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6/33)

15.

퀴나에가 도서관에서 기어 나온 건 거의 보름 뒤였다.

식사도 걸러 가며 정보를 파헤치느라, 눈이 그가 얻어 낸 정보의 깊이만큼 팼다. 그 몰골로 퀴나에는 바로 자레스를 찾아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중요한 걸 알아냈군.”

자레스가 흡족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중요한 접견이니만큼 처소를 벗어나 집무실에서 퀴나에를 맞았는데, 그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태초에 악신 칼리크와 선신 메타가 싸웠다는 건 아시지요?”

“지금 그걸 정보라고 알아내 왔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순서대로 알려 드리려는 겁니다. 제가 아주, 아주-우 운이 좋게 황자 전하의 도서관에서 온크웰어 사전을 찾아냈지 뭡니까?”

“그것 참 다행이군.”

“과연, 황자 전하! 이미 사멸한 언어로 된 사전을 구비하고 계시다니, 과연 지식과 야만의 수호자다우십니다.”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네, 그래서 그 온크웰어 사전을 뒤져 가면서 자발산에서 찾아낸 고서를 해독해 냈습니다. 그냥 고대에 기록된 역사서라고만 생각했는데 거기에 꽤 재밌는 게 적혀 있었답니다.”

계속하라는 고갯짓에 퀴나에가 말을 이었다.

“태초에 혼돈 속에서 선신 메타와 악신 칼리크가 태어난 건 알고 계시죠? 그리고 거대한 암소 한 마리도 같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하늘과 바다 땅, 동물과 식물이 차례로 생겨났지요. 메타와 칼리크는 빛과 그림자의 숙명에 따라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자레스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르드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을 주저리주저리 읊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만 다행히 메타가 암소의 젖을 먹고 힘을 키워 칼리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지요.”

“그건 이미 다 알려진 신화다.”

“네, 맞습니다. 땅은 다시 일곱 개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중심의 아라와트 대륙에 인간들이 살게 됐죠.”

아라와트의 동쪽엔 새들의 섬 타이르가 있고, 서쪽엔 뱀들의 섬 이알라가 있었다. 그리고 극북엔 얼음의 대륙이 있었고, 극남엔 차가운 얼음 바다 아래 불타는 거대한 화산섬이 있었다.

“하지만 극남에 있던 화산섬은 분화와 함께 가라앉았죠. 그 여파로 남서쪽에 있던 소대륙 타흐트 역시 함께 침몰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퀴나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거주하던 아라와트 대륙은 지진으로 다시 일곱 개로 쪼개졌고요, 인간들은 각 대륙에 나라를 만들어 살고 있습니다. 그게 지금 이 세계, 아르드의 모습입니다.”

“그것 역시 이 세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새로운 게 나오지 않으면 지금 당장 퀴나에의 입을 찢어 놓을 기세였다. 자레스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배후에서 살기가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에 찾아온 고대 기록을 보니 우리가 아는 땅 말고 이상한 섬이 하나 더 있었어요.”

“무슨 말이지?”

“아라와트 말고도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는 일곱 개의 땅이 더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저는 여섯 개밖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일곱 번째의 땅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퀴나에가 극적으로 팔을 펼치며 연극배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신화 속에서도 고대에는 아라와트를 포함해 일곱 개의 땅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왔지만 아무도 일곱 번째의 땅이 뭔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이상하지 않나요?”

“네가 알아낸 게 그 땅에 대한 것인가?”

“맞습니다. 고대서에서 그 땅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나클이라고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마을 세 개 정도 크기의 섬이랍니다.”

“그래서?”

“그런데 재밌는 게 말이지요, 이 섬의 위치가 시대에 따라서 달라요.”

“그게 무슨 뜻이지?”

“고대서는 연대기입니다. 신화시대부터 시작해서 시대마다 큰 사건을 시간순으로 엮어 놨단 말이죠. 그런데 나클 섬이 처음 기록에 나타난 건 아라와트가 생겨날 때가 아니라 한참 뒤란 말입니다. 그것도 시대마다 나클 섬이 다른 위치에서 나타나요.”

“다른 섬을 착각한 것 아닌가?”

“나클 섬은 중앙에 커다란 분화구가 하나 있는 걸 제외하곤 굴곡이 거의 없는 평평한 지형이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풀이나 생명체가 거의 없어서 마치 팽이 반쪽을 바다에 띄워 놓은 것 같다고도 적혀 있어요. 이렇게 생긴 섬을 다른 섬과 헷갈리겠습니까?”

“그렇긴 하군.”

“그런데 그런 섬이 천 년 전에는 아라와트의 동북쪽에 있다가 다음 백 년 후에는 아라와트의 남쪽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백 년 뒤에는 서쪽, 서북쪽에서 차례로 발견됐지요. 그리고 그 뒤에는 다시 동북쪽에서 나타났습니다.”

“…설마 움직이고 있다는 건가?”

“아마도요.”

