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어디선가 맑은 바람이 흘러들어 오는 것 같았다. 코끝에서 청신한 향이 느껴졌고, 그러자 아넬은 갑자기 누가 밀어낸 것처럼 무의식의 세계에서 튕겨져 나왔다.
‘여기가 어디지?’
아넬은 벌떡 일어나 사방을 돌아봤다.
유가의 침실도 아니었고, 자레스의 황자궁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석조 재질의 방이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
창문이 닫혀 있었지만, 버긋이 벌어진 틈새로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바닷가 근처인 것 같았다.
아넬의 기억은 유가의 침실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었기에, 갑자기 엉뚱한 방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아넬.”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를 이끌었다.
돌아보니 자레스가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는 게 보였다.
“자레스 황자!”
놀라움과 반가움이 더럭 밀려왔다. 하지만 그 뒤를 잇는 건 당황스러운 감정이었다.
자레스가 왜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걸까. 처음 보는 미묘한 표정이 낯설었다.
아넬은 주춤거리며 자레스에게 물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그러고 보니 유가 황자는….”
“그놈 이야기는 그만두지.”
“다, 당신이 날 구해 줬나요?”
“그래, 아넬. 유가 놈이 당신을 범하기 위해 미약을 먹였지. 그 직전에 내가 놈의 방에 뛰어들어서 당신을 안고 나왔어.”
기억이 났다. 밤새 목이 타서 고생하던 그녀에게 시녀가 음료수를 내밀었던 것. 그리고 유가의 침실로 끌려갔던 것.
그 뒤는 기억이 흐릿하다. 그런데 그 흐려진 기억 속 군데군데에서 자레스의 경악한 얼굴이 그림자처럼 떠돌았다.
그녀의 쉰 목소리도 마치 남의 것인 것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약에 취해 사랑한다고 속삭였었다. 그에게 매달려 흐느껴 울다가, 그리고….
“헉!”
“…기억이 났나 보군.”
제가 저지른 일을 믿을 수가 없어서 아넬은 입을 틀어막았다.
모든 걸 털어놓은 걸까?
기억은 토막 나 있었다. 하지만 떠올리려 애쓰자 그 부분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메타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던 것, 당신이 나를 범했다고… 그래서 아르드가 멸망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아넬은 할 말을 잃어 망연해졌다. 자레스가 그런 아넬을 지그시 쳐다보다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당신 말을 들으니,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게 짜 맞춰지더군.”
예전에 성녀가 됐을 때는 키리아가 죽지 않았다고 말한 것, 세레그의 내부 사정을 지나치게 잘 알았던 것, 사랑한다면서도 절대 안기지는 않으려 그렇게 밀어냈던 것.
모두 이미 한 번 경험했으니까 그랬던 것이다. 세계의 멸망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에, 자레스와 몸을 섞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말해 줘.”
자레스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아넬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애정이 담긴 입맞춤이었지만, 그녀를 노려보는 눈 속에는 집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대로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다 털어놓을 때까지 그녀를 괴롭힐 거라는. 그보다 더한 짓도 할 거라는.
눈물이 뺨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슬프고 두려웠지만 차라리 속이 시원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녀의 입이 마침내 열렸고,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거라 여겼던 진실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다 털어놓고 나니 혼자만 간직하고 있느라 토할 것만 같았던 벅찬 무게감이 드디어 사라져서 아넬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가 되면 나를 만날 게 뻔하니 노예로 변장해서 도망쳤다, 이거로군. 이제야 의문이 풀렸어.”
왜 하필 노예를 자처하면서까지 신전을 도망쳤을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았다.
그런데 그 탈출이 오히려 그녀를 자레스에게로 이끌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운명이란 모순덩어리다.
‘아넬이 그대로 신전에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결국은 그녀를 만나게 됐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메타는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운명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쫓아 보냈는데도 결국 아넬은 그에게로 돌아왔고 기어코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목숨을 걸고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뭘까.
묵묵히 흐느껴 우는 아넬을 바라만 보고 있던 자레스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그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자가 과연 진정한 신인가?”
그의 물음에 아넬이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성녀가 약탈당한 데 분노했으면, 나만 죽였으면 돼. 그 정도 힘을 가진 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어.”
“……!”
“그런데 메타는 그러는 대신 당신을 비롯해 아르드 전체를 소멸시켜 버렸다. 그게 무슨 선의 신이고 자비의 신이지?”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자레스의 말이 맞았다. 메타의 복수는 그에게만 향해도 됐었다.
하지만 분노한 메타는 자레스는 물론이고 아르드인 전부를 죽여 버렸다. 심지어 그의 은총의 상징인 아넬까지 죽였다.
격분한 나머지 충동적으로 저질렀다고 하기엔 선의 신이라는 메타의 본질과 들어맞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들이 갑자기 뒤집히며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저희 칼리크의 신도들은 메타와 칼리크의 위치가 서로 뒤바뀌었다고 배워 왔습니다. 성녀님께선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희의 가르침 속에서는 칼리크가 빛의 신이자 자비의 신입니다.”
문득 메타와 칼리크가 뒤바뀌었다는 무하립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때 자레스가 또다시 끼어들며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넬, 정작 당신은 수명을 깎아 가며 사람들을 구하려 드는데, 신은 당신보다 더 잔인해.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모두 죽여 버리는 신이 무슨 자비의 신인가. 게다가 성녀의 순결이 아르드인의 목숨 전체와 바꿀 정도로 중요하다면, 당신은 대체 왜 죽인 거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메타가 과연 그녀를 사랑하긴 한 걸까?
