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8/33)

17.

마치 악귀처럼 변한 그의 얼굴이 일리파스에게 끌어안긴 아넬을 본 순간 더욱 광포하게 일그러졌다.

“일리파스!”

자레스가 칼을 빼 들자 일리파스도 어쩔 수 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승자가 아넬을 데려가는 것이다.

“자레스 황자. 그만둬요!”

아넬이 외쳤지만, 자레스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감히 그의 여자를 뺏으려 한 일리파스를 응징해야 했다. 다시는 아무도 아넬을 빼앗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이미 광기로 물든 그의 눈에는 형제도 보이지 않았다. 일리파스를 향해 겨눈 칼에 살기가 서렸다.

“하앗!”

첫 번째 검격이 벌어졌다. 날카롭고 긴 자레스의 환도와 검신이 더 두껍고 크게 휜 일리파스의 시미터가 세차게 부딪쳤다.

챙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면서 먼 거리의 사람들까지 불러 모았다.

웬만한 칼부림도 아니고, 황자들끼리의 검투였다. 뒤에서야 음모를 꾸미고 덫을 파고 전쟁을 일으키며 싸워도, 개인적으로 결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한낮의 결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비겁한 새끼!”

그렇게 외치며 자레스가 일리파스의 목을 향해 검을 날렸다. 피를 싫어하는 아넬이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리파스가 용케 그를 피하면서 자레스의 머리 위로 시미터를 내리쳤지만, 이번엔 자레스가 왼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세게 치는 바람에 일리파스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너는 명예도 없나? 감히 내실까지 들어와서 동생의 여자를 훔쳐 가? 더러운 도둑놈!”

그 말에 일리파스의 검은 얼굴이 먹빛으로 변했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대답할 말이 없으니 더욱 화가 났다. 흥분한 일리파스가 고함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감히 천한 노예 따위가 가질 여자더냐!”

그 말이 자레스를 더욱 자극했다.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다시 한번 검이 세차게 부딪치며, 거센 검투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싸움이 길어지는 동안 보는 눈은 더 모였다. 가까운 궁에 있던 스에반이 달려왔고, 소식을 들은 유가는 그의 궁전 창에서 망원경으로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둘 중 하나는 죽겠구나.”

그가 원하는 바였다. 적은 하나라도 줄이는 게 좋았는데 일리파스나 자레스 중 하나를 제거하면 그는 황위에 더욱 가까워진다.

유가는 다시없는 기회를 잡은 것에 흡족해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기뻐했다.

“형님들, 그만들 두십시오!”

달려온 스에반이 외쳤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유가와 달리 스에반은 둘 중 하나라도 죽으면 불리했다.

자레스나 일리파스가 죽으면 유가의 다음 목표는 스에반이 될 텐데, 지금이야 존재감이 별로 없어 살아 있는 거지 그의 표적이 되면 스에반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제발 정신들 차리라니까요! 여자 하나를 두고 무슨 짓입니까!”

하지만 그 ‘여자’를 본 순간 스에반도 할 말을 잃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두 사람의 심정이 그만 이해가 가 버렸다.

두 사람이 싸우는 사이 아넬에게 접근한 스에반이 가지고 있던 검으로 그녀를 묶은 밧줄을 풀어 줬다.

“고맙습니다, 스에반 황자.”

‘어라? 이 여자가 나를 어떻게 알지?’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아름답다.

그와 별개로 황자임을 알면서도 무례한 점은 기분이 나쁜데, 어쩐지 그를 지적할 수가 없었다. 여자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스에반도 본능적으로 그에 압도됐다.

한편 그러는 동안, 마지막 사력을 다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리파스가 거대한 시미터를 위에서 내려치자, 자레스는 그 공격을 가로로 받아 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일리파스가 검을 떼어 내기도 전에 가로로 부딪친 그의 검이 일리파스의 검신을 쭉 타고 내려가면서 바로 일리파스의 목에 닿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나 간단하게 목을 내준 일리파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놈.”

유가가 쓰게 웃었다. 자, 이제 자레스가 어떻게 나오려나?

“죽여라.”

그럼 일리파스가 제거되고, 자레스는 같은 형제를 살해한 죄로 역시 책임을 묻게 된다.

물론 일리파스의 죄가 있으니 처형은 안 당하겠지만, 그 벌로 황자궁을 떠나 지방 영지로 보내지면 자연스럽게 황위에서 멀어지니 일석이조였다.

