”

카에티는 비로소 당황했다. 갑자기 심한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노예상은 이미 다른 나라로 보내 버렸다. 들킬 리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예니센 대장은 저리 자신만만한 걸까.

“노예상의 집결지는 마르파지. 노예상들의 정보는 거기에 다 모인다. 거기에다 병의 진원지를 밝히는 자에게 상금을 주며 그 죄는 묻지 않는다고 퍼뜨렸더니, 네가 고용한 노예상이 바로 찾아왔더구나.”

제임이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설마 동생이 그런 지독한 짓까지 저질렀을 줄은 몰랐기에, 절망이 한꺼번에 덮쳐 오며 눈앞이 깜깜하게 변했다.

‘우리 일족은 끝이로구나.’

그의 예감이 맞았다. 제임과 카에티는 한꺼번에 묶여 황궁으로 끌려갔다.

***

황궁 재판이 열렸다.

재상들은 물론이고 대재상에 황제까지 참여한 재판으로 반역처럼 국가적으로 중대한 죄인을 다룰 때나 열리는 것이었는데, 지엄한 재판장에 카에티와 제임이 포박당한 채 무릎 꿇렸다.

“우스라의 카에티.”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카에티가 독살 맞게 자레스를 쏘아봤다.

그것만으로도 불경죄로 눈을 파 버릴 상황이었지만, 자레스는 따로 책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에티는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될 테니까.

“이미 증인이 다 모였다. 후궁 라키사의 내실에 일부러 전염병에 걸린 노예를 보낸 게 그대라지?”

“거짓 증언입니다! 모함이에요!”

바락 외친 카에티가 입 끝을 비틀며 대들었다.

“황자 전하께선 저를 죽이기 위해 죄를 만드신 게 아닙니까? 성녀를 탐하기 위해 혼인을 파탄 내시더니, 이제는 아예 저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하셨나 보군요?”

“무엄하다! 감히 황제 폐하를 모욕하다니!”

재상 한 명이 소리를 질렀으나 자레스가 손을 저어 말렸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네 죄를 따지는 자리니, 사안과 상관없는 모함에 대해선 일고할 가치도 없다. 무하립, 증인을 데려오게.”

그의 명에 살아남은 라키사의 시녀들과 카에티의 하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예상이 나왔다.

“황금 1천 디하브와 노예 열 명을 받고 카에티 님의 명령을 받들었습니다. 하나 거짓이 없음을 이 노예 권리증으로 증언하겠나이다.”

그가 내민 권리증에 죽은 여자 노예의 이름과 출신이 적혀 있었다. 이어서 그가 더 증언하였다.

“카에티 님께서는 궁에 전염병을 퍼뜨리고자 일부러 아와드의 풍토병에 걸린 노예를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거짓말입니다!”

“거짓이라니요. 노예가 저택에 실려 올 때부터 병에 걸려 있었다는 건 상자를 본 적 있는 하녀들이 알 것입니다.”

증언이 하나둘 쌓일수록 카에티의 죄상이 드러났다.

일부러 라키사의 궁에 환자를 보낸 것, 심지어 그 병든 노예가 아쉬갈 앞에서 기침을 하고 침 묻은 손으로 여기저기를 만져 대고 사람을 만났다는 것.

카비르는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나라였으므로, 사람의 침이 병을 옮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이는 그녀의 죄를 판가름할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후궁 라키사에게 뇌물을 보내 나와 혼인을 하고자 했지. 그게 실패하고 나니 복수를 하고 싶었나 보군.”

“아니에요, 아닙니다! 당신이 먼저 나를 모욕했잖아요! 성녀를 여자로… 악!”

카에티가 뭐라 더 떠들기 전에 예니센 병사가 그녀의 등을 걷어찼다. 카에티는 머리를 찧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 바람에 머리가 깨지면서 카에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됐다.

그런 그녀 위로 자레스가 천천히 일어나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성녀는 여자가 맞다. 그래서 모두의 사랑을 받지. 일찍이 많은 왕과 황제들이 성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지난 왕과 황제들도 그랬는데 내가 성녀를 사랑하는 게 죄가 되는가?”

자레스는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선선히 인정하자, 재상들이 더 놀랐다.

“내가 묻겠다, 재상들이여. 성녀를 사랑하는 게 죄인가?”

재상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윽고 젊은 재상이 답했다.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폐하.”

사람의 감정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것만으로 죄의 유무를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랑을 핑계로 납치를 했다든가, 강제로 범하였다든가, 그와 같은 행위가 뒷받침됐을 때에야 비로소 심판을 받는다.

성녀를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죄라고 하려면, 지난 역사 속에서 숱하게 성녀를 찬미했던 문학도 단죄해야 했고, 황제들이 남긴 시집도 태우고, 성녀를 조각한 성상들도 파괴해야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성녀에 대한 짝사랑을 앓았던 수컷들 모두 벌을 받아야 했다.

카비르의 재상들은 그런 면에서는 이렌시아나 탈라사 같은 보수적인 나라보다 훨씬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그 성녀는 이미 유가가 납치해 간 뒤인데, 굳이 여기 있지도 않은 사람을 사랑했느냐 아니냐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이어서 자레스가 물었다.

“그럼 그 성녀를 끌어내겠다는 목적으로 궁 안에 일부러 전염병을 퍼뜨린 건 죄인가, 아닌가?”

“대죄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죄인은 물론이고 일족을 도륙하여도 모자랍니다!”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이 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대체 얼마던가. 카에티의 죄는 감히 역사서에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죄인 카에티는 성녀를 질투하여 만인 앞에 끌어내려 했다. 그리고 성력을 고갈시켜 성녀를 죽인 뒤, 나와 혼인하고자 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이번엔 제임은 물론이고 재상들까지 놀랐다.

