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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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황자를 만나러 오는 사람은 많았다.

이런저런 청탁을 하러 오는 자, 상품 거래를 놓고 그와 의논해야 하는 자, 이곳저곳에 심어 놓은 첩자의 관리 문제로 비밀리에 알현을 신청하는 자 등등.

수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러 왔기에 자레스는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날을 정해 놓고 내방객들을 만났다.

보통은 적당한 선에서 퀴나에가 처리하긴 했지만, 오늘 만남을 신청한 자는 카에티의 아버지인 우스라 부족장이었기에 자레스는 별수 없이 그를 만나러 나왔다.

하지만 그가 손님용 접객실에 갔을 때, 거기 나타난 건 우스라 부족장이 아니었다.

두건을 깊이 눌러쓴 남자가 쿠션이 잔뜩 깔린 장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자레스가 나타나자 그가 일어나면서 두건을 벗었다.

그 얼굴을 본 자레스가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넌 누구냐?”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 옷을 입긴 했지만, 두건 아래 나타난 아름다운 얼굴은 여자의 것이었다.

“당신의 혼인 상대인 카에티입니다, 전하.”

“우스라의 카에티?”

실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카비르에선 혼전의 남녀가 함께 있는 걸 꺼렸다.

물론 백성들이야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얼굴을 맞댔지만 신분이 높을수록 남녀 간에 만남을 자제했기에, 상류층 여자들이 만날 수 있는 남성은 오직 남편과 하인들밖에 없었다.

“담이 크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저는 안 만나려 하시길래,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남장까지 하다니. 우스라의 카에티, 명예가 더럽혀져도 상관없는 건가?”

“전하께서 저와의 혼사를 물리지 않는 이상 어차피 혼인할 상대 아닙니까. 아내와 마찬가지란 것이지요.”

“이런 객기까지 부릴 정도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단 얘기겠지? 할 말이 뭐요?”

“…노예 파이디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그건 그녀가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카비르에선 아내가 남편의 여자 문제에 간섭할 권한이 없었다.

그런다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신분이 높은 남자들은 대개 아내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적인 자유를 누렸다.

카에티가 싫든 말든, 그녀는 아넬을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혼인은 꼭 저와 해 주십시오, 전하.”

“겨우 그 말을 하러 남장까지 하고 찾아왔다는 거요?”

“제 마음이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전하.”

“허어.”

***

그 시간 알수무는 아넬에게 갈 식사에 손을 대고 있었다.

아넬은 다른 노예들과 달리 항상 제 방에서 식사를 했다. 그것부터 벌써 가당찮은 일이라, 노예들 사이에선 뒷말이 나오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알수무에겐 다행이었다.

그 덕에 손쓰기가 편했던 것이다.

노예의 식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브가 아넬과 함께 밥을 먹기 위해 식사 쟁반을 들려 할 때 알수무가 핑계를 대 사브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알수무는 그릇에 담긴 채소 스튜에 미리 갈아 둔 독초를 넣었다.

“한 입만 먹어도 지옥을 본다네. 두 입을 먹으면 사신을 만나게 되지.”

알수무가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노랫말대로 입만 대도 사브와 아넬 둘 다 죽게 될 테지만, 알수무는 사뭇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독초가 스튜 안에 사르르 녹아드는 걸 확인한 뒤, 그녀는 곧 그 자리를 떠났다. 카에티에게서 신호가 왔으니 이제 자레스에게도 손을 써야 할 때였다.

오늘 밤, 아주 많은 역사가 이뤄질 터였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사브가 쟁반을 들고 아넬의 방으로 향했다.

요즘 사브는 거의 아넬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노예가 노예의 시중을 들다니 웃기는 노릇이지만, 사실 신분이 높은 자가 총애하는 노예는 시중 노예를 여럿 두는 경우가 있긴 했다.

사브도 자신을 그런 경우라 생각했고, 아플 때 그를 도와준 이가 아넬이었기에 그녀가 남색의 대상이란 소문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파이디 형. 점심이에요오.”

한동안 아팠던 아넬이 요 며칠 들어 많이 회복됐다. 아직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사브는 제법 총기가 돌아온 눈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아넬 앞에 쟁반을 놓았다.

“배고팠죠, 형?”

“별로 그렇진 않아.”

