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운명이 참 얄궂구나.’
소녀와 소년으로 구성된 열두 명의 노예들에 끼어 카에티의 집에 도착한 날, 아넬은 비관적인 심정에 사로잡혔다.
자레스를 피할 수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또다시 밀려온 운명의 파도가 그녀를 어디까지 밀어 보낼지 암담했다.
그녀와 함께 온 노예들은 각자의 임무를 받고 각기 다른 장소로 끌려갔다.
대부분 나이가 어린 데다가, 혼인 예물답게 일부러 외모가 뛰어난 아이로 골라 왔기에 힘든 노역이 아니라 부인들의 시중 노예로 불려 갔다.
노예들을 담당하는 노예장이 마지막으로 아넬을 부르더니 그녀를 내실로 데려갔다.
카비르에서 여자들이 사는 내실은 지위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
카에티는 우스라 부족장의 딸이기에, 이 내실에서 두 번째로 큰 방을 갖고 있었는데 아넬은 자레스의 방보다 훨씬 크고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치장한 카에티의 방을 보고 살짝 놀랐다.
“왔구나, 노예 파이디.”
당당하게 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카에티의 모습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카에티는 이 카비르에선 드문 옅은 금발 머리에 연회색의 눈을 갖고 있었다.
타네시 풍으로 장식 없이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얼핏 청초해 보여서, 여기저기 번쩍거리는 유색 보석과 화려한 도자기 속에서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다.
인상으로만 보자면 유순하고, 인자해 보였다.
그녀를 들여다보는 표정은 순진했고, 목소리도 다정했다. 이제껏 그녀가 만나 왔던 카비르인들과는 사뭇 달랐기에 아넬은 갑자기 희망이 샘솟았다.
“주, 주인 아가씨. 소원이 있습니다.”
돌연 솟은 충동에 아넬이 그 자리에 엎드렸다.
혼인 예물로 보내진 노예들은 결혼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로 잘 대해 주는 게 카비르의 전통이라고 했다.
그러라고 일부러 어리고 예쁜 노예들을 보냈기에 대부분 편한 일을 담당하게 하거나, 때로는 자비를 보여 주기 위해 해방시켜 주기도 했다. 아넬은 거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저를 타네시로 보내 주세요!”
이렌시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카비르에서 노예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댄 게 그곳이었다.
듣기에 카에티가 그곳에 유학도 했다 하니, 보내고자 하면 연고도 있을 터였다.
“어머나, 그게 무슨 말이니?”
카에티가 마치 몹쓸 말을 들은 것처럼 낯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노예가 제 입으로 해방을 시켜 달라고 조르다니, 목을 잘리고 싶어서 용을 쓰는가 보구나. 어디, 전하께서 보낸 노예들이 헛생각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혀 정도는 잘라 놓을까?”
“……!”
카에티는 고운 얼굴과 달리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어쩌면 아넬이 건방졌을 수도 있지만, 혼인 상대가 보낸 노예를 짐승처럼 다루는 카에티에게선 잠시나마 보였던 다정함이 녹은 듯 사라졌다.
“노예가 희망을 품는 건 죄란다.”
카에티가 잔혹하게 웃으며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화사한 웃음은 여전히 천사처럼 보였지만, 내뱉는 말은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노예가 꿈을 가지면 그게 무너질 때 더 견디기 힘들어지거든. 그건 본인에게도 고통이 아니겠니?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서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겠다.”
하녀가 나타나자, 카에티가 명령을 내렸다.
“이 아이를 악투 오라버님에게 보내렴.”
***
자레스는 잠을 좋아하지 않는다. 깊은 수마에 빠지면 암살에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잠이 들면 악몽을 자주 꾸는 탓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꿈은 달랐다.
꿈속에서 자레스는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허덕거리며 달려가는 금빛의 형체.
처음엔 사슴이라 생각해서 활을 들고 쫓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금빛의 그림자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자레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림자를 덮쳤다.
그림자가 바뀌었다. 사람의 눈코입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자레스는 신음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헉!”
