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넬은 막사 안에 갇혔다.
무칼라스는 자레스의 명을 충실히 지켜 아넬의 입에 재갈을 물렸고, 재갈을 풀지 못하도록 손발까지 묶었다.
짐짝처럼 이부자리 위에 던져진 아넬은 밧줄을 풀려 애를 쓰다 결국 포기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냉혹한 남자. 잠시나마 불쌍하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어.’
전쟁 포로를 죽이는 거나, 이교도를 산 채로 수장하는 거나 사실 별나게 잔인한 게 아니다. 하지만 사로잡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역시 유별난 게 아니었다.
손만 내밀면 간단한 것을, 자레스는 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처형을 결정했다.
‘포로들 중에 어린아이들도 많았는데. 그 아이들까지 모두 죽일 건가?’
자레스는 할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남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사람을 죽이는 자와 생명을 살리는 자.
그와 아넬 사이엔 너무나 큰 간극이 있었다. 새삼 그를 절감한 아넬의 눈에서 끊이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레스는 그날 밤늦게야 돌아왔다.
스에반과 일리파스가 전후 처리를 위한 회의를 요청하는 바람에 시간이 더욱 늦었는데, 전후 처리는 다 핑계고 사실은 자레스의 전공에 숟가락을 얹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뿌리치고 돌아온 자레스는 그때까지 묶인 채 누워 있는 아넬을 보고는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을 더욱 구겼다.
“이대로 배에 함께 실어 바다에 던져 버릴까.”
위협적인 어조로 으르렁댔지만, 아넬은 그가 화를 내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태도에 더 화가 났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자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이 녀석이 뭐라고!’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끌어내라 명령하는 대신 필사적으로 화를 참았다.
그리고 아넬을 묶은 밧줄을 끊어 버렸다.
위협만 했지, 정말 죽이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넬은 고맙다는 기색도 안 보이며 말없이 풀린 손목만 문질렀다.
피가 돌지 않아서 퉁퉁 부어 있었고, 묶인 자리마다 멍이 들었다. 그걸 보니 잠시나마 화가 가라앉았지만, 아넬은 약한 주제에 이를 악물며, 그를 외면하고 있다.
도대체 이 시건방진 노예가 어디까지 기어오를지 알 수가 없었다.
자레스가 그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지만, 아넬은 모른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그 모습에 자레스는 갑자기 아넬을 덮치고 싶은 무서운 충동이 들었다.
동부로 오는 내내 잘 참았는데,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무뎌졌다 생각했는데, 아넬은 끝내 그의 예민한 부분을 들쑤셔 내고 냉정한 그를 들끓게 만든다.
‘겨우 노예 하나 때문에….’
자레스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아넬은 천한 노예였다. 그냥 무시하거나, 아니면 죽여 버리면 된다.
그런데 그게 되지 않았다. 아넬은 끊임없이 그를 거스르며 그를 시험했고, 자레스는 그런 아넬을 죽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했다.
어느 것 하나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고,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자레스 역시 괴로운 밤이었다.
***
자레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자는 척했지만, 여전히 깨어 있었던 아넬은 그가 잠든 기색을 보이자 조용히 일어났다.
전투에 늦은 밤까지 이어진 회의로 그도 피곤했을 것이다. 아넬은 살그머니 움직여서 막사 밖으로 나갔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날이 개어서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 빛에 아넬을 알아본 자가 말을 걸었다.
“어딜 가냐?”
밖에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군사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도망치기는 어려웠다. 아넬은 조그맣게 대답했다.
“오, 오줌이 마려워서요.”
“헐, 고추도 작은 게 오줌은 마렵나 보지?”
일리파스의 노예가 온 황궁에 다 퍼뜨렸나 보다. 아넬은 그 와중에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서쪽으로 가면 간이 변소가 있어. 그리로 가라. 변소 너머로도 병사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으니 어디 도망갈 생각은 말고.”
잠깐이나마 들었던 탈출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넬은 화장실로 가는 대신 그나마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동부로 오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나 어느새 달은 보름에 가까워져 있었다.
환한 달빛에 세상이 흰 비단을 뒤집어쓴 것처럼 은은하게 반짝였고,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또 눈물이 났다.
“키리아 님.”
