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20/33)

19.

아넬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자레스가 그렇게 황궁에서 황제와 기 싸움을 하고, 황자들의 첩보망을 쳐 내는 와중이었다.

아넬은 자레스의 걱정대로, 바닷물에 뛰어든 여파로 몸살이 나서 꼬박 하루를 앓았다. 성력을 쓰면 대번에 나았을 테지만, 그녀는 제 몸에 성력을 쓰지 않았다.

하녀들이 약초와 약을 쓰며 번갈아 간호한 덕에 그나마 빈약한 체력치고는 일찍 나았는데, 그래 봤자 온전히 기운을 차린 것은 별장에 들어온 지 사흘째가 되는 아침이었다.

“스프를 끓여 왔습니다, 마님. 한 숟가락 드셔 보세요.”

말 못하는 하녀와 눈먼 하녀가 진하게 끓인 스프 단지를 들고 아넬의 방에 나타났다.

눈먼 하녀의 이름은 사이야라고 했는데, 마음 같아선 두 사람의 몸을 고쳐 주고 싶었지만 자레스가 화를 낼 게 뻔해서 아넬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은 꼭 식사를 하셔야 해요. 기운이 없으면 병이 다시 찾아온답니다.”

“…알아요. 오늘은 먹어 볼게요.”

“잘 생각하셨어요. 화덕에서 갓 꺼낸 빵도 있는데, 가지고 올까요?”

“그건 점심에 들어도 될까요? 그리고 식사를 하고 나선 별장 주변을 돌아보고 싶어요.”

“무하립 님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모쪼록 무리는 하지 마시어요.”

두 하녀는 손발이 아주 잘 맞았다. 별장에 오래 있어서인지 사이야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돌아다녔고, 사이야가 챙기지 못하는 부분은 말을 못 하는 하녀가 맡았다.

대부분 지시는 사이야가 내렸지만, 눈이 보여야 할 수 있는 건 말 못 하는 하녀가 했다. 두 하녀의 시중 속에서 식사를 마친 아넬은 1층으로 내려와 무하립을 만났다.

“무하립이라 합니다.”

“……?”

멀찍이 서서 허리를 굽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아니, 낯설었다. 그녀가 본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옷은 찢어져 너덜너덜했으며 온몸이 모래투성이였다. 같은 사람이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멀끔하다.

아니, 이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은 드무니 같은 사람이 맞는 걸까?

“설마…?”

무하립이 멋쩍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전하께서 살려 주신, 그 칼리크 교도가 맞습니다.”

“아, 그럼 약속대로 마디나로 올라온 거군요.”

“그렇습니다. 사실은 사이야도 칼리크 교도입니다. 이 별장에 모여 있는 사병들 전부 같은 신을 믿고 있지요.”

“아…!”

“전하께서 그때 생포한 칼리크 교도들 외에, 카비르 전역에 있는 젊은 교도들을 데리고 오라 명하셨기에 이렇게 마디나에 모이게 됐습니다. 교도들은 이 별장과 마디나 곳곳에 배치돼 있지요.”

자레스는 약속을 지켰다. 칼리크 교도들을 모두 살려 준 것도 모자라 젊은 신도들을 모아 일자리까지 마련해 줬다.

물론 그 목적이 그의 병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숨어 살아야 했던 칼리크 교도로서는 살길을 마련해 준 은인일 터다.

“다행이군요. 정말 잘 됐습니다. 이제 당당히 마디나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됐으니, 신도들도 기뻐하겠어요.”

아넬이 진심으로 기뻐하자, 무하립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다 그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선 저희 칼리크 교도들을 미워하지 않으십니까?”

“네?”

“메타와 싸운 신이고, 메타를 믿는 자들은 칼리크 신을 악신이라 믿습니다. 성녀님께서도 그렇게 배우셨을 텐데, 저희가 혐오스럽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아넬도 이상했다.

에포메니로 살 때, 그녀가 들은 칼리크 교도들의 모습은 아이를 희생양으로 바치고 살인을 즐기며 피를 마시는 악귀들이었다. 그때는 분명한 혐오가 있었다.

그게 바뀐 건 노예 소년 파이디로서 포로로 잡힌 칼리크 교도들을 만났을 때였다.

그들은 듣던 것과 달리 평범했고, 심지어 악하지도 않았으며 행동으로 보자면 선량하고 경건한 쪽에 속했다.

오히려 메타의 신관들이 긴 역사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정치에 물들어 가면서 위선적인 속물이 돼 갔다.

그에 비하면 도리어 칼리크 교도들이 그동안 그녀가 교육받은 ‘훌륭한’ 메타 신도에 가까웠다.

아마도 선입견을 버리게 된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느새 아넬은 칼리크 교도들을 메타 교도와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칼리크를 믿는다고 해도, 그녀가 배운 칼리크 신도들처럼 잔인한 짓을 하지 않으면 비난하고 미워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오히려 약한 자를 괴롭히고, 전쟁을 부추기는 메타 교도들이 더 악에 가까웠다.