유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레스를 재촉했다.

“안 돼요!”

하지만 그전에 아넬이 소리를 질렀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가, 자레스에게 자비를 구했다.

“황자 전하, 검투에서 이긴 거로 충분합니다. 그보다 더한 짓은 하지 마세요!”

하지만 자레스의 귀에는 그녀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아넬을 뺏겼다는 걸 알아챈 순간부터 그의 온몸을 가득 채운 광기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애원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넬이 일리파스를 편들어 준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라왔다.

이미 이성적인 사고는 할 수 없었다. 감히 그의 여자를 뺏으려 한 자는 죽어 마땅했다. 아니, 죽지는 않아도 정당한 징벌은 받아야 했다.

일리파스를 발로 차서 무릎을 꿇린 자레스가 그의 오른팔을 잡으며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안 돼-에!”

비명은 아넬 쪽에서 먼저 들려왔다. 그녀가 눈을 감으며 쓰러지는 동안, 사람들은 시퍼레진 얼굴로 일리파스의 팔이 잘려 날아가는 걸 지켜봤다.

“으으윽.”

끔찍한 광경에 모두 눈을 감았지만, 아무도 자레스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의 내실에 있는 여자를 납치했으니, 그 죄는 팔을 잘라 벌하는 게 맞았다.

혀를 차거나, 몹쓸 광경에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스에반마저 팔을 잘린 거로 끝난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본 피에 그녀의 눈앞이 새까맣게 변해 갔다.

회귀하기 전의 그녀는 한 번도 제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팔이 잘리고 피가 분수처럼 튀는 광경은 처음으로 직면한 것이었다.

그것이 아넬의 사고를 완전히 마비시켜 버렸다.

자레스가 아넬을 뺏기고 나서 눈이 돌아간 것처럼, 아넬은 눈앞에서 사람이 팔을 잘리자 이성을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일리파스는 그녀 때문에 다친 것이다. 오직 그녀에게 반했다는 이유만으로 팔을 잘렸고, 그건 아넬이 용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아아아악!”

아넬이 울부짖었다.

운명의 흐름이 또 한 번 그녀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키리아 성녀가 말했던 것처럼 어떤 운명은 맞닥뜨려야 아는 경우도 있었다.

이 선택이 운명을 가른다는 것을 아넬은 저절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 운명에 따라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도.

아넬이 일리파스를 향해 달려오자, 그 순간 뒤를 돌아본 자레스는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 알아챘다.

“안 돼, 아넬!”

자레스가 가로막았지만 이번엔 그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넬이 그의 손을 피하며 바닥에 구르는 일리파스의 팔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잘린 그루터기에 그 팔을 붙이며 그 자리에 성력을 퍼부었다.

“저게 뭐야?”

스에반이 소리를 질렀다.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유가 역시 경악한 눈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광경에 집중했다.

아넬의 몸에서 흰 빛무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넬의 몸 주위에서 마치 화염처럼 일렁거리던 빛이 실처럼 길게 늘어지면서 모조리 일리파스에게 쏟아졌다.

정확히는 잘린 팔과 그 그루터기가 붙은 지점이었다. 그저 갖다 대기만 했을 뿐, 여전히 잘려 있던 그 지점에 빛이 퍼부어지자 사색으로 변해 있던 일리파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리파스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붙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일리파스가 팔을 움직이자, 잘린 적이 없던 것처럼 그 팔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모두가 경악해 외쳤다. 머리를 쥐어뜯고, 그러다 무릎을 꿇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녀?”

유가가 침음을 흘렸다.

사라진 에포메니가, 새 성녀가 자레스의 수중에 있었다니!

일리파스와 스에반마저 할 말을 잃어 멍하니 아넬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작 아넬은 그제야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였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자레스가 휙 잡아끌었다.

“자레스 형님! 성녀… 그분이 성녀가 맞습니까?”

스에반이 외치자 군중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 그분을 돌려주십시오! 성녀님을 돌려주세요!”

모두가 아우성을 치며 그들에게 몰려드는 찰나, 자레스가 아넬을 말에 태웠다. 그리고 그 역시 말에 올라타며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형님!”

“성녀님!”

두 사람을 태운 말은 순식간에 황자궁을 향해 사라졌다. 그 길로 자레스의 황자궁 문은 안쪽에서 완전히 걸어 잠겼다.