어머니 같았던 그녀가 그리워졌고 그러자 울음이 더욱 치밀어, 아넬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거 아십니까, 형님? 제가 심어 둔 첩자들이 그러는데 예론킬이 죽은 게 아니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스에반과 일리파스는 자레스와의 작전 회의를 마친 뒤 자기들끼리 술을 나눠 마신 참이었다.
깐깐한 자레스를 욕하고 전공을 독차지해 버린 그에 대한 질투를 터뜨리다 자기들의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술김에 털어놓은 뜻밖의 정보에 일리파스가 귀를 기울였다.
“시체를 끌고 다니다 목을 잘라 장대 끝에 걸어 놨다던데? 그건 뭐란 말이냐?”
“그 시체가 가짜라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예론킬은 세레그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럼 자레스가 예론킬에게 속았다는 말이야? 이거 부황께서 아시면 어떻게 될까?”
“후우, 일리파스 형님.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십니까? 소문일 뿐 확증이 없으니 부황께 알리긴 어려워요. 그뿐 아니라 지금 예론킬이 본국으로 돌아간 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럼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어쨌든 자레스가 전투에서 승리했잖아요. 그냥 그런 소문이 있다는 거지, 자레스 형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요.”
“뭐야? 그럼 그런 말은 왜 한 거야? 괜히 신경만 쓰이지 않느냐!”
일리파스가 투덜거릴 때였다. 문득 그의 눈에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신형이 보였다.
“저건… 자레스가 부리는 노예가 아니냐?”
스에반 역시 아넬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처울고 있는 걸 보니 노예 신세가 고달프긴 한가 봅니다. 아니면 자레스 형님이 침대에서 괴롭힌 걸까요?”
스에반이 지저분한 농담을 지껄였지만 일리파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홀린 듯이 아넬을 쳐다보던 일리파스가 갑자기 말했다.
“너 먼저 가거라.”
“형님?”
“어서 가래도. 나는 갑자기 볼일이 생각났다.”
말을 마친 일리파스가 조심스럽게 아넬을 향해 다가갔다. 우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그가 다가가는데도 눈치를 못 채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넬의 모습이 예전과 달리 고왔다. 달빛 아래라서일까?
‘진짜 피부가 하얗게 변했네?’
일리파스가 꿀꺽 침을 삼켰다.
사내인 게 분명한데, 달빛 아래서도 확인할 수 있는 고운 피부와 머리카락이 아넬의 인상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곱상한 노예였다면, 지금은 고귀한 여인처럼 보였다. 사내인 게 분명한데도,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아넬은 영락없는 여자였다.
일리파스는 미인에게 약했고, 미인의 눈물에는 더 약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가 남자란 걸 알고 있지만, 여자를 방불케 하는 고운 선과 그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일리파스를 홀렸다.
“일리파스 황자님?”
그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일리파스를 확인한 아넬이 깜짝 놀랐다.
“어, 크흠흠. 노, 놀라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며 일리파스가 그녀의 곁에 털썩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거대했다. 한 번은 그녀를 죽을 위기까지 몰고 간 사람이 아닌가. 아넬은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느끼고 주춤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거, 뭐 내가 무슨 뱀이냐? 그렇게 못 볼 걸 본 것처럼 피하게?”
“…….”
“이젠 이용 안 해. 아, 그때는 네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 아, 아니다. 그때는 자레스와 적이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고!”
“지금은 적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아닌 건 아니지만…, 적어도 널 뭐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고.”
일리파스가 우물쭈물 중얼거리다, 결국 진심을 토해 냈다.
“그러니까 날 그렇게 피하지 말란 말이다. 난 그냥 지나가다 네가 울고 있길래, 좀 위로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마음은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노예도 사람인지라, 저를 죽이려고 했던 분이 껄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말이야말로 노예가 지껄일 수 없는 말이었으나, 천생 노예가 아닌 아넬은 그걸 몰랐다. 그녀의 분위기에 밀린 일리파스 역시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일리파스는 카비르에 도착해 그녀를 한 번 본 것 말고는 아넬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넬은 노예답지 않게 똑똑했고 말에는 위엄이 있었다. 일리파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압도당했다.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내가 사과하면 되겠느냐?”
머리를 긁적거리던 일리파스가 갑자기 허리춤에 꽂혀 있던 검집을 풀었다.
“가져라.”
“이런 건…. 황자님께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아, 내 마음 편해지려고 주는 거야. 그러니까 받아 둬.”