“여기 닭구이부터 먹어 봐요. 노예들은 고작해야 콩죽이나 먹는데, 요리장이 아주 신경을 썼더라고요.”

“입맛이 없어, 사브. 그냥 네가 다 먹어.”

“에이,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죠. 안 그래도 그동안 형 앞으로 나온 요리들을 죄다 내가 먹었는데.”

“너라도 먹었으니 다행이구나.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입맛이 없어. 목이 부었는지 아프기도 하고.”

“그럼 여기 채소 스튜라도 먹어요. 이건 묽어서 목 넘김도 괜찮을 거예요.”

“…그럴까?”

“너무 안 먹으면 더 힘들어진다고요. 이러다 형이 또 쓰러지면 황자 전하가 저를 혼내실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또 미안하다. 거절하려던 아넬이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고, 스튜 한 스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돌연 노크도 없이 문이 휙 열리더니 퀴나에가 나타났다.

“파이디, 사브! 지금 접객실로 가 줘야겠다!”

“네?”

수저를 뜨다 말고 아넬이 되묻자 퀴나에가 다시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너를 부르신다. 사브는 얼른 가서 물담배를 챙겨 오고, 파이디 너는 커피를 받아서 접객실로 가도록.”

밥보다는 자레스의 명이 더 급했다. 두 사람 다 들던 수저를 내려놓고 퀴나에를 따라 1층에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

사브가 물담배를 받으러 간 사이, 아넬은 황자궁의 카베기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끓여 준 커피를 주전자에 담고 은쟁반에 설탕 결정이 담긴 접시도 곁들였다.

그러고 접객실로 향하려는데, 문득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파이디? …지금 어디 가니?”

“황자 전하께서 부르셔서 접객실에 가는데요?”

“아, 그럼 식사는 안 했나 보네?”

“네, 심부름부터 해야죠.”

“지금 오신 손님이 누군지 잘 모르나 보네? 이런, 너도 참 안됐다.”

“네?”

알수무가 너무 낮게 말하는 바람에 아넬은 미처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가 보렴. 전하께서 기다리시겠다.”

알 수 없는 말에 아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접객실로 갔고, 그 뒤에서 알수무가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황자 전하 쪽은 손을 써 놨으니까, 아쉽지만 저 녀석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알수무가 손을 댄 것은 커피 주전자였다. 카베기가 따로 있어서 커피에 약을 타기는 어려웠지만, 커피 주전자는 상대적으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알수무는 영리하게도 자레스가 쓰는 주전자 주둥이 안에 얇은 천으로 싼 가루약을 밀어 넣었다.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커피를 담기 전에 주전자도 샅샅이 살펴보지만, 주둥이는 얇고 길어서 눈길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

실로 절묘한 위치였다.

‘커피는 멀쩡하지만, 커피를 잔에 따를 때 약이 녹아서 나오게 되어 있지. 약을 마신 황자가 미쳐 날뛸 텐데 호호호, 저 노예 놈, 속이 좀 타겠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넬이 접객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다.

카에티의 얼굴을 알아본 것인데, 카에티 역시 아넬이 나타나자 눈에 띄게 경직됐다.

한쪽은 사지로 몰아넣은 당사자고, 또 한쪽은 애꿎게 죽을 뻔한 피해자이니 피차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요? 받아들이겠다 하지 않았던가?”

자레스가 이죽거리자,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카에티가 차갑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럼요. 전하의 의중이 그러시다면, 저도 존중해야지요. 아내는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하니까요.”

아내라는 말에 이번엔 아넬이 흠칫 놀랐다. 혼담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카에티의 입에서 아내란 말이 나오자 묘하게 기분이 어수선해졌다.

카에티에게 보내질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쩐지 서운하고, 또 어쩐지 불쾌했다.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시커먼 감정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예가 주인의 시간을 함께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전하, 노예는 노예답게 다뤄야 합니다.”

“그대와 나의 기준이 많이 다른 것 같군. 하지만 좋소. 정 꺼려진다면 문밖에 서 있으라고 하지.”

“꼭 그래야겠습니까?”

“아내는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스라의 카에티, 그대가 한 말이 아직 이 방을 떠나지도 않았소.”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에티는 속으로는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

‘그럴수록 당신이 아끼는 노예가 마음을 다칠 텐데?’

