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날 밤, 아넬과 자레스는 또다시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동침을 하게 돼서 아넬을 안아다 침대에 눕힌 자레스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침대로 올라왔다.
이젠 ‘그녀’의 침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세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침대는 이것의 주인이 아넬만이 아니란 걸 암시하고 있었다.
아넬이 차마 거절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동안, 자레스는 재빨리 그녀의 옷을 벗기고 알몸으로 만들었다.
“자레스. 제발….”
새 은신처로 옮겨 오는 동안 쌓인 여행의 피로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넬이 애원했지만 평소라면 그녀의 건강이 제일 걱정인 그가 이 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겉옷과 상의를 벗어 버린 자레스가 또다시 그녀와 몸을 겹쳤다.
아넬은 차마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제일 큰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결국 그녀의 몸을 열게 했다.
한계 전까지는, 그녀가 줄 수 있는 걸 모두 주고 싶었다.
아넬은 집착하듯 달라붙는 자레스에게 기어코 굴복했다. 그녀의 입술을 덮치는 자레스에게 원하는 것을 내줬고, 이윽고 그의 목덜미에 매달리며 그가 원하는 반응을 흘렸다.
“으, 응.”
자레스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 젖가슴 끝을 삼키자 아넬이 앓는 소리를 냈다. 자레스는 요령 좋게 그녀의 가슴 끝을 혀로 굴리며 이리저리 핥았다.
외롭게 홀로 남겨진 나머지 젖가슴은 왼쪽 손으로 움켜쥐어 밀가루 반죽처럼 치대자, 아넬이 허리를 비틀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아직도 이 달콤한 고통이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가 혀로 희롱할 때마다 괴로울 정도로 머릿속이 뜨거워지면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과 계속해 줬으면 하는 이율배반의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이 너머에 더 큰 것이 있을 거라는 짐작이 들어서, 점점 자레스가 뭔가 더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강해졌다.
해갈되지 않은 갈증에 자꾸 허우적거리다, 허전함과 그래도 선을 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아넬은 그의 품 안에서 잠들곤 했다.
“아넬, 하아…. 아넬.”
자레스가 괴로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참기 힘들었다. 아넬을 만지고 애무하는 것만으로는 욕심이 차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참을 수 있다는 다짐은 불쏘시개처럼 스러지고 그 자리에 날름거리는 불꽃만 남았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넬의 고백이 생생했기에 애써 참고는 있지만, 메타가 여전히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있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자레스는 충동적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걸치고 있던 바지를 벗어 버렸다.
“자레스!”
얇은 옷 한 장은 그녀와 자레스 사이에 그어진 최후의 방어선 같은 것이었다.
아넬은 비록 그에게 나신을 보였지만, 자레스는 그의 인내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로 옷은 다 벗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다 고갈된 모양이었다. 하의를 벗어던지자 튕겨져 나온 거대한 모습에 아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바지 위로 튀어나온 그의 중심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거대했다. 굵기는 그녀의 손목만큼 굵었고, 길이는 배꼽에 닿을 정도로 길다.
검붉은 색깔에 울뚝불뚝 핏줄이 돋은 그것이 아넬에겐 마치 무기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비록 이번 생은 아니지만, 아넬은 그와 이미 관계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강제적인 침입이었고 겁탈이었기 때문에 아넬은 그의 벗은 몸 일부는 끝까지 보지 못했다.
강제로 팔을 내리눌린 채 몸 안으로 치뚫어 오는 흉기 같은 것에 내 찔린 기억과 그 통증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끄러움보다 그 기억이 더 컸다.
그 원흉을 보자마자 고통이 함께 솟구쳤기에, 아넬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려 버렸다.
“아넬.”
그가 불렀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넬이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부의 뜻을 표시하자 자레스가 천천히 몸을 겹쳐 왔다.
자레스의 굵고 뜨거운 기둥이 아랫배에 와 닿았다. 커다란 존재감에, 가린 두 손 안 아넬의 눈이 퍼뜩 커졌다.
몸 안에 들어왔을 때는 치 떨리게 아팠던 것이지만, 놀랍게도 지금은 따뜻하고 든든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흐흑.”
알고는 있었다. 자레스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고 아넬 역시 그랬다. 하지만 전생에도 자레스가 같은 마음이었을까?
남자는 욕망만으로도 자신의 일부를 키울 수 있었다.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전생에 겪었던 일은 그녀의 신뢰와 용기를 무너뜨리고도 남았다.
“아넬, 지금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날 봐. 내 몸을 느껴 봐, 아넬. …이건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몸이야.”
그러면서 자레스가 그녀 쪽으로 좀 더 하체를 밀어붙였다.
체중에 눌리지 않도록, 상반신은 그녀의 몸 옆으로 팔을 뻗어 지지한 뒤 자레스가 천천히 그의 기둥을 아넬의 다리 사이에 대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넬의 눈가가 눈물로 얼룩졌고 턱 끝은 덜덜 떨렸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어쩌면 그건 메타가 그어 놓은 파멸적인 선보다 더 넘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적이 자신이라니, 어이없는 상황에 쓴웃음이 났다.
허탈함을 밀어내며 자레스가 몸을 숙였다.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짓이기듯 가르고 들어간 뒤, 자레스가 한쪽 팔로만 몸을 지탱한 채 나머지 한쪽 팔을 아넬의 아래쪽으로 뻗었다.
“아…!”
그의 손길이 그녀의 수풀 안, 예민한 살점에 닿자 아넬이 퍼뜩 놀라 입술을 떼며 허리를 물렸다.