그가 사랑과 자비의 신이고 선의 신인 게 맞긴 한 걸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아넬을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
폭동은 결국 진압됐다.
카비르 제국의 치안력이 그리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다.
방심한 탓에 황궁 문은 쉽게 뚫렸지만 곧 근위대가 달려와 폭도들을 닥치는 대로 베기 시작했고 그들은 황궁 이리저리로 도망치다가 살해되거나 아니면 요령껏 몸을 빼서 달아났다.
마디나 시내에서 점점 불어나던 폭도들은 마디나를 방어하는 중앙 상비군이 출동하면서 더 큰 무리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당했다.
그 와중에 황궁은 큰 피해를 입었다.
황제가 있는 본궁은 무사했지만, 폭도로 변한 백성들이 황자궁들을 약탈하면서 황자들의 피해가 커졌다.
제일 크게 당한 것은 유가의 궁이었지만 자레스의 궁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부러 혼란을 유발해 그 와중에 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문을 열어 놨기 때문에, 폭도들은 자레스의 궁 안 여기저기를 부수고 패물을 훔쳐 달아났다.
물론 정말 귀한 물건들은 이미 창고에 옮겨 놓은 뒤였기 때문에 실제 피해는 적었지만, 여기저기 파괴된 곳이 많았기에 겉보기엔 유가 못지않게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자레스는 엉망이 된 자신의 궁으로 일단 돌아왔다. 돌아가지 않으면 그가 아넬을 데려갔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신 폭도들을 피해 궁 밖으로 도망쳤다는 핑계를 댔고 아넬을 데려간 게 자레스란 걸 뻔히 알았지만, 증거가 없기에 황제와 유가는 그를 벌할 수 없었다.
근위대장이 병사들을 끌고 자레스의 황자궁에 찾아왔지만, 자레스는 볼멘소리로 그들의 속을 긁었다.
“성녀를 내놓으라니 무슨 소리인가? 성녀는 유가 형님이 데리고 있었잖은가. 근위대가 무능해서 무뢰배가 궁을 휘젓고 다니도록 내버려 둬 놓고선 왜 나한테서 성녀를 찾는 거지?”
공식적으론 성녀는 황궁에 없었던 거로 돼 있었다. 폭도들이 그렇게 들쑤셔 댔지만 유가의 궁은 물론이고 다른 황자궁에서도 성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소문을 믿고 날뛴 게 되어 궁에 침입한 폭도들만 처벌받았다.
자레스는 오히려 자신이 입은 피해가 제일 크다며 근위대장을 문책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 안 그래도 분노한 황제와 유가를 더욱 약 오르게 만들었다.
“백성들을 선동한 것도 놈의 짓이겠지. 분명 폭동 와중에 빼내서 성녀를 마디나 어딘가에 숨겨 놨을 것이다.”
하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었다. 파란 눈이란 것만으로 자레스를 성녀를 납치한 범인으로 몰 수는 없었다.
황제가 자레스를 유폐하려 시도했지만, 명분이 없었다.
당장 재상 회의에서 반대가 심했고, 그보다는 다시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민심을 다스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유폐령은 취소됐고, 황제는 일단 그의 궁 주변을 감시하기로 했다.
성녀가 카비르에 있다는 소식은 이제 마디나를 넘어 카비르 전체에, 바야흐로 아르드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위험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
아넬의 새 은신처는 평화로웠다.
여기가 바닷가라는 것 말고는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근처에 집이 한 채도 없다는 것만은 알아냈다.
둥글게 휘어진 만 안쪽으로 백사장이 있었고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간 야트막한 언덕에 이 집이 있었다.
집 앞마당 앞쪽으로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벌판을 조금 더 지나 숲이 있긴 했지만, 누가 나타나도 벌판을 지나오는 동안 노출되기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곳이었다.
마디나를 벗어난 아주 외진 곳이라고만 들었는데, 어떻게 하룻밤 만에 이렇게 먼 곳까지 왔는지는 수수께끼였다.
두 명의 하녀가 다시 왔다. 다행히 무하립도 무사했고 그가 이끄는 칼리크 교도들이 아넬의 새 은신처를 물샐틈없이 지켰다.
뒤로는 바다였는데,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도록 해안에 보트 여러 척이 준비돼 있었다.
뼈저린 경험을 한 번 했기에 이번엔 정말 빈틈없이 준비를 해 놨다.
자레스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뒤 아넬은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자레스가 곁에 있어도 불안하고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지금은 다 내려놓은 채 평화를 즐겼다.
가끔은 환궁한 뒤로 돌아오지 않는 자레스가 그립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다.
그와 함께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마음이 더 짙어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모순이다. 성녀라는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은 아넬은 자신의 욕망대로 마구 부대끼고 있었다.
“마님.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아넬이 창문을 열어 놓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는 동안 사이야가 식사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머리가 비상한 그녀는 이곳의 내부 구조도 금세 외워서 실수 없이 움직였다. 아넬이 식탁으로 가자 사이야가 가지고 온 도자기 컵에 약하게 희석한 술을 따랐다.
“이건 뭔가요?”
“아니스 씨로 만든 술이에요. 과일을 넣어서 달고 맛있답니다.”
