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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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황궁의 문이 열렸다.

마디나의 시내는 일찍부터 일어나 자발적으로 길을 청소한 서민들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그에 더하여 성녀님을 맞이하겠다고 집집마다 알록달록한 장식을 달고 길에는 꽃을 뿌려 놓으니 마디나 전체에 꽃향기가 진동했는데, 마침내 그 사이로 아넬과 자레스가 나타났다.

“성녀님이 오셨다!”

성녀를 호위한다는 명분 아래에 자레스의 사병들이 앞뒤로 두 사람을 겹겹이 감쌌고, 그와 아넬은 마차 대신 말에 타고 마디나로 들어섰다.

베일을 쓰고 있어서 아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소문의 성녀임을 짐작하고 열광했다.

일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든 존재였다. 심지어 병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났다 하니 열광이 극에 달했다.

서민들은 2층 집 발코니에서 건물 옥상에서, 꽃잎을 뿌리고 오색 구슬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고 성녀를 찬양했다.

활짝 열린 황성 문 앞에선 근위병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이미 카비르에 성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감격해 마지않았다.

다만 그들은 자레스와 성녀를 호위하고 온 병사들은 가로막았다.

“사병은 열 명 이상 들일 수 없습니다, 전하.”

“특수한 상황이 아닌가. 성녀의 안전을 위해서다.”

“하오나 전하, 황명이 내려진 이상….”

“정 그렇게 나오면 오늘 성녀님을 입성시키지 않겠다.”

“전하!”

“근위대장, 그대도 알 테지만 이미 성녀님은 유가 황자에게 납치되는 수모를 겪은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을 겪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나? 황자들이 연합해 성녀를 뺏고자 한다면?”

“걱정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수가 많은데, 그들이 먼저 치료를 받겠다고 성녀에게 덤벼들면 성녀님을 누가 지키지?”

“그건 저희 근위대원들이….”

“그대들을 제일 믿을 수 없어.”

근위병들은 황제의 손발이나 마찬가지다. 황제가 성녀를 뺏을 흑심을 품고 있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기에, 자레스가 근위대장을 못 믿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입성을 거부하는 그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에 황족과 궁인들의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었기에 근위대장은 어쩔 수 없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면 병사들의 수를 반으로 줄여 주십시오.”

“안 돼.”

“그 정도면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근위병들의 수와 같으니, 저희가 함부로 손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수를 줄여 주셔야 합니다.”

“황자들의 호위병들이 가세하면 수가 더 많아지지 않나.”

“그럼 이렇게 하지요. 황자들의 호위병들은 움직이지 못하게 따로 모아 놓겠습니다. 각 궁마다 병기고가 있으니, 그리로 모아 놓고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게 가둬 두도록 하지요.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제야 자레스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 모든 조치가 취해지고 난 다음에야 자레스와 아넬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무하립과 절반의 병력은 황성 문 앞에 떨궈 놓은 뒤였다.

근위대장과 일단의 근위병들이 자레스와 아넬을 따라왔는데, 혹시나 자레스가 데려온 병력들이 다른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감시하려는 것이다.

절반은 황궁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레스의 사병을 상대하기 위해 남겨 놔야 했지만, 남은 병력은 자레스가 데리고 들어온 병사들의 수와 비슷했기에 근위대장은 어느 정도 안심했다.

성녀가 공식적으로 입성한 건 처음이었기에,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궁인들은 모두 나와 성녀를 환영했다.

전염을 염려하여 모두 열 걸음 이상 다가오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열성적으로 환호하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아넬은 얼굴을 붉히며 그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였다.

“일리파스와 스에반 황자는?”

“황자들은 모두 처소에 있습니다. 전하의 요청대로 병자들은 세 부류로 나눠서 모아 놨고요.”

퀴나에가 대답했다.

병에 걸린 근위대와 사병들은 모두 황궁 한복판에 있는 기도소에 모아 놓았다.

황녀를 비롯한 내실의 여자들은 일반인과 같이 모아 둘 수 없기에 내실의 한방에 모이게 했다.

남녀 하인과 노예들은 황궁에서도 북쪽에 있는 구석진 곳, 남루한 창고에 모아 놨는데, 카비르는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였기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병에 걸린 자들이 상당히 많군.”

“궁 밖으로 전염병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폐하께서 궁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덕분에 시정에는 병이 퍼지지 않았지만, 궁 안에 있는 많은 자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황제가 탐욕스럽긴 했지만 우둔한 자는 아니어서, 황제의 조처 덕분에 현재 전염병은 황궁 안에 한정돼 있었다.

물론 병이 퍼지는 동안 황제는 전염을 피해 궁을 도망치긴 했다.

황제는 현재 마디나에서 떨어진 남쪽 별궁에 피신해 있었는데, 자신은 몸을 빼놓고 궁인들은 위기 속에 방치해 놨다.

불가피한 조처이긴 했으나 궁인들은 황제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성녀의 등장은 그들에겐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구원이었다. 궁인들은 물론이고 전염된 근위대원들 역시 목을 빼고 아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준비는 됐나, 퀴나에?”

“물론이지요, 전하.”