묘한 일이다.

“칼리크란 이름만 빼면 오히려 신실한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혐오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때는 그런 감정을 가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아넬은 잘못된 편견을 오래 간직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녀가 좁은 신전에 갇혀 상상만 하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이제 아넬은 그녀가 신전을 보고 나와 알게 된 현실과 눈으로 본 현상을 믿게 됐다.

무하립이 그런 그녀의 맑은 눈을 들여다봤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고, 사실 거짓을 말한다 해도 원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성녀였다. 메타를 믿는 신도들이 신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여자.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막 입을 달싹거리려 할 때 불현듯 인기척이 났다.

“전하!”

언제 온 건지 자레스가 입구에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언제 오셨습니까, 전하.”

“말발굽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었나 보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했지만,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

자레스의 질투심은, 그녀에 대한 집착만큼 강하다. 사내답지 못한 것 같아 불편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아넬은 늘 그를 불안하게 했고, 그녀에게 다가서는 남자들은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넬을 사랑하는 동안엔 이 불안정한 감정이 계속 따라다닐 거라 생각하니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물러가 있어. 그리고 저택 안에 사람을 모두 비우도록.”

쌀쌀한 명령에 무하립이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재빨리 1층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하녀와 사병들을 몰아 마당으로 나가려는 것이리라.

“자레스 황자.”

거의 사흘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었다. 반가움보다 묘한 어색함이 아넬을 감쌌다.

천천히 가라앉던 바닷속에서 그녀를 향해 헤엄쳐 오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격하게 그에게 안긴 것도, 그와 입술을 겹친 것까지.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진 것처럼 선명하게 상기됐다.

그 뒤로 이어진 그의 부재와 병으로 인해 미처 떠올리지 못했는데, 그녀는 결국 스스로 탈출을 포기하고 자레스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게 자레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아넬은 모르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당황한 나머지 저절로 한 걸음 물러서자, 자레스가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성큼 다가섰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자레스가 바로 아넬을 안아 들었다.

“아!”

단단한 팔이 옥죄는 것처럼 등과 무릎 안쪽을 감쌌다.

거절해 봤자 무의미했고, 안 그래도 무하립 때문에 예민해진 자레스를 자극할 뿐이다. 아넬은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안긴 채 2층 침실로 올라왔다.

“열은?”

아넬을 침대에 내려놓으며 자레스가 물었다. 이미 연락이 갔었던 모양이다. 자레스가 모르는 일은 없는 듯했다.

“괜찮아졌어요.”

확인하겠다는 것처럼 갑자기 자레스가 그녀의 이마를 짚는 바람에 아넬은 깜짝 놀랐다. 얼굴이 확 붉어지며 순간 열이 오르자 자레스가 짓궂게 웃었다.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다시 그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고 열렬히 응했던 게 생각나면서 얼굴이 더 빨개졌다.

“나았다는 건 거짓말이로군. 이마가 태양처럼 뜨거워.”

“아니에요. 정말로 괜찮….”

제대로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그때 자레스가 아넬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댄 채 드러누웠기 때문이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성력을 달라고 안 할 테니 제발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줘. 이러고 있는 게 나한테는 치유야.”

눈살을 찌푸린 채 툭 내뱉은 자레스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자레스가 이렇게 쉽게 그녀를 흔들게 된 걸까.

자레스는 아넬의 약한 부분을 파악한 게 틀림없었다. 거절하지 못하도록, 손안에 넣고 이리저리 잘 굴려 댔다.

아넬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무릎을 내주자, 자레스는 눈을 감은 채 잠시 동안 누워 있었다.

주변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병들이 말까지 싹 몰아서 별장 아래로 내려가 버렸는지, 말 울음소리도 안 들렸고 인기척도 없었다.

별장 주변을 맴도는 새 소리만 가끔씩 고요를 깰 뿐, 두 사람 사이에 부드러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이 정도로 편안했던 적이 있을까?

아넬은 침대 머릿장에 등을 기대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은 자레스와의 접촉이 그리 무섭지도 않았고, 어느 정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아무렇지 않게 아넬의 무릎을 훔쳐 가서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넬은 마음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황궁은 어떤가요?”

반드시 황제나 나머지 황자들이 아넬을 추적하려 들 터였다. 자레스가 어떻게 그들을 막아 내고 있는지 걱정이 됐다.

“당신을 놓친 거로 해 뒀어. 실제로 신관과 시녀들이 짜고 당신을 탈출시켰으니까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지. 부황은 당신이 배를 타고 탈라사로 도망친 거로 알고 있어.”

아마 황제는 아넬을 내놓으라고 비선에서 탈라사를 압박할 것이다. 탈라사는 온 적도 없는 성녀 때문에 당분간 외교적으로 핍박을 받아야 할 테고.

하지만 그런 건 아넬이 모르는 게 나았다.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여자는 늘 걱정이 없어야 했고, 그의 품 안에서 편히 쉬어야 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래야 했다.

“아넬.”

