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자레스가 새로 들인 정부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천사처럼 아름답다는 평가가 점점 과장되더니 눈을 마주치면 기절해서 쓰러진다느니, 걸음 딛는 데마다 꽃이 핀다느니, 말을 할 때 보석이 튀어나온다느니 하는 엉뚱한 소문까지 퍼졌다.
물론 그런 소문들은 대개 농담으로 치부됐지만, 자레스의 새 여자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평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괴짜라는 것도.
“밥을 안 먹는다며?”
“아무것도 안 먹는대. 굶어 죽을 생각인지, 식사는 물론이고 물도 안 마신대. 혹시 황자 전하가 남의 여자를 데려온 거 아냐? 그래서 저렇게 거부하는 거지?”
“아니, 그런데 이렇게 되면 카에티 님은 어떻게 되는 거야?”
갖가지 구설이 횡행했다.
적어도 식사를 거부한다는 소문은 맞았다. 그녀가 자레스의 처소에 거하게 된 다음 날 저녁까지, 아넬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넬은 침대를 벗어나 장의자에 기진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나마 자레스가 나타나지 않는 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그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위협할지 몰라, 아넬은 긴장 속에 있었다.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하는 걸 보면 적어도 자레스는 아니라서, 아넬은 힘없이 들어오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목욕통을 든 하녀들이었다.
“이게 뭔가요?”
“몸을 씻으셔야지요, 마님. 황자 전하께서 제대로 의장을 갖추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답니다.”
“피, 필요 없어요.”
아넬도 몸을 단정히 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자레스의 처소에서 살을 드러내고 몸을 씻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은 목욕하는 게 자레스를 위한 것처럼 비춰질까 봐 더욱 싫었다.
“죄송합니다, 마님.”
하지만 하녀들도 만만치 않았다.
“꺄악!”
하녀 둘이 달려들어 아넬의 옷을 벗겼고, 그러는 사이 다른 하녀 한 명이 목욕통에 따끈하게 데운 물을 부었다. 이어서 아넬이 강제로 목욕통에 던져졌다.
오랫동안 부엌일에 단련된 하녀들의 힘을 아넬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체념해서 그냥 내버려 두자 하녀들이 그녀의 몸을 씻기고 향유를 바르고 이어서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하녀가 가지고 온 비단옷을 본 아넬은 더욱 절망했다. 옷만 호화로운 게 아니라 함께 걸치라고 들고 온 보석들까지, 성녀가 아니라 귀부인에게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자레스의 여자가 아니었다. 성녀는 누군가의 여자로 살아선 안 됐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그녀더러 자레스의 여자로 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미래를 보지 않았더라도 반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넬은 어찌할 바를 몰라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그러자 몸에 더욱 힘이 빠져 장의자에 누워 버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쳐다만 보던 하녀들 중 한 명이 달려가 이 사실을 퀴나에에게 보고했다.
***
“식음을 전폐했다고?”
“전폐는 무슨, 그래 봤자 하루 정도 굶은 것뿐인데요, 뭐.”
퀴나에는 대수롭지 않게 그리 말했지만, 자레스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화가 난 자레스가 벌떡 일어나자, 퀴나에가 재빨리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전하. 평범한 여자는 몰라도 상대가 에포메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슨 말이냐?”
“평범한 여자라면… 아니, 그냥 남자인 게 차라리 낫죠. 차대 성녀를 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
“성녀가 남자와 관계했단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유래가 없는 일이고, 사내들이 그동안 성녀를 여자로 대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거란 뜻입니다.”
“…해 보지 않았으니 아무도 모른 거겠지.”
“전하!”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 말만 남기고 자레스는 집무실을 나와 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사람의 기척이 없어 자레스는 놀랐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하녀들이 방 안에 불을 밝혀 놨는데, 그 불빛에 아넬이 장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자레스는 불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그녀의 금발을 한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울었던 건지 뺨이 부어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마치 날개처럼 그녀의 눈 밑을 덮고 있었고, 그 아래로 눈물이 말라붙은 흔적이 보였다.
‘젠장.’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불이 끓는 것 같았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여윈 팔목을, 축 늘어진 목덜미를 더듬고 싶었다.
아넬을 남자로 알았을 때는 간신히 자제하고 있던 선이 끊어졌다. 지금 자레스는 그녀를 안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소 거칠어진 숨결이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자레스는 조심스럽게 아넬의 곁에 앉았다.
너무 지친 나머지 아넬은 장의자 팔걸이에 얼굴을 기댄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고, 그러느라 자레스가 다가온 것도 몰랐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자레스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자 그녀의 몸이 한 뼘 안 되는 거리로 가까워졌다.
그녀를 안고 싶은 심정에 절절할 정도로 애가 탄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건드릴 수 없었다.
어느새 아넬은 그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뭔가가 돼 있었다. 그건 그녀가 에포메니라서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 깃든 감정이 다른 색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감히 손댈 수 없어 자레스는 그녀의 몸을 더듬는 대신 가만히 손끝으로 목덜미 위로 늘어진 긴 머리카락 끝을 만졌다.
그 작은 기척마저 예민한 아넬이 금세 알아챘다. 손끝이 스치는 느낌에 아넬이 눈을 떴고, 바로 곁에 자레스가 있는 걸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장의자 한구석으로 물러나며 몸을 웅크렸다.
마치 벌레라도 만진 것처럼 꺼림칙한 반응에 자레스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황자들에게 굴욕을 당할 때는 차라리 싸늘하게 웃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제 안에 갈무리해 둔 흉포함이 당장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아넬이 그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들끓는 이 감정에 보답받고 싶었다. 항상 차가운 이성의 칼날 안에 묶여 있던 난폭한 감정들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왜 식사를 안 하지?”
“…먹고 싶지 않아요.”
“내가 주는 건 아무것도 손대고 싶지 않은 건가?”
아넬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분노가 불쑥 튀어나왔다.