퀴나에는 다행히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물론이고 자레스 황자궁의 식구들 대부분은 건강했는데, 이는 자레스 황자궁 식구들이 따돌림을 당한 탓에 다른 궁인들과의 교류가 적었던 탓이었다.

화가 오히려 복이 된 셈이다.

“모두 성녀의 치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아직 안 나타나냐며 불만을 터뜨리더군요.”

“은혜를 받는 게 당연한 놈들이군. 유가나 황자들은 안 왔나?”

“유가 황자는 아직 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인 듯하고요, 병에 걸린 황자들은 먼저 자기들 처소로 오라는 입장이네요.”

“백 년은 기다리라고 해.”

자레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모두가 예상대로 흘러갔다.

황자들은 탐욕과 이기심을 부리느라 산산이 흩어져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있었다.

시야는 좁아져 있었고, 각자의 활로를 찾느라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성녀님을 황자궁으로 모셔. 그리고 황자들은 내 황자궁으로 오라고 해. 듣지 않으면 치료는 없다고 전해라.”

“명을 받들지요.”

퀴나에가 생글생글 웃으며 허리를 굽히자, 자레스는 무칼라스를 불렀다.

“무하립에게 전령을 보내. 기도소부터 시작하라고.”

***

무하립과 칼리크 사병들은 황성의 문 앞에서 시위하듯 대기하고 있었다. 근위병들이 긴장한 채로 궁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궁성 수비대장은 사실 걱정이 컸다.

‘자레스 황자의 사병이 이렇게 많았던가.’

황자들은 당연히 궁밖에 사병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사병들의 대부분은 영지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대규모로 이동시키는 건 어려웠다.

그 정도의 병력이 이동하면 반드시 통과하는 지역마다 움직임이 포착되기 마련이고, 허가 없이 사병이 이동하면 반란으로 간주될 정도로 엄중히 처벌됐다.

그런데 자레스의 사병은 소리 소문도 없이 마디나에 나타났다. 그나마 절반을 떨어뜨려 놓고 갔는데도 그 수가 남은 황궁 수비 병력과 비등할 정도였다.

‘만약 이들이 작정하고 황궁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하지?’

불안함이 커졌다.

사병을 절반으로 줄이긴 했지만, 궁 안에 들어간 자레스의 병력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물론 궁 안 근위병들의 수도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 일부는 지금처럼 황궁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자레스의 사병들과 대치하기 위해 남겨졌기 때문에 병력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만 안 퍼졌어도, 불안할 수준은 아닌데.’

황제가 데려간 병사들만 있었어도, 황자의 사병쯤은 걱정할 상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병력들이 조각조각 흩어진 상태였다.

그를 생각하자 돌연 등골이 쭈뼛해졌다.

어느새 궁 문 앞에 군중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성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점점 많아져 갔다.

“성녀께선 안 나오실 거요! 황궁 사람들 치유하는 데만도 며칠은 걸릴 거라고! 어차피 황궁 밖에는 전염병에 걸린 환자가 없지 않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전염병자는 없어도 환자는 이 마디나에도 많다고요! 우리에게도 힘을 나눠 주세요!”

성녀가 있다는 소문에 황궁 문을 부수고 들어오던 그때와 같았다. 한 번 은혜를 받으면 두 번, 세 번을 원한다.

그들에게 성녀는 경모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공짜 의사이기도 했다. 먼 나라에 있을 땐 닿을 수 없는 대상이었지만, 눈앞에 보이고 욕심을 내기 시작하자 그 힘을 나눠 받는 게 당연하게 됐다.

“이거 안 되겠는데.”

이미 한 번 침입을 당한 적이 있는 수비대장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인가, 무하립의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뒤쪽에 있는 사병들과 수시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 수가 늘어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데? 아까는 백 명이 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군중이 늘어나서 사병들도 많아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수비대장은 일단 그렇게 생각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문을 닫아야겠다.”

대장이 곁에 있던 부하에게 넌지시 일렀다.

진작 닫을 걸, 생각이 짧았다. 성녀를 환영한다는 이유로 활짝 열어 놨는데, 군중의 수가 늘어나는 걸 보니 그들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면 늦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명을 내린 순간 갑자기 몰려선 서민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무하립이 먼저 튀어나왔다. 군중들의 전두에 서서 그들을 막아 주고 있던 자레스의 사병들이 오히려 그 선단에 서서 창검을 휘두르며 수비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쳐라!”

무하립의 명이 내려졌고, 수비병들이 무기를 꺼내기도 전에 자레스의 사병들이 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수가 늘어난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 아니었다. 군중들 속에 무장한 병사들이 섞여 들어와서 어느새 자레스의 병력이 수비병들을 압도하는 수가 되어 있었다.

카비르는 물론이고 아르드 전역에서 소집령을 듣고 모여든 칼리크 교도들이었다. 그들이 자레스의 새로운 칼이 되어 황궁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

황궁 기도소에는 병든 근위병들이 모여 있었다.

병이 심해져서 거동을 할 수 없는 자는 물론이고, 약간이라도 증상이 있는 자는 확실히 병이 들었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모두 보냈다.