평소엔 있는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시녀들이 아넬을 놀리듯 사내와의 교합에 대해 간간히 흘리긴 했지만, 자세한 건 알려 주지 않았다.
어차피 아넬은 평생 알 수 없는 것이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넬의 지식은 자레스에게 직접 당한 것밖에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몸이 어떤 구조인지,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이렇게 좋아하게 되는지는 전혀 몰랐다.
“하, 하지 말아요!”
부끄러움에 아넬이 자레스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지만, 자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요하게 도드라진 정점을 누르며 위아래로 살살 문대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아넬의 몸이 화다닥 달아올랐다.
“아, 아핫.”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흘렀다.
가슴 끝을 물렸을 때 느꼈던 희열과는 크기가 전혀 달랐다. 허리가 녹신녹신 풀어지는 것 같았고 동시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당혹감이 배로 늘어나고, 그와 동시에 저릿한 전율이 온몸에 번쩍거렸다.
도저히 하지 말라고 말릴 수 없었다. 마치 파도에 떠밀린 작은 조각배처럼, 아넬은 자레스가 일으킨 격랑 속으로 단숨에 휘말려 들어갔다.
“아넬.”
분명한 반응에 자레스가 그녀를 들여다보며 흔연한 미소를 흘렸다.
아직 그의 전부를 다 받아 달라고 조를 수는 없지만, 그가 줄 수 있는 게 뭔지는 알려 주고 싶었다.
자레스는 허우적거리며 자꾸 쾌감을 피해 달아나려 하는 아넬을 집요하게 붙들었다.
결국은 욕망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계속해서 쾌락의 발화점을 지분거리며 아넬을 자신과 같은 구렁 속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기다란 중지로 여린 살점을 꾹 누르며 빙글빙글 돌리자 아넬이 비명을 질렀다. 다리 사이에서 꿀물이 왈칵 흘리는 게 느껴졌는데, 자신의 반응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 하지 말아요, 제발….”
“왜? 날 사랑하잖아. 아넬, 당신도 날 원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
“하지만, 메타가… 아아. 으응!”
쾌감이 너무 커져서 오히려 무서웠다. 이제야말로 메타가 그어 놓은 선을 넘는 게 아닌가 싶어 겁이 났지만, 정작 몸의 반응은 자레스가 계속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신벌이 있을까 봐? 그렇다면 왜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우리가 이렇게 대담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데, 왜 메타는 아무 짓도 안 하는 거지?”
자레스의 속삭임에 아넬이 저도 모르게 창밖을 쳐다봤다.
덧창을 열어 놓아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바깥이 훤히 보였지만, 바닷새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을 향해 쏟아지던 흰 빛의 창도, 파멸적인 붕괴도, 메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타는 모든 걸 알 텐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왜… 만지는 것까지는 괜찮은 건가?’
이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뭐는 되고 뭐는 안 되는 걸까? 어쩌면 그가 아넬의 몸에 자신을 묻는 것만 빼고는 괜찮은 걸까?
혼란에 잠겨 흔들리는 아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자레스는 결심했다.
조금씩 선을 밀고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그의 예상을 넘어 좀 더 깊은 곳까지 넘어가 보고 싶었다.
“날 허락해 줘, 아넬.”
“안….”
“제발. 당신이 무서워하는 곳까지는 가지 않을게.”
“흐으윽.”
그의 애원에 아넬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녀도 원하면서 억지로 들어주는 척하는 건지도 모른다.
욕망이 끓는 물처럼 들끓었고, 몸은 속절없이 풀어져 갔다. 기대가 두려움을 넘어서면서 이대로 자레스에게 모든 걸 맡겨 버리고 싶다는 심정이 커졌다.
늘 베풀고만 살았지 받는 법은 몰랐다. 하지만 자레스는 그녀에게 모든 걸 주려고 애썼고, 아넬은 그런 그에게 자꾸만 익숙해지고 기대고 싶어졌다.
‘그러면 안 돼?’
불현듯 어디선가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를 메타에게 외치고 싶어졌다.
자레스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욕망하는 그녀를 일평생 신전에 가둬 놓고 희생만을 강요한 메타도, 신관들도 모두 이기적이다 못해 잔혹하다.
자레스만이 아넬을 사랑해 주고 생각해 줬다. 아넬은 이제 그런 그에게 보답하고 싶어졌다.
“사랑해요….”
아넬이 속삭이며 허벅지에 힘을 풀자 자레스의 몸이 불끈 달아올랐다.
허락받았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좋았다.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기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손이 거침없이 내려갔다.
또다시 정점을 누르자 아넬이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내질렀다. 듣기 좋은 비음이 자레스의 귀에는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자레스가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실으며 위아래로, 양옆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비벼대자 이제 신음이 헐떡이는 교성으로 바뀌었다. 자레스는 여전히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채 아넬의 젖가슴을 덥석 물었다.
위와 아래를 혀와 손으로 동시에 괴롭히자 이제 아넬은 짐승에게 물린 희생양처럼 흐느적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손길이 더 빨라졌다. 애액이 왈칵 흘러내리며 허벅지 사이가 축축해졌고, 아넬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점점 치밀어 올라오는 희열에 휘감겼다.
거의 폭력에 가까울 정도로 커다란 쾌감이 그녀의 몸 안을 계속해서 쳐 댔다.
아랫배 안쪽 깊은 곳에서 뭔가가 크게 부풀고 팽팽해지더니, 이내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자레스가 맹렬하게 비비고 치대는 그곳에서 번쩍이는 쾌감이 몰아닥치면서, 눈앞에 하얀 섬광이 덮쳐 왔다.
