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9/33)

18.

그 시간 황자궁은 오랜만에 떠들썩했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지만, 오늘은 그 문이 잠시 열렸다.

황자궁에 물자를 공급하는 상인들이 식량과 옷감, 서책이나 귀한 장식품 같은 것들을 들고 황자궁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성녀가 나타난 뒤로 계속 긴장만 흘렀는데, 풍족한 물자가 들어오자 모처럼 궁에 활기가 돌았다.

올리브와 꿀, 과일 같은 식량을 비롯해 하인들과 노예들이 쓸 물건들이 들어왔다.

자레스가 아넬을 위해 주문한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담긴 커다란 상자도 노예들의 손에 들려 내실로 옮겨졌다.

시녀 둘이 노예들을 따라 내실로 들어왔는데, 어째서인지 노예들이 나간 뒤에 시녀들이 얼른 내실의 문을 잠갔다.

“왜 문을 잠그는 거죠?”

내실의 문은 오직 자레스만이 잠글 수 있었다. 그럴 권리는 심지어 아넬에게도 없었다.

“몰래 보여 드릴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성녀님.”

시녀들이 자리에 엎드리며 사과했지만 아넬은 성녀란 게 밝혀지고 나서 갑자기 달라진 시녀나 노예들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예전엔 그냥 주인을 섬기는 자세였지만, 요즘의 황자궁 사람들은 아넬을 거의 숭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평범한 서민들은 평생을 가도 만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직접 보았고 섬기고 있으니 경이로울 만도 했다.

어지간한 권력자들도 못 보는 대상이니, 그들에겐 성녀가 마치 강림한 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덕분에 노예와 시녀들은 자레스가 막는데도 매일 꽃다발을 보내오거나 소박한 공물을 바쳤고, 때로는 그녀의 내실에서 보이는 정원에서 기도를 올리곤 했다.

심지어 시녀들은 아넬을 대할 때 멀리서부터 두 무릎으로 기어 오기까지 했다. 어떤 면에선 주인인 자레스나 황제보다 아넬을 더욱 극진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성녀란 걸 부인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는 있는데, 오늘 두 시녀의 태도는 좀 이상했다.

문을 잠그고 재빨리 아넬에게 달려온 시녀 둘이 드레스 상자의 뚜껑을 열자 아넬은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상자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성녀님. 성녀님을 해치러 온 게 아닙니다.”

한 명은 검은색 머리였고 한 명은 갈색 머리였는데, 아넬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흑발의 남자가 재빨리 외쳤다.

이어서 갈색 머리 남자가 얼른 상자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아뢨다.

“용서해 주십시오, 성녀님. 저희는 무뢰한들이 아닙니다.”

“성녀님. 저희는 마디나의 신관입니다. 성녀님을 뵙기 위해서 무례를 저지른 것이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흑발의 남자도 함께 무릎을 꿇으며 외치는 바람에 아넬은 사람을 부르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 마디나에도 메타의 신전이 있고 메타를 모시는 신관이 있을 거라는 점을, 아넬은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항상 제힘으로 어떻게든 이렌시아로 돌아가려 애썼지 신전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이렌시아로 돌아갈 생각을 했을 때는 키리아가 위독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무렵이고, 그 시점에는 자레스의 집착이 시작된 까닭에 신전에 연락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신전이 드디어 나섰다. 아마도 성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텐데, 황궁에 엄격히 내려진 함구령 속에서 그 사실을 누가 발설했는지 아넬은 문득 궁금해졌다.

“용서해 주세요, 성녀님.”

이번엔 시녀 두 명이 나란히 머리를 카펫에 박으며 엎드렸다. 아넬은 신관을 숨겨 들어온 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누가 신관에게 성녀의 존재를 알렸는지도.

“저희가 성녀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걸 알렸습니다.”

“하지만 가만있을 수가 없었어요, 성녀님.”

“성녀님은 누군가의 여자로 살아서는 안 되는 분이시잖아요. 성녀님께서 순결을 잃었다가 신벌이 내리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신관님들께 도움을 청했어요.”

그 말이 예리한 유리칼처럼 아넬의 심장을 저며 냈다.

안 그래도 머릿속 한구석에 금으로 된 못처럼 박혀 항상 번쩍거리며 고통을 뿌리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자레스가 주는 끔찍하게 커다랗고 짙은 애정에 묻혀 자꾸만 잊게 됐던 것이다.

그걸 시녀들이 갑자기 끄집어내 아넬에게 들이밀었고, 그녀는 그 잔인한 폭력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신벌. 그건 이미 아넬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파멸하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제발 성녀님으로 계셔 주세요. 만인의 성녀로 살면서 저희들에게 신력을 나눠 주세요.”

그 말마저 잔인한 이기주의의 소산이었으나, 아넬은 원래 그러라고 태어난 사람인 게 맞았다.

그건 날 때부터 주어진 숙명 같은 거였지만, 오히려 자레스가 신이 정한 규율을 깨려는 거였다.

“잠시 자리를 비워 주겠소?”