자레스가 손님에 대한 예의로 커피를 따랐다.

이어서 자신의 잔에도 커피를 채운 그가 평소의 버릇대로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마셔 버렸고, 카에티는 자신의 커피엔 손대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눈여겨봤다.

‘곧 효과가 나타나겠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약의 제조자가 말하길 미약은 족히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시간 정도가 지나야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남자에게는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약이라 했다. 약효가 나타나면 자레스가 짐승처럼 발정할 것이고, 카에티는 억지로 당하는 척하면서 그에게 안길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책임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주제를 모르는 노예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걸 자기 귀로 확인해야 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뭘 그리 웃는 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전하, 혼담을 중지하지 않겠다 하셨으니, 이제 길일을 받아야겠지요?”

“그건 우스라에서 알아서 하시오. 마디나에 있는 신전에 알리면 좋은 날을 알려 줄 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참금 문제도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을 끌기 위해 카에티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자, 자레스는 점점 그녀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다 우스라에 일임하겠소. 예물도 더 원하면 목록을 넘겨주시오. 원하는 대로 보내 줄 테니까. 단, 파이디는….”

돌연 명치께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심장이 조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폐가 타는 듯한 고통까지 밀려오기 시작했다.

‘독!’

그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자레스는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격렬한 기침을 토해 냈다.

“전하?”

카에티가 깜짝 놀라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전에 자레스가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쿨럭!”

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고, 카에티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카에티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전하! 누, 누구 없느냐! 의원! 의원을 불러 다오!”

밖에 서 있던 아넬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아넬이 바로 접객실로 달려 들어왔다.

“황자 전하!”

피를 토하며 쓰러진 자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기도가 막히기 시작해 얼굴이 회색빛이었고, 동공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안 돼!”

“의원! 의원을 부르라고! 네깟 노예 놈이 낄 게 아니야!”

카에티가 악을 썼지만, 아넬이 그런 그녀를 세게 밀쳐 냈다.

“비켜요!”

의원을 부르면 늦어진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성력이 아니면 자레스를 살릴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딱 봐도 죽음에 준하는 상태다. 성력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로 인한 성장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잠시나마 차라리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비심도, 메타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죽으면 그녀도 멀쩡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본능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고, 어느새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

지금은 그 정체를 분류할 수 없지만, 자레스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넬이 그의 손을 잡으며 성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제발!”

자레스와 맞잡은 그녀의 손에서 눈부신 흰빛이 흘러나왔다. 손뿐 아니라 몸 전체에서 가느다란 흰빛이 실 가닥처럼 일어나더니 모조리 자레스에게로 퍼부어졌다.

성력과 함께 눈물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아아, 이제야 알 것 같다. 자레스가 아니라 그녀도 변했던 거였다. 절대로 가까이 해선 안 될 사람이란 걸 알면서, 그를 알고, 그의 다른 면을 알면서 조금씩 이끌리기 시작한 거였다.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선 가장 확실한 방법인 걸 알면서도 두 번이나 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그녀 역시 자레스에게 마음을 줬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요, 자레스 황자!”

아넬에게서 튀어나온 빛의 다발이 한층 거세졌다. 실 가닥 같던 성력이 하나의 덩어리로 바뀌면서 자레스에게 쏟아져 들어갔다. 그 순간 자레스가 눈을 떴다.

“황자!”

이상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넬이 그의 손을 잡고 있고, 그녀의 몸에선 눈부신 흰빛이 솟구쳐 나와 그에게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아넬이 울고 있고 그를 간절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발 살아나 달라고 울면서 외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그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그와 아넬 사이를 연결한 흰빛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빛은 갑자기 스러졌고, 자레스의 호흡이 제대로 돌아오는 순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자레스가 제대로 몸을 가누며 일어났다. 반대로 아넬은 밭은 호흡을 뱉어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에티가 그런 모습을 덜덜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넌 누구냐?”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자레스는 분명히 죽기 직전이었다. 의원이 와도 살리기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 이 어린 노예가 손을 잡는 순간 이상한 빛이 일어났고, 그 빛을 맞은 자레스가 되살아났다.

그녀가 아는 한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성녀?’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성녀는 지금 이렌시아에 있고, 심지어 위중한 상태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노예는 사내가 아니던가.