자레스는 노예들에게 호위병들의 시신을 끌어내게 한 다음 즉시 아넬을 안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아까부터 이상한 짐작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넬이 성녀란 걸 들켰다는 것보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이 감각이 더 중요했다.

자레스가 아넬을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며, 그 즉시 발버둥 치는 그녀를 제압한 뒤 앞섶을 찢었다.

“이럴 수가…!”

확실했다.

빈약한 편이었던 가슴이 훨씬 더 커졌다. 달덩이처럼 부푼 가슴은 이제 여자의 징표만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 풍만함으로 사내의 눈을 멀게 했다.

가슴만 커진 게 아니었다. 작은 편이었던 키가 더 커졌고, 머리카락은 허리 길이로 자라났으며 가슴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몸의 곡선은 훨씬 더 유려해졌다.

“또… 성장한 건가?”

그와 동시에 키리아 성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성력은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고갈되지요. 나이가 들면 성녀의 육체도 시들고, 신이 남겨 준 성력도 조금씩 사라집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면서, 미심쩍었던 인과관계가 확실해졌다.

“설마… 성녀는 성력을 쓸 때마다 성장하는 건가?”

그의 절규 같은 물음에 아넬은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그 의미는 확실했다.

성장은 수명이 고갈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인간의 육체가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성장을 끝마친 육체는 이제 서서히 나이를 먹고 퇴화된다.

성력의 발휘가 성장을 앞당기고 그로 인해 아넬이 완벽한 성년을 맞이한 거라면, 이제부턴 성력의 발휘가 노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빌어먹을!”

격분한 자레스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겨우 서른여섯의 나이에 온몸을 천으로 칭칭 감아 감추고 있던 키리아를 떠올렸다.

그 안에 감춰진 몸은 아마도 늙은 노파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를 숨기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이게 무슨 메타의 은혜인가! 한 여자를 평생 신전에 가둬 놓는 것도 모자라서, 수명보다 훨씬 빠르게 늙게 만들다니! 왜, 도대체 왜! 왜 당신이 희생돼야 해!”

이번엔 아넬 대신 자레스가 울부짖었다. 처참한 절규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한 책무라 생각했던 것들이 자레스에게는 족쇄일 뿐이었고, 아넬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감추려 했건만, 오히려 제 손으로 그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뼈아픈 실수가 아니었다. 아넬은 본능적으로 짐작했다.

마치 흐르는 강물이 대해를 향해 가듯, 운명은 자연스럽게 아넬을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녀가 한 선택, 그녀가 저지른 실수, 모든 것이 먼 미래를 결정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넬은 그를 거부할 방법이 없는 듯했다.

‘어쩌면 메타께서 나를 이리로 이끌고 있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를 막을 힘은 없다. 그저 무력하게 신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뿐이다.

자레스와 결국 만나게 된 것도, 그에게 성녀란 걸 들키게 된 것도, 성력의 진실을 알리고 만 것도 모두 신이 정한 운명이다.

그리고 그에게 끌리게 된 것마저도.

자레스와 아넬이 만나는 걸 그리도 무서워했던 메타가 이리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는 건, 어쩌면 이 운명의 끝에 뭔가 다른 걸 예비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녀의 무릎 앞에 엎드려 어깨를 떨고 있는 자레스에게 손을 뻗어 그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

성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황궁 안에 순식간에 퍼졌다.

황자들은 물론이고 내실의 여자들의 귀에도 들어갔으며, 마침내는 황제에게까지 자레스가 성녀를 데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갔다.

“카비르에게 어떤 풍랑이 몰아닥칠꼬.”

황제는 짐짓 걱정하였다. 그와 같은 염려는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의에 참석한 총신들은 각자 한마디씩 의견을 보탰는데, 득과 실을 논하는 의견이 각각 반반이었다.

황제의 마음도 같았다.

황궁에 속한 자들에게 일제히 함구령을 내렸지만, 사람의 입을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소문은 기어코 궁 밖을 넘어 퍼져 갈 것이고, 곧 아르드의 모든 나라가 이 사실을 알 것이다.

성녀를 내놓으라는 성화가 이어질 게 뻔했다.

‘하지만 굳이 성녀를 내줄 필요가 있을까?’

자레스가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황제도 했다.

카비르는 세계에서 제일 큰 대국이다. 동쪽으로 있는 제3대륙은 내전에 휘말렸으니 이쪽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고, 남쪽의 다크신은 이미 정복하여 적이 없다.

