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17/33)

16.

마디나는 한여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카비르는 워낙 땅이 넓어 지역에 따라 기후도 다양했는데, 서쪽에 면한 마디나는 여름이 길고 봄과 가을 겨울은 짧다.

성녀가 죽은 지 두 달째였다. 아직도 새 성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에포메니가 사라진 건 기정사실이 됐다.

세계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전염병이 발생하지도 않았지만 신의 상징이 사라진 지금 그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할 존재가 없어졌기에, 사람들은 점점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카비르를 비롯한 각국에서 이렌시아로 사신을 보내고 대책을 숙의하는 동안, 진짜 성녀인 아넬은 자레스의 황자궁에서 여름 더위를 맞았다.

퀴나에는 이즈음에 아주 좋은 충고를 해 줬다.

여전히 지지부진한 조사에 매진하던 그는, 자레스와 아넬 사이가 그의 일과 마찬가지로 답답한 지경이란 걸 알고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튀어나와 자레스를 야단쳤다.

“성녀님을 말려 죽이실 겁니까? 바람이라도 쐬게 해 주십시오, 쫌! 사람을 그리 가둬 두면 멀쩡한 사람도 미쳐 버린다고요!”

그 말에는 꿈쩍하지 않았지만, 그다음은 솔깃했다.

“가둬 놓고 이것저것 바치면 뭐합니까. 그것보다는 차라리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것도 보여 주고, 좋은 구경도 시켜 주세요. 여자를 꾀려면 그런 것도 필요한 겁니다.”

“…그러한가?”

“그렇고말고요! 게다가 성녀님은 어려서부터 신전에만 갇혀 산 분 아니에요. 마디나의 화려한 거리를 구경시켜 주면 아주 좋아할 겁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자레스는 다음 날 퀴나에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

시녀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몰려와 그녀를 꽁꽁 싸맸다.

아넬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시녀들이 모자가 달린 외투를 입혔고, 그녀의 작은 발에는 역시 수를 놓은 빨간색 구두를 신겼다.

마지막으로 모슬린으로 만든 반투명한 베일을 씌우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침소를 벗어난다는 걸 깨달았다.

시녀들이 나가자 이번엔 자레스가 들어왔다. 그 역시 카프탄 위에 외투를 걸쳤는데, 들어오자마자 아넬을 번쩍 안아 들었다.

“내, 내려 주세요!”

아넬이 외쳤지만, 자레스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늘 그렇듯 자레스는 그녀의 청을 들어준 적이 없다.

“그 다리로 어떻게 걸으려고?”

“…걸어야 하는 곳에 가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당신은 걸을 수 없고, 그러니 내가 안고 가야지. 다른 사내놈이 감히 당신 몸에 손을 대게 할 수는 없으니까.”

평소라면 기겁했어야 할 그 말보다 앞의 것이 더 중요했다.

‘황자궁을 나간다!’

아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물론 자레스가 그녀를 돌려보내 주려고 데리고 나간다는 희망은 없었지만, 그래도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그녀의 볼에 화색이 돌았다.

무려 두 달 만에 황자궁 밖의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베일로 가렸어도 그녀의 전신에서 기쁨에 들뜬 기운이 뚫고 나오는 게 느껴졌다. 자레스는 그 모습에 매우 만족했다.

황자궁 마당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타자, 마차가 출발했다. 호위병과 시녀들이 말에 올라타 뒤를 따르는 가운데, 행렬은 황자궁을 나와 마디나의 시내로 들어섰다.

아넬이 마지막으로 마디나의 시내를 본 건 한참 전이었다.

그때는 노예의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귀한 마님처럼 비단옷을 입고 마차를 탄 채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 차이를 절감한 것도 잠시였고, 아넬은 이번엔 밀쳐지고 발로 차이는 대신 느리게 전진하는 마차 안에서 느긋하게 바깥의 풍경을 내다봤다.

자레스가 마차의 창문을 반쯤 열어 준 덕에 아넬은 날씨가 더워지면서 오히려 한층 더 활기를 띠고 있는 거리의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이렌시아와는 모든 것이 다른 곳이었다.

거리에는 마차가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길 양쪽으로 좌판이 쫙 깔려 있어서 상인들이 손님을 불렀다.

“남쪽 바다에서 채취한 귀한 진주로 만든 목걸이입니다! 만져 보시고, 걸어 보세요. 구경하는 건 값을 안 받습니다아!”

자레스가 준 것만 해도 보석함에 차고 넘치는 아넬이었기에, 흐릿한 광택을 가진 그건 아무리 봐도 가짜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넉살 좋게 호객하는 장사꾼의 말재간이 재밌었고, 그가 좌판에 늘어놓은 알록달록한 장신구들은 조악하긴 해도 괜히 한번 사 보고 싶어졌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걸친 것이 훨씬 진귀한 거지만 이것은 남이 준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 손으로 물건을 사 본 적이 없었지.’

사기는커녕 돈을 벌어 본 적도 없다. 심지어 돈을 쥐어 본 적도 없었다.

신전의 재정은 각국에서 보내온 봉납금으로 알아서 채워졌으며, 귀한 성녀는 가만히 있어도 가장 좋은 물건들을 받을 수 있었다.