신관들 중 한 명이 말하자 시녀들이 재빨리 물러갔다. 하지만 문 앞을 지키는 건 잊지 않았고, 그녀들은 거기서 아무도 아넬의 방에 들어오지 않게 감시했다.

아넬과 자신들만 남자, 흑발의 신관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들은 성녀님이 아직 에포메니일 시절부터 일찌감치 주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성녀님, 혹시 작년 가을쯤에 이상한 꿈을 꾸지 않으셨습니까? 9월쯤 무렵에 말입니다.”

“꿈이라니오?”

9월이면 그녀가 회귀한 즈음이었다. 꿈은 꾸지 않았지만, 그 무렵을 언급하자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저희 신관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마디나의 신관들은 물론이고, 아르드 전역의 신관들 전부가 그런 꿈을 꾸었지요.”

“대체 무슨 꿈이란 말입니까? 어떻게 신관들이 모두 같은 꿈을 꿨다는 건가요?”

“저희들의 꿈에 메타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분이 꿈에서 계시를 내리셨지요. 에포메니의 성스러움이 지금 위험에 처해 있으며, 그 위험은 카비르의 자레스 황자로 인한 것이니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경계하라 하셨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아넬의 몸이 휘청거렸다.

메타는 아넬을 마냥 믿고 지켜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 혼자의 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할 것도 대비하였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메타의 뜻을 거스르고 자레스와 함께 있는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를 힐책하러 나타난 신관들.

“메타께서… 그리 경고하셨단 말입니까.”

수치를 모르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위험이란 게 그녀의 순결에 관한 것임은 이미 신관들도 알고 있었으며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만 않았을 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메타께서는 다 예비하고 계셨구나. 그럼 그분께서는 자레스 황자와 내가 벌인 일들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몹시 두렵고 비참해졌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던 걸까. 메타의 상징임을 잊고 사랑 놀음에 빠져 있었다. 자레스가 주는 애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제 본분을 잊고 살았다.

돌연히 나타난 메타의 손길에 아넬은 수치심으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저희는 그 계시를 받고 에포메니를 만나러 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에포메니께서 사라지신 뒤였죠. 허망하게 돌아왔는데… 설마 성녀님이 돼서 자레스 황자의 곁에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변명을 하려 들면 할 말이 있었지만, 그녀가 이미 한 번 자레스에게 범해졌고 회귀했다는 말까지 할 수는 없었다.

아넬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을 못한 채 그들의 책망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하여 저희가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것입니다.”

“성녀님을 돕기 위해서지요. 성녀님, 성녀님께서도 이렌시아로 돌아가길 원하시지요? 아마도 자레스 황자가 성녀님을 가둬 놓는 바람에 이렇게 갇혀 계실 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당연히 이렌시아로 돌아가셔야지요. 성녀님이 계실 곳은 거기입니다!”

문득 한 여자를 신전에 가둬 놓고 제 수명을 깎으며 늙어 가게 하는 신이 무슨 선의 신이냐고 울부짖던 자레스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들에겐 그녀의 희생이 당연했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대체 언제부터 그걸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 희생이라 생각하게 된 걸까.

‘내가 미쳤구나.’

이것도 세뇌라면 세뇌다. 자레스의 곁이 너무 익숙해져서 뇌가 이상해져 버린 것이다. 아넬은 얼른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을 좀먹는 잡념을 떨쳐 냈다.

“뾰족한 수라도 있단 말입니까?”

“있습니다. 이 황자궁 안에도 성녀님을 숭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황자궁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저희가 숨어들어 온 이 상자에 숨어서 궁을 나가십시오. 그다음은 저희 신관들이 마련해 놓은 배를 타고 이렌시아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렌시아로 가면 반드시 자레스 황자가 쫓아올 겁니다.”

“그럼 일단 다른 나라로 가시지요. 메타 신의 신전은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아르드 어디를 가든 신전만 찾으면 신관들이 성녀님을 보호해 줄 겁니다. 그러니 성녀님은 저희를 따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이 상자에 숨어서 나가면 신관님들은 어쩌시려고요?”

“성녀님이 먼저 탈출하시면, 시녀들이 알아서 저희를 빼돌려 줄 겁니다. 노예로 변장해서 심부름하는 척 궁을 빠져나가도 되고요.”

“아니면 황자궁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적당한 때에 탈출하면 됩니다. 뒷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성녀님은 어서 서둘러 주십시오.”

이제는 뒷일이나 자레스에 대한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넬은 그들의 말을 당연히 따라야 했고, 당연히 카비르를 떠나야 했다.

‘내가 사라진 걸 알면 황자가 어떻게 나올까.’

알고 싶지 않았다. 불같이 노할 그의 얼굴을, 절망한 그의 표정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넬은 눈앞에 서리는 그의 모습을 손으로 휘저어 지워 내며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

아넬을 숨긴 수레가 흔들거리며 황자궁 문으로 향했다.

물건을 사고팔던 상인들은 이미 한 차례 흥정을 끝내고 거의 다 나간 참이었다.

