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1/33)

10.

유가와 일리파스가 오랜만에 모임을 가졌다.

핑계는 일리파스가 이번에 2대륙에서 가져온 진귀한 공예품을 보여 준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핑계가 아니었다. 일리파스는 순전히 자랑하고 싶어서 유가를 초대한 게 맞았다.

유가는 아주 까다로운 안목을 갖고 있어서 그가 칭찬하면 모두에게 자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반대로 유가는 단순한 일리파스를 설득해 연대하는 게 목적이었다.

아직은 일리파스가 황위에 욕심이 남아 자신과 대적하지만, 어머니가 꽤 강한 부족 출신인 일리파스가 그의 편에 선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영리한 스에반이나 무모한 자레스에 비하면 훨씬 손쉬운 상대라, 유가는 일리파스의 초대를 마다하지 않았다.

손님들에게 공예품을 내놓기 전에, 모임의 재미를 돋우기 위해 불러온 재담꾼이 한바탕 익살을 떨었다.

그가 농담 끝에 터번 안에서 비둘기를 꺼내 날리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유가 역시 부채 뒤에서 나직한 웃음을 흘렸는데, 뒤이어 재담꾼이 수수께끼를 냈다.

“수수께끼를 하나 낼까요? 아침에는 갈색이었다가, 저녁엔 보라색이 됐다가, 다음 날 아침엔 하얀색이 되는 게 뭐게요?”

“가지!”

“아닙니다. 유가 황자님은 아시겠습니까?”

“개암이 아닌가?”

“아, 개암나무 열매가 흰색이었다가, 연한 보랏빛을 띠다가 갈색으로 익기 때문입니까요? 그나마 일리파스 황자님보단 조금 더 머리를 굴리셨군요. 땡! 아니올습니다요!”

“그럼 대체 뭐야? 빨리 알려 줘!”

재담꾼의 농담은 벌하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성질이 급한 일리파스가 빽 외쳤다.

“답은 노예 파이디입니다. 와하하하핫!”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소식을 못 들었습니까? 16황자의 노예인 파이디란 녀석이 갈색 피부였다가 어느 날 보라색으로 바뀌더니, 그다음 날엔 눈부신 흰 피부가 됐다지 뭡니까?”

“푸하하핫! 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고? 게다가 이제는 흰색?”

“예. 지금 궁에선 놈이 할바(카멜레온)의 화신이란 농담이 돌고 있습니다요!”

“그 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 진짜 사람 껍질을 뒤집어쓴 할바인가?”

일리파스는 배를 잡고 웃었지만 유가는 수상하단 생각부터 들었다. 자레스나 퀴나에와 같은 추측을 거치고 나니 아넬의 의도가 더욱 궁금했다.

“염색초를 쓴 모양이군. 원래는 갈색이었다고 하니, 갈색 염색초를 쓰려다 보라색으로 바뀌었을 게야.”

“맞습니다. 염색초 중에 처음엔 갈색으로 물들었다 보라색으로 바뀌는 놈이 있지요.”

“흰 피부를 감추기 위해 갈색으로 물을 들인 것 같은데, 이유가 뭘까?”

“그야 당연히 눈에 띄면 손을 탈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여자 노예들 중엔 제 외모를 가리려고 일부러 흙칠을 하고 다니는 것들이 있지요. 파이디 놈도 아마 그래서 살빛을 감춘 겁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문제는 노예 놈이 어떻게 흰 피부를 가졌느냐는 것이다. 여자도 아니고 험한 일을 해야 하는 남자 노예는 그런 피부색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일찌감치 주인의 눈에 띄어 애동(愛童) 노릇을 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신전에 애동을 거느릴 여자는 성녀밖에 없는데, 성녀가 애동을 만드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신전 노예는 원래 그런 일반 노예와 다른 건가?’

아직은 이렌시아에 가 본 적도, 신전 노예를 본 적도 없는 유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노예는 자레스가 우스라에 준 걸로 알았는데, 어째서 돌아온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일리파스가 대답했다.

“우스라에서 큰 실수를 하는 바람에 돌려보냈다던데요. 그런데 형님은 그딴 노예 놈이 뭐가 그리 궁금한 겁니까?”

일단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우스라는 자신들의 수치이기에 사태에 대해 함구했고 자레스 측도 마찬가지였기에 실상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처음에야 아넬이 자레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녀가 카에티에게 예물로 보내졌단 말을 듣고는 그 관심이 사라진 상태였다.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예전만 한 흥미는 잃은 뒤였기에, 유가는 모임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왔다.

처소엔 시종 노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가가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자 노예가 그에게 두루마리를 바쳤다.

“흐음.”

흥미로운 눈으로 두루마리를 읽은 그가 곧 촛불에 그를 태워 없앴다. 그리고 노예에게는 이렇게 일렀다.

“총희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전해라. 내 첫째 딸이 열 살이 되고 라키사의 아들이 일곱 살이 되는 해에 혼약을 맺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카비르에선 남매 사이만 아니면 근친 간의 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복 남매 사이에도 결합하는 일이 있으니, 삼촌 정도는 가까운 촌수도 아니다.