잠에서 깨어난 자레스가 앉은 채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보통은 깨자마자 꿈을 잊어버렸지만, 이번엔 손에 남은 감각이 생생했다.
깨기 직전, 그는 그림자를 안았고 놓치지 않으려 그걸 애타게 끌어안았었다.
그건 아넬이었다. 품에 잠기던 그 감각이 꿈이 아니고, 바로 며칠 전 그녀를 그렇게 안고 입을 맞췄다는 걸 자레스는 기억해 냈다.
그를 떠올리자마자 또다시 열이 끓어올랐다.
“제기랄!”
그놈은 사내였다. 그리고 맹세코 자레스는 남색을 경멸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도 그랬지만, 생리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소년 노예에게 반응하다니.
여자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데, 남자에게 이상한 감정을 품다니.
여전히 꺼지지 않는 아랫배 쪽의 열기에 자레스가 스스로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머리를 자르지 않는 한 이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시종을 불러 목욕물을 준비하게 했다.
일부러 차가운 물을 받아 몸을 씻고 나오자, 퀴나에가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전하, 이걸 알려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는데 말입니다.”
“할까 말까 고민할 땐 하는 게 좋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려 드릴게요. 분명히 전하께서 말하라 하셨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오늘따라 유난히 서론이 길군. 대체 말하려는 게 뭔데 그래?”
“파이디가 악투에게 보내졌답니다. 카에티 님이 파이디가 도착하자마자 오라버니에게 보내 버렸다는군요.”
***
아넬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카에티의 저택에 온 날, 아넬은 그날 밤으로 다시 악투의 처소로 보내졌다. 카에티와 그는 남매이기 때문에 같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악투의 처소는 저택에서도 외진 곳에 있었다.
아넬은 이유를 몰랐지만, 그건 악투의 비밀스런 악행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전날 밤엔 이미 늦은 뒤라 노예들이 머무는 건물 중 빈방을 아넬에게 내줬는데, 아넬은 밤을 꼬박 새우다 이른 아침에 악투에게 불려갔다.
시중 노예를 따라 1층의 거실로 가자 쿠션에 기대앉아 있던 악투가 일어나며 혀 꼬인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파, 파이디. 과연 예쁘구나.”
아넬은 흠칫 놀랐다.
한눈에 봐도 멀쩡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카에티를 닮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눈이 잔뜩 풀렸고 입꼬리에선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 안에 가득 찬 고약한 냄새가 마약의 일종인 다와란 것도, 아넬은 바로 알아챘다.
물담배에 섞는 유피움보다 훨씬 더 독한 마약이었다. 이걸 태운 향을 들이마시면 유피움보다 강한 도취감을 얻는 대신 점점 미쳐 간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너는 나가 봐도 좋다.”
시중 노예가 안됐다는 시선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둘만 남자 분위기는 한층 더 위험해졌고, 악투는 입가의 침을 닦아 내며 아넬에게 성큼 다가섰다.
“이, 이리 오거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시키실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 그 이유를 몰라 물어? 크, 크크큭. 이, 이렌시아 출신이라더니 아직 나를 모르는 게로구나. 큭.”
저 눈빛은 그녀를 내리누르던 자레스의 것과 닮았다. 아니, 그보다 더 위험하다. 저건 광인의 눈빛이다.
그를 깨달은 순간, 아넬은 다가선 악투를 밀쳐 내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1층으로 달려 내려가며 아넬이 소리쳤다. 아무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모두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카에티 역시 알고 보낸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제발… 도와주세요!”
“히, 히히힛! 이, 이렌시아 출신은 역시 새, 색다르구나!”
뒤에서 악투가 비틀거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약에 취한 탓에 제대로 뛰진 못했지만 그래도 사내라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아넬은 당황해서 사방을 돌아봤다.
일부러 피한 듯, 사람이 씻은 듯이 보이지 않았다.
악투의 처소는 구조가 복잡했다. 악투의 악행을 가리려고 이리저리 벽을 쳐 뒀고, 아넬은 어제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입구가 어딘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넬은 방향도 정하지 못한 채 그저 달리기만 했다.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좁은 오솔길이 나왔다.