왜 이 여자 앞에선 약한 짐승을 괴롭히는 어린아이처럼 난폭해지는 걸까. 기대에 보답받지 못했던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아넬에게는 한 발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쥐고 강제로 입을 벌려 음식을 쏟아붓고 싶은 심정을 자레스는 간신히 참았다.
“내가 그렇게 미운가? 당신을 노예 취급하고, 마구 대해서?”
그의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아넬은 그에게 겁탈당한 뒤에도 그를 두려워만 했을 뿐, 미워한 적은 없었다.
끔찍한 경험을 하게 한 상대인데도 그랬고, 지금에 와선 두려움도 희석돼 오히려 연민보다 진한 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게 두려웠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에요. 나는….”
잠시 망설이던 아넬이 대답했다.
“나는… 누군갈 미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 자비의 성녀님이다, 이건가?”
자레스가 코웃음을 쳤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이처럼 쓰게 들릴 줄은 몰랐다. 미워 마땅한 자이나 신의 사랑으로 봐준다는 걸까.
쓰레기만도 못한 연민에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다. 자레스가 원하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베풀어 주는 사랑이 아니다.
남과 똑같이 대할 거라면 차라리 특별히 미움을 받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당신이 성녀라서 날 살렸다는 거로군. 누구에게나 자비로워서 말이지. 참 고맙기도 해라.”
전혀 고마운 말투가 아니라서 아넬은 움찔거렸다. 기세를 탄 자레스가 내뱉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난 사랑을 나눠 받고 싶지 않아.”
“자레스 황자. 이제는 알지 않습니까. 나는… 에포메니입니다.”
“그게 뭘?”
“황자!”
“당신이 세계를 위해 희생한다 해도 뭐가 돌아오지? 잘난 성력을 쏟아부으면 보답을 받기라도 하던가?”
“성녀는 제 사명입니다. 보답을 받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사명? 가진 건 그저 성녀라는 명예뿐이지, 실상은 신전에 갇힌 죄수가 아닌가. 왜 그런 자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려는 거지? 그놈의 메타 때문에?”
갑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던 상식들이 죄다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마주하는 것 같다.
성녀라는 이름의 죄수.
자레스의 비아냥을 반박하지 못하는 건 그녀가 이미 자유를 맛봤기 때문이라는 걸, 아넬은 비로소 깨달았다.
세 살 때 신전에 들어온 이후로 신전에 갇혀 사는 삶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제 신전 밖의 삶을 알아 버린 그녀가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레스는…? 과연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그를 잊고 살 수 있을까?
너무 혼란스러워서 오히려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기분이다. 어지러운 실타래들이 진흙과 섞여 머리가 있을 자리에 박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넬은 어느 순간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장의자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은 뒤였다.
깜짝 놀라 일어나려는 순간 자레스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입술이 내려왔고, 그 뜨거운 것이 아넬의 발등에 닿았다.
‘헉…!’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밀어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강제로 키스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거절하기 힘들었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자레스가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계속해서 촘촘히 입술을 대며 아넬의 정강이를 따라 올라왔다.
그러자 그녀의 몸 안에도 서서히 뜨거운 것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일찍이 느껴 본 적이 없는 자극이었다.
턱 끝이 떨렸다.
키스를 당할 때와는 다른 감각이 그녀를 가득 채워서 아넬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에 최면제가 발라져 있는 걸까? 아니면 무릎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그의 타는 듯한 눈빛이 그녀를 마비시킨 걸까?
아넬은 마치 화살에 맞은 여린 짐승처럼 그 자리에 꼼짝없이 못 박혔다.
어느새 치맛자락이 무릎 위로 올라갔고, 촉촉한 입술은 둥그런 등성이를 넘었다. 그와 함께 몸이 확 뜨거워졌다.
“안… 돼요.”
듣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귀머거리가 된 것 같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종아리를 움켜쥐더니 부드럽게 위아래로 문질렀다. 마찰열에 몸이 타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 손이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와 아넬의 치맛자락 안으로 들어왔다.
“제…발. 제발!”
아넬이 울먹였지만 자레스는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그녀의 애원을 들어주지도 않은 채 마지 제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묵묵히 움직였다.
창문 밖으로 새하얀 섬광이 가득하던 게 생각났다. 그녀의 영혼이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메타 앞에 섰던 것도.
그와 같은 일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아넬은 필사적인 심정으로 그를 밀어내려 팔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커다란 노크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전하!”
퀴나에의 목소리였다.
“전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모쪼록 나와 주십시오!”
자레스는 격노했지만 퀴나에가 이 늦은 시간에 처소의 문을 두드릴 정도면 정말 화급한 소식을 가져왔다는 걸 인식할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무슨 일이냐?”
자레스는 아넬을 내버려 둔 채 문을 반쯤 열었다. 퀴나에가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아넬이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지만,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자레스가 퍼뜩 뒤를 돌아보며 묘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기에, 아넬은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
카에티가 황자궁에 다녀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오늘도 카에티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도 눈앞에서 노예 파이디가 여자로 변하는 광경을 본 기억이 생생했다.
사람의 몸이 그렇게 갑자기 변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남자였던 노예가 여자로 변했고, 자레스는 그런 아넬을 붙잡고 에포메니냐고 물었다.
‘에포메니라니! 왜 카비르에 에포메니가 있는 거지? 아니, 그전에 에포메니는 원래 그렇게 남자였다가 여자로 변하는 건가?’
남장을 했다는 추측이 뒤이었지만 그래도 수수께끼투성이인 건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자레스가 소문내지 말아 달라는 서신을 보내왔기에 일단 입을 다물고는 있지만, 자레스와 에포메니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속이 뒤집혀 미칠 지경이었다.
보아하니 자레스도 아넬이 여자라는 건 이제야 안 것 같다. 남자로 알았을 때도 그렇게 흔들렸는데, 여자인 걸 알았으니 금제할 선이 없어진 것이다.
자레스가 에포메니에게 달려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에포메니라면 이뤄질 수 없는 사이잖아.’