이걸로 라키사와의 연대가 확실해졌다. 라키사와 그 아들의 목숨을 보장하는 대신, 라키사의 세력은 유가에게 흡수된다.

합종연횡.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암세포처럼 분열과 결합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밤이었다.

***

아넬은 보랏빛 인간이 됐을 때보다 오히려 밖에 나다니기가 어려워졌다.

자레스는 무슨 생각인지 아넬을 다시 부르지 않았고, 대신 퀴나에가 그녀를 불러서 왜 일부러 살을 물들였는지 물었다.

어째서 보랏빛 염색이 바로 빠졌는지는 퀴나에가 알려 줬다.

“네가 씻을 물에 제염초를 풀었단다. 물들인 옷감에 염색을 뺄 때 쓰는 풀이지.”

“황자님의 지시였나요?”

퀴나에는 묻는 말 대신 다시 물었다.

“누가 널 덮칠까 봐 일부러 피부색을 감춘 거니?”

반은 맞았지만, 실제로는 노예처럼 보이기 위해서 흰 피부를 감춘 거다. 그렇게 대답할 순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퀴나에는 제멋대로 단정을 내렸다.

“하긴 원래도 예쁘지만, 피부까지 바뀌니 이건 완전히….”

분명히 어린 남자아이인데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하얗게 바뀐 원래의 피부는 잡티 한 점 없어서 마치 복숭아처럼 보였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욕심을 품게 만들었다.

귀부인들 앞에 내놨다면 아마 앞을 다퉈서 데려갔을 것이고, 사내들 역시 그러했을 터다.

‘황자 전하께선 그래서 아마 피하고 있는 거겠지? 어휴, 황자님 성격에 사내 녀석을 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보낼 수도 없고, 전하도 진짜 죽을 맛이겠구나.’

융통성 없고 뻣뻣한 자레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고문이었다. 고소한 한편으로 안됐다.

“저는 주로 에포메니 신변의 잡다한 심부름을 했기에 신전에서 별로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호오, 처음 듣는 말인데? 그럼 에포메니나 성녀님에 대해서도 잘 아니?”

“네, 그럼요. 성녀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하긴 하시지만, 지혜로우시고.”

“아니, 그런 거 말고! 성녀나 에포메니의 약점이 될 만한 건 없는 거야? 성력의 비밀이라든가, 신전의 비밀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건 모릅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몰랐다. 자신 역시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에 성력이 나타나서 신전에 오게 됐고, 예비 성녀로서 교육을 받았을 뿐 이 힘의 근원에 대해선 모른다.

물론 신전의 비밀을 알아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성녀님도 인간이고, 칼로 찌르면 다치고 병들면 죽어요. 에포메니도 마찬가지고요.”

“병이 들다니? 성녀도 병이 든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잘도 고쳐 주면서?”

“작은 병이면 고치지 않아요. 성력은 무한한 힘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큰 병이 든 게 아니면 힘을 아끼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처럼 의사를 불러요.”

“호오, 그 말을 들으니 네가 진짜 신전 출신이긴 한 것 같구나. 재밌다. 성녀님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더 말해 봐.”

“성녀님에 대해선 저도 잘 몰라요. 에포메니라면 조금 알지만.”

“그럼 에포메니에 대해 말해 줘.”

그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아넬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에포메니는 외로운 분이세요. 아주 어릴 적에 신전에 온 뒤로는, 신전에 갇혀서 지내기만 했거든요.”

퀴나에가 아넬의 진짜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정보를 캐내는 동안, 황궁에선 다른 암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궁에 들어간 라키사는 황제와 몸을 섞었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기분일 땐 느긋해지고 제법 자비로워진다. 라키사는 황제의 배를 문지르며 애교스럽게 속삭였다.

“동부 국경의 소요가 점점 커지고 있다죠?”

“내실에 앉아서 국경까지 신경 쓰고 있느냐. 누가 보면 네가 황후인 줄 알겠구나.”

“호호호. 카비르엔 황후가 없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후궁이나 부인은 여럿 들이지만, 외척이 득세하지 못하게 황후는 정하지 않잖아요.”

“여자가 정치에 맛을 들이면 못 쓴다.”

“저는 정치에는 관심 없답니다. 하지만 제 아이의 미래에는 아주 관심이 많지요. 다음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저희들이 살지, 죽을지가 결정되잖아요.”

그러면서 라키사가 다시 말했다.

“저는 기왕이면 자비로운 황자가 황제가 되길 바란답니다.”

“자레스는 아니겠구나. 그 아이는 협상이란 걸 모르는 놈이니.”

“맞아요. 그래서 늘 신경 쓰고 있답니다. 폐하, 저와 아이를 사랑하신다면, 모쪼록 절 찌를 칼들을 녹슨 칼집에 숨겨 놔 주세요.”

“다시는 뽑히지 않도록 말이냐?”

“폐하께서는 항상 지혜로우세요.”

