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헉!”
막사로 들어온 자레스가 다짜고짜 아넬을 침대 위로 집어던졌다.
보잘것없는 그녀의 잠자리가 아니라 자레스의 침대였다. 아넬이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려 버둥거렸지만, 자레스가 그녀 위로 올라타면서 아넬의 양팔을 내리눌렀다.
뭘 하려는지 몰라 겁이 났다. 당장 두 사람이 있는 곳이 침대 위다. 위험한 분위기에 아넬은 두려워졌다.
“놔, 놔주세요!”
“닥쳐!”
자레스의 분노는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
하긴 도망치려던 게 이번으로 두 번째다. 이번엔 뇌물까지 써 가면서 본격적으로 달아나려 했으니, 평범한 노예였다면 그 자리에서 어디 한 군데가 베였어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이번엔 제멋대로 자레스를 평가하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던가.
‘내가 너무 오만했어.’
자레스는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잔인한 남자가 아니었고, 노예에게 가혹한 사람도 아니었다. 아넬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레스를 평가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겪은 경험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일을 제외하면 그녀는 자레스란 사람을 너무 몰랐다. 그녀가 당한 일은 지독한 일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아넬이 그의 장점까지 모조리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밀어내려 버둥거리던 아넬이 이윽고 잠잠해졌다. 그저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자레스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폭력으로 제압하고 싶었다. 다시는 달아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두려움으로 압도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담담해진 그 눈을 보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됐다.
대체 왜 아넬은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없는 걸까. 왜 자꾸 아넬 앞에서는 제 것이었던 그의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는 걸까.
“제기랄!”
갑자기 밀려온 분노에 자레스가 주먹으로 침상을 내리쳤다. 아넬의 머리 옆, 손가락 한 마디쯤 떨어진 아슬아슬한 거리에 구멍이 뚫리면서 침대가 부서져 나갔다.
겨냥이 조금만 어긋났어도 아넬은 피투성이가 됐을 것이다.
아넬은 눈을 감았다 떴다.
평소 같으면 무서웠을 텐데, 지금은 자레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렇게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자신이 미안했고, 그래서 그를 달래고 싶어졌다. 하지만 무심결에 뻗은 자신의 손을 본 순간 아넬은 흠칫 놀라 손을 거뒀다.
그를 모르는 자레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막사 안을 빠르게 서성이며 분노를 달랬다.
“너를 묶어 둬야겠다.”
“…….”
“가둬 두는 것만으론 안 돼. 또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써서 달아나려 들겠지. 그런 희망마저 모두 꺾어야겠어. 팔다리를 묶고 짐승처럼 기둥에 매어 놔야겠다.”
아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무섭지 않았다. 거친 말을 지껄이지만, 모두가 위악이란 걸 알 것 같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갑자기 자레스가 우뚝 멈춰 서며 물었다. 하지만 아넬은 대답하는 대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에 자레스가 코웃음을 쳤다.
“제가 잘못한 걸 아는가 보군. 그래, 그게 노예다운 태도다.”
자레스가 막사 밖을 향해 외쳤다.
“밧줄과 쇠사슬을 가져와!”
아넬은 포박됐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은 쇠사슬에 묶였다.
예전보다 더 가혹해진 취급이었지만, 아넬은 받아들였다. 진짜 노예였다면 바로 처형당해도 할 말 없는 일이다. 지금은 날뛰는 그의 분노를 감내해야 할 것 같았다.
손발이 묶였기에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브가 두 사람 몫의 식사를 가져오자, 자레스가 빵과 스프가 담긴 쟁반을 들고 그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먹어라.”
자레스가 스프를 뜬 수저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손을 풀어 주시면 제 손으로 먹을게요.”
“그리고 또 도망을 치려고? 이젠 안 속아.”
“…….”
“좋게 말할 때 먹어라. 거절하면 강제로 쑤셔 넣겠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자 그가 수저를 밀어 넣었다. 가끔 빵을 찢어 입에 넣어줬고, 아넬은 거부하지 않고 계속 받아먹었다.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가 된 느낌이다. 처음 겪는 상황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넬이 거절하지 않자, 자레스도 분노가 한결 가라앉은 것 같았다. 제 몫의 식사를 마친 그가 돌연 아넬을 묶은 사슬을 풀어 줬다.