문득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무 목소리가 낮아서 아넬은 듣지 못했는데, 그사이 자레스가 누운 채로 슬며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아넬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대체 언제쯤에나 그의 손길이 익숙해질까. 배에서 뛰어내린 찰나에는 그렇게나 격하게 그의 입술을 맞아들였으면서.

자레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자, 아넬이 침대 머리 쪽으로 물러났다.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자레스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챈 것이다.

“왜 놀라지?”

자레스는 차분하게 물었다.

당연히 예상했던 게 아니었던가?

그녀는 그가 어떤 마음인지를 알면서도 돌아왔고, 그렇다면 아넬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넬은 당황하지 말아야 했다.

자레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앉으며 그녀와 몸을 밀착시켰다. 굳센 팔뚝이 다시 아넬의 허리를 감쌌고, 자레스는 다른 한 손으로 뜨거워진 그녀의 뺨을 거머쥐었다.

“나, 나는… 이, 이런 건….”

귀에서 김이라도 빠져나올 것처럼 아넬의 낯빛이 새빨개졌다. 좋게 보면 귀여웠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뱃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똬리를 튼 뱀처럼 머리를 치켜들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탈출을 포기한 것 아니었어? 내가 죽을까 봐 걱정돼서 돌아온 것 맞잖아?”

그건 맞았다. 그래, 아넬은 이 남자가 죽는 걸 볼 수 없었다. 자레스의 물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여자는 없어. 그렇지 않은가?”

“아니에요. 난…. 그, 그냥 당신이 불을 붙이려 하니, 나도 모르게….”

서툰 거짓말을 하며 몸을 빼려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침대 위에 눕혀진 뒤였다.

아넬의 위로 올라탄 자레스가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황자…!”

튀어나오려던 말이 그의 입술에 가로막혔다. 어느새 그는 얼굴을 내렸고, 양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 쥔 채 뜨거운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밀어 넣고 있었다.

키스를 처음 당해 본 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떨 때는 정신없이 응한 적도 있었고, 바로 며칠 전만 해도 격하게 입술을 부딪쳤었다.

하지만 지금 이 키스는 다르다. 그전의 것이 사랑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면, 지금 이것은 이미 사랑을 확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을 무언가를 위해 차근차근 몸을 열어 가려는 행동이었다.

입술을 열어 깊숙이 혀를 얽은 그가 이윽고 그녀의 뺨과 이마에도 열렬한 키스 자국을 남겼다.

“아넬. 아넬….”

그가 뜨겁게 속삭이며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에 깊게 입술을 눌러 키스 자국을 남기더니 이어서 푹 팬 쇄골에 혀를 밀어 넣어 핥았다.

“하앗.”

짜릿한 통증에 아넬이 비명을 질렀다. 자레스가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어 얕은 잇자국을 남겼다. 그러고는 욕망에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는데, 그 눈빛이 마치 야수처럼 느껴졌다.

무서웠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어느새 그의 감정에 반응해 서서히 열려 가는 그녀의 몸이었다.

두려움이 사막에 떨어뜨린 한 방울 물처럼 순식간에 휘발돼 버리고, 그 자리에 어떤 기대가 들어찼다.

그녀도 응하고 싶었다. 자레스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수영도 못하면서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이미 자신의 감정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이젠 자레스도 그를 알아챌 게 틀림없으니, 어쩌면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각오했어야 했다.

“앗.”

어느새 치마 아래로 들어온 자레스의 손이 허벅지를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치마 아래로는 얇은 속옷밖에 입지 않았다. 자레스가 간신히 사타구니만 가리는 그 속옷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로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 아래로 드러난 눈부시게 하얀 허벅지를 자레스는 정신없이 들여다봤다.

마치 눈처럼 하얀 빛깔이었다. 매끄러운 피부는 마치 진주처럼 보이기도 했고, 입을 맞추고 싶은 강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자레스는 그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뽀얀 허벅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으읏.”

부끄러운 곳에 입술을 맞이한 아넬이 몸서리를 쳤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쾌감에 아넬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자레스의 입술이 촘촘히 입술 자국을 내며 허벅지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아넬이 저릿한 자극과 생경한 희열에 뻣뻣하게 몸을 굳히자, 자레스가 여전히 허벅지에 댄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작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넬, 하아….”

그의 숨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버거울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그녀의 엉덩이를 치대던 자레스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허리의 곡선을 따라 올라온 그의 손이 곧 앞섶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아넬의 사랑을 확신한 자레스는 더 이상 밀려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겹쳤고, 아넬은 뜨거운 살덩어리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오자 그만 거기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자레스는 뜨거운 유혹자였다. 능숙하게 그녀의 넋을 빼내고 그를 용납하게 만들었다.

아넬이 키스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자레스는 마침내 아넬이 걸친 드레스의 단추를 모두 풀어 버렸다.

벌어진 앞섶 새로 드러난 그녀의 흰 젖가슴을 자레스가 한입 가득 물었다. 따뜻한 혀가 유륜 주위를 살살 핥자, 아넬은 난생 처음 느끼는 이상한 쾌감에 저절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 아앗!”