에포메니가 남자와 관계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성녀는 언제나 절벽의 꽃이었고, 남자들의 손을 타지 않아야 했다.
그런 이유로 성녀를 이렌시아의 신전에 평생 가두는 게 아닌가.
어째서 에포메니가 노예로 전락해 카비르까지 왔는지도 모를 일이나, 언젠가는 이렌시아로 돌아가야 할 몸이었다. 그를 떠올리자 비로소 카에티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또 다른 가정이 떠올랐다.
“에포메니를 데리고 있으면…. 자레스 황자는 황위에 한발 더 가까워진다. 어쩌면 황제가 될지도 몰라.”
방 안을 부산하게 서성거리던 카에티가 문득 중얼거렸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의 씨앗이 돼서 카비르가 전화에 휩싸일 수도 있어. 어떻게 해야 하지?”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에포메니는 자레스에게 있어 뜨거운 감자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손이 데일 것이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미묘한 존재. 에포메니는 그런 상대였다.
“아가씨, 16황자 전하께서 또 사람을 보내오셨습니다.”
혼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데 부리는 시녀가 와서 알렸다.
“들여보내라고 해.”
“그게… 들어오진 않고 서신만 전달하고 갔습니다.”
“뭐야?”
이건 경우가 아니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서신만 보낸 걸 이해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연락을 할 게 있으면 정식으로 사람이 와서 서신을 건네고 답을 받아 가야 했다.
그런데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갔다는 것은, 답을 구할 필요가 없이 통보하겠다는 뜻이다.
모욕적인 동시에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시녀가 가지고 온 서신을 뜯은 카에티는 경악했다. 자레스가 혼인 무효를 선언했다.
그동안 오간 혼담을 없던 일로 하고 그 대신 우스라에 상당한 수준의 보상을 한다는 것이었는데, 내용을 읽던 카에티가 그만 화가 나서 서신을 바닥에 던지고 밟아 버렸다.
“아, 아가씨. 전하께서 보낸 서신을 그리 훼손하면 안 됩니다!”
“안 돼? 뭐가 안 돼! 자레스 황자가 나를 이렇게 모욕했는데, 뭐가 안 돼! 아아아악! 자레스! 내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 알아?”
그렇다면 우스라의 카에티를 너무 쉽게 본 거다. 그녀는 이런 모욕을 당하고 물러날 성격이 아니었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 이 수모를 갚아 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밀쳐 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카에티는 가눌 수 없는 분노로 씩씩댔다. 편지를 발로 밟은 걸로도 모자라서, 방 안에 있는 집기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 새로 사들인 값비싼 도자기는 또 깨져 나갔고, 걸개 장식이 뜯어져 나갔으며, 그도 모자라 서신을 들고 온 시녀의 얼굴을 할퀴고 머리를 뜯어 분풀이를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카에티.”
마침 그녀를 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 우스라 부족장이 나타났고, 그는 엉망이 된 방 안과 시녀의 얼굴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 역시 막 같은 내용의 서신을 전달받았기 때문에, 분명 딸이 광분하고 있을 걸 예상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좀 자중하지 않고선.”
“제가 지금 분을 삭일 처지입니까? 자레스 황자는 저를, 우리 부족 전체를 모독했어요! 이렇게 물러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황자가 엄청난 이권을 약속했다. 그가 주겠다던 이권 목록은 읽지 않았느냐?”
“그게 제 명예를 되살려 주나요? 저는 황자에게 차인 여자로 낙인찍혀서 아무에게도 시집가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자레스 황자에게서 양도받은 재산이라면 너는 시집을 두 번 가고도 남을 거다. 꼭 황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마디나로 진출할 수 있어.”
“황후가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난 황후가 아니면 절대 만족할 수 없다고요!”
“카에티. 그건….”
카비르의 황제는 황후를 두지 않는다.
카비르의 혼인법상 아내는 맞을 수 있을 만큼 맞아들일 수 있지만, 적장자가 황위를 상속하는 대신 황자들끼리 싸워 황위를 차지하기에 황제는 아내는 여럿 맞아도 정식 황후는 책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카에티는 황후가 되길 꿈꿨다.
자레스라면 출신에 문제가 있기에 그 대신 자신을 황후로 받아들일 거라 믿었고, 이제 그것은 꿈이 아니라 확신이 돼서 고스란히 자레스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중재를 요청할 거예요! 폐하께서도 눈이 있으시다면 황자가 보낸 혼서를 읽고, 우리의 혼약이 여전히 유효함을 선언해 주시겠죠!”
“카에티. 지금은 황제 폐하가 그런 데 신경 쓸 경황이 아니다. 어제저녁 이렌시아에서 새로운 소식이 왔어.”
“이렌시아라고요?”
“키리아 성녀가 죽었다. 황제께서는 황태자를 데리고 새 성녀의 배례식에 갈 거야. 후계자와 나란히 찾아가서 새 성녀에게 치유를 받고 건강한 몸이 돼서 돌아오겠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누가 황태자로 뽑히느냐, 각축전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까?”
***
보이지 않는 암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젯밤 궁에 날아온 급보를 확인한 황제는 자정이 되기 전에 재상을 불러 이렌시아로의 외유를 의논했다.
“전 세계 각지의 왕과 후계자들이 움직일 거다. 근 20년 만에 왕들의 회동이 열리겠군.”
성녀가 바뀔 때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됐다.
새 성녀의 배례식 때는 건강한 권력자들도 일제히 찾아온다. 새 성녀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례식에 나온 성녀의 성력이 가장 강력하다는 소문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새 성녀를 어느 특정한 나라에서 약탈해 가거나 뺏어가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제일 컸다.
새 성녀를 중심으로 권력자들의 맹약을 다시 새기고, 성녀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만국 공통의 것임을 다시 공언하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배례식에 누구를 데리고 가느냐이다. 배례식에는 황제 본인만 참석하거나 아니면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후계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전통이다.
