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안기면 세계가 멸망한다
22.
파도 소리가 여느 때보다 거칠었다.
‘비가 올 모양이네.’
아넬이 살던 신전은 섬이었기에 파도 소리엔 익숙했다. 이렇게 바람도 없이 해조음이 큰 날에는 꼭 큰 비가 내렸고, 그런 날에는 바다 비린내도 평소와 달랐다.
아넬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커다란 체구에 가로막혀 있었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아넬은 그녀의 곁에 누워 있는 것이 자레스란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 꼭 붙어 잤던 게 무색하게, 아침이 되고 나서야 바로 곁에 누운 그의 체취가 확 끼쳐 오는 듯했다.
밤에는 밤의 얼굴이 있고, 낮에는 낮의 얼굴이 있었다. 흐리긴 하지만 사방이 밝은 아침이 되자 밤새 그에게 안겨 편히 잠들었던 그녀는 사라지고 부끄러움이 먼저 치밀어 올랐다.
아넬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침대 구석 쪽으로 물러났다.
그가 가둬 놓은 탓에 자레스를 넘어가지 않고선 침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넬은 어쩔 수 없이 갇힌 채로 잠든 자레스를 잠시 쳐다봤다.
늘 생각했지만 참 수려한 얼굴이었다. 콧대가 산등성이처럼 높았고, 턱 선은 남자답게 굵었다.
유가처럼 우아하진 않았지만 허여멀건 해서 유약하게 생기지 않았고, 일리파스처럼 지나칠 정도로 뼈대가 굵지도 않았다.
적당히 날렵한 몸매에, 근육이 잘 짜여 있었다.
일부러 키운 게 아니라 실전을 많이 겪다 보니 생긴 근육이었는데, 그러느라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흉터들도 지금 그녀의 눈에는 남자답게만 보였다.
칼을 잡느라 생긴 손바닥의 굳은살도 일리파스에게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미 애정을 느껴서인지, 이제는 그것마저 좋았다.
‘하지만 저 손으로 너무 치대는 건 싫어.’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었다.
지난밤엔 자레스가 정말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젖가슴을 만졌다.
입으로 물고 빨며 희롱을 해 대서 아넬을 정신 못 차리게 하다가, 나중에 그녀가 괴로워 울자 그제야 물러났다.
그 후에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아넬을 뒤에서 끌어안고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주물러 대며 아넬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는데, 나중에는 그 손에 박힌 굳은 살 때문에 가슴 끝이 쓸려 꽤 아팠다.
“다시는 안 아프게 한다더니….”
괜히 그가 얄미워졌다.
아넬은 팔베개를 해 주느라 옆으로 쭉 뻗은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약이 오른 나머지 살짝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라?”
깜짝 놀라 눈을 든 순간 아넬은 그대로 손목을 잡혀 이불 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끌어들이자마자 입술을 훔치는 그의 몸짓이 사뭇 다급했다.
그토록 괴롭혔던 젖가슴을 움켜쥐고 다시 그 끝에 입을 맞추자, 아넬은 겁이 나서 비명을 질렀다.
“아, 하… 하지 마. 하지 말아요!”
“그럴 거면 먼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내, 내가 뭘 했다고요?”
한 게 너무 많았다.
일어나자마자 꼼지락거린 죄, 침대 구석으로 도망가서 또다시 그를 애타게 한 죄, 그래 놓고는 귀여운 말을 종알거리다 끝내 손까지 대려 해서 그를 도발한 죄.
자레스는 그 모든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그리고는 아넬의 허리를 붙들며 살짝 솟아오른 배꼽 근처를 약하게 깨물었다.
“아, 아얏.”
민감한 곳에 가까운 탓에 아넬은 아픔보다는 부끄러움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자레스는 멈추지 않았다. 부드러운 몸 구석구석을 살짝 깨물고 간지럽히고, 예민한 곳을 핥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이불 안에선 비명과 웃음소리, 끊어지는 듯한 신음이 번갈아 새어 나왔다.
간신히 자레스의 귀를 꼬집고 나서야 그에게서 벗어난 아넬이 이불 밖으로 기어 나왔지만, 곧 도로 붙잡혀 들어갔다.
마치 유사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가련한 희생자 같았지만, 또 웃음소리가 들린 걸 보면 꼭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닌 듯했다.
“하읏.”
이불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웃음소리가 다시 간드러진 신음으로 바뀌었다. 끙끙 앓는 것처럼 연약한 흐느낌이 들리더니 기어코 아넬이 이불을 걷어 버리며 몸을 뺐다.
“안 돼요.”
아넬이 거절했지만 이불로 가려진 하체 쪽에서는 여전히 자레스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려 애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리와 다리 사이의 좁은 공간 속에서 자레스는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자레스….”
아넬이 애원하자 그제야 자레스가 멈췄다.
아직 선을 넘은 건 아니지만, 그도 이 이상 밀어붙이면 자신이 더 참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레스는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후우….”
자레스가 한숨과 함께 이불 밖으로 나왔다. 거미처럼 기어서 아넬의 위로 올라온 자레스가 그녀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멀어졌다.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
자레스가 바닥에 던져 놨던 카프탄을 뒤집어쓸 찰나였다. 돌연 말캉한 가슴이 그의 등을 짓눌렀다.