아넬의 허리가 크게 휘었다. 머릿속이 녹아 버릴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휘몰아쳐서 아넬은 벌벌 떨며 그가 주는 희열 속으로 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아….”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키스도 당황스러운데, 남자한테 젖가슴을 빨리다니. 그런데 한번 문을 열자, 두려움보다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욕망이 확 커져 버렸다.

무서운 것은 자레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에게 젖가슴을 내주면서 희열에 몸을 떠는 자신.

처음으로 겪는 세계가 차례차례 문을 열면서 그녀를 더 깊은 열락의 안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한쪽 젖가슴을 입으로 희롱하던 자레스가 이번엔 다른 쪽을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었다. 혀와 손을 번갈아 놀리면서 젖가슴을 치대다 이윽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유두를 튕겼다. 날카로운 자극에, 아넬은 또다시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으으응!”

“하아….”

자레스가 또 올라와 입을 맞췄다. 여전히 한쪽 가슴을 주무르면서 혀를 깊이 밀어 넣어 말캉한 살을 섞자, 아넬은 자신도 모르게 열렬히 그에 응했다.

자레스가 입술을 떼어 냈지만 두 사람의 혀와 혀 사이에 끈끈한 타액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아넬의 입술은 자레스가 묻힌 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발개진 볼과 몽롱한 눈,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의 조화가 그를 끔찍하게 자극한다는 걸 아넬은 알고 있을까.

어서 그녀를 안고 싶었다. 아넬의 안으로 밀고 들어가서 그녀를 자신으로 꽉 채우고, 아넬의 자궁 안에 그의 정수를 부어 넣고 싶었다.

그녀의 것을 떠난 입술이 목표를 향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이미 허리띠는 풀어졌고, 드레스 앞섶은 완전히 헤집어져 있어서 그 사이로 은밀한 곳을 가린 속옷만 남아 있었다.

자레스는 그것마저 제거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느릿한 손길이 거미처럼 기어가 허리춤에 손가락을 걸자, 그제야 아넬이 퍼뜩 깨어났다.

‘안 돼!’

모든 것을 각오했어도 이것만은 아니었다. 메타에게 한 맹세는 이미 깨졌지만 순결을 지키겠다는 의지까지 무너뜨릴 용기는 없었다.

아르드가 소멸하는 걸 보지 않았다면, 메타의 존재를 직접 만나지 않았다면 끝내 응했을 몸과 마음이 그 문턱에 덜커덕하고 걸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안… 안 돼요.”

아넬이 안간힘을 다해 자레스의 손목을 잡고 그를 밀어내자, 그가 놀란 눈으로 아넬을 쳐다봤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지금껏 열렬하게 응해 놓고, 다 받아들여 놓고서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거부하다니, 이건 우롱에 가까웠다.

“왜지?”

그나마 물어볼 수 있는 인내심을 발휘한 건 그에게 안겨 오던 아넬의 열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분명 그녀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그가 주는 열락에 몸을 맡기지 않았던가.

“성녀는… 순결해야 합니다.”

“개소리.”

“제발… 메타께서 모든 걸 다 보고 있습니다.”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온 거잖아. 방금 전까지 신음을 흘리고 허리를 뒤틀던 여자는 누구였지?”

아넬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넬도 메타가 왜 그녀와 자레스를 내버려 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파괴적인 신의 힘이라면 그냥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원흉인 자레스를 그냥 죽여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 건 이 정도까지는 허락한다는 뜻일까?

신벌이 내리지 않은 걸 보면 그녀의 짐작이 맞을 수도 있지만, 자레스가 그녀와 결합하는 순간 신의 힘이 땅에 내리꽂히는 걸 확실히 본 아넬로서는 차마 그 너머까지 갈 용기가 없었다.

“아넬, 제발.”

이제 애원하는 건 자레스 쪽이 됐다. 그가 마지막 천 조각을 치워 버리기 전에, 그전에 마음부터 허락해 달라고 애걸했다.

하려고 들면 힘으로 못할 게 없었다. 전생에 있었던 일이야 자레스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억지로 아넬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인내심은 고갈돼서 마음을 지나 몸까지 타들어 갈 지경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확인하고 싶었다.

아넬이 그를 사랑한다는 걸, 그래서 그에게 몸도 열 수 있다는 걸. 뭣보다 알고 싶은 건 그것이었다.

마음이 없는 빈껍데기 몸을 갖고 싶지 않았기에, 부두에서 재회했을 때 얻은 믿음이 너무나 확실했기에, 오히려 그녀의 인정 없이는 그 이상을 바랄 수 없게 됐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당신을 허락해 줘.”

자레스가 다시 한번 애끓는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그건 아넬에겐 아예 형벌이었다.

인두로 지지고, 채찍으로 내리치는 것보다 그의 간절함이 더 고통스러웠다.

왜 메타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걸까. 왜 더 빨리 그녀와 자레스 사이를 갈라놓지 않은 걸까.