술은 자레스가 억지로 먹인 것 말고는 마셔 본 적이 없었다. 호기심에 홀짝거리자 달착지근한 맛에 혀끝은 즐거워지고 머릿속은 살짝 알딸딸하게 달아올랐다.
“마님은 술이 약하신가 보네요. 이것도 물을 타서 희석시킨 건데, 바로 취기가 오르시나 봐요.”
사이야가 킬킬댔다. 보지 않아도 아넬의 뺨이 붉어진 걸 알다니, 그녀야말로 성력이 있는 것 같았다.
“요즘 마디나는 어떤가요?”
“그럭저럭 조용해졌어요. 근위대가 폭도를 찾아내겠다고 집집마다 뒤지고 있긴 한데…, 궁에 들어갔다 왔다고 이마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지금은 포기했다나 봐요.”
“황궁에서 별다른 소식은 없나요?”
“비밀리에 마님을 찾고 있다는 말은 들었어요. 황제 직속의 비밀 조직을 움직였다는 말도 있으니, 당분간은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아요. 마님의 외모는 굉장히 눈에 띈다면서요.”
사이야는 아넬을 절대 성녀라고 부르지 않았다. 혹여 새어 나가는 일이 없게 반드시 마님이라고만 불렀고, 이리로 옮긴 뒤에는 무하립을 비롯한 칼리크 신도들도 마찬가지로 대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넬 역시 자신이 성녀라는 의식이 점점 엷어지는 것 같았다. 자레스에게 자신의 비밀을 모두 털어놔서일지도 모르겠다.
성력을 쓰지도 않고, 성녀로 불리는 일도 없어지니 어느새 그녀는 성녀가 아니라 자레스를 기다리는 그의 여자가 된 것만 같았다.
사랑하길 바라고, 사랑받길 원하는 평범한 여자.
그가 보고 싶었다. 여전히 메타가 그어 놓은 선을 넘는 건 두려웠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음 놓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서 자레스를 만나 그 말을 실컷 해 주고 싶었다.
***
“항구로 빠져나가는 건 위험할 것 같네요. 가장 가까운 건 리만 항구인데, 거긴 이미 감시의 눈길이 카펫처럼 쫙 깔려 있죠.”
퀴나에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놓은 지도를 짚었다.
“차라리 육로를 거슬러 올라가서 동부로 가는 건 어떨까요? 동부에 있다는 칼리크 신도들의 지하 도시에 숨으면 찾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거긴 이미 노출됐어. 일리파스와 스에반이 알아낼 가능성이 높다.”
배와 함께 신도들을 수장시킨 척한 뒤 그들을 임시로 모아 둔 적이 있었다. 비밀리에 저지른 짓이긴 하지만 수하들 중 일부는 알고 있으니, 언제 위치가 누설될지 몰랐다.
“칼리크 신도들은 곳곳에 비밀 마을을 만들어 놨지.”
그 말과 함께 자레스가 지도의 북쪽에 있는 어느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타네시와 붙어 있는 국경 마을에도 그들의 거점이 있다고 들었다. 험한 산지이니, 일단 숨으면 찾기는 어려울 거야.”
“지금 수배령이 떨어졌는데 북부까지 갈 수가 있겠습니까?”
“동부나 북부나 가기 어렵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네, 하지만 마차로 갈 수 있는 곳과, 말도 가기 힘든 곳은 차이가 엄지손가락만큼은 나죠. 아, 물론 제 손가락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란 건 아시죠?”
“일단 수배는 해 둬. 동쪽이 아니라 북쪽이다.”
“네에, 네에. 전하께서는 명령만 하면 되는 분이니까요.”
퀴나에가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퀴나에는 결국 경로를 찾아낼 거다. 못하면 목이 달아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넬에 관련된 일이라면 자레스는 목을 쳐도 여러 번에 나눠서 칠 거다.
“다녀오겠다.”
제 할 말만 남긴 자레스가 일어났다. 목적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갈 곳이 뻔했다.
몸이 동해 미칠 때가 된 것이다.
“언제쯤 돌아오세요?”
“나도 몰라.”
그건 아넬에게 달려 있었다. 저번처럼 어쩔 수 없이 환궁할 필요는 없을 테니,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못 돌아올지도 몰랐다.
아넬이 붙잡으면, 아니 붙잡지 않아도 아예 헤어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넬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주 급해지는 것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럴 때는 등에 날개가 달려 있으면 좋겠다.
“아, 정말 무책임하세요! 폐하가 부르기라도 하면 어쩌라고요!”
“기다리라고 해. 이 세계가 창조되는 데도 일주일은 걸렸다고.”
피식 웃은 자레스가 무칼라스와 함께 황자궁을 나갔다.
하여간 사랑에 빠진 사내란!
***
‘자레스 황자가 움직였다!’
바로 첩보가 떴다. 황궁에 있는 첩자들도 모두 움직였다.
미행당하는 자는 둘이었지만, 미행하는 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황제가 보낸 자, 유가를 비롯해 각 황자궁에서 보낸 자, 심지어 내실의 여자들이 보낸 간자와 신전의 첩자들, 타국에서 보낸 자들까지 죄다 그를 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몰래몰래 따른다 해도 어느새 자레스를 따라 꽤 커다란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쫓아가는 자들끼리 서로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보낸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자레스를 미행하고 있다는 건 알아봤고, 모르는 척했지만 실은 상대를 향해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정작 자레스와 무칼라스는 한가로웠다.
마차도 아니고, 쫓아오라고 일부러 드러낸 것처럼 말을 탔다.