천천히 돌아보자 아넬이 발개진 얼굴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아침 햇빛이 흐릿한데도 그 빛을 받은 그녀의 몸이 눈부시게 하얗다.
아넬이 뚫어질 듯이 쳐다보는 그의 눈빛을 가르며 다가와 자레스의 입술에 촉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더니 살며시 속삭였다.
“사랑해요.”
이 악마. 대체 어디가 성녀란 말인가.
이 여자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다. 옛 설화에 신이 성자를 유혹하기 위해 내려보냈다는 검은 날개의 요정이 틀림없다.
자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게 그녀가 줄 수 있는 최선임을 안다. 정말로 사랑하기에, 몸은 열 수 없어도 마음만은 열어 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래. 그거면 돼. 나는… 그걸로 충분해.”
자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더 머물렀다간 정말로 그녀를 덮칠 것 같아, 자레스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
자레스는 이틀 만에 환궁했다.
아넬의 예상대로 폭풍이 몰아닥쳤는데, 자레스는 그를 핑계로 하루를 더 묵으면서 아넬과 시간을 보냈다.
돌아올 때는 변장을 한 채로 마디나로 들어왔다가 모처에서 옷을 갈아입고 황자궁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미행도 미처 따라붙지 못했다.
오자마자 황제가 불렀지만 자레스는 거절했다.
“소자가 비를 맞아 몹시 아픕니다.”
자레스가 아넬을 만나고 왔을 게 뻔했지만, 처벌할 빌미가 없었다.
성녀는 카비르에 없는 거로 되어 있는데 무슨 명분으로 벌을 내린단 말인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유가 역시 이를 갈았지만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반대로 스에반과 일리파스는 번갈아 가면서 사람을 보내와 만남을 청했지만 자레스는 모두 거절하고 틀어박혔다.
언제까지고 아넬을 숨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기에, 자레스는 퀴나에를 불러 동부에 사람을 보내도록 했다.
동부에 아직 남아 있는 칼리크 신도들의 장로를 불러들여 메타와 칼리크에 대해 더 깊이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발 산맥에서 가져온 고대서의 해독에도 박차를 가하게 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황궁의 시선이 몰려 있었다. 신중하게 움직이되, 용기를 내야 했다.
이제 그의 적수는 황제가 아니라 신이었다. 그의 심중에 가공할 정도로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레스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이 아넬은 우울한 감정에 빠져 있었다.
고작 그가 떠난 지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자레스가 그립고 허전했다.
겨우 진심을 털어놓은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억지로 마음을 다잡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범속한 여자가 돼 버린 걸까.
무서운 건 이제 자레스만이 아니라 그녀도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강렬하게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자레스가 무섭게 흥분했을 때, 사랑한다는 말뿐이 아니라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나도 열렬히 원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그에게 주고, 자레스와 희열을 같이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로 미쳤구나.’
아직도 세상이 멸망하던 순간의 기억이 생생한데, 혼자만의 욕망에 빠져 있었다. 그를 떠올리자 아넬은 기가 막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메타시여.”
습관처럼 신의 이름을 불렀다가 아넬은 흠칫 놀랐다.
내뱉은 것과 달리 신을 섬기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레스와 그녀의 사이를 훼방 놓는 방해자처럼 느껴졌고, 그의 말처럼 메타가 변덕스러운 파괴자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왔다.
“메타가 악신이고 칼리크가 선과 자비의 신입니다. 메타가 승리한 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무하립의 말을 믿고 싶은 건 그녀의 욕망 때문일까, 아니면 합리적인 의심인 걸까.
‘나는 메타를 숭배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만 하고 있구나.’
아넬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든 그녀가 신심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공포뿐이었다.
***
“자레스 황자가 그년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카에티가 확신하는 어조로 단언하자 그 속에 담긴 강렬한 증오에 제임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난감해했다.
카에티가 자레스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레스의 무시 때문에 뭉개진 자존심은 오히려 그가 아닌 그의 옆자리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낳게 했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그 자리를 가져야 했다. 제임이 전해다 준 소식 때문에라도, 자레스의 사랑은 얻지 못해도 정식 부인의 자리는 반드시 그녀가 가져야 했다.
“유가 황자가 성녀를 뺏어 갔다는 정보가 있다. 그가 성녀를 황제에게 바치는 대신 황태자 자리를 달라고 협상했다더구나.”
하지만 유가는 성녀를 뺏겼고, 아넬은 이제 자레스의 수중에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황제는 이번엔 자레스와 거래를 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자레스가 황태자가 될 게 뻔했다. 미래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부인이 돼도 좋다고 자처해야겠어요.”
“무슨 소리냐, 카에티. 네 자존심에 어찌….”
“두 번째라도 상관없어요. 그렇게라도 태후의 자리를 노려야지요!”
제임은 카에티의 언중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성녀가 성스러움을 잃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데,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는 건 메타를 숭상하는 카비르는 물론이고 아르드 안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레스가 아무리 성녀를 사랑해 봤자, 그녀에게서 아이까지 얻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성녀가 아이를 낳을 수는 있을까? 성녀가 누군가의 여자가 된 전례가 없으니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정식 혼인도 어려운데 감히 성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요? 성녀를 아무리 사랑해 봤자 그녀는 껍데기뿐이에요. 나를 아내로 맞이하게만 하면 돼요.”
