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자레스가 오지 않는 동안 아넬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다쳤을 때, 아넬 역시 다쳤다. 그에게 상처를 입힌 칼로 자신까지 찌른 셈이었다.
자레스가 물러나고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았고, 안심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하기만 해서 아넬은 매일 울다가 잠들었다.
이젠 메타도 찾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메타를 위해 순결을 지키겠다 해 놓고, 마음은 이미 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넬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잡지 못했고, 자신이 자레스를 그리워하는 건지 그가 오지 않아 차라리 다행인 건지 알지 못한 채 서서히 여위어 가고 있었다.
그런 아넬의 불신에 못을 박을 일이 생겼다.
자레스가 오지 않은 지 일주야가 될 무렵이었다. 아넬은 쓸쓸함과 답답함을 참다못해 말을 못 하는 하녀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는 해가 질 즈음이었다.
저택 뒤로 이어진 숲을 거쳐 온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마당에는 곳곳에 등불이 걸려 있었고, 그 밑에 저택을 지키는 칼리크 교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아침과 저녁 식사 후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하필 아넬이 나온 게 그때였다.
일찍이 본 적 있던 경건한 기도가 이어지고 있었고, 아넬은 경배의 상대만 다를 뿐 형식이나 내용이 메타에게 드리는 예배와 비슷한 그들의 모습을 의문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성녀님.”
기도를 이끌고 있던 무하립이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피하려던 아넬이 오히려 당황했다. 그들이 적대시하는 메타의 성녀인데 왜 전혀 거리끼질 않는 걸까. 아넬을 향한 칼리크 교도들의 눈빛은 오히려 경의에 가까웠다.
“제가 예배를 방해했군요.”
“아닙니다. 막 끝난 참인데, 예배의 끝에 성녀님이 나타나셨으니, 되레 저희의 기도가 보답을 받은 기분입니다.”
“…칼리크 신도들은 메타를 모시는 성녀나 신관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요?”
갑자기 궁금해져 묻자 무하립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메타와 칼리크는 서로 적대하는 신이 아닙니까. 메타는 선의 신이고, 칼리크는 악의 신. 두 신끼리도 싸웠지만, 지난한 역사 속에서 신도들끼리도 무수한 살생을 벌여 왔습니다.”
“외람된 말입니다만, 성녀님. 저희는 메타가 아니라 칼리크 신께서 선의 신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희 칼리크의 신도들은 메타와 칼리크의 위치가 서로 뒤바뀌었다고 배워 왔습니다. 성녀님께선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희의 가르침 속에서는 칼리크가 빛의 신이자 자비의 신입니다.”
“…태초에 인간들을 수없이 죽이고 그들의 피로 강을 만들었다는 칼리크가 선신이란 말입니까?”
“받아들이기 어려우실 걸 압니다. 하지만 성녀님께서 배우신 게 전부는 아닙니다. 메타의 신도들과 칼리크 신도들이 오랫동안 싸운 건 아시지요?”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칼리크 신도들은 패배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요. 무릇 승자는 역사를 자기들 좋을 대로 바꾸는 법입니다.”
그 말은 듣기에 이상했다.
결국 메타가 칼리크를 쳐서 이긴 탓에 원래의 선과 악이 뒤바뀌었다는 것인데, 아넬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성녀인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디기 힘들었다.
칼리크 교도에 대해 선입견을 없애 갈 마당에 그런 말을 들으니, 도리어 없던 편견이 다시 생길 지경이었다.
“제가 메타의 힘을 이어받은 성녀인 걸 아시면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요?”
“흥분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당신들의 믿음대로라면 저는 악신의 힘을 빌린 여자인데 악신이 성녀를 통해 사람을 치유하다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성녀님, 언젠가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하립은 당황하지 않고 거기서 말을 멈춘 채 물러갔다. 아넬만 제 방으로 올라와서 자레스 생각도 잊은 채 혼란에 빠졌다.
그녀가 아는 세상이 점점 깨어지고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히 무하립의 말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갇혀 있던 조그만 세상과 그를 채운 진실들은 신전을 빠져나온 뒤로 자꾸만 뒤집히고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잔인한 약탈자로 생각했던 자레스를 사랑하게 됐고, 악마라 여겼던 칼리크 교도들은 오히려 경건하고 선량했다.
겉으로는 위엄 있었던 귀족이나 황족들은 비열한 짓을 하거나 수시로 배신을 일삼았으며, 메타를 믿는 사람들은 그녀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며 힘을 나눠 달라고 졸랐다.
‘오직 자레스 황자만이 나를 소중히 여겼지.’
아넬이 힘을 쓸 때마다 수명이 준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단 한 방울의 성력도 쓰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이 죽든 말든 알 바가 아니라 했고, 그건 안타까웠지만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아껴 주는 자레스가 고마웠다.
문득 그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생각의 끝은 항상 그에게로 고정되어 있어서 결국 자레스에게로 달려가게 돼 있었다. 아넬의 눈에선 또다시 맑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시는 안 찾아오는 걸까?’
그가 그리우면서도, 자레스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미안할 뿐이었다.
이렇게 고통만 주느니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애모의 마음은 쉽게 잘라 내지지 않는다.
아넬은 또다시 침대에 엎드려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아넬이 있는 별장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길만 그런 것이었고, 힘들긴 하지만 별장의 뒤쪽에 있는 빽빽한 숲을 반대편 언덕 아래쪽에서 뚫고 올라가면 별장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쪽에 경비병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젊고 건장한 칼리크 신도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저택 안으로 잠입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지.’
카에티가 보낸 밀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손에는 기름에 적신 장작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밀정 한 명만 온 게 아니었고, 카에티의 수하들이 그와 같은 짐을 지고 여럿이 함께 올라왔다.