두 사람은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천천히 마디나 시내를 가로지르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포목점에서 내려 물건을 보기 시작했다.
‘성녀에게 줄 선물을 고르려는 건가?’
쫓는 자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흥정을 붙여 보지도 않고 이내 가게를 나와 버렸고, 이번엔 근처에 있는 모자 상점으로 들어갔다.
‘대체 뭐 하려는 거지?’
이번에도 자레스는 오래 있지 않았다. 모자 몇 개를 집어 보다 그냥 나왔고, 그다음엔 또 다른 가게로 들어갔다.
목적지가 어딘지 점점 알기 힘들어졌다. 그를 따라 마디나 시장을 뱅뱅 도느라 첩자들은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무리의 동선이 겹치다 보니 첩자들끼리 맞닥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레스의 뒤를 쫓다가 어깨를 부딪치기도 했고, 앞서가려고 하다 상대를 밀어젖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애써 서로를 모르는 척하며 피하기는 했지만, 서서히 신경들이 날카로워지면서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벌어졌다.
목표는 하나, 쫓는 자는 여럿.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자레스를 쫓는 게 아니라 다른 자들을 떨구고 이기는 데 정신을 쏟기 시작했다.
그때쯤 자레스와 무칼라스는 다음 행보를 이어 갔다.
두 사람은 말을 골목 어귀에 매 둔 채 과자 가게로 갔다.
아몬드 과자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놓인 좌판이 차양 아래 늘어서 있었다.
“다, 전부 다!”
무칼라스가 서툰 카비르어로 외치며 좌판에 있는 과자를 모두 사들이자 상인의 입이 찢어졌는데, 무칼라스는 과자를 사자마자 바로 거리를 쏘다니는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황자 전하의 신발이다!”
동전 다섯 닢은 줘야 하는 제법 값나가는 과자들이었다.
무칼라스가 바구니에 든 과자들을 나눠 주자,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이 신발이든 선물이든 신경 쓰지 않고 우르르 몰려들어 너도 나도 손을 내밀었다.
“저도 주세요!”
“저도요!”
입성이 초라한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뻗으며 아우성을 쳤다. 좌판에서 산 과자가 바구니 한가득인데도 어째선지 무칼라스는 인심이 각박했다.
고르듯 눈으로 훑다가 겨우 과자 두 개를 한복판에 있는 아이 둘에게 나눠줬다.
당연히 아이들은 기갈이 났다. 왜 자기들은 안 주냐며 빽빽 소리를 지르고 울었지만, 무칼라스와 자레스는 외면한 채 말을 타고 출발해 버렸다.
“나리, 저도 하나만 주세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두 사람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말 궁둥이를 따라가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면 무칼라스가 선심 쓰듯 과자 두어 개를 던졌다.
쫓아가면 조금씩 나눠 준다는 걸 깨닫자 아이들은 기를 쓰고 자레스와 무칼라스를 뒤따랐다. 당연히 두 사람을 미행하던 추적자들에겐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틈을 봐서 도망가려는 건가?’
마음이 급해진 추적자들이 아이들 사이로 끼어들며 빠르게 움직였다.
아이들 사이에 어른이 여럿 끼어드니 당연히 부딪치거나 나가떨어진 아이들이 생겼고, 거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방해꾼들을 향해 욕을 했다.
“아저씨, 뭐예요? 다 큰 어른이 과자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거야?”
“와아, 코 묻은 애들 과자 뺏어 먹으면 더럽게 맛있겠다아.”
거리의 아이들은 기도 억세고 입도 거칠었다. 일부러 약을 올리고 욕설까지 하자 눈에 띄지 않으려 애를 쓰던 첩자들 중 황제가 보낸 자가 분을 못 참고 아이의 머리통을 때렸다.
나이가 좀 있는지 아이들 중에선 유독 커다란 녀석이었다.
머리를 맞은 녀석은 도망치는 대신 갑자기 바닥에 있던 돌을 들어 사내를 향해 집어 던졌는데, 정작 돌을 맞은 것은 그들을 제치고 자레스를 쫓아가던 유가의 첩자였다.
“어이쿠!”
순간 분김이 치민 그가 아이를 잡으려 와락 덤벼들자, 아이는 오소리처럼 재빨리 뒤로 빠졌다.
방향이 묘했다. 아이가 약삭빠르게 물러나는 바람에 유가의 첩자는 중심을 잃고 황제의 첩자와 부딪혔다.
“아야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멍청한 자식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유가의 첩자도 본분을 잊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멍청한 놈들. 염탐의 기본도 모르네.”
조용히 속삭이면서 다른 첩자들이 자레스의 뒤를 쫓으려 할 때, 이번엔 엉뚱한 방해꾼들이 끼었다.
“꺼져요! 더러운 욕심쟁이들!”
아까 빠져나간 키 큰 녀석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순식간에 오해가 퍼져 나가면서, 아이들이 녀석을 따라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싸움은 어디서나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아직 시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탓에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의 싸움은 어른들을 불렀고, 어른들은 ‘애들 과자를 뺏어 먹으려 드는 못된 사람들’을 가로막으며 시비를 걸었다.
순식간에 소란이 커지면서 싸움이 붙은 두 첩자를 추월하려던 자들은 시장 상인들에게 붙잡혔다.
“아, 좀 가게 해 주시오! 나는 볼일이 있어 이쪽 방향으로 가는 것뿐이라고!”