그가 짐작하고 있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이 알려진 게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카에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자레스는 일부러 재상들에게 진실과 거짓이 함께 섞인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유가에게 써먹은 방법 그대로, 앞뒤 관계를 조작하고 여론을 호도했다.

사람들은 잘 정리된 인과관계만 믿을 것이다. 처음 알게 된 진실에 눈이 가려져 그녀의 호소는 먹히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성녀의 힘은 제한된 것이다. 성력을 쓰면 쓸수록 나이를 먹고, 나아가 일찍 죽게 된다. 성녀가 마흔만 돼도 차대 성녀로 갈리는 것은 이 때문인데, 믿지 못하겠다면 신전 신관들이 증언할 터다.”

자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원인과 결과가 철저히 조작됐지만, 그 인과는 재상들이 듣기에 매우 그럴듯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우스라의 카에티는 그걸 알기에 성녀를 죽이기 위해 병을 퍼뜨렸다. 성녀께서 아픈 자를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저지른 짓이지.”

“그게 사실입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의도가 매우 사악하며, 투기와 질투로 인해 감히 사람이라면 하지 못할 짓을 벌였다!”

“아니에요, 성녀를 끌어내고자 한 건 맞지만, 그건 성녀의 책무를 다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녀는 누군가의 여자로 사는 건 안 되…!”

“성녀를 끌어내고자 한 건 인정하는 건가? 그러기 위해서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거지?”

자레스가 말을 잘랐다.

“우스라의 카에티, 너는 인간도 아니다! 증인의 증언이 명확하고 증거 역시 확실하니, 이제 처벌을 내리겠다!”

“억울합니다! 이 상황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킨 건 자레스 황자예요!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카에티의 말이 사실이었으나, 이미 자레스의 편으로 돌아선 재상들은 못 들은 척하였다. 이미 그들은 한배를 탄 뒤였으니, 카에티가 호소해 봤자 그녀만 더 고통스럽게 죽을 뿐이었다.

“그 말 잘했다, 우스라의 카에티.”

돌연 자레스가 다가오더니 카에티 앞에 한무릎을 꿇고 앉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래서 뭘? 그 판을 깔아 준 건 너다.”

“……!”

“네가 전염병을 퍼뜨리지 않았으면, 나 역시 이렇게 빨리 황위를 찬탈하진 못했다. 고맙다, 카에티.”

“이 악마!”

“네 말이 맞다, 카에티. 나는 악마 같은 놈이야. 그러니 너처럼 사악한 여자 대신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나서 구원을 받아야 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레스가 일어나 명을 내렸다.

“우스라의 카에티에게 생매장형을 명한다!”

“자레스 황자!”

“무례한 그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많은 이들이 지켜볼 수 있도록 이 즉시 마디나에서 가장 큰 길 한복판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재상들이 일어나 일제히 그의 명에 찬성한다는 의미로 오른손을 반대쪽 어깨에 댔다.

카에티가 악을 썼으나 바로 재갈이 채워지면서 입이 막혔고, 다음 날 아침 자레스의 명대로 마디나의 어지러운 시장 골목 한복판에 있는 광장으로 끌려갔다.

미리 전령을 보내 놨는지, 구덩이가 이미 파여져 있었고 구덩이 옆에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황궁에 전염병을 퍼뜨린 장본인이 끌려온다는 말에 수많은 마디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카에티가 줄에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진 채 예니센 대장에게 끌려 나타나자 그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부었다.

“저년이 황궁에 전염병을 퍼뜨린 장본인이라며?”

“세상에, 일부러 병에 걸린 노예를 골라 데려왔대! 성녀님을 황궁으로 끌어내서 유가 황자가 납치하게 하려고 협력한 거래!”

“새 황제께서는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을 구하려고 성녀님을 모시고 온 거지!”

“천하에 몹쓸 년!”

그게 아니라고, 카에티가 울부짖었지만 모든 절규는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넘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린 건 자레스였지만, 일부러 병을 퍼뜨리고 많은 이를 죽게 한 죄는 온전히 카에티의 것이다. 하지만 카에티는 그 죄도 인정할 수 없어 억울하기만 했다.

‘아니라고! 모두 자레스 그놈이 저지른 짓이야! 성녀와 흘레붙으려 판을 짠 거라고! 억울해! 난 억울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몸부림을 치는 카에티를 향해서 돌 하나가 날아왔다.

날아온 돌이 정확히 이마에 맞는 바람에 카에티는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는데, 분노가 전염되면서 여기저기서 돌이 더 날아왔다. 몇 개는 맞았고 몇 개는 빗나갔지만, 카에티를 위협하기엔 충분했다.

“어허! 형을 집행하는 중이다!”

예니센 대장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돌팔매질이 멈췄다.

“이를 어쩌나. 여기엔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예니센 대장이 흘흘 웃으며 카에티를 수레에서 끌어내렸다. 병사들이 그녀를 구덩이 안에 던져 넣자, 대장이 처박힌 카에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를 묻지 말고, 그냥 두고 가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계셨다.”

‘뭐?’

“황제 폐하께서는 너의 처결을 백성들에게 맡기셨다. 네게 죄가 없다면 사람들이 너를 꺼내 풀어 줄 것이고, 그 반대라면 알아서 처벌을 내리겠지.”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몰라!’

카에티는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거짓이 아닌지 정말로 예니센들은 그녀를 내버려 둔 채 가 버렸고, 그 대신 구덩이 위로 사람들이 속속 머리를 내밀었다.