들어올 때는 몰라도 나갈 때는 검색이 더 심하였기에, 궁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바로 수레 앞을 막아섰다.

수레를 끄는 자는 상인이 아니라 황자궁에서 익히 보던 남자 노예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라 해도 봐주는 법이 없어서, 병사가 수레로 다가오며 물었다.

“무엇을 가지고 나가는 거냐?”

“오물입니다요, 나리.”

“우욱.”

어쩐지 고약한 냄새가 난다 했다.

노예가 몰고 온 수레에는 어린아이 키만큼 커다란 질항아리가 여러 개 실려 있었는데, 뚜껑을 닫아 놨는데도 거기서 악취가 풍겼다.

“지금 함부로 문을 열 수 없단 거 모르느냐? 오늘은 문이 닫혔으니, 내가려거든 다음에 상인들이 올 때나 내가라.”

“하지만 나리, 황자궁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궁 안의 화장실에 오물이 너무 쌓였습니다요. 지금 버리지 않으면 화장실이 넘치게 되고, 그러면 전염병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에이잉.”

노예의 말이 맞았다. 카비르는 제국의 크기만큼이나 과학이나 의학이 발달한 나라였고, 위생이 전염병의 예방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다.

이건 자레스가 온다 해도 허락할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뚜껑을 열어 봐라.”

그래도 검사는 해 봐야 했기에 노예를 시켜 항아리의 뚜껑을 열게 했는데, 그러자 인분 냄새가 확 끼쳤다.

“우웨엑.”

병사는 유독 비위가 약했다. 항아리 안에는 노예의 말대로 인분이 가득 들어 있었기에, 병사는 구역질을 하며 물러났다.

카비르식 화장실은 분뇨를 저장해 두는 형식이 아니기에 이렇게 오물을 모아 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병사는 질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열어 보일깝쇼?”

“됐다! 얼른 꺼지기나 해!”

병사가 창대를 휘두르며 으르대자, 노예가 재빨리 수레를 몰고 황자궁 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황궁까지 빠져나가 카비르의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수레는 한참을 달려 마디나의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어느 2층짜리 석조 건물로 들어간 수레는 마당에서 멈췄고, 그러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이 달려 나와 수레에 실린 항아리를 끌어 내렸다.

“가운데에 있습니다, 신관님.”

“오오, 무사히 모시고 나왔군. 수고가 많았네.”

다른 신관들도 나와서 가운데 있는 항아리를 서둘러 들어냈다.

나머지 것들은 수레에 실은 채 다시 몰고 가게 했는데, 끌어낸 항아리를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뚜껑을 여니, 거기 웅크리고 있던 아넬이 고개를 들었다.

“나오십시오, 성녀님.”

신관 둘이 그녀를 부축해 항아리에서 끄집어내자, 기다리고 있던 신관들이 일제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거룩한 메타의 사자시여.”

“성스러운 분을 더러운 것 한복판에 놔뒀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심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 도움이 과연 고맙기만 한 건지 아넬은 알 수 없었다.

뱃속이 불편했다. 계속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아픈 게 오물에 가까이 있어서 비위가 약해졌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얼른 몸을 씻으십시오, 그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바로 항구로 가셔야 합니다.”

“항구로 간 다음에는요?”

“이렌시아로 가는 배편을 타십시오. 오늘 오후에 뜨는 배가 있는데 승선 허가증을 얻어 놨습니다.”

“궁에 오신 신관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이렌시아로 가면 바로 자레스 황자가 쫓아올 겁니다. 거기는 좋지 않아요.”

당황한 신관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다 중심인물인 듯한, 장발의 신관이 다시 말했다.

“그럼 탈라사로 가시지요. 그곳은 성녀님의 고향이기도 하니 숨어 지내기에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곳의 신전에도 연락을 해서 성녀님이 머무실 곳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배보다 연락이 먼저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신관들끼리 사용하는 전서구가 있습니다. 신전에서 신전으로, 또 그다음 신전으로 전서구끼리 이어지는 사슬이 있지요. 말하자면 봉화 같은 것입니다.”

“배편은 걱정 마십시오. 항구엔 드나드는 배가 엄청 많으니 그중에 탈라사로 가는 배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없다 해도 중간 기착지에 내려서 배편을 알아보면 됩니다.”

“탈라사에 있다는 걸 들키면요?”

“그것도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탈라사는 1대륙 서부에 있지 않습니까. 비록 군소국이긴 하지만, 주변에 크고 작은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연합국을 형성하면 카비르가 쳐들어가도 국경마다 걸러 내며 버텨 줄 수 있을 겁니다.”

그 반대의 경우, 카비르가 소국의 국경을 거침없이 깨부수며 진격할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과연 카비르에 대항해 반군을 형성할 용기가 그들에게 있는지의 여부도.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아넬은 그들의 지시대로 욕실에서 빠르게 몸을 씻었고 남자 옷으로 갈아입은 뒤, 머리를 틀어 올려서 모자로 가렸다.

“출발하시지요. 언제 자레스 황자가 성녀님이 탈출한 걸 알아채실지 모르니 서둘러야 합니다.”