“너는 영악하고 말이다. 남자는 세계를 흔들고, 그 남자를 흔드는 건 항상 여자이나니.”

“칼을 모두 쓰실 게 아니면, 너무 날카로운 칼은 무디게 해 두셔야지요. 부러뜨릴 수 있다면 부러뜨리는 것도 좋고요.”

“일리가 있군.”

여자를 우습게 보는 건 황제의 단점이었으나, 그는 타성에 젖어 자신의 잘못을 몰랐다. 잠시 수염을 쓸던 황제가 이윽고 말했다.

“황자 셋을 동부로 보내겠다.”

그 황자 셋은 일리파스와 스에반 그리고 자레스였다.

유가는 빠졌고, 동부로 가 3대륙 해적들을 진압하라는 황명을 받은 황자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건 유가 형님이 배후에서 공작한 거야. 동부로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지도 몰라!”

스에반은 어떻게든 발을 뺄 궁리부터 했지만 일리파스는 또 달랐다.

“공을 세워 돌아오면, 부황께서 나를 높게 봐주실 거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재빨리 출병 준비를 했고, 반대로 자레스는 부정적이었다.

“반드시 함정이 있을 거다.”

하지만 황명을 거부할 순 없었다. 알면서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었다. 자레스도 순순히 군사를 모아 출발했다.

단, 아넬은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약혼자라는 이유로 카에티가 밀고 들어와 무슨 술수를 꾸밀지 모른다는 빌미를 댔다.

‘과연 그것만 이유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마음속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단지 아넬이 위험해서, 만이 아닌 것이다.

그에게 더해지는 압박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안 한 채 주시하고만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의 상태가 더욱 두려웠다.

예전 같으면 주저하지 않고 아넬을 버렸을 것을, 이제는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레스의 군대는 가장 먼저 동부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자레스의 선봉군은 군사 수가 겨우 1만이었다.

동부로 밀고 들어온 해적의 수와 엇비슷하다고 들었는데, 해적들이 정예병이 아니란 걸 생각하면 전력이 적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자레스는 일부러 황제가 군사를 적게 줬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일부러 진군 속도를 조절했다. 일리파스의 군대와 합류해 군사를 늘리고, 그 대신 책임은 일리파스와 나눠질 심산이었다.

진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가 날이 저물었고, 부대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은 채 일부러 들판에서 야영을 했다.

여기저기 군막이 펼쳐졌고, 자레스는 가장 중심에 있는 군막에 짐을 풀었다.

아넬은 군막에 자레스의 잠자리를 봐 뒀고, 이윽고 얼마 안 되는 자기 짐을 들고 나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마침 자기 막사로 오고 있던 자레스와 마주치자 아넬이 움찔 놀랐다. 얼른 옆길로 새려 했지만 그전에 들켜서, 자레스의 부름에 아넬은 어쩔 수 없이 쭈뼛거리며 뒤돌아섰다.

“어디 가는 거냐?”

“저, 제, 제 짐을 풀려고….”

“네 막사는 따로 없다. 내 막사에서 자도록.”

“하지만, 전하.”

“긴말하지 않겠다. 남자들도 같은 남자에게 욕정을 품을 수 있단 것만 알아 둬. 그리고 여긴 그런 놈들 천지란 것도.”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피부가 흰빛으로 돌아오고 난 뒤, 아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카락은 제법 자라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길이로 길어졌다. 삭발에 가까웠을 때는 그럭저럭 노예처럼 보였지만, 피부까지 원래대로 돌아온 지금은 천사처럼 고와져서 예전보다 더 고귀해 보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품위가 외모에 녹아들면서,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차라리 자레스 황자의 곁이 더 안전할지도 몰라.’

적어도 자레스는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가끔 식사 시중을 들라고 해서 그에게 다가갈 때면 물끄러미 쳐다볼 때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더 숨 막힐 때도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고를 만한 상황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아넬은 별수 없이 자레스를 따라 막사로 들어왔다.

“세숫물을 가져올까요?”

“아니, 목욕물을 가져와라.”

또 그녀가 보는 앞에서 벌거벗으려는 걸까?

아넬이 놀라 긴장하자, 자레스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다. 행군 중에 목욕을 할 정도로 한가한 녀석은 아니다. 목욕은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거기서 하도록 하고, 세숫물은 사브더러 길어 오라고 해.”

“제가 가도 되는데요?”

“사브는 놀라고 데려온 줄 아나?”

사브는 아넬의 일을 돕기 위해 데려왔다. 노예가 노예의 심부름을 하다니 웃긴 노릇이지만, 사방에 번들거리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아넬을 돌아다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군영은 황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니까.

“넌 내 시중만 들어.”

아넬은 묵묵히 그의 명을 따랐다. 속셈이 뭔지 몰라도 어쨌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다.

세숫물로 얼굴을 씻고, 수건에 물을 적셔 대충 몸을 닦은 자레스는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아넬 역시 체할 것 같은 심정으로 과일 몇 개만 집어 저녁을 대신한 뒤, 사브와 함께 남은 상을 치웠다.