“껍데기는 네가 될 수도 있다.”
“아니오! 자레스 황자도 후계자는 필요해요. 나는 반드시 그의 아이를 낳을 거고, 그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 거예요. 그러면 내가 태후가 되고, 카비르의 미래가 되는 거예요!”
‘이 아이는… 아들을 낳은 후에 남편을 죽일 생각이구나.’
카에티의 미래에 방해가 되는 남편을 살려 둘 리 없다. 황제를 죽이고 자신의 아이를 황위에 올린 뒤, 어린 황제의 뒤에서 카비르를 주무를 계획인 것이다.
자레스가 만만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만 어쨌든 카에티가 품은 그림은 그랬다.
남자를 이용해서, 그 남자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려는 카에티의 야망이 자못 오만하긴 해도 아주 허황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제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자레스가 차기 황제가 되면 우스라에는 희망이 없다.
집요하게 매달린 카에티가 꼴 보기 싫어서라도 우스라 일족을 중앙 정치에서 배제할 게 뻔하니, 차라리 지금 그와 억지로라도 인연을 맺어 두는 게 나았다.
전부 아니면 전무였다. 천천히 망해 가느냐, 아니면 끈질기게 버텨 모든 것을 손에 넣느냐.
제임도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연이 안 생길 것 같으면, 억지로 붙이기라도 해야지요. 후궁들에게 만남을 청해야겠어요.”
중얼거리던 카에티가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여자들에겐 여자들의 정치가 있는 법이에요.”
***
겉보기엔 고요했지만 물밑에선 수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카에티가 내실의 정치를 하는 동안, 신전 쪽에서도 새로운 궁리를 짜내고 있었다.
“성녀를 찾아낼 가망은 아예 없는 건가?”
대신관의 질책에 신관들은 고개를 숙였다.
신전은 잘 조직화돼 있지만 첩보전에 능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성녀를 찾아내고, 가두고, 교리를 잘 다듬어 포교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능할 뿐이었다.
천년 넘는 세월이 지속되는 동안 정치는 종교를 능가하기 시작했고,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교단의 세력은 세속 권력 속에 많이 녹아들었다.
성녀로 상징되는 종교 권력을 첨예화시키지 못한 게 실수였다.
성녀를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고 따로 분리해 가둬 놓는 데만 집중했기에, 신전은 조직화엔 성공했지만 그 정점에 성녀 말고 다른 수장을 두지 않은 탓에 하나로 뭉치는 데는 실패했다.
“송구합니다, 예하.”
신전은 잘 단련된 정예 조직의 정보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신전에서 아무리 힘을 써 봤자 자레스처럼 비밀리에 사람을 부리는 데 능숙한 자를 염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신관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신전 공사를 빌미로 폐쇄됐던 신전에 다시 모이긴 했지만, 감시의 시선이 많아서 드러내 놓고 움직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신전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대신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에는 형태가 없는 메타 대신 초대 성녀의 모습을 상상한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성녀.
그들이 찾아내고 길러 내고, 관리하며 숭배하는 모순된 존재.
“하는 수 없지.”
말하자면 성녀는 그들에겐 예쁜 애완동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한 마리밖에 없지만, 반드시 그 예비는 준비돼 있다.
애완동물이 말을 듣지 않고 주인을 물면, 죽이고 또 데려오면 된다.
“다음 대 에포메니를 찾아내세.”
키리아가 죽고 아넬이 새 성녀가 됐으니, 이제 또 그녀의 예비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신전 조직은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언젠가는 에포메니를 찾아낼 것이다.
원래 에포메니가 성녀가 되면 바로 다음 대 에포메니를 찾아내는 게 신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탈라사 대신전에 전서구를 날리게. 아마 탈라사 대신관도 이에 동의할 거야. 거기를 시작으로 성력 시험을 시작하세.”
세 살에서 네 살 사이의 여아를 교구 신전에 모아들이고 시험을 시작한다.
아르드 전역에 걸쳐 시험을 해야 하므로 시간은 걸릴 테지만, 늦어도 반년 안에는 반드시 에포메니를 찾아내게 돼 있다.
아르드의 인구가 1억을 넘지 않았고, 각 교구 단위로 내려가면 생각보다 그 나이 대의 여아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야. 만약에 에포메니가 빨리 발견된다면.”
잠시 말을 끊은 대신관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다음엔 성녀를 갈아 치워야지.”
***
카에티의 손길이 뻗은 곳은 라키사의 내실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최근 들어 황제의 총애를 차지한 여자였고, 라키사 이후로 들어온 여자들은 후궁의 지위에도 오르지 못한 채 한두 번 안긴 다음 내쳐졌다.
라키사는 제대로 머리를 쓸 줄 아는 후궁이었다. 그렇기에 카에티는 라키사에게 만남을 청했다.
라키사는 아들을 낳은 덕분에 별궁을 따로 하사받았는데, 카에티는 그 별궁에 초대됐다.
카에티는 시중에 떠도는 한담을 나누고 성녀의 행방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다음 준비해 온 상자를 열었다.
“디아스포라입니다. 동부 고원 지대에서 발견된 걸 우스라가 손에 넣어 장인에게 가공하도록 했지요.”
“어머나. 정말 아름다워요.”