이제껏 해 보지 않았던 원망이 모두 신에게로 향하였고, 신심과 미움을 모두 견디지 못한 아넬이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으흐흑.”

그냥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건 자레스의 명치를 후벼 파는 그런 송곳 같은 무기였다.

노예 파이디로만 알았을 때도 우는 건 숱하게 봤다. 하지만 사랑하게 된 후로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그가 휘두르는 환도만큼이나 날카롭고 치명적이었다.

울 정도로 그가 싫은 걸까?

그동안 보인 반응은 그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고, 마음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 않는 채로 굳어 있는 걸까?

의심이 폭풍 전에 몰려오는 구름처럼 마구 부풀면서 그의 온 마음을 덮었다. 절망이 다시 그를 내리누르고, 뜨거웠던 마음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자레스가 무겁게 물었지만, 아넬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지금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것 같았다. 사랑한다고, 그와 함께하고 싶어서 그녀도 미칠 것 같다고 매달리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그에게 말한단 말인가. 당신에게 안기면 이 세계는 멸망한다고. 그래서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자레스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에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꾸며 낸다고 더 격분할 것이다. 믿는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두려웠다.

함께하지 못하는 좌절은 그대로 증오가 돼서 메타를 향할 텐데, 아넬은 자레스가 그 이후에 무슨 짓을 벌일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 광포한 남자는 언제나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었고, 그렇기에 세계의 멸망까지 가져왔다. 그걸 아는 아넬은 절대로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넬의 침묵은 고스란히 자레스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는 모든 희망과 기대가 스러진 눈빛으로 아넬을 쳐다봤고, 불이 꺼져 버린 어둠처럼 깊어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당신의 진심은 뭐지? 날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왜 돌아온 거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그만이 항상 아넬을 원하고, 그녀는 그 사랑에 보답해 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아넬이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안에 아무것도 없기에,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몸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항상 날 미치게 해.”

차라리 당신이 싫다고 하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그래도 소용없다. 아넬이 무슨 말을 해도 자레스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한다.

평생 그를 증오한다 해도 자레스는 아넬을 제 손안에 두지 않고선 살 수 없었다.

비참했다.

굴욕감에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차라리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사랑을 구걸할지언정, 아넬을 놔줄 수는 없었다.

평생을 어두운 골방에 가둬 놓고 오직 그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미쳐서, 살고 싶어서 그를 사랑한다고 거짓말이라도 해 줄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이미 미쳐 있구나.’

갑자기 자신이 두려워졌다.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다간 아넬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애정을 강요하고, 그러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그녀를 죽이고, 그도 자살할 것 같다.

이 맹폭한 감정이 두려워 자레스는 물러났다.

다시 오겠다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자레스는 울고 있는 아넬을 뒤로하고 별장을 빠져나갔다.

‘정말 동정심 때문에 돌아온 건가?’

궁으로 돌아온 자레스는 식사도 거부한 채 제 방에 틀어박혔다.

머릿속을 맴돌던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 돌덩이처럼 그의 심중에 박혔다.

다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던 그녀였다.

왜 굳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돕느냐고 힐난했을 때, 아넬은 생명은 모두 똑같다고, 다친 사람은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고 받아쳤었다.

모든 생명을 아끼는 그녀라면, 자레스가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아넬은 그래서 돌아왔다고 그에게 확인시켜 줬었다.

어쩌면 자레스 혼자서 물속에서 격렬하게 그를 끌어안던 아넬의 마음을 제멋대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동정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고통이 나무뿌리처럼 그의 몸속에 퍼져 나갔다. 혈관 속에 피 대신 모래가 흐르고,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유리 파편이 박혀 끊임없이 그의 몸을 후벼 파는 것 같다.

‘산 채로 죽어 간다는 게 이런 심정이로구나.’

세상의 모든 절망이 그에게로 몰려와, 자레스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그를 향해 입을 벌린 시커먼 나락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어 갔다.

노예 시절에 올려다봤던 황궁은 멀고 멀었으나, 그 길을 올라갈 계단이 확실히 보였다.

계단의 끝에 비참한 전락이 있을지라도 꼭대기까지는 올라가 보겠다는 처절한 의지와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올라갈수록 계단마다 푹푹 빠지는 늪이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도로 굴러떨어져 진창에 처박혔고, 지금 자레스는 그가 가장 밑바닥이라 여겼던 곳보다 더 깊은 곳까지 내려앉아 저 멀리 하늘에 달린 별처럼 바늘 끝만 한 빛만 보이고 있는 출구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럴 힘이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에포메니를 납치하겠다고 의기양양하게 카비르를 떠나던 그즈음으로 돌아가 배를 불사르고 싶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 힘이 없었고, 자레스는 끝없는 절망에 사로잡힌 채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

황제는 마디나의 대신관과 신관들을 감금한 지 닷새 만에 풀어 줬다.

마음 같아서야 죄다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종교와 정치가 반목하기 시작하면 혼란이 끝이 없었다.