그리고 그가 망설이다 다시 말했다.
“그리고, 어…. 음, 다음번에 만날 때는 웃는 얼굴을 보여 다오.”
“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리파스가 멀어져 가자, 아넬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나쁜 사람 같진 않은데.”
하지만 위험한 사람이다. 변덕스럽고 충동적이며 왜 아넬에게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노예를 우습게 아는 사람이었다.
“황자라 어쩔 수 없는 건가.”
고개를 떨어뜨린 아넬이 손에 쥐어진 검집을 봤다. 황자의 검답게 검집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큼지막한 보석도 한 개 박혀 있었다.
아마 비싼 물건이리라. 그 순간 갑자기 아넬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넬은 그 길로 막사로 돌아갔다. 밖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이 그녀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는데, 아마도 그녀가 늦게 돌아온 탓에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넌 대체 뭐 하다가…!”
그때 아넬이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병사님. 저 좀 도와주세요.”
“뭐?”
“제가 이 군영을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대신 대가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황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황궁이란 감옥 속에 갇혀 있지도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도망가지 못할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녀가 자레스 곁을 도망치지 못한 건 계속 제힘으로 달아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뇌물을 주면 더 확실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일리파스가 준 검은 그 용도로 적격이었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검을 본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허, 험!”
누구 보는 눈이 없나, 병사는 사방을 돌아봤다. 막사 사이사이 경비병이 지키고 있긴 했지만, 너무 멀어서 이쪽의 동태를 자세히 알지는 못할 것이다.
병사는 재빨리 검을 뺏으려 손을 내밀었다.
“무사히 빠져나가면 그때 드리겠습니다.”
아넬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며 등 뒤로 감추자, 병사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기다려라.”
그러더니 병사가 자신의 막사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의 손에 투구와 군복이 들려 있었다. 병사가 그를 던졌다.
“그 모습으론 절대 못 나가. 군복 입고 날 따라와라.”
도박이 성공했다. 아넬이 얼른 군복을 뒤집어쓴 다음 병사를 따라가자, 병사가 근처에 서 있는 경비병에게 말을 걸었다.
“나 잠깐 볼일이 급해서 말이야. 변소에 가 있는 동안 나 대신 전하의 막사를 지켜 주지 않겠어?”
“알았어!”
별다른 것 없는 부탁이었기에 병사가 이동해 오자, 그 틈을 타 병사가 아넬을 끌고 진영의 바깥쪽을 향해 걸어갔다.
둘 다 군복을 입고 있었기에 아무도 막는 자가 없었다.
아넬이 노예의 복장으로 길을 나섰다면 아마 바로 붙잡혔을 텐데, 아넬과 병사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경비병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외곽 쪽으로 나왔다.
“난 이만 돌아갈 테니 여기서부턴 알아서 가라.”
“어디로 가야 하죠?”
“동부로 오는 길에 봤으니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죽을 고생한다는 건 잘 알고 있지? 남쪽으로 내려가면 도시가 있어. 거기서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면 될 거야. 재주껏 가 봐.”
“감사합니다.”
“조심해. 이 외곽에도 경비병이 순찰을 도니까,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경비가 지나가면 그때 달아나.”
말을 마친 병사가 바로 뒤돌아섰다. 그가 말을 해 주지 않았으면 모르고 나섰다가 바로 잡힐 뻔했다.
아넬은 그의 조언대로 사람보다 커다란 바위틈에 숨어 경비병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언제 자레스가 깨어나 그녀가 없어진 걸 발견할지 몰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달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경비병 두 명이 짝을 지어 지나갔고, 아넬은 그 뒤 몰래 걸음을 옮겨 진영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나왔다!”
죽을힘을 다해서 달리자 곧 진영에 세워 둔 횃불 빛이 아스라하게 멀어졌다. 그제야 정말로 탈출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항상 자레스의 곁을 떠나려다 실패했었다. 한 번은 의사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려다 자레스에게 잡혔고, 그다음엔 노예상에게 팔리고, 카에티에게 보내지기도 했다.
카에티에게 다른 나라로 보내 달라 애걸했지만 오히려 악투에게 끌려가 더 나쁜 처지로 떨어졌는데 이번엔 정말로 그녀의 힘으로 도망친 것이다.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뿌듯하기도 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남쪽? 오늘 안에 내 걸음으로 도착할 수 있을까?’