원래 예상보다 상당히 빨라지긴 했지만, 이를 계기로 황위 경쟁에 종지부를 찍기는 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황태자가 무사히 살아서 황위에 오른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힘이 실리면 훨씬 더 유리해지기 마련이다.
“짐은 유가 황자를 데리고 갈 생각이다.”
예정된 결말이었다. 유가는 모친의 부족이 아주 강력했지만, 유가 자신의 수완도 대단했다. 출신도, 힘도 모두 가장 우위에 있었다.
“그러면 황태자로 책봉한 뒤 함께 가시렵니까?”
“아니, 그러기엔 시간이 없군. 어차피 유가를 데리고 가는 게 황태자로 인정한다는 증표이니, 책봉식은 돌아와서 정식으로 치르고 일단은 출발하도록 하지. 신전에서 배례식 날짜를 발표하면 그에 맞춰 출발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예상과 달리 배례식 날짜는 공표되지 않았다.
키리아 성녀의 죽음이 알려진 뒤에도 에포메니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그 즉시 에포메니가 새 성녀가 됐음을 선언해야 했는데 신전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급기야 각국의 지배자들은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혹시 에포메니가 신전에 없는 것 아닌가?”
모든 황자들이 이 사태를 궁금해했지만, 그중에 유가는 의문만이 아니라 불안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 역시 사실 에포메니가 공석이든가, 아니면 키리아 성녀와 함께 죽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직 키리아 성녀의 장례식은 안 치렀지만 성녀의 자리는 절대 공석으로 놔둘 게 아니었다. 성녀가 죽고 차대 성녀가 오르는 것 자체도 초유지만, 차대 성녀가 나타나지 않는 건 초유이기 전에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태였다.
“에포메니도 혹시 죽은 게 아닐까요? 신전에 전염병 같은 게 돈 건…?”
“성녀는 죽을 수 있어도 에포메니라면 자신을 치유하겠지. 병은 아니야. 그리고 죽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에포메니의 죽음 역시 공표했을 거다.”
“그렇다면…?”
“사라진 거다. 그리고 아마 이렌시아에 없을 거야. 그러니까 여태 찾아내지 못하는 거지. 이렌시아처럼 좁은 땅에선 바늘 하나 찾아내는 것도 쉬워. 그런데 성녀를 못 찾아낼 리가 없다.”
그렇다면 현재 성녀의 자리가 비워졌다는 건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성녀는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었다.
고대에 나라들이 성녀를 놓고 싸웠을 때도, 이 나라 저 나라 끌려 다니긴 했어도 성녀 자체는 존재했다.
성녀가 없는 세계라니, 마치 신의 힘이 사라진 듯한 두려움이 무르마를 감쌌다.
“누군가 성녀를 손아귀에 넣고 숨겨 놨다면요?”
“그럴 가능성도 높지.”
유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 손에 들어오지 못할 거면 다른 자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게 나았다. 개인이 성녀를 소유하면, 그건 가공할 힘이 될 터였다.
“그건 재앙이자… 최강의 패가 될 거야. 타네시 같은 약소국이 성녀를 데려가면 전화에 짓밟히겠지. 하지만 카비르 같은 대국이 성녀를 손에 넣으면 최강의 패가 될 거야.”
유가가 그 말과 함께 눈을 빛냈다.
“내 손에 들어온다면, 이야기는 더욱 달라지지. 내가 성녀를 손에 넣으면, 나는 불사의 황제가 돼서 세계를 제패할 것이야. 이 1대륙을 넘어 2대륙, 3대륙까지. 전 대륙을 휩쓸고 아르드를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유가는 바로 그 성녀가 같은 마디나의 성벽 안에 있는 걸 몰랐다. 그가 가장 미워하는 동생이 바로 그 재앙이자 최강의 패가 될 여자와 한 침대를 쓰고 있다는 것도.
***
자레스는 퀴나에에게 에포메니와 성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는 명을 내렸다.
만사를 제치고 그것부터 우선하라고 했는데, 퀴나에는 그 명을 받고 바로 황자궁의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보안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카에티와의 남은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예상대로 우스라에선 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건을 놓고 거래를 하려는 의도거나, 아니면 카에티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일 터다.
카에티는 전혀 두렵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아넬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그녀가 악에 받쳐 입을 열면 자레스도 곤란했다.
“왜 처소에 경비병이 여섯밖에 없지?”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온 자레스는 호통부터 쳤다. 경비를 강화하라고 했는데 숫자가 똑같았다.
지금 같아선 백 명을 줄 세워 놔도 모자랐다. 성력밖에 없는 아넬이 경비병을 제치고 도망치긴 힘들었지만, 자레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도 문제지만, 누군가 그녀를 약탈하러 올까 봐 그게 더 두려웠다.
처소 입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시녀들이, 그가 나타나자 황급히 문을 열었다. 아넬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나마 침대를 피해 장의자에 기대 있지 않은 건 다행일까. 하지만 그가 들어와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힘든 게 눈에 보였기에, 시녀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기운이 없으셔서 그럽니다. 다행히 점심에는 고기를 넣은 요구르트 수프를 드셔서 쓰러지시는 건 막았습니다. 의원에게도 약을 받아 와서 드시게 했고요….”
시녀가 얼른 덧붙이자, 그제야 자레스가 눈길을 거두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며 다시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그 서슬에 아넬이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당혹스러운 감정이 그 커다란 눈에 서린다. 또 화가 난다. 요 며칠 자레스와 아넬의 사이는 늘 이 패턴이었다.
아넬은 그를 거부하고, 자레스는 그 거부에 분노하고. 그래서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다 다시 끈질기게 다가선다.
마치 달과 파도 같았다.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지만, 영원히 서로에게 다가설 수는 없는 듯했다.
“식사를 했다고?”
아넬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수프라도 마신 건 그녀가 계속 식사를 거부하면 시녀들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고 애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목숨이 붙어 있어야 이렌시아로 돌아갈 수 있지.”
그러자 바로 아넬의 눈이 빛났다.
절대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자레스는 기꺼이 희망의 깃발을 흔들며 그녀를 속였다.