“아아악!”

그런데 그 순간, 아넬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치 자레스와 제 몸 상태를 바꾼 것처럼, 바닥에 쓰러진 아넬이 몸을 비틀며 뒹굴었다.

성력이 그녀의 몸 안에서 마구 날뛰고 있었다. 뼈와 뼈 사이를 헤집고, 골반을 비틀며, 그녀의 체형을 한꺼번에 바꿔 가고 있었다.

이미 거의 죽은 사람을 살려 낸 게 두 번째였다.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무너져 내리면서, 막혀 있던 시간이 한꺼번에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변하고 있었다.

“아, 아아아악!”

“파이디!”

이번엔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아넬을 자레스가 붙잡았다. 아넬이 그의 손을 밀어내며 일어나려 애썼다.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변화가 더 빨랐다. 그 순간 그녀의 몸 안에 고여 있던 성장의 흐름이 그녀의 전신을 관통했다.

“하아악!”

가슴이 셔츠를 밀어내며 부풀어 올랐다. 키가 더 커지더니, 간신히 목덜미를 덮고 있던 짧은 금발이 빠른 속도로 길어졌다.

엉덩이가 커지고 허리가 잘록해지면서 몸 전체가 낭창한 곡선으로 바뀌었다.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여자의 몸이었다.

“흐, 으으으으….”

무섭게 성장하던 몸이 마침내 천천히 가라앉았다. 고통이 사라지고 호흡이 돌아오면서 아넬이 그제야 눈을 떴다.

자레스와 카에티가 넋을 잃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었다.

눈부신 금발과 초록빛의 눈. 소년은 사라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넌… 대체 누구냐?”

카에티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

당황한 아넬이 달아나려고 벌떡 일어섰지만, 그전에 자레스가 아넬을 낚아챘다. 그가 한 팔 안에 그녀를 끌어들이며 경악한 눈으로 속삭였다.

“에포메니?”

“놓아주세요!”

아넬이 달아나려 그를 뿌리쳤지만, 자레스는 그 정도로 밀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단번에 그녀를 번쩍 안아 든 자레스가 곧바로 그의 침소로 향했다.

황궁 안에 가득 찬 하인과 노예들이 그런 두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접객실에 있던 자레스가 갑자기 웬 여자를 들쳐 메고 나오니, 혹시 그가 새 여자를 데리고 온 게 아닌가 싶어 저들끼리 수군댔다.

침소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자레스가 아넬을 침대 위에 집어 던졌다.

아넬이 벌떡 일어났지만 그가 침대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를 밀치고 달아나기는 불가능했다. 아넬은 별수 없이 침대 한쪽으로 물러나며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레스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런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셔츠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부푼 가슴과 몸 선은 이제 완연히 여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동안 몰라볼 수밖에 없었다.

열아홉이라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에포메니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신전에 숨어 있을 줄 알았지, 가슴도 없는 소년의 모습으로 성장이 멈춰 있을 줄은 몰랐다.

‘성장이 멈춰 있었다.’

단지 덜 자랐을 뿐 원래는 여자였던 말이다. 납작한 가슴팍만 보고 간단하게 남자라 여겨 버렸는데, 사실 아직 성징이 안 나타난 소녀의 몸이었던 것이다.

어찌 된 건지 몰라도 그를 살리면서 완전히 성장한 것이다.

“잘도… 잘도! 여자였나? 심지어, 에포메니? 그런데도 날 속이고…!”

흥분이 지나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자레스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늘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아넬을 남자로 여기고 얼마나 갈등했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배신감,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충격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때 자레스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아넬이 다람쥐처럼 잽싸게 침대를 빠져나갔다.

어림없지. 자레스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놔, 놔요!”

몸이 겹쳐지면서 아넬의 부푼 가슴이 그대로 자레스에게 닿았다.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뒀지만, 그 말랑한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며 간신히 잠가 두고 있던 빗장이 풀렸다.

여자.

지금 그에게 안긴 상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충동이 번개처럼 머리를 쳤다. 여유가 사라졌다. 심장이 타는 듯했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이 미친 듯한 갈증은 아넬이 아니면 삭일 수 없었다.

자레스가 비명을 지르는 아넬을 내리누르며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아, 읍!”