“아, 아아앗!”
그녀의 아랫배 안쪽에서 뜨거운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이 몸 전체로 뻗어나가면서 저릿한 희열이 핏줄의 끝마다 번쩍거리며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하. 흐으으으으. 흐응…!”
희열의 잔재가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아넬이 경련하듯 잘게 몸을 떨었다.
난생 처음 겪는 절정이었다.
그녀가 괴로워 도망치던 감각과 차원이 달랐다.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희열에 달뜬 몸이 자꾸 바르르 떨려 왔다.
아넬은 그에게 매달려 계속해서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아넬.”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맞춰 왔다. 눈물 젖은 눈이 그를 올려다보자, 아넬이 얻은 쾌감 이상으로 뿌듯한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몸의 만족도 포기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가 얻은 위안에 비하면 작은 것이었다. 자레스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 입술을 다시 아넬의 이마와 코끝과 입술로 옮겼다.
자잘한 키스가 무수히 이어지는 동안 아넬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서워요.”
“뭐가?”
“너무… 너무 좋아서요.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녀가 정말 겁에 질린 눈으로 물었다. 자레스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가 이내 기막히게 몰아치는 기쁨에 정신을 가눌 수가 없게 됐다.
“당신은 성녀가 아니라 마녀야.”
자레스가 괴롭게 신음했다. 그의 손이 아니라 그의 기둥으로 그녀에게 더 큰 환희를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작 자신과 몸을 섞는 건 두려워하고 아파하면서, 그가 주는 기쁨은 좋다 하니 뿌듯하다가도 화가 나고 또 서운해진다.
“아넬.”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아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직도 곤두서 있는 기둥 끝 선단을 손으로 잡게 하자 아넬이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침이 마른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가르고 들어가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에 몸이 바짝바짝 탔다.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아넬이 이 타는 듯한 갈증을 해갈은 시켜 줘야 했다. 그녀가 무서워하는 이 흉기가 사실은 그녀의 희열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넬은 알아야 했다.
“나도 만져 줘.”
그가 원하는 게 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안에 그의 것을 붙들게 한 일 만으로 자레스가 괴로워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니, 아넬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것을 만지는 행위가 자레스를 기쁘게 하는 듯했다.
아넬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중심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자레스의 기둥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핏줄이 돋아난 갈색의 중심은 돌덩이처럼 단단했고 용암처럼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넬은 그것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자레스가 하라는 대로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감으며 숨을 헐떡거리자 그에 조금 더 용기가 났다.
그녀만 혼자 좋아한 게 미안했는데, 자신의 손으로 그를 희열에 빠뜨릴 수 있다면 아넬도 과감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자레스가 아넬이 나갈 길을 알려 줬다. 그가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빠르게 움직이게 하자 요령을 알게 된 아넬이 그의 가슴팍에 입을 맞추며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손 놀리는 속도를 높이자 이내 자레스가 몸을 젖히며 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아넬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찡그리며 쾌감에 젖었고, 그의 입은 희열의 주인인 아넬의 이름을 불렀다.
“하아, 아넬…. 흐윽!”
본능이 그녀를 이끌었다. 자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움직임을 더 빨리하자 그의 숨결이 점점 더 거칠고 밭아졌다.
마침내 최고조에 달한 순간, 자레스가 움찔 몸을 굳히며 큰 한숨을 토해 냈다.
그와 함께 그의 귀두 끝에서 탁한 정액이 튀어나오자, 아넬은 흠칫 놀라 손을 놓았다.
남자의 절정은 좀 더 알기 쉬웠다. 그가 남긴 희열의 증거를 알아챈 아넬의 뺨이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넬 역시 자레스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기뻤고, 그가 얻었던 것과 같은 뿌듯한 만족감이 그녀의 안에도 번져 갔다.
자레스가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으며 아넬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안았다.
아직 강직이 풀리지 않은 살기둥이 그녀에게 닿았지만, 이번엔 아넬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아넬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더 뜨겁게 그의 품에 안겼다.
자레스가 그런 아넬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넬. 교합은 나쁜 게 아니야. 아프기만 하지도 않아.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몸을 합치면, 우리에겐 환희만 있을 거야.”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절대 아넬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넬이 이내 처음 겪은 나른함에 지쳐 눈을 감았다. 자레스가 그런 그녀를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 밤 내내 자레스는 아넬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하나의 몸인 것처럼 포개진 채 아침까지 내내 포옹을 풀지 않았다.
***
“아이들은 모두 모았다 하는가?”
대신관의 물음이 있자, 메르케즈가 전서구로 전달받은 내용들을 읊었다. 마디나 대신관이 전령새를 통해 보낸 제안을 각 나라마다 수도의 대신전에 보고를 했고, 그들의 답은 다시 마디나 대신관에게 전달됐다.
원래는 이렌시아로 모여야 할 것이었지만 지금은 암암리에 성녀가 있는 거로 알려져 있는 카비르가 필두였다.
“교구마다 명단을 알려 왔습니다만, 탈라사에만 대략 천이백 명 정도가 있고, 타네시는 그 절반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각각 7, 8백 명에 달하고 카비르만 2천 5백이라 합니다.”
“명단을 파악할 정도면 모으기는 다 모았다는 뜻이군그래.”
교구마다 아이들을 모아들이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일단 인원을 파악했으니, 시험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것이다.
이 모든 게 이미 성녀 시험을 위해 거대한 신전 조직이 대대로 운영돼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대신관이 곧 손을 휘저었다.
“방금 보고한 내용을 취합해 각 수도의 신관에 다시 보내게. 그리고… 성녀 시험을 시작하라는 명령도 같이 전달하게.”