자레스가 엉덩이를 옮겨 아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아넬이 흠칫 놀라며 그의 시선을 피해 침대 발치 쪽을 바라봤다.
여차하면 그리로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이다. 밖에는 시녀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절대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화가 나는 것보다 아넬의 곁에 눕고 싶고, 그녀를 만지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다.
손을 뻗어 아넬을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칼날 같은 무표정 아래 들끓는 바다를 숨기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가슴을 갈라서 심장에 가득 찬 이 지독한 애정을 모두 쏟아 내 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여자에게 미칠 수 있다는 걸, 자레스도 처음 알았다.
“건드리지 않겠다.”
지금은 이렇게밖에 약속할 수 없었다. 영원히 그러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신전에서만 자라 남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이 순진한 여자가 바로 안심하는 걸 보니 이 수밖에 없었다.
“날 이렌시아로 돌려보내 주세요, 자레스 황자.”
하지만 풀어졌다 안심하면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인내심에 한계가 느껴진다.
“성녀님께서 돌아가셨잖습니까. 제가 차대 성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발, 자레스 황자. 세계를 위해 절 돌려보내 주세요.”
“하아.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군.”
자레스가 실소를 터뜨리자 아넬의 얼굴에 궁금증이 어렸다.
“그렇게 돌아가려고 애를 쓸 거였으면, 애초에 신전은 왜 빠져나온 거지?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몰랐나?”
아넬은 당황했다. 그의 질문이 뼈를 부수고 등골을 찔렀다.
이 얼마나 얼빠진 짓인가. 노예로 변장까지 하면서 탈출해 놓고선 지금은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니. 제가 봐도 한심한 짓이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침대보만 내려다보고 있던 아넬이 문득 중얼거렸다.
“…성녀님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다고?”
그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다니, 이 상황이 이상했지만 지금은 너무 괴로워서 처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쓰디쓴 후회가 먹물처럼 흘러나왔다.
“내가 이전에 성녀가 됐을 땐, 키리아 님께서 신전을 나가 은퇴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내가 모습을 감추면 키리아 님이 오랫동안 성녀로 머물러 계실 줄 알았습니다.”
예민한 자레스는 그 순간 아넬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해 냈다.
“이전에 성녀가 된 뒤? 당신은 이제 막 성녀가 된 게 아닌가?”
‘헉!’
실수했다. 서투르게 변명을 하다 보니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털어놓고 말았다.
“아, 그, 그러니까 그렇게 될 거라고 배웠어요. 내가 성녀가 되면 키리아 님께서는 은퇴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신다고.”
아넬이 얼른 둘러댔지만, 자레스의 시선에서 의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아넬을 쳐다보다 문득 중얼거렸다.
“당신이 신전을 탈출한 이후로 성력을 자주 베풀었지. 나를 살리기 위한 게 두 번이나 됐어. 가벼운 부상이 아니라 다 죽어 가는 걸 살려 낸 거였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의 추측이 맞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어쩌면 그게 키리아 성녀의 죽음을 재촉한 게 아닌가?”
그의 말에 아넬이 칼에 찔린 것처럼 흠칫 놀랐다.
어느 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남의 입으로 확인하는 건 상황이 또 달랐다.
자레스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몇 번이고 성력을 낭비하는 바람에 키리아가 죽은 것이다.
아마도 아넬이 성력을 쓸 때마다 그에 연결된 것처럼 키리아의 생명력 역시 빼앗겼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자레스를 구하자 남은 생명력마저 사라져 죽음에 이른 것이다.
확증은 없지만 그녀의 추측이 맞을 것이라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이 직감 역시 성력의 일부라는 걸, 아넬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개화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녀가 가진 모든 힘이 개방됐다.
막 피어난 날것 그대로의 힘이 불꽃을 일으키며 그녀를 감쌌고, 그녀가 키리아를 죽게 한 장본인이 맞다고 나침반의 바늘처럼 가리키고 있었다.
“흐으윽.”
죄의식을 못 이긴 아넬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녹색 눈에서 투명한 물이 흘러넘치면서 아넬을 한층 더 가련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자레스가 돌연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넬이 흠칫 놀라 굳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그녀는 억센 그의 팔을 밀어낼 힘이 없었다. 포기한 아넬이 그에게 안긴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자레스가 그녀를 안은 채 말없이 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뜻밖에 다정해서 아넬은 내심 놀랐다. 그녀는 어느새 긴장이 풀려 그의 어깨에 기대고 말았다.
이 안온함은 뭐일까.
늘 거칠고 무서운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왜 이제 와서 따뜻함을 보이는 걸까.
자신이 여자인 걸 알게 돼서? 아니면 그녀가 성녀라서?
전생에도 성녀였지만, 자레스는 그녀를 탐욕스럽게 범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부드럽게 그녀를 위로한다. 그에게 있는 줄 몰랐던 다정함에 빗장 한 겹이 또 스르르 풀렸다.
떠나야 한다. 이렌시아로 돌아가야 한다.
알고는 있지만 지금은 기댈 어깨가 필요했다. 아넬은 자레스에게 안긴 채 그의 어깨가 흠뻑 젖도록 울었다.
자레스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겼다.
놀랍게도 육체 쪽이 흥분으로 끓어오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당장 그녀를 침대 위에 쓰러뜨리고 집요하게 탐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다른 것이 그를 잡아끌었다.
‘성녀가 됐었다고? 대체, 언제…?’
키리아는 내내 살아 있다가 아넬이 성력을 크게 쓰고 나서야 죽었다. 그러니 아넬이 성녀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일 터.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면, 두 번째일 리가 없다.
설사 다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전의 성녀가 키리아일 리도 없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지 않는 한, 같은 역사가 되풀이될 수는 없는 일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하는데, 이상하게 석연치가 않았다.
자레스는 아넬의 등을 계속해서 쓸어내리면서 그 점에 대해 생각했다.