“저 혼자 탈라사로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탈라사까지는 메르케즈가 동행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뒤는 탈라사의 신관들이 책임질 겁니다.”

아넬은 메르케즈란 이름의 신관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언젠가 아넬이 일리파스에게 끌려 도착했던 리만 항구로 가는 내내 그녀는 자레스가 쫓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그녀는 달아나기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차라리 자레스에게 잡히길 원하는 걸까.

두 개의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 아넬은 아연해졌다.

***

자레스가 궁에 돌아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황제를 알현하는 과정은 원래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정작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협상을 마친 뒤에도 서로의 속내를 감춘 채 차를 나누고 알맹이 없는 안부 인사를 나누다 그렇게 물러나오는 데 반나절이 흘렀다.

하지만 넌더리를 내면서 황자궁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텅 비어 있는 내실이었다.

“아넬?”

내실은 꽤 넓었기에, 처음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방 안 어디 한구석에 그녀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침대는 텅 비어 있었고, 나머지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자레스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호위병!”

벼락같이 정신이 깨어났다. 아넬이 사라졌다. 그 사실이 그를 후려치자, 자레스는 문밖으로 뛰어나가며 호위병을 불렀다.

납치? 아니면 탈출?

두 가능성 모두 다 치가 떨린다. 하지만 적어도 탈출의 가능성만은 염두에 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밖에 서 있던 네 명의 호위병이 영문을 몰라 자레스를 쳐다봤다. 이들이 납치나 탈출에 협조했다면 여기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레스는 결론을 내렸다.

“성녀님이 사라지셨다!”

“네? 그럴 리가… 저희가 쭉 지켰지만, 성녀님은 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전하!”

“그럼 내실에 들어갔다 나온 자가 누구냐?”

“성녀님을 모시는 시녀 둘이 드나들긴 했습니다만. 그때도 성녀님은 함께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아…!”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호위병이 소리를 질렀고 곧바로 사색이 됐다.

“시, 시녀들이… 새로 들여온 드레스 상자라면서 커다란 옷상자를 들고 들어갔습니다. 나올 때도 똑같은 상자를 들고 나왔고요.”

“그리고?”

“그 뒤에도 다른 옷감을 보여 드린다며 상자를 들고 들어갔다 나왔지요. 들고 나갈 때마다 상자를 열어 봤습니다만, 정말로 매번 옷감과 드레스가 들어 있었기에 의심을 하지 않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호위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아마도 그중의 하나에 아넬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이 멍청한 호위병들은 그녀의 몸 위로 살짝 드레스나 옷감을 덮어 둔 걸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내보낸 것이다.

자레스는 문자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아넬이 그의 곁을 떠나려 한 게 대체 몇 번째였던가.

모두 용서했다. 그녀가 에포메니인 걸 알고서는 그 심정만은 이해하게도 됐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납하는 것은 다르다.

자레스는 더 이상 아넬이 달아나려는 걸 묵과할 수 없었다.

“황자궁 문밖으로 나간 게 있는지부터 확인해!”

명령이 떨어졌고 곧 보고가 이어졌다.

오물 수레가 나간 것 말고는 없다고 했다. 그 오물 수레에 아넬이 숨어 있었을 거라 짐작한 자레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여자가 오물에 섞여 나가다니, 이런 모순이 없었다.

“전하, 시녀들의 처소에서 이자들을 발견했습니다!”

보고가 또 이어졌다. 무칼라스와 호위병들이 시녀들과 남자 두 명을 끌고 와서 자레스 앞에 무릎 꿇렸다.

“너희들이 성녀를 탈출시켰느냐?”

네 사람 다 입을 다물었지만, 자레스가 눈짓을 하자 무칼라스가 사내들의 옷을 벗겨 냈다. 신원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는데, 자레스는 예상 외로 빠르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이놈들은 신관이군.”

신관들의 등짝에 채찍 자국이 있었다.

이건 카비르에 있는 신관들 특유의 상처였는데, 메타과 악신 칼리크와 싸울 때 생겼다는 등의 상처를 재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갈겨서 생긴 자국이었다.

“신관들이 작당해서 아넬을 탈출시켰나?”

메타를 숭배하는 신관들이니 그들은 당연히 성녀가 이렌시아로 돌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리만 항구로군. 가장 빠른 길이 거기니!”

결론을 내린 자레스가 외쳤다.

“말을 가져와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호위병 하나가 말을 끌고 오자 자레스가 거기에 올라탔다. 하지만 막 말의 배를 걷어차기 전에 문득 자레스가 멈춰 서서 명을 내렸다.

“그것을 가져오거라!”

자레스의 부하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암호였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들은 병사들이 무기고로 달려갔다.

약간의 시간 끝에 신속하게 준비를 마친 자레스가 마침내 말을 몰아 문으로 나갔다.

하지만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황자궁 문 앞에는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성녀님을 뵙게 해 달라는 궁인들과 노예들, 하인들을 비롯해 자레스의 궁을 염탐하기 위해 모여든 첩자들도 여럿이었다.