“거짓말이에요! 아까부터 저 말 탄 사람만 쫄래쫄래 쫓아왔다고요!”
고발이 이어지자 상인들의 얼굴이 더 험상궂어졌다.
어차피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상인들은 서로 얼굴을 아는 처지였고 거리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거리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놈들이 애들 과자까지 뺏어 먹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애들이 그렇다고 하잖아! 이봐, 당신들은 더 이상 못 가.”
“뻔뻔하기도 하지. 애들 과자를 뺏어 먹으려고 쫓아다녀? 가려거든 저 녀석들이 과자를 다 얻어먹고 난 뒤에나 가요!”
마치 저수지 물을 막는 보가 생긴 것 같았다. 갑자기 생겨난 사람들의 장벽에 자레스의 뒤를 쫓던 첩자들은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잽싸게 뒤로 돌아 샛길로 빠져나가 바로 자레스와 무칼라스를 쫓아갔지만, 그때는 이미 두 사람이 사라진 뒤였다.
텅 빈 길에는 바구니째로 과자를 얻은 아이들이 모여들어 아귀처럼 과자를 입안에 욱여넣거나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까 말 탄 자들,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몰라요. 누가 묻거든 말하지 말라고 하던데요?”
“어디로 갔는지 말해 주면 돈을 줄게. 제발 가르쳐 다오.”
돈이라면 이미 자레스에게 금화를 한 닢씩 받은 터였다. 계속 뒤를 쫓아오던 게 얄밉기도 했기에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그들을 향해 빈 바구니를 집어던졌다.
그러고는 첩자들이 왈칵 화를 내는 틈을 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들은 꼼짝없이 당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
“사브가 잘해 주었군.”
“사브, 똑똑하다. 사브, 성녀님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부연 설명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자레스는 말없이 말 배를 걷어차며 속도를 더 높였다.
무칼라스는 카비르어만 서툴 뿐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해 줬을 뿐인데 어린놈에게까지 질투를 느끼는 자신의 집착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완전히 따돌렸는지 다행히 따라붙는 자가 없었다. 감시에서 놓여난 두 사람은 빠르게 마디나를 빠져나갔고, 저녁이 될 무렵에 마침내 은신처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미리 연락을 넣어 두었기에 무하립이 바로 나와 그를 마중했다.
부상자를 빼고 추가로 칼리크 신도들을 보충했기에 은신처를 지키는 인원은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하지만 대부분을 이곳이 아니라 바닷가 인근 숲에 숨겨 놨기에 겉으로만 봐선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보였다.
“마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미약의 부작용이 아직 남아 있어서, 깨어 있는 시간이 적으신 편입니다.”
의원에게 받아 온 약을 계속 먹게 하고 있었지만, 원체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회복이 더뎠다. 그동안 지독한 긴장 속에 있다가 갑자기 풀리는 바람에 더욱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사이야가 주방에 서 있다가 자레스가 들어가자 쫓아 나와 인사를 했다.
주방 쪽에선 스프를 끓이는지 고소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식탁에 나무 쟁반이 있고 거기에 채소 요리가 올려진 것도 보였다.
“저녁 시간인가?”
“네, 전하. 지금 마님께 가려던 참입니다.”
“내가 가지고 가겠다.”
하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상대라면 손을 휘저으며 무슨 말이냐고 말리겠지만, 지금 눈앞에 선 이 남자는 지독한 사랑에 빠진 상태다.
모르는 척해 주는 수밖에.
자레스가 직접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프와 채소 요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아넬의 방으로 향했다.
가로로 긴 대신 단층인 이 집의 가장 구석 쪽에 아넬의 방이 있었다.
노크도 없이 밀고 들어가자, 마지막 남아 있는 한 줌 햇볕이 드는 창가 쪽에 놓인 침대에 아넬이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문 열리는 소리에 깼는지, 자레스가 침대로 다가가자 아넬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마치 성화에 그려진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아넬은 자레스를 발견하자 불현듯 보스스한 웃음을 머금었다.
“자레스.”
어느새 호칭이 바뀌었다. 표정도 바뀌었다.
이 마녀 같은 여자.
이렇게 웃을 줄 알았으면서, 이렇게 사랑스럽게 쳐다볼 줄도 알았으면서 그렇게 무정하게만 굴었던 건가.
원망과 애정이 뒤섞여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은 뒤 침대맡에 앉은 자레스는 차라리 아넬이 그동안 버텨 준 게 고마운 일이란 걸 인정했다.
그를 향해 뻗어 오는 버들가지처럼 연약한 손목을 그러쥔 순간 끔찍할 정도로 커진 애정이 순식간에 그를 녹였다.
진작부터 이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면, 아마 그는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속여 왔기에, 그녀를 바라고 원하면서도 지금까지 참아 낼 수 있었던 거였다.
“아넬.”
간신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더는 말을 잇기 어려웠다. 손목을 그러쥐었지만 더 움직일 수도 없었다. 여기서 손 하나라도 까닥였다간 그대로 아넬을 껴안고 부숴 버릴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한 애정이 너무 커서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너무 커져 버린 그것이 내장과 심장을 모두 밀어내고 몸 밖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팽창했다.
자레스는 호흡을 하기 위해 집중을 해야 했다. 마치 물밖에 끌려 나온 아가미 달린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왔어요?”