“허튼소리! 섬이 물고기도 아니고, 헤엄이라도 쳐서 대양을 가로지른다는 건가?”

“하지만 기록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나클 섬은 목적 없이 대양을 가로지르는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아라와트 주변을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어요.”

“그럼 섬이 살아 있기라도 하단 말이야?”

“그래서 재미있다는 겁니다. 뭔가 굉장한 비밀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 말에 자레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가 알아 오라고 한 건 성녀와 에포메니에 대한 것이었는데, 퀴나에는 엉뚱한 걸 들고 와서는 혼자 신이 나 있었다.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 물론 성녀와 에포메니에 대해서도 계속 조사를 하고 있어요. 제가 놀고 있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험악한 분위기를 알아챈 퀴나에가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보름 동안 도서관에 처박혀서 알아낸 건 그 나클인지 뭔지 하는 괴상한 섬에 관한 것뿐이다, 이거지.”

“모름지기 사건을 조사하려면 원인부터 알아야….”

결국 자레스가 폭발했다. 그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하키르의 아들 퀴나에. 오늘부터 2주일의 시간을 더 주겠다. 에포메니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들고 와. 그렇지 않으면 다리에다 돌덩이를 묶어서 나흐르 강에다 던져 버리겠다.”

“2주일은 너무합니다, 전하!”

“네가 보름 동안 이상한 곳을 긁지 않았다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떠들 시간에 어서 나가서 뛰어다녀라, 퀴나에!”

***

한편 자레스가 퀴나에와 만나고 있던 그 시간, 아넬은 침소에 남아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밖의 상황을 모르니 불안이 점점 커져만 갔다.

키리아 성녀가 죽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차대 성녀가 나타나지 않으니 아마도 카비르를 비롯한 아르드 전체가 동요하고 있을 것이다.

성녀는 단순히 치료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 세계에 남아 있는 메타의 상징이고, 신이 아르드에 내려 준 은총의 결정체였다. 그런 성녀가 사라지면 아르드를 잇고 있는 정신적인 연대는 끊어지고, 사람들의 믿음은 붕괴된다.

태곳적부터 아르드는 메타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져 왔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바로 성녀였고, 그렇기에 그들은 신의 은혜와 심판을 믿으며 자신들의 삶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 세계를 주관하는 신의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지고 쉽게 무너질 터다.

그러기 전에 성녀가 나타나야 했다. 메타의 힘이 아직도 아르드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붕괴하여 가는 인간들의 정신을 다시 메워 줘야 했다.

“메타시여….”

아넬이 격자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지만 오늘도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도할 때마다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단다. 하지만 나는 자주 그분의 힘을 느끼고 세계 곳곳에 메타의 힘이 넘쳐나는 것을 느끼지.”

키리아는 그렇게 말했었고 회귀하기 전, 성녀가 된 아넬은 분명히 키리아가 말한 것과 같은 경험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메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넘실대는 권능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댈 데가 없는 무력함에 아넬은 점점 지쳐 갔다.

아넬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나무로 된 격자창을 흔들어 봤다.

두꺼운 나무를 댄 창은 어지간한 장정의 힘으로도 부서지지 않을 성싶게 튼튼했다.

심지어 지금은 격자창 밖으로 덧창까지 덧대 놔서 그 사이로 연약한 햇빛만 살짝 새어 들어올 뿐,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식물을 발아시켜서 창을 뚫어 볼까?’

아넬은 시녀들이 가져다 놓은 과일 접시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접시에는 말린 무화과와 석류처럼 씨가 많은 과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석류를 발아시켜 덧창 사이로 발아시키면 격자창과 덧창을 한꺼번에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자레스의 사람들로 가득 찬 이 황자궁에서 성력만으로 탈출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밤에 몰래 탈출한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 시간에는 항상 자레스가 붙어 있었다.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마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며 그들이 점심거리를 들고 나타났다.

“오늘은 기운을 보충하시라고 특별히 고기 요리를 많이 가져왔어요. 보셔요, 이 소고기 소시지는 향도 좋고 맛도 좋답니다. 양고기를 곁들인 가지 요리도 아주 맛있어요.”

“치즈와 올리브도 맛있어요. 튀긴 빵에 곁들이면 아주 맛있을 거랍니다. 이 무화과잼도 아주 달콤하니, 빵에 발라서 드셔 보세요.”

“다 드시고 나서는 소금을 넣은 요구르트도 드셔 보세요. 차게 보관해 둔 거라 아주 신선하고 시원해요.”

푸짐한 진수성찬이었지만 보기엔 좋아도 식욕은 돌지 않았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자레스가 또 옷을 벗기겠다고 협박을 할지 모르니, 아넬은 마지못해 음식을 들어야 했다.

“빵과 요구르트만 먹을 테니 나머지는 당신들이 드세요.”

아넬은 원래 고기를 잘 먹지 않았다. 원체 먹는 양도 적어서 남기기 일쑤였기에, 시녀들은 눈치를 보다 곧 그녀가 건네준 요리 접시를 받아다 한구석에 앉아 신나게 나눠 먹기 시작했다.