유가가 보낸 자들이 가장 많았지만, 일리파스를 비롯한 다른 황자들이 보낸 자들도 적지 않았다.

자레스가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나타나자 그런 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며 길을 막았다.

“성녀님을 뵙게 해 주세요!”

“성녀를 전하만 독차지하는 겁니까? 성녀를 내놔요! 우리들도 치료해 주세요!”

황제와 황자들이 보낸 선동꾼들까지 섞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중에 몇 명은 열린 문틈으로 끼어들어 황자궁 안으로 침입하려는 자도 있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

“무칼라스!”

자레스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려 나오던 무칼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카비르어도 공용어도 서툴렀지만, 몸짓으로 하는 대화는 오히려 누구보다 더 잘 알아먹었다.

원래 싸울 때는 말이 필요 없는 법이다. 무칼라스가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그의 몸집만큼 거대한 거도를 꺼내 들었다.

“침입자! 다 죽인다!”

죽인다는 단어만큼은 아주 똑똑히 외쳤다. 억양까지 완벽한 카비르어였지만, 무칼라스의 위협보다 그의 커다란 체구와 거대한 칼이 공포를 확실하게 다져 넣었다.

“우아악!”

무칼라스가 황자궁 문을 막아서며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한바탕 피바람이 부는 동안, 자레스는 그들을 뒤로한 채 질풍처럼 말을 달렸다.

***

아넬은 그 시간 메르케즈라는 신관과 함께 항구에 나와 있었다. 마침 탈라사로 가는 배편이 있었다.

여객선이 아니라 화물선이었지만 적잖은 돈을 주자 그들을 태워 주기로 했고, 두 사람은 얼른 항만 관리소로 달려가 승선 허가증을 받은 참이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성… 아, 아니. 도련님.”

배를 타고 내린 게 한두 번이 아니란 걸 메르케즈는 모르는 듯했다. 심지어 노예 생활까지 했던 것을. 아넬은 이제 자신이 신전 안에 갇혀만 지내는 꽃이 아니란 걸 실감했다.

‘이런 내가 다시 성녀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번 맛본 바깥바람은 너무 달콤했다. 자레스에겐 그렇게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해 놓고선 정작 돌아갈 수 있게 되니 그 바람이 벌써 그립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메르케즈가 선원에게 승선 허가증을 내민 뒤, 두 사람은 배에 올라탔다.

이제 출항만 하면 됐는데,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한다던 배는 아직 닻을 올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메르케즈나 아넬이나 초조함에 손톱과 입술을 짓씹었다.

“곧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은데 어째서 출발을 안 하는 겁니까?”

참다못해 메르케즈가 묻자 승선용 다리 앞을 지키고 있던 선원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선원 두 놈이 아직 안 왔소. 놈들이 오기 전엔 출발할 수가 없어.”

“보나마나 지난 밤 유곽에서 진탕 처마시고 늦잠을 자고 있는 거겠지. 하여간 꽤나 밝히는 놈들이라니까.”

“겨우 두 명 때문에 출발을 못 하는 게 말이 됩니까? 벌써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잖아요. 신전의 종이 두 번이나 쳤습니다!”

“아, 항해사가 없는데 어떻게 출발을 해? 망망대해를 떠돌다 어디 암초에라도 부딪혀 죽으라는 거야, 뭐야?”

그렇게 벌컥 외치니 할 말이 없었다.

얹혀 가는 짐이나 마찬가지인 신세 아닌가. 두 사람 모두 베에선 항해사만큼 귀한 존재는 아니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자레스 황자가 내가 사라진 걸 알아챘을까?’

빈방을 보고 얼마나 광분하고 있을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선했다.

보이지 않는 그 광경을 머릿속에 담자 가슴이 떨렸다.

‘황자가 나를 쫓아올까?’

당연히 그럴 것이나, 자신이 그걸 바라는지 그 반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초조감이 기대와 동일한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도, 아넬은 몰랐다.

메르케즈는 아예 뱃전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아넬은 힘 빠진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성녀라면 이럴 때 신의 힘을 보여 줘야겠지만, 아넬은 치유의 힘을 제외하고는 무력했다.

풀씨와 나무를 성장시키는 거로는 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없으니, 지금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웅얼거리는 듯한 기도 속에서 오후의 해가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며 리만 항구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언덕 너머로 넘어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토록 기다리던 항해사와 선원이 비틀거리며 부두에 나타났다.

“젠장, 빨리 와요! 당신들 때문에 출항을 못 하고 있잖아!”

사실 메르케즈 못지않게 초조해하고 있던 선원이 소리를 지르자, 항해사와 선원이 불콰한 얼굴로 다리를 기어 올라왔다.

“헤헤헷. 어제 데리고 잔 계집이 어찌나 착착 감기던지, 시간 가는 줄 몰랐지 뭐야.”

“어련하시겠수. 계집도 감기고, 술도 감겼겠지. 낯빛을 보아하니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퍼마셨나 보구려.”