치유의 힘을 베푸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었지만, 그 힘으로 뭔가를 얻었다는 실감은 안 나서 아넬은 푼돈을 주고받으며 물건을 사고파는 거리의 일상이 몹시 신기했다.

“과일이 아주 답니다! 맛보고 가세요!”

알록달록한 이국의 과일은 지나가기만 해도 마차 창으로 향기가 흘러들어 왔다.

아넬의 침소에는 그보다 더 귀한 과일들이 있었지만, 햇볕을 받아 노랗게 빛나는 과일들이 훨씬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어떤 곳에선 상인이 원숭이에게 재주를 부리게 하며 구경값을 받고 있었다.

아넬이 눈을 번쩍이자, 자레스가 바로 마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그를 보게 해 줬고, 아넬은 원숭이가 사과 세 개와 칼을 번갈아 돌리는 묘기를 부리는 걸 보며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러느라 정작 자레스가 그런 아넬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몰랐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아넬이 그가 웃는 걸 보고 놀랐다고 했던가. 그녀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그 역시 지금 경이로운 기분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늘 겁에 질려 있거나, 시무룩하거나, 어두운 모습만 봤는데 지금은 눈을 빛내며 박수를 치고 활기에 차 있다.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그도 뿌듯해졌다.

늘 남의 것을 빼앗고 쟁취해 놓고도 아귀처럼 더 높은 곳만 바라보며 만족을 몰랐는데, 지금은 아넬이 웃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아귀가 올라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레스의 눈에 세상에 없는 다정함이 서렸다.

원숭이의 한바탕 재주가 끝나자 녀석이 쓰고 있던 빨간 모자를 벗어 돈을 담길 요구하며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 주는 동안, 자레스는 수하에게 시켜 금화를 열 닢이나 보냈다.

아넬을 즐겁게 해 줬으니 그 정도 대가를 치르기에 충분했다. 금화를 받은 원숭이 주인이 놀라서 뒤로 자빠지는 동안 자레스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저건 자레스의 마차가 아니냐?”

“네엥?”

버터에 버무려 구운 아몬드를 입에 털어놓고 있던 일리파스가 갑자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일리파스는 유가나 스에반과 달리 평복을 하고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때로는 신분을 숨긴 채 술을 마시다 패싸움까지 벌였는데, 다른 황자들은 천박하다고 싫어했지만 혈기 왕성한 일리파스는 답답한 황궁 생활보다는 거리에서 활력을 찾곤 했다.

일리파스의 말에 함께 따라 나온 참모 마카르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별 표식이 없는 평범한 마차가 골목 어귀를 돌아 들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냥 귀족의 마차인 것 같은데요? 어딜 봐서 16황자님의 마차라는 건지요?”

“아니, 아니. 마차 말고 말. 저 말은 내가 탐내던 하이산 말이라 알고 있단 말이야. 웃돈을 줄 테니 달라고 졸랐는데도 자레스 놈이 끝내 거절했지.”

그날의 원한이 되살아 난 듯, 화 난 눈으로 마차를 쳐다보던 일리파스가 중얼거렸다.

“저기에 자레스가 타고 있는 게 틀림없어.”

황자임을 나타내는 표식까지 뗀 걸 보면 분명 신분을 숨긴 채 뭔가 비밀스러운 짓을 도모하고 있다는 뜻이다. 얄미운 동생의 행보에 호기심이 불끈 일었다.

“따라가 보자.”

일리파스가 일어나자, 마카르 역시 재빨리 그 뒤를 쫓아갔다.

마차는 어느 카베 앞에서 멈췄다. 언젠가 자레스가 카에티와 만났던 그 카베였지만 일리파스가 알 리 없었다.

마차 문이 열리며 자레스가 내렸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몸집이 가냘픈 여자를 안고 있었는데, 자레스는 마치 여자의 발이 땅에 닿게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소중하게 그녀를 안고 카베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시녀와 호위병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갔다.

“혹시 저 여자가, 소문의 그 정부 아니냐?”

자레스는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정부일 수밖에 없다.

자레스는 내실에 여자를 들인 적도 없거니와, 여자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일리파스는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반쯤은 과장이겠거니 했는데, 저 싸가지 없는 동생 놈이 여자를 직접 안고 들어가는 걸 보니 허언만은 아닌 듯했다.

‘그 정도로 저 여자를 좋아하나?’

잘하면 약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을 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저 여자가 얼마나 아름답기에 어지간한 미인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던 자레스가 홀딱 빠졌나 그게 더 궁금했다.

“따라 들어가 보자, 마카르.”

그러나 당당하게 밀고 들어가려던 두 사람은 카베 입구에서부터 가로막혔다. 카베 주인이 튀어나와 손사래를 쳤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으니 내일 찾아와 주십시오.”

“뭐야? 방금 전 사람이 들어가는 걸 봤는데, 손님을 받지 않다니? 지금 손님 차별하는 건가?”

“아, 그건… 양해해 주십시오. 앞서 들어온 손님이 이 가게를 통째로 빌리셨기 때문에, 손님을 더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요.”

이러면 낭팬데?

그런데 그때 마카르가 요령을 부렸다.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이러는 건가? 이분은 카비르의 여섯 번째 황자이신 일리파스 전하시네!”

“네에?”

“이 단검을 보라!”