“성녀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면 시험을 해 보는 수밖에 없지.”
아넬의 안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카에티는 별장에 침투할 위험을 무릅쓰지 말고 그냥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아넬이 있다면 튀어나올 것이고, 그때 아넬을 납치하면 된다. 반대로 없다면 별장만 태우고 마는 것이니 손해 볼 게 없었다.
그래서 카에티의 수하들은 지금 불쏘시개를 지고 올라온 것이다.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기에 밀정은 다른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수하가 재빨리 부싯돌을 부딪쳐 장작에 불을 붙였고, 바로 숲에 불을 놓았다. 나뭇가지에 불이 붙자 이번엔 그 불을 다시 장작에 옮겨 붙인 뒤 별장 뒤쪽을 향해 던져 넣었다.
“웬 놈이냐!”
불길이 치솟자 바로 사병들이 달려왔다. 수하들은 일제히 숲의 양옆으로 흩어지면서 계속해서 횃불을 집어던졌다. 그러는 한편으로 화살을 메겨 달려오는 사병들을 향해 쐈다.
“침입자다!”
사방에서 경계성이 울려 퍼졌다.
저택의 호위병이 수하들보다 훨씬 많았다. 게다가 잘 훈련된 정예병들일 테니 맞부딪쳤다간 좋을 게 없었다. 수하들은 재빨리 숲 아래쪽으로 물러나면서 양쪽으로 넓게 퍼져 나갔다.
그러는 사이 저택에선 불길이 커지고 있었다.
나무로 된 지붕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그 불이 목재 기둥을 타고 저택 안쪽까지 번지고 있었다.
침입자도 문제지만 그 안에 있는 아넬부터 구출해야 했다.
“성녀님부터 모시고 나와라!”
무하립이 외쳤다.
누군지 몰라도 이미 아넬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침입해 온 것이다. 불을 피해 나올 아넬을 기다렸다 잡을 심산인 게 틀림없으니, 그에 대비해 전투를 각오해야 했다.
“저택 뒤부터 막아라!”
숲 쪽으로 틈입해 온 자들은 맞닥뜨려 상대할 수는 있어도 숲 안으로 들어가 잡아낼 수는 없다.
그러는 동안 저택의 경비에 공백이 생기니, 차라리 그들이 불을 피해 물러나길 바랄 뿐이었다.
‘증원을 요청해야겠어.’
무하립이 재빨리 전령새의 발목에 자레스에게 보낼 쪽지를 적어 묶는 동안 사이야와 말 못 하는 하녀 두 명이 아넬을 부축한 채 밖으로 나왔다.
아넬은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무하립을 보자마자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나요?”
“성녀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다행히 불이 번진 지붕이 제 방 쪽은 아니라서….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요?”
아넬이 침착하게 묻자 무하립이 대답했다.
“일단 병사들에게 길 쪽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그쪽에 활로가 확보되면 그리로 나가시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점점 안 좋은 예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불을 지른 한편으로 사병까지 동원해 공격해 오면 아넬과 칼리크 신도들은 불과 적병 양쪽에 끼게 되는데, 그러면 상황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방어가 용이하도록 언덕 위 외진 곳에 있는 별장을 골라 은신했지만, 그 선택이 이번엔 아넬을 위험에 빠뜨렸다.
“정면 쪽은 어떤가!”
수색을 나갔던 병사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정면에 매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위험을 무릅쓰고 숲을 관통하는 수밖에 없는데, 숲은 싸우기가 더 어려운 장소였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정면이냐 후면이냐.
무하립은 이를 악물고 명령을 내렸다.
“성녀님을 모셔라! 후면으로 나간다!”
숲을 통과하려면 말은 포기해야 했다. 무하립의 수하가 아넬을 업었고, 병사들의 반은 퇴로를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나머지 반이 아넬과 무하립을 쫓아 함께 달렸다.
이미 불이 번지기 시작한 숲은 그들의 위치를 환하게 노출시켰다. 기회를 포착한 카에티의 수하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와아악!”
하지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무하립을 비롯한 칼리크 교도들은 수도 마디나에서 반년에 걸쳐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최정예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카에티의 수하들보단 실력이 뛰어났고, 무하립은 특히 그중에서도 최강자였다.
무하립이 수풀을 뚫고 달려 나오는 사내들에게 칼을 휘두르자 동시에 두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이번엔 숨어 있던 자들이 일행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몇몇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지만, 무하립은 맞서 싸우는 대신 질풍같이 달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쪽을 택했다.
“쫓아라!”
카에티의 수하들이 서로에게 신호를 하면서 그들을 따라 달려 내려왔다. 불이 번진 구역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부턴 달리는 게 쉽지 않았다.
화살을 쏘기도 어려웠기에 달려들어 직접 싸우는 수밖에 없었는데, 무하립과 칼리크 신도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빨랐다.
“놓치면 안 돼!”
마침 나무들이 벌어지고 살짝 패인 분지가 나왔다. 칼리크 신도들의 신형이 눈에 띄자 바로 카에티의 수하들이 활을 쐈다.
무하립이 칼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면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 냈다. 오히려 다른 신도들 몇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창을 던지면서, 그 창끝에 카에티의 수하 한 명이 무참하게 꿰뚫렸다.
“으흐흑.”
무하립은 그 와중에도 아넬의 흐느낌을 들었다.
아마도 그녀 하나 때문에 죽고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을 터다. 아넬은 그런 여자였다.
무하립이 다시 한번 달려드는 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오른팔을 잡아채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고, 칼날로 베어 내는 대신에 칼자루로 놈의 얼굴을 쳐서 그대로 기절시켰다.
될 수 있으면 희생을 줄여 아넬의 걱정을 줄여 주고 싶었다.