상자 안에선 보랏빛의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보석을 들어 본 라키사는 곧 보석이 보랏빛이 아니라 투명한 색깔이란 걸 깨달았다.
색이 없는 무색의 보석은 광원에 따라 다양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색깔이 변하는 게 매력적이었다.
“햇빛에 비추면 담청록색이 된답니다. 정오의 날카로운 햇볕 아래 비춰 보면 진한 녹청색으로 바뀌지요. 저녁에는 또 그 색이 심홍색으로 변하니, 시간마다 다른 보석이 되는 셈이에요.”
“디아스포라는 세공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완벽한 것을 구하셨지요?”
“별것 아닙니다. 우스라는 비록 중앙에 진출하진 못했지만, 정치에 참여하는 대신 재주 있는 장인을 키우는 데 힘을 기울였거든요.”
“부럽습니다. 저는 변변한 친정이 없어서 늘 든든한 뒷배를 가진 분들을 부러워했어요.”
“꼭 든든한 뒷배가 친정이어야만 할까요? 진정한 친구는 폭풍을 막아 주는 벽처럼 안전한 법이지요.”
은근한 웃음이 오갔다. 진정한 친구라. 거래로 시작되는 관계가 과연 ‘진정한’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손잡을 상대가 여럿이어서 나쁠 건 없었다.
라키사는 믿을 구석이 황제밖에 없는 만큼 이러한 접근이 내심 반가웠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요.”
라키사가 은근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우정에 보답할 길이 뭐가 있을까요? 저 라키사는 친구의 후의를 그냥 흘려버릴 정도로 후안무치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한 가지, 소박한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카에티는 제법 담대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말을 돌리는 법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마마, 황제 폐하께 저와 자레스 황자의 혼인을 명하게 해 주세요.”
예상을 어긋나지 않는 대답에 라키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카에티가 자레스 황자와의 혼담에 매달린다는 소문은 들었다.
원래는 혼사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었는데, 하필 성녀가 나타나면서 자레스가 그녀에게 마음을 뺏겼다는 것도.
“가엾어라. 남자의 마음은 정말 갈대와 같아요. 약혼녀를 두고 가질 수도 없는 여자에게 손을 대다니, 자레스 황자가 정말 신의가 없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마음을 둔 제가 잘못이지요. 미래의 남편이 엇나가는 걸 지켜볼 수 없는 게 아내 될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답니다.”
“날 믿으세요, 카에티.”
카에티가 자레스와 결합해서 나쁠 건 없었다. 카에티가 성녀를 제치고 자레스의 사랑을 쟁취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함정을 여러 군데 파 둬서 나쁠 것도 없다.
자레스 황자 주변에 독사를 던져 넣으면, 어쨌든 알아서 구실을 할 것이다.
“제 별궁에 며칠 머물렀다 가시겠어요? 우리 아쉬갈이 아직 어리지만 미인을 참 좋아한답니다. 제 아들과 놀아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럴게요, 마마. 저야 영광이지요.”
“카에티 님은 황제의 여자가 아니니, 폐하의 허락만 받으면 내정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 거예요. 제 친구인데 당연히 허락하시겠지요.”
라키사가 은밀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정을 거닐다 보면 자레스 황자와 만날 기회도 있지 않겠습니까?”
뜻이 통한 두 여자가 마주 웃었다.
마치 두 마리 독사가 제 짝을 만나 서로 혀를 날름거리는 듯했다.
***
카에티와 라키사의 만남이 있은 지 며칠 후, 황제가 자레스를 불렀다.
그동안 아프다고 계속해서 핑계를 대고 두문불출하던 그였지만, 이번엔 황제가 우스라를 입에 올렸다.
그래서 안 올 수가 없었다. 카에티가 뭔가 수를 부렸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현실에서 만난 황제는 대뜸 입을 열었다.
“네가 혼인할 나이가 되었지?”
유가가 첫 부인을 맞은 게 열여덟이었으니 솔직히 이미 한참 지났다.
일리파스는 바람둥이인지라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한 탓에 아직 정식 아내가 없지만, 스에반을 비롯한 다른 황자들은 이미 성혼한 뒤였다.
오직 자레스만 그 나이까지 혼자였는데, 여태 관심도 없던 그의 혼사에 왜 갑자기 관심을 기울이는 걸까.
“우스라와 이미 혼담이 오가고 있다 들었노라.”
“깨진 지 오래입니다. 우스라에서 제가 보낸 혼인 예물을 팔아 치우고, 저를 모독하였기에 혼사를 취소하였습니다.”
“허물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혼담을 깰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안 그래도 우스라에서 그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고, 다시 정식으로 혼담을 넣기를 짐에게 청원하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짐이 정식으로 황명을 내리노니, 자레스 황자여. 우스라의 외동딸과 혼인하거라.”
자레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에티가 뭔가 수를 썼군.’
당장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제임이 움직였거나 그 아비가 움직였을 수도 있지만, 그의 예민한 촉은 카에티에게 가 닿았다.
우스라는 황제를 직접 알현할 수 있을 정도의 권세가 없었다. 하지만 카에티라면 내실의 여자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라키사인가?’
현재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라키사가 청탁을 넣고, 황제는 자레스를 옭아맬 겸 그를 들어주고.
“아바마마. 소자도 좋아하는 여자와 혼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황제가 내리는 여자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있지. 너는 짐의 신민이 아니란 말이냐?”