식후에 차를 마시는 카비르의 관습대로 물을 끓여 차를 내렸다. 차 이름은 몰랐지만, 퀴나에가 그나마 자레스가 좋아하는 거라며 챙겨 준 거였다.

“너도 마셔라.”

“제가 어찌….”

“그럼 네가 차에다 독을 탔다고 생각해야겠구나.”

어쩔 수 없이 차를 따라 입에 머금었다. 그런데 정작 자레스는 그녀가 마시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그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나를 시험한 게 아니었구나.’

그냥 아넬에게 차를 먹이기 위한 거였다. 마음이 이상해졌다.

자레스의 태도는 점점 묘해졌다. 요즘 들어 자레스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졌다. 아넬을 봐도 도통 말이 없었고 가끔 뚫어져라 볼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위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가끔 이렇게 알아차리기 힘든 친절을 베풀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씩 무너진다.

“너는 왜 신전을 탈출했지?”

날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막 지대가 많은 카비르지만 밤에는 꽤 추웠다. 난방을 위해 불에 달군 돌을 천에 싸서 그의 이부자리 안에 넣자, 갑자기 자레스가 물었다.

그동안은 묻지도 않더니, 이제 와 새삼 관심을 보인다.

“노예로 살기 싫었습니다.”

노예로선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래서인지 자레스도 더 묻지 않았다.

“신전에 있을 때도 피부색을 감췄나?”

이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민하던 아넬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신전을 빠져나올 때 물을 들였습니다. 밖에서는 제 외모가 너무 눈에 띌 것 같았거든요.”

“설마, 머리도 그래서 자른 건가? 노예처럼 보이려고?”

너무나 빠른 추리에 아넬은 흠칫 놀랐다. 미처 대답을 못 하는 동안 자레스의 머리는 계속해서 빠르게 돌아갔다.

‘노예가 아니면? 평민이라면 그냥 정문으로 나오면 될 일, 굳이 몰래 탈출을 할 이유가 없다.’

에포메니?

신전을 ‘몰래’ 빠져나와야 할 사람 중에 노예가 아닌 자는 성녀와 에포메니 말고는 없다. 하지만 성녀는 아넬이 탈출한 뒤에 그와 만났으니 아닐 테고 그러면 남는 건 에포메니밖에 없다.

‘하지만 녀석은 남자다.’

또다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의 앞에 아무리 애를 써도 부술 수 없는 벽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혹시 죄를 짓고 갇혀 있었나?’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다면 피부가 그을리지 않은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억지로 끼워 맞춘 것에 불과했고, 아넬은 그의 추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넬은 아무리 캐물어도 자꾸 감추기만 했다.

자레스는 저녁을 먹은 뒤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넬도 막사의 한구석에 자리를 깔고 거기 드러누웠다.

‘저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예전처럼 장난을 치거나, 옷을 찢으며 위협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그는 마치 불이 붙지 않은 연료 같았다.

한 번 불이 붙으면 영원의 불처럼 절대 꺼지지 않고 탈 것 같다.

‘대체 언제쯤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 아넬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즈음, 자레스가 누운 침대 쪽에서 작은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 해.”

흠칫 놀라 귀를 기울이자, 그 목소리가 자레스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이번엔 목소리가 좀 더 커졌다. 아넬이 주춤거리며 다가가자, 자레스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중얼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악몽을 꾸는 건가?’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

자레스는 꿈속에서 노예 검투장에 있었다.

아직 노예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 자레스는 검투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십인대장을 시켜 준다는 말에 검을 잡았다.

그리고 검투 노예인 메살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제까지 친구였던 자들을 죽였다.

“약하니까 죽는 거야! 약한 자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 내 잘못이 아니야!”

친구들의 목을 베고, 달아나는 자의 등에 칼을 꽂으면서 미친 듯이 외쳤었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대신 더 많이 죽였다. 십인대장이 돼서, 백인대장으로 올라가 마침내 노예 부대의 대장이 되고 황자로 인정받았고 그 과정에서 이제 웃으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아무에게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되는 위치가 됐다.

“죽이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하지 못한 말을 꿈속에서야 외친다. 아침이 되면 다시 황자의 돌가면을 쓰고, 위악을 가장한다.

아마, 그는 꿈이 아니고서는 절대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것이다.

그를 깨우려던 아넬은 문득 생각을 바꿨다. 그러는 대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메타를 찬양하는 찬가지만, 아넬이 마음을 담자 부드러운 자장가가 됐다. 진심으로 그가 좋은 잠에 취하길 바라면서 아넬은 노래를 불렀다.

그러느라 아넬은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자레스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가 잠든 척하면서 가만히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것도.

아까 마지막 잠꼬대를 끝으로 그는 마치 누가 밀어내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것과 동시에 자신이 잠꼬대를 했다는 걸 깨달았는데,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넬이 노래를 시작했다.

지금 일어난 기척을 냈다간, 자신이 약해졌다는 것도 인정해야 했다. 그럴 수가 없어서 여전히 잠든 척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노래를 듣는 동안 점점 마음이 편해져 갔다.