항해사는 부정하는 대신 여전히 휘청거리는 다리로 갑판에 내려섰다.

그제야 출발 준비가 시작됐다. 선원들이 다리를 걷어 올렸고, 이어서 굉음을 올리며 닻이 올라갔다.

‘드디어 떠나는 건가?’

닻을 완전히 감아올리는데 거의 양초 반 개가 탈 만한 시간이 흘렀다. 그만한 겨를이 있었는데도, 부두에서 항구 외곽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자레스로 보이는 인영이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선 메르케즈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바다를 향해 성호를 그으며 감사와 축복의 인사를 하고 있는데 정작 아넬은 이 출발에 이상한 감정이 교차했다.

닻을 올리는 것과 돛을 올리는 것을 동시에 끝낸 화물선이 마침내 출발했다. 화물선은 항해사의 지시에 따라 바람을 타고 부두에서 멀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부두엔 짐을 내리거나 선적하는 인부들과 선창에 서서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완전한 해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자레스에게서 도망치려 애를 썼는데, 이제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쉽게 그 뜻을 이룬 것이다. 그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제 이 배가 탈라사로 향하면 자레스가 그녀를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신전 조직은 아주 견고하고 비대하며, 경우에 따라선 아주 조직적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에포메니를 찾아내고 시험하기 위해 그들은 신전들만의 그물망을 만들었고, 이 조직은 아주 긴밀하게 작동했다.

그들 사이로 작정하고 숨으면 카비르의 황자라는 위치 정도로는 절대 뚫을 수 없다.

‘자레스 황자.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겠지.’

그 사실이 왜 시원하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픈 걸까. 감추려 애를 써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넬의 눈이 마지막으로 부두로 이어지는 긴 골목길을 훑었다. 부두에는 이리로 모여드는 여러 개의 골목길이 있었지만, 그중 어디에도 자레스의 모습은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래도 그가 격노하는 모습은 보지 않았으니….

“헉!”

그 순간 아넬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요술처럼 일단의 사람들이 부두에 나타났다.

그녀가 내내 주시하던, 아넬이 메르케즈와 함께 마차를 타고 달려온 그 길이 아니라 부두의 거의 끝 쪽에서부터 나타난 자레스가 말발굽을 포석에 부딪쳐 가며 사납게 달려왔다.

자레스가 배를 향해 달려오는 것과, 배가 부두에서 멀어지는 속도가 거의 비슷했다.

그렇기에 자레스의 모습은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처럼 그리 크지 않았고, 그 모습마저 자레스가 부두의 가장자리에 다다라 말을 멈추자 점점 더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넬!”

그가 말에서 내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와 배 사이에 자리한 파도를 뚫고 들려오자, 그 순간 아넬의 눈에선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황자…!”

이미 늦었다.

배는 이미 말로 달려서 건너뛸 수 없는 거리로 멀어져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파도를 가를 수 없었고, 날아서 이 배 위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이별은 이미 기정사실이었기에, 갑자기 눈앞에 다가온 현실에 아넬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자레스의 갈망과 확신을 더 깊고 짙게 만든다는 것을 모른 채, 아넬은 목이 메어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눈물은 터져 나왔던 것만큼이나 극적으로 멎었다. 자레스가 악을 쓰며 발광하는 대신, 돌연 그가 타고 왔던 말안장에 매어 놨던 가죽 자루를 풀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부두에 모인 사람들은 말에서 내린 게 황자인지 몰랐기 때문에, 말에서 내린 사내가 갑자기 가죽 자루를 풀어 그 안에 들은 것을 제 머리 위로 들이붓는 행동을 하자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자레스의 몸이 시커먼 기름으로 물들었다.

그게 뭔지를 알아챈 아넬이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벌리며 굳어 버렸다.

“안 돼…!”

아넬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알아차린 것이다.

어두워져 가는 부두엔, 성급하게 걸어 둔 횃불이 곳곳에 켜져 있었다. 자레스가 손을 뻗어 불붙은 장작을 집어 들자, 아넬은 벌떡 일어서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안 돼요, 제발!”

영원의 불은 한번 연료에 불이 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다. 물로도, 흙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오직 태울 것을 모조리 다 태우고 더 불살라 버릴 것이 없을 때에야 저절로 꺼진다.

저 불이 자레스의 몸에 붙는 순간, 자레스는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는 처절한 고통을 겪다가 죽게 될 것이다.

“그러지 말아요, 제바알!”

아넬이 발을 동동거리며 외쳤지만, 자레스는 그 모습을 무시하며 횃불을 자신에게로 가져다 댔다. 불이 붙기 직전이었다.

그녀가 되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작정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넬을 붙잡아 두겠다는 건데, 이건 정말 승산이 거의 없는 도박이었다.

그런데 그 도박에 자레스는 목숨을 걸었다.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을 그의 입아귀가 그려졌다.

좌절과 자신감이 반씩 섞여 있을 그의 얼굴이, 슬픔과 분노가 엉망으로 엉켜 있을 그의 표정이. 그리고 새까만 재가 되어 바스러질 모습까지.