그렇기에 황궁을 지키는 근위 병력의 절반 이상이 기도소에 모여 있었다.

성녀가 오신다니 본전을 제대로 챙기려 한 것이었다. 전염병이 들지 않았어도, 어디 한두 군데 아픈 곳이 있는 자는 다 기도소로 왔다.

병든 자끼리 모였다가 새로 전염될 수 있었지만, 어차피 성녀가 다 치료해 줄 거라 생각했기에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각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거나 메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성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성녀 대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무하립이 이끄는 자레스의 사병들이었다.

기도소는 3층으로 돼 있었고 내부에는 층마다 원형의 회랑이 있었는데, 그 회랑에 돌연 무하립과 칼리크 병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근위병들이 기도에 열중하고 찬양을 하느라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 기척을 죽인 그들이 회랑을 완전히 채우자, 무하립이 바로 외쳤다.

“공격!”

그를 들은 몇몇 근위병들이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는 사이 칼리크 사병들이 일제히 병사들을 향해 화살을 쐈다.

“아아아악!”

“피해, 기도소 밖으로 나가!”

비명과 고함이 빗발치며 기도소 안은 아비규환이 됐다. 성녀를 기다리던 차였기에 아무도 무장을 한 자가 없었다.

거동도 하기 힘든 터라 무기가 있었어도 저항할 수 없었다. 게다가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쏴 대니, 가지고 와 봤자 검이 고작인 그들로서는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기도소의 출입문으로 달려가느라 근위병들은 서로를 밟고 밀쳐 댔고 그 와중에 화살 비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동료들에게 깔려 죽었다.

나머지 병력도 무사하진 못했다.

출입구에는 무하립의 수하들이 매복하고 있어서, 문으로 튀어나오는 자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

“끄아악!”

삽시간에 기도소 안에 있던 근위병들이 도살됐다.

아넬을 자레스의 황자궁으로 먼저 데려갔기 때문에, 근위대장의 주의는 그쪽에 쏠려 있었다. 그 탓에 대부분의 병력이 그쪽으로 이동해 있었기에, 이는 병력이 분산되는 결과를 유발했다.

기도소 밖의 근위병들이 눈치를 채고 자레스의 병사들에게 대적하려 했지만 수적인 열세에 밀려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쓸려 나갔다.

치료를 빌미로 근위병들을 한곳에 모아 둔 탓에, 황궁을 지켜야 할 병력들이 손도 못 쓰고 학살당했다.

본래는 이 두 배는 있어야 할 근위병들 중 상당수가 피난을 간 황제를 따라간 것 역시 치명적인 패인이 됐고, 칼리크 병사들은 순식간에 황궁을 장악했다.

같은 황궁 안이라도 기도소와 자레스의 황자궁은 거리가 멀었다.

황자궁 바깥을 감싸고 있던 근위병들은 반란이 일어난 걸 몰랐고, 그러는 사이 칼리크 병사들은 은밀하게 자레스의 황자궁 주변을 포위한 뒤 근위병들을 급습했다.

근위병들이 즉각 대응에 나섰지만, 아르드에서 몰려든 사병까지 더해진 자레스의 병력에 맞서기엔 수적으로 열세였다.

심지어 전투를 벌일 무렵에 자레스의 황자궁 문이 열리면서 무칼라스를 필두로 한 나머지 절반의 병력이 나타났다.

“너희들, 메타와 만나라!”

무칼라스가 거도를 휘두르며 외쳤다.

메타와 만나라는 건 어느 의미로 보나 나쁜 것이었다. 원래는 축복이었어야 할 그 말이 저주가 돼 근위병들을 덮쳤다.

무칼라스의 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여지없이 병사들의 목이 날아갔고, 그렇게 황궁 근위병들은 자레스의 사병들에게 앞뒤로 포위당해 학살당했다.

황자들의 사병은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황자궁의 병기고에서 나오지 못한 채로 모두 불타 죽었다.

일리파스와 스에반은 처소에 감금됐으며, 병에 걸린 궁인들과 내실의 여자들은 모두 격리된 채 갇혔다.

남은 자들은 궁을 장악한 자레스의 사병들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성녀를 맞이하겠다고 내정에 모여 있던 재상들 역시 모조리 잡혀 인질이 됐다.

성녀의 치유를 빌미로 오히려 자레스의 적들은 한꺼번에 일소됐고, 황궁은 자레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오직 단 한 명, 유가만이 이 소동에서 용케 몸을 빼 달아났다.

그의 행방은 알 수 없었지만, 유가의 모친과 부인들은 모두 잡혀 그들 역시 인질이 됐다.

살아남은 근위병들은 모두 충성을 약속받은 뒤 자레스의 사병들로 편입됐고, 자레스는 여세를 몰아 황제가 있는 별궁을 포위했다.

전염병을 피해 고립을 택한 것이 오히려 패착이 됐다. 황제의 병사들 역시 전투에서 패해 자레스의 사병들이 황제의 처소까지 밀고 들어갔다.

“감히…!”

황제는 칼끝을 들이댄 칼리크 사병들 앞에서 파들파들 떨었다. 자레스가 병사들 사이를 가르며 나타나자, 그가 수염 끝을 떨며 자레스를 노려봤다.