힘들게 왔을 것 같다는 걱정을 그렇게 따뜻하게 녹여서 묻는다. 자레스는 얼어붙은 듯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다가 그 물음에 간신히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그녀의 걱정 어린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내 걱정을 하는 걸 보니 미약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나 보지?”
“…당연히 물어야 하는 걸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아넬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 얼굴에 웃음이 났다.
“푸핫.”
“왜 웃어요?”
자신이 이전에 비해 몰라보게 다정해졌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래서 미약의 효과가 남아 있는 거냐고 물었는데, 아넬은 정말로 자신이 변한 걸 모르는 것 같다.
이 여자가 이제는 마음 놓고 자신에게 기대는 게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위험하다.
이 끔찍한 행복의 끝에 나락이 있을 것만 같아 갑자기 두려워졌다가 그러다 다시 기분이 하늘까지 날아오른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일평생 가둬 두려 했단 말인가.’
메타나 그의 신관들이나, 모두 악랄한 일당들이다.
자레스는 이대로 아넬에게 달려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식사 쟁반을 침대로 가져오며 호흡을 조절했다.
스프를 한 숟가락 떠서 그녀의 입가에 대 주자 아넬이 불편한 눈을 했다. 나도 손발이 있다는 항의겠지. 하지만 자레스가 무시하자, 아넬이 체념한 것처럼 입을 벌렸다.
“착하군.”
솔직히 이건 반복된 학습의 결과였다. 자레스는 집요한 남자였고,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괴롭힐 게 뻔했다.
자레스가 즐거워하면 그걸로 됐다.
아넬은 자레스와 함께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졌다.
눈치 빠른 하녀가 식사가 끝나 갈 즈음에 맞춰 차를 가지고 왔다.
아넬이 커피보다 차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안 뒤로는 식사의 끝에는 반드시 차가 나왔다.
자레스의 취향은 반대였지만, 아무 말 없이 그의 몫으로 나온 차를 단숨에 들이마셔 버렸다.
각설탕이 두 개나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차가 아닌 설탕물이 돼 버린 것을 아넬은 무척 좋아했다. 생긴 걸로 봐서는 맑은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데, 알면 알수록 새로운 여자다.
“사람들이 아직 저를 찾고 있나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아넬이 조심스럽게 묻자 자레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꿈도 꾸지 마.”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아픈 사람이 많은 것에 아넬은 신경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자레스는 짜증이 났다.
“앞으로 당신의 힘은 한 톨도 못 써. 당신이 아플 때가 아니면 절대로, 성력을 쓰지 마.”
“…….”
“아니, 당신이 아플 때도 힘은 쓰지 마. 의원을 닦달하고 아르드를 뒤져서 명약을 가져올 테니까. 반드시 내 손으로 낫게 해 줄 거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마.”
명령이라고 하기엔 애타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기에 아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을 위해선 힘을 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자레스가 또다시 위기에 처하면 망설이지 않고 성력을 쓸 것이다.
성녀가 아니라 창녀라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해도 좋았다.
그동안 세뇌처럼 각인된 자비를 버리고, 세상 사람 모두를 버리고 오직 자레스를 위해서만 성력을 베풀 것이다. 자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음.”
또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미약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 몰라도 황궁에서 도망친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졸렸다.
자기도 모르게 작게 하품을 하자, 자레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그가 그녀를 안아 침대로 옮겼다.
아넬이 순순히 침대에 눕자 자레스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침대라는 장소가, 두 사람만 있다는 상황이 둘 사이에 또다시 어색한 공기를 맴돌게 했다.
지금은 강요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저번처럼 억지를 부려서 아넬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몸 어딘가가 부푸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넬이 안타까운 눈으로 입술을 깨무는 걸 자레스는 인내심을 갖고 지켜봤다.
그나마 이제는 속을 알 수가 있어 다행이다. 예전처럼 오해와 좌절, 환멸을 씹어 가면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니.
“내가 당신을 많이 아프게 했나?”
갑자기 자레스가 불쑥 물었다. 회귀 전의 경험을 묻는 거라는 걸 깨닫자 아넬이 난감한 얼굴이 됐다.
“조금….”
아넬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하지만 곧이어 고개를 저었고, 조금 더 강해진 말투로 속삭였다.
“아니, 사실은 많이… 많이 아팠어요. 당신이 원망스러웠어. 그리고 무서웠어.”
저지르지도 않은 일이 죄스러워졌다. 어쩌면 미래, 어쩌면 과거. 모든 시간의 자신이 미워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성녀를 범했을까.
욕망만은 아닐 거라는 희미한 확신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면 더욱 사랑하는 여자를 그렇게 대해선 안 됐다.
“그래서 신전에서 탈출했을 때…. 당신을 다시 만나고 너무나 두려웠어요.”
“나를 보자마자 벌벌 떨었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아넬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자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그저 도망치려다 잡힌 탓에 공포에 질린 거라 생각했다. 이상했던 것들이 모두 착착 자리를 잡는다.
자레스가 부드럽게 아넬을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아넬. 절대로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게.”
그 말에 들어 있는 끈질긴 의지를 아넬은 알아챘다. 자레스는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아넬이 그를 거절하는 이유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타에게 그녀를 양보할 생각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아넬이 눈을 감았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로 뻗어 가는 사랑을, 그로 인해 그녀 역시 자레스를 원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아넬이 회귀한 걸 안 뒤로는 거의 처음 있는 접촉이었다.