북쪽과 서쪽의 자잘한 나라들은 연합해 쳐들어온다 해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 오히려 카비르 황제는 성녀의 목숨을 인질로 그들의 항복을 받아 낼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다.

‘성녀를 독차지하면 내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이미 그의 나이는 50이 넘었지만, 성녀의 성력으로 치료에 치료를 거듭하면 그는 건강하게 불로장수할 것이다.

성녀가 모두의 것이고, 그녀의 성력을 공평하게 나눌 때와는 비교가 안 된다.

독점은 좋은 것이다. 이미 좋은 것을 차지한 이상, 그보다 나약한 자들에게 그를 나눠 주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일단은 자레스와 성녀를 본궁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지.”

황제는 자레스에게 호출령을 내렸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성녀는 물론이고, 자레스까지 소환에 불응한 것이다. 자레스는 황자궁 문을 걸어 잠그고 어떤 부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레스는 이제 침소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오직 아넬의 곁에만 머물렀다.

퀴나에가 대책을 강구하자고 난리를 쳤지만, 자레스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황제의 내관이 그를 찾아왔지만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궁인들이 몰려와 성녀를 뵙게 해 달라고 애원해도 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황자궁 안에도 불안과 놀람이 감돌았다.

“대체 어디서 성녀를 만난 거야? 혹시 이렌시아에 찾아갔을 때, 그때 데리고 온 건가?”

“하지만 카비르에 돌아왔을 때는 성녀님이 없었잖아.”

“아냐, 아냐. 다 틀렸어! 너희들 그거 알아? 그날 그 소동 중에 성녀님을 본 애가 있는데, 그 성녀님이… 파이디랑 엄청 닮았대!”

“파이디? 황자 전하가 내쫓았다는 애?”

“하지만 걔는 남자애였잖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수한 소문과 구설이 난무했다.

과장된 것도 있었고, 아예 허황된 것도 있었고, 뜻밖에 진실에 가까운 것도 있었는데, 많은 추측과 망상 속에서도 사라진 성녀님이 다시 나타난 것 하나는 확실했다.

자레스의 사람들은 그 사실에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했다.

자레스는 그 성녀를 여자로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녀가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게 가능한 것인가?

“이러다 아르드에 신벌이 내려질지도 몰라!”

자레스 황자가 성녀를 데리고 있음으로써 황권에 가까워진 것을 기꺼워하는 자도 있었지만, 황자궁의 사람들 중에 그를 불안해하는 사람 역시 못지않게 많았다.

황자궁은 아넬이 성녀란 게 밝혀진 이후로 쭉 뒤숭숭했다.

반대로 다른 황자들의 궁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졌다.

자레스가 성녀를 데리고 있다.

이건 카비르의 행운이자 자레스에게 절대 유리한 것이었다. 소심한 스에반은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지만, 유가는 그 반대라고 판단했다.

황제는 분명히 자레스에게서 성녀를 뺏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황위를 내밀겠지.’

그렇게 되면 유가가 가장 위험해진다.

중립이니, 세계의 위험이니, 카비르에 불어 닥칠 전운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황좌, 그것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선 아넬이 필요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를 자레스에게서 뺏어 와야만 했다.

일리파스를 북돋우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필요로 인해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무르마를 불렀다.

“자레스의 궁에 심은 첩자는 아직 살아 있는가?”

“대부분 솎아 내졌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레스 황자가 하인과 노예들을 싹 갈아치운 적이 있었지요.”

“대부분, 이란 건 남은 자가 있긴 있단 뜻이지? 그자에게 연통을 넣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녀를 자레스의 궁 밖으로 끌어낼 방법을 찾아내라고 해!”

스에반의 궁도 성녀로 인해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인 스에반은 고민을 하다 하다못해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스에반은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잠깐이나마 그가 성녀를 빼돌리면 황위 계승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스에반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는데, 성녀를 뺏기도 어렵지만 뺏는다고 해도 바로 형제들의 표적이 될 게 분명하니 그의 능력으로 성녀를 사수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게 확실했다.

“자레스 형님이 황태자가 될 게 분명해. 황위를 이으면 형제들을 죄다 죽일 텐데 어떡하지?”

그렇다고 유가가 황제가 되면 살아남을 것 같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유가가 더 고약했다.

그나마 호탕한 데가 있는 일리파스라면 능력 없고 소심한 스에반을 살려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만일의 이야기다.

스에반은 당장 그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이 필요했다.