“전하?”
그가 아넬을 끌고 간 곳은 그의 침대였다.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그가 아넬을 침대 안쪽에 눕혔다.
“제, 제 잠자리에서 자겠습니다!”
“그랬다간 또 도망치겠지.”
“이, 이런 꼴로 어떻게 도망을 칩니까. 게다가 밖에는 병사들도 있고….”
“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계속 달아났잖아. 너무 머리가 좋은 게 탈이란 말이지.”
그가 이죽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묶은 밧줄을 풀어 침대 기둥에 연결했다.
“도, 도망 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놓아주세요!”
“왜? 이교도 사내놈들과는 잘만 잤잖느냐.”
“그건….”
“짐승들과 어울릴 수 있으면, 나와도 잘 수 있다.”
그는 명령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를 안쪽으로 밀어 넣은 자레스가 아넬의 곁에 몸을 눕혔다.
자레스가 아넬의 곁에 눕자 그의 체취가 훅 느껴졌다. 예전에도 한 번 접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밤새 함께 누워 있을 줄은 몰랐기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체향이 이제 와서 강렬하게 그녀를 자극했다.
‘어떡하지?’
당장은 그를 밀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넬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묵묵히 누워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를 썼지만, 등 뒤에서 그의 기척이 느껴져 자꾸만 긴장이 됐다.
손을 대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아넬은 잔뜩 몸을 웅크리면서 막사 벽 쪽으로 달라붙었다.
한편 자레스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아넬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막상 그녀를 같은 침대에 눕히고 나니 자꾸 아넬이 의식됐다.
맹세코 그녀에게 욕망을 느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경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자꾸만 온 신경이 아넬에게 쏠렸고, 그녀의 숨소리에 귀가 바짝 곤두섰다.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지만, 아넬과 자레스 모두 서로를 느꼈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등 뒤에 누운 자레스의 숨결이 한결 고르게 바뀌었다.
잠이 든 건지 확인하기 위해, 아넬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렸는데 몸을 뒤척이는 척 돌아누우니 자레스의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게 보였다.
코앞에서 보니 그의 등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이 났다.
마치 기둥 같았다. 일리파스의 덩치가 그보다 컸지만, 자레스는 훨씬 더 단단한 느낌이다. 어둠 속에 웅크린 그의 뒷모습이 마치 그녀 앞을 가로막은 산맥처럼 보였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넬이 이윽고 손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끈에 여유가 있어서 코앞까지 손을 내릴 수 있었는데, 막사 밖에 세워 둔 횃불 빛에 비춰 보니 어지간해선 이빨로 물어뜯는 정도론 끊어 낼 수 없을 것 같다.
“뭐 하는 거지?”
“헉!”
깜짝 놀라 쳐다보니 어느새 자레스가 몸을 돌려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또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 그냥… 소, 손목이 너무 아파서.”
“그럼 풀어 줘야겠군.”
정말?
얼떨떨해서 그를 쳐다보자 자레스가 침상 옆에 세워 놨던 환도로 그녀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레스가 밧줄을 던져 버리더니, 돌연 그녀를 끌어안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못 지른 채 돌덩이처럼 굳어 버리자, 자레스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픽 웃으며 내뱉었다.
“밧줄 대신 내가 널 묶어야겠다.”
‘헉!’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 기능도 못 하는 줄 알았던 그것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요동치며 움직였다.
단단한 팔에 감싸이자, 그대로 피가 멎는 것 같았고 그러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펄떡대기 시작했다.
‘미쳤어!’
밀어내야 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밀어낸다고 물러날 자레스가 아니었다.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면 가만있는 게 맞다.
머릿속으로는 그런 이유들이 숱하게 넘나들었는데, 정작 이 모든 게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는 걸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이건 그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이다. 죽임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 말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아넬은 그렇게 억지를 썼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그녀를 끌어안은 게 자레스라서가 아니라, 남자에게 안긴 게 처음이라 그런 거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문득 목덜미로 불어닥치는 숨결이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은 팔뚝에 힘이 들어가면서, 자레스가 그녀를 더 깊숙이 안았다.
‘안 돼!’