호흡이 막힌 아넬이 버둥거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를 밀어내려 어깨를 때렸지만, 이번엔 자레스가 좀 더 완강했다.

여린 살들이 얽히고, 입술이 짓이겨졌다. 서로의 입술을 타고 타액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입술을 떼며 도망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바로 붙잡혀서 반응을 종용받았다. 키스는 한층 더 짙어져 갔고, 자레스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으며 더 깊이 그녀를 잠식해 들어왔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젠 밀어내도 소용없을 것 같다는 체념이 그녀를 감쌌다.

예전엔 남자인 줄 알았으니 자제라도 했지만, 이제는 진실을 알아 버렸으니 자레스가 물러날 리 없었다.

힘이 빠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한층 더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뜨거운 살이 아넬의 여린 입술 안쪽을 훑으며 물고 맛보기를 반복했다.

목구멍 깊은 곳까지 혀를 밀어 넣고 구석구석을 훑더니 이윽고 그녀의 혀를 뽑을 듯 거칠게 빨아댔다.

야하게 츠릅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도 들려왔고, 그러자 아넬은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 밀어내야 했다.

아르드가 멸망하게 내버려 둬선 안됐다. 그에게 흔들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 감정을 아르드에 있는 모든 생명과 맞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 당연했던 본능이 그녀를 잡는다. 더 이상 그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고, 그녀를 향해 밀려들어 오는 그의 것이 전부인 것만 같았다.

점점 사고가 희미해졌다. 어느새 자레스는 얼굴을 비틀며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도 거칠어졌고, 타액이 섞이고 혀가 얽히면서 머릿속에 아지랑이가 낀 것처럼 의식이 아득해져 갔다.

그녀에게 부딪쳐 자레스의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고, 그것만이 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낄수록 반항하는 몸짓이 약해졌다. 어느새 미약한 떨림만이 남았고, 아넬은 그에게 팔목을 잡힌 채, 무력하게 자레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아.”

자레스가 간신히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아넬은 울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물보다 아넬이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만 중요했다.

정체를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살렸다. 그리고 그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게 분명했다. 부관의 기습에 척추를 관통당한 날, 아마 그때도 아넬이 그를 살렸을 것이다.

뱃속에서 불이 번쩍거렸다. 모든 금제가 사라진 지금, 아넬을 갖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아넬이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반응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손목을 아프게 그러쥐었던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남루한 티셔츠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자레스가 혐오스러운 눈으로 그 옷을 노려보다 북 찢어 냈다. 그러자 셔츠 앞섶이 갈라지면서 뽀얀 가슴이 드러났다.

“아, 안….”

바로 어제만 해도 없던 것이었다. 드디어 형체를 드러난 그 모습에 자레스의 전신에 광기에 가까운 충동이 밀려왔다.

아넬이 가슴을 감추려 버둥거렸지만 자레스에게 금방 붙잡혔다. 타는 듯한 그의 시선이 둥실한 가슴 끝에 매달린 유두에 꽂혔다.

거기에 입 맞추고 싶었다. 분홍빛 유실을 함빡 물고 마음껏 핥고 빨고 싶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고, 그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그 욕망을 실현하기 전에 아넬이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제발, 전하…. 으흑.”

애원하는 눈물이었다. 그건 이전에 두려움 가득하고 혐오가 깃든 눈물과 달랐다. 자레스는 그 실낱만 한 차이를 포착해 냈다.

“절… 내버려 두세요.”

아넬이 간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이전과 달리 자레스는 그 눈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사내라 믿었을 때도 복잡했던 감정이 형용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혼탁해졌다.

무력감, 좌절감에 이은 원시적인 욕구를 제어하기가 어려운데, 그 욕구 때문에 또다시 아넬이 그를 밀어내는 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왜? 당신이 날 살려 낸 건 내게 마음이 있기 때문 아니었나?”

자레스가 으르렁대며 물었다.

아니라고 부정해야 했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 반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자신에게 그녀도 놀랐다.

언제 이렇게 제 마음이 덩굴처럼 자라나 있었던가. 메타에게 바쳐야 할 사랑이 왜 그에게로 향해 있는 건가.

아넬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생명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살려 낸 겁니다.”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성녀가 그를 사랑한다? 그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 역시 그 미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었다.