아랫것들은 맛볼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체면도 버린 채 고기를 입에 넣고, 식구들에게 가져다줄 음식까지 싸는 시녀들을 보던 아넬이 한숨을 쉬며 튀긴 빵 한 조각을 찢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빡빡해진 목을 축이기 위해 요구르트를 한입 머금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입술에 이질적인 촉감이 느껴졌다.

‘뭐지?’

시녀들이 넣은 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 거라면 이렇게 비밀스럽게 요구르트 잔에 넣어서 전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넬은 시녀들이 음식을 나눠 먹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조심스럽게 잔에 든 쪽지를 빼서 이불 밑에 밀어 넣었다.

얼른 나머지 식사를 마친 아넬은 시녀들에게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 달라 부탁했다. 그녀들이 남은 요리들을 들고 사라지자 그제야 아넬은 숨겨 놨던 쪽지를 꺼내 읽었다.

쪽지는 얇은 양피지에 칼집을 내서 글자를 새긴 것이었다. 요구르트를 머금고 살짝 퉁퉁해져 있었지만 읽어 내기엔 어렵지 않았다.

‘이렌시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발신인이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성녀님이 자레스 황자의 침소에 갇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녀가 있어야 할 장소인 이렌시아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탈출을 원하면 이 양피지의 아래쪽에 그러겠다는 글을 적어 같은 방법으로 돌려달라고만 쓰여 있었다.

‘누구일까?’

자레스가 아넬이 성녀인 걸 밝혔을 리는 없다.

‘설마 카에티?’

카에티는 접견실에서 그녀가 여자의 몸으로 바뀌는 걸 봤고, 자레스가 그녀에게 에포메니라 외치는 것도 들었다.

아마도 방해가 되는 그녀를 치우려는 거겠지. 자레스와 혼인하기 위해 아넬을 약쟁이 오라버니에게 넘길 정도였으니, 지금 아넬을 자레스와 떼어 놓기 위해 혈안이 돼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녀인 걸 알고서는 죽일 수 없으니, 이렌시아로 돌려보내는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어떻게 모든 사고가 자레스 황자를 중심으로만 움직이는 걸까?’

아넬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또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아넬이 성녀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카에티는 자레스의 아내로만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여자였지만,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해서 카에티를 어리석다 여길 수는 없었다.

어떤 면에선 오히려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카에티도, 어쩌면 자레스도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난다.

그녀는 성녀인 이상 강제로 메타에게 메어 있어야 했고, 그렇기에 자레스를 향해 덩굴처럼 뻗어 가는 마음을 끝내 잘라 내야 했다.

아넬은 그 사실이 처음으로 서러워졌다.

그녀에 비해 자레스와 카에티는 어떤가. 마음껏 제 마음을 드러내고, 감정을 폭발시키고, 질투하고, 화를 낸다. 그렇게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이 아닌 걸까.’

맞다. 그녀는 성녀다. 오직 메타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여자. 감정을 깎아 내고, 기계처럼 자신의 수명을 잘라 내 권력자들에게 바치는 존재.

말하자면 그녀는 마치 비누 같은 여자였다. 숱하게 마모되고 깎이다, 새 에포메니가 나타나면 키리아처럼 거품이 돼 사라질 운명이다.

갑자기 그 사실이 불쑥 다가오는 바람에 아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든 게 허무하고, 억울해졌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베풀어 왔던 것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뭐라 생각하고 살아왔던 걸까.

성녀니까 당연하다 생각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소모품이라는 걸 잘도 포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키리아 님도 이런 운명을 알면서 순응하신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넬은 그녀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아넬이 무사히 성녀로서 오래 살았다면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대의 성녀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왔었다. 신이 주신 생명을 남을 위해 베풀고, 그 힘을 다음 성녀에게 이어 준다.

메타의 은총은 그렇게 대를 이어 내려온 것이었고, 성녀들은 알면서도 그 길을 따라갔다.

그 가련한 희생으로 아넬 역시 태어난 것이다. 아넬은 비로소 그 사실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서 걸어간 그 길을 그녀만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떠나야 한다.’

이번으로 세 번째 탈출 시도였다.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이번만큼 이별이 절실한 적도 없었다.

‘신전으로 가면 반드시 자레스 황자가 쫓아오겠지. 이렌시아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이전엔 맹목적으로 탈출에 집착했지만, 이제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다른 나라에 먼저 도움을 청해 신전의 병력을 늘리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러면 전쟁이 터진다.

아르드의 여러 나라는 중립국인 이렌시아에 성녀를 가둬 놓고 공동으로 이용하기로 정했다. 그런 암묵적인 규율을 자레스가 어기면, 왕국과 제국들은 그를 막기 위해 전력을 동원할 것이다.

아직 황태자도 아니고 황자에 불과한 자레스가 그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전쟁 중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아넬도 견디기 어려웠다.