미래의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고 아넬이 또다시 그를 거절할까 봐 두려웠지만, 아넬은 그러는 대신 살짝 입을 벌려 그를 맞아 주었다. 용기는 열정으로 이어지면서, 이내 자레스가 두툼한 팔 안에 그녀를 가득 담았다.
“아넬.”
아넬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세게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비틀면서 더 깊이 입술을 묻었다.
허겁지겁 입술을 삼키고 입안을 훑자, 그동안 피하거나 밀어내거나, 아니면 마지못해 그를 받아들이던 아넬이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피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욕망이 앞섰지만, 지금은 더 넓고 깊어진 애정이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다.
성급한 젊은 기운은 서둘러 하고 싶은 짓을 다 저지르라고 재촉했지만, 자레스는 날뛰는 혈기를 누르고 계속해서 부드러운 키스를 이어 나갔다.
조심스러운 혀끝이 그녀의 것을 건드렸다. 아넬이 거기에 반응하자, 그에 용기를 얻은 것처럼 자레스가 좀더 깊이 밀고 들어왔다.
“응….”
오히려 흥분한 것은 아넬이었다.
늘 거칠고 압박하던 자레스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아넬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면 밀고 들어왔고, 그녀가 피하면 바로 물러났다.
본의 아닌 밀당이 된 셈이었다. 아넬은 어째선지 그가 일방적으로 다가올 때보다 더 애가 탔다.
그가 참는 게 싫었다. 조금 더 이성을 잃어 줬으면 좋겠고, 예전에는 두렵고 싫었던 그것이 지금은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자레스.”
아넬은 용기를 냈다. 잠시 입술을 떼고 그녀에게 호흡할 시간을 주려는 그에게 아넬이 매달려 키스했다.
벌어진 그의 입술 안에 자신의 혀를 밀어 넣으며 자레스의 뺨을 움켜쥐었다. 그리고선 서툴게 그의 입술 안을 건드리고 훑었다.
그다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아넬의 위로 자레스가 몸을 겹치면서,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침범해 들어왔다.
아넬이 자레스를 너무 얕봤던 것이다. 그녀가 던진 작은 돌이 무시무시한 파문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그녀가 스스로 입술을 열고 다가온 것이었다. 자레스는 그 한 조각의 응답을 생명 줄처럼 물고 늘어졌다.
참고 있던 갈증이 가뭄이 든 대지처럼 커졌다. 아넬은 자신이 저지른 짓에 책임을 져야 했다.
자레스는 계속해서 고개를 비틀며 그녀의 입술 안에 고인 것들을 퍼내고 자신의 것을 아넬의 것과 섞었다.
자레스의 키스가 입술을 떠나 목덜미로 이어졌다. 그가 가느다란 아넬의 목 깊숙한 곳에 이를 박아 넣자 아넬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아…!”
아팠지만, 짜릿함이 함께 흘렀다. 이상한 양가감정이었다. 아넬이 괴로워하는 대신 그의 어깨를 감싸 안자, 자레스는 주저하지 않고 하려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
쇄골을 깨물어 붉은 자국을 남긴 그가 이번엔 편한 실내복 옷깃 위로 드러난 그녀의 앙가슴에 입을 맞췄다.
이어질 일을 아넬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마치 허락하는 것처럼 그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무방비하게 침대 위로 내려놓자 자레스가 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왜 웃어요?”
대답 대신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실내복의 단추가 다 풀리고 어느새 그녀의 희고 소담한 가슴이 따뜻한 공기 속에 드러났다.
마치 아야발 산맥에서 퍼온 눈처럼 흰 가슴이었다. 흰 젖가슴의 정점에 분홍빛 유두가 맺혀 있었는데, 그를 향해 피어난 꽃송이처럼 눈부셨다.
자레스가 잠시 황홀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자 그 시선이 부끄러워 아넬의 흰 몸에 얼룩덜룩 붉은 반점이 피어났다.
여기까지는 허락됐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레스에게 가슴을 허락했을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니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고 싶었다.
“보드라워.”
풍만하진 않지만 사랑스러운 가슴이었다. 양손에 모아 쥐고 홀린 듯 들여다보던 자레스가 욕망을 못 이기고 그 끝을 물었다.
“아!”
이미 한 번 겪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이 더 무서웠다. 겨우 두 번째인 짜릿한 감각이 몸을 타고 달리는 바람에 아넬은 허리를 휘며 그에게로 몸을 밀착시켰다.
그에 자극받은 자레스가 집요하게 그녀의 가슴 끝에 매달리며 부드럽게 혀를 굴리고 희롱했다.
그가 유두 위를 혀로 짓누르다 유륜과 유두를 한꺼번에 집어삼킨 채 혀로 한 바퀴를 돌렸다. 혀끝에 짓이겨진 유두 쪽에서 쾌감이 번개처럼 휘몰아쳤다.
온몸이 부드러운 버터가 돼서 뜨거운 화덕에서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아넬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신음만 흘렸다.
그에게 매달리고도 싶고, 반대로 너무 괴로워서 밀어내고도 싶었다. 이 생경한 세계는 거의 한평생을 갇혀서 살아온 아넬이 겪기엔 너무 벅찬 곳이었다.
“아, 으으응. 흐윽.”
아넬이 끓는 듯한 흐느낌을 토해 내자 자레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싫어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었다. 그걸 깨닫자 안 그래도 뜨겁던 몸에 불이 확 붙었다.
“울지 마, 아넬.”