“에포메니.”

문득 자레스가 그녀를 부르자 저도 모르게 아넬이 부름에 응해 그를 바라봤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반응. 지금에 와서 보니 이리도 자연스러운 것을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타고난 우아함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를 어떻게 노예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당신은 왜… 노예인 척했지? 애초에 왜 신전을 탈출한 건가? 다음 대 성녀가 돼야 할 당신이?”

아넬은 대답 대신 애원했다.

“나를 보내 주세요, 자레스 황자. 난 신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키리아 님께 가야 해요.”

“웃기는군.”

하지만 자레스는 코웃음을 쳤고, 이를 갈며 답했다.

“내가 당신을 돌려보낼 것 같은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땐 아주 웃기는 상황이었군. 에포메니를 납치하려, 에포메니를 데리고 들어가다니.”

머리가 어지럽다. 눈물은 어느새 멈췄고, 아넬은 당황한 채 멍하니 자레스를 바라봤다. 그가 아넬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선언했다.

“애초에 당신이 내 목표였어, 에포메니. 내 손 안에 들어왔으니, 이젠 내 것이다.”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퀴나에는 알 수가 없었다.

접객실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별안간 자레스가 여자를 안고 나왔다. 그가 단단히 끌어안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차림이 이상했다.

그 와중에도 여자가 노예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걸 알아본 사람들 때문에, 자레스에게 새 여자가 생긴 것 같다는 소문이 황자궁에 쫙 퍼졌다.

그사이 카에티는 당혹감에 사로잡힌 채 황자궁을 나갔는데,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자레스의 침소 문은 한참 동안 잠겼고, 퀴나에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날이 바뀌었다.

아침나절이 돼서야 자레스가 퀴나에를 불렀다.

방으로 들어간 퀴나에는 깜짝 놀랐다.

자레스의 침대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간 그는 더욱 놀랐다.

여자였다. 그것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 미인이 반쯤 옷이 찢어진 채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었는데, 퀴나에는 곧 그녀가 파이디와 아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이디…? 아, 아니, 누나인가?”

“파이디가 맞다.”

침중한 얼굴로 장의자에 앉아 있던 자레스가 불쑥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거짓 이름이겠지. 이 여자는 에포메니다.”

“메타가 맙소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잠깐 찢어졌다 붙었나?

누가, 뭐라고? 에포메니? 차대 성녀?

파이디가 여자? 아니, 닮긴 했지만 파이디는 남자였는데… 그런데 왜 에포메니?

퀴나에가 명석한 머리를 활용하지 못한 채, 양쪽으로 깨지려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감싸 쥐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가요? 파이디가 에포메니라고요?”

자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온몸으로 진심을 담아 퀴나에가 외쳤다.

“미치셨습니까, 황자 전하?”

“나는 제정신이다. 미친 건 이 세상이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름은 아마… 아넬이라 했던가? 탈라사 출신이었지. 평민이라 성은 없었고.”

이미 그가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아넬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에포메니를 납치하려고 찾아온 그였으니, 그 정도 뒷조사는 해 뒀을 것이다.

하지만 퀴나에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현실이었다.

그가 혼란에 빠져 입만 껌뻑거리고 있자, 자레스가 걸음을 멈춰 세우고 명했다.

“황자궁의 경비를 배로 늘려라. 알겠나, 퀴나에? 에포메니다. 전 세계가 노리는 차대 성녀야. 키리아 성녀가 위독한 지금, 이 여자가 곧 성녀가 된다는 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저는 지금 남자가 여자로 변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만도 넘치게 힘든데요?”

“그건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은 명을 따라.”

자레스의 명령은 엄중했다.

“절대 에포메니를 놓쳐선 안 돼. 그리고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도 안 돼! 곧바로 우스라의 카에티에게 사람을 보내서 입을 다물라고 명하도록!”

퀴나에가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그제야 지금 일어난 사태의 여파를 짐작한 퀴나에는 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더럭 겁이 났다.

에포메니를 데리고 있다는 건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다간 재앙을 몸으로 받는 자리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양날의 검 정도가 아니라 한쪽엔 파멸을, 한쪽엔 황관을 든 두 얼굴의 신이다.

‘에포메니를 탈환하겠답시고 다른 나라들이 카비르를 침공해 온다면?’