해안을 떠올린 건 그때였다. 자레스는 내일 이교도들을 배에 태워 수장시키라고 명령했다.
해안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배를 바다에 띄워 놨는데, 거기에 이교도들을 실어 가려면 보트를 해안에 대 놨을 것이다.
그 배가 있으면 남부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고, 걷는 것보다는 훨씬 빠를 테다.
‘이교도들을 구출해서 함께 도망치자.’
그런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애초에 도망을 결심한 게 뭣 때문이던가. 이교도들이라 하여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레스에게 실망해서였다.
할 수 있다면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메타는 자비의 신이니, 이교도들을 살리고 이렌시아로 데려가 신의 감화를 받게 하고 싶었다.
아넬은 둘러 입은 군복을 벗는 대신 조심스럽게 산을 넘어 해안 쪽으로 다가갔다.
이교도들이 수용된 해안에 횃불이 두어 개 세워져 있어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 빛에 꽤 많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너무 많아.’
어떻게 저들의 감시를 뚫고 이교도들을 구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넬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은 수풀이라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들이 있었지만, 해안은 모래가 가득한 허허벌판이었다. 식물들을 성장시켜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다.
‘어떻게 하지?’
주변에 삭정이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긴 해지만, 이건 무기가 되지 않았다.
겨울이라 나무들은 죄다 잎이 떨어져 있어서 몸을 숨기기도 어려운 상태라, 아넬은 몰래 해안가에 둘러선 병풍 같은 바위 뒤로 기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쥐새끼 같은 놈.”
“어?”
아넬이 깜짝 놀라 위를 올려본 순간 누군가 그녀를 내리쳤다. 딱 소리와 함께 아넬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병사 한 명이 어깨에 군복을 걸친 녀석을 짊어지고 왔다. 등불을 등지고 서 있던 경비대장 앞에 녀석을 내려놨는데, 대장은 불빛 아래 굴러 나온 아넬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
“이 녀석은 누구냐?”
“저도 모릅니다. 사실은 우리 군영을 도망치는 걸 보고 몰래 쫓아온 참입니다. 탈영병인가 싶어서 잡으려 했는데, 뜻밖에도 이 녀석이 이쪽으로 오더군요.”
“탈영병이라고?”
“예. 그런데 숲에 숨어서 이쪽을 탐색하는 게, 아무리 봐도 행동이 수상해서 일단 때려눕혔습니다.”
하지만 아넬을 들여다본 경비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우리 병사가 아니야. 이렇게 어린놈이 병사로 들어왔을 리가 없잖아.”
불빛에 드러난 아넬의 얼굴은 겨우 열두어 살로 보였기에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병사로 변장해서 이교도들을 구하려고 한 것 아닌가?”
“그럼 이놈도 이교도일까요?”
“아마 그런 것 같군. 하, 군복은 대체 어떻게 구한 거지?”
아넬은 막사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은 데다가, 이 해안에 왔을 때는 외투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무칼라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넬의 신분을 확인해 줬겠지만, 여기서는 아넬이 자레스의 노예 파이디란 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 빠르게 결정이 내려졌다.
“이놈도 손발을 묶어서 이교도들 사이에 던져 놔라. 내일 배에 태워서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자.”
***
비릿한 바다 냄새에 아넬은 눈을 떴다.
손발이 너무 아팠다. 뭣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뒤통수가 너무 아파서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얼핏 고개를 들었다가 고통이 작렬하는 바람에 아넬은 신음을 흘리며 도로 모래에 얼굴을 파묻었다.
“여기가 어디지?”
“움직이지 말게. 얻어맞은 데가 꽤 아플 테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넬이 또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아넬은 그렇게 한참을 끙끙 앓았는데, 간신히 통증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키자 자신이 포박된 채 이교도들 사이에 쓰러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잡혔구나!’
어제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내리친 건 기억이 났다. 결국 그녀는 누군가에게 들켰고, 이렇게 묶여서 이교도들 사이에 던져졌나 보다.
“자네는 우리 교인이 아니군. 그런데 어쩌다 여기 들어오게 됐나?”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물었다. 그의 주변에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몰려 있었는데, 그들 역시 비슷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교도인 이들에게 사실은 당신들이 배척하는 메타 신의 성녀가 될 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 일어나라!”