‘왜 내가 이 녀석에게 위로를 받고 있지?’

아넬은 자꾸만 그의 약한 곳을 확인하게 만든다. 계속해서 그의 아픈 기억을 들쑤시는 아넬이 싫었다.

그 역시 아넬처럼 노예의 과거를 가졌지만, 그녀처럼 남을 위해 희생한 적도 없었고 남을 살리려고 든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망치고 싶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란 걸, 사람은 그런 처지에 빠지면 결국엔 남을 밟고 살아가게 된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노력은 참담하게 실패하였고, 그는 이제 아넬에게 붙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빌어먹을 신의 장난이다.

‘어쩌면 네가 남자인 게 다행일지도 몰라.’

가만히 노래를 듣다 보니 문득 그런 희망이 생겼다. 그럼 사랑하게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죽어도 사내를 안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품고 있는 이 감정이 단순한 정욕이라면 혼인을 통해 풀어 버리면 그만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그의 안에 아넬에 대한 감정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너를 놓아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걸어 놓은 빗장 한 귀퉁이가 스르르 풀어지면서 자레스의 깊은 곳까지 노래가 흘러들어 와 그를 어루만졌다.

자레스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어 갔다.

***

동부 국경 지대까지 오는 데 한 달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사막을 관통하지 않기 위해 남부로 우회해 고원지대를 지났다.

동부는 바닷가와 면해 있어서인지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따뜻했으며, 막 우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아직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공기가 습하고 날이 흐린 게, 당장이라도 우기가 시작될 것 같았다.

야트막한 산 하나를 넘어서면 바로 해안이 나왔지만, 거기는 해적들이 점령했다는 첩보가 있었기에 자레스의 군대는 일단 거기서 멈춰 섰다.

그리고 전황을 보고받았는데, 거기서 뜻밖의 정보가 나왔다.

“이교도들이 산 위를 점령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선발대가 여기 와서야 알게 된 건데, 이곳에 이교도들이 몰려 사는 도시가 있었다는군요.”

“도시라니?”

“정착한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규모가 꽤 컸습니다. 이 이교도 세력이 해안 지대의 해적과 카비르 군 사이에 끼면서 전선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싸워야 할 적이 두 배가 된 건가?”

“그런 셈입니다. 도망친 이교도들이 산을 점령했고, 해적 놈들은 그들을 방패 삼아서 남부 쪽으로 우회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데, 자칫하면 양동작전 사이에 껴서 대패할 수 있습니다.”

“이게 함정이었군.”

이교도들은 정규 병력이 아닐 테니 큰 위협은 아니다. 하지만 종교가 끼어들면 사람은 광신도가 되기 쉽다.

거기에 해적들까지 상대해야 하는데 겨우 1만으로는 군대를 나눌 수가 없다. 전력이 나뉘면, 양쪽 다 상대하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정말 군공을 세우라고 황자 셋을 보낸 건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노림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컷 써먹고 나서는 하나둘 제거하는군. 그렇다면 부황의 마음은 유가에게 기울었단 뜻인가?’

“해적 놈들이 이동하기 전에 이교도부터 토벌한다.”

“전하. 하지만 그전에 해적들이 우회해서 등 뒤를 치면….”

“오늘 밤 바로 기습한다. 해적들은 카비르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으니 밤에 이동하진 못할 거다. 놈들이 미처 대비하지 못할 때 재빨리 선공하는 게 좋아.”

그리고 자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영을 설치한 걸로 오해하도록 막사를 치고 막사마다 횃불을 세 개씩 꽂아 둬라. 이교도들이 도망치거나 해적들에게 합류하기 전에, 진영을 빠져나가 습격하겠다.”

그리고 그날 밤, 자레스의 군대는 야산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산등성이에 도착한 자레스와 카비르 군은 깜짝 놀랐다. 능선에 진을 치고 있던 이교도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거냐? 왜 척후대의 보고가 없었지?”

“척후병들은 능선에 이교도들이 모여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전하. 뭔가 일이 잘못돼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적이다!”

무칼라스가 코끼리 같은 목청으로 외치며 칼을 뽑았다. 그의 말대로 먹장구름에 반사된 빛을 통해 해안 쪽에서 병사들이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게 더 경악스러웠다. 밀려오는 자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선두에 말을 탄 기마병이 있었고, 그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전군, 교전 태세를 갖춰라!”

카비르 군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고, 이내 궁병들이 지휘에 맞춰 활을 쏘기 시작했다. 그를 기점으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

야습을 감행한 3대륙인들도 대단했지만, 카비르 군도 만만치 않았던 탓에 첫 번째 격돌은 양측이 서로 피해를 입으면서 끝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카비르 군이 공격에 유리한 산등성이를 점령했고, 3대륙 군은 해안으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그 뒤로 몇 번 교전이 벌어졌지만, 카비르 군도 우세하지만은 않았다. 3대륙 군은 바다에 배를 띄워 놨는데, 그 배를 남쪽으로 몰아 상륙하면 자칫 카비르 군이 포위될 수 있었다.