“안 돼에에에!”

더 이상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 인정해야겠다. 자레스가 이겼다.

그녀는 자레스가 죽는 걸 볼 수 없었다. 아넬은 이제 메타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

그를 깨달은 순간 아넬이 뱃전을 넘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메르케즈가 잡으려 했지만 그녀가 한발 앞섰고, 아넬은 풍덩 소리를 내며 파도 속으로 빠졌다.

“아넬!”

그를 확인한 자레스 역시 횃불을 버리고 곧바로 부두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넬은 헤엄을 치지 못한다. 그런 주제에 자레스를 구하겠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세찬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그였지만, 그 사실에 초조한 한편으로 미치도록 기뻤다.

자레스는 물 위에 간신히 얼굴만 내민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아넬을 향해 빠르게 헤엄쳐 갔다.

아넬이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파도 속으로 사라지자, 자레스는 아넬이 가라앉기 시작한 지점을 향해 아예 자맥질을 해 들어갔다.

‘아넬!’

깊은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눈부신 금발 머리가 보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영롱한 불빛 같은 광휘가 그의 눈을 가득 채웠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눈이 그를 향하면서, 아넬이 자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레스가 마침내 그 손을 잡은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뜨거운 입술을 겹쳤다.

***

자레스는 황자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황궁 여기저기서 보내온 첩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믿었던 수하들까지 배신을 했다. 지금은 황자궁이 사자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가 아넬을 데리고 향한 곳은 마디나 외곽에 있는 자레스의 비밀 별장이었다.

산이 거의 없는 마디나에서 그나마 높은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언덕에 올라서면 그 아래로 마디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름다워요.”

비록 도착한 때가 밤이라서 그 절경을 볼 수 없었지만, 아넬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흰색으로 칠해진 아담한 2층 건물을 마음에 들어 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 전하.”

미리 전갈을 넣었는지, 저택 앞을 지키고 있던 사병들이 달려 나와 말고삐를 잡았다.

저택을 지키는 사병들의 수는 한눈에 봐도 황자궁의 호위병 수보다 훨씬 많았다.

혹시 모를 반란이나 소요를 막기 위해 황자궁에 있는 호위병의 수는 제한하고 있지만, 이렇게 황궁 외부에서는 자유롭게 사병들을 키울 수 있다.

아마 이곳에 있는 사병들의 수는 자레스가 가지고 있는 병력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거라고, 아넬은 짐작했다.

“방을 덥히고. 먹을 것과 따뜻한 물, 모포를 가지고 와.”

오는 동안 두꺼운 천을 둘러 말린다고 했지만 젖은 몸의 물기를 다 날려 없애기는 쉽지 않았다.

그 몸으로 말을 타고 오느라 벌써 아넬은 열이 오르는 듯했다. 자레스 역시 아직 몸이 덜 말랐지만, 그는 천으로 둘둘 말다시피 한 아넬을 안고서 서둘러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2층에 있는 가장 커다란 방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하녀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맞았다.

일부러 골라 둔 사람이었다. 한 명은 눈이 안 보였고, 한 명은 말을 못 하고 글자도 몰랐다.

아넬의 정체를 숨기기엔 적절한 조건이었다. 두 하녀는 아넬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고 목욕물을 준비하며 수선스럽게 두 사람을 맞았다.

“황자 전하도 몸을 씻으십시오. 젖은 몸 그대로 돌아가시면 황제가 의심할 겁니다.”

저택을 지키는 사병들의 우두머리는 무하립이라 했다. 한때는 부상을 입고 합병증까지 걸려 다 죽어 가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건장한 몸으로 돌아왔다.

원체 타고나길 용사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신분도 신분이거니와, 그의 무력과 용기, 의협심까지 모두 자레스의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레스는 굳이 아넬을 무하립이 지키고 있는 먼 이곳까지 데려왔다.

“마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잘 모셔라.”

하녀들에게 단단히 당부를 한 뒤, 자레스는 뒤뜰로 가서 찬물로 대충 몸을 닦았다.

마음 같아선 밤새 아넬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황자궁에 돌아가 보니 아넬이 탈출했다는 핑계를 대려 했는데 우습게도 그게 사실이 돼 버렸다.

자레스가 시녀들과 신관을 문초하는 장면을 황자궁 안 여럿이 보았고, 아넬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모습은 황궁 안 사람들이 다 보았다.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졌으니, 지금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적당히 꾸며 황제에게 보고해야 했다.

‘만약 아넬이 그대로 떠났다면…?’

아마 자레스는 끔찍한 겁화를 둘러쓰고 타 죽었을 것이다. 영원의 불의 연료를 끼얹을 때, 자레스는 정말로 그럴 결심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아넬이 돌아올 거라는 데에 제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아넬이 배 아래로 뛰어내리고, 바닷속에서 그에게 손을 뻗어 올 때 확신했다.

아넬도 그를 사랑한다.

머리가 돌아 버릴 것처럼 기쁘다는 느낌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억지로 말에 올라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동안, 말고삐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별장으로 돌아가 아넬을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를 만나러 가야 했고, 그 일을 해치우지 않으면 아넬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없다.