그러는 새에 경비대장이 외쳤다. 이교도들이 미적거리자 병사들이 창대로 그들을 후려쳤고, 위협에 밀린 사람들이 억지로 일어나 해안 쪽으로 걸어갔다.
아넬 역시 밧줄에 묶인 포로들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얼결에 함께 일어나 걷기 시작하자 그녀에게 신분을 물었던 노인이 외쳤다.
“여보시오! 여기 이 아이는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오! 풀어 주시구려!”
그 말에 경비대장이 아넬을 봤지만 이내 콧방귀를 뀌며 외면했다.
“내 알 바 아니다!”
“억울하게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소! 칼리크를 믿는 것도 아닌데, 우리와 같은 이유로 죽는 건 너무하오!”
“너희들을 구하려던 놈이다. 칼리크를 믿든 메타를 믿든 한통속이야. 그러니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외친 병사가 검집째로 아넬의 등을 후려쳤다.
안 그래도 뒤통수가 아팠는데, 등을 맞자 현기증이 밀려오면서 아넬은 고꾸라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 엎어진 채 질질 끌려가자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그녀를 밀어 일으켜 억지로 걷게 했다.
“칼리크 신께서 최후까지 함께하실 걸세. 우리와 함께 순교하면, 그분께서 신의 정원에서 맞아 주시리니.”
“칼리크는 악신인데… 신의 정원이라니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렇게 말하자, 노인이 슬프게 중얼거렸다.
“자네를 위해 기도하겠네. 의로운 선인이라, 천국에 가면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앉게 될 걸세.”
해안으로 걸어간 그들 앞에 보트가 준비돼 있었다. 이교도들은 모두 열 대의 보트에 태워졌고, 곧 수부들이 노를 저어 저 멀리 띄워 놓은 배를 향해 나아갔다.
‘나도 함께 수장되는 건가?’
배 쪽을 바라보던 아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주변엔 식물도 없었고, 도움이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해초를 성장시켜 병사들을 바닷속에 빠뜨릴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러다 배가 뒤집히면 보트에 탄 모두가 함께 빠질 테고, 줄에 묶인 사람들 모두 제대로 헤엄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자레스 황자의 노예라 밝히고 살려 달라 할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살아난다 해도 자레스가 그녀를 살려 줄지도 의문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교도들을 내버려 둔 채 혼자만 살고 싶지도 않았다.
‘마지막을 칼리크를 믿는 신도들과 함께하다니….’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메타 앞에 서면 신의 분노로 아르드가 다시 멸망할까 두려웠다.
“메타시여.”
그녀가 중얼거리자 이교도들이 아넬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칼리크를 향해 그들만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 기도에 응답하는 것처럼,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며 비가 내렸다.
***
갑자기 천둥이 치는 바람에 자레스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 깊이 잠들었다고 놀란 것도 잠시, 자레스는 시선을 돌린 자리에 아넬이 없다는 걸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갔지?”
자레스는 체통을 잃고 싶지 않아 잠시 동안 기다렸다.
경비가 철저한 이 군영에서 외모가 눈에 띄는 아넬이 달아날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밖에 병사도 세워 함부로 나다니지 못하게 단속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넬은 나타나지 않았고, 초조해진 자레스는 막사를 나가 병사를 불렀다.
“파이디는 어디에 갔나?”
“안에 없습니까?”
병사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미 일리파스의 검은 그만 아는 비밀 장소에 묻어 놨겠다, 그는 시치미를 뗐다.
“없으니까 묻는 거다. 놈이 어디에 있지?”
“저는 모릅니다, 전하.”
“뭐야?”
“믿어 주십시오, 전하. 내내 이 앞을 지키고 섰지만 파이디 놈이 나오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아, 제가 잠깐 소피를 보고 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적이 있는데 혹시 그때 파이디가 나간 게 아닐까요?”
“감히 수비를 소홀히 하고 자리를 비웠다고?”
“저 대신 옆 막사에 있는 친구를 불러 지키게 했습니다만, 어쩌면 그 친구가 한눈을 판 사이 파이디 놈이 도망쳤을지도 모르죠. 전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도망을… 쳤다?”
핑계까지 완벽했으니, 심문을 받는다면 그 친구가 당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싸늘한 눈으로 병사를 노려보던 자레스가 갑자기 외쳤다.