‘나 좀 풀어 줘! 내 입에 물린 재갈만 풀어 주면 모든 진실을 말해 줄게!’

카에티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눈으로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 눈빛을 알아주지 않았다.

대신 어떤 소년이 그녀를 향해 주먹만 한 돌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카에티는 얼굴을 맞고 쓰러졌다.

광대가 부러지면서 카에티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돌이 몇 개 더 날아왔고, 쌍욕도 함께 날아왔다.

“여러분, 황제 폐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이년을 용서해 줄지 몰라도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 소리를 지르자 여럿이 화답했다.

“내 동생도 황궁에서 일했는데, 병에 걸리는 바람에 궁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죽었어!”

“내 아내도 그랬소!”

“병이 황궁에만 퍼져서 다행이지, 새어 나왔다면 우리들도 위험했던 거 아니에요!”

“맞아, 맞아!”

‘아니야. 모두 자레스의 거짓말이야. 성녀 때문에…. 그래, 성녀도 사실은 자레스가 끼고 있는 게 틀림없어! 유가가 데려갔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하지만 이젠 재갈이 풀린다 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광대뼈가 부서지는 바람에 입을 놀릴 수도 없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이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생매장도 아깝다! 저년은 산채로 화장을 해야 돼!”

“굳이 광장에 묻으라는 이유가 뭐야?”

“그건, 죽어서도 오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게 하라는 폐하의 명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던 병사 하나가 외치자 아낙네가 흙더미에 꽂아 놓은 삽을 집어 들었다.

“오, 그런 뜻이었구먼? 그럼 내가 한 삽 보태야지!”

카에티의 머리 위로 후두둑 흙 한 덩어리가 떨어졌다. 한둘이 아니었다. 카에티가 겁에 질려 쳐다보니 어디서 난 건지 다들 삽을 한 자루씩 들고 와서 열심히 흙을 던져 넣고 있었다.

‘내 말을 들어줘! 이건 다 음모야! 이 어리석은 것들아! 다 속고 있는 거라고!’

“어디서 눈알을 부라려? 저것의 눈부터 덮어야겠네!”

아낙네가 외치자 너도 나도 카에티의 얼굴을 향해 흙을 퍼서 던졌다. 여러 사람이 거드니 순식간에 흙더미가 쌓였다. 카에티가 몸부림을 치며 흙을 파헤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구덩이를 둘러싸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흙을 퍼 넣고 있었고, 어떤 자들은 화장실에 쌓아 둔 오물 더미를 가져와서 던지기도 했다.

카에티가 흙더미를 파헤치며 일어나려 애를 썼지만, 그보다 흙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구덩이는 그녀의 머리보다 깊어서 포박되지 않은 상태라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런 마당에 흙이 허리까지 차자 이젠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됐다.

‘안 돼!’

삽시간에 흙이 그녀의 목덜미까지 찼다. 숨을 쉬려 고개를 내밀었지만, 보람도 없이 그녀의 얼굴 위로도 흙더미가 쌓였다.

‘자레스…! 성녀!’

마지막으로 카에티가 두 사람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지만 저주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한 겹, 두 겹, 흙이 쌓이고 곧 구덩이가 다 메워졌다. 그렇게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한 시간이었다.

삽시간에 생매장을 끝낸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덩이를 메운 흙을 밟아 단단히 다지기까지 했다.

“지독한 년이니 흙을 뚫고 나올지도 몰라요!”

“큰 돌을 갖다 놓읍시다! 지년이 아무리 용을 써도 바위를 밀고 올라오진 못하겠지!”

“그럽시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 어느 집 뒤뜰에 놓여 있던 커다란 장식석을 가져왔다.

구덩이 위에 장식석을 내려놓은 사내들이 이번엔 아내들을 집으로 보내 술을 가져오게 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한잔합시다!”

“아, 좋지! 황제 폐하 만세시다!”

“새 황제 폐하 만세!”

새 황제를 향해 만세를 외치던 자들이 너도 나도 술과 안주를 가져와 잔치를 벌이는 동안, 카에티는 그들의 발아래서 반나절을 버티다 결국 숨이 끊어졌다.

카에티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

카에티가 생매장된 구덩이엔 그 뒤로도 쭉 장식석이 놓여 있게 됐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거기에 침을 뱉고 오물을 버렸다. 두고두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남은 가족들은 모두 노예가 됐고, 우스라 부족장과 제임을 비롯한 우스라 일족 모두 아와드에 있는 식민지로 보내졌다.

악투는 아와드로 보내지기 전에 약물 중독의 부작용으로 죽어서 아와드행은 피했는데, 어차피 악투는 오래 버틸 건강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게 오히려 행운이었다.

우스라 일족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

자레스가 새 황제가 된 뒤 많은 일이 있었다. 대대적인 사면이 이뤄졌고, 늙은 노예들은 자유민으로 풀어 주는 법률이 제정됐다.

어차피 나이 든 노예들은 일할 기력은 떨어지고 밥은 축내는 존재기에 귀족들은 이 법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로 노예들은 이 법을 반겼는데, 나이가 들면 노예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찾아올 자유를 위해 노예들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았다. 무력함을 벗어나 제 의지를 갖고 일했는데, 그건 노예들이나 주인에게나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생산이 늘어나고 경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 서민들의 세금이 감면되고, 상인들에겐 불필요한 각종 규제를 풀어 주자 새 황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됐다.

그 반면에 신전에 대해선 가혹한 징계가 가해졌다.

이미 1,5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전이 쌓아 온 부패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부패를 척결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신전에 바치던 신전세를 폐지해 버리니 신전들의 돈줄이 말랐다.