성녀는 메타의 상징일 뿐 메타 자체는 아니다.
숭배받는 건 그럴 가치가 있을 때뿐, 이제 그들은 불순해진 성녀를 갈고 새롭게 관리해야 할 때가 됐다고 믿었다.
“메타의 광휘에 영광을.”
“광휘에 영광을. 새 성녀께 영광을.”
은밀한 인사가 오간 뒤, 메르케즈가 신전을 나갔다.
***
그 시간 자레스는 퀴나에와 독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황자궁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미행이 달라붙어 있었다.
간 김에 오랫동안 아넬과 외유를 즐겼지만 미행이 더 늘어난 덕에 당분간은 칩거해야 했는데, 마침 퀴나에가 그동안 고서들을 더 해독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한 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 일곱 개의 땅 중에 나클이란 섬이 있다는 거였고, 그 섬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흥미로운 정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아넬을 메타에게서 해방시키겠다는 계획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 알아 와.”
그렇게 명령을 내린 지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 칼리크 교도들을 통해 메타와 칼리크가 서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생겼는데, 거기에 더해 퀴나에가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새로 해독된 내용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별거 아니었다간 봐라.’
그런 눈빛으로 퀴나에를 노려보자 그가 얼른 덧붙였다.
“고대 서적에는 신화 속의 악신 칼리크가 선신 메타에 의해 소멸된 뒤에도 칼리크의 신도들과 메타의 신도들이 한동안 맞서 싸운 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싸운 게 아니라 성녀를 두고 싸운 거로 기록돼 있더군요.”
“계속해 봐.”
성녀가 나오자 흥미를 느낀 자레스가 턱짓으로 명하자 퀴나에가 서둘러 설명했다.
“원래 고서에는 메타 신도들의 손에 있던 성녀를 칼리크 교도들이 데려간 거로 돼 있어요. 그리고 이후에 치열한 전쟁 끝에 이번엔 메타의 신도들이 성녀를 다시 뺏어와 이렌시아의 신전에 가뒀죠.”
“가뒀다고? 그렇게 기록돼 있단 말인가?”
“네, 문자 그대로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배운 가르침에선 처음부터 메타의 신도들이, 메타가 내려 주신 은혜의 결정체인 성녀를 모신 거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 해독한 고서에선 초기 칼리크 신도들이 성녀를 숭배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속았다는 건가?”
“고대서의 내용대로라면 그렇지요. 오히려 그 성녀를 뺏은 건 메타 신도들이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칼리크 교도들이 메타의 은혜의 정수인 성녀를 숭배했을까요? 마녀 취급하고 죽였어야 맞지 않아요?”
“…무하립도 아넬이 성녀인 걸 알게 되자 존경하는 태도를 취했지.”
교리대로라면 칼리크 신도들은 메타의 상징인 성녀를 배척했어야 마땅했는데 정작 현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성녀는 칼리크의 힘을 부여받은 거로 보여요. 그래서 메타 신도들이 성녀를 약탈해 신전에 가뒀고요.”
퀴나에가 대담한 추측을 내어놓았다. 그 추측은 자레스가 동부에서 불러들인 칼리크의 장로가 설명한 내용과 들어맞았다.
장로는 이 세계의 신화가 날조돼 있고, 가르침과 달리 메타가 악신이고 칼리크가 선신이라고 말했다.
“칼리크 교의 교리에 따르면, 태초의 혼돈에서 빛이자 선의 신인 칼리크가 먼저 생기고 그의 쌍둥이인 어둠과 악의 신 메타가 생겨났습니다.”
장로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어서 하늘과 바다 땅이 생기고 동물과 식물이 생겼다고 했다.
그리고 최초의 생명체인 흰 암소 바카라가 태어났다.
흰 소는 땅에 생겨난 식물을 먹고 자라는데, 서로 대결해야 할 숙명인 칼리크와 메타의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을 이번엔 퀴나에가 말해 줬다.
“제가 이런 추측을 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칼리크가 흰 소의 우유를 먹고 힘을 키우자 메타는 흰 소를 죽였습니다. 죽은 흰 소의 정액에서 사람이 태어나는데, 태어난 한 쌍의 인간이 처음 마주한 것은 메타였다지요.”
“칼리크가 아니라?”
“네, 소를 죽인 게 메타였으니까요. 메타는 그가 사람과 세계를 창조했다 속이고 칼리크와 적대하게 했다고 하네요.”
여기서부터 그들이 알던 신화와 판이하게 달려졌다.
그들이 아는 신화 속에서는 흰 소 바카라의 이야기가 거의 생략돼 있었고, 메타가 인간을 창조했다고만 전해져 내려왔다.
하지만 고대서에 적힌 내용은 그 반대였다.
“사람들은 칼리크가 악의 신이라 믿게 됐고, 메타의 편에 서서 칼리크와 싸웠지요. 메타는 아라와트를 일곱 개의 대륙으로 나누고 각 대륙의 사람들이 서로 싸우도록 부추겼습니다.”
그 부분을 사람들은 칼리크가 전쟁을 부추긴 거로 알고 있었다.
“오랜 전쟁이 있었습니다. 파괴와 죽음이 세계를 덮자 메타의 힘은 더욱 커졌지요. 점점 더 강해진 메타는 칼리크와 격돌해 이번엔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퀴나에의 언성이 더 높아졌다.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입니다. 메타와 칼리크는 빛과 그림자 같은 관계였습니다.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었기에 메타는 칼리크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가 없었답니다.”