“무칼라스를 불러들여라!”
“네, 전하!”
“그리고, 이놈은 당장 끌어내서 발목을 잘라라!”
갑작스러운 명령에 병사가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전하. 억울합니다, 전하! 저는 정말 못 봤습니다!”
“못 봤다? 감히 황자의 막사를 지키면서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보지 못했다고? 그게 핑계가 된단 말인가? 무칼라스! 다리를 자르기 전에 이놈의 쓸모없는 눈부터 파내!”
끔찍한 명령이었다.
병사는 아넬에 대한 자레스의 집착이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황자의 명령에 이유 따윈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자레스는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핑계로 사람의 팔다리를 자를 수 있는 자였다.
“명을 받든다.”
그에게 불려온 무칼라스가 바로 검을 빼 들었다. 칼날을 번쩍이며 그에게 다가오자, 겁에 질린 병사가 결국 실토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전하!”
“지금 사실을 말한다면 살려 주지.”
자레스가 잔혹하게 입귀를 비틀며 말했다.
“눈 한쪽으로 끝내 주겠다. 하지만 거짓을 말할 경우엔 눈과 팔, 다리를 다 자르고 마지막엔 목을 자를 거야.”
적어도 목이 잘리는 것보단 눈 하나로 끝내는 게 나았다. 포기한 병사가 벌벌 떨면서 내뱉었다.
“마, 말하겠습니다, 전하! 그놈이… 파, 파이디 놈이 제게 뇌물을 주길래… 놈에게 군복을 줘서 군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 뒤는 저도 모릅니다!”
자레스는 말이 없었다. 극도의 분노를 느꼈을 때의 버릇 그대로, 그는 격분했을 때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미동도 하지 않던 자레스가 호흡 여러 번이 오갈 즈음 마침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약속대로 이놈의 한쪽 눈을 파내라.”
“크윽.”
그래도 살았다. 병사는 안도했으나, 이어서 자레스가 명을 내렸다.
“그리고 밧줄로 묶은 뒤 말에 실어 사막으로 보내라. 놈이 살아서 사막을 빠져나갈지, 죽어서 사막에 떨어질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그건 사실상 죽으라는 말이었다. 식량 하나 없이, 한쪽 눈은 파인 채 사막에 버려지면 그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목은 베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켰지만, 사실상 사형선고였다.
“전하! 살려 주십시오, 전하! 전하!”
병사가 끌려 나간 뒤, 자레스는 비에 젖은 채로 말에 올라타며 명을 내렸다.
“무칼라스! 수색병을 내보내라!”
“명, 받든다!”
겨우 노예 하나 때문에 자레스가 이 정도로 움직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칼라스는 우직한 성격이었고, 주인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수색대를 조직해 동서남북으로 내보낸 뒤, 무칼라스는 자레스를 쫓아 병사가 마지막으로 아넬과 헤어졌다는 지점으로 갔다.
하지만 종적을 찾는 건 실패했고, 자레스는 말없이 해안으로 이어지는 산 쪽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이해가 가지 않겠지, 무칼라스.”
“나는 명, 받든다.”
그 말이 오히려 더 썼다. 단순한 무칼라스마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기록에 세계의 남쪽 끝에 얼음의 대륙이 있었다고 하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무칼라스가 그를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그 얼음의 대륙 밑에 해저 화산이 있었다더군. 그 차가운 얼음 바다 밑에 가장 뜨거운 불이 있었다.”
잠시 말을 끊은 자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내 상태가 그렇다.”
***
아넬이 탄 보트는 범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병사들이 탄 작은 보트들이 범선 옆에 몇 척 떠 있었는데, 그들의 배에는 폭약이 실려 있었다.
아넬이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병사들이 폭약을 뱃전으로 날랐다. 아마 그 폭약이 터지면 배가 파괴되면서 그대로 침몰할 것이다.
“지혜의 주 칼리크시여, 생명의 근원 칼리크시여. 하늘에 오르는 이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노인이 기도하기 시작하자, 다른 보트에 탄 이교도들 역시 기도하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배를 향해 직진하던 보트들이 방향을 꺾어 하나둘씩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뭐지?’