위험하다. 이건 너무 위험하다. 더 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런데 그때 막사 밖에서 분주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무칼라스가 외쳤다.
“전하! 급보다!”
갑자기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식었다. 비로소 자레스가 정신을 차린 듯했고, 그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환궁, 해야 한다. 서둘러서!”
“황도에 일이 생겼나?”
“성녀 키리아, 위독하다!”
그사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아넬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
동부로 향했던 것에 비하면 두 배의 속도로, 자레스와 두 황자는 황도로 돌아왔다.
셋 다 싸우다 죽기를 바랐던 황제와 유가였지만, 어쨌든 이기고 돌아왔으니 자레스를 개선장군으로 환영해야 했다.
유가는 축하연을 베풀고, 자레스의 승리를 높이 치켜세웠다.
황궁의 가장 큰 연회장에 귀빈들이 가득 찼고, 악사와 무희들이 기막힌 공연과 연주로 전승을 찬양했다.
일리파스와 스에반도 참가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연회의 주인공은 자레스였기에 그 당당함에 두 사람은 물론이고 유가까지 불편해졌다.
“이렌시아의 성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다.”
자레스 위주로 돌아가는 화제도 돌릴 겸, 유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들 성녀의 건강엔 관심이 없었다. 성녀가 죽어도 예비 성녀인 에포메니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대 성녀가 죽어야 에포메니가 성녀가 되는 건가?”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성녀가 죽은 다음에 에포메니가 성녀가 된 경우가 있나? 역사서를 보면 대부분 에포메니가 성년이 되면 전대 성녀는 자연스럽게 물러나고, 에포메니가 성녀의 자리에 올랐던데?”
“드물긴 하지만, 역사에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16대 성녀는 에포메니가 성인이 되기 전에 암살당하는 바람에, 에포메니가 바로 성녀가 돼야 했지.”
“성년이 되기 전인데? 에포메니는 성인이 돼야 성력을 발휘하는 거 아니었어?”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기록엔 그렇다는군, 형님. 공백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어.”
“그럼 이번에도 바로 에포메니가 성녀가 되겠군. 아아, 에포메니. 소문에는 이번 에포메니가 천사처럼 아름답다고 하던데.”
“에포메니는 원래 그렇게 아름다운 건가요?”
“에포메니들은 성력의 영향 때문인지 대체로 예쁘다더라. 하지만 이번 에포메니는 특별히 아름답다더군.”
화제가 성녀에서 에포메니로 옮겨 갔다. 여색을 밝히는 일리파스가 황홀한 얼굴로 입을 열자 스에반이 거기에 동조했다.
“그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금발 머리에 초록색 눈, 몸매도 뛰어난 데다 엄청난 미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문득 자레스가 꿈틀거렸다. 금발에 초록색 눈. 남자인 걸 제외하면 아넬과 똑같은 외모다.
그 소문 때문에 아넬을 잠시 의심한 적도 있지만, 아넬은 황홀한 몸매를 갖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 사내 녀석이었다.
“자레스 형님은 이렌시아에 간 적이 있었죠. 혹시 거기서 에포메니를 뵀습니까?”
“아니. 에포메니는 고사하고 성녀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그건 또 왜 그랬습니까? 아하, 혹시 성녀께서 형님을 박대하던가요?”
“이렌시아에 가 본 적도 없는 녀석이 박대를 거론하다니 우습군.”
코웃음을 친 자레스가 말을 이었다.
“성녀를 만나긴 했다. 하지만 성녀는 천으로 온몸을 가려서 몸매는 고사하고 얼굴도 볼 수가 없었어. 이런 소문은 들은 적이 없더냐, 스에반? 그렇다면 네놈이 부리는 정보통은 신통치 않은 놈인가 보구나.”
한 방 얻어맞은 스에반이 얼굴을 붉혔고, 연회장엔 일리파스의 웃음이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
황자궁으로 돌아온 자레스에게 퀴나에가 다가왔다.
표정을 보니 어째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예상대로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파이디가 앓아누웠습니다, 전하.”
“내게 보고까지 할 일인가?”