“성녀님은 차라리 아무의 소유도 되지 않는 게 나아.”

스에반은 생각을 거듭하다 그런 결론을 내렸다.

성녀라는 변수가 없어지면 황위 다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스에반은 예전처럼 기회를 봐 가며 이 황자, 저 황자에게 붙어서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결심한 즉시 스에반은 성녀님을 이렌시아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불행히도 스에반이 자레스의 궁에 심은 첩자는 저번 물갈이 때 쫓겨났다.

하지만 남아 있는 하인들 중에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자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 갈아 넣은 물도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다. 수하를 부른 스에반은 큰돈과 함께 편지를 내주었다.

일리파스의 궁은 상황이 더 나빴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폭풍 같은 사랑에 빠졌다.

일리파스처럼 단순하고 성질 급한 남자는 사랑에 빠지는 데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아넬이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한눈에 반한 이 남자는, 그녀가 성력으로 그를 살려 주기까지 하자 곧 엄청난 착각에 빠졌다.

“성녀님께선 나를 사랑하니까 치료해 주신 거야!”

그가 간단하게 사랑에 빠졌으니, 아넬도 그럴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로의 마음이 통했으니 더 마음이 급해졌다. 성녀는 저 맹수 같은 자레스에게 사로잡힌 불쌍한 포획물이니, 그가 하루라도 빨리 아넬을 구해야 했다.

“마카르! 사병들을 끌어모아!”

“전하, 설마 자레스 황자의 궁으로 쳐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죠?”

“바로 그거다, 마카르! 우리는 성녀님을 구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 순간 마카르는 심각하게 일리파스를 버려야 할지를 고민했다.

황자궁에 호위병 몇을 두는 것과 외부에 있는 사병을 끌어들이는 건 차원이 다르다. 후자는 황제를 해할 역심이 있다는 죄로 인정돼 목이 달아났다.

‘이 황자 밑에 남아 있다간 목숨이 위험하겠어.’

하지만 지금 당장 도망칠 길은 요원했고, 그렇다고 정말 황자들 간의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일단은 성녀님의 뜻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자 전하, 제가 어떻게든 성녀님께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오오, 네가 나서겠단 말이냐?”

“그럼요. 그분이 황자 전하께 마음이 있다면 분명히 답장을 주실 테니, 일단은 기다리십시오, 전하.”

마치 말 안 듣는 개에게 ‘앉아!’를 연습시키는 것처럼, 마카르는 필사적으로 일리파스를 뜯어말렸다.

황궁 전체에 그런 대혼란이 일어나는 동안 오직 자레스의 궁만이 고요했다.

***

오늘도 자레스는 침소 바닥에서 잠들었다. 오밤중에 잠깐 깬 아넬은 침대에 누운 채로 이제는 익숙해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레스는 환도를 곁에 둔 채 반듯이 누워 자고 있었는데, 격자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마치 등불처럼 그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콧날은 마치 칼날처럼 날렵했고, 턱은 굳센 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릴 때는 여자처럼 곱상했었다는데, 지금의 모습으로는 그런 시절을 상상할 수가 없다.

‘만져 보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예전에 섣불리 그런 짓을 했다가 자레스에게 미친 듯이 키스를 당했던 게 생각났던 것이다.

아넬 역시 몸을 돌려 반듯이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황자궁 안 그 어디보다 사치스럽게 꾸며진 이 방은, 벽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화려한 타일로 장식돼 있었다.

한때 아넬에게 주어졌던 귀빈실은 치워졌고, 자레스는 그동안 공사를 마친 새 내실로 아넬을 옮겼다.

자레스에게 여자가 많았다면 따로 별채를 지었겠지만, 그는 여자를 늘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별채를 지었다간 오히려 표적이 될 수 있기에 자레스는 그냥 본채의 가장 깊은 곳에 따로 내실을 지었다.

원래 이곳은 카에티가 머물 곳이었다. 그를 아는 아넬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한테 미안하진 않아.’

아넬은 선량하긴 했지만 무턱대고 잘못을 용서해 줄 정도로 순진해 빠진 여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사악한 여자가 자레스와 혼인하지 않은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지혜도 있었다.

하지만 자레스의 아내가 써야 할 방을 그녀가 차지하고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모르겠어.’

그에 대해선 미리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아넬은 누운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자세를 바꾸려 돌아누운 순간, 아넬은 누운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자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두 사람은 얼어붙은 것처럼 눈길을 얽은 채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먼저 움직인 건 자레스였다. 그가 아넬을 향해 가만히 손을 뻗어 왔는데, 그녀가 그 손을 잡은 건 순전히 본능 때문이었다.