‘일단은 타네시로 가자. 거기라면 카에티의 연고도 있을 테고. …성녀라는 걸 알게 됐으니 카에티도 날 함부로 죽이려 들지는 않을 거야.’

궁리 끝에 아넬은 그렇게 결심했다.

뭣보다 자레스를 떠나는 게 중요했다. 그러니 탈출부터 한 뒤, 당분간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미래를 생각해야겠다.

아넬은 눈물을 닦아 내며, 카에티가 말한 대로 손톱으로 양피지를 꾹꾹 눌러 답을 썼다.

***

알수무는 다행히도 한 차례 하인과 노예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간 폭풍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

독살 사건은 황자궁 내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살자를 솎아 내기 위해 아주 믿을 만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하인들이 쫓겨났다.

노예들은 사브와 샤이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졌는데, 그 와중에 알수무가 잘리지 않은 건 그녀가 퀴나에의 추천으로 이 궁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원래 제 발바닥 밑은 못 보는 법이지.’

퀴나에가 사람을 고를 때는 먼저 추천인을 본다. 제국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족 사회에서 국가로 발달한 카비르는 혈연이 가장 중요했다.

잇속에 따라 주인을 옮겨 다니면 평판이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출셋길에서 멀어진다.

이득은 상황에 따라 바뀌지만 혈연은 죽지 않는 이상 끊을 수가 없는 것이라, 카비르인들은 씨족 바깥의 이방인을 배척하는 대신 피로 이어진 가족을 지키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카비르인들은 절대 혈육은 배신하지 않았다.

정작 카비르 황실은 피를 섞은 형제들끼리 배신하고 서로를 죽이는데, 그와는 정반대인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퀴나에는 그의 혈연들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골라서 채용하거나, 아니면 그 혈연의 혈연을 데려왔다.

물론 방계나 먼 친척을 데려오다 보면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친척의 추천장 하나만 받아서 사람을 쓰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알수무는 그걸 이용했다.

추천장을 받아 마디나로 올라오던 퀴나에의 친척을 살해하고 추천장을 가로챈 것이다.

자레스가 아넬을 납치하기 위해 이렌시아로 가기 전, 막 카에티와 자레스 사이에 혼담이 오고 갈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추천장 덕분에 알수무는 아랫것들이 다 갈려 나가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았고, 막 제 손에 돌아온 아넬의 답변을 들고 히죽히죽 웃으며 자레스의 집무실로 가고 있었다.

“이렌시아로 고이 돌려보내 줄까 봐? 그랬다간 자레스 황자가 죽어라 쫓아가겠지. 그걸론 안 돼.”

그녀의 주인 카에티는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알수무에게는 아넬이 성녀란 건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고용한 수하라도 해치려는 상대가 성녀란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알수무는 카에티의 말대로 아넬을, 자레스가 데려온 이렌시아 출신의 정부로만 알았다.

“그 여자를 미워하게 해야 돼. 지금이야 미모에 눈이 멀어 열렬히 구애를 하겠지. 하지만 자레스 황자처럼 흉포한 남자는 자기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으면 미쳐 날뛰게 되어 있어.”

그건 옳은 말이다. 경험이 많은 알수무 역시 남자들의 그런 성정을 잘 알았다.

“황자를 거부하고 도망치려 한 걸 알게 되면 격분할 테고, 어쩌면 그년을 죽일지도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녀는 성력으로 자신을 치료할 수 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알수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카에티는 그렇게 생각했다.

죽지 않는 대신 자레스를 미워하게 될 테고, 자레스도 언젠가는 자신을 계속 거절하는 여자에게 질리고 말 것이다.

안 그래도 가까이할 수 없는 사이였다.

카에티는 그 벌어진 틈에 쐐기를 집어넣고 계속해서 벌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기어코 자레스의 곁을 차지하고 말 것이다.

직접 자레스에게 찾아가 쪽지를 보여 주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그보다는 남의 손을 통해 자레스에게 들어가게 하는 쪽이 좋다.

알수무는 2층에 있는 집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에 양피지를 떨어뜨렸다.

요즘 이 2층엔 자레스가 신뢰하는 자들만 드나드니 분명 그들 중에 하나가 이 양피지를 주워 자레스에게 바칠 것이다.

일을 마친 알수무가 곧 사라지자, 얼마 안 가 병사 하나가 교대를 위해 계단 쪽으로 왔다가 그 양피지를 발견했다.

그날 저녁, 양피지는 자레스의 손에 들어갔다.

***

양피지를 받은 자레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숨은 그대로 멎었다.

까만 어둠이 눈앞을 가로막은 듯했다. 그의 일생에 때려 부수고, 뚫지 못한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비로소 ‘절대’라는 것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녀는 성녀라고.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은 더욱더 이렌시아로 돌아가려 애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납득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의 행동을 인정은 할 수 있어도 새빨간 분노가 치솟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를 어떻게 감히 그가 논할 수 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 말부터 튀어나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씐 망령이 그를 제멋대로 조종했다.