“신은 인간들의 믿음을 원하지 돈을 바라지 않으신다!”

자레스의 선언 아래 백성들의 등골을 휘게 하던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에 더하여 중앙 귀족이나 지방의 영주들에겐 신전에게서 뺏어 온 권리와 금전을 나눠 줬다.

그 모든 일들이 자레스가 즉위한 지 단 두 달 만에 단행됐다.

귀족이나 서민들이나 새 황제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신전의 반발이 컸지만, 그에 대해 자레스는 신전 폐쇄로 답했다. 자레스는 타협을 몰랐는데, 그런 상대와 대적하는 건 의외로 어려웠다.

자레스는 오히려 새로운 신학자들을 모아들여 교리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그들은 머지않아 메타의 역사가 잘못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메타와 칼리크가 뒤바뀌었다는 진실을 알리게 될 테지만 그건 꽤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아직은 1,500년간 이어 온 대중의 믿음을 한꺼번에 뒤바꾸긴 어려웠다.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지난 후에 한 번 더 큰 개혁이 이뤄졌다.

수도를 마디나 대신, 그보다 좀 더 북쪽 내해에 위치한 카라로 옮긴 것이다.

카라는 카비르 제2의 도시로 원래 200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카비르의 황조가 바뀌면서 수도를 마디나로 옮겼지만, 다시 수도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인구도 많았고,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중심이었기에 부유한 도시다.

대해와 연결된 내륙의 바다를 끼고 있어서 해양자원도 풍부했고, 도시 곳곳에는 수도와 정교한 배수로가 건설돼 있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구시대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 내 시대는 새 도시에서 시작될 것이다.”

황명하에 수도를 옮기는 대역사가 시작되는 동안, 자레스는 재상들과 황궁의 식솔들을 이끌고 아직도 건재한 옛 황궁에 입성했다.

그 곁에 아넬도 함께 있었다.

***

카비르의 건축술은 뛰어났다.

오랫동안 1대륙의 패자로 군림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카비르는 과학과 문화의 수준이 높았고, 중부 대륙과 달리 기술자를 우대했다.

지은 지 200년이나 된 궁인데도 무너진 데가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단장된 황궁으로 자레스와 아넬이 들어섰다.

늠름하고 건장한 자레스와 우아한 아넬.

비록 아넬은 얼굴 아래쪽과 머리를 가리는 베일을 쓰고 있었지만, 미모가 베일 너머로 솔솔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반투명한 베일 안쪽에서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사하니, 마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 보였다.

아무도 그녀가 성녀인 걸 몰랐지만 그 후광이 아넬을 성녀처럼 성스러워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황제와 아넬을 맞이하기 위해 내정 앞길에 도열해 있던 궁인들이 일제히 감탄성을 흘렸다.

“두 분 다 선남선녀시군요. 황제 폐하도 잘생기셨지만, 후궁님도….”

“쉬잇, 후궁님이라 부르면 안 돼. 새 황제 폐하께서는 저분을 후궁이라 부르는 걸 굉장히 싫어하셔! 아실이라 불러!”

아실은 고귀한 사람이란 뜻의 카비르어였다. 성녀는 유가가 납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까닭에 아넬의 신분은 숨겨졌고, 그녀는 새로운 호칭을 얻게 됐다. 그게 아실이었다.

“예? 후궁을 후궁이라 부르지 뭐라고 해요?”

“나도 저분이 누군지는 모르는데, 어쨌든 황제 폐하께서 목숨처럼 아끼시는 분이래. 황자 전하실 때부터 곁에 뒀다나.”

“그럼 후궁 맞잖아요?”

“아냐,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지는 않았는데 카라로 수도가 완전히 옮겨지면 혼인을 하실 모양이야.”

그러더니 그녀가 주위를 살피다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리고 이건 옛날부터 황제 폐하를 모신 분한테 들었는데, 폐하께서는 아실을 황후로 맞이할 거래.”

“예에?”

카비르의 관습상 황제는 후궁은 여럿 둬도 황후는 두지 않는다.

이미 황자 시절에 결혼한 부인이 있다 해도 황제에 오르는 순간 모두 후궁으로 취급되는데, 이는 정쟁을 걸쳐 한 사람만 살아남아 황제가 되는 전통 때문이었다.

황후를 인정하면 황후가 낳은 아이가 자동으로 황태자가 되니, 황자들끼리의 피 튀기는 싸움은 없어진다.

“뭐야, 그럼 가장 뛰어난 황자가 밀려날 수 있잖아요. 황후의 몸에서 났다는 이유만으로 다음 대 황제가 되면 제국의 미래가 어떻게 돼요?”

“그야 나도 모르지. 어쨌든 폐하께서는 그 정도로 저분을 사랑하나 봐. 하긴 왜 아니겠어. 미모가 베일을 뚫고 나오던데. 얼굴을 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정말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래.”

“우와, 얼마나 아름답길래요?”

“궁으로 들어오시면 어차피 우리가 모시게 될 텐데 곧 볼 수 있지 않겠어? 하여간 너희들, 절대 아실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안 돼! 알겠니?”

“네, 명심할게요!”

***

“아름다워요.”

황궁의 시녀와 하녀, 노예들이 아넬을 두고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동안, 아넬은 내정과 황궁을 돌아보며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카라의 황궁은 카비르보다는 중부 대륙의 양식에 가까웠다. 계단과 난간은 전형적인 중부 대륙풍이었고, 건물의 외관 역시 그랬다.