3대륙 군이 더 시간을 끌기 전에 빨리 결판을 내야 했다.

“이교도들이 적군과 야합한 건 사실이지?”

“포로로 잡힌 자들 중에 카비르어를 쓰는 자가 많은 걸로 봐서는 그들이 이교도들인 것 같습니다.”

“제기랄. 아무리 봐도 저건 해적들이 아니야.”

작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자레스는 심화에 차 있었다.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거듭된 공방전으로 피로가 누적된 탓에 평소보다 더 예민해 보였기 때문에 아넬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도착하기로 한 스에반 군은 군량을 보급한다는 이유로 중도에서 멈춰 있었다.

일리파스의 군대가 내일 도착한다고는 하는데, 3대륙 군이 남하할 경우 그들을 상대하게 하기 위해선 첩보를 날려 멈추게 해야 했다.

아무 데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상황이 불리해진 걸 안 일리파스와 스에반이 변심해서 그의 뒤통수를 치면 그는 꼼짝없이 양쪽에 끼어 죽게 된다.

“전황이… 안 좋은 거지요?”

아넬이 조심스럽게 묻자 자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넬에게 비교적 관대하게 대해 주긴 했지만, 노예가 감히 전황을 묻고 입을 대는 건 그가 봐줄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입을 조심해라, 파이디.”

아넬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에게 차를 올린 뒤에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우물쭈물 근처를 서성거렸다.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경계만 하던 녀석이 뭐라 입을 열려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3대륙 군 선봉에 기마병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렇다면 몰려온 게 해적이 아니라, 좀 더 내륙 쪽에 있는 사는 자들이 아닐까 싶어서요.”

“내륙이라니?”

“내륙 쪽에는 제국의 후예들인 세레그인들이 산다죠? 그 사람들은 말과 한 몸이 돼서 말 위에서 먹고 잔다고.”

“세레그인들은 해전에 약하다. 그건 말이 안 돼.”

“그러니까 해적들을 앞세운 것 아닐까요? 전하, 제가 신전에 있을 때 성녀님께 세레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세레그엔 지금 계승전이 벌어져서 내부 상황이 상당히 어지럽다 들었어요. 원래 세레그는 막내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는데, 막내 왕자가 어린 걸 틈타 장왕자가 실권을 장악했다 합니다. 그리고 막내 왕자를 지지하는 자들을 우회적인 방법으로 숙청하고 있다고 해요.”

“마치 부황이 나를 사지로 들여보낸 것처럼 말이지?”

일리가 있다. 자레스가 보기에도 3대륙 군들은 전술을 배운 정예병이었다. 심지어 마상 무예에 익숙한 기마병들이었다.

세레그인을 비롯한 3대륙인들은 카비르인과 생김새가 비슷해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그들이 해적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세레그의 장왕자가 막내 왕자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계책을 낸 거라면 이해가 간다.

부황이나 세레그의 장왕자나 결국 제 살 깎아 먹는 짓을 벌이고 있다니, 인간의 추악함은 어디나 똑같다는 것에 쓴웃음이 났다.

“신전에선 그런 정보가 감히 노예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오갔단 말인가?”

아넬이 움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럴 리가.’

사실은 그녀가 성녀가 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당시 배례식에 온 자들 중에 세레그의 장왕자가 있었다.

막내 왕자를 지지했던 대장군이 카비르에 출병한 사이 막내 왕자는 축출됐고, 대장군은 카비르에서 패퇴한 뒤 귀국했다가 패전을 빌미로 참수당했다.

이미 끝난 일이었기에 아넬도 그 정도의 정보는 알 수 있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각국의 최상위층이나 알 수 있는 고급 정보이긴 했다.

그리고 아넬은 이 동부에 왔다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여기서 무르익어 가는 걸 보게 됐다. 아넬은 비로소 자신이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했다.

“해적이 아니라 세레그의 정예병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자레스가 일어나 막사 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토벌이 아니라 전쟁으로 확전되는 거면, 여기서 무리하게 소모전을 벌이기보다는 후퇴해서 일리파스 군에 합류하는 게 나았다.

‘문제는 부황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건데. 과연 세레그와의 전쟁인 걸 알면 나를 지원해 줄까?’

어차피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동부에 보낸 거면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알면서도 보낸 걸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거면 그는 여기서 살아 돌아가기가 어렵다. 어떻게 귀환한다 해도 황위 다툼에선 밀려날 것이고, 계승전에서 패한 황자의 말로는 어차피 죽음으로 귀결된다.

“…외람된 말입니다만, 전하. 세레그의 장군과 협상을 하시는 건 안 될까요?”

“뭐라고?”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막내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 중 가장 주축이 되는 자가 세레그의 장군 예론킬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선봉에 선 장군이 그라면, 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넬의 기억이 맞다면 이번에 밀려온 세레그인들의 주력 지휘관이 바로 예론킬이다. 장왕자가 술에 취해 그 이름을 들먹이며 본보기로 그의 머리를 성벽에 걸었다고 떠드는 걸 들었었다.