“그게 진짜로 아픈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고열로 죽도 못 먹고 게워 내기 시작한 게 벌써 사흘째입니다. 그러다 죽어 버리면 전하께서 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파이디가 아니라 전하를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퀴나에가 또 자레스를 살살 긁었다. 저 독설에 멀쩡히 남아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자레스가 이맛살을 구기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아넬은 마디나로 돌아온 뒤 곁방이 아니라 자레스의 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퀴나에는 또 이상한 소문이 난다고 펄쩍 뛰었지만, 이미 병이 든 상태로 돌아왔기에 더 말릴 수도 없었다.
그가 문을 닫으며 들어서자 구석에 놔둔 침대 위에 누운 아넬의 작은 몸집이 보였다.
자레스가 다가갔지만, 아넬은 깨어나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들여다봐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짚어 보니 퀴나에의 말대로 열이 상당히 높았다. 진짜로 아프긴 한 것이다.
“제발 저를 이렌시아로 보내 주세요.”
황도로 돌아오던 길에 아넬이 무릎 꿇고 빌었던 게 생각났다.
자레스가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아넬은 끈질겼다.
예전처럼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자레스가 들어주지 않자 아넬은 심지어 카비르로 돌아오겠다고 메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기까지 했다.
“안 돼.”
하지만 자레스는 들어주지 않았고, 아넬은 그 뒤로 몸져누웠다. 처음엔 자레스를 속이기 위한 꾀병인가 싶었는데 상태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심화가 깊어 몸이 나빠진 것이다.
‘성녀 키리아를 모신 적이 있어서 정이 남아 있는 건가?’
직접 시중을 드는 건 시녀들의 일이었다지만, 신전에서 일한 이상 성녀를 만나기는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넬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때맞춰 아넬이 잠꼬대를 했다.
“성녀님….”
열에 들뜬 상태에서도 마치 엄마처럼 키리아를 불렀다. 작게 속삭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자, 문득 그 모습이 어릴 적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도 그렇게 잠이 들 때마다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를 호강시키기 위해 노예 부대원으로 참전했건만, 정작 그의 어머니는 그가 황자로 인정받기 전에 죽었다.
그 뒤로는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며, 원한을 씹으며 그렇게 눈물을 감춘 채 잠이 들었다. 눈물은 오직 그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날 때마다 흘렸다.
이렇게 약해진 아넬의 모습은 고통에 버거워하던 자신의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꾸 끌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키리아 님. 흐윽….”
아넬이 흐느껴 울자, 말없이 그를 들여다보던 자레스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내자, 불현듯 아넬이 그의 손바닥을 잡으며 그 손에 자신의 볼을 비벼 댔다.
돌연 뱃속에 저릿한 느낌이 퍼져 나갔다.
아마도 아넬은 그의 손을 키리아의 것으로 착각하고 매달린 듯한데, 그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자레스는 얼어붙은 것처럼 그녀에게 붙들린 채 굳어 버렸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스스로에게 물어도 그도 대답을 모르기에 답할 수가 없다. 신을 믿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메타의 신탁이 간절했다.
***
아넬은 오밤중에 깨어났다.
목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에 잠에서 깼는데, 문득 그녀는 자신이 누운 것이 제 침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지? 허억!’
확인을 하기 위해 옆으로 돌아누운 순간 아넬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황자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곁에는 자레스가 있었다. 그냥 나란히 누운 게 아니었다.
그는 옆으로 팔을 뻗고 있었고, 아넬은 그의 팔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팔베개를 한 채 잠들었던 것이다.
‘미쳤나 봐!’
제 침대에서 앓고 있었는데 언제 이리로 옮겨졌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자레스가 저지른 짓이겠지.
이젠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자신의 침대로 데려가는데, 아넬은 그런 자레스를 경계하기는커녕 천연덕스럽게 팔베개까지 하고 잤다.
부주의한 자신의 모습에 심화가 끓어올랐지만 한편으로 다른 기억도 떠올랐다.
그녀가 지난밤 고열에 신음하고 있을 때 차가운 냉기가 그녀의 뺨에 닿았었다. 그때는 그게 구원인 것처럼 매달렸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자레스의 손이었다.
그 손의 주인이 가만히 멈춰 있다가 이내 그녀의 등을 토닥였던 게 생각났다. 마치 위로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고, 아넬은 그 덕에 고통을 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자레스는 그러고도 모자라 자기 침대에 눕히고 그녀에게 팔까지 내줬다.