잠시 말을 멈춘 퀴나에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메타는 칼리크를 작은 에너지로 만들어 인간에게 넣었습니다. 그게 바로 성녀입니다.”
“뭐라고?”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럼 성녀가 칼리크 자체란 말인가.”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네, 비록 작은 에너지로 남긴 했지만 그렇습니다. 메타의 상징이 아니라 칼리크의 분신 같은 거였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알던 것과 정반대로군.”
“게다가 메타는 꼼꼼하기도 했지요. 안전을 위해 에너지를 나눠서 큰 쪽은 성녀에게, 작은 쪽은 에포메니라 불리는 후계자에게 넣었어요. 그래서 누구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한쪽이 그 힘을 이어받게 했지요.”
자레스가 침묵한 채 계속하라는 눈짓을 했지만, 쉬지 않고 몰아쳐서 설명을 하느라 지친 퀴나에는 긴 숨을 내쉬었다.
나머지는 황자궁에 몰래 불러들인 장로가 해 줬다. 집무실에 온 장로는 그가 아는 내용들을 말해 줬다.
“메타는 칼리크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많은 힘을 소모하고 한동안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됐지요. 대신 인간들이 메타의 가르침에 따라 성녀를 신전에 가두고 관리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뒀다, 라고 쓰여 있는 거로군.”
이제야 이해가 됐다. 모든 수수께끼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대부분은 모르지만, 초기의 메타 교전엔 성녀를 악신 칼리크의 흔적이자 악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엔 오히려 성녀가 메타 교도들에게 박해당하고 마녀로 몰려 수난을 당했답니다.”
하지만 칼리크 교도들에겐 성녀가 칼리크의 후예이자 신성한 존재였다. 그래서 전쟁 끝에 성녀를 데려갔지만, 다시 메타 교도들에게 뺏겨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성녀님은 메타 교도들에겐 마녀였습니다. 하지만 갇혀 있던 성녀가 죽은 왕을 살린 뒤부터 메타의 신도들 역시 성녀를 숭배하게 됐다네요.”
퀴나에가 고서에서 알아낸 사실을 덧붙였다.
메타의 교리는 바뀌었고, 성녀는 메타의 힘을 이어받은 존재로 조작됐다.
“굳이 칼리크의 힘을 여자에게 넣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남자는 여러 여자한테 씨를 남길 수 있지만 여자의 몸은 출산에 한계가 있죠.”
일리가 있었다. 아마 남자에게 넣었다면, 씨를 퍼트리기 좋아하는 남자의 본능대로 칼리크의 후예는 점점 늘어났을 것이다.
“여자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며 가둬서 통제하기도 쉬워요. 그렇게 해서 칼리크의 힘이 인간들 사이에 퍼져 나가지 않게 관리했을 겁니다.”
“성녀를 신전에 가두고 순결을 강요한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맞습니다. 메타는 칼리크의 힘을 나눠 받은 인간들이 늘어나는 걸 두려워했을 겁니다. 그래서 성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막은 겁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회귀 전에 자레스가 아넬을 범했을 때 메타가 세상을 멸망시킨 건 성녀의 신성함이 훼손된 것에 분노해서가 아니었다.
둘의 결합으로 아이가 생길 게 두려웠기 때문이고, 칼리크의 힘이 커지는 걸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메타의 사악한 욕망 때문이지, 성녀의 자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팔걸이에 몸을 기댄 자레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이 패이고 살짝 피가 났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아직 해독이 덜 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고대서의 기록은 일단 여기서 끝났어요. 하지만 상황을 보니 메타는 아마 계속해서 인간들이 벌인 파괴와 전쟁 덕에 서서히 힘을 회복한 것 같네요.”
아넬이 회귀했다는 건 퀴나에게만 알렸다.
당연히 그는 뒤로 자빠질 정도로 깜짝 놀랐지만 자레스의 설명에 결국은 납득했는데, 메타가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해진 걸 보면 퀴나에의 추측이 맞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여전히 메타의 힘은 파괴적일까? 감히 인간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것일까?
“칼리크의 신도들은 불을 숭상하지요. 불과 태양. 모두 빛을 발하는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궁리를 거듭하는 자레스에게 장로가 덧붙였다.
“그래서 칼리크의 몸이 부서지면서 생겨난 영원의 불을 숭상하고, 그의 육신이 땅에 남긴 흔적을 섞어 영원의 불의 연료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은 메타의 신도들이 영원의 불을 성녀의 상징으로 숭배하고 있지만, 원래 그건 칼리크의 흔적이었습니다.”
“칼리크 신도들이 영원의 불을 만들었나?”
이것 역시 뜻밖이었기에 자레스와 퀴나에 모두 놀랐다.
영원의 불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땅속에서 발견되는 검은 흙인데, 일반인들은 몰랐던 그 흙들이 바로 칼리크의 육신이라고 했다.
지금도 칼리크 교도들은 영원의 불의 연료를 만들고 있고, 그것을 팔아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칼리크 교도들이 만든 영원의 불이 메타의 상징이 됐고, 자레스는 그 영원의 불로 목숨을 건지고 아넬을 붙잡은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이는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메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길래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가만히 방관하고 있을까.
‘결정적인 때가 오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넬과 내가 결합만 하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인가?’
과거를 알았지만, 미래는 예측할 수 없었다.
메타가 악신인 걸 알았지만, 과연 아르드의 누가 이 사실을 믿어 줄까. 결국 이대로는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더 큰 힘이 필요했다.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퍼뜨려야 했다.
후자는 전자가 반드시 수반돼야 했는데, 자레스는 그러기 위해 지금 그가 가야 할 방향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신을 죽일 수 있는 힘.