그 정도로 견제받고 있는 상태라면 그는 정말 카비르와 전쟁을 하고 싶어서 여기 온 게 아닐 터다.

장왕자의 음모를 알려 준다면 그는 굳이 카비르와 일전을 벌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이제이라 이건가. 나쁘지 않군.”

곰곰이 생각하던 자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의문은 남는다.

“신전의 정보망이 그 정도로 대단하단 말이냐?”

자레스가 묻자 아넬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알려고 한 게 아니라, 각국의 상위층이 오가다 보니 흘리는 정보들이 간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성녀가 너한테는 말해 줬고? 일개 노예한테? 이거야, 원. 너는 정말로 성녀 키리아의 애동이 맞았나 보구나.”

“그, 그건 절대 아닙니다!”

사색이 돼 부정했지만 자레스는 이미 관심을 거둔 뒤였다.

그가 무칼라스를 불러들였고, 작전 회의가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밀사가 오간 끝에 며칠 후 예론킬과 자레스의 회담이 극비리에 열렸다.

***

“만나서 반갑소, 예론킬 장군.”

예론킬과 자레스 모두 공용어를 할 줄 알았다.

혹시나 하고 던져 본 말에 회담에 나온 지휘관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다 알고 온 거였군.”

“그렇소. 세레그의 장왕자와 사이가 아주 안 좋다는 것 역시 알고 있지. 그러는 장군이야말로 나도 당신과 같은 처지란 걸 알고 있으니 나왔을 거라 믿소.”

“…알고 있소.”

“그럼 더 이야기가 쉬워지겠군요.”

자레스가 무칼라스를 내보냈다. 예론킬 역시 데리고 온 수하들을 다 내보내자 회담장엔 둘만 남았다.

“하나만 물읍시다, 예론킬. 카비르의 이교도들이 당신 부대에 합류한 건 사실이오?”

“맞소. 하지만 이교도들의 수는 굉장히 많소. 나는 그들을 모두 흡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병력이 될 만한 자들만 뽑았소. 노약자나 부상자들은 북쪽 해안가에 숨어 있소.”

자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장왕자가 이 시기에 당신을 카비르에 보낸 이유를 알고 있소?”

“짐작은 하고 있소. 하지만 나는 출병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소. 타이르에서 괴물 새들이 날아오는 건 사실이니까.”

“괴물 새가 정말 있긴 있소?”

“카비르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타이르의 괴물 새는 엄연히 존재하오. 그것들은 지금 세레그의 동부와 남부 해안을 따라 내륙까지 들어오고 있소. 덕분에 내륙 주민은 해안가로 밀려나고, 해안가의 주민들은 해적이 되고 있지.”

“그건 댁의 나라 사정이오. 덕분에 카비르가 입은 피해가 막심하오.”

“우리도 이러고 싶어 출병한 게 아니오. 세레그의 장왕자는 이 김에 카비르에 식민지를 두고 1대륙으로 진출하길 원하고 있는데, 필요가 있는 게 사실이라 나는 거병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굳이 장왕자가 필요한 걸 다 들어줄 필요가 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당신 모국 조정은 다른 일을 꾸미고 있소. 아마 곧 당신이 지지하는 막내 왕자는 축출되고, 당신도 숙청당할 거요.”

“무슨…!”

“우리 카비르인들은 보이는 것만 두고 판단하지 않소. 예론킬, 당신은 이미 장왕자가 버리는 패요. 이기든 지든, 당신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제거당할 거요. 그런 거면 차라리 여기서 나와 손을 잡는 게 낫지 않겠소?”

“…….”

“카비르 진출도 당신이 살아 있어야 가능한 거요. 물론 나도 그때쯤엔 이번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거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당신과 나는 이런 진흙탕 싸움에 소모될 인재가 아니란 거요. 귀국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지.”

예론킬의 수심이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자레스는 그가 결단을 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거의 초 하나가 다 탈쯤에야 답이 나왔다.

“좋소.”

그리고 다시 그가 물었다.

“황자께선 내게 뭘 원하시오? 싸우지 않고 물러나는 건 말이 안 돼요. 그건 내 목을 베라고 들이밀어 주는 거요.”

“싸웁시다. 대신 가짜로 싸웁시다.”

“무슨 뜻이오?”

“내게 져 주시오, 예론킬. 당신을 대신할 가짜 장군을, 당신 갑옷을 입혀 내보내시오. 나는 당신을 죽인 거로 하고 말에 그 시체를 매달아 끌고 다니게 할 거요.”

“허수아비를 내보내란 거요?”

“그렇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리면 귀국의 조정에서도 당신이 죽은 걸 의심하지 않을 테니, 장군은 패잔병으로 위장해 세레그로 돌아가시오.”

“죽은 척하라 이거요?”

“당신 군사 반은 남겨 주겠소. 패잔병인 척 위장해서 해적질을 하시구려. 패잔병들이 해적으로 돌변하는 일은 자주 있었고, 그들이 고국을 공격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소. 마침 이번에 해적인 척 위장하기도 했으니 장군의 나라에서도 의심하지 않을 거요.”