“중앙군이 가만있을 줄 아느냐! 이 카비르 제국군의 수는 수십만이다!”

“압니다, 아바마마. 그래서 제가 직접 온 겁니다.”

“무슨 수작이냐?”

“양위하십시오. 황위를 선양한다는 칙서를 발표해 주시면 제가 아바마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물러갈 것입니다.”

“내가… 내가 그런 것에 옥새를 찍어 줄 줄 아느냐? 내가 미쳤다고!”

“살아서 황위를 물러나시겠습니까, 아니면 죽어서 물러나시겠습니까? 결과는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못한다, 죽어도 황위는 못 물려준다! 머지않아 각 주에서 군사들이 소집될 것이다. 너는 제국군 전체를 상대해야 할 테고, 결국 삼 일도 못 가 목이 잘려 효수될 것이야!”

“아바마마. 성녀가 제 곁에 있는데, 제가 왜 죽습니까?”

“뭐라?”

“아바마마 역시 불사의 황제가 되고자 하시지 않았습니까. 유가 형님도 그러했고, 황족들 모두가 같은 꿈을 꾸었지요. 하지만 성녀를 손에 넣은 건 저입니다.”

“네놈이!”

“아바마마, 병도, 암습도, 사고도 저를 죽이지 못합니다. 진정한 불사가 된 건 저입니다.”

“혼자 살아남아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제국군이 네 병사들을 모두 도살할 것이다! 그리고 성녀를 되찾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바마마께선 그전에 땅에 묻히시겠군요. 그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은 맞았다. 자레스가 나중에 목이 잘리든 말든, 양위를 하지 않으면 황제는 지금 당장 죽는다.

“중앙군이 움직일 거라 하셨습니까? 애석하지만 지금 유리한 건 저입니다. 재상들은 모두 제 수중에 떨어졌고, 그들은 제게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무릎을 꿇지 않을 자가 없었다. 몇몇 재상은 반항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투옥되고 황위 선양에 찬성한 자들만 살아남았다.

자레스가 재상들이 연명(連名.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한곳에 죽 잇따라 씀)한 연판장을 들이밀었다.

재상들은 사병을 키우지 않았지만, 그들이 속한 부족들은 상당한 병력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재상을 배출할 만큼 세력이 큰 부족들이기에 그 영지들이 대부분 마디나 인근에 있다.

좋든 싫든 각 부족이 인질이 된 재상들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면 중앙군은 삽시간에 포위된다.

‘지방에 있는 영주군들은? 안 돼. 집결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부족과 영지의 이익이 걸려 있으니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만 해를 넘길 테고…, 황명이 있으면 모이기 쉽겠지만 자레스가 나를 사로잡았으니 황명은 전달되지 않겠지.’

“뭣하면 이대로 황궁으로 들어가실까요. 아니, 사실 전 굳이 황위를 선양받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자레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살벌하여 황제는 저도 모르게 수염 끝을 떨었다.

“옥새도 이미 손에 넣었겠다, 황명을 위조하는 게 뭐 어렵겠습니까. 재상들 역시 수중에 넣었으니 재상 회의는 제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입니다.”

“그럴 리 없다! 네놈이 연판장을 위조한 것이야! 재상들이 그리 쉽게 나를 배신할 리 없어!”

“그럼 그냥 아바마마가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 발표하고, 제가 아바마마 대신 재상 회의를 지휘하면 되겠군요.”

“뭐라?”

“황궁에 전염병이 퍼져 있는 건 카비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 아바마마께서 궁에서 이미 병에 걸린 바람에 상태가 악화됐다고 하면 너무나 자연스럽지요.”

자레스의 말이 맞았다. 이제 보니 전염병이 돌고 성녀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어차피 유가 형님은 달아났고 다른 황자들 역시 제 포로가 됐으니,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머리가 어질어질, 현기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야는 좁아지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그 선대 황제로부터 태평한 제국을 이어받았다. 그 역시 황위에 오르면서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피바람을 겪어 본 역사가 없었다.

타성에 젖은 그의 머리는 이제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졌다.

그를 지킬 군사들은 너무 멀리 있었고, 칼끝은 바로 앞에 있었다.

황위를 선양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권력은 이미 사후강직에 들어간 상태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탈출하지 않는 이상 그는 이미 살아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인데, 황궁으로 끌려가면 탈출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길을 도모해 보는 수밖에.

황제는 침음을 흘렸다.

한참 동안 충혈된 눈으로 자레스를 노려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양위하면… 내 목숨은 살려 주겠느냐?”

“아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메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나를 유폐시키겠지.”

“적어도 황궁에 끌고 가 가두지는 않겠습니다.”

“…먼저 별궁을 둘러싼 병사를 물려라. 그러면 내가 칙서를 써 주겠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물리겠습니다.”

“내가 그를 어찌 믿고! 칙서만 받고 도로 포위할 것 아니냐!”

황제가 자기가 했던 말을 부정하며 앞뒤 안 맞는 소리를 해 댔다.

“믿기 싫으시면 저도 어쩔 수 없군요. 그럼 그냥 궁으로 가시지요.”