‘아넬…. 지금쯤 자고 있을까?’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오던 아넬이 생각났다. 바닷속에서 그에게 끌어안긴 채 입술을 허락하던 모습도, 그 혀의 말캉한 느낌도.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열기가 바다에 뛰어든 탓인지, 품 안에 꽉 잠겨오던 아넬의 몸이 생각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얼른 이 갈증을 채울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자레스는 더 세차게 말을 달려 황궁으로 향했다.

***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내뱉는 게냐?”

다음 날 아침 일찍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한 자레스는 어제 일어난 일 중에서 일부만 가공해 보고했다.

성녀가 신관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 뒤늦게 쫓아갔으나 이미 배가 떠난 뒤였다. 그 뒤의 행방은 그도 모르고,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황궁에 돌아왔노라.

믿기 어려운 설명에 황제는 격분했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려는 게냐! 황제를 능멸해도 분수가 있지!”

“하지만 아바마마. 저는 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고,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보고 들은 증인이 있으니, 불러서 문초해 보십시오.”

자레스의 말이 맞았다.

황자궁에는 황제가 보낸 첩자도 많았는데, 그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아뢰었다.

“신관과 내통한 시녀가 신관들을 옷상자에 실어 내실로 들여보냈습니다. 성녀는 거기 들어갔다가 나중엔 오물을 실어 나가는 수레에 숨어 황자궁을 빠져나간 듯합니다.”

“신관과 시녀들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하더이다.”

“자레스 황자가 격분해서 쫓아갔습니다. 저희도 따라가려 했지만 무칼라스란 자가 끼어들었지요.”

“황자궁 문으로 끼어들어 오려는 자와 따라가려는 자들을 모두 막는다고 칼부림을 하는데, 어찌나 난폭한지 미처 따라가질 못했습니다요.”

“그럼 그 뒤로 성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단 말이냐?”

“자레스 황자가 부두까지 쫓아간 것 같긴 한데, 그 뒤의 일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른 자들을 보내 황자의 뒤를 쫓았지만, 이미 황자도 없고 배는 떠난 뒤였던지라….”

“부두 관리인들에게 수소문을 하긴 했지만, 다들 정확한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귀족처럼 보이는 자가 말을 타고 달려오긴 했는데 그때는 이미 탈라사로 가는 배가 뜬 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자가 빈손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미 부두에서 그 광경을 본 자들에게 일일이 돈을 줘서 매수한 뒤였다. 부두 관리인들에겐 특별히 큰돈을 주고 입막음을 하였으니, 황제는 반쪽짜리 정보밖에 얻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자레스가 못을 박았다.

오후에 황제의 본궁으로 아넬을 탈출시킨 시녀와 신관들을 보냈는데, 그들 역시 첩자들이나 자레스가 한 것과 똑같은 증언을 하였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라는 자레스의 전언이 있었고, 격노한 황제는 그날 해가 기울기 전에 네 명의 주동자를 모두 참수했다.

쓰디쓴 결과지만 황제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는 카비르를 빠져나갔으며, 이제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성녀를 독점하려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그 소식은 빠르게 온 황궁에 퍼져 나갔다.

***

자레스는 그 뒤로 황궁에 이틀 정도 더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일리파스가 찾아왔다. 유가나 스에반은 굳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 정도의 정보력과 교양이 있었지만 일리파스는 그럴 만한 심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아넬이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일리파스는 대성통곡을 했다.

“우흐흐흑. 네놈은 어찌 그렇게 무능하냐. 성녀님을 놓치다니!”

“난들 어쩌겠습니까. 감히 신관들이 나서서 성녀를 빼돌릴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더러운 신관 놈들! 그것들이 나의 성녀님을 빼앗았다! 내 마디나의 신전을 모조리 부수고, 신관 놈들의 목을 베어다 황궁 성벽에 깃발 대신 주르륵 꽂아 놓을 것이다!”

“안 그래도 폐하께서 진노하셔서, 대신관과 나머지 휘하 신관 놈들을 끌어와 옥에다 가두긴 했습니다. 처형할 명분이 없으니 곧 풀어 주셔야 하겠지만요.”

그들을 처형했다간 당장 아르드 전체의 신관들이 반발할 테니, 정말 단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괘씸해서 가둬 두긴 했지만 어차피 성녀가 그들의 손에 들어간 이상, 황제는 신관 조직과 타협을 해야 했다.

일리파스를 상대하고, 황궁에 연막을 까는 동안 자레스는 겉으로는 태연했다. 하지만 내심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건 어서 아넬을 만나고 싶은 갈증 때문이다.

얼른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를 끌어안고 기어코 그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끌어내야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은 날아서 이미 별장에 가 있었지만, 몸은 여기 묶여 있어서 그 기분이 마치 영원의 불을 몸에 붙인 것만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꺼뜨릴 수 없는 불이다. 연료는 그의 몸이었고, 이 불은 그가 죽기 전에는 꺼지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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