***
자레스가 그런 의문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퀴나에는 그가 받은 명대로 도서관에 틀어박혀 에포메니와 성녀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에게 유리한 자료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레스가 이렌시아로 향하기 전에 그에게 비슷한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성녀에 대해 조사하란 명을 남기고 이렌시아로 떠났었는데, 그때 이미 에포메니를 납치할 목적이 있었기에 그런 명령을 내렸었다.
그리고 퀴나에는 그의 명을 좇아, 성녀의 기록을 찾아 카비르 각지를 뒤졌다.
그 결과 자발산 근처에서 고대의 성전(聖典)을 찾아냈고, 퀴나에는 지금 그 성전을 해독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아, 옌장! 왜 이건 공용어가 아니냐고!”
고대에는 당연히 공용어가 없었다. 고서는 이미 예전에 멸망한 나라인 온크웰어로 쓰여 있었는데, 온크웰어는 이미 거의 사멸한 언어라 해석을 할 방법이 없다.
“7대륙까지 건너가서 온크웰의 후예들을 찾아야 하나? 대체 어느 세월에?”
그전에 자레스가 그를 말려 죽일 것이다. 성질 급한 황자 같으니.
‘지금은 성녀에게 미쳐 있으니 더 몰아쳐 대겠지. 하여간 수컷들이란!’
개인 도서관을 더 뒤져 봐야겠다.
자레스는 출신이 비천한 만큼 지식에 대한 갈증이 아주 심했다. 교양 있는 척하는 황족들보다 더 지식을 쌓고 싶어 했기에, 그의 도서관엔 황궁 도서관만큼이나 책이 많았다.
없는 책은 황궁 도서관 책을 빌려다 필사를 했고, 책 담당자를 따로 정해서 전 세계를 돌며 귀한 책을 수집하게 했다.
‘혹시 그중에 온크웰어 책이 있을지도 모르지.’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뒤져는 봐야겠다 생각하는 그때 사브가 달려왔다.
자레스를 만나러 온 자가 있는데, 지금 알현을 받지 않는다는데도 고집을 부리며 물러나지 않는다는 말에 퀴나에가 대신 접견실로 향했다.
“뉘신지요?”
접견실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본 퀴나에가 물었다. 그런데 금발 머리에 연회색의 눈을 보니 불현듯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우스라의 카에티 님?”
퀴나에는 카에티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레스에게 독살 사건이 있던 날, 카에티가 남장을 하고 찾아온 적이 있다는 말은 들었고 외모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카에티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턱 끝을 높이 치켜들더니, 자신의 신분을 인정함과 동시에 바로 태도가 달라졌다.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아주 남장이 습관이 되셨나 봅니다? 우스라의 여자들은 원래 그리 용감하신가요?”
카에티의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노려보는 시선이 무시무시해졌다.
“퀴나에라고 했던가? 내가 황자님과 혼인하고 나서도 그 주둥이를 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지.”
“현명한 여인은 남편의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법입니다. 아니, 그전에 카에티 님께서 황자 전하와 혼인을 하실 수 있는지부터 생각을 다시 해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너무 몰아붙였나 보다. 카에티의 얼굴이 새빨간 색을 지나 거의 보라색이 돼 갔다. 격분하면 숨을 못 쉬는 것 같다고, 퀴나에는 생각했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게 습관인가 보지? 협박하면 내가 고개 숙일 줄 알고? 흥!’
퀴나에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웬만한 사람은 퀴나에를 말로는 못 이긴다. 자레스의 사람을 한 명이라도 제 편으로 끌어들여도 모자랄 판에, 카에티는 그 오만한 성격 때문에 제일 골치 아픈 적을 만들었다.
“황자 전하를 만나게 해 줘.”
“그건 곤란합니다. 황자 전하께선 공무로 무척 바쁘셔서요.”
“공무가 아니라 여자와 함께 있느라 침소에서 안 나오는 거겠지! 나는 전하의 약혼녀고, 이런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어!”
“죄송하지만 카에티 님,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우스라에는 이미 파혼서를 보냈고 그를 받아들이신 거로 압니다.”
“아직 답서를 보내지 않았다. 파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부족의 명예 때문에라도 우스라는 절대 파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좋아요, 그렇다고 칩시다. 아직 카에티 님이 약혼녀라고 치자고요. 그러면 약혼녀로서 성녀를 손에 넣는 게 황권 다툼에 얼마나 유리하신지 잘 아실 텐데요?”
이건 받아칠 수가 없었다. 카에티가 이를 악물자 퀴나에가 계속해서 그녀를 후려쳤다.
“전하께선 성녀를 무기로 황위에 오르실 수 있습니다. 다른 황자들보다 절대 우위에 설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성녀를 물리치라는 겁니까?”
“말을 조심해라, 퀴나에.”
“설마 황자 전하의 미래를 손수 방해하기로 작정하신 건 아니겠지요? 그게 과연 절대 파혼은 못 하겠다는 사람의 자세인가요?”
눈으로 사람을 벨 수 있다면, 지금 퀴나에는 카에티에게 난도질을 당했을 것이다. 카에티의 눈길이 무시무시한 걸 지나 지옥에서 온 악마의 것처럼 변했다.
“감히 평민 주제에 나를 가르치려 들어?”
“섬기는 주인을 위해선 재주를 아끼지 않을 뿐입니다. 모쪼록 제 성심을 이해해 주시길.”
“그래, 주인을 위해서라니 내가 참아야지. 하지만 현명한 책사라면 주인이 엇나가는 걸 막아야 할 책임도 있지 않을까? 성녀를 여자로 안으려 들다니, 대체 그런 미친 짓이 어디 있어?”
“그거야 남녀 문제니, 두 분이 알아서 해야지요. 황자 전하께서 지금 좀 감정이 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앞뒤 안 가리고 사고를 저지를 정도로 어리석은 분도 아닙니다.”
하지만 카에티는 믿을 수 없었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자로 변하기 전에도 감정을 가누지 못해 흘려 대던 사람이, 그런 여자를 보고 참을 리가 없다.