마디나의 황궁처럼 정교한 타일 벽은 없었지만 그 대신 화려한 랑브리와 샹들리에, 줄지은 회랑과 기둥, 금과 은, 크리스털로 만든 조각 장식들로 가득 채워져 사치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비록 규모는 마디나 황궁보다 훨씬 작았지만, 화려하기는 이쪽이 더했다.

그녀를 위해 준비된 내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 카비르의 풍습으로는 후궁들은 궁을 따로 쓰고 황제가 부를 때만 황제의 침실로 데려 왔지만, 자레스는 두 사람의 침실을 아예 합쳐 버렸다.

침실 옆에 아넬의 내실을 주고 값진 가구와 책과 보석을 채워 넣는 대신, 적어도 밤에는 반드시 함께 지내도록 했다.

카라의 황궁을 책임지는 담당자들이 깜짝 놀랐지만, ‘아실’에 관한 한 새 황제의 고약한 성벽이 이미 소문이 났기에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 그냥 못 본 척했다.

아넬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그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은 카비르 풍의 가구 대신 아넬의 고향인 탈라사에서 들여온 것을 놓았고, 방의 장식도 탈라사 풍을 따랐다.

비록 탈라사에서 지낸 기억은 거의 없었지만, 탈라사나 이렌시아나 지역 색은 비슷했기에 아넬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염병에서 간신히 살아난 마디나 황궁의 사람들은 이리로 따라오지 못하고 마디나에 남겨졌다.

심지어 자레스와 황자궁 사람들도 대부분 갈아치워서, 카라로 함께 온 건 새로 선발된 시녀들과 노예들, 그리고 칼리크 교도들이었다.

물론 사이야와 말 못 하는 하녀, 노예 소년 사브와 샤이크도 따라왔다. 사브와 샤이크는 노예에서 해방되어 높은 봉급을 받는 정식 시종이 됐고, 사이야는 시녀장으로 승격했다.

따지고 보면 아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다 봐야 해도 좋았다. 그런데도 그 뒤에서 죽어 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죄의식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다.

‘나 혼자 괴로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방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은 아넬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섬기는 신을 잃었다. 성력은 있지만 이제 쓸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더하여 메타의 성녀로 살기도 싫었다.

그녀가 힘을 베풀 때마다 사람들은 메타를 찬양할 텐데, 그러느니 차라리 악신으로 조작된 칼리크 신도라고 주장하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성녀로 나서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아넬은 그렇게 결심했다.

넘치는 행복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자레스가 퍼붓는 사랑만 받아먹고 사는 건 그녀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알면 자레스가 화를 낼 게 뻔하지만,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아넬은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먼저 이 카비르가 돌아가는 정치 구조부터 알아야겠다. 그래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황궁에선 아넬이 염두에 두고 있던 이 카비르 정치 구조 중 최상층에 해당하는 재상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내정의 한편에 회의가 열리는 건물 콘페란스가 있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카라에 함께 온 재상들은 굳은 얼굴을 한 채 국무 보고를 했다.

“폐하, 타네시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황제 폐하와의 독대를 요청하길래, 제가 그를 거부하고 먼저 만나 봤습니다만.”

“접견 내용을 보고하시오, 외무 재상.”

“달아난 유가 황자가 타네시로 망명했다고 합니다. 타네시에서는 카비르가 성녀님을 억류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며, 성녀를 내놓으라고….”

“터무니없군. 성녀는 자기가 데리고 있으면서 이 카비르에 성녀를 내놓으라고 해?”

자레스가 코웃음을 치며 일갈했다.

“유가가 협상을 했을 것이다. 성녀는 어디다 숨겨 놓고서, 카비르를 쳐서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주면 성녀를 주겠다 했겠지.”

알 수 없는 시선들이 교차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자레스가 주도면밀하게 반란을 성공시킨 걸 보면 성녀는 정말 자레스가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가가 데리고 도망쳤다 둘러대고 합법적으로 성녀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황제가 황자이던 시절부터 애지중지 아끼는 후궁이 있다고 했지. 금발 머리에 대단한 미인이라고….’

마디나 궁정에서 일리파스와 자레스가 성녀를 두고 대결했을 때, 황궁 사람들이 봤던 성녀의 외모와 비슷했다.

하지만 반대로 자레스의 말대로 유가가 카비르의 황제가 되기 위해 타네시와 거래를 했을 수도 있다.

이미 성녀를 주는 조건으로 옛 황제에게서 황위를 받으려 했을 정도니, 자레스의 의견은 재상들이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듯했다.

“아니면 카비르를 치기 위해 타네시가 성녀 핑계를 대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과연 그러합니다. 타네시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항상 호시탐탐 카비르를 노리고 있었지요.”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그 이유로는 누가 봐도 이쪽이 적당했다.

일국의 황제가 여자 하나 때문에 반란을 넘어 전쟁까지 불사한다고 하면 그 누가 반길까.

어디까지나 전쟁은 타국의 야욕 때문에, 또는 배신자의 탐욕과 이간질 때문에 일어나야 했다.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전운(戰運)은 무르익었다. 어차피 일어나게 될 터라면 철저히 준비해서 이겨야 했고, 나아가 카비르의 국경을 더 확장해야 했다.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지 50년이 넘었지. 평화가 너무 길었어. 1대륙의 나라들은 그동안 카비르가 얌전히 참아 줬다는 걸 알아야 할 때가 됐소.”

국방 재상이 긴장하였고, 대재상과 다른 재상들도 눈치를 주고받았다.

“군제를 재편하고, 지방 영주들로부터 군대를 차출하도록. 재무 재상은 세제 개혁안을 내놓고, 식민 재상은 다른 대륙의 식민지로부터 병력과 자원을 충당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시오.”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꾼다. 국경, 국운, 그리고 권력.