자레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황제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양위를 하든 안 하든, 어차피 절대 권력은 자레스가 이어받을 것이었다. 황위에 앉는 건 조금 늦고 빠름의 문제였다.

재상 회의를 장악한 자레스가 정치력을 발휘하면 황제는 빠른 속도로 잊힐 것이다.

2, 3년쯤 뒤에 황제가 죽었다 발표하면 자연스럽게 자레스는 황관을 쓸 테고 황제의 수명은 그걸로 끝이다.

잘해야 2, 3년. 아니면 더 빠른 죽음.

황제는 도박을 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황제는 조금 더 안전한 쪽에 판돈을 걸 수밖에 없었다.

“…칙서를 써 주마.”

“성은이 망극합니다, 아바마마.”

자레스가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황제는 자레스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칙서를 썼다.

자레스가 스스로 옥새를 찍고, 칙서를 손에 넣은 그는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약속은 꼭 지키겠나이다, 아바마마.”

자레스가 나간 뒤, 그는 약속대로 열 명 정도의 감시 병력만 남긴 채 모든 군사를 물렸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난 지 한 시간도 안 돼, 황제의 처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라키사!”

황제가 깜짝 놀라며 일어나자, 라키사가 창백한 얼굴로 기어 왔다.

“아쉬갈을… 아쉬갈을 살려 주세요, 폐하!”

하지만 황제는 사랑하던 후궁의 얼굴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피했다.

열로 인해 송골송골 맺힌 땀, 부르튼 입술.

병에 걸린 상태였다. 그런 여자를 황제의 방에 집어넣은 건 의도가 뻔했다.

“저리 가거라, 내게 다가오지 마!”

황제가 벌떡 일어나며 라키사를 발로 찼지만, 이미 원념에 가득 찬 라키사는 걷어차이고 밟혀도 집요하게 황제에게 매달렸다.

“아쉬갈을 살려 줘! 비겁한 놈, 우리를 내버려 두고 자기만 피했어!”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악을 쓸 때마다 침방울이 튀었다.

열에 젖은 손이 그의 뺨을 만지고 손을 만졌으며, 떼어 내려 애를 써도 라키사는 마치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게 침을 뱉고 욕을 퍼부었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경비병, 이 계집을 데리고 나가라! 어서!”

황제의 명에 문이 열렸지만, 그리로 나타난 건 경비병이 아니라 또 한 무리의 여자들이었다.

병에 걸린 황녀와 내실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떠밀려 들어오면서 황제의 처소는 아수라장이 됐다.

황제는 비로소 약속은 꼭 지키겠다는 자레스의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렸다.

아들은 약속을 지켰다. 맹세대로 자레스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황제는 병으로 죽게 될 것이다.

“자레스, 이놈!”

황제가 그악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처소의 문이 닫혔다. 황제가 그 문으로 나오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

아넬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황자궁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병에 걸린 황자들이 먼저 올 거라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황자들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황자궁 바깥에서 고함 소리와 창칼이 부딪치는 소음이 들리더니 이내 그것마저도 들리지 않게 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함께 데려온 사이야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자기도 모른다는 듯 고개만 저었다.

아넬이 있는 방은 예전에 머물렀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내실이기에 바깥의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오후가 돼서야 퀴나에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릎을 꿇더니 자레스가 황궁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우리는 병자들을 치유하러 궁에 온 게 아닌가요? 황궁을 장악했다니요?”

“…병자 치료는 핑계고, 사실은 그 핑계로 근위대를 한곳에 모은 다음에 다 죽여 버린 거죠. 애초에 전하께선 그럴 생각으로 성녀님을 함께 모시고 온 겁니다.”

사실 굳이 아넬을 데리고 온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건 당장 알릴 필요는 없을 듯했다. 모든 건 자레스가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고 난 뒤에 밝혀도 된다.

“이것도 다 전하께서 성녀님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황자 전하는 처음부터 성녀님의 힘을 쓰게 할 생각이 전혀 없으셨어요.”

“…그런!”

“아마 앞으로도 성녀님이 힘을 발휘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성녀님의 힘을 원하는 사람은 전하가 모두 없애 버릴 거니까요.”

“그러면 안 돼요!”

아넬이 경악하여 내뱉었다. 뭔가 조리 있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놀람이 지나쳐서 제대로 된 언어로 조합되질 않았다.

기껏해야 터뜨린 말이 그러면 안 돼, 라니. 기가 막히고 한심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난 병자들을 치료하러 왔어요! 그런데 치료 대신 살해라니요!”

“진정하세요, 성녀님. 어차피 근위병들은 우리의 적이었습니다. 치료를 했다 해도 언젠가는 황자 전하의 군사들과 부딪쳐야 될 사람들이었어요.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성녀님이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성녀님, 근위병은 황궁을 공격하는 적에 맞서 싸우는 게 소임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소임을 다하다 죽은 것이에요.”

“죽어도 되는 생명은 없습니다!”

“성녀님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지만 어차피 근위병은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온 자들이에요. 성녀님도 그건 아시잖아요.”