카비르는 이미 세속 정치가 종교 위에 있었지만, 아르드에선 유일신이나 다름없는 메타의 신관들과 척을 지면 국민들의 반발도 거세진다.

그런 까닭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신관들을 풀어 줬지만 보복은 잊지 않았다. 마디나의 신전은 공사를 빌미로 폐쇄됐다.

신관들은 갈 곳 없이 쫓겨나 거리를 유랑하는 신세가 됐으니, 이제는 다른 지역의 신전으로 옮겨 가거나 타국으로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은 그들의 행보를 논하기 위해 마디나의 주요 신관을 그의 저택으로 불렀다.

아넬을 리만 항구로 보낸 신관들 역시 거기 포함돼 있었는데, 대신관은 그들에게 아넬의 일을 추궁했다.

“성녀님이 배에 타고 떠난 건 확실한 건가? 자레스 황자는 그리 말했다던데, 어째 석연치가 않아.”

대신관은 그 신분답게 감옥에 갇히는 대신 황궁의 귀빈실에 감금돼 있었다. 덕분에 일의 시작은 알아도 결과는 알지 못했다.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메르케즈가 함께 갔는데, 그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배를 탄 게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탈라사에 도착했다면 전서구가 날아왔을 텐데 어째 소식이 없는 건가.”

“탈라사까지 가려면 한 달은 걸리니, 돌아오려면 멀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라도 소식을 전하면 곧 도착할 겁니다.”

하필 때맞춰 하급 신관이 들어와 고했다. 문제의 메르케즈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그를 불러들이자, 메르케즈가 부복한 뒤 상황을 알렸다.

“탈라사가 아니라 중간 기착지에서 배를 내려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거기엔 신전이 없어서 전서구를 날리지 못했고요.”

“성녀님은 왜 함께 계시지 않은 건가?”

“그게… 서, 성녀님은 배가 출발할 무렵에 바다로 뛰어내려 버리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성녀님이 바다에 빠지셨다고?”

“빠졌다기보다는 스스로 뛰어드신 건데…, 어떤 남자가 부두에 나타난 걸 보고는 굉장히 동요하셨습니다.”

“그자가 누구길래?”

“그건 모르겠는데, 그자가 제 몸에 이상한 기름 같은 걸 끼얹고는 불을 붙이려 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는 성녀님이 갑자기 뛰어내리셨습니다. 제가 잡으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놓쳤고요.”

“그래서? 그래서 그 뒤는 어떻게 됐나? 자네는 왜 성녀님을 구하지 않았어?”

“송구하지만 제가 수영을 하지 못해서….”

“한심하긴!”

“하여튼 성녀님이 바다에 빠지자 부두에 나타난 남자도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성녀님께서 허우적거리는 걸 그 남자가 구했는데, 아마 그자가 성녀님을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자레스 황자로군!”

그래 놓고 아넬이 배를 타고 탈출했다 둘러댄 뒤, 애꿎은 신관들을 희생양으로 내세웠다.

대신관은 자레스의 순발력과 생각보다 치밀한 면모에 치를 떨었다.

“자레스 황자가 성녀님을 데려 갔다는 걸 황제에게 알릴까요?”

“아니, 그건 안 되지. 그러면 보나마나 성녀를 뺏으려 들 텐데, 황자궁도 아니고 황궁으로 끌려가면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차라리 안 알림만 못 해.”

잠시 생각하던 대신관이 말을 이었다.

“황자궁 안에 배신자가 몇이나 있을지 모르니 아마 성녀님을 황자궁으로 데려가진 않았을 거야.”

“그 말씀이 맞을 듯합니다.”

“일단은 자레스 황자 주변을 뒤져 보세. 성녀님을 어디에 숨겼는지는 모르지만, 성녀님이 사라진 밤에 황자가 다시 황자궁으로 돌아온 걸 보면 마디나 인근에 숨겨 뒀을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황자가 성녀님을 찾아가겠군요.”

“맞네. 우리는 자레스 황자가 황궁을 나오거든 그 뒤를 추적하세.”

막연하게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과연 주도면밀한 자레스가 쉽게 뒤를 내어 줄지 알 수는 없었다.

참으로 암담한 상태였다. 더 암담한 건 아넬이 스스로 자레스에게 돌아갔다는 것이고, 차마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남녀로서 맺어져 가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제발 성녀께서 제 몸만은 내주지 않기를.’

사랑에 빠진 남녀가 얼마나 쉽게 서로의 몸을 탐하게 되는지는 그들도 잘 알았다.

메타의 계시는 절대적이었고, 대신관을 비롯한 신관들도 아넬이 신념을 지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만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

자레스의 주변을 탐색하고 있는 건 신관들만이 아니었다.

황제나 황자들 역시 수족을 심어 넣고 그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를 알아서 그런 건지 며칠 동안 자레스는 병을 핑계로 황자궁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자레스에게 정식으로 알현을 신청한 사람이 있었다.