“제기랄. 화살을 쏴! 성녀가 맞아도 괜찮아! 무조건 쏴!”
흥분한 밀정이 외치는 동안, 이번엔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돌연 언덕 아래쪽에서 일단의 횃불이 켜진 것이다.
달려가던 무하립과 아넬 일행도, 쫓아가던 카에티의 수하들도 모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숲이 끝나 가면서 나무들이 듬성듬성해졌는데, 그 사이를 가르며 말에 올라탄 자들이 횃불을 들고 올라왔다.
“유가 황자!”
그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을 본 아넬이 비명처럼 낮게 속삭였다.
최악이었다. 하필 유가에게 들키다니!
“우스라에 선공을 빼앗겼군.”
그제야 아넬은 숲과 저택에 불을 지른 게 카에티가 보낸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아마도 유가는 다른 경로로 잠복한 것이리라.
기가 막힌 건 카에티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척 봐도 언덕 아래를 감싼 유가의 부하들은 그 숫자가 백 명이 넘었다. 칼리크 신도와 카에티의 수하들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사냥의 진정한 묘미는 중간에 가로채는 것이지.”
유가가 비열하게 웃자, 곧 유가의 부하들이 아넬 일행을 둘러쌌다.
“처음부터 우리를 쫓았던 건가?”
카에티의 수하들이 울컥해서 중얼거렸다. 아마도 가만히 앉아 카에티의 수하들이 정보를 낚아 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일 터다.
한마디로 고생은 그들이 하고, 사냥감은 다른 이들이 낚아채 가는 것이다. 울화가 치밀었다.
“누구 마음대로!”
카에티의 수하들이 유가 일행을 향해 무기를 겨냥했고, 무하립과 칼리크 신도들 역시 칼을 치켜들었다.
1 대 2. 혹은 2 대 1. 피아를 구별하기 힘든 적들이 아넬을 사이에 놓고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
자레스의 궁에 전령새가 날아든 건 한 시간쯤 뒤였다.
황자궁 주변에 감시의 눈이 사방에서 번뜩이고 있었지만, 하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 사방이 어두워진 뒤였기에 전령새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전령새의 발목에 묶인 쪽지를 확인한 퀴나에가 그 즉시 자레스에게로 달려갔다.
“전하! 성녀께서 납치되셨습니다!”
“뭐라고!”
저녁도 거른 채 웅크리고 누워 있던 자레스가 벌떡 일어났다.
잠시 동안 할 말을 잃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퀴나에를 노려보던 자레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구냐?”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론만 묻는 그의 질문에 퀴나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유가 황자가 성녀님을 끌고 갔습니다. 첩보가 들어왔는데, 지금 유가 황자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있다고 하네요.”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침대에서 뛰어내린 자레스는 곧바로 황궁을 향해 달려갔다.
그 시간, 유가는 퀴나에의 말대로 황제를 만나고 있었다.
황궁 문도 닫을 시간인 이 저녁에 유가가 만남을 요청했지만, 그 내용이 워낙 놀라운 것이라 황제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웃음을 흘리며 유가의 말을 경청하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허면 네가 성녀와 혼인을 하겠다는 것이냐?”
“그러합니다, 아바마마. 허나 혼인은 하되, 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아바마마만이 성녀의 힘을 온전히 향유하시도록 할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내실에 보내 드릴 수도 있고요.”
“허허, 누구와 달리 참으로 융통성이 있구나.”
황제는 만족스러웠다.
자레스가 성녀를 빼돌려 마디나에 숨겨 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장황자 유가가 그 성녀를 데려와 바치겠다 하지 않는가.
성녀의 힘을 독점할 수 있다면 유가가 그사이에 저지른 사적인 비행은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삼가 아뢰오니, 성녀와의 혼인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바마마.”
“허락하노라. 덧붙여 성녀가 나의 내실에 들어오는 대로, 너를 황태자로 봉하겠노라.”
거래는 아주 간단하게 이뤄졌다. 똑같은 성정의 부자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폐하. 알현 요청이 또 있나이다.”
유가가 일어나려 할 무렵에 내관이 들어와 알렸다.
“이번엔 또 누구인가?”
반쯤은 예상하며 되물으니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16황자 전하십니다. 급히 아뢸 일이 있다고….”
“허허, 짐이 이미 침수에 들 시간인 걸 알면서도 어찌 감히 안면을 방해하는고? 돌아가라 이르라. 짐이 매우 피곤하니, 당분간 알현은 받지 않을 것이다.”
“하오나 폐하, 황자 전하께서 물러가지 않을 기세로 본궁 마당 앞에 무릎을 꿇고 계시옵니다. 저러다 밤새 시위를 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짐이 알 바 아니다. 계속 버티거든 근위대를 내보내어 끌어내도록. 그리고 당분간 내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라.”
그 말을 들은 유가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알현실을 나왔다.
여러 개의 계단을 내려와 본궁 앞마당으로 나오자 곧 거기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자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곧 비가 올 것처럼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달이 떠 있긴 하지만 구름에 가려 끄트머리만 보일 뿐이다.
두꺼운 구름장에 부딪혀 산란된 빛에 오히려 황궁의 모습이 잘 보이는 게, 아무래도 조만간 비가 내릴 모양이다.
카비르에선 이 계절엔 드문 비였다.
“비가 올 듯하구나. 아무리 여름이라도 비를 맞으면 몸에 좋지 않을 텐데, 이만 들어가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유가가 일부러 자레스의 곁을 지나며 슬쩍 말을 건넸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레스가 무섭게 눈을 치뜨며 그를 노려보자 유가는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인 법이지. 지혜로운 자는 괜한 데에 힘을 들이지 않는 법이란다.”