아넬은 꽤 뻔뻔하면서도 단호한 퀴나에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차피 치료를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와 싸우다 죽게 됐을 테니 그들을 치료하지 않았다 해서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답니다.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에요.”

퀴나에는 굉장한 독설가였지만, 그만큼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잘 알았다. 그의 눈에 자신이 얼마나 몽상가처럼 보일지 뻔히 알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무리했을 것이다. 이상론을 들먹이며 반박하고, 자신을 깎아 내며 메타의 섭리를 실현하려 애를 썼을 터이나 지금은 그럴 만한 신념이 많이 꺾여 나갔다.

그녀의 성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상에는 아픈 자, 병든 자가 넘쳐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을 다 치유해 줄 수는 없었다.

아넬의 헌신은 허무했고, 효과는 미미했다. 그녀의 힘이 다해 새 성녀가 나타난다 해도 그들 역시 수명만 깎이다 죽어 나갈 뿐이다.

성녀의 힘은 그저 상징이었다. 신의 힘이 실재한다는 증거일 뿐, 그게 아픈 자를 모두 치유하라는 의무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넬도 이제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힘은 정말로 필요한 곳에만 써야 했는데, 지금이 전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란 것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대신 병에 걸린 궁인이나 노예들을 위해선 힘을 써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아주 약간만이지만요. 정말 상태가 심한 사람들에 한해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하시라고, 그 이상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레스는 사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넬이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것보단 낫다 싶어 그 정도만 허용한 것이었다.

아넬도 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퀴나에와 함께 환자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향했는데, 그녀는 몰랐으나 환자는 이미 적은 수만 남아 있었다.

내실의 여자들과 황족들은 모조리 별궁으로 빼돌려진 뒤였고, 남은 환자들 역시 아넬이 힘을 많이 쓰지 않도록 일부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그를 모르는 아넬이 이만한 수라도 치료할 수 있길 다행이라 여기며 치유에 힘쓰는 동안, 자레스는 재상들의 회의소로 향했다.

“폐하께선 이미 병에 걸리셨소. 그에 이와 같은 칙서를 내주시며 내가 황위를 이으라 명하셨소.”

그렇게 말하며 자레스가 옥새가 찍힌 칙서를 내밀었다.

속임수라는 게 뻔히 보였다. 아마도 황제는 양위를 강요당했을 테고, 억지로 옥새와 칙서를 내줬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안다 해도 방법이 없었다. 지금 그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건 자레스였고, 어차피 그들은 자레스의 강압에 밀려 양위에 찬성한다는 연명장을 보낸 터였다.

이미 뒤돌아서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극히 희박한 확률로 황제가 다시 복위한다 해도, 황제는 재상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그중에 단 한 명, 그나마 아직은 기개가 남아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을 보내 폐하를 치료하게 할 수는 없을까요?”

“그게 어렵게 됐소. 유감이지만 유가 황자가 성녀님을 빼돌려 달아났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궁의 반란 세력들과 내 군사들이 맞서 싸우는 동안 혼란을 틈타 유가 황자가 성녀를 납치했단 말이오. 지금 성녀님이 어디 계신지는 나도 모르오.”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였다.

회의실에 갇혀 있는 재상들은 바깥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몰랐다. 도망친 유가는 변명할 길이 없으니, 성녀는 그가 납치한 거로 몰아가도 무방했다.

“사실 이제야 말하지만 유가 황자는 예전에도 성녀님을 납치한 적이 있소. 심지어 성녀님을 사적으로 소유하려 강제로 미약을 먹이고 혼인식까지 치르려 했지.”

유가가 무르마만 데리고 혼자 내뺀 덕분에 성녀 납치와 혼인식에 대한 증인은 여럿 확보할 수 있었다.

유가 궁에 속한 노예와 하인들이 강제 혼인에 대한 증언을 했고, 납치 당시 포로로 잡힌 카에티의 수하들이 유가가 성녀의 은신처를 습격했다고 진술했다.

소속이 다른 증인의 진술이 셋 이상 일치하면 효력을 인정한다.

이것이 카비르의 관습이었고 유가가 아넬을 납치한 것도, 혼인식도 사실이었기에 자레스는 자신만만했다.

“다행히 그 직전에 내가 성녀님을 구출해 안전한 곳으로 모실 수 있었지. 그리고 오늘 병자들을 치유하러 궁에 모시고 왔으나… 반란군을 진압하는 도중에 그만 유가에게 뺏기고 말았소. 성녀님을 지키지 못한 점은 유감이라 생각하오.”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재상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던 중 가장 젊은 재상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봤자 이미 40을 넘은 나이지만, 그래도 재상들 중에선 젊은 축에 속했고 사고도 유연한 편이었다.

가장 먼저 눈도장을 찍는 게, 어정쩡하게 뒷물에 합류하는 것보단 나았다. 젊은 재상이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그게 기폭제가 됐다. 늦으면 안 된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면서, 다른 재상들까지 한꺼번에 일어나 만세를 외쳤다.

마지막 한 명 남은 건 대재상이었다.

카비르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의 대표이며, 노회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의 협력을 얻느냐 마느냐가 이번 반란에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될 터였다.