이교도들 역시 놀란 눈치였다. 열 척의 보트는 바다로 나아가는 대신 굽어진 해안선을 돌아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절벽 때문에 아래쪽 해안에선 보이지 않는 위치였는데, 뜻밖에 거기에 카비르의 옷을 걸친 인형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아넬을 비롯한 이교도들이 모두 배에서 내려졌다.
그 대신 인형들이 배에 실렸는데, 그 안에 모래를 넣은 까닭에 무게감은 사람과 비슷해서 그것들을 태우자 뱃전이 적당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교도들 대신 인형을 태운 열 척의 보트가 배를 향해 나아갔다. 멀리서 보면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보트가 배에 닿자 미리 와 있던 병사들이 인형을 등에 메고 배 위로 올라갔다. 올라갔던 병사들이 빈 몸으로 나온 뒤 모두 안전한 거리로 후퇴하자,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했다.
“우리가 타지 않았는데…!”
배에 태워진 건 인형뿐이었다. 그것들이 사람 대신 배와 함께 순식간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모두 일어나라!”
경비대장이 이어서 외쳤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새로 태어난 것이다! 기왕 다시 태어난 목숨, 이제부터 자레스 황자 전하의 병사로서 충성을 바치거라!”
***
아넬과 이교도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위 절벽에 둘러싸인 작은 분지였는데, 도착하자마자 이교도들이 환성을 질렀다.
“왜 그리 좋아하는 거죠?”
“여긴 우리가 원래 살던 지하 도시예요. 운 나쁘게 카비르 병사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여기서 끌려 나왔죠.”
“우릴 여기로 돌려보낸 걸 보니 정말 살려 주실 생각인가 봅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장로 격인 이교도 노인이 경비대장에게 불려 나갔다가 이내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렸다.
“병력으로 쓸 수 없는 자들을 제외한 젊은 장정들은 모두 자레스 황자 전하의 사병으로 들어가게 된다네.”
“정말 죽이지 않는답니까?”
“아닐세. 전하의 이름으로 약속하셨네. 대신 칼리크의 이름으로 충성 맹약을 해야 한다네.”
“맹약이라고요?”
“그리고 장정들이 부상을 치료한 후 마디나로 가는 대신, 노약자들은 모두 이 마을에 남아야 해. 덧붙여서 카비르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젊은 신도들을 더 모아들이는 걸 조건으로 하셨네.”
그건 즉, 가족들을 인질로 이교도들을 부려 먹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소문을 퍼뜨려 젊은 신도들을 더 불러들이면 수도에 있는 자레스의 사병은 그 수가 최소 두 배는 늘어날 것이다.
이교도인 걸 들키지만 않으면 꽤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그 효율 앞에 메타를 버리는 자레스의 행동에 아넬은 혀를 내둘렀지만, 지금은 자레스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감동이 더 컸다.
“함정 아닐까요? 그래 놓고 수도로 불러들여 다 죽이는 거 아닙니까?”
“그럴 거면 우리를 그냥 여기서 몰살시키면 되지 뭐 하러 연극까지 벌이겠나. 황자께서는 칼리크를 숭배하든 메타를 믿든, 살아서는 황자를 주인으로 모시면 된다고 말씀하셨다네.”
장로의 전언에 일제히 웃음이 터졌다.
어찌 보면 자레스다운 행동이라,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던 아넬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다운 선택이다.
최상의 효율을 추구하며, 그를 위해선 종교나 신은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남자.
마냥 착하기만 한 남자가 절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그를 향해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맹세하겠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모두 이의가 없나 보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원망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게라도 살려 준 것에 감사해야 했다.
신도들이 비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장로가 손을 들었다.
“다시 태어남을 허락해 주신 칼리크 신을 위해 기도하세.”
그 말에 이교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기도를 하다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하룻밤이 더 지났다.
하지만 꽤 먼 곳까지 수색을 나갔던 병사들은 소득 없이 돌아왔고 자레스는 이제 불안을 내보이지도 않는 상태가 됐다.
“그렇게 멀리 갔을 리가 없다.”
걸어서 도망쳤다면 근처에서 발견됐어야 했다. 이 근처는 해안으로 이어진 야트막한 산지를 제외하곤 숨을 데도 없는데 모두 이 잡듯이 뒤졌다 했다.
아넬은 문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얼음처럼 침묵하던 자레스가 문득 무칼라스에게 물었다.
“혹시 이틀 전 밤에 군영에 다른 이상은 없었나?”