마카르가 일리파스에게 받아 내보인 단검의 검집에는 카비르 황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의심할 수가 없었다.

불행히도 자레스는 이 카베를 빌릴 때 그가 황자란 걸 밝히지 않았다. 주인은 그저 돈 많은 귀족이겠거니 여겼고 군말 없이 응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짜 황자가 나타났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귀족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카베 주인은 황자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머, 먼저 오신 손님께 양해를 구하고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나는 한구석에서 커피 한 잔만 마시다 조용히 돌아갈 테니 알리지 말게.”

“알겠습니다요!”

불복했다 괜한 피해를 보기 싫었기에 주인은 재빨리 물러갔다. 그리고 일리파스와 마카르는 조용히 자레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자레스 일행은 정원 쪽에 있는 것 같았다. 자레스와 함께 온 호위병들이 정원 입구를 막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카르가 실력을 발휘했다.

“나 들어가야겠다.”

배를 내밀고 거드름을 피우며 밀고 들어가려 하자,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 호위병들이 대뜸 창대를 세우며 나왔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놈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물러가라! 여긴 오늘 귀한 분이 전세를 내셨다.”

“귀한 분인지 아닌지, 내가 알 게 뭐야? 나도 귀한 신분이란 말이야. 나바르가라고 알아? 앙?”

“그런 가문이 있었나?”

언변에 휘말린 호위병들은 귀족이 황족보다 아래라는 걸 판단할 틈이 없었다. 그사이 마카르가 뻔뻔하게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아, 나는 들어가야겠다니까? 이봐, 카베기! 정원으로 커피 한잔 가지고 와!”

마카르가 그들을 젖히고 들어가려 하자, 호위병 둘이 그를 밀어내려 머리통을 때렸다. 가만있을 마카르가 아니다. 바로 사달이 났다.

“아이고, 아이고! 이 무례한 놈들 보게! 나는 귀족인데 이놈들이 나를 때렸다아! 이봐, 종업원! 얼른 관청에 신고해서 이놈들을 잡아가라!”

관원이 나오면 자레스의 조용한 외출은 망쳐진다.

당황한 호위병들이 어떻게든 마카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팔다리를 붙잡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일리파스는 슬며시 그들을 피해 정원으로 들어갔다.

입구가 시끄러운 것에 비해 정원은 조용했다.

주변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 걸 보니 아마도 자레스와 그 여자는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일리파스는 만일을 위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얼굴 반쪽을 덮었다.

그러고서 살금살금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문득 그의 눈에 장미 덤불 뒤에 서 있는 자레스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자레스에게 가려져 있어서 등과 엉덩이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를 좋아하고, 미색을 밝히는 일리파스는 금방 알아챘다.

여자는 분명 미인이었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다.

미인에겐 특유의 아우라 같은 것이 있는데, 지금 자레스가 차마 만지지도 못해서 허리를 감을까 말까 하며 손을 든 채 머뭇거리게 하고 있는 저 여자는 대단한 미인인 게 틀림없다.

“이 장미의 이름은 뭔가요?”

그때 아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일리파스는 목소리만 듣고도 마치 벼락에 맞은 듯한 전율을 느꼈다.

“타시르. 추위에 강해서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피는 장미야.”

“가을에 피는 장미는 처음 봅니다. 이렌시아에선 장미가 늦봄에나 나오거든요.”

크림처럼 흰 장미는 꽃잎 끝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화색이 깃든 아넬의 모습과 비슷했다.

장미를 보는 아넬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자레스는 그 모습을 정신없이 들여다봤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기 싫은 탐욕을 자제하고 그녀를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

아넬이 즐거워하고 있었고, 처음으로 스스럼없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레스는 이 소소한 대화에 기쁘게 몰입했다.

이제 보니 아넬은 호기심이 아주 강했다. 지식이 많고 똑똑했지만 정작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몰라서 마치 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처럼 느껴졌다.

‘이 여자는 귀엽기도 하구나.’

별것 아닌 것에 감동하고, 신기한 것을 보여 주면 재밌어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면 그에 대해 종알종알 떠든다.

보석이며 값진 패물과 비단은 아무 소용없었다. 그저 그녀를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쓸데없는 데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그런데 이 장미는 왜 향이 없지요?”

“타시르 장미는 원래 그래. 병에 강하고 추위에도 강한 대신에 향기가 적지.”

“아하. 역시 이렌시아의 장미와는 다르네요.”

그녀의 목소리를 좇아 홀린 듯이 다가가고 있던 일리파스는 생각했다.

‘이렌시아 출신인가? 성녀가 사는 땅에서 와서 저렇게 목소리마저 우아한 건가? 아아, 보고 싶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다!’

머리가 가고 몸이 달았다. 자레스의 애인인 걸 아는데,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욕심이 난 일리파스는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면서, 장미 덩굴 아래 숨었다.

얼기설기 엉킨 덩굴 안쪽에 용케 작은 틈이 있어 몸을 숨긴 채로도 자레스와 아넬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순간 아넬이 일리파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하마터면 일리파스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갈 것 같았고, 천상에서 황홀한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등까지 내려오는 눈부신 금발에 새로 피어난 새순 같은 초록빛의 눈이 무시무시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

메타가 처음 창조한 여자는 특별히 힘을 쏟아 만들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는데, 그녀의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저 정도쯤 되는 여자니 자레스가 그리 애지중지하는구나.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었어!’