그건 세계를 제패해야 비로소 그 끄트머리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투지가 다시 한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해독되지 않은 부분은 언제 알아낼 수 있지? 온크웰어 사전까지 동원했는데 왜 해독이 안 되는 건가?”
“고대서가 온크웰어로만 기록된 게 아니에요. 인용된 부분도 있는데 그건 온크웰어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고대 언어라고요. 휴우. 전하, 제발 사람더러 신처럼 일하라고 하지 마세요.”
“찾아내! 아르드 전역을 뒤져서 모든 언어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
***
카에티 앞에 노예가 끌려왔다.
7대륙에서 데리고 온 여자라고 했다. 검은 대륙에서도 깊은 곳에 있는, 이름도 없는 오지에서 데려왔다는데 여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무로 된 상자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배를 타고 오면서 쇠약해졌는지, 밭은기침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카에티는 상자에 다가가진 않고 여자를 데리고 온 노예상에게 물었다.
“상태는 확실한가?”
“의원에게 확인을 했습니다요. 초기에 데려왔기 때문에 아직 상태가 아주 나빠지진 않았고요. 원래 카비르 귀족이 노예로 부렸기 때문에 카비르어도 능숙합니다요.”
“만족스럽군.”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자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 악의에 가득 찬 것으로 바뀌었다.
사실 요즘 카에티의 인상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선량하고 자비로운 얼굴에 사람들이 많이 속았지만, 지금의 카에티는 사납고 독해 보였다.
자레스 때문에 변한 거라며, 카에티는 거울을 비춰 볼 때마다 그에게 모든 원망을 돌렸다.
“선물을 하나 줄 테니, 이 여자에게 들려서 라키사의 내실을 찾아가게 하게. 이미 뇌물을 준 적이 있으니, 그년은 거절하지 않고 노예를 들일 것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마님.”
“저 노예에게 내가 시킨 짓을 모조리 하고 나오도록 하게. 특히 라키사의 아들에게 접근하는 걸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오면 노예는 죽여서 후환을 없애. 그러면 내 수하가 자네에게 약속한 보상을 건네줄 거야.”
금화 1천 디하브에 어디서나 노예 열 명을 사들일 수 있는 권리증. 그것이 카에티가 약속한 보상이었다.
그 돈은 작은 노예상에 불과한 그가 거상으로 거듭날 수 있는 동아줄이 돼 줄 터였다.
크게 만족한 노예상이 상자를 끌고 나가자, 장의자에 기댄 카에티가 나른한 미소를 흘렸다.
테이블에는 하녀가 가져다 놓은 독한 술이 놓여 있었다. 붉은 액체를 가득 채운 카에티가 잔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라키사도, 성녀도, 자레스도 다 죽어 버려라.”
이젠 자레스랑 결혼할 생각도 없어졌다. 그녀가 가질 수 없으면 남도 못 가져야 했다.
성녀에게 주는 건 죽어도 싫었고, 그렇다고 열 명, 백 명의 여자와 자레스를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를 비웃는 이 세상이 모두 망가졌으면 좋겠다.
평판이고 뭐고 따질 겨를도 없는 지옥도로 만들어 버리면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명예를 묻지 않을 것이다.
“다 죽어. 죽어 버려! 늙거나 젊거나, 어린놈, 어린년, 다 죽어! 나만 빼고 다 죽어!”
악에 받친 카에티가 킬킬거리고 웃다가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
라키사는 카에티가 보낸 여자 노예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도와달라는 요청일 게 뻔했지만, 그런 탓에 빈손으로 오진 않았을 터였다.
라키사의 예상대로 노예는 루비가 알알이 박힌 티아라를 보내왔고, 라키사는 노예가 바친 보석함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선물 말고 다른 전언은 없다더냐?”
예의상 묻자 노예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기쁘게 받아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라고 하셨어요. 아, 그리고 또… 선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러면서 노예가 끌고 온 수레에서 상자 하나를 더 꺼냈다. 비단으로 마감한 상자를 열자 거기서 딱 어린애 손목에 채울 만한 작은 팔찌가 나왔다.
크기는 작아도 귀하기는 사실 이쪽이 더 했다.
푸른색 청옥에 백옥을 끼우고 한가운데엔 검은 수정을 끼워 넣은 보석 구슬을 줄줄이 배치했는데, 카비르에서 이런 세공 보석은 신의 눈동자라고 불리며 귀한 물건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보석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걸어 팔찌로 만들었으니, 라키사의 입이 벌어질 만도 했다.
“어머나. 이건 우리 아쉬갈의 손목에 걸면 딱 알맞겠구나.”
“마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신의 눈동자가 아쉬갈 전하를 늘 들여다보고 지켜 주실 거라며, 제가 황자 전하의 손목에 직접 팔찌를 채워 드리고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도 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호호호, 성의에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렴.”
라키사는 기쁘게 노예의 행동을 허락했다. 원래는 천한 노예의 손이 아쉬갈의 몸에 닿는 걸 싫어했을 테지만, 워낙 귀한 물건을 바친 터라 기분이 좋았다.
라키사의 허락하에 노예는 직접 아쉬갈의 통통한 손목에 팔찌를 끼우고, 경의의 뜻으로 손등에 입을 맞췄다.
“콜록!”
기침을 한 건 그때였다.
가벼운 기침이었다. 두어 번 하다 그쳤고, 노예는 바로 입을 막으며 죄송하다 허리를 굽혔지만 귀한 물건 덕에 없던 자비가 생긴 라키사는 노예를 탓하지 않았다.