전쟁에서 이기면 황권이 강해지고, 군대를 차출당하고 군자금을 대야만 하는 지방 영주들의 세력은 기울게 된다.

전쟁이 없던 평화의 시기 동안 조금씩 입김을 발휘했던 귀족과 지방 영주들은 예전보다 휘청거리게 될 것이다.

물론 자레스는 전쟁에 이길 자신이 있었다.

타네시 역시 작은 국지전 외에는 큰 전쟁을 치른 지 오래되었다. 아무리 전쟁과 전투는 다른 거라지만, 자레스는 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대규모의 전쟁을 지휘할 능력까지는 없었지만, 적어도 군부에 어떤 자가 유능하고 어떤 자가 무능한지는 알고 있었다.

부패와 비리로 높은 지위를 얻은 자, 재능을 갖고도 단지 줄을 잘 못 서서 한직에 머무르는 자.

모두 갈아엎을 것이다. 전쟁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

“아실은 어디에 계시지?”

내실에 찾아온 자레스는 아넬이 거기에 보이지 않자 시녀에게 물었다.

“후원에 나가 계십니다. 카라의 이른 봄 장미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바로 아넬이 있다는 후원으로 갔다.

중앙 대륙풍으로 꾸며진 후원엔 정원수를 다듬어 만든 정교한 미로가 있었다.

미로를 넘어가면 한복판에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주변으로는 빨간 장미와 노란 튤립이 교묘하게 배치돼 있었다.

아넬은 그 연못 앞에 있었다. 자레스가 나타나 그녀를 부르자 눈치가 빠른 사이야가 시녀들을 휘몰아 미로 정원 쪽으로 사라졌다.

“사이야는 혹시 눈이 보이는데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던 아넬이 문득 중얼거렸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 들었어. 그래서 다른 감각이 더 비상한 거다. 남들보다 배는 더 노력해서 사물의 위치를 숙지하고 지리를 외우는 거야.”

“신의 은혜는 저런 분이 받은 것 같습니다.”

“칼리크의 후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쉬잇.”

자레스가 웃자 아넬이 누가 들을까 겁나 얼른 목소리를 줄였다.

“이리 와.”

자레스가 그녀의 손을 끌고 연못을 지나 후원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가 마치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줄을 세워 심어져 있는 나무들의 행렬마다 그 끝에 벤치가 놓여 있거나, 작은 연못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새 소리 말고는 사람의 인기척이 없었고, 고요한 적막 속에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다워요.”

“당신이 제일 아름다워.”

연못가 의자에 그녀를 앉힌 자레스가 아넬의 금발 머리칼 끝을 말아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낯부끄러운 말도 익숙해지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덩치 큰 남자는 그의 애정에 맞춰 반응해 주지 않으면 금세 시무룩해지기에, 아넬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맙다고 답했다.

“저기, 자레스.”

뭐라 입을 열려는데 자레스가 입을 맞췄다. 입술에 한 번, 뺨에 한 번, 이마에 한 번. 그러다 다시 돌아와 또 입술. 말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아,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말해. 대신, 내 무릎 위에서.”

안 들어주면 계속해서 키스할 기세다. 아넬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뒤에서 자레스가 정답게 끌어안았는데, 탄탄한 허벅지 사이로 벌써 뭉치기 시작한 살덩어리가 느껴졌다.

“구호소를 설치하고 싶어요.”

“누구를 위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싶어요. 제가 직접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지자, 아넬이 서둘러 덧붙였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아파도 의원을 찾아가지 못해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무료 구호소를 짓고 싶은데, 어떨까요?”

“…생각해 보지.”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말고 들어줘요. 카비르는 부유한 나라잖아요. 황실 재산만 해도 한 나라를 사들일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중에 일부만 풀어서 재단을 만들면 안 될까요? 재단에 기금을 만들고 그 이자를 운용하면 무료 구호소를 운영할 수 있을 거예요.”

이렌시아나 탈라사 같은 데선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는 구호소들이 꽤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식량만 나눠 줄 뿐, 무료로 의술을 베푸는 곳은 없었다. 아넬은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구호소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자레스는 그녀의 청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넬이 원한다면 맨몸으로 북쪽 최극단의 방벽인 아야발 산맥 정상에 올라가서 셔벗을 만들어 올 그였지만, 그녀가 이런 쪽으로 신경을 쓰는 건 싫었다.

‘대체 왜 고생을 사서 하지?’

자레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생을 베풀고만 살았으니 이젠 좀 편하게 살아도 될 터다. 그런데 아넬은 도무지 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실무야 담당자가 알아서 하겠지만, 아넬이 그런 일에 나서는 것 자체가 싫었다.

행여나 구호소를 들여다보다 병자를 보고는 또 치유를 하겠다고 나설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제발요. 들어줘요, 자레스.”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넬이 열심히 부탁했다.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라,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빡이며 그의 목덜미에 매달리자 비로소 반응이 돌아왔다.

“오늘 밤, 내가 하라는 거 다 들어주면. 그럼 허락해 줄게.”

자레스가 짓궂게 속삭이자 아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치사해!’

그녀가 아는 몇 안 되는 욕 중에 몇 개가 내면에서 메아리쳤다.

이 남자를 대체 어쩌면 좋을까.

대범하고, 냉혹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졸렬한 남자. 아니, 사실은 무서울 정도로 지독한 소유욕을 가진 남자.