처음 느낀 건 당혹스러움이었지만, 이내 감정의 물결이 잦아들면서 아넬은 그에게 안긴 채로 물끄러미 자레스를 쳐다봤다.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잔인한 것 같은데 따뜻하기도 하고.’
문득 눈물을 흘리며 잠들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며, 미안하다고 잠꼬대를 하던 자레스.
강한 척하지만, 실제로도 강했지만 그도 약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려고 마음만 먹으면 다정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알면 알아 갈수록 그에게 품고 있던 편견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사내는 울대뼈가 참 크구나.’
자세히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점들도 눈에 들어온다. 어깨가 넓다거나, 가슴팍이 단단하다거나, 그 밖에 여자와 다른 여러 가지 모습들.
반듯이 드러누운 자레스의 목선에 유난히 도드라진 울대뼈가 눈에 띄었다.
그녀에겐 없는 것이었다. 불현듯 그게 신기해져서 아넬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선을 더듬었다.
그다음 일어난 일은 아넬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잠든 줄 알았던 자레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아…!”
그리고 그가 아넬을 덮쳤다.
잠이 든 척, 그녀가 그의 팔 안에서 깨어나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걸 외면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몸을 지분지분 만지기 시작하자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이건 메타가 와도 못 말린다.
자레스가 그녀의 위로 몸을 겹치며 입술까지 겹쳤다. 말랑말랑한 입술을 가르며 그가 그 안으로 침범해 들어갔다.
‘흐읏!’
평소라면 거부했을 것이다. 당연히 밀어내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 대며 반항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아넬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누가 약이라도 쓴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고, 그를 밀어낼 의지가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변모에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지만, 분명한 건 이번엔 그녀가 먼저 그를 도발했다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가 자고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그렇다 해도 그를 먼저 건드린 건 변명할 수 없다.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혼란은 판단력을 무너뜨리고 결정을 방해한다. 그녀가 아무런 결론도 못 내리는 사이 자레스가 더 밀고 들어왔지만, 아넬은 그대로 그를 받아들였다.
예전과 달리 아넬이 거부하지 않는 게 자레스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늘 그가 강압적으로 밀어붙였고, 그녀는 울고 반항했는데 이번엔 아넬이 그를 순순히 허용하고 있었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한 가닥 이성의 끈이 끊어지면서, 자레스가 아넬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아무도 두 사람을 방해할 이가 없었다. 온전히 둘만 남은 이 시간과 공간에서, 자레스가 다시 고개를 비틀며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두 사람이 입술을 겹치는 소리가 어둠 속에 작게 울려 퍼졌고, 그것이 아넬을 자극했다.
그를 허락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짓누르는 자레스의 체중이, 열기가, 그리고 계속해서 입술 안을 휘젓고 있는 말캉한 살이 자신을 녹이는 것 같았다.
위험하게만 느껴졌던 것들이었건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모든 일들이 일어나서, 아넬은 저항할 의지를 잃고 말았다.
아넬은 그를 밀어내는 대신 자연스럽게 자레스의 어깨에 매달렸고 그러자 자레스의 몸이 불끈 요동을 쳤다.
뺨을 감쌌던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아넬이 걸친 보잘것없는 셔츠 자락을 밀어 올리며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슴팍 쪽으로 올라왔다.
원래대로라면 여자의 것이 잡혀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자레스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 자레스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자레스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아넬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알고서 저지른 짓이 아니었다. 그의 본능 속에서 아넬은 여자였고, 그는 몸이 이끌리는 대로 따랐다.
하지만 그건 그가 바란 모습일 뿐, 현실 속의 아넬은 남자의 몸이었다.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자레스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넬 역시 비로소 제가 저지른 짓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침대 한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또다시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선을 넘고 싶은 욕망이 갑자기 커졌다.
지금은 방해할 사람도 없고,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넬은 남자였다. 그 역시 소년 시절 숱한 추행을 겪었기에, 감히 자신이 당한 일을 아넬에게 저지를 수 없었다.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을 수도 없었다. 그건 황위를 향한 그의 열망만큼이나 절대적인 것이었다.
머릿속이 들끓었지만 자레스는 필사적인 자제력을 발휘해 아넬에게서 물러났다.