자레스가 대재상을 지긋이 바라보자, 이미 그를 황제로 인정한 재상들이 일제히 대재상을 노려봤다.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먼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친 재상들은 면구해진다. 나아가 대재상이 부족을 움직여 자레스의 반대편에 서면 자레스가 상당히 불리해진다.

그런데 그때 늙은 대재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노구를 움직여 바닥에 엎드리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카비르의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다.”

대세는 결정됐다.

만세를 외치던 재상들이 대재상을 따라 일제히 절을 올렸고, 자레스는 비로소 벅찬 감회에 사로잡혔다.

황제 자레스.

이제 황위는 그의 것이었다.

다음 날, 황제의 병환과 황위 선양이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유가는 황제가 병이 들어 별궁으로 피난 간 틈을 타 황위를 뺏으려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로 알려졌고, 반란에 실패하자 성녀를 납치해 달아난 거로 소문이 났다.

유가는 역적이 된 반면에 자레스는 반란을 진압한 영웅으로, 나아가 선황에게 정당하게 황위를 선양받은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받게 됐다.

아넬에게 직접 치유를 받은 궁인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궁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구석진 곳에 모여 있던 데다가 소문이 하도 많아 앞뒤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성녀님께 직접 치료를 받았잖아? 그럼 유가 황자가 그 뒤에 성녀님을 납치했다는 거야?”

“그러고도 남을 분이긴 해. 내가 유가 황자의 내관에게 들었는데, 예전에도 성녀님을 납치한 적이 있다던데?”

“유가 황자궁에는 비밀 통로가 있다더라고. 그게 궁 밖으로 연결되어 있다던데 그리로 성녀님을 끌고 나간 게 분명해.”

자레스가 심어 놓은 선동꾼들이 가짜 정보를 흘리고 거짓 소문을 부추겼다. 실제로 유가의 궁에서 비밀 통로가 발견됐으니 소문은 진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치료를 기다리던 근위대는 유가에 협력한 반란군으로 바뀌었고, 황제의 병환과 선양은 순서가 달라져 퍼져 나갔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뒤죽박죽이었다.

진실과 거짓이 다 섞여 있는 바람에 아무도 일의 순서와 제대로 된 경과를 알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은 무성하던 소문이 다 스러지며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됐다.

어쨌든 자레스가 새 황제였다.

그 주의 말에 자레스는 약소한 대관식을 치르고 황관을 썼다.

***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장 크게 바뀐 건 자레스의 지위다. 이제 그는 황제 폐하로 불리고 있었고, 선황은 남쪽 별궁에 갇혀 목숨만 연명하고 있었다.

병은 이미 전염된 상태지만 죽지 않도록 약은 계속 처방해 먹이고 있었는데, 나머지 내실의 여자들은 대부분 죽었으나 다행히 아쉬갈은 살아남았다.

황녀도 살려 줬는데, 병은 의약의 힘으로 치료했으나 다른 거처로 옮겨 가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카비르에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추방할 것이다.

혼인 장사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자레스는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꼈기에 황녀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쪽을 택했고, 제안을 받은 황녀는 오히려 감사해했다.

나머지 문제는 황자들이었다.

황위에 오르지 못한 황자들은 다 처형하는 게 관례였으니 처형해도 별문제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 자레스는 그들에게 선택지를 줬다.

“내게 충성을 맹세해. 그러면 살려 주마.”

스에반을 비롯한 황자들은 별수 없이 충성을 맹세하는 쪽을 택했다.

영지를 모두 뺏기고 사병 역시 해체됐으며, 평생 약간의 연금만 받아 먹고살아야 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더 나았다.

그들 역시 살려 준 것을 다행이라 여겼지만 일리파스만은 충성을 거부했다.

“수치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일리파스는 단순하긴 해도 기개가 있는 남자였다.

스에반처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살아남을 길만 찾는 기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사형 집행자를 보내든, 사약을 주든 알아서 해라. 바라건대 되도록 빨리 끝났으면 좋겠구나.”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일리파스는 오래 살지 못할 듯했다.

젊고 건장한 몸이긴 했지만, 이미 걸린 전염병으로 인해 몸이 허약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체력이 있어 여태 버틴 것이지만 약이나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방치하면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될 것이다. 말은 차라리 빨리 죽이라 했지만, 일리파스는 자레스가 굳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쓸 거라 짐작했다.

일리파스는 황자궁에 혼자 남아 처소에 갇혔다. 하인들은 모두 궁에서 쫓겨났고, 노예들은 자유민이 되자마자 황자궁에 있는 귀물들을 훔쳐 달아났다.

심지어 그가 아파 누워 있다고 하는데도 아무도 찾아오는 자가 없었다.

일리파스의 외가는 세력이 강한 부족이었지만 그들 모두 자레스가 몰아낸 건지, 아니면 스스로 일리파스와의 연을 끊어 버린 건지 연락도 없었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수비병을 꾀어 소식이라도 전할 텐데 일절 그런 것이 없다.

아무도 없는 궁에서 일리파스는 열에 들뜬 채 쓰라린 배신감과 허무함을 짓씹고 있었다.