“기왕이면 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내려 주십시오. 우스라는 싫습니다.”
“짐은 그 우스라의 여식이 마음에 들더구나. 총명하고 아주 다부지다 들었다.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였지. 오랫동안 혼자 지낸 너와 아주 잘 맞는 짝이 될 것이다.”
“혼자 지내기로는 일리파스 형님이 더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일리파스는 처족의 신세를 질 정도로 사정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너는 아니지 않느냐.”
짐짓 생각해 주는 것처럼 황제가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렸다. 부인할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비록 아넬에 대한 마음을 깨닫기 전이었지만, 실제로 자레스는 그런 이유로 우스라에 혼담을 넣었다. 그게 고스란히 돌아온 것이었다.
피해 가기 어렵기도 했지만 그럴 만한 핑계도 없었다.
“아니면 따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 황명을 거부하는 게냐? 혹시 성녀에게 마음이 있어 그런 것일까?”
“이미 카비르를 떠난 사람에게 미련을 둬 뭐하겠습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짐이 권하는 혼사를 거부할 리도 없겠구나. 황제가 직접 주선하는 혼사는 영광스러운 것이니라.”
“…….”
“언제부터 황명이 저 좋으면 받고, 싫으면 거부하는 것이 되었느냐? 아들아, 짐은 이미 너의 교만한 행태를 많이 봐주었다.”
“성은이 망극할 뿐입니다, 아바마마.”
“망극한 걸 아는 놈이 이리 버텨? 짐이 몸소 혼사까지 주선해 주었는데, 나의 호의를 이리 거부한다면 내 네가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 건 아닙니다.”
“허면?”
잠시 말을 멈췄던 자레스가 침중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우스라의 딸과 혼인하겠습니다. 다만 시기는 미뤄 주십시오.”
“뭐라?”
“제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혼인은 하겠지만 카에티를 첫 번째로 맞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소자의 사정도 생각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정은 무슨 사정!”
“유감스럽지만 카에티는 첫 번째 부인이 될 재목은 아닙니다. 첫 번째 부인이라면 마음이 넓고 내실을 잘 다스리며 관대한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카에티는 그런 여자는 아닙니다.”
“어찌 그리 잘 아느냐?”
“소자가 한때 우스라의 여식에게 호감이 있어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 여자는 아름답긴 하지만 투기가 아주 심하다는 것을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라키사가 속살거린 말 중에도 카에티의 성격이 보통은 아닌 것 같다 했으니.
“명령이시니 혼인은 하겠습니다만, 제가 자리에 맞는 첫 번째 여인을 찾을 때까지는 기다리라 전해 주십시오.”
“푸하하하핫!”
갑자기 황제가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치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이 순간에도, 자레스는 활로를 뚫었다. 아들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의 지략과 배짱만큼은 인정해 줘야 했다.
“아들의 내실이 어지러워지는 걸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좋다. 혼인만 한다면 순서는 신경 쓰지 않겠다.”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아바마마.”
담판이 끝났다. 얼핏 보기엔 자레스가 밀린 것 같았지만, 피차 얻은 게 있는 만남이었다. 두 사람 다 만족하여 물러났다.
자레스를 보낸 뒤, 황제는 라키사를 불러들였다.
“자레스가 제법 머리를 쓰더구나.”
“머리를 쓰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카에티와 혼인은 하겠다 했지만, 순서는 자기가 정하겠다 했다. 이리되면 카에티는 언제 혼인을 할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일이 그리되는 건가요?”
“그렇지. 짐의 명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실속은 녀석이 챙긴 것이다. 순서를 자신이 정한다 했으니, 카에티는 어디 시집도 못 간 채 자레스가 계속해서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을 구경해야 하는 것이야.”
황제의 설명에 라키사가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자레스 황자, 역시 보통은 아니군요.”
카에티에게 뇌물은 받았지만, 딱히 그녀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이걸로 제 할 일은 다 했으니, 나머지는 카에티가 알아서 해야 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전해 주기는 해야겠지? 소식을 들으면 그 도도한 여자가 아주 펄펄 날뛰겠구나.’
카에티 역시 귀족의 딸이라고 콧대가 아주 높은 게, 라키사는 꼴 보기 싫었다. 비록 우정이란 이름으로 손을 잡긴 했지만, 내심 그녀가 망신을 당하는 게 기꺼웠다.
독을 가진 짐승끼리의 우정이란 말로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카에티의 얼굴이 퍼레질 걸 상상하니 즐겁기까지 해서, 라키사는 별궁으로 돌아온 즉시 카에티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카에티가 분노로 얼굴을 붉히는 걸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카에티는 참지 않았다.
라키사의 전언을 듣자마자, 카에티는 벌떡 일어나 별궁을 나왔다.
라키사가 말을 전하면서 즐거워 보였다거나, 이 소문을 당장 내궁에 퍼뜨릴 게 뻔하다든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얼른 달려가서 자레스를 붙잡아야 했다.
다행히 자레스는 아직 본궁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가 나타나자 성녀의 행방을 알고 싶었던 내관들이나 각료들이 그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내정은 황제의 본궁과 그를 감싸는 내성 벽까지의 공간이었다. 본래는 재상이나 각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지만, 황제의 후궁들도 얼굴을 가린 상태라면 이 내정을 오갈 수 있었다.