먼저 손을 뻗어 오는 걸 외면할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 그 손을 마주 잡자, 자레스가 갑자기 그녀를 휙 끌어내렸다.

“아앗!”

비명과 함께 아넬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자레스가 몸으로 받아냈기에, 아넬은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됐다.

아프진 않았다. 자레스가 쿠션 역할을 해 준 덕분이기도 했지만, 아넬이 일리파스에게 성력을 퍼부으면서 제어를 벗어나 흘러넘친 성력이 그녀의 다리도 낫게 했기 때문이었다.

“놔, 놔주세요.”

아넬이 사정하며 버둥거렸지만, 그는 꼼짝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감싸 안은 단단한 팔뚝은 마치 강철로 주조된 것 같았다. 아무리 밀어내려 애써도 그 자세 그대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쯤이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았다. 아넬은 힘이 빠져 그대로 자레스의 품 안에 안겼다.

얼굴은 발개져 있었지만, 반항을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아넬은 그렇게 가만히 자레스의 몸 위에 누워 있었다.

귀를 대고 있으려니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빠르다. 의술도 공부했기에 일반적인 박동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알겠다. 그러니까, 자레스도 태연한 얼굴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아마도.

그녀를 지금 당장 안아 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후우.”

자레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품은 체향이 모조리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심지어 공기마저도.

아넬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중심이 부풀어 있는 게 그제야 느껴졌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모를 정도로 숙맥은 아니다 보니, 안 그래도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던 볼은 불꽃색이 됐고 그와 맞붙어 있는 아랫도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눈을 굴리는 방법도 잊은 것 같고, 숨을 어떻게 쉬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다. 아넬은 숨도 못 쉰 채 나무토막처럼 굳어서 가만히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러고 있노라니 이윽고 자레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아까 들이마셨던 숨을 이제야 내뱉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가 아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그 끝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는 그녀를 놔줬다.

아넬은 굴러떨어지듯 그의 몸 옆으로 내려앉았다.

허전했다. 여전히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고 그와 꼭 달라붙어 있었지만, 마치 머나먼 국경 너머로 보내진 것 같았다.

제대로 반응도 못 해 놓고서 뭘 서운해하는 건지,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레스답지 않은 자제에 마음이 쓰여서, 아넬은 그가 놓아준 뒤에도 함부로 자레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거칠었다.

조금씩 평정을 찾고 잦아들어 가긴 했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를 위해서라도 침대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문득 자레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가 미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아넬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을 학대했잖아. 마음대로 노예로 팔고, 남에게 줘 버리고.”

“그러네. 다시 생각해 보니 밉네요.”

그렇게 대답한 아넬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레스는 더 말이 없어졌다. 어두운 방에 메아리치는 그녀의 방울 같은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한참 만에 한숨을 내뱉듯 속삭였다.

“그럼 내가 싫지는 않은 건가?”

그럴 거라 믿고 싶었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넬은 이번에도 침묵을 지켰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답만 내놓았다.

“성녀는… 신을 위해서만 살아야 해요.”

“남자를 사랑해선 안 된다? 아, 그래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신전에 가둬 놓는 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될까 봐? 신전에 가둬 놓고 혼자 늙어 가게 하는 이유를 알겠군.”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가 그렇게 갑자기 화를 낼 때면 아넬은 금세 겁에 질렸다. 하지만 화제가 나온 김에 말은 해야 했다.

그동안 자레스가 화를 낼까 봐 말을 아꼈지만, 아넬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황자. 저를 이렌시아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레스가 냉큼 대답했다.

“그 말은 그만해, 아넬. 이미 당신이 성녀란 건 다 들통 났어. 돌려보내고 싶어도 이젠 황제가 막을 거야.”

물론 그 역시 아넬을 이렌시아로 보낼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아넬도 알아야 했다.

“나는 지금 다른 황자들은 물론이고 황제를 막는 것도 버거워. 당신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밀서들이 보내지고 있는 줄 알아?”

코웃음을 치며 자레스가 말을 이었다.

“유가 놈은 자기에게 오면 첫 번째 부인으로 맞아 주겠다고 하더군. 이미 아내가 셋이나 있는 놈이…. 일리파스는 말할 것도 없고, 스에반까지 가세하고 있어.”