지금껏 그가 만나 왔던 여자들은 비교가 안 됐다.

카비르 최고의 미인이라 일컬어졌던 여자들의 미모가 기억 속에서 깡그리 지워지고, 그 자리에 아넬만 들어찼다.

그녀가 원래는 노예 파이디였다는 것도 모른 채, 일리파스는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아, 아름다워…. 아름다워! 신이시여, 어떻게 저런 역작을 만들어 내셨나이까! 이 일리파스에게 내려 주시려고 힘을 쏟으신 겁니까?’

동생의 여자인 걸 잊은 채 어느새 일리파스는 혼자 상상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아넬은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의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아, 정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하필 그때 정원 입구 쪽에서 더 큰 소리가 났다. 본격적인 싸움판이 벌어졌는지 아이구야, 데이구야 하는 비명이 커지면서, 컵과 쟁반을 던지고 깨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지금은 안 되겠구나.’

이러다 자레스에게 들키면 피를 볼 게 뻔하니 일단은 나중을 기약해야 했다.

일리파스는 아쉬움을 삼킨 채 덩굴 길을 돌아 정원의 옆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담벼락 근처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나무 위로 기어오른 일리파스가 높은 담을 넘어 골목길로 뛰어내렸다.

그 길로 황자궁으로 돌아온 일리파스는 그날부터 상사병을 앓기 시작했다.

***

일리파스가 앓아누웠다는 소문은, 자레스와 그의 여자에 대한 소문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황궁에 퍼졌다.

덕분에 유가와 스에반이 찾아왔는데, 아프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일리파스는 겨우 사흘 만에 놀라울 정도로 안색이 나빠졌다.

“아니, 형님. 어디서 전염병이라도 옮아오신 겁니까? 너무 팔팔해서 소도 때려잡을 것 같던 형님이, 왜 이리 약해지신 거예요?”

“농담할 기운 없다, 이 자식아.”

“황궁 밖은 한여름인데 이리 방에만 누워 있으니 병에 걸리지. 일어나서 어디 사냥이라도 나가거라.”

“그랬다간 형님이 사냥터에서 내 뒤통수에 화살을 날리겠지요.”

“내가?”

반문한 유가가 껄껄 웃었다.

“나라면 독살을 하거나 죄를 뒤집어씌우지, 그런 짓은 안 한다. 게다가 네놈은 화살을 맞아도 죽지도 않을 것 같아.”

“맞아요. 힘으로는 자레스 형님보다 우월하지 않습니까? 뭐, 칼솜씨는 자레스 형님이 더 뛰어나지만 말입니다.”

“황자가 칼을 써서 무엇 하느냐. 우리는 사람을 부리는 자라, 직접 칼을 쓸 필요가 없다. 자레스가 칼을 잘 쓰는 것도 출신이 비천하기 때문이야.”

유가를 좋아하진 않지만 노골적으로 자레스를 비하하는 게 듣기엔 좋았다. 마침 답답하던 차에 일리파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일리파스는 누구라도 좋으니 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마카르에게 의논하기엔 체면이 상하고, 같은 황자이면서 머리 좋기로 유명한 유가이니 혹시 해결책을 찾아내 주지 않을까?

“사실 제가 아픈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형님. 사실은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습니다.”

일리파스의 고백에 유가가 손뼉을 쳤고, 스에반은 휘파람을 불었다.

만날 이 여자, 저 여자 기웃대기만 하지 금방 진력을 내던 일리파스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다니.

“오호라? 그럼 드디어 혼인할 생각이 들었단 말이냐?”

“혼인할 생각이야 진작부터 있었지요. 다만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지…, 그런데 제가 한눈에 반한 여자가 생겼단 말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어떤 여자길래 바람둥이 일리파스 형님의 눈을 멀게 한 건가요?”

“내가 왜 바람둥이야? 나는 그냥 예쁜 여자에게 친절한 것뿐이다!”

“딴 길로 새지 말고, 계속 말해 보아라. 아플 정도라면 그 사랑을 이루기 힘들어서 그런 게 맞는 게지?”

“그러니까 요컨대 상사병이란 거군요!”

스에반이 기분 나쁘게 웃어 댔다. 유가 역시 부채로 입을 가리는 걸 보니 비웃는 게 뻔했다.

황자가 상사병을 앓다니, 누가 들어도 웃을 거다. 하지만 불타는 이 마음을 숨길 방법이 없었기에 일리파스는 일단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으면 취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대체 뭐가 문제예요?”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내가 병이 들지 않지.”

“혹시 신분이 너무 높으냐?”

“내가 황자인데 황자보다 더 높은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럼 신분은 문제가 아니란 거네요. 하긴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면 거리에서 만났다는 건데, 평민이겠군요.”

“거리에서 만난 게 아니다. 어쩌다 보니 몰래 훔쳐보게 된 거라….”

“네?”

스에반과 유가가 서로를 흘깃 쳐다봤다.

신분이 높은 여자들은 내실에만 머물지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는다. 거리에서 만난 게 아니면 남의 집에서 마주쳤다는 건데, 몰래 훔쳐봤다면 손님으로 간 건 아니라는 것이다.

“설마…?”