만나자는 숱한 요청을 모조리 거부한 자레스였지만 이번만은 거절하지 않았다.

찾아온 건 카에티의 작은 오라버니 제임이었는데, 자레스는 카에티와의 관계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끊어 버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성녀가 카비르를 떠났다면 혼담을 다시 이어 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성녀와 우스라와의 혼사는 별개의 문제요, 제임. 미안하지만, 나는 우스라와 다시 인연을 이을 생각이 없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황자 전하. 제 동생은 아직 전하와의 약속이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스라 역시 전하께 많은 것을 보장해 드릴 수 있고요.”

“파혼의 보상으로 이미 많은 걸 약속했을 텐데, 그거로는 안 되겠다는 거요? 여동생의 몸값이 그리 높다고 생각하시오, 제임?”

“전하, 그건 모욕입니다!”

“내 할 말은 다했소. 우스라의 힘이 더 자격이 있는 황자께 가기를 바라오.”

“전하!”

“뭣하면 일리파스 형님도 좋고 스에반 황자도 좋겠소. 일리파스 형님은 아직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았고 스에반은 아내가 한 명뿐이니, 우스라가 연을 맺기에 충분할 것 같소. 원하신다면 내가 다리라도 놓아드리리다.”

그렇게 말한 자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우스라와 나의 인연은 이걸로 완전히 끝났소. 더 이상 이런 일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

“망할 새끼! 노예 출신 주제에, 어쩌다 운이 좋아 황자가 됐다고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군요!”

제임의 전언을 들은 카에티는 너무 분해서 발을 동동 굴러댔다.

수도의 명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귀족의 딸인데, 지저분한 장사치나 쓸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으면서 자레스를 욕했다.

노예 출신 황자에게 매달리고 있는 건 카에티가 아닌가. 제임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의 마음을 알 수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카에티의 고집이 정말 우스라를 위한 것인지, 자존심이 상해서인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상해요.”

한참 동안 상욕을 퍼붓던 카에티가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더니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자레스 황자 말입니다. 성녀가 배를 타고 도망쳤다는데, 왜 추적을 하지 않는 거죠?”

“그러고 보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배를 띄워 성녀를 추적할 수도 있는데, 자레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달아났다는 말만 남겼을 뿐, 그 뒤로는 황자궁에 박혀 두문불출 중이었다.

성녀를 잃은 상심 때문이 아니냐고 사람들은 추측했지만, 카에티가 보기에 자레스는 차라리 집요하게 성녀를 쫓아갈지언정 상심해서 드러누울 사람은 아니었다.

“혹시 성녀가 달아났다는 게 거짓말이 아닐까요?”

“하지만 신관들과 시녀들이 작당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더냐. 부두에서 황자가 벌인 소동을 본 사람들도 있었고.”

“…….”

그렇게 반박하면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은 빈틈없이 잘 짜여 있었고,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도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만약 자레스 황자가 성녀를 어딘가에 숨겨 두고 있는 거라면, 언젠가는 꼬리를 드러낼 거야.’

혼담을 성사시키려면 그를 막고 있는 원인부터 제거해야 된다. 카에티는 아직도 자레스의 궁에 남아 있는 알수무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

알수무가 두 번에 걸친 황자궁의 물갈이에서 살아남은 건 모두 그녀의 타고난 속임수와 친화력 덕분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자신의 행적을 잘 감춰 왔기에 별 수상한 점이 없었던 알수무는 전적인 신뢰를 받게 됐는데, 자레스가 아무리 조심을 해도 완벽한 단속은 있을 수가 없었다.

황궁처럼 복잡하게 얽힌 세상에선 더욱 그랬다.

‘성녀가 아직 카비르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카에티에게서 비밀 전언을 받은 알수무는 뜻밖의 상황에 고민했다.

카에티가 의심할 만하긴 했다. 그녀의 직감대로 성녀를 놓쳤다고 가만히 있을 자레스가 아니었는데, 또 그런 의심과는 반대로 요즘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잠잠했다.

성녀가 마디나 어딘가에 있다면 자레스가 언젠가는 만나러 갔을 텐데,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사실은 수하 중의 한 명으로 변장을 하고 아넬을 만나고 왔었지만, 알수무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외출이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꼼짝을 하지 않았기에 정말 아넬이 도망치지 않은 게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아넬을 잃은 충격으로 드러누운 게 맞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자레스는 그런 상태로 거의 일주야 가깝게 은둔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낯선 남자가 찾아온 것은 7월도 말로 접어 들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알수무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자레스의 처소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저자는 누구래요?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데?”

“상단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던데? 황자 전하께서 타네시 쪽과 새로 거래를 트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소.”

알수무가 지나가는 말처럼 호위병에게 묻자 그가 답해 줬다.

물론 알수무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전령새를 날려 바깥에 이 사실을 전달했고, 상단의 심부름꾼이란 남자가 황궁 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카에티의 밀정이 그를 쫓기 시작했다.

심부름꾼은 걸음이 아주 빨랐다. 카에티의 밀정이 그를 쫓기 위해 허덕허덕 달려야 했다.