심지어 다른 황자와 황녀들까지 온갖 밀서를 보내고 있었는데, 자레스는 그것들을 일일이 찾아내고 가로채 불사르는 데 꽤 많은 인력과 심력을 들여야 했다.

“부황께서도 당신을 욕심내고 있는데, 부황에게 끌려가면 당신은 성력을 뺏기다 몇 년 안에 늙어 죽을 거야.”

그 말끝에 갑자기 자레스가 아넬을 훅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기 전에 부황을 죽이겠어.”

“황자.”

아넬은 당황했다. 그 바람에 그에게 끌어안겼다는 걸 의식할 새도 없었다. 아넬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애원했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제가 이렌시아로 돌아가면 끝날 일입니다. 차라리 절 이렌시아로 보내 주세요. 그러면 다른 황자들과 싸울 일도, 부황을 거스를 일도 없습니다.”

이번엔 자레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말의 즐거움도 없는, 오직 잔인한 파괴 욕구만 가득한 마른 웃음이었다.

“날 아직도 모르는군, 아넬. 그럴 거였으면 굳이 일리파스의 팔을 자르지도 않았어.”

섬뜩한 속삭임에 아넬이 몸을 떨었다. 이어지는 맹세엔 더욱 그랬다.

자레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녀의 뺨을 감싸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력이든 뭐든 당신을 탐내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릴 거야.”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맹세를 충분히 실현할 것이다.

그녀에게 탐욕의 눈길을 보내면 황제라 해도 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 됐다.

그의 애정은 맹목적인 광기에 가까웠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아넬밖에 없었고, 이제는 황위마저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더 두려운 것은 아넬과 그의 사이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이제 신마저 증오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의 증오가 어디까지 치달을지 무서웠다. 그녀를 겁탈했다는 이유로 세상을 멸망시킨 걸 알게 되면, 그래서 그녀가 그를 거부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

그가 전생에 기어코 황위를 찬탈한 것처럼, 어쩌면 그는 신에게까지 화살을 겨눌지 모른다.

아넬은 그게 겁이 났다.

“앗.”

아넬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불현듯 자레스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이 어느새 스르르 내려가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잠옷으로 입은 얇은 모슬린 드레스의 허리끈이 그의 손에 잡혔다. 아무도 없는 이 밤, 그가 허리끈을 풀어 버리고 그녀를 취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 사실을 실감하자 아넬은 저절로 몸을 굳혔다. 뻣뻣해진 반응에 아넬을 부드럽게 안아 오던 자레스가 동작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려고 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물러나는 건 아넬이 성녀라서가 아니었다.

“…날 사랑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게.”

가만히 속삭인 자레스가 몸을 돌려 드러누웠다.

아넬은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 속에서 그 쓸쓸한 등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

“황자, 서생이 왔다.”

아침부터 찾아온 무칼라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자레스는 ‘서생’이 대체 뭔지 이번엔 진심으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무칼라스가 금 쟁반에 받친 황금빛 봉투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문장이 봉랍으로 쓰인 봉투를 뜯자 거기서 역시 황금빛 서지에 쓰인 서신이 나왔다.

“뭐랍니까?”

집무실에 온 퀴나에가 묻자, 자레스는 무례하게도 황제의 친서를 퀴나에에게 던졌다.

“당장 성녀를 데리고 본궁으로 오지 않으면 근위대를 보내겠다는군.”

“협박이네요.”

“제대로 된 협박도 아니야. 마음이 너무 급한 게 보여. 이래서야, 협상이 되질 않지.”

“그건 그러네요. 전하께서 칼자루를 쥐셨으니, 조건을 좀 더 올리셔도 되겠어요.”

“조건?”

자레스가 코웃음을 치며 경멸 섞인 눈으로 퀴나에를 쳐다봤다.

‘이 인간, 진짜 황제의 친서를 씹을 작정이야?’

현 황제가 현군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장은 무시 못 할 위협이 되는 게 현실이다.

“전하,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은 폐하를 만나셔야 합니다. 이대로 계속 무시할 수는 없어요.”

“나도 알아. 그래서 오늘은 찾아갈 생각이야.”

협상이든 협박이든, 뭔가 하려면 만나긴 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레스가 하려는 게 후자에 가까운 짓일 것 같아 퀴나에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바로 성녀님을 내 드릴 겁니까?”

“아니.”

“그럼 대체…?”