“별거 없었다. 병사들끼리 사소한 싸움 몇 번.”
“다른 변고는 없다?”
“없다. 아, 그런데… 아까 아침에 돌아온 경비대장, 이상한 보고했다.”
“뭐를?”
“타령병 있었다. 우리 군복 입은. 그런데 이교도가 변장한 것 같아서 이교도들이랑 함께 묶어서 수영시켰다고 했다.”
“수장시켰다고?”
그 순간 자레스가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아넬이다. 직감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죽었나?’
처음엔 그 생각부터 들었지만 곧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교도들은 모두 수장시킨 걸로 위장한 뒤, 원래 그들이 숨어 살던 지하 도시로 보내라고 했다.
이교도가 병사로 변장한 거로 간주했다면 그들과 똑같은 취급을 하지, 따로 빼내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추측이 틀렸다면?’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무칼라스, 지금 바로 지하 도시로 간다.”
“따른다.”
두 사람은 그 길로 바로 지하 도시로 향했다.
***
그 시간 지하 도시에선 아침 예배가 이뤄지고 있었다.
병사들이 나눠 준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신도들은 지하 광장에 모여 일제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넬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칼리크는 악신이다.
이 세계의 신화 속에서 빛과 선의 신 메타는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 태어난 악신 칼리크를 죽이고 인간을 창조한 뒤, 사랑으로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교도들은 그 악신 칼리크를 사랑의 신으로 섬기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드리니, 칼리크시여. 인애하는 자의 머리 위에 축복을 내리소서. 우리가 악한 이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퍼뜨릴 수 있게 하소서.”
아넬은 칼리크가 사악한 것처럼, 그를 믿는 이교도들도 사악하다고 들었다. 악을 숭배하며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피를 마신다는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그들은 그녀가 지금껏 들어왔던 소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시는 신의 이름만 바꾸면 메타를 믿는 신도들과 똑같아.’
심지어 예배 방식도 비슷했다. 심지어 성가는 가사만 다를 뿐 음률이 똑같은 것도 있었다.
인애로운 행동도,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설교하는 모습도 오히려 오랜 역사 속에서 세속적으로 변한 메타의 숭배자들보다 훨씬 더 성스러웠다.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칼리크 교도들의 모습에 아넬은 혼란을 느꼈다.
‘내가 메타의 성녀란 걸 밝히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나올까? …날 죽이려 들까?’
아닐 것 같았다.
껄끄러워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죽이거나 해를 끼치진 않을 듯했다.
그런데 그때 돌연 병사들이 광장으로 들어왔다.
칼리크 교도들이 예배를 멈추자 그들이 신도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사람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아넬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여기 있다!”
“……!”
그녀의 직감이 맞았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몰라도 지하 도시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자레스와 무칼라스가 있었고, 아넬은 그들 앞에 끌어내졌다.
“직접 처분하시겠습니까?”
경비대장은 무칼라스를 통해 아넬이 도망친 노예라는 걸 알았다. 당연히 도망 노예는 처형이라 생각했기에 경비대장이 물었지만 자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까. 말에 올라탔을 때는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그를 지배했지만, 막상 끌려 나온 아넬을 보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네가 대체 뭔데.’
어째서 이 작은 사내아이가 그를 흔들고 망설이게 하는가. 예전 같으면 위험하다는 자각이라도 했지만 이젠 자신이 아넬을 죽일 수 없다는 걸 뻔히 알게 됐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정말 죽여 버릴까? 앞으로도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그런데 그때 아넬이 돌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뭐라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황자 전하를 오해했습니다.”
“하!”
도망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교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는데 거절하자, 도망친 것이다. 아마도 그가 잔인하다고 원망했겠지. 그리고 달아나는 길을 택했겠지.
한갓 노예가 황자의 도덕성을 평가한 것도 모자라 그를 이유로 탈출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노릇이다.
그런데도 또다시 흔들린다.
아넬이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자신이 도망친 게 옳은 일이 아니었다는 걸 받아들였고, 그건 마치 자레스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젠장.’
살의가 허무하게 스러져 버렸다. 그 빈자리에 대신 밀려드는 건 지독한 소유욕이었다. 아넬을 일으켜 세운 자레스는, 그가 탄 말 앞자리에 그녀를 태운 뒤 군영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