황제의 병환과 양위, 성녀의 실종 그리고 황자들의 굴종. 자신의 전락.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원인을 되짚어 보면 모든 건 전염병이 시작되고 난 뒤부터였다. 일국의 황궁과 황족이 전염병 하나 때문에 모두 뒤집히고 바뀌었다.

철옹성 같던 권력의 요새가 그렇게 순식간에 와해됐다. 일리파스는 쓴물 같은 고독을 삼키며 아넬을 떠올렸다.

“성녀님.”

한 번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이미 유가가 데리고 사라졌다 했지만, 꿈에라도 좋으니 만나고 싶어졌다.

환상으로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병으로 쇠약해진 주제에 시력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하아….”

시시각각으로 호흡이 힘들어지는 게 느껴졌다.

두통이 너무 심해서 이젠 판단력도 흐려졌다.

고열로 인해 살까지 썩기 시작했으니, 아마 오늘내일 안에는 죽으리라.

일리파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서서히 다시는 깨나지 못할 무의식 속으로 빠져드는데, 그때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몸 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시원한 물이 몸속에 퍼지는 것 같았다. 갈증에 말라붙었던 몸에 비가 내리고, 거기서 새싹이 돋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놀라움에 일리파스가 번쩍 눈을 뜬 순간, 죽어 가는 동안에도 잊지 못했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성녀님!”

환영일까? 드디어 헛것을 보는 걸까?

일리파스가 눈을 비볐지만, 허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넬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 주면서 몸속에 돋아나던 신선한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자, 아넬이 일리파스를 향해 더 강한 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빛의 줄기가 더 굵어지기 전에 자레스가 나타나며 아넬을 막았다.

“그만!”

“하지만 자레스….”

“살려만 놓는다고 했어. 약속대로 살려는 놨으니, 나머지는 저놈이 알아서 할 문제야.”

아넬이 성력을 쓰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자레스가 치료를 허락한 건 그녀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아넬은 스에반과 일리파스는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고 애원했다. 자레스가 질투심마저 느끼기 시작하자 아넬은 이렇게 설명했었다.

“성녀가 치유의 힘을 베푸는 건 본능에 따른 것이에요. 신분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신의 힘이 우리를 치유의 길로 이끄는 거예요.”

일리파스가 팔이 잘렸을 때 그를 치료한 것도 그런 운명적인 이끌림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 사람에게 힘을 베풀어야 한다는 강력한 본능. 그 말에 자레스는 키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레스 황자,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생명의 귀함이 권력이나 돈에서 비롯된 게 아니란 겁니다. 우리는 오직 메타가 내린 숙명에 따라서 구해야 할 생명을 살리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계속 구르게 만들 뿐입니다.”

키리아 성녀나 아넬이나 성력으로 누군가를 치료하고 살리는 건 운명의 부름에 따라 하는 것이라며 같은 말을 했다.

아넬은 아직 그에게서 달아나려 애를 쓸 때도 죽어 가는 자레스를 살렸는데, 그렇다면 일리파스를 살려야 한다는 아넬의 청은 앞으로 벌어질 운명의 흐름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리파스에게 성력을 베푸는 걸 허락했다.

스에반은 다행히 이미 회복되고 있었기에 힘을 베풀지 않았지만, 일리파스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이란 전제하에 치료하게 했고 그의 명대로 아넬은 일리파스 본인의 체력으로 회복 가능한 수준까지만 성력을 흘려 넣었다.

“이제 그만 가지.”

아직까지 일리파스의 손을 쥐고 있는 아넬의 손목을 휙 낚아채며 자레스가 말했다.

그나마 기운을 회복한 일리파스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레스를 노려봤다.

“성녀님이 납치됐다더니… 다 거짓말이었구나. 네놈이 그렇게 쉽게 뺏길 리가 없어 수상하다 생각했다만, 네놈은 역시 대악당이야.”

“그 말 고스란히 돌려주마. 너는 성녀를 차지하기 위해선 나보다 더한 짓도 했을 놈이야.”

“그거야, 당연하지! 성녀님은… 성녀님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일리파스 역시 자레스와 똑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지혜와 결단력이 모자라 아넬을 뺏겼을 뿐 마음은 같았기에, 일리파스는 자레스가 벌인 이 변란을 비난할 수 없었다.

일리파스는 벌게진 얼굴로 씨근덕대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네게 굴복한 게 아니다.”

“죽어 가는 걸 살려 줬더니 입에만 기운이 돌아왔나 보군.”

“성녀님이 살려 주신 거다. 네가 아니야!”

“그러시던가. 이제 살 만해졌으니, 감옥에 가둬도 되겠군그래. 무칼라스!”

“자레스!”

아넬이 말렸지만 자레스는 귓등으로 흘렸다. 무칼라스가 바로 들어오자, 수비병들이 일리파스를 끌고 황궁 감옥으로 향했다.

“한 달 동안 시간을 줄 테니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피우겠다면 나도 두말하지 않고 처형하겠다.”

사실은 그냥 죽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아넬이 일리파스가 운명의 흐름 안에 있다고 하니 그나마 기한이라도 준 것이었다.

일리파스를 옥에 가둔 자레스는 아넬과 함께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까지 미뤄 둔 일을 처리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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