상상만 해도 떨렸다.

아무리 대제국 카비르라 해도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이렌시아에 갈 때부터 에포메니를 손에 넣을 생각이었으니까. 시기가 조금 늦춰진 것뿐이다.”

“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고요?”

“그래, 원래부터 내 무기로 쓸 생각이었고, 지금 나는 최강의 패를 쥐게 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도, 생각도 달라졌다.

아넬은 그에게 더 이상 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가장 지독한 약점이 돼 버렸다.

강철 같았던 그의 심지를 흔들고, 내면의 연약함을 뒤집어 끌어내는 여자.

또다시 타들어 가는 심장에, 자레스는 다시 장의자에 주저앉으며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레스는 퀴나에에게 다시 엄명을 내렸다.

“에포메니가 입을 의복과 신발을, 그리고 침소를 꾸밀 물건들을 사들여라.”

“…방을 따로 주시게요?”

“아니. 내 방에 둔다. 보안을 강화하는 마당에 따로 재우는 건 말도 안 돼.”

‘와아, 이 인간이 드디어 제대로 미치기 시작했구나.’

아넬이 파이디였던 시절에도 그녀를 어떻게 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사람인데, 이제 여자인 걸 알게 됐으니 불이 붙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 심정이 처절하게 이해가 갔다. 아넬의 외모는 남자들을 미치게 만든다. 자레스가 들끓는 이유도, 처소에 가둬 두고 감추려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제 자레스는 아넬을 에포메니가 아니라, 여자로서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포메니의 시중을 들 시녀를 셋 구해라. 모두 믿을 만한 여자로.”

“알겠습니다, 전하. 바로 명을 받들겠습니다.”

퀴나에와 자레스가 나갔고, 얼마 되지 않아 하녀가 여성용 카프탄을 가져왔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진주가 박힌 신발과 부드러운 양털로 만든 슬리퍼가 들여졌다.

“옷을 갈아입으세요, 마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퀴나에로부터 자레스가 새로 들인 여자니 공대해야 한다고 들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외모를 보니 자레스 같은 황자가 아니라 황제의 여자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예뻐. 하아, 하늘나라 천사님들이 이렇게 생겼을까?’

하녀는 한숨을 내쉴 정도로 감탄했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왜 남자 노예들이나 걸치는 허름한 셔츠와 발목이 다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싫어요.”

아넬이 세차게 고개를 젓자, 하녀가 설득했다.

“어서 갈아입으세요. 퀴나에 님이 곧 오신다고 했는데, 그런 찢어진 옷차림으로 만나실 거예요?”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어서, 아넬은 억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녀를 내보내고 혼자서 카프탄을 걸치고 허리띠를 둘렀는데, 그러고 나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완연히 여자가 됐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모습이다. 전생에도 이와 같은 성장을 하고 배례식에 나가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노예의 모습으로 몇 달 다녔다고 지금 이 모습이 낯설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퀴나에의 목소리였다. 경어로 바뀐 게 어색했고, 굳이 문을 두드리며 의중을 묻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자레스보다는 말이 통하는 상대일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곧 퀴나에가 나타났다. 여자 옷을 입은 아넬을 보자 그가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 눈이 오늘 평생 치 복을 받았군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에포메니.”

“그런 말, 거북합니다. 그리고 에포메니라고 부르지도 말아 주세요.”

“그건 어쩔 수 없죠. 신이 보낸 성력의 증거인데, 노예 파이디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아휴, 이놈의 입. 에포메니께서 부디 메타의 자비로 이 입을 용서해 주십시오.”

“메타는 그런 이유로 사람을 벌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퀴나에 님.”

“하아, 이렇게 품위 있는 사람을 어떻게 노예라고 생각했지? 사람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것 같습니다, 에포메니.”

“퀴나에 님. 저를 에포메니라 생각하신다면, 이렌시아로 돌려보내 주세요. 키리아 님이 위독한 지금, 성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사근사근한 태도와 달리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째서입니까? 성녀가 없으면 세계의 중심이 흩어집니다. 메타의 은혜가 신전을 떠날 수는 없는 겁니다. 이건 신과의 약속입니다.”