그는 기대했던 것이다.

그가 퍼붓는 사랑에 아넬의 마음이 열렸기를. 그가 주는 것의 무게를 제멋대로 무겁게 재단하고, 그에 상응해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억울함에 갑자기 분노가 머리를 뚫고 치솟았다.

격분한 그가 사나운 기세로 침소의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갔다.

아넬은 장의자에 기대 반쯤 누워 있었는데,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분노로 달아오른 그를 보자마자 백랍처럼 굳어져 벌떡 일어났다.

‘들켰구나!’

바로 직감했다. 그게 아니면 자레스가 아넬에게 이리 분노할 일이 없었다.

자레스는 막 고로에서 꺼낸 무쇠처럼 새빨갛게 달궈져 있었다. 열화 같은 분노가 어디 튀어 나갈 데도 없이 그 안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그렇다고 이 분노를 아넬에게 터뜨릴 수도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 광기로 머리가 돌아 버리는 듯했다. 사방이 빙글빙글 돌고 벽이 그를 향해 죄어 왔다.

아니다, 그를 조르는 것은 아넬이었다.

항상 그녀가 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냉철하다 믿었던 그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형편없는 남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차라리 아넬이 없었더라면.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이렌시아에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후회와 미련, 그러함에도 삭여지지 않는 애정이 뒤섞여 더 뜨거운 분노로 기화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돼서 이젠 뭐가 뭔지도 알 수 없게 됐고, 당장 아넬의 목을 조르고 살려 달라는 말을 듣고 싶어졌다.

살려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기어코 그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넬이 의자에서 벗어나 문을 향해 달려갔다.

차라리 조용히 입을 다물거나, 겁먹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면 나았을 테지만, 아넬은 그 시점에서 최악의 선택을 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그를 피해 달아나려 한 것이다.

“아넬!”

그가 벼락같이 포효했다. 고함이라기엔 오히려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지만, 아넬의 귀엔 그저 무섭기만 했다.

귀를 막으며 도망치려는 아넬의 허리를 낚아챈 자레스가 그녀를 장의자에 집어 던졌다.

“아악!”

아넬이 장의자에 부딪혔다 튕겨 나왔고,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필 의자에서 튕겨 나오며 부딪힌 곳이 테이블 모서리였다.

튼튼한 나무 테이블에 부딪힌 아넬의 정강이뼈가 부러지면서 그녀의 다리가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렸다.

“아아아아악!”

극심한 고통에 아넬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너무 지독한 통증이라 아넬은 이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녀를 자레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가 저지른 처참한 짓에 몸서리가 쳐졌다. 앞뒤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끔찍한 자기혐오가 들어찼다.

여자를 때렸다.

그의 손으로 때린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제 손으로 다치게 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레스는 제 손을 들여다봤다.

이미 피를 묻힌 살인자의 손이다.

그를 학대했던 두 명의 형과 두 명의 동생을 죽였고, 한 명은 결투로 다리를 잘라 불구로 만들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피가 그의 온몸에 덮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피의 무게보다 지금 그가 다치게 한, 단 한 사람의 상처가 더 무거웠다.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너무 증오스러웠다.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 내려 자레스는 아넬에게 달려들어 강요했다.

“성력을 발휘해!”

“…못 해요.”

아넬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죽어 가는 자레스를 살릴 정도면 부러진 뼈를 붙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터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자레스의 잘못만큼 고통받겠다는 것처럼 치료를 거절하고 있었다. 그게 자레스를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왜 못 해! 나에게 했던 것처럼 성력으로 당신을 치료해!”

“안 돼요. 내 힘은 더 귀한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 해요!”

하려고 들면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성징이 나타났을 뿐 완전히 성인이 된 것이 아니다. 성력을 발휘하면 그녀는 또 성장할 테고, 자레스는 수상한 걸 눈치챌 것이다.

차라리 고통을 감내하고 말지, 절대 성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치료해! 당신 몸을 고치라고! 아넬!”

“흐, 으으으윽!”

자레스가 엎드리다시피 해서 애원했지만, 아넬은 엎어지며 신음만 흘릴 뿐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미워서 이러는 것일까. 그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비열하고 처참한지 알려 주려고 일부러 그 앞에 고통을 전시하는 것일까.

그런 의도라면 성공했다. 자레스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죄의 무게가 태산처럼 그를 내리눌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의원! 의원을 불러! 빨리!”

결국 자레스가 문을 박차고 나가 외쳤고, 그사이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아넬은 기절하고 말았다.

***

야밤이었지만 의원이 즉각 달려왔고, 퀴나에도 함께 왔다.

모든 사실을 들었을 때 퀴나에의 눈빛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었는데, 그런 눈으로 그를 꼬나보기만 할 뿐 입은 열지 않아서 자레스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미안하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의사의 처치가 끝난 뒤 아넬이 시녀들에게 들려 2층 한복판에 있는 귀빈실로 옮겨진 뒤에도 자레스는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방의 문이 닫히고 사라지는 여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처참한 얼굴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사과하는 법을 몰랐다.