“네 방으로 돌아가라.”
곁에 그녀를 재워 놓고서 이성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운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서로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침대에서 내려간 아넬이 곧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문을 닫고 나갔다. 자레스에게는 수치심만 남았다.
“이러다 신벌을 받겠구나.”
자기 방으로 돌아온 아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엔 자레스가 강제로 취하려 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이번엔 그녀도 응했다. 심지어 열렬하게. 이건 미쳤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짓이었다.
자레스를 피하기 위해 노예의 신분을 자처하며 신전을 탈출했는데, 이제는 그 자레스에게 자신을 열고 있었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키리아 님.”
심지어 키리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양어머니나 다름없는 그녀가 위중한 상태인데 그를 망각하고 남자와 엉키다니.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키리아 님이 아픈 건 내가 성력을 계속 써 댔기 때문일까.”
예비 성녀인 그녀였지만, 정작 성녀가 된 뒤의 일은 잘 모른다.
시녀들도 그런 건 가르쳐 주지 않았고, 성녀가 되면 안다는 말로 자세한 사정을 숨겼다. 아넬이 아는 건 그녀가 성녀가 되면 전대 성녀 키리아는 은퇴해서 신전을 나간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전생에 아넬이 성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였는데, 아넬이 성인이 됐을 때만 해도 키리아는 건강한 상태였다. 그러다 그녀가 성녀가 되자 조용히 신전을 나가서 종적을 감췄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위독하다는 건, 자신이 힘을 쓴 것과 연결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아넬은 성녀가 되기 전엔 성력을 발휘한 적이 없으니, 지금 일어난 일들과의 연결 고리는 ‘성력’밖에 없다.
어찌 됐든 모든 결론은 이렌시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성력의 진실을 알려면 키리아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자레스와 헤어져 운명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서도 그녀는 이렌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키리아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면 성녀가 해결책을 알려 줄지도 몰랐다. 성녀가 되지 않고, 자레스와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키리아라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성녀가 되지 않겠다고 신전을 도망치려 한 게 잘못이었어. 차라리 키리아 님께 다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걸.’
아넬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는 그녀가 도망치면 다른 에포메니 후보자를 찾아 성녀의 자리에 올릴 줄로만 알았다.
차대의 성녀로서 교육을 받긴 했지만, 진실은 적당히 가려져 있었고 그녀가 아는 성녀에 대한 지식은 그 정도였다.
그때야 설마 그렇게나 피하려던 자레스를 만날 줄은 몰랐다. 운명이 그토록 지독하게 그녀를 자레스에게 이끌 줄도 몰랐다.
‘왜 메타께선 가만히 계시는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전능의 신인 메타라면 그녀가 자레스와 만나는 걸 방해했어야 했다.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로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그라면 차라리 자레스를 죽이는 게 맞을 텐데, 그는 아넬의 회귀 이후론 마치 사라진 것처럼 조용했다.
아넬은 그동안 운명의 격류에 휘말려 잊고 있던 사실을 비로소 자각했다.
‘모든 게… 전생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
똑같은 듯, 그렇지 않은 듯. 조금씩 그녀가 알던 흐름이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게 그녀에게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불어넣었다.
***
“황자께서 그 노예를 아예 끼고 산다고?”
“네, 아가씨. 알수무가 전해 왔는데 잘 때만 방을 따로 쓰지, 한시도 곁에서 떨어뜨려 놓질 않는답니다.”
알수무는 카에티가 자레스의 하인들 사이에 몰래 심어 놓은 첩자였다. 자레스가 카에티에게 첩자를 보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똑같은 짓을 했는데, 그건 별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황궁 어디에나 첩자들이 득시글거렸고 암살과 기습이 횡행했다.
자레스 위로 있던 젊은 황자들 역시 그렇게 차례로 잘려 나갔으니, 그들이 자레스에게 당했는지 다른 황자들에게 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젠 적당히 숨기지도 않는단 말이지.”
하인을 내보낸 뒤 카에티가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일부러 아넬을 돌려받으러 온 것도 그렇고, 그냥 일반적인 색욕이 아니었다.
그저 남색을 즐기는 거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노예 놈에게 진심이 된 거면 그게 더 문제였다.