그 문제를 생각하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거기다 대고 퀴나에가 약 올리듯 말을 덧붙였다.
“주제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카에티 님. 정 황자 전하와 혼인을 강행하시겠다면 차라리 두 번째 부인이 되겠다고 자청하십시오. 그리해 주시면, 제가 카에티 님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황자 전하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나더러 둘째 부인이 되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비르에서 제일가는 여자가 되기 위해 자레스를 택했는데, 두 번째 부인이 되라니.
“그러면 일석이조지요. 우스라는 황자 전하와 운명을 함께할 수 있고 전하는 성녀를 손에 넣어 카비르의 황제가 되시는 겁니다. 카에티 님의 꿈이 이뤄지시는 것 아닙니까?”
“닥쳐! 나는… 나는 절대 이인자로는 살 수 없어! 그렇게 성녀를 원하면 차라리 그 여자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라고 해!”
“카에티 님…. 후우, 이런 말 죄송하지만, 황자 전하께서 성녀를 만난 이상 이미 그 마음속에 누구도 일인자가 될 수 없게 됐답니다.”
아넬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아넬은 외모 말고도 자레스와 얽힌 게 많았다. 여자인 걸 안 지금은, 그것 때문에라도 아넬을 더 놓지 못한다.
“아마 아넬 님이 성녀가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예요. 이것만은 제가 카에티 님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때로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득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퀴나에는 카에티가 싫었다. 원래도 귀족이며 황족을 비롯해, 거들먹거리는 존재는 죄다 싫어했는데 카에티는 그중 제일 재수가 없다.
하지만 여자의 입장으로 보자면 안됐기도 했다. 난데없이 연적이 나타나 끼어든 것도 모자라, 하필 그 상대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여자라니. 분하긴 할 것이다.
“황자 전하를 원하신다면 부디 몸을 낮추세요, 카에티 님. 그리고 성녀님 대신 카에티 님이 줄 수 있는 것을 제시하세요. 그래야 기회가 올 겁니다.”
퀴나에는 진심으로 충고했지만, 카에티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에티는 대답하는 대신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갑자기 물었다.
“내가 성녀가 자레스 황자의 수중에 있다는 걸 알리면 어떻게 할 거지?”
“카에티 님께서 그리 어리석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되면 자레스 황자는 만인의 표적이 되겠지만, 그 반대로 카에티 님 역시 두 번째 부인이라도 될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
“그만한 빌미라도 있어야 전하께서 카에티 님을 받아들일 수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모욕적인 말에 카에티가 이를 갈았지만, 더 협박하지는 않았다. 벌떡 일어난 그녀가 접견실을 나가 버리자, 퀴나에는 그제야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퀴나에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지만, 사실은 자레스가 카에티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남자가 사랑에 미치면 나라가 기운다더니, 자레스 황자도 별수 없는 수컷이구나. 아이고, 내 팔자야. 세 사람 사이에 끼어 나만 고생이네.’
***
자레스는 집무실을 아예 침소로 옮겼다.
침대에는 커튼을 쳐서 아넬이 보이지 않게 하는 대신, 모든 공무를 침소에서 처리하며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넬은 식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자레스는 항상 두 사람 몫의 식사를 준비하게 했고, 시녀들을 내보낸 뒤에는 몸소 쟁반을 들고 왔다.
“먹고 싶지 않아요.”
죽 그릇을 내밀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기운 빠진 목소리에 애처롭기보다는 화가 치민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자 때문에 자레스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더 잔혹하게 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지금부터 수저를 거절할 때마다 옷을 한 겹씩 벗기겠다.”
아넬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자레스가 제 말이 허언이 아니란 걸 증명할 것처럼 바싹 다가오자, 아넬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머, 먹을게요!”
항상 우아한 성녀의 가면을 쓰고 있던 그녀가 이럴 때는 영락없는 소녀의 얼굴이다. 열아홉이면 절대로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남자에게 면역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자레스는 자신을 무서워하는 그녀에게 화가 나면서도 너무나 간단하게 함락당하는 아넬이 웃기기도 했다.
속이 쓰리다. 이 여자의 반응 하나하나에 울고 웃게 되다니.
자레스가 빵을 갈라 수프에 적셔 내밀었다. 아넬이 어쩔 수 없이 새 모이만큼이나 적은 양을 받아먹더니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절하면 옷을 벗기겠다고 했을 텐데?”
“원래 많이 못 먹는 편이라….”
“몸이 왜 그리 안 자랐는지 알겠군.”
그 말을 하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넬은 그를 살리자마자 폭발하듯 갑자기 성장했다. 그 변화엔 역시 성력이 영향을 미친 걸까?
“에포메니는 성력을 쓰면 성장하는 건가? 그래서 이번에 나를 살리면서 갑자기 성장한 건가?”
막 자레스가 건넨 물을 마시려던 아넬이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언젠가 물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너무 느닷없는 기습이다.
“나를 구하기 전엔 왜 어린 채로 있었던 거지? 혹시 성력을 쓰지 않으면 성장이 멈춰 버리는 건가?”
머리가 좋은 자레스는 순식간에 거기까지 추측했다.
그가 모든 걸 알아채면 이렌시아로 돌아가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귀환은커녕, 그녀가 성녀로 살아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에, 에포메니는 성년이 되기 전엔 거의 성장을 하지 않아요.”
아넬은 거짓으로 둘러댔다. 뿐만 아니라 거짓을 가리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더했다.
“아주 느리게 자라다가, 성년을 맞으면 갑자기 성장해서 여자의 몸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계속 소년으로 보였던 겁니다.”
자레스가 의심하는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봤다. 아주 거짓말은 아닌 듯한데 뭔가 석연치가 않다.
“그럼 당신은 이번에 성년이 됐단 말인가? 하필 나를 살려 낸 바로 그때에?”
“그, 그래요.”
“당신은 이제 열아홉인 거로 아는데? 에포메니는 스물이 돼야 성인으로 개화한다고 들었다.”