자레스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빼앗는 거나 훔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몰랐다.

노예였던 그는 가진 게 없었고, 힘으로 뺏는 것 말고는 원하는 것을 얻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자레스는 처음 만난 벽 앞에서 좌절하고 당황했다.

사랑이란 부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잘하는 모든 수단이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기에 자레스는 그가 그토록 얻고 싶어 하던 제국 크기만큼의 거대한 절망과 공허감을 느꼈다.

너무 사랑하면 오히려 그 상대 앞에서 무력해지고 만다는 걸, 자레스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성녀도 여자입니다, 전하.”

처소로 들어온 자레스를 따라 들어온 퀴나에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평범한 여자라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좋아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여자의 다리를 부러뜨려요? 그것도 심지어 성녀님을?”

퀴나에가 말을 하다 말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속으로 아주 심한 욕을 지껄였다는 것을 자레스는 알아챘다.

“황자 전하는 죽어서 지옥에서도 제일 깊은 밑바닥에 떨어질 겁니다. 아, 물론 여태 저지른 짓만으로도 한 중간층 정도는 가겠지요. 제가 거기까지는 같이 가서 친절하게 배웅해 드리지요.”

“…내가 바보라는 건 나도 안다.”

“알아요? 아는 사람이! 환심을 사도 모자랄 판에 성녀님을 다치게 해요?”

눈으로 쌍욕을 할 수 있다는 걸 이제 알겠다. 번들거리는 퀴나에의 눈에서 자레스는 그걸 읽었다.

“이런 젠장! 제 마음 안 받아 준다고 때리고, 미안하다 사과도 안 하고! 당신이 무슨 애새끼입니까? 마음대로 안 되면 다 때려 부수게?”

황자 앞에서 감히 욕을 퍼붓는데도 자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독설이 다 맞는 말이었고, 자레스는 옳은 말에는 저항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퀴나에도 아넬이 도망치려 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자레스가 격분한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짓이 잘못이 아닌 건 아니었다. 그건 아주 치졸하고 비겁하며 야만적인 짓이었다.

농담 삼아 자레스를 야만의 수호자라고 비아냥대긴 했지만, 그건 그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나 가치 있는 것이었다.

“후우, 이보세요, 불쌍한 황자님. 여자의 마음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성녀님도, 성녀이기 전에 일단은 여자란 말입니다.”

퀴나에가 지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짐짓 가르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작 그러는 퀴나에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제멋대로 밀어붙이는 자레스보단, 이론으로 연애를 배운 퀴나에가 더 나았다.

“제발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전하. 거센 바람은 꽃을 꺾지만, 따뜻한 햇볕은 꽃잎을 틔운단 걸 아셔야 합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단 걸 명심해야 해요.”

자레스는 짜증 나는 눈으로 퀴나에를 쳐다보긴 했지만, 꺼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태연한 척하지만, 그도 정말 간절하긴 한 것이다.

하여간 멍청한 인간 같으니.

***

“부러진 다리가 다시 붙으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마시고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의원은 통증을 줄여 주는 마취약을 처방하고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 처치한 뒤, 그렇게 당부하고 돌아갔다.

장의자에 부딪히고 쓰러지면서 엉망이 된 옷은 시녀들이 와서 갈아입혀 줬고, 아넬은 지친 마음으로 침대 머릿장에 놓은 쿠션에 기대 있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자레스가 나타났다.

찬바람을 등에 지고 나타난 자레스는 겨울바람만큼이나 싸늘한 표정이었다.

아넬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는 사이, 그의 턱짓 한 번에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이 싸늘한 적막이, 둘만 남겨졌다는 사실이 아넬을 두렵게 만들었다.

이번엔 그가 정말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차라리 그녀가 죽으면 아르드의 파멸은 막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앞에 목을 늘어뜨린 적도 있었다.

그때는 키리아가 살아 있었고, 그녀에게 미래를 맡길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녀가 된 아넬까지 죽은 뒤 이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그녀도 몰랐다.

한편 자레스는 아넬이 새파래진 얼굴로 벽에 달라붙는 걸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예전엔 그저 겁을 먹었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그를 무서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몰아간 게 자신이었기에, 자레스는 진창에 처박힌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아넬을 바라봤다.

퀴나에의 말이 맞았다. 그는 아넬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

툭하면 옷을 찢고, 그녀가 질색하는 장난을 쳤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한다고 목을 조르기도 했으며, 그러다 노예로 팔아 버렸다.

강제로 키스를 하다가 다음 날엔 카에티에게 줘 버리며 장난감처럼 취급했다.

그때는 몰라서 그랬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 이번만큼은 자신이 쓰레기란 걸 변명할 수가 없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해 달라고 조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에 대한 환멸이 쓴물처럼 올라왔다.

자레스는 그가 저지른 죄의 무게에 짓눌려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아넬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빛나는 초록색의 눈에 처음으로 그에 대한 공포가 아닌 것이 어렸다.