“남의 여자냐?”

유가의 추측에 일리파스가 고개를 떨어뜨리자, 유가와 스에반은 둘 다 짐짓 심각한 표정 뒤에서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아니, 형님. 그 많은 여자들을 놔두고 왜 하필 유부녀입니까?”

“그, 그게 유부녀는 아니다. 아직 결혼은 안 했단 말이다.”

“흠, 그래도 남의 여자인 건 맞다는 거지? 어쩐지, 장애가 있으니 상사병에 걸린 게로구나.”

“남의 여자면 유부녀나 마찬가지지요! 내실에 머물 정도면 모르긴 해도 첩이나 정부는 될 텐데, 그런 여자를 탐하다 걸리면 여자는 다리를 잘리고 남자는 팔을 잘리는 거 모릅니까?”

“하지만 일리파스는 황자가 아니냐. 누가 감히 황자의 팔을 자른단 말이냐?”

듣고 있던 유가가 끼어들더니 슬슬 부추겼다. 아무리 봐도 위험한 상황인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부추기는 유가의 모습에 스에반이 불안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대체 무슨 심산이지?’

하지만 단순한 일리파스는 제 귀에 좋은 말만 골라 듣고 당장 입이 벌어졌고, 유가의 달콤한 독언에 속아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사병이 들 정도면 포기하기가 싫다는 뜻이겠지.”

“맞습니다. 저는 도저히 포기 못 하겠습니다. 그 여자는 정말이지… 정말 신이 빚은 것처럼 아름다워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봤습니다.”

“그럼 취해야지. 아무리 남의 여자라 해도 황자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서야 말이 되겠느냐.”

“무, 무슨 수로요? 쳐들어가서 그 여자를 뺏어 오기라도 하란 말입니까?”

“힘들겠느냐? 너는 키우고 있는 사병도 많으면서.”

“그게….”

차마 상대가 자레스라 무력으로 밀어붙이기 힘들다는 말은 못 하고, 일리파스는 엉뚱한 말로 둘러댔다.

“아무리 그래도 저, 저도 체면이란 게 있지, 어떻게 힘으로 여자를 뺏어 옵니까?”

“꼭 힘을 쓰라는 게 아니다. 때로는 지혜가 완력을 이기는 법이지.”

그러면서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뱀의 혀를 놀렸다.

“들은 이야기다만, 내 모친의 부족에 그런 짓을 감행한 남자가 있단다. 남자는 부족장의 아들이었고 이미 두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그만 다른 부족의 유부녀에게 반하고 말았지.”

“그래서요? 병사들을 끌고 가서 납치를 했습니까?”

“부족 간에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면 그리 정면 승부를 할 수는 없지. 남자는 여자를 하나 구해서 피리를 가르쳐 준다며 그 집에 들어가게 했지.”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 일리파스는 귀를 바짝 세웠다.

“그렇게 가까워진 뒤에는 부족장의 아들에 대해 엄청나게 칭찬을 해 댔어.”

“그다음은요?”

“칭찬을 자꾸 듣다 보면 호기심이 생기는 법이지. 그러다 그 부족장의 아들이 준 귀한 보석을 주면서 남자가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흘렸어. 어떻게 됐겠느냐?”

“여자가 넘어온 겁니까?”

“왜 아니겠느냐. 부족장의 아들은 유부녀의 남편보다 신분이 높고 부족의 세력도 훨씬 컸어. 남편과 비교가 안 됐지. 아내는 스스로 탈출해서 부족장의 아들에게 왔단다. 동생아, 여자란 그런 존재고, 남자의 지혜는 그렇게 발휘하는 것이란다.”

“하지만… 남편이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관청에 고발하면 남자나 여자나 둘 다 처벌받을 일인데.”

스에반이 마지막으로 저항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유가가 우아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힘의 크기가 다른데 관헌이 누구의 편을 들겠느냐? 법의 저울은 항상 강한 자에게 추가 더 얹혀 있는 것이다.”

유가가 다시 일리파스를 돌아봤다.

“일단 뺏어라. 그다음은 돈과 권력으로 누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세상의 이치야.”

좋은 조언을 해 주는 척 속살거리고 위험한 짓을 사주했다. 일리파스는 유가의 독언을 가려들을 정도로 똑똑하지 못했고, 사랑에 눈이 먼 그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유가의 말이 맞다. 그래, 나는 자레스보다 형님이 아니냐. 게다가 노예 출신인 자레스보다야 내가 훨씬 낫지. 세력으로 쳐도 자레스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지지 않아.’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보는 거다. 일단 만나서 구애를 해야 거절을 당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그래, 그 여자도 내 궁이 자레스보다 크고 내 재산이 자레스보다 많은 걸 보면 내가 그놈보다 훨씬 나은 남자란 걸 알아볼 거야.’

일리파스는 위험한 결심을 했다.

사람을 들여보내고, 설득하는 지루한 작업을 하는 대신 그가 직접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성질 급한 그다운 결정이었는데, 일리파스는 바로 그 주에 그의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

자레스의 궁에 몰래 잠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리파스는 덩치가 커서 눈에 띄었고, 뭣보다 황궁 안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일리파스는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정식으로 찾아가겠다고 요청을 한 것이다.

“내 혼사 문제로 의논할 일이 있으니, 한번 만나자꾸나.”