황태자가 되면 자레스를 비롯한 모든 황자들을 지방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사병들은 모두 빼앗은 뒤, 총독이란 명목으로 작은 지역의 한직으로 좌천시켜 허수아비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가 황위에 오르는 날 모두 죽일 것이다. 그게 유가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성녀는 다시 내가 이어받아야지.’
불사의 황제가 돼서 세계를 제패한다.
한때 자레스가 꿨던 꿈을 유가 역시 품기 시작했다.
***
새벽까지 비가 내렸지만,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화창해졌다.
비가 내리기 전에 황자궁으로 되돌아온 자레스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그 곁을 퀴나에와 무칼라스가 지켰다.
“살아남은 자는?”
“사망자가 셋이고 중상자가 두 명입니다. 나머지는 가벼운 경상이거나 무사합니다. 무하립도 멀쩡하다더군요.”
“유가와 우스라, 싸우다 말고 갔다.”
유가가 큰 충돌을 일으키는 대신 재빨리 도망가는 쪽을 택했기에 오히려 사상자는 적었다.
카에티의 수하들 역시 모두 도망쳤고, 별장을 지키던 칼리크 신도들은 신원을 숨기기 위해 마디나 여기저기로 흩어졌다고 했다.
“폐하께서 유가 황자와 성녀님의 혼인을 허락하신 듯합니다.”
퀴나에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수완가인 퀴나에는 황궁의 내관 중 한 명을 매수해 첩자로 쓰고 있었는데, 그 탓에 안 좋은 소식도 아주 빠르게 알아냈다.
“허락을 받았으니, 유가 황자가 바로 혼인식을 치를 것 같긴 한데…. 때가 때이니만치 아마 비밀 결혼식을 하겠죠?”
“성녀와 결혼할 생각을 하다니, 이 소문을 메타의 신관들이 들으면 참으로 좋아하겠군.”
자레스가 툭 내뱉었다.
“공식적으로 유가 황자의 부인이 되면 유부녀가 되는 셈이니, 저희가 뺏어 오기가 힘들어집니다.”
“내가 유가의 문, 부수겠다! 무칼라스, 강하다!”
“이 무식쟁이야, 힘으로 밀어붙일 게 따로 있지, 네가 무슨 명분으로 다른 황자궁의 문에 쳐들어가니?”
“그런 것 필요 없다!”
“괜히 칼부림 냈다간 근위대에게 끌려가 목이나 잘릴 거야! 그리고 네 몸뚱이는 갈아서 닭모이로 던져 주겠지. 네 덕에 황궁 닭들이 아주 튼튼해지겠구나!”
퀴나에가 핀잔을 주고, 무칼라스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먹지 못해 눈알을 굴리는 동안 자레스는 생각에 잠겼다.
퀴나에의 말이 맞았다. 황명을 받은 근위대가 쳐들어가지 않는 이상, 자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안에서 걸어 잠근 황자궁의 문을 밖에서 열 방법은 없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지.’
결론을 내린 그가 툭 내뱉었다.
“나 혼자서는 열 수 없다면 힘을 합쳐야지.”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퀴나에와 무칼라스가 무슨 뜻인지 몰라 그를 쳐다보자, 자레스가 명을 내렸다.
“글을 쓸 줄 아는 노예들을 모아 들여. 그리고 종이도! 도서관에 있는 책에서 글자가 적히지 않은 부분을 모조리 찢어 오도록!”
***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유가 황자궁의 시녀들과 내관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화제의 중심은 당연히 아넬이었다. 유가가 어디선가 성녀를 데려왔다는 소문이 돌더니, 화제의 당사자가 오늘 아침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실 대신 접견실에 갇혀 있던 아넬이 끌려 나오자, 유가는 그런 그녀를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들여다봤다.
“아름답군.”
유가가 성인으로 개화한 아넬을 본 건 처음이었다. 파이디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리파스와 마찬가지로 설마 그녀가 정말 파이디였단 건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아름다운 외모에도 그리 관심이 없었다.
여자란 그에게 권력을 쥐여 주는 수단이냐 아니냐, 그것밖에는 의미가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아넬은 그에게 최고의 도구였다.
그래서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자레스의 여자이기도 하니, 이야말로 최고의 사냥감이지.’
바닥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짐승을 고꾸라뜨리는 것은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처음부터 제 자리에 만족한 채 사는 노예의 삶은 짓밟아 봤자 별 의미가 없지만, 한 번 자유를 맛본 노예는 그것을 상실했을 때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된다.
유가는 자레스가 느낄 패배감에 커다란 쾌감을 느꼈다.
그 무심하고 잔인한 놈이 처음으로 마음을 뺏긴 여자. 그런 여자를, 심지어 성녀를 제 것으로 만든다면 그 쾌감은 더욱 치솟아 극치에 다다를 것이다.
벌써부터 아랫배에 힘이 모이는 것 같았다. 아넬에 대한 성적 관심이 아니라, 자레스를 꺾고 싶은 무자비한 욕망이 그를 자극했다.
“성력을 확인했나?”
“네, 전하. 눈앞에서 아이를 다치게 했더니 바로 치료를 해 줬습니다.”
내관이 확인하자 바로 유가가 명을 내렸다.
“내 침실로 데리고 가라.”
그 말에 시녀와 내관들이 겁먹은 눈으로 유가를 쳐다봤다.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성녀였다. 그런 여자를 범할 생각인 건가.
말로는 황제에게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혼인이라 했지만, 혼인식은 건너뛰고 바로 침실로 끌고 가려는 걸 보니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싫어요!”
아넬이 비명을 지르니 더욱 그랬다.
아넬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메타의 힘이 아니라면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일리파스가 팔이 잘리던 날 황궁의 중정에서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본 자도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 미모는 마치 천상에서 내려 보낸 것처럼 황홀했다.