카에티는 그 내정을 달려, 막 외성 쪽으로 빠져가려는 자레스를 붙잡았다.
“뭐지?”
자레스가 불쾌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욕감이 느껴졌지만, 카에티는 씨근덕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혼담을 허락했다 들었습니다.”
“그러겠다고 했소. 뭐, 이제 와서 무를까?”
“…첫 번째는 포기하겠습니다, 전하.”
“뭐라고?”
예상 밖의 답변에 이번엔 자레스가 놀랐다.
“대신 두 번째로는 맞아 주십시오. 성녀를 데려오든, 다른 여자를 데려오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두 번째는 저를 아내로 맞아 주세요.”
“허어.”
자레스는 코웃음을 쳤다. 이 오만한 여자가 두 번째 부인이라도 자처하겠다 하는 걸 보니, 카에티가 급하긴 했던 것이다. 자존심을 접고 머리를 쓰는 게 눈에 보였다.
“그건 내 마음이오. 우스라의 카에티.”
“전하.”
“세 번째, 네 번째가 될지 아니면 백 번째가 될지 그건 아무도 몰라. 그러니 당신은 내가 우스라와 혼인을 할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리시오.”
“전하!”
“이미 황명이 내려졌는데 어찌할 텐가? 조른 건 그쪽이니 다시 물러 달라고 할 수는 없겠지? 폐하께서는 혼인만 한다면 순서는 상관없다고 이미 명하셨소.”
“…후회하실 겁니다.”
“그대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더 후회하겠지. 아니지, 내가 그대를 아직 죽이지 못한 걸, 나는 더 후회해.”
섬뜩하게 낮아진 목소리에 카에티가 그를 쳐다봤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선을 내리긴 했지만, 그의 목소리엔 절절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한 번 더 그녀를 건드리면, 그때는 내가 당신의 목을 꺾고 당신 아버지와 오라비의 목을 베어 아이들에게 차고 다니라고 내줄 거야.”
‘한 번 더’라고 조건을 달았지만, 내심으로는 이미 우스라를 멸족시킬 걸 다짐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보다 더 큰 적을 멸하고 난 뒤. 카에티에 대한 복수는 그때 이뤄질 것이다.
“지금 목이 부러져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 앞에서 꺼져.”
협박이 아니라 정말로 실행할 것 같았다. 기에 밀린 카에티가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자레스가 입아귀를 비틀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좋은 아내가 될 거라 믿소. 반드시 당신과 혼인할 테니, 나를 믿고 기다려 주시오.”
눈빛과 전혀 다른 말을 흘리며 그가 들으라는 듯 크게 외치자, 내정을 오가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잠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라키사도 그렇고, 지금 그들의 대화를 들은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나불대며 그녀가 당한 굴욕을 소문내리라.
카에티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제 할 말을 마치고 뒤돌아 내정을 빠져나가는 자레스의 뒷모습을 카에티가 독살 맞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레스는 적어도 그녀에게 이런 모욕은 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몰아간 것은 카에티였지만,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의 잘못보다는 그녀에게 돌아온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더 커져 있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성녀를 걸레로 만들어 주지.”
사라지는 자레스를 향해 카에티가 파랗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치적으로는 자레스가 그녀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사랑 같은 건 믿지 않기에 계산이 맞으면 부부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여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계산이었다.
감정이란 것은 이해타산으로 저울질할 수 없는 것이었고, 먼저 거래를 제안했던 자레스는 어느새 아넬에게 눈이 멀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카에티도 자레스와 닮은 점이 있었다. 이제 그녀도 자레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해 눈이 멀었으니까.
“성녀를 내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겠어. 자레스 황자. 당신이 성녀를 독점할 수 없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야.”
이를 악물며 내뱉은 카에티가 이윽고 궁을 나갔다.
***
“저 여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본궁의 2층에서 그 광경을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일리파스가 중얼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악담이 오고 간 건 알겠다.
남녀가 저렇게나 서로를 증오하는 눈으로 쳐다볼 수 있다는 걸, 일리파스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혼담이 오가던 상대가 성녀에게 빠졌으니 당연히 미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저라면 따귀라도 올려붙였을 겁니다.”
“음, 우스라의 딸이 저렇게 나오는 건 이해가 가지만, 자레스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성녀님에게 빠지니 옛 약혼자가 귀찮아서 저러는 건가? 하지만 저렇게까지 미워할 일이냔 말이야.”
유가만 한 정보 조직을 갖고 있지 않은 일리파스는 놓치고 있는 것이 많았다.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에게 약하기도 한 일리파스로서는 자레스가 옛 약혼녀를 왜 그렇게 증오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성녀님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서야 우스라의 딸 정도로 만족할 수가 없겠지. 아아, 성녀시여.”
자레스가 성녀를 어딘가에 숨겨 두고 있다는 건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미행을 붙여도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자레스는 번번이 미행을 따돌렸고, 그 솜씨는 날이 갈수록 능숙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상사병이 심하게 든 일리파스는 거의 자레스 못지않게 미쳐 가는 중이었다.
이 세상에 성녀보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여자는 없었다.
아넬을 만난 뒤로 그의 눈은 극히 시야가 좁아졌다. 사고의 폭 역시 마찬가지가 돼서, 이제 황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성녀님과 결혼할 수 있다면!’