아넬을 뺏어 내면 정식으로 혼인하고 싶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레스는 일리파스가 찾아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혼사 문제는 꽤 중요한 일이었기에 마지못해 그의 내방을 허락했다.

일리파스는 호위병 서너 명을 달고 왔는데, 그 정도쯤이야 당연한 경호이니 신경 쓰지 않았다. 자레스 역시 호위병을 달고 1층에 있는 접객실에서 그를 만났다.

“형제끼리의 만남인데 접객실이라니, 꼭 남처럼 구는구나.”

“그럼 뭐 내실에라도 들일 줄 알았습니까? 왔으니 용건이나 말하십시오.”

재수 없는 놈.

노예 출신인 걸 떠나 어쨌든 동생인데 싸가지 없기가 땅을 뚫고 하늘을 찌른다. 자레스는 누구나 경계하고, 까칠하게 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유가나 스에반보다 대하기가 더 어려웠다.

일리파스는 내심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억지웃음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긴한 이야기니 호위병들은 물렸으면 한다.”

썩은 미소를 흘리며 부탁하자 자레스가 선선히 들어줬다.

일리파스는 유가보다는 강하지만, 실전에서 싸우면 절대 자레스를 못 이긴다. 그걸 알고 있고, 또 강조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자레스는 그의 호위병까지 함께 물렸다.

그들이 나가자 비로소 일리파스가 입을 열었다.

“그… 왜, 이번에 내가 혼인을 할까 한다.”

“그런데요?”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구나.”

“형님의 혼사인데 제가 도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혹시 다른 나라 황녀라도 원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

일리파스는 계속해서 우물거리며 말을 돌렸다. 그가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그의 호위병들이 지시한 내용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일리파스는 작전이 완료됐다는 신호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알맹이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리파스가 데리고 온 호위병은 모두 셋이었다.

그들이 나오자마자 한 건 자레스의 호위병들에게 화장실이 어디냐 묻는 것이었다.

“1층 복도 끝쯤에서 왼쪽으로 돌면 작은 출입구가 있는데 그리로 나가면 있소. 아, 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은 가지 말고. 거긴 귀빈용이오.”

다른 궁에서 온 손님이니 한꺼번에 화장실에 몰려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레스의 호위병들은 접객실 밖에 남았고, 일리파스가 데려온 무리는 모두 화장실 쪽으로 갔다.

하지만 그들은 가르쳐 준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람의 인적이 드문 복도로 몰래 숨어 들어가서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이 복도로 들어섰다.

여자였다.

자레스의 궁에서 일하는 노예 중 하나였는데, 이 복도에 있는 악기실에서 악기를 가져오기 위해 찾아온 참이었다.

호위병들은 재빨리 노예를 낚아챈 뒤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목에다 칼을 들이댔다.

“마님의 방이 어디냐?”

여노예는 그들이 가리키는 ‘마님’이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자레스의 황자궁에 마님이라 불릴 만한 여자는 한 명밖에 없다.

목숨이 아까웠기에 여노예는 손가락으로 2층을 가리켰다. 틀어막은 손을 살짝 느슨하게 해 주자 그녀가 속삭였다.

“2층… 복도 한복판에 있는 귀빈실입니다. 그, 호, 호위병들이 지키고 있어요.”

걸려들었다. 호위병들이 교활한 시선을 교환하더니, 병사들 중 하나가 품 안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노예의 입을 강제로 열고는 병 안에 들어 있던 것을 털어 넣었다.

“콜록, 콜록! 크윽!”

노예가 기침을 했지만 약물은 고스란히 그녀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그를 확인한 호위병이 바로 협박을 늘어놓았다.

“네가 지금 마신 건 독약이다. 해독제를 마시지 않으면 한 시간 안에 죽을 거야.”

“그런…!”

“시키는 대로 하면 우리가 시간 안에 해독제를 주마. 그 대신 너는 이 음료수를 마님 방 앞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줘.”

그러면서 다른 병사가 허리춤에 멘 도자기 병을 건네줬다.

병에는 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찻잔을 겸하는 것이었으며 병 안에는 시원한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이걸 그 호위병들에게 마시게 해. 자레스 황자가 내렸다 하고.”

노예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그들이 ‘마님’을 노리는 게 명백했는데, 그런 의도를 가린 자들이 주는 음료수가 멀쩡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그런 짓을 했다간 전 황자 전하께 죽습니다!”

“해독제를 안 마셔도 죽어. 이봐, 아직도 몰라? 네가 우리에게 잡힌 시점에서 네 운명은 이미 결정된 거야.”

병사의 말이 맞았다. 재수도 참 없지, 이 복도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그녀의 팔자는 뒤틀린 거였다.

“말을 듣지 않겠다 하면 우리는 너를 죽이고 가면 그만이다. 뒤뜰에다 던져 놓으면 발견되는 데 한참 걸리겠지. 우리를 의심한다 해도 대놓고 따지지는 못할 테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우리에게 협조해. 성공만 하면 해독제도 줄 거고 일리파스 전하가 큰 상을 내리실 거다. 아, 물론 노예 신세도 면하게 해 줄 거고 말이야.”

이미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면 도박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나.

노예는 쉽게 제 의무를 포기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병사가 내미는 음료수 병을 받았다.