“전하. 형식적으로 혼인식만 치러도 되지 않겠습니까. 상대는 성녀님이십니다.”
내관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했지만, 유가는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이 여자가 성녀로 보이나?”
“전하!”
“천만에, 이건 메타의 창녀일 뿐이다. 이미 자레스와도 잤을 터야. 그런 여자가 무슨 성녀란 말이냐.”
잔인한 웃음과 함께 유가가 뇌까렸다.
“내가 자레스보다 더 참혹하게 짓밟아 주지.”
겉보기만 우아하고 아름다울 뿐, 유가는 저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비틀린 것 같았다.
내관과 시녀들에게 끌려 침실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진 아넬은 비소를 흘리며 다가오는 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를 건드리지 마세요, 유가 황자.”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나, 메타의 창녀여.”
“저는… 창녀가 아닙니다! 메타의 성녀를 탐하면 신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건 거짓이 아니에요, 유가…!”
갑자기 머릿속이 뒤집힌 것처럼 흔들렸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면서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귓불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누가 불길을 꽂아 넣은 것처럼 하복부가 조여 왔다.
“아침에 준 물에 이미 미약을 타 뒀지.”
유가가 다가와 주저앉은 그녀의 턱 끝을 잡아 쥐었다.
성력으로 자신의 상태를 치료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이던 힘이 자꾸 흩어지고,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몸이 흐느적거렸다.
“자레스의 침실에서 그리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면서 순결하다 주장하는 건가? 그걸 믿으라고?”
유가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신벌이 있었다면 네가 자레스에게 안겨 있을 때 이미 내려졌겠지. 신벌 같은 건 없다. 메타도 없어.”
“아니, 아니…. 내, 내가… 내 성력이 증거…. 흐, 으….”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이 불덩어리가 됐다가, 다시 얼음처럼 차가워지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몸이 나른해져 가더니 이제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입에도 힘이 풀렸다. 누가 이 혼란한 머릿속에 물이라도 끼얹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메타의 신관들이 신은 사람을 창조하지만, 운명을 바꾸는 건 인간이라고 지껄이거든. 그 말이 맞아. 나는 내 운명을 바꾸겠다.”
유가가 잔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안을 거고, 네 힘을 빌려 황제가 돼서 이 세상을 지배할 거야. 그게 내 운명이다.”
이런 무모한 점만은 자레스와 똑같은 것 같았다. 그걸 인정하자 유가의 입에서 더 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래서 형제인 거지.”
그가 중얼거리면서 아넬의 드레스 앞섶에 손을 댔다.
풀기 좋게 리본 매듭으로만 묶은 얇은 드레스는 손만 대도 바로 흘러내릴 것 같았는데, 유가는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그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아넬이 필사적으로 막 풀리려는 옷깃을 잡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쿵!
하는 커다란 굉음이 뒤를 잇자 막 아넬의 옷을 벗기려던 유가가 손길을 멈춘 채 창문 쪽을 쳐다봤다.
“무슨 소리지?”
소음이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커다란 게 부딪히는 소리가 쿵쿵, 연달아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뒤를 잇듯 군중들의 고함 소리가 더 커졌다.
“무르마! 무슨 일이 일어난 게냐!”
벌떡 일어난 유가가 침실 문을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갔다.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3층 높이인 그의 방 앞 복도에선 황자궁 문밖이 보였다. 황자궁 문 앞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나와라, 유가 황자!”
“성녀님을! 성녀님을 내줘! 우리에게도 성력을 나눠 달라고!”
궁인들이 자레스의 궁문 앞에서도 시위를 벌인 바 있지만, 이번엔 그 수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심지어 기세도 상당히 거셌는데, 그중 몇몇이 커다란 나무 기둥을 메고 와서 그걸로 문짝을 부수려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황궁 사람들이 아니었다.
베일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서민들이 즐겨 입는 풍성한 바지와 조끼 차림인 자들이 많았고, 궁에는 드문 노인들과 아이들까지 몰려와 있었다.
“저것들이 성녀가 황궁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언젠가는 황궁 밖으로 새어 나갈 게 틀림없었지만, 너무 이른 시점에 성녀의 존재가 들통 났다.
그것도 사람들이 저렇게 한꺼번에 몰려든 걸 보면 한두 명에게 퍼져 나간 게 아니라, 일시에 폭발하듯 터진 것이다.
“전하. 지금 마디나 시내에서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고 합니다.”
황급히 달려온 무르마가 무릎을 꿇고 아뢨다.
“성녀가 황궁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떼를 지어서 황궁까지 달려왔습니다. 근위대가 막는다고 막았지만, 워낙 수가 많아서….”
근위대가 아무리 창칼로 무장했다 해도, 분노한 민중들 앞에는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내정을 지키는 황궁 근위대가 달려오기 전에 황궁 문이 뚫렸고, 그들은 성녀가 있는 거로 알려진 유가의 궁까지 쳐들어왔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도 그 수가 꾸역꾸역 불어나고 있다고 했다.
물론 황궁 근위대가 총동원되면 궁 안에 침입한 자들은 막아 낼 수 있겠지만, 사태가 황궁 안에서 끝나지 않고 점점 커져 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소요가 아니라 폭동이 되고, 폭동이 반란이 되면 이것은 이제 유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카비르 전체의 문제가 된다.
나아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이웃 나라에 알려질 테고, 그것은 전쟁을 부르게 될 터였다.
반란과 전쟁. 두 가지 벼락이 한꺼번에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자레스! 이 갈아 마실 놈!”
유가가 이를 갈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짐작대로 그 시간, 여러 필의 말이 마디나 시내 여기저기서 골목길을 누비고 있었다.
그 말들은 모두 기수가 없었다.