그러면 세상의 행복은 모두 자신의 것일 것만 같았다. 아넬이 그를 향해 웃어 주고,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고 마주 바라볼 수 있다면, 황관 따위는 필요 없을 듯했다.
“마카르. 차라리 자레스에게 다른 여자를 붙여 주면 어떨까?”
“방금 전 성녀님을 본 뒤에는 어떤 여자도 눈에 안 들어올 거라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황위에 오르도록 지원해 주겠다면 어떨까?”
“…글쎄요. 차라리 그쪽이라면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전하, 정말로 황위에 미련을 버리신 겁니까? 그 정도로 성녀님이 좋으세요?”
“당연하지! 자네도 성녀님을 뵈면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야. 그래, 차라리 거래를 하도록 하지. 마카르, 자레스에게 밀사를 보내게.”
마카르는 눈치가 빨랐기에 당연히 자레스가 거절할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서는 대체 여자 하나 때문에 황위도 버리겠다는 일리파스나 자레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핏줄 탓인가? 황자가 둘씩이나 저 모양이라니, 이럴 거면 차라리 유가 황자에게 줄을 설 걸 그랬어.’
오늘도 수명이 한층 더 짧아지는 기분이었다.
일리파스의 좋은 점은 의외로 허술한 데가 많아서 빼돌릴 게 많다는 것인데, 이제 그 이점이 단점을 더 넘어서고 있었다.
마카르도 목숨은 아까웠기에, 슬슬 몸을 뺄 기회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마침 그때 그가 부리는 밀정 중 한 명이 달려왔다. 그에게서 귀띔을 받은 마카르가 신난 얼굴로 외쳤다.
“전하. 성녀가 숨어 있는 은신처를 발견했답니다!”
“정말인가?”
일리파스의 얼굴에 화색이 폈다. 그 즉시 마카르와 수하 사병들을 거느린 일리파스가 해안에 있다는 은신처를 향해 달려갔다.
***
바닷가는 적막했다. 숲을 뚫고 나온 일리파스와 마카르는 소금기를 품은 마른 벌판 위에 달랑 세워져 있는 저택을 발견하고 말 배를 걷어차며 달려갔다.
“뭔가 이상한데?”
일리파스가 단순하긴 해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수상한 점을 바로 눈치챘다.
성녀를 숨긴 장소라면 당연히 호위병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하를 여럿 거느리고 접근하는데도 아무도 튀어나오는 자가 없었다.
전투를 대비해 일부러 사병을 2백 명이나 끌고 왔는데 반응이 전혀 없다. 불길한 예감이 치솟았다.
“이게 뭐야!”
예상이 맞았다. 바닷가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넬은 물론이고 호위병도 없었고 버리고 간 침대와 가구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는데, 이미 한참 전에 떠난 듯 냉기가 가득했다.
한발 늦었다. 아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심지어 침대보가 찢어져 있고, 가구들도 서랍이 튀어나온 채 뒹굴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이 떠난 뒤에 누군가 이미 침입한 듯했다.
일리파스는 남들이 다 알고 난 뒤에야 달려온 것이다.
“대체 정보원이 누구야!”
일리파스가 마카르의 멱살을 잡기 위해 그를 찾았지만, 눈치 빠른 그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
그 시간 아넬은 또 다른 은신처에 있었다.
이곳에 온 지는 이미 사흘이 넘었다. 보안을 위해 주기적으로 은신처를 바꾸기로 했는데, 이번에 온 곳은 깊은 산중이었다. 들어오는 데만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어느 귀족의 여름 별장으로, 귀족이 죽고 나서 방치된 것을 사들였다고 했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져 있었는데, 병풍처럼 저택을 둘러싼 산에 여름꽃이 만발해 몹시도 아름다웠다.
아넬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산세에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이렇게 꽃이 많이 핀 걸 본 건 처음이에요.”
“당신은 뭐든지 감탄하는군.”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온 적이 없는 걸요. 아니… 산에 올라온 것도 처음이에요. 신전 근처에는 항구를 낀 작은 마을밖에 없어서, 외출해 봤자 거기까지였어요.”
보이는 건 바다와 섬마을뿐인 아주 좁디좁은 세계에 갇혀 살았다.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라면서 항아리 안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것이다.
자레스는 새삼 썩 행복하지 않았던 아넬의 삶에 혀를 찼다.
“계곡물이 꽤 거치네요.”
“별장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호수가 있어. 거기서 물이 내려오는 덕에 계곡치곤 물이 많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피곤하지 않다면 이따 호수에 가 보지.”
사실은 피곤했지만, 호수란 걸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아넬은 선뜻 따라나섰다.
바다는 질리도록 보고 자랐지만 호수나 산은 모두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갇혀 살았는지 실감이 나서, 아넬은 설레는 마음으로 자레스가 모는 말 앞에 앉아 호수로 올라갔다.
등 뒤로 그녀와 밀착한 자레스의 몸이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넬은 그에게 편히 몸을 기대며 기대로 달뜬 얼굴을 보여 줬고, 그 모습은 무뚝뚝한 자레스를 흔연히 웃게 만들었다.
“아아.”
마침내 오르막길이 끝나고 호수가 나타나자 아넬은 바로 감탄성을 흘렸다.
산에 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호수였다.