“앞장서서 걸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각각 복도 양쪽 끝에 있다. 일리파스의 호위병들은 두 팀으로 나눠서 계단으로 향했다.

노예가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남은 일리파스의 호위병들이 어쩌다 동선이 겹친 것처럼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를 따라왔다.

“소리를 지른다든가, 그런 허튼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들키면 네 해독제도 없어.”

경고와 함께 서슬 퍼런 살기가 뒤에서 느껴졌다. 노예는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2층 계단 앞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음료수 병을 내밀었다.

“자레스 황자 전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한 잔씩들 드시고, 시원하게 목을 축이세요.”

“어, 마침 목이 말랐는데 잘 됐군.”

여자 노예는 자주 보던 얼굴이었기에 자레스의 수하들은 의심하지 않고 잔을 받아 마셨다.

얼마 전 한바탕 첩자들을 솎아 내지 않았던가. 그 피바람 속에서 남은 여자니 믿을 만했다.

하지만 음료수에는 노예가 마신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맹독이 들어 있었기에, 그를 마신 순간 수하들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도 못 지른 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노예를 따라온 일리파스의 병사들이 그들이 쓰러지기 전에 재빨리 안아서 계단 아래로 내려놓았다.

하지만 복도가 길고, 계단 쪽은 그늘져 어두운 탓에 아넬의 방을 지키는 호위병들은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노예가 자레스의 수하들의 시야를 가리며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똑같은 방식으로 잔이 내밀어지고 수하들은 사이좋게 그를 나눠 마셨다.

그들이 쓰러지는 건 숨길 수가 없었다. 수하들이 픽픽 쓰러지자 반대쪽 계단을 지키던 자레스의 호위병들이 그를 눈치챘지만 그들은 미처 달려올 수가 없었다.

반대쪽 계단으로 올라온 일리파스의 수하들이 뒤에서 그들을 급습했던 것이다.

소리도 못 지른 채 그들이 쓰러지자, 달려온 수하들은 재빨리 아넬의 방문을 열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누구…!”

시녀들도 미처 저항할 수 없었다. 방에 있던 두 명의 시녀들은 수하들이 검 자루로 쳐서 모두 기절시켰고, 나머지 한 명이 침대로 달려가 휘장을 걷어치웠다.

그리고 그 찰나 수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일리파스가 한눈에 반하고, 자레스가 그리 애달아하는 게 단번에 이해가 갔다.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신이 직접 빚고 조각해서 세상에 내린 신의 선물이다.

일리파스의 수하는 잠시 제 할 일을 잊은 채 넋이 나가 아넬을 들여다봤다.

“누, 누구십니까?”

겁에 질린 아넬이 물었다. 자레스의 수하가 아닌 게 확실한 것 같은데, 정체를 알 수가 없다. 혹시 카에티가 보낸 사람인가?

무기가 될 게 없나, 아넬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하필 근처에는 식물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오늘따라 과일 접시는 일찍 치워 버렸고, 시녀들이 좋아해서 남겨 둔 설탕 과자만 남아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아넬이 잠시 주의를 돌린 사이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수하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자들도 달려오면서 그들은 아주 빠르게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을 묶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수하들은 그녀를 가지고 온 자루에 집어넣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 끝으로 달려가 3층으로 올라가자 건물 뒤쪽으로 뚫린 창이 나타났다. 그리로 달려간 수하들이 줄사다리를 걸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뒤쪽엔 마구간이 있었는데, 거기엔 아까 타고 온 일리파스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마부에게 그렇게 해 두라 지시했었다. 마차를 지키고 있던 마부가 재치 있게 마차 문을 열자 수하들이 아넬이 든 자루를 밀어 넣었다.

이 모든 과정이 겨우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은 건 탈출뿐이다.

호위병들은 아넬을 마부에게 맡긴 뒤 태연하게 건물을 돌아 자레스의 수하들이 가르쳐 준 화장실 쪽 출입구로 나타났다. 1층에 있는 자레스의 호위병들은 아무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같은 층에 있는 접객실로 간 그들 중 한 명이 문을 두들기고 들어가자, 일리파스와 자레스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그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자레스는 계속 빙빙 도는 대화 때문에 지루한 참이었다. 수하가 다가와 일리파스에게 귓속말을 하자, 그가 갑자기 외쳤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다.”

일리파스가 일어나자 자레스는 아예 대놓고 환영했다.

“배웅은 안 할 테니 알아서 잘 돌아가십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일리파스는 재빨리 나가 버렸고, 자레스는 따라 나가서 일리파스 일행이 어느새 건물 앞에 대기시킨 마차를 향해 달려가는 걸 지켜봤다.

“대체 왜 온 거지?”

고개를 갸웃거린 자레스가 그들을 뒤로한 채 아넬의 방으로 향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널브러져 있는 호위병들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아넬의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복도 여기저기에 호위병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방으로 달려 들어가니, 아넬의 침대 휘장이 찢겨져 있고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자레스는 그 순간 온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걸 실감했다.

“일리파스!”

자레스가 포효하며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

마차는 일리파스가 타자마자 재빨리 출발했다. 호위병들은 말에 올라타 뒤를 따랐는데, 마차는 빠르게 자레스의 황자궁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일리파스는 자루를 풀었다. 버둥거리던 아넬이 불쑥 튀어나오자 그 순간 일리파스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오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꿀물이 흐르는 것 같은 황금의 머리, 초원을 닮은 초록색 눈과 분홍빛의 뺨까지.