말 등에 올라탄 자도 없이 골목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말들의 옆구리엔 모두 커다란 헝겊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일부러 아가리를 크게 벌려 놔서 말들이 달리는 동안 주머니에 들어 있는 종이들이 빠져나와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를 주워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유가 황자가 성녀를 약탈하려 하고 있다고?”
키리아 성녀의 죽음 뒤로 새 성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는데 그 성녀가 카비르에 있단다. 심지어 유가 황자가 그 성녀를 부인으로 삼으려고 납치했다는 글귀를 읽은 사람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분노했다.
이 기회에 성력을 나눠 받고 싶은 자, 유가 황자가 성녀를 범하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자, 성녀를 이렌시아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자 등 여러 무리가 뒤엉켜 황궁으로 향했다.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어서 황궁 정문을 맡은 소수의 경비대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물러나지 않으면 베겠다!”
경비대가 협박했지만, 몰려온 백성들도 빈손으로 온 게 아니었다.
낫과 칼을 든 백성들과 경비대 간에 충돌이 벌어졌지만 백성들 쪽의 숫자가 훨씬 많았기에, 성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뚫렸다.
황궁 근위대는 궁의 동서남쪽으로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동원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황궁의 문은 두께가 어린아이 키만 할 정도로 장대하기 때문에 문을 닫는 데만 십여 명의 인원이 동원돼야 할 정도였다.
밀려드는 폭도들 속에서 그 문을 닫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근위대가 동원되기 전에 황궁으로 침입한 백성들이 모두 유가 황자의 궁으로 몰려갔다.
그 수는 이미 수백으로 불어나 있었으며, 소식을 들은 자들이 가세하면서 그 수는 점점 더 불어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자레스가 보낸 선동꾼이 섞여 있었다. 모두 칼리크 신도들이었는데 그들이 군중들 사이에서 성녀를 약탈해 간 유가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고 있었다.
“유가의 궁으로 가자! 성녀님을 구출해 내자!”
분위기에 압도된 폭도들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충차(衝車. 성문을 부수기 위해 사용된 공성병기) 노릇을 하는 거대한 기둥까지 동원해 유가 황자궁의 문을 두들겨 대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유가가 분노하며 그답지 않게 상스러운 욕을 퍼부었다.
“호위병들을 동원해! 그리고 본궁에 연락을 넣어 근위대를 불러와라!”
“이미 연락했습니다. 하지만 황궁 외정에 벌써 사람이 가득 차서 여기저기서 약탈을 벌이고 있습니다. 근위대가 아니라 수도 방위군을 동원해야 할 마당입니다.”
때맞춰 또다시 굉음이 들려왔는데, 이번엔 그 소리가 달랐다.
충돌음에 이어 쩍, 하며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노도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황자궁 문이 뚫렸다. 황자궁 안마당으로 밀려 들어오는 인파를 본 유가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성녀를 본궁으로 옮겨라!”
그의 명령에 무르마가 침실로 따라 들어왔다. 침실 한복판에는 아넬이 여전히 정신이 혼미한 채로 엎드려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눈은 완전히 흐려져 있었고, 이렌시아어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유가는 그 모습을 보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뭘 보고 있나, 어서 업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 약한 비명이 들렸는데 유가가 뒤를 돌아본 순간 열어젖힌 문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무르마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무르마 뒤에서 나타난 건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괴한이었다. 보이는 부분은 눈밖에 없었지만, 새파란 눈을 본 유가는 바로 그가 누구인지를 짐작했다.
“자레스.”
유가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지만 자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유가가 아니라 아넬에게 향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의 상태가 이상했다.
인기척이 여럿 들리자 고개를 들어 이쪽을 봤지만 눈동자는 이미 흐릿해졌고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자레스가 잠시 주의를 돌린 사이 그가 재빨리 일어나더니 침실 안쪽으로 달아났다.
자레스가 깜짝 놀라 그쪽을 쳐다봤을 때는 유가가 이미 침실 한구석에 있는 비밀 장치를 당겨 통로의 문을 열고 있었다.
한쪽에 세워진 거울 뒤의 벽이 열렸고, 유가가 그 통로로 들어가자마자 벽이 다시 닫혔다.
“비밀 통로인가.”
자레스가 중얼거렸지만 쫓아가는 건 포기했다. 지금은 유가를 죽이는 것보다 아넬을 구해 내는 게 먼저였다.
자레스는 유가의 침대에 놓여 있던 이불로 아넬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둘둘 감쌌다.
유가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넬은 인사불성이었다. 자레스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가가 눈앞에 있다면 칼로 난도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부글거렸다.
“이봐, 너.”
아넬을 안아 든 채로 무르마를 발로 차자 잠깐 기절했던 그가 금세 깨어났다.
자레스가 칼을 들이대자 무르마가 겁에 질려 엉덩이를 뒤로 물렸는데, 자레스가 그런 그에게 으르렁댔다.
“너희 내관들이 다니는 뒷길이 따로 있지?”
황자궁과 황궁 안에는 무수한 샛길과 지름길이 있다.
유가는 내관을 비롯한 천한 것들이 자신이 다니는 길에 얼쩡거리는 걸 싫어해서 그들을 남들 눈에 띄지 않는 뒷길로 다니게 했다.
아마 그 길은 지금 쳐들어온 폭도들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를 그리로 안내해라.”
자레스의 위협에 무르마가 어쩔 수 없이 앞장섰고, 자레스는 서둘러 유가의 황자궁을 빠져나왔다.
유가의 궁은 이미 엉망이 돼 있었다.
성녀를 찾겠다는 폭도들이 유가의 궁 안에 쏟아져 들어와 있었지만, 이미 성녀는 깡그리 잊은 뒤였다.