노예가 라키사에게도 경의를 표하겠다며 무릎으로 걸어와 손등에 입을 맞추고자 할 때도 기쁜 마음으로 손등을 내밀었다.
노예는 라키사의 손등을 두 손으로 잡고 입을 맞췄고, 마지막에는 손가락 끝에도 존경의 입맞춤을 했다.
“아와드에선 지위가 높은 여인에게 이렇게 존경의 마음을 표해요. 옛 온크웰 왕국에선 발등에도 키스를 했는데, 귀한 분의 손발이 되고 싶다는 의미라네요.”
“호호호, 내 발등도 내주고 싶지만 오늘은 안 되겠구나. 다음에 또 온다면 내, 발을 씻고 기다리고 있겠다.”
시원하게 웃은 라키사는 답례로 금귀걸이 한 쌍을 내줬다. 그건 카에티가 바친 것에 비하면 소박한 것이었지만, 라키사는 그 정도도 잘해 준 거라 여겼다.
한편 라키사의 내실을 물러 나온 노예는 그냥 나가지 않았다.
온 김에 별궁 구경을 하고 싶다 부탁했기에, 라키사가 안내역으로 붙인 노예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녔다.
노예가 가끔 기침을 했지만, 가벼운 감기라는 말에 아무도 깊게 신경 쓰지 않았다. 노예긴 하지만 라키사의 손님이 아닌가.
별궁의 시녀와 내관들은 카에티의 노예가 이곳저곳에 침을 튀기고, 침 묻은 손으로 사람을 만지는 걸 그냥 내버려 뒀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라키사의 아들 아쉬갈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자레스의 설명을 들은 아넬은 한동안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봤다.
“메타시여….”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다, 화들짝 놀라 하늘을 쳐다봤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난 어떡해야지요?”
두 번에 걸친 삶 속에서 온전히 메타를 위해서 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아가는 목적이 오직 메타의 힘을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한 것이었고, 메타가 모든 인생의 지표였다.
그런데 그게 조작된 거라니, 자신이 악의 신을 믿고 섬기고 있었다니.
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건 이미 한 번 메타가 전 세계를 멸망시키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그게 과연 선의 신이 할 수 있는 짓인가?’
그때는 자신을 귀히 여겨 격분한 것이라 여겼는데,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비를 강조하고 그녀에게도 강요하던 신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자레스가 숨겨진 사실을 말해 주기 전에도 이미 시작된 의문이었다.
“왜 메타가 시간을 되돌리는 무리수를 뒀는지 궁금했어요.”
아넬이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메타의 상징이자, 메타의 힘을 이어받은 후예니까. 하지만 내가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자레스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자 아넬이 말했다.
“메타는 뭔가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
“메타는 선과 빛 그리고 생명과 창조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죠. 인간을 창조한 것도 메타라고 했어요. 칼리크는 어둠과 악의 신이자 죽음과 파괴의 신이라 했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고 하면…?”
“파괴의 신이 생명을 창조할 순 없었겠지.”
“맞아요. 그러면 메타가 굳이 시간을 되돌린 이유가 확실해져요. 메타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힘이 없었던 거예요.”
“메타는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과 파괴, 죽음에서 힘을 얻는다고 했지.”
“충동적으로 아르드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메타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인간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인간을 창조할 힘은 없었을 테고, 그러니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을 택한 거죠.”
“메타가 자비로워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게 아니었군.”
긴 의문에 답이 내려졌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메타는 악의 신이었고, 자레스와 아넬의 적이자 인류의 적이었다.
그때 세찬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명도 없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무칼라스가 나타났다.
“전하. 퀴나에, 전령을 보내왔다.”
“급한 일인가?”
“황궁에. 병이 돈다!”
중요할 때는 말이 통하는 게 무칼라스의 신기한 점이었다.
일이 가볍지 않은 걸 알아챈 자레스가 바로 전령을 불러들이자, 그가 엎드려 상황을 보고했다.
“병은 주로 내실의 여자들과 황족들 사이에서 돌고 있습니다.”
“이유가 뭐지?”
“아마도 첫 발병이 내실에서 시작된 듯합니다. 최초로 증상을 보인 게 후궁 라키사의 아들이었다 들었습니다.”
“내실에는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않을 텐데?”
“그래서 처음엔 전염병이라 여기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그 뒤 라키사가 전염됐습니다. 그러고 라키사와 접촉이 있었던 황궁의 여자들이 다시 그 남편과 남자들에게 병을 퍼뜨린 것 같습니다.”
“황제는?”
“아직은 안전하십니다. 전염병이란 게 밝혀진 뒤로는 침소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터라.”
“제 한 몸 빼는 데는 확실히 빠른 분이지.”
“내실의 여자들을 한데 몰아 격리하고 이미 병에 걸린 자들 역시 따로 격리해 병이 더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만, 격리되지 않은 자들 중에도 계속 감염자가 나와서 전염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전염병의 증상은 마치 감기와 같다 했다.
하지만 전조 증상인 기침이 지나면 고열이 시작됐고, 급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지다가 목이 부어 숨을 못 쉬다 죽거나 아니면 의식 불명에 빠졌다가 그대로 사망한다고 했다.
제일 나쁜 건 기침이 시작되기 전, 별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병이 전염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병에 걸린 줄도 모른 채 돌아다니다 여러 사람에게 병을 퍼뜨렸고, 전염의 사슬이 연쇄적으로 연결됐다.
궁의들이 동원돼 열을 내리는 처방을 하고, 약초를 달여 먹였지만 사망률이 높았다.