“당신을… 다치게 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폐부에서 끄집어낸 것처럼 묵직한 사과였다.

자레스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고 아넬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아넬은 그런 그가, 지금 이 상황이 기이했다.

성녀가 아니라 여자로서 사과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구애와 탐욕의 눈길을 받지 않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컷 냄새를 풍기며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도 자레스가 첫 번째였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남자로서 사과한 것도 모두 그가 처음이었다.

아넬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이 순간만큼은 성녀도, 뭣도 아니고 그저 여자가 된 느낌이다. 이런 느낌 자체가 아넬에겐 처음이었기에 그래서 낯설었다.

‘사과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잘못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원하는 건 항상 힘으로 뺏고 약탈하는 남자라 판단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넬 앞에선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고,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쳐든 그와 아넬의 눈빛이 마주쳤다. 살짝 경이가 서린 그녀의 시선에 자레스가 쓴웃음을 흘렸다.

“나를 잔인한 남자라고만 생각했군.”

그녀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냉혹했고 무자비했고 서슴없이 남의 목숨을 빼앗고 짓밟았다.

그런데 그런 그도 아넬 앞에선 무력해진다. 자레스는 이 달콤한 무력감을 이제는 인정하고 감내할 수 있게 됐다.

“그래, 맞아. 나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넬, 난 당신을 성녀로만 원하는 게 아니야. 그냥 욕구를 풀 상대로만 원하는 것도 아니야.”

그가 일어나더니 침대로 다가와 아넬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해.”

“흐윽.”

그 순간 아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참아야 하는데, 잘라 내야 하는데, 가냘픈 몸 안으로 간신히 갈무리하고 있던 감정이 가슴을 찢을 것처럼 튀어나왔다.

무서워해야 마땅한 남자. 지금도 그가 두려운데, 이 남자의 고백이 벼락처럼 그녀를 내리치고 천둥처럼 세게 심장을 흔들었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강제로 그녀를 범하던 자레스가 노예처럼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그에게 겁탈당하며 자레스를 저주하던 아넬이 그의 고백에 흔들리게 될 줄은 메타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시간을 거슬러 그녀를 되돌려 보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흐흑.”

흐느낌이 목구멍을 가르며 튀어나왔다. 숨겨야 하는데, 참아야 하는데.

누구보다도 예리한 눈이 그녀의 흔들림을 포착했다. 그의 눈에 희망이 서리기 시작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아넬은 자레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저는… 성녀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넬은 자레스에게 선언하는 척, 자신의 뼈에 그 말을 새기고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저는 메타만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자레스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 아넬은 그녀가 제 입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고백했다는 것을 알까?

메타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었다.

그녀도 사랑이란 감정을 안다는 걸 고스란히 알려 놓고서, 자레스가 속아 넘어갔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에포메니로만, 미래의 성녀로만 살아온 아넬은 여자로서는 애송이였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사랑을 모르면 가르쳐 주면 된다. 그리고 남자로서 처음 다가간 그를, 오직 그만을 보게 하면 된다.

갑자기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가 끓어 올라왔다.

아넬도 그를 원하기에 구해 준 것이라 억지로 이유를 붙여 가며 합리화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의 무력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반응을 보인 거라고 절망할 필요도 없어졌다.

지금 그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아넬의 모습이 진짜였고, 그는 드디어 실마리를 비춘 그녀의 진심을 게걸스럽게 물었다.

거대한 벽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그리로 새어 나오는 아넬의 진심을 더 크게 끌어낼 수 있다면, 그는 개처럼 그것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진창을 뒹굴고 채찍질을 당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시절만큼 힘들 것이다. 그를 돌아보지 않는 여자 앞에 노예처럼 비굴해지는 절망을 다시 겪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그는 ‘희망’이라는 달콤한 나락을 향해 기꺼이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

자레스는 황자궁의 창고를 열었다.

구매 담당관을 선발했고, 그 뒤로 온갖 값진 물건이 아넬의 처소로 들여졌다.

2층 귀빈실이 그녀의 침실로 개조됐고, 곁방을 터서 그녀의 유희실로 만들었다. 카비르 황족들이나 쓰는 귀한 카펫이 깔리고, 상아로 된 정교한 장난감과 책들을 채웠다.

유색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와 머리 장식 같은 것들은 수도 없이 선물했다.

황제의 여자들에게나 선물할 법한 진귀한 보석들이 보석함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날 정도로 바쳐졌지만, 아넬은 항상 흐린 얼굴로 곤란해할 뿐 기뻐하는 법이 없었다.

“얼굴만 예쁘지 사실은 미친 여자인가 봐.”

황자궁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

“아니면 혹시 황자 전하가 남의 여자를 데려온 거 아닐까? 애인이 따로 있어서 저렇게 전하를 거절하는 거 아냐?”

후자 쪽에 좀 더 설득력이 실렸다. 만약 그런 거면 아넬이 불쌍한 거다.