그들은 눈앞에 번쩍거리는 보물과 귀중품에 눈이 뒤집혀 여기저기서 약탈을 벌이고 있었다.
성녀를 찾으려고 뒤지는 자들도 있긴 했지만, 아넬을 이불로 둘둘 감아 둔 상태였기에 자레스가 그 성녀를 안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그들처럼 유가의 궁에서 뭔가를 약탈해 나왔으려니 여기며 신경 쓰지 않았고, 그들이 눈이 뒤집혀 유가의 궁을 뒤지는 동안 자레스는 아넬을 안고 황궁을 빠져나갔다.
황궁 밖에는 무칼라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준비한 마차에 올라탄 자레스는 계속해서 달려 시내에 있는 모처로 들어갔다.
별장은 이미 노출된 뒤였기에 그리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향한 곳은 자레스가 예전에도 여러 번 이용한 적이 있는 카베였다.
그곳엔 퀴나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레스가 아넬을 안고 들어가자마자 퀴나에가 카베 주인에게 명해 아예 가게 문을 닫게 했다.
“폭동을 빌미로 문을 닫았다 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예요. 주인장은 한 며칠 정도 바닷가 별장이라도 가서 푹 쉬다 오세요.”
그 말과 함께 큰돈을 안겨 주었기에 카베 주인은 두말하지 않고 가게를 비웠다. 무칼라스와 퀴나에를 뒤로한 채 자레스는 카베의 깊숙한 내실로 향했다.
그곳은 평소에는 귀족들이 커피를 마시고 토론을 하는 별실이었다. 벽을 따라 긴 장의자가 놓여 있었고, 장의자엔 푹신한 쿠션들이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아넬을 의자에 내려놓은 자레스가 둘둘 만 이불을 치우고 그녀를 들여다봤다.
“흐으으….”
아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약효가 한창 효과를 발휘할 무렵이었다. 아넬은 여전히 몽롱한 채로 자레스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자레스.”
상대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알아는 봐도 그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제어가 풀린 이성이 마구 날뛰어 대고 있었다.
꼬박꼬박 황자라고 부르며 선을 긋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레스의 이름을 불렀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색기를 띤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레스는 저절로 꿀꺽 침을 삼켰다.
혼인식을 치르려 했다니, 유가가 아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미약을 먹였겠지.
아넬의 미색에 혹해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이기에 짓밟으려 들었을 게 뻔한데, 단지 그런 이유로 성녀를 범할 마음을 품은 유가를 자레스는 찢어 죽이고 싶어졌다.
“그래, 아넬. 나야.”
자레스가 속삭이며 그를 향해 팔을 뻗은 아넬을 끌어안았다. 평소 같으면 바로 밀어내거나 마지못해 반응을 보였던 그녀가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자레스에게 안긴 아넬이 오히려 그에게 매달리며 더욱 흐느적거렸다.
“내 몸이… 이상해. 흐, 뜨거워. 너무…. 으, 으응.”
이성은 흐릿해졌지만, 제 몸이 이상하다는 걸 알 정도의 본능은 남아 있었다.
그 본능이 문제였다.
미약에 자극된 그것이 자꾸만 자레스를 향해 움직였다.
유가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려 할 때는 역겹고 무섭기만 했는데, 이 남자 앞에서는 미약의 효과가 생생하게 발휘됐다.
그녀의 안에 들어찬 이 시뻘건 것을 토해 내고 싶었고, 자레스라면 그걸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요. 으…. 흐응.”
어쩌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레스에게만 그걸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넬은 애타는 심정으로 허우적거렸다. 그에게 매달리자, 그리고 자레스가 그녀를 꽉 끌어안자 체온이 더해지는데도 오히려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자레스가 애타게 속삭였다. 계속해서 그를 밀어내기만 하던 아넬이 스스로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하라고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젊은 몸은 이미 한계에 부딪혀서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만 남은 지금이라면 아넬이 그에게 안길 것이다.
“사랑해.”
하지만 자레스는 겨우 그렇게 속삭일 뿐이었다. 약을 먹인 채로 그녀를 안고 싶지 않았다. 아넬이 진심으로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래서 몸도 열게 하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다.
아넬은 맨정신일 때 그를 봐야 했고, 맑은 몸과 마음으로 그에게 안겨야 했다.
하지만 흐느적거리는 그녀를 안은 채 참고만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았다.
미약을 먹은 건 그인 것 같았다. 그도 함께 머릿속이 열기로 몽롱해지고, 몸 안에 화염이 번져 갔다.
“사랑해. 사랑해…. 아넬. 정말 미치도록 사랑해.”
겨우 그렇게 속삭이는 게 고작이었다. 색기로 인해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다가 이내 그 입술을 짓이기듯 내리눌렀다.
숨이 막히도록 키스를 하고 입술 안을 휘젓다가 다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아넬이 바르르 몸을 떨며 그에게 응했다.
다시 밀려들어 온 촉촉한 살이 아넬의 혀끝을 건드리고 곧 입술 안쪽 깊은 곳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혀끝으로 침샘에 고인 타액을 맛보고 구석구석 건드리더니, 이내 얼굴을 비틀며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아넬은 입술을 곱게 벌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 역시 자레스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가, 다시 그를 받아들이며 열렬하게 반응했다.
이것도 미약의 효과인 걸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그가 죽는 게 두려워서 돌아왔다는 아넬의 말이 기억나면 더 밀고 들어갈 수가 없어졌다.
자레스는 끓어오르는 열기를 내리누르며 간신히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넬이 벗어나려는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애타게 속삭였다.
“가지 말아요.”
“…아넬.”
이건 새로운 고문법인가?
퀴나에를 불러 얼른 해독제를 구해 오라 해야겠다.