사실은 그로 인해 아넬이 우는 게 좋았다. 좋아서, 희열에 들떠서 앙앙 울게 만들고 싶은 욕망에 몸이 들끓었다.
재빨리 위로 올라와 아넬의 입술을 삼킨 그가 다른 한 손을 분주하게 움직여 아넬의 실내복을 끌어 내렸다.
아넬이 깜짝 놀라 다리를 움츠리려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허리끈을 풀어 버린 자레스가 실내복을 그녀의 다리 아래로 빼내 침대 아래로 집어 던졌다.
아넬이 두 손으로 얼른 다리 사이를 가리려 했지만 그보다 자레스가 한발 더 빨랐다.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자레스가 풀어내 버렸고, 아넬은 완전한 나신이 돼서 자레스의 시선 아래 놓였다.
부끄러움에 온몸이 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레스는 그녀가 제 몸을 가리지 못하도록 그녀의 양손을 잡아 침대 위에 누른 채 열기 띤 두 눈에 그녀의 황홀한 몸을 담았다.
적당히 부풀어 오른 젖가슴과 엉덩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작은 어깨를, 새빨개진 얼굴을.
그러다 시선을 내려 이윽고 두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밀부를 뚫어져라 내려다 봤다.
머리카락 색깔과 같은 빛깔의 체모가 꽃다발처럼 무성하게 피어나 있었다. 황금색의 삼각주와 그 아래 자리 잡은 뜨거운 샘을 상상한 자레스의 중심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안고 싶었다. 그 촉촉한 땅으로 들어가 자신을 확인하고 아넬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안다.
굳이 그렇게 억지로 끌어내지 않아도 아넬이 그를 사랑한다는 걸.
그러니 지금은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후우.”
그가 인내의 한숨을 토해 내며 그러쥔 아넬의 손목을 풀어 줬다. 힘을 줘 누른 게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풀려났다.
아마, 아넬이 애를 썼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자레스의 욕망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에게 알몸을 보이길 허락한 것이다.
자레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더 쉽게 제멋대로 날뛰는 욕망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한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고, 후퇴시킨다. 자레스는 남자로서의 인내심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참을성에는 미끼도 필요한 법이었다.
“몸을 섞는 게 두렵다면, 함께 자기라도 해 줘.”
자레스는 구걸하듯 아넬에게 부탁했다. 달콤한 보상이 없다면 어딘가 터져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카비르 제국의 황자가 어쩌다 이렇게 여자에게 애원하게 됐을까. 그녀가 대체 뭐라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넬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고, 자레스가 겉옷을 벗고 바지만 걸친 채 침대로 들어왔다. 그리고 벌거벗은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탄탄한 복부와 가슴팍이 그녀의 몸에 맞닿았다. 맨살이 닿는 감촉이 두려울 정도로 선뜩했다.
팔 안에 잠긴 그녀의 몸은 크림처럼 부드러웠고, 꿀을 부은 우유처럼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토록 원하던 것에 가까이 닿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했다.
그와 반대로 아래쪽은 단단하게 발기해서 아넬의 복부를 단단하게 찔러대고 있었다. 그를 알아챈 아넬이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는 게 느껴졌다.
살이 닿는 부분마다 불길이 이는 것 같았지만, 자레스는 흥분해서 그녀를 취하는 대신 아넬의 보드라운 몸을 안은 채 가만히 숨만 몰아쉬었다.
코끝을 묻은 그녀의 어깨에서 단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우윳빛 향기에 정신이 그와 같은 빛으로 아득하게 물들어 가는 것 같다.
자레스는 그 향기에 취해 가만히 내뱉었다.
“…사랑해, 아넬.”
여린 몸이 그의 팔 안에서 살짝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침묵을 지키는 대신 작게 속삭여 줬다.
“나도요.”
그녀의 대답에 심장은 또다시 미친 듯이 날뛴다.
자레스는 믿지 않던 신을 떠올리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 신이 메타든, 칼리크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몸을 좀 더 깊이 끌어당기며, 자레스는 아넬을 삼킬 듯이 폭 안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숙이 살 내음을 흡입하다가 이윽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
그가 아직도 곤두서 있는 아넬의 젖꼭지를 깨물자 그녀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자레스는 그런 아넬의 젖 끝을 물고서 이를 세워 아프지 않게 자근자근 씹어댔는데, 그때마다 아넬의 몸이 선뜩선뜩 요동을 쳤다.
간신히 잠재웠던 생경한 희열이 벼락처럼 다시 몰아쳐 왔다.
자레스가 잇새로 혀를 내밀어 혀끝을 한 바퀴 돌려 가면서 유륜과 그 주변의 살을 빨아들이자 아넬이 고개를 젖히며 몸을 휘었다.
그러자 자레스는 이번엔 반대쪽으로 옮겨 역시 유두와 유륜을 희롱하다, 나머지 한쪽 가슴을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었다.
마치 고운 반죽을 손으로 짓이기듯, 그가 아넬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처음으로 그녀의 맨몸을 접한 자레스는 정말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번갈아가며 양쪽 가슴을 취하다, 이 끝으로 물고 자근자근 씹다가 그러다 위로 올라와서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짓이겼다.
목덜미의 여린 살을 깨물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때마다 흘리는 아넬의 비명을 귀 안에 새겼다.
그의 여자.
세계와 맞선다 해도 절대 놓을 수 없는 운명의 연인.
두 사람은 그렇게 꼭 끌어안은 채 서로에게로 빠져들었다.
<3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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