늘 창문만 바라보면서 바깥을 그리는 그녀의 모습에 시녀들은 아넬이 안됐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반면에 자레스가 이렇게 마음을 바쳐 구애하는데 그걸 몰라주는 그녀가 야속하다는 반응도 많았다.

다른 건 몰라도 자레스가 여자에게 이렇게 정성을 쏟는 건 처음이라,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황자궁 담을 넘어 황궁과 카비르 전체에 점점 퍼져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자레스는 밤이 되어 아넬의 침소로 찾아왔다.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자, 언제나처럼 자레스와 아넬 사이엔 불편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젠 그녀도 자레스가 찾아오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자레스는 공무가 끝나면 늘 아넬과 저녁을 함께하고, 하루 종일 뭘 했는지를 물어보고, 새로운 선물을 줬다.

자레스도 처음 해 보는 것이었고, 아넬도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레스가 정말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기에, 아넬은 점점 그 노력을 외면하기가 힘들어졌다.

“다리는 이제 아프지 않은가? 의원이 오늘도 왔다 갔다고 들었는데.”

“아직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아요.”

이만한 대화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자레스는 만족했다.

아넬이 자비로운 여자라서 다행이다. 아마 평범한 여자라면 그런 폭력을 휘두른 남자를 쉽게 용서하지않는 건 물론이고, 그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받아 냈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굴어 준다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무리 보상을 하고, 그녀를 기쁘게 해 주려 애써도 아넬은 반응이 없다.

그녀를 웃게 할 수 있는 건 이렌시아로 귀환시켜 주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건 자레스가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 아넬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걸 찾을 수 있다면, 자레스는 심장이라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은 괜찮은가?”

“그럭저럭이요.”

“그렇군.”

더 주고받을 말이 없었다.

아넬의 일과는 항상 비슷했다. 새 모이만큼 먹고, 유희실에서 책을 읽다가, 그러다 잠을 잔다. 죄수처럼 단조로운 생활이다.

자레스가 절대 방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넬이 그에 관해 뭐라도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자레스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없었다.

그래서 속이 쓰렸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한 번 그림자만 비춘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피곤해 보이는군.”

“…괜찮습니다.”

“자는 게 좋겠어.”

“괜찮습니다!”

또 침대를 같이 쓰려 들려고 할까 봐 무서워서, 이번엔 아넬이 서둘러 대답했다. 다리를 다친 탓에 자레스는 한동안 밤에는 함께 있지 않았다.

대신 시녀들이 그녀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밤을 새워 감시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자레스가 이대로 물러가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귀여워 보여 자레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예전 같으면 피하는 그녀에게 화를 냈을 텐데 왜 웃는 걸까.

그 바람에 아넬은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자레스는 그녀가 창피해서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의 웃음에 또 심장이 두근거린 걸 숨기려는 것이었다. 아직은 그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넬의 심정을 모른 채 자레스가 장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를 안아 들었다. 깜짝 놀라 버둥거리자 그가 속삭였다.

“다리 흔들지 마. 그러다 더 다치면 나중에 도망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잖아.”

자레스가 그렇게 말하자 비로소 얌전해진다.

말만 이렇게 하지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 여전히 헛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난다.

하지만 이렇게 아넬을 기만하면서 좋을 대로 다루는 그 역시 그녀를 탓할 상황은 아니다.

지금은 그저 순순히 그에게 안긴 아넬의 부드러운 몸과 체취를 말없이 향유하는 데 만족할 뿐이었다.

아넬을 침대에 눕힌 자레스가 다시 시녀를 불렀다.

“침구를 가져오너라.”

아넬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는 가운데 노예들이 푹신한 요와 이불, 베개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아넬의 침대에 그것들을 까는 대신 침대 곁 바닥에 정갈하게 편 뒤 그대로 물러갔고, 아넬은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자레스를 쳐다봤다.

“나는 바닥에서 잘 테니까 당신은 안심하고 자도록 해.”

그가 말하더니 신발을 벗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아넬은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나랑 같이 자려던 게 아니었나?’

하지만 자레스는 딱히 침대에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와 열정적인 밤을 보내고픈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밀어붙이지 않는 그를 보는 게 참 기이했다.

그가 침소를 같이 쓰는 게 불편해야 했는데, 지금은 등불 하나만 남겨 둔 채 희미한 인영만 남긴 채 돌아누운 자레스를 보는 게 불편했다.

‘내가 대체 뭐라고….’

그가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건 아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금은을 보내고 보석을 선물해도 열리지 않던 마음이 노예처럼 바닥 잠을 자처하는 모습에 금이 갔다.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다가, 아넬은 흠칫 놀라 손을 거뒀다.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보여야 할까.

예전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경계는 느슨해지고, 그리로 새어 나가는 자신의 진심을 막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벌어진 틈으로 자레스가 스며들었다.

‘메타시여….’

기도해도 이젠 메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웃는 모습만 자꾸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