아넬이 아니라 그가 미칠 것 같았다. 자레스는 나름 단단하게 옷깃을 붙잡은 그녀의 손가락을 다치지 않게 풀어내려 애를 썼다.
“가지 말아요. 흐, 흐으…. 으, 자레스.”
“아넬, 제발 이러지 마.”
애가 타는 건 그였다.
“지금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야. 나도 알아, 하지만 이러다 내가 정말 당신을 덮쳐 버릴 것 같아.”
아넬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속삭였다. 하지만 미약의 효과는 생각지도 못한 아넬의 일면을 드러냈다.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앙탈을 부리며 다시 그를 붙잡았다.
“가지 마. 흐, 응. 자레…. 응. 나도… 나도 사랑해요, 자레스.”
“뭐라고?”
아넬에게 물들어 점점 흐려져 가던 그의 정신이 벼락처럼 깨어났다.
귓구멍이 송곳으로 쑤셔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 멍해졌고, 그러다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태산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다시 한번 말해 봐.”
“흐. 으응. 사랑해요. 하, 으응…. 나도… 당신을. 하아….”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정신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그대로 별들이 가득 박힌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 그대로 꽂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다가 이내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한 걸까.
환희로 뱃속이 뜨거워졌다가, 이내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란 걸 깨닫고는 다시 싸늘하게 굳어진다.
이 여자는 성녀가 아니라 마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악마 같은 말만 속삭일 수가 없다.
“거짓말.”
너무 믿고 싶은 나머지 오히려 부정하고 싶어진다는 걸 자레스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절망이 부글부글 끓었고, 광기로 죽을 수 있다는 게 절절하게 느껴졌다.
“거짓말… 아니에요. 흐, 으응…. 당신을 사랑해. 하아.”
아넬이 키스해 달라는 것처럼 애타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이게 정말 미약의 효과인 걸까?
단지 그에게 안기고 싶어서 이런 거짓말까지 술술 흘리는 걸까?
미약은 성적인 흥분을 고조시키지만, 없는 애정까지 끌어내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의 고백은 진심일지도 몰랐다.
애타는 희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와 동시에 다시는 좌절하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방어 본능도 함께 눈을 치떴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면 왜 그를 거절하는 걸까.
자레스는 자꾸만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그녀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일부러 그를 미치게 하려는 게 아니라면 아넬은 이래선 안 됐다.
“나를 사랑한다면 왜 날 거절하지?”
“그건… 흐….”
“역시 거짓말이로군.”
“아니에요. 흐, 으으윽. 나는… 윽, 자레스…. 흐윽.”
숨이 가쁜 건지, 슬퍼서 우는 건지 아넬의 호흡이 꺽꺽거리며 가팔라졌다.
“말해 봐. 순결을 잃는 게 두려운 건가? 당신이 성녀라서?”
“으, 으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어느 정도는 그녀의 두려움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넬을 위해 가지 말아야 할 사지만 골라서 밟아 온 자레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넬을 갖기 위해 황위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메타의 저주를 받아도 상관없었다.
고작 신벌이 두려워 함께할 수 없는 거라면 아넬은 그에게 감히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안 됐다. 그건 그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수없이 해쳐 본 자레스였지만 이 세상에 신벌은 본 적도 없었다.
늘 더 악랄한 자가 이겼고, 더 비겁한 자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신의 정의와 징벌이 현실에서 이뤄지는 걸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메타는 없어.”
자레스가 그녀의 양손을 모아 쥐며 위협하듯 내뱉었다. 아넬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자레스 역시 그의 부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신은 없어. 이 세상에 신벌은 없어. 신벌이 있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악당 천지일 리가 없어. 그리고 당신이 내게 이렇게 안겨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리도 없어.”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으흑. 신은 있어요.”
“아니야. 당신도 내 말이 옳다는 걸 알아. 날 봐, 아넬.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날 받아들여 줘. 괜히 메타를 핑계로 대지 마.”
“아니… 아니에요. 정말이야. 메타는… 당신이 나를 범하자, 아르드를 멸망시켰어요. 메타는 정말로 있어요. 흐으으윽.”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그를 때렸다.
그 순간 자레스는 벌떡 일어났고, 울먹이는 아넬의 눈을 잡아먹을 것처럼 들여다봤다.
이 여자가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지?
“누가 누굴 범했다고?”
그녀를 안지 못해 미쳐 가던 그가 아넬을 범했다고? 알고 있던 모든 일들이 다 뒤집혔다. 결과와 원인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나를… 이미 한 번 범했어.”
아넬의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마치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처럼 그녀는 질식할 듯 새하얗게 변했다 다시 붉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그토록 숨겨 왔던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카비르의 황제가 돼서… 날 약탈했어. 나를… 흐윽, 강제로…. 그 순간 메타가 세계를 멸망시켰어요.”
자레스가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아넬을 쳐다봤다.
거짓말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미약에 취해 내뱉은 허언이 아닌 것처럼, 그녀는 오히려 그 약의 힘으로 진실을 토해 내고 있었다.
혼자 감추기 힘들어서 목구멍까지 차 버거워하던 걸 꾸역꾸역 뱉어 내고 있었다.
“나, 난… 메타 앞에 끌려가서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어요. 나를 돌려보내 주면 절대 당신과 만나지 않겠다고…. 순결을 지키겠다고… 그 대신 아르드를 되돌려 달라고 애원…했어요.”
계속하라는 듯 자레스가 끼어들지 않자 헉헉,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메타는… 내 말을 들어줬어요. 시간을 되돌렸고, 나는 2년 전으로 돌아…왔어요. 아직 성녀로 개화하기 전, 열아홉의 몸으로…. 나는… 흐윽, 그래서 신전을 도망….”
더 말을 잇고 싶었지만, 미약의 기운이 너무 강렬해 이젠 그조차도 힘들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아넬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