“알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답니다. 에포메니… 아니, 이젠 거의 성녀님이라 해야 되나요? 당신은 보내기엔 너무 강력한 카드입니다.”

“퀴나에 님!”

“주군을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에포메니, 당신이 신을 위하는 것처럼, 저 역시 자레스 황자 전하를 진심으로 섬긴답니다.”

“사람이 신보다 위일 수는 없습니다. 제발… 절 보내 주세요!”

“아니오. 제게는 전하가 신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성녀라는 카드를 쥔 이상, 거의 무적에 가까워요. 죄송합니다, 에포메니. 저는 전하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돌연 퀴나에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바닥에 머리를 대고 아넬에게 절을 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에포메니. 아니, 미래의 성녀님. 미천한 범인이 성녀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하루아침에 그녀에 대한 취급이 달라졌다. 아넬의 처지도 완전히 달라졌다.

노예 파이디가 아니라 에포메니로 돌아온 지금이 오히려 더 이렌시아로 돌아갈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그를 깨달은 아넬이 절망에 잠겨 눈을 감았다.

***

자레스는 서신을 쓰고 있었다. 우스라에 보낼 것이었고, 그 내용은 꽤 심각한 것이었다.

우스라가 입을 다문다는 전제하에 자레스가 황제에게 하사받은 땅 전부를 양도하기로 했다.

그것만 해도 굉장한 재산이었는데, 거기다가 천만 디하브의 위로금을 주고 자레스가 아와드에 개척한 식민지에서 나는 특산물의 판매 이권 역시 주기로 했다.

“아주 그냥 우스라랑 한 몸이 되시죠. 이럴 거면 뭐 하러 따로따로 이익을 나눕니까?”

협상 내용을 적던 퀴나에가 투덜거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것 아닌가.”

“언제는 좋다고 혼서를 집어넣더니, 혼서 한 장의 대가가 아주 대단합니다그래.”

“…그 점은 나도 동감이다.”

그때 아넬이 에포메니인 걸 알았다면 절대 카에티에게 혼담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자레스도 입맛이 썼다.

“보상은 보상이고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전하.”

“독을 말하는 건가.”

“맞아요. 감히 누가 전하를 독살하려 했는지는 알아야죠. 카베기를 문초했는데 그가 끓인 커피에선 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디에 들어 있던 거지?”

“주전자에 담기고 난 뒤에 독이 들어간 것 같은데, 주전자를 조사해 보니 주둥이 안에 천이 끼워져 있더군요.”

“거기에 독이 담겨져 있었던 건가?”

“맞아요. 커피를 따르면서 독이 녹아들게 했겠지요. 아주 영리한 방법이었습니다.”

“내 앞에서 나를 죽이려 한 자의 칭찬을 듣고 싶진 않군.”

“문제는 누가 독살을 시도하려 했느냐인데, 당연히 우리 황자궁 식솔들 중에 암살자가 있었던 거겠죠? 그것보단 배후가 누구냐인 게 더 중요한 문제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상한 게 말입니다, 파이디… 아니, 이젠 에포메니지. 에포메니와 사브에게 전달된 식사에서도 독이 나왔다는 겁니다.”

“뭐라고?”

“사브와 에포메니가 막 먹으려던 찰나에 황자님이 부르는 바람에 둘 다 식사를 못 했지요. 한참 뒤에야 사브가 돌아와서 다 식은 음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색이 이상하게 변해 있더랍니다. 뒤늦게 제게 알리기에 쥐를 잡아서 먹여 봤더니, 쥐가 즉사했습니다.”

자신에게 독을 먹이는 건 하도 일상적인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넬을 노린 건 차원이 달랐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카에티?”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이긴 합니다만…, 카에티 님이 맞다면 자레스 님은 왜 죽이려 했는지, 그게 납득이 안 가네요. 자레스 님이 살아 있어야 결혼을 할 텐데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자레스가 신중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보상은 보상대로 진행하고, 이 독살 문제는 철저하게 수색해. 내 궁에 적의 간자들이 날뛰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전하.”

황자궁에 첩자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역시 다른 황자궁에 간자를 수명씩 심어 두고 있으니, 알고도 서로 묵인하고 견제하며 때로는 그들을 역이용해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게 그들 사이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번에 직접 공격이 들어왔으니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자레스의 궁에선 조용하지만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아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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