젊은 사람은 그나마 버티지만 노약자와 체력이 약한 자들은 금세 병이 악화돼 손쓸 겨를도 없이 죽어 나갔다.
“스에반과 일리파스 황자도 현재 병에 걸려 있다더군요. 두 분은 아직 젊어서 병세가 아주 심각한 건 아닙니다만 치유 여부는 아직 모르겠답니다.”
“나와 교류가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군.”
“어쨌든 그래서 지금 황제 폐하께서 전하의 환궁을 명하셨는데, 거부하면 근위대와 영주들의 군대까지 동원할 태세십니다.”
“…성녀를 내놓으라고 하겠군.”
왜 하필 지금일까?
자레스는 팔걸이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전염병은 언제 어디서든 발병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전염병은 사람이 많고 접촉할 기회도 많은 민간에서 발생하지, 상대적으로 위생 상태가 좋은 황궁에서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심지어 궁 밖 출입은 고사하고 내정 출입도 적은 내실에서 전염병이 일어난 건 전무하다 봐도 무방했다.
시기도 그렇고 장소도 수상했다.
“제가 갈게요.”
병이 돈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아넬이 나섰다. 대번에 자레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안 돼.”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어요, 이럴 때 성녀가 필요합니다. 그러라고 신이 주신 힘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무칼라스를 들이지 말 걸 그랬다. 하긴 들어오라 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들어왔지만.
“살아 있어 봤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종자들 때문에 당신이 말라 죽는 꼴을 보라고? 절대 안 돼, 아넬.”
“생명의 무게는 그런 식으로 재는 게 아니에요. 자레스, 날 가게 해 주세요!”
“하아. 고집쟁이.”
이럴 줄 알았지.
해코지를 하면 했지 하나 도와준 것도 없는 남을 구하겠다고 무턱대고 나서는 건 그동안 받은 가르침 때문일까, 아니면 천성일까?
“자레스, 제발….”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 않자, 이제는 방법을 바꿨다. 애원하는 표정으로 그의 두 손을 잡자 자레스가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와 함께 가지.”
“네?”
놀라서 소리를 지른 건 아넬 쪽이었다. 설마 자레스가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힘은 한 방울도 쓰지 못하게 하겠다더니, 돌연 태도를 바꾼 게 수상했다. 내심 섭섭하기까지 했는데, 이 양가감정을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전령, 자네는 내가 성녀를 찾아냈고, 성녀와 함께 황궁에 간다는 걸 황제에게 알리라고 퀴나에에게 전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 정도쯤 알려 두면 나머지는 퀴나에가 알아서 할 거야. 중간 연락책에게 그리 전하라고 하고, 자네는 즉시 이리로 돌아와.”
무칼라스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성력은 쓸수록 고갈된다는 걸 모르는 전령은 내심 자레스의 명을 반겼다.
환자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성녀가 할 일이 아니던가. 전령은 그 즉시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은신처를 나섰다.
“아넬, 당신 소원대로 황궁으로 돌아갈 테니 준비해.”
“…고마워요, 자레스.”
아넬이 머뭇거리다 곧 자신의 침소로 돌아갔다. 그녀까지 나가자, 무칼라스가 눈치도 없이 툭 물었다.
“황자, 이제 성녀 사랑하지 않는다?”
자레스가 무서운 눈으로 무칼라스를 노려봤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차라리 황제나 아넬을 아는 다른 자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랐다.
사랑을 버리고 황위를 선택하는 무정한 남자. 아니면 만인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이타심을 가장한 계산적인 인간.
그렇게 간주해 준다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협상은 쉽게 끝났다.
성녀만 내놓으면 그에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하겠다고 황제가 전해 왔고, 퀴나에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자레스는 전령에게 새로운 명을 내렸다.
“사흘 후 아침, 성녀를 모시고 궁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전에 성녀님이 치유의 힘을 베풀기 쉽도록 병자들을 한곳에 모아 달라고 황제에게 전하라고 해.”
그러겠다는 대답이 돌아온 뒤, 자레스는 아넬과 함께 환궁할 준비를 했다.
치밀한 명령이 무하립을 비롯한 사병들에게 하달된 것과 동시에, 성녀가 마디나로 오신다는 소문이 수도에 불 일 듯이 퍼졌다.
그 소식은 카에티에게도 전해졌고, 그를 들은 그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한번 성녀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절대 한 남자의 여자로는 못 살지.”
아넬은 모두의 성녀가 될 것이며, 자레스는 절대 그녀를 독점할 수 없을 것이다.
대중은 마치 굶주린 아이와 같다. 한 번 먹을 것을 주기 시작하면 두 번, 세 번을 원하고 이윽고는 베풂을 받는 것이 당연해진다.
예전처럼 신전에 가둬 두고 지배자들만 치유의 혜택을 받던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 했다.
자레스가 아무리 막으려 해 봤자 성녀는 다시 끌어내질 것이고 밤낮으로 치유를 강요받게 될 것이다.
“체력이 성력에 비례한다면, 성녀도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될 거야.”
괜히 성녀를 신전에 가둬 두고 제한된 숫자만 치유를 받게 한 게 아닐 것이다. 카에티는 그렇게 짐작했다.
성녀가 힘을 베풀 수 있는 기간은 에포메니가 성인으로 개화하기까지 2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힘을 독점하는 이유가 과연 지배자들의 특권 의식만일까.
나쁜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카에티는 거기까지 추측했다.
그리고 그 사악한 계획에 수많은 희생자를 끌어들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축배를 들어야겠어. 제일 독한 술을 가져오거라.”
카에티가 기쁘게 웃으며 하녀에게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