신이 그를 위해 빚은 여자가 틀림없다.

여태까지 그가 혼인하지 않은 건 이 여자를 맞기 위해서였던 거라고, 일리파스는 제멋대로 결론지었다.

“미안하오, 아가씨. 내 맹세코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오.”

일리파스는 애타게 외쳤다. 아넬의 겁먹은 눈동자를 보니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이름은 일리파스, 이 카비르 제국의 여섯 번째 황자요.”

아넬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이 사람이 왜 자신을 납치했는지 그 이유를 몰라 무서웠다.

‘혹시 성녀인 걸 알아챈 걸까?’

아니었다. 일리파스는 바로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사랑하오, 아가씨.”

“……!”

“사실은 지난번 당신과 자레스가 카베에 왔을 때 두 사람을 봤소. 거기서 당신에게 한눈에 반했다오.”

‘그런 거였어?’

기가 막혔다. 겨우 얼굴 한 번 본 걸로 사랑에 빠졌다 외치는 것도 한심했지만 자레스와 함께 있는 걸 봤다면 그의 여자란 걸 알아챘을 텐데, 알면서도 동생의 여자를 납치하다니 이런 만행이 없었다.

긴장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어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주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우우읍.”

아넬이 묶인 손으로 재갈을 가리키며 풀어 달라는 몸짓을 하자, 일리파스가 얼른 입을 막은 재갈을 풀어 줬다.

“후우우.”

아넬이 긴 한숨을 내쉬자 일리파스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환희에 가득 찼다.

역시 그녀에겐 재갈이나 밧줄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았다.

궁에 데리고만 가면 자레스가 줬던 것보다 훨씬 많은 재물을 바치고, 더 화려한 보석과 목걸이를 팔과 다리에 치렁치렁 감싸 주고, 침대엔 황금을 깔겠다고, 일리파스는 맹세했다.

그녀가 달라고 하면 심장이라도 뜯어내 줄 것이다. 이 순간, 일리파스는 자레스만큼이나 지독한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나를 풀어 주세요, 전하.”

“그럴 순 없소. 못 들었소? 나는 일리파스 황자요. 카비르의 여섯 번째 황자이고, 부황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고, 또 내가 가진 영지가 자레스보다 두 배는 넓고….”

일리파스가 떠드는 동안 아넬은 반쯤 열린 마차 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쳐다봤다.

마차는 이미 황자궁을 벗어나 중정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은 황궁 안이긴 했지만 황제가 사는 본궁이나 황자궁에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지대였다.

제빵소나 방앗간, 황궁 전용 양조장이나 기병대 숙소와 같은 곳이 있었고, 거기에 속한 궁인과 노예, 군인들이 오가느라 사람이 무척 많았다.

마차는 그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위험하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여기서 더 달려 일리파스의 궁으로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는 걸, 아넬은 직감했다.

마침 마차는 본궁을 향해 뻗은 일직선 도로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도로의 양옆으로 벚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지금이다.’

아넬은 성력을 집중했다. 그 순간 벚나무의 가지가 길을 향해 쑥 뻗어 나오는 바람에, 말들이 깜짝 놀라 큰 울음을 날리며 멈췄다.

“으아악!”

간신히 마부가 고삐를 끌어당기며 마차를 세웠을 때 아넬이 문에 몸을 부딪쳤다.

일리파스는 마차가 크게 흔들리는 탓에 미처 아넬을 잡지 못했는데, 그 틈을 타 아넬이 뛰어내렸다.

“아아악!”

간신히 붙었던 다리에 격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넬은 비틀거리며 왔던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궁 안을 오고 가던 궁인과 노예, 백성들이 놀라서 바라봤다.

“거, 거기 서라!”

뒤늦게 일리파스가 마차에서 내려 뒤쫓아 왔다. 뒤를 돌아본 아넬이 다시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여자의 걸음인 데다가 다치기까지 해서 바로 지척 간으로 거리가 좁혀졌다.

일리파스 황자가 여자를 쫓아가고 있다!

게다가 그 여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라,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게 그 장면을 지켜봤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줄 생각은 못 했다. 상대가 일리파스 황자이니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여기서 황자가 칼부림을 벌인다 해도 황제를 제외하곤 황자를 벌할 사람이 없으니,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예상대로 아넬은 몇 걸음 못 가 넘어졌고 일리파스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아악! 아파!”

“미, 미안하오!”

아넬이 비명을 지르자 일리파스가 당황하며 사과했다. 그런 정경 또한 이상했다.

황자가 사과를 하다니, 상대가 황제가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일리파스는 여자에게 쩔쩔맸으며, 도망치려는 여자에게 욕을 하는 대신 얼른 그녀를 안아 들었다.

마치 일리파스가 노예고, 여자는 어느 나라 황족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말 한 필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일리파스를 향해 펄쩍 뛰어오른 것이다.

“저, 저거!”

“밟힌다!”

하지만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말은 크게 뛰어올라 일리파스와 아넬을 넘어갔는데, 착지하자마자 말에 탄 자가 내렸다.

자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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