그런데 그가 얄미운 한편으로, 자레스가 하고 싶어 하는 짓이 대체 뭔지 스멀스멀 호기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번 발을 딛자, 다시는 돌아 나오지 못하게 된 생경한 감각의 안쪽. 또 다른 문이 열릴 것 같다는 기대가 강하게 솟구쳤다.

아넬이 못 이기는 척 눈을 꼭 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레스가 킬킬거리며 웃더니, 곧 그녀의 입술을 짓이기듯 집어삼켰다.

***

“우, 우음….”

그날 밤 자레스는 예고를 실행에 옮겼다.

아넬은 커다란 침대 한복판에 벌거벗은 채 눕혀졌다.

대리석처럼 희고 매끈한 나신이 성찬처럼 펼쳐져 있었고, 역시 벌거벗은 상태인 자레스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입을 맞췄다.

그러다 문득 자레스가 상반신을 일으킨 채 아넬을 들여다봤다.

흰 몸 여기저기에 그가 남긴 붉은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버들가지처럼 연약하고 가냘픈 몸은 자꾸 이빨로 물어뜯어 마구 상처를 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했다.

“아름다워. 눈이 멀 정도로….”

자레스가 탄식을 토해냈다. 아넬의 온몸에 피어난 붉은 열꽃마저 사랑스러웠다.

벌어진 앙가슴에 살짝 입을 맞춘 자레스가 이윽고 다시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짓눌렀다.

꿀럭꿀럭 혀가 엉키고 서로의 입술 안을 한 바퀴 돌다 나온 타액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였더라….’

혼미한 와중에도 아넬은 그걸 떠올리려 애썼고, 자꾸만 다시 쳐들어오는 자레스를 밀어내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초저녁부터 시녀들이 온갖 꽃잎을 말려 얻어 낸 입욕제를 풀어 목욕을 시키더니, 입은 것 같지도 않은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혀 침실로 들여보냈던 게 기억났다.

그러니까 시작은 아주 한참 전이었던 것이다.

자레스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침실은 낮에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기에, 아넬은 한 서른 명은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침실 안을 서성거리며 구경했다.

아넬이 쓸 내실은 호화롭게 꾸며 놓고, 정작 침실은 검박했다. 셋이 누워도 될 정도로 넓고 튼튼한 사주식 침대를 빼고는 가구가 거의 없다.

바닥에 깔린 비단으로 짠 카펫이 이 방에서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진한 감색 바탕에 금실로 원형의 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아넬은 문양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은 원형으로 돌아가며 수를 놓은 카비르 문자라는 걸 알아챘다.

“나의 생명, 내가 살아가는 이유, 천국의 강을 흐르는 나의 포도주여.”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아넬은 감탄하며 계속해서 글자를 읽어 나갔다.

“나의 봄날, 나의 기쁨이요, 내 침실의 빛. 그대의 문 앞에서 당신을 찬양하리. 나는 사랑에 미친 이라, 그리하여 행복하도다. …나의 아넬. 헉!”

시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아넬이 입을 막으며 벌떡 일어났다.

‘설마?’

그 시커먼 위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썼을까?

믿기지 않았지만, 자레스가 이런 사랑시를 다른 자에게 쓰게 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를 증명하듯 문 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레스.”

아넬이 얼굴을 붉히며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번쩍 들렸다. 자레스가 버둥거리는 그녀를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그 뒤로 시작된 키스가 정신 못 차리게 계속된 것이었다.

시간이 잊혔고, 다음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었다. 이 세상에 몸을 겹친 자레스와 그녀,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달라붙은 맨살이 땀으로 축축해지고, 너무 세게 끌어안은 나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는데, 벌써부터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제발, 자레스….”

“아직, 아직이야. 하아…, 아넬.”

간신히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애원했지만, 자레스는 들어주지 않았다. 애무가 아래로 내려갔고, 젖가슴 끝을 물린 아넬은 뒤로 몸을 젖히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분명히 키스만 하다 끝내진 않을 거다. 본격적인 건 이다음에 벌어질 텐데, 이젠 그게 무서워졌다.

“제발. 힘들단 말이에요.”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체력이 달랐다. 심지어 귀하게 자란 아넬은 힘든 일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웬만한 여자들보다 약했다.

아넬이 달을 따다 달라 하면, 자레스는 연금술사를 동원해 달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 내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침대에서는 절대 아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깃털보다 무거운 건 들게 하지 않겠다더니, 침실에선 연약한 그녀의 체력을 쪽쪽 빨아먹었다.

“당신은 그냥 가만있으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할게.”

‘아까는 하라는 거 다 하라더니?’

이상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려던 아넬이 순간 비명을 질렀다.

“헉!”

자레스가 아넬의 다리를 열며 그 사이로 내려갔다.

황금빛 수풀 사이를 헤치고 항상 그가 자극하던 여린 살점을 드러내자 아넬은 기대심에 살짝 몸을 떨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의 예민한 곳에 닿은 것은 그의 굵직한 손가락이 아니라 말캉한 혀였다. 자레스가 마치 사탕을 빠는 것처럼 그곳을 아래에서 위로 길게 핥아 올리자 아넬이 몸서리를 치며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앗!”

손으로는 만졌지만 설마 혀로 그곳을 핥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민감한 곳에 촉촉한 살이 닿자, 그곳에서 뒤로 넘어갈 것처럼 세찬 쾌감이 밀려왔다.

“아, 하, 하, 하지 마…. 응!”

아넬이 허우적거렸다. 자레스를 밀어내려 그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신히 입술을 뗀 자레스가 으르렁댔다.

“하라는 거 다 한댔잖아.”

“하…라는 게 이거였어요?”