자레스가 혼사를 물리지는 않았지만, 보류된 채로 유지되고 있었다. 정말 혼사가 이뤄질지도 의문이지만, 혼인을 한다 해도 이젠 카에티의 체면이 말도 안 되게 뭉개진다.
‘사내놈과 사랑을 다퉈야 한다니.’
고민하던 그녀가 하인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걸 그 노예 놈의 밥에 타라고 알수무에게 전해.”
독초를 말린 것을 내주며 카에티가 말했다.
“이걸 먹으면 설사를 하고 피를 토하다 죽게 될 것이다. 겉으로만 봐서는 이질에 걸렸다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이건 자레스 님의 커피에 타거라.”
카에티가 이번엔 얇은 가죽에 싼 거친 가루약을 내밀었다.
“조만간 황자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때 자레스 님이 마실 커피에 이걸 타라고 해.”
***
알수무는 카에티의 수하가 전해 준 약을 받아 처소로 돌아왔다.
‘이 약은 쓴맛이 강하니 반드시 커피에 타서 맛을 감춰야 한다.’
카에티의 전언이었다.
‘말은 쉽지. 카에티 님도 참, 어려운 걸 간단하게 주문하시네.’
자레스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음료수와 음식 모두, 그가 데리고 있는 사병들의 친척처럼 전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들이 만들고 올리도록 하였기에 숱한 암살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알수무가 자레스의 궁에서 일하고 있지만, 주방과는 거리가 머니 이 약을 쓰기 위해선 모험을 해야 했다.
“일단은 보관해 두자.”
카에티는 일주일 뒤에 궁에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그전에 어떻게든 이 약을 탈 방도를 알아내야 했다.
그전에는 약을 숨겨 놔야 했기에, 알수무는 그녀가 쓰는 베갯잇 속에 카에티가 준 두 가지 약을 밀어 넣었다.
처리를 하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 역시 확인했다.
그나마 하인들은 노예와 달리 개인 방을 가질 수 있었다. 작긴 하지만 그녀가 초대하지 않는 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알수무는 약을 숨긴 뒤 안심하고 방을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문을 닫고 사라진 직후, 열려진 창문으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
이 방은 2층이었기에, 알수무는 창문 쪽에 누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알수무가 방에 없는 걸 확인하자, 몸집이 왜소한 남자가 창문을 넘어 들어와 베갯잇에 숨겨 둔 약을 끄집어냈고, 그 길로 줄달음을 쳐 유가의 궁으로 향했다.
“뭔가 저지르지 않을까 기대했지.”
수하인 무르마의 보고를 받은 유가가 킬킬 웃었다.
진작부터 카에티 쪽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유가가 첩자를 심은 방법은 자레스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퀴나에가 카에티에게 보낸 첩자를 매수해 이중 첩자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쭉 지켜본 결과 오늘 그 꼬리를 잡았다. 약을 살펴본 의사가 하나는 독약이라고 진단했고, 또 하나는 다른 종류의 약이라고 말했다.
유가는 그에 흥미를 느꼈다.
“카에티가 독을 보내왔군. 목표가 과연 누구일까?”
혼인 상대자인 자레스는 아닐 것이다. 보나마나 아넬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목표는 자레스겠지. 아주 깜찍한 여자로군. 자레스가 보통 아닌 신부를 맞겠구나.”
장난을 좀 쳐 볼까?
유가가 빙글빙글 웃다 무르마에게 말했다.
“카에티가 자레스에게 보낸 것과 비슷해 보이는 가루약을 준비해라. 그리고 그 독약을 자레스에게 보낼 약과 바꿔치기하도록.”
“노예 놈에게 먹일 약은 어떡할까요?”
“그건 내버려 둬. 하찮은 노예 놈이야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니, 우린 자레스만 없애면 된다.”
“카에티의 첩자가 과연 자레스 황자에게 약을 먹일 수 있을까요? 저희도 그동안 독살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다 실패했는데.”
“그것도 신경 쓸 것 없다. 방법은 카에티의 첩자가 알아서 궁리할 것이니, 우리는 그저 일이 돼 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실패한다 해도 밑져야 본전, 손해 볼 게 전혀 없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유가가 덧붙였다.
“성공하면 죄는 카에티가 뒤집어쓸 것이야. 우린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