눈에 띌까 봐 뛰다 걷다가를 반복하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를 추적했는데, 심부름꾼은 마디나 안을 한참 걷다가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는 양고기 요리로 유명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눈치를 봐서 밀정도 그리로 따라 들어갔다.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손님이 많았지만 심부름꾼은 구석에 있는 빈자리를 찾아 거기에 앉았다.

밀정이 빈자리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서성거리는 동안, 가게의 점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심부름꾼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올리브 상태가 어떻소?”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아직 숙성이 덜 돼서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답니다.”

“그렇군. 내 아는 사람도 올리브를 파는데, 그럴 때는 바닷바람을 쐬게 해 주면 좋다더군. 소금기가 올리브를 빨리 익게 해 준답디다.”

밀정은 두리번거리는 척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얼핏 들으면 평범한 대화였지만 밀정은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보름쯤에 바닷가로 올리브 단지를 옮겨 보쇼. 적당히 소금기에 재워 두면 맛이 좋아질 거요.”

“충고 고맙네요. 그래서 음식은 뭐로 주문하실 건데요?”

“홍합에 다진 조갯살을 채운 밥으로. 그리고 고등어를 끼운 빵도 주시오. 레몬즙을 가득 뿌려서!”

주문을 받은 점원이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방으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그 오른쪽에 난 작은 출입구로 나가는 걸 밀정은 놓치지 않았다.

밀정이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눈치채이지 않게 가만히 문밖으로 목만 내밀자, 가게에 들어올 적부터 입구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던 붉은 옷의 남자에게 점원이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는 걸 봤다.

‘저놈이 진짜 심부름꾼이로구나!’

말하자면 자레스를 만나고 온 자는 그의 전언을 전할 뿐이고, 그를 실행에 옮기는 자는 따로 있는 것이다.

밀정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한 붉은 옷의 남자를 쫓아갔다.

붉은 옷의 사내는 더 쫓기가 힘들었다. 그는 자레스를 직접 만나고 나온 심부름꾼보다 훨씬 더 주의가 깊어서,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누가 따라오는지를 확인했다.

밀정도 하마터면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그는 경험이 많아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그를 쫓아갔다.

위험해진 건 사내가 마디나의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인적이 드물어지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미행이 힘들어질 것을 짐작한 밀정은 거기서 용단을 내렸다.

사내가 향하는 방향엔 마침 거지 소굴이 있었다. 말이 좋아 거지지, 돈만 주면 도둑질부터 살인, 강도질까지 하는 놈들이었다.

밀정이 재빨리 소굴 입구에 앉아 졸고 있는 어린 거지에게 돈푼을 쥐여 주면서 일렀다.

“저기 저 가는 빨간 옷을 입은 남자 보이지. 저놈을 쫓아가서 돈을 달라고 조르거라.”

“돈을 타내면 끝이에요?”

“아니, 이걸론 모자라다고, 더 달라고 졸라. 끝까지 쫓아가서 놈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이리로 돌아와서 놈이 들어간 곳이 어딘지 알려 줘. 그러면 내가 금화 한 닢을 주마.”

1디하브!

그 돈이면 거지굴 식구들이 한 끼씩은 먹을 수 있는 큰돈이다. 어린 거지 아이가 눈을 빛내며 빨간 옷의 사내를 쫓아갔다.

그리고 거의 한나절이 지나 저녁이 다 돼 갈 무렵 그 아이가 돌아왔다.

“알아냈어요!”

“어디로 들어가더냐?”

“그 남자가 돌을 던지는 바람에, 어디로 들어가는 것까진 못 봤어요. 하지만 마디나 남쪽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건 봤거든요?”

“그래서?”

“그 언덕엔 집이 한 채밖에 없어요. 그러니 거기에 사는 게 맞을 거예요.”

그 정도면 괜찮은 수확이었다. 밀정은 소년에게 1디하브를 준 다음, 소년이 말한 곳을 찾아갔다.

남쪽 언덕길로 들어서자 소년의 말대로 꼭대기에 별장으로 보이는 저택이 서 있는 게 보였는데, 언덕 아래서부터 칼을 든 남자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밀정을 보자 당장 그를 불러 세우더니 사나운 기세로 물었다.

“여보시오, 어딜 가려는 거요?”

“농장에 일감을 알아보러 왔는뎁쇼. 여기가 농장 가는 길이 아닙니까요?”

“이쪽은 막다른 곳이고, 농장 같은 건 없소. 돌아가시오!”

“어라,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나리, 그럼 이 위엔 뭐가 있습니까요?”

“그건 알 것 없고, 썩 돌아가시오! 여기서 얼쩡거리다 주인 나리 눈에 띄면 경을 치게 될 거요.”

위협에 못 이기는 척 물러 나오면서 밀정은 확신했다.

평소에 비어 있던 저택의 경계가 갑자기 삼엄해진 게 이상했다. 저 위 저택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밀정은 카에티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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