“그래. 내가 뭘 하든 꼼짝 않는 것.”

“아, 하지만… 아!”

또다시 밀려든 강렬한 자극에 아넬이 허리를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아, 아앗!”

아넬이 그만 견디지 못하고 두 눈을 손으로 가리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커다란 희열이 그녀를 덮쳐 왔다. 지금껏 그녀가 알아 왔던 감각이 파도였다면, 이건 해일이었다.

괴로웠다. 끔찍했다. 그런데 너무 좋았다.

아귀처럼 매달려서 더 달라고 조르고 싶어졌고 안 그래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그에게 더 큰 기쁨을 달라고 재촉하고 싶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애처럼 떼를 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사실은 그게 자레스가 가장 바라는 거였는데, 아넬은 그걸 모르고 환희를 밀어내려 이를 악물고 꾹꾹 참았다.

그 모습이 자레스를 자극했다.

들은 바로는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 했다. 너무 좋다 못해 미칠 정도로 몸부림을 친다더니, 아넬은 오히려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살짝 약이 올랐다.

혹시 아무 느낌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가 서툰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숱하게 안는 동안 아넬이 어떨 때 좋아하고, 어떨 때 자지러지는지 잘 알게 됐는데 지금 이건 명백하게 좋아하는 쪽의 반응이었다.

단지 부끄러워서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가만히는 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넬이 말 잘 듣는 순진한 성격인 건 좋았다. 그러니까, 아넬은 계속 그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자레스가 계속해서 할짝거리며 예민한 살점을 핥아 올렸다. 그것도 모자라 양 엄지로 조갯살을 가르더니 더 깊은 곳에 자리한 핵심을 혀끝으로 찔렀다.

아넬은 거의 자지러졌고, 온몸이 돌덩이처럼 뻣뻣해졌다.

아래쪽에서 짜릿한 전율이 흐르며 단숨에 벌어진 질 입구에서 왈칵 꿀물이 흘러나왔다.

“아, 하아, 아아앗!”

신음이 마치 악기의 선율처럼 한 음, 한 음 높아져갔다.

미칠 것 같았다. 예전에도 희열을 경험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달랐다. 몸이 녹는 것 같고, 동시에 온몸이 떨리면서 머리 위에 있는 아득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자레스는 얼굴을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렸다. 계속 공략하고 있던 곳보다 더 깊은 곳. 그가 늘 닿고 싶어 괴로워하던 태초의 근원.

회음부로 이어지는 긴 고랑을 자레스의 혀가 가르며 내려갔다.

자레스가 뭘 하는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아넬이 곧 이어진 침입에 경악했다.

자레스가 질 입구를 비집고 그 안에 혀를 박은 것이다.

“꺄아아악!”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같은 물음이 머릿속을 백만 바퀴 도는 것 같았다.

온몸을 파고드는 짜릿함에 몸이 뻐근해질 정도로 굳었다. 제 몸을 어찌할 바를 몰라 아넬은 얼굴을 가린 채 연신 비명을 질렀다.

그럴수록 자레스는 더욱 자신감을 얻어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속살은 그 안을 적신 시큼한 애액 때문에 시고 비렸다. 하지만 자레스에겐 천상의 맛처럼 달았다.

아넬의 사랑을 확인한 뒤로, 아니 그 전부터 품은 욕망은 그 안에서 너무 단단하게 굳어서 거의 화석이 돼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환희의 맛을 확인이라도 해야 응축된 덩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자레스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혀를 밀어 넣고, 질 안을 휘저으며 내벽 여기저기를 찔렀다.

“으흐흐흐흑!”

결국 견디다 못한 아넬이 울음을 터뜨렸다.

희열이 몸을 후비고 들어와 불꽃을 일으키며 크게 파열했다.

끔찍한 기억밖에 없던 그곳이 부드러운 것으로 채워졌다. 그 안에 새겨졌던 고통이 밀려나면서 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득함만이 남았다.

자레스가 끈덕지게 밀어 넣는 혀끝에 아넬은 농락당했다. 그가 내벽을 핥고 혀끝을 찔러 넣을 때마다 아넬은 괴로워 비명을 질렀다. 쾌감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자레스는 그녀를 태린을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였다.

“아, 아아…. 헉! 자, 자… 아응!”

아넬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금단의 선을 넘은 게 아닐까 하던 걱정이 회귀 전의 기억처럼 아득해졌다.

그동안 느껴 왔던 절정의 선이 한꺼번에 떠밀려 올라가면서, 갑작스럽게 온몸에 전율이 밀려왔다.

아넬은 그 격정의 끝에서 끝내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파열하고 말았다.

“하앗….”

아넬의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동안 아래쪽에 머물러 있던 자레스가 올라와 그녀를 끌어안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넬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더니 이윽고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올리고 물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건 싫어요.”

불공평했다. 자레스 역시 그녀와 동침할 때마다 절정을 맞긴 했지만, 그 크기가 과연 그녀와 같을지 알 수 없었다.

아넬의 기쁨이 점점 커진 걸 생각하면, 아마도 자레스 역시 더 큰 환희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가르쳐 줘요. 나만 좋은 건 싫어요.”

그녀가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매달렸다.

“나도 알고 싶어요.”

당신을 위해서란 말은 삼켰지만, 자레스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의 사랑이 더 커졌다. 그 크기는 지금이 가장 크다고 가늠하는 순간 어느새 더 부풀어 있었다.

“…가르쳐 줄게.”

자레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의 굵직한 손가락이 발갛게 부풀어 오른 아넬의 입술을 만졌고, 자레스는 싱긋 웃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사랑에 미친 이라, 그리하여 행복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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