“아넬을 먼저 빼돌릴 거야. 황자궁에 계속 데리고 있으면 위험하니, 속임수를 써서 밖으로 내보내야지. 내 영지로 피신시킨 다음에, 부황에게는 탈출했다고 둘러댈 거다.”

“폐하가 그 말을 믿으실 것 같아요?”

“안 믿겠지. 하지만 그래서 뭐?”

황제에게 박해를 받든 말든, 자레스는 별 상관없는 듯했다. 이젠 그토록 바라던 황좌도 별로 중요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미운털은 이미 박혔으니, 자기는 신경 안 쓰겠지. 당신도 당신이지만, 우리는 훨씬 더 고생한다고!’

퀴나에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 앞에 고생길이 훤하게 열렸고, 그 시련은 앞서 겪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다.

***

황제와 자레스가 독대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자레스가 남색을 즐긴다는 참소가 들어왔을 때 이후로 거의 8개월 만이었는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에 두 사람 사이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더 이상 황제는 그의 혈통을 빌미 삼아 자레스를 강박하지 못했다. 자레스는 당당했고, 황제는 그에 부아가 치밀었으나 감히 그의 목을 베지 못했다.

“성녀를 어찌하려는 거냐?”

“생각 중입니다, 아바마마.”

“이렌시아로 돌려보낼 생각이냐? 아니면 네 아내로 맞기라도 하려는 거냐?”

“둘 다 고려 중입니다.”

“감히 성녀를 여자로 소유하려는 것이냐? 성녀는 순결을 잃으면 성력도 잃는 법, 그런 식으로 성녀를 대해선 안 된다!”

“아바마마, 어찌해서 제게만 그리 모질게 구십니까?”

“모질다니,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유가 형님은 성녀를 첫 번째 부인으로 맞겠다고 몰래 밀서를 보내왔고, 일리파스 형님은 성녀를 사랑한다고 제발 아내가 돼 달라고 연서를 보내고 있는데, 그건 알고 계십니까?”

“허어! 이런 못난 놈들!”

자식들이 하나같이 성녀를 욕심내고 있는 게 황제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유가는 그나마 정치적인 목적이 있으니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자레스는 그 반대다. 성녀에게 완전히 미쳐 있는 게 눈에 보였고, 그러리라 짐작한 적이 없는 놈이 보인 정반대의 행보는 황제에게 너무 낯설고 위험해 보였다.

“성녀를 이렌시아로 돌려보내지 말아라. 다 잡은 사냥감을 남들과 나눌 필요는 없는 일.”

“황명이 그러하다면 따라야지요.”

“황명이라. 그렇다면 내가 성녀를 내게 바치라 하면 그것도 따를 터이냐?”

“…….”

자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순순히 응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황제는 미끼를 내밀었다. 아마도 유가였다면 덥석 물었을 미끼를.

“네가 충심을 보인다면, 너를 황태자에 봉하지 못할 것도 없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황위를 걸고 하는 말인데, 내가 허언을 내뱉을 리 있겠느냐?”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는데, 그는 사실이었다. 그가 자식들에게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은 적은 없다.

다만 그 진심이 자주 바뀌었을 뿐이지, 그는 항상 그 상황에서 그에 맞는 진심을 내보였었다.

“내 약속하건대, 성녀를 내게 보내면 너를 황태자로 책봉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제국 전체에 알리며, 앞으로 절대 바뀌지 않을 성지(聖志)임을 선포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다시 한번 힘을 줘서 선언했다.

“내가 죽으면 황위는 너의 것이다.”

‘하지만 황위에 있는 동안 아넬의 성력을 쪽쪽 빨아 먹겠지. 그 성력의 힘으로 적어도 백 살까지는 살 것이고.’

그가 설령 아넬을 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뱀 같은 황제는 황관을 틀어쥐고 그 위에 도사려 앉은 채, 절대 자식들에게 황위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아바마마.”

하지만 자레스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간 숱한 호출령에 응하지 않았던 그가 뜻밖에 순순히 응하자 오히려 황제가 놀랐고, 이어서 큰 웃음을 터뜨리며 드러내 놓고 좋아하였다.

물론 황제는 자레스가 이미 아넬을 빼돌릴 궁리를 하고 있고, 황명을 받들기 위해 궁에 돌아가 보니 아넬이 이미 탈출한 뒤였다고 둘러댈 생각이란 건 전혀 몰랐다.

그리고 자레스 역시, 그의 핑계가 정말로 사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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