“음….”

“그렇게 군사를 끌고 간 뒤, 몰래 내륙에 상륙해서 세레그로 가서 장왕자를 치시오. 장왕자는 당신이 죽은 줄 알고 방심하고 있을 테니, 기습이 어렵지 않을 거요.”

“그 대신 황자는 내 병력의 반을 꿀꺽하시겠다?”

“그냥 삼키려는 게 아니오. 슬쩍 남겨만 주면 난 그들을 이교도 토벌에 쓸 거고, 그 뒤엔 세레그로 돌려보내겠소. 당신은 패전을 가장해서 본국을 먹을 수 있고, 나중에 병력도 돌려받을 수 있으니 서로 좋은 거 아니겠소?”

지나치게 좋은 작전이라 오히려 망설여졌다. 예론킬이 잠시 말을 잃은 동안 자레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장왕자를 칠 때 없어진 줄 알았던 병력이 가세하면, 장왕자는 꼼짝도 못 하고 당할 거요.”

“그럼 당신은 뭘 얻게 되는 거요?”

“세레그를 물리쳤다는 업적. 그리고 이교도를 토벌한 전공. 나는 승전을 챙기고 마디나로 개선할 거요. 유가 황자와 부황은 원하던 걸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낭패하겠지.”

서로 손해가 될 게 하나 없는 계책이었다. 예론킬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녀자를 약탈하고 동료 병사를 죽인 죄로 참수형에 처해질 병사가 있소. 그놈을 나로 위장하도록 하겠소.”

두 사람의 비밀 밀약서가 맺어졌고, 자레스와 예론킬은 서명을 한 뒤 각자 밀서를 교환했다. 이것이 서로가 배신하지 못하는 증거가 될 터였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자레스는 예론킬을 죽이고 승전했다. 예론킬의 부대가 패주한 뒤, 여세를 몰아 이교도들이 숨어 있던 근거지를 습격했고 이교도 토벌까지 성공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일리파스와 스에반이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난 뒤였고, 모든 전공은 자레스에게 돌아갔다.

***

병력 정비를 마친 뒤, 자레스는 생포된 포로들을 살피러 갔다.

이번엔 아넬도 따라갔는데, 메타를 모시는 성녀로서 다른 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거길 가겠다고?”

자레스에게 딱히 부탁을 해 본 적이 없는 아넬이었다.

이번에 세운 군공은 전적으로 아넬 덕분이었기 때문에 원하면 노예 신분을 벗어나게 해 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공을 모르는 아넬은 고작 그런 것만 원했다.

그가 선선히 허락하자 아넬은 외투에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을 가린 다음 그를 따라나섰다.

드디어 우기가 시작돼서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름 먹인 가죽 외투를 입은 자레스가 처벅처벅 걸어갔고, 아넬은 간신히 그를 뒤따라갔다.

세레그인들이 물러나거나 병력으로 흡수된 지금, 잡힌 포로들의 대부분은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은 바닷가에 천막 하나 치지 않은 채 모여 앉아서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이미 아넬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레스를 따라갔는데, 다가가 보니 상황이 더욱 안 좋았다. 포로로 잡힌 자들은 대부분 부상자들이었다. 이렇게 방치돼 있으면 곧 사망자가 더 나올 것이다.

“하나같이 왜 이 모양들이지?”

자레스가 묻자 무칼라스가 말했다.

“좀 멀쩡한 신도들, 다 예론킬이 데려갔다. 이자들, 북쪽 해안에 숨어 있던 이교도들.”

“여우 같은 놈. 결국 제 실속은 다 차렸군.”

“예론킬이 남기고 간 부상병들이다. 나머지 노인들, 여자, 아이들은 못 싸우는 사람.”

“불쌍해요.”

아넬이 조그맣게 속삭이자 자레스가 가당찮다는 듯 돌아봤다. 무서운 시선이었지만, 아넬은 기죽지 않고 말했다.

“전하, 이들은 전쟁을 하려던 게 아니에요. 그냥 숨어서 살다가 들켜서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을 뿐입니다.”

“파이디, 노예가 건방지다.”

“제발 살펴 주십시오, 전하. 이자들도 카비르의 신민들입니다.”

“카비르에서 이교도는 사형이란 걸 모르나. 주신 메타를 부정하고 사악한 악신 칼리크를 모시는 자들이다. 악마 숭배자들이야.”

“전하께서 자비를 베풀면 개종할 수도 있습니다. 전하께서 메타 대신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무칼라스!”

더 이상 참지 못한 자레스가 외쳤다.

“이 녀석을 막사로 끌고 가라. 떠들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고, 나오지 못하게 감시해!”

“전하!”

무칼라스가 지체하지 않고 아넬을 낚아챘다. 허리를 잡혀 끌려가면서도 한마디라도 더 하려 버둥거렸는데, 그때 자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아침, 전원 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킨다!”

<2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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