산봉우리들 사이에 자리한 호수는 마치 물감을 녹여 낸 것처럼 밝은 청록색으로 빛나는 게, 마치 하늘에서 떨어뜨린 커다란 보석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호숫가에 나룻배 한 척이 있었는데, 평소엔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 산 정상으로 오갈 때 쓰는 것이었다.
자레스가 명하여 빌려 놓은 지금은 나룻배에 햇빛을 가릴 천막이 처져 있었고, 뱃전에 푹신한 쿠션도 놓여 있었다.
먼저 배에 오른 자레스가 손을 내밀자, 아넬이 그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배에 탔다. 호위병이 배를 밀어내자 나룻배가 가볍게 호수의 잔잔한 물 위에 떴다.
“직접 배를 젓게요?”
자레스가 노를 잡자 아넬이 놀라 물었다. 황자쯤 되는 이가 노를 젓다니 보기 드문,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작 자레스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노예로 살 때는 매일 노역을 했는데, 노 젓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뭣보다 둘만의 공간에 훼방꾼을 들여놓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연약한 아넬에게 노를 젓게 하는 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넬은 앞으로 펜보다 무거운 건 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발이 땅에 닿는 일도 없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오늘 별장에 드나들 때도 아넬은 자레스에게 안겨 있었는데, 자기도 발이 있다고 아넬이 항의했지만 그는 모른 척 외면해 버렸다.
어느새 배가 호수 중심으로 나갔다.
바람이 적당한 까닭에 물도 잔잔했다. 살짝 일렁이는 은파를 타고 호수 위로 밀려온 바람은 딱 시원하게 느껴졌다.
호수를 빙 둘러싼 산등성이에 피어난 꽃 냄새가 실려 있어, 정취는 더욱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조각배를 탄 적이 있네요. 두 번이었던가.”
신전에 살 때는 항구 마을로 나갈 때도 거창한 배를 타고 갔었다. 에포메니로서의 위엄도 있고, 안전 문제 때문에도 그랬기에 조각배를 탄 적은 거의 없다.
“그때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싫었어요.”
“왜?”
“그 두 번이 모두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요. 한 번은 당신과 신전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또 한 번은….”
“아.”
자레스는 그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첫 번째는 자레스가 에포메니를 납치하겠다고, 그 에포메니인 아넬을 강제로 태워 신전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두 번째는 아넬이 탈출했다가 칼리크 교도로 간주됐을 때였다. 그때 아넬은 신도들과 함께 수장되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바다로 끌려 나갔었다.
두 번의 경험 모두 끔찍한 것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두가 자레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실 그녀가 겪은 고난과 수모 모두 대부분 자레스로 인한 것이었다. 그래 놓고 이제야 사랑한다고 매달리다니, 수치심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건 제발 잊어 줘.”
그가 나지막이 말하자 흙빛으로 물든 그 얼굴을 본 아넬이 난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을 책망하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알아. 하지만 내 잘못이 맞지. 나는… 항상 제멋대로였어. 노예라는 이유로 당신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혔어. 에포메니란 걸 알았으면, 아마도 그보다는 훨씬 더 소중히 대했겠지.”
손익에 따라, 혹은 지위에 따라 사람을 도구 취급하고 이용했던 그에 비해 아넬은 어떻게 했던가.
계급과 혈통을 따지지 않고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겐 아낌없이 힘을 베풀었다.
때로는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도 아넬은 목숨을 걸고 나섰고, 가장 고귀하다는 여자가 제일 낮은 곳까지 내려가는 걸 피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자유가 될 기회가 왔을 때도 자레스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으며, 그 결과로 그는 살아남아 아넬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이쪽으로 오겠어?”
자레스가 손을 내밀었다. 아넬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자레스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자레스의 곁에 앉자 그가 아넬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연스럽게 그에게 머리를 기대게 했다.
호수 위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보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체취가 훨씬 더 좋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그에게 빠지게 된 걸까. 가까이 앉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사내 노예로 알았을 때부터 아넬에게 끌렸었다. 그 역시 노예였지만 그녀처럼 위대하지도 못했고, 남을 위해 헌신할 줄도 몰랐다.
사는 것만이 목표였고 그걸 당연하다 여기며 합리화했기에, 그와 달랐던 아넬에게 열패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강제로 굴복시키려 들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녀는 짓밟아도 꺾이지 않는 고결한 여자였다. 아넬은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혀도 그 물을 성수로 만들었을 것이다.
성력이 있어 성녀가 아니라, 그러한 인격을 가졌기에 성녀라 불려 마땅했다.
그러니 아넬을 남자라 생각했을 때도 결국은 그에 매혹된 것이다.
그가 갖지 못한 것. 아무 조건 없는 선의와 자비. 그건 천상의 빛처럼 어둠 속에 웅크린 자레스를 비춰 기어코 그를 양지로 끌어올렸다.
“당신이 나를 구원해 줬어.”
짤막하게 덧붙이자 아넬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자레스가 입술을 내려 그런 그녀에게 키스했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있는 법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으음.”
아넬이 부드럽게 입을 열어 그를 맞이했고, 두 사람은 한동안 고요한 호수 위에서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다.
세계가 모두 사라지고 아넬과 자레스만 남은 것 같았다. 지금만큼은 그래도 좋겠다는 아득한 만족감과 안온함이 두 사람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