“자, 잘못…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제가 신관들에게 발견된 건 네 살 무렵입니다. 그 뒤로 16년이 지나서, 딱 올해로 성년을 맞을 나이입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넬이 신전을 탈출하고 꽤 시간이 지난 탓에 곧 스무 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력을 자꾸 쓰는 바람에 일찍 개화하긴 했지만,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성년을 맞기는 했을 것이다.
그녀의 설명에 자레스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성녀 시험은 세 살 무렵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들었는데?”
“시험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에요. 때로는 나를 발견했을 때처럼 시간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에포메니가 세 살보다 더 나이를 먹은 경우도 있고요.”
그녀의 말을 믿기도, 그렇지 않기도 어려웠다. 세 살 전후로 시험을 한다고만 들었는데, 시간이 걸리면 해를 넘겼을 수도 있다.
세계는 워낙 넓고 에포메니가 어디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더 나이를 먹은 뒤에 발견됐을 수도 있다.
자레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넬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얼른 그가 비켜 주길 바랐을 텐데, 지금은 그녀의 거짓말이 제대로 먹혔는지 궁금해 도망칠 생각도 못 했다.
그를 알아챈 자레스는 그 모습에 돌연 갈증이 심해졌다. 참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그는 건장한 사내였기에 아넬을 품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하려고 들면 억지로 그녀를 취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성녀는 순결해야 한다는 믿음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아넬이 허락만 한다면 언제라도 그녀를 안을 준비가 돼 있었다.
사실은 그러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문제는 아넬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득 생각난 사실에 뱃속에 저릿한 통증이 흘렀다.
자비로운 성녀라 그녀를 괴롭히던 그마저 살렸다 했다. 메타를 섬기는 성녀면 당연한 행동이라 했다.
그 사실이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고, 분노하게 하고, 좌절로 몰아넣었다. 그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이토록 괴로울 줄은, 예전의 그는 몰랐다.
자신이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제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자레스는 맥이 풀리고 무력해졌으며, 때로는 광포해졌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애써 누르고 있던 그 안의 맹수가 눈을 떴다.
가만히 아넬을 바라보던 자레스가 침대 옆에 놓은 테이블에 쟁반을 놓았다. 하지만 아넬이 잠깐이나마 마음을 놓은 그 순간 돌연 자레스가 침대로 올라와 그녀의 양 팔목을 낚아챘다.
“웃!”
입술이 무력하게 벌어졌다. 그 사이로 자레스가 말캉한 살을 밀어 넣으면서, 그와 함께 달콤하고 쓴 액체가 쏟아져 들어왔다.
타액과 섞여 끈끈해진 액체가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대체 언제 술을 머금은 건지, 자레스의 입안에 있던 것이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와 그녀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콜록!”
간신히 자레스가 입술을 떼자, 재차 사레가 들린 아넬이 정신을 못 차리고 기침을 해 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자레스가 다시 술을 머금었고 키스와 함께 아넬의 목구멍에 악마의 액체를 쏟아 넣었다.
밀어낼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고, 그럴 힘도 없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몇 번이나 키스를 당하자, 아넬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면서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번도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처음 접하는 술인데 심지어 빈속에 가까웠다.
순식간에 취기가 몰려오면서 그녀가 반쯤 감긴 눈으로 자레스를 쳐다봤다.
술의 위력은 무서웠다. 경계심을 무디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사고도 마비시켰다.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것도 같았고, 될 대로 되라는 위험한 의식도 함께 차올랐다.
“흐으….”
아넬이 흐느적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아넬의 입술은 술과 섞인 자레스의 타액이 묻어 번들거렸다. 그 입술과 몽롱한 두 눈이 자레스를 미치게 만들었다.
괜히 술을 먹였다. 이렇게 그녀가 급속도로 무너질 줄 알았더라면, 위험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눈앞에서 자제할 자신이 없었고, 참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저주스러웠다.
“이런 눈으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두 눈을 파 버리고 싶군.”
탄식하던 그가 문득 흠칫 놀랐다.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 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무서워 더욱 놀란다.
인내심이 점점 닳아 없어져 갔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를 가두고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면 언젠가 아넬도 포기하고 그에게 사랑을 줄까?
언제나 자신만만한 자레스였지만, 아넬 앞에선 그 자신감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그를 휘두르는 아넬이 무섭고, 혹독하게 그녀를 몰아대는 자신도 두려웠다.
그는 한 번도 들어서 본 적 없는 미지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뱃속에서 정염의 불길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자레스는 그대로 아넬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흐, 응… 황… 싫….”
아넬이 흐느적거리는 몸으로도 안간힘을 쓰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원래도 모자란 힘은 술기운 때문에 더욱 약해져서, 가느다란 팔이 숨죽은 고사리처럼 푹푹 꺼졌다.
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포기했기 때문인지, 아넬이 축 늘어졌다. 지금은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자레스가 그런 아넬을 끌어안은 채 입술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녀의 입안을 거칠게 훑었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아주 느리고 질척하게 아넬의 것을 핥고 빨았다. 입천장을 건드리고, 혀 아래와 치열을 골고루 건드리다 이내 그녀의 혀를 그의 입 안 깊숙이 빨아들였다.
이대로 아넬을 취하고 싶었다. 술을 핑계로 그녀를 무장해제시키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충동에 몸이 들끓었다.
“하아….”
하지만 자레스는 거의 기적적으로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가 얻고 싶은 건 아넬의 몸만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전부 원하기에, 어느 한쪽만 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알아 온 아넬은 어떤 협박에도 제 신념을 꺾지 않는 여자였다.
마음으로는 몇 번이고 아넬을 파고 들어갔지만, 몸부터 먼저 취하면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게 더 힘들어진다는 자각이 기어코 그를 막아섰다.
자레스는 어느새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아넬에게 이불을 덮어 준 뒤 침대에서 물러났다.
이대로 곁에 있다간 본능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 자레스는 문밖 복도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뜨거워진 몸을 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