방향 감각을 잃은 아넬이 그리로 달아나자 곧 길이 사라지고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면서 풀밭이 나타났다.
거기도 아무도 없었는데, 대신 잎사귀가 칼날처럼 뻗은 덩굴 식물들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그게 다와였다. 악투는 나라에서 금한 풀을 아예 집 근처에 심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 히히힛. 거, 거기 서라! 후, 그, 그러다 잡히면 더 아프게 해 줄 거다!”
어느새 악투가 바로 뒤까지 쫓아와 있었다. 놀란 아넬이 얼른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그때 돌부리가 발에 걸리면서 다와 밭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얏!”
칼날 같은 잎사귀가 아넬의 몸 여기저기를 벴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악투에게 잡히기 직전이었다. 엉덩이를 물려 뒷걸음을 치던 아넬이 눈을 꼭 감으며 힘을 모았다.
‘커져라!’
마음속으로 외치자 곧 능력이 발현됐다. 다와 풀들이 불쑥 성장하면서 덩굴줄기들이 악투의 다리를 붙잡았다.
“어억!”
줄기에 걸린 악투가 넘어졌다. 일어나려 버둥거렸지만, 다른 줄기들이 불쑥불쑥 커져서 그의 팔다리를 휘감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괴, 괴물…!”
식물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건 처음 봤다.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지만, 잎사귀가 몸 여기저기를 베어 내는 감촉이 선연했다.
“우, 우왁!”
억지로 팔을 비틀어 넣어 허리춤에 있던 칼집에서 단도를 빼냈다. 호신용으로, 또는 누군가를 괴롭힐 용도로 갖고 있던 거였는데, 단도를 휘두르자 억센 덩굴풀이 뜯겨져 나갔다.
“거, 거기 서!”
깜짝 놀란 아넬이 다시 일어나 도망갔다. 악투가 악을 쓰며 그 뒤를 쫓아가려 했지만 또다시 덩굴풀들이 그를 막았다.
마치 풀들이 아넬을 위해 그를 방해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 문득 두려워졌다.
식물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성장하고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봤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넬이 이 풀들을 움직이는 것 같아 공포심이 밀려왔다.
“이, 이익! 뒈, 뒈져라!”
악투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풀들이 끊겨 나가면서 악투의 팔다리가 풀려났다. 하지만 다시 그 앞에 돋아난 풀들이 불쑥 자라났는데, 그때 악투가 아넬을 향해 단도를 집어 던졌다.
“꺄악!”
단도는 아슬아슬하게 아넬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제대로 맞은 건 아니지만 깜짝 놀란 아넬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 순간 악투가 몸을 날리며 아넬을 쓰러뜨렸다.
“아악! 도, 도와주세요!”
그에게 잡혀 깔리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나 도와달라 외쳤지만, 이 다와 밭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악투만 드나들었기 때문에 평소에도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히, 히히! 히이익!”
악투가 괴성을 지르며 그녀의 옷을 찢었다. 옷자락이 찢어져 나가면서 가슴팍이 드러나자, 아넬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 쪽을 가렸다.
그 틈을 타 이번엔 악투가 그녀의 허리춤을 밀어 내리려 했다.
“시, 싫어!”
그때였다.
그녀의 비명에 응답한 것처럼 저택으로 이어진 길 쪽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
퀴나에의 설명을 듣고도 자레스는 말이 없었다.
퀴나에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넬과 함께 보낸 노예들 중엔 첩자도 섞여 있었고, 그 아이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지만 보고를 들은 자레스는 침묵을 지켰다.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으시겠어요?”
“…….”
“악투는 남색가로 유명한데요. 재판에 안 넘겨진 건 순전히 우스라의 족장이 악투가 정신병이 있다고 둘러댔기 때문입니다만, 평소에 미친 짓을 하도 많이 하고 다녀서 다들 반쯤은 믿는다죠?”
그 나쁜 버릇 때문에 일찌감치 후계자 자리에서 내쳐진 탓에 자레스처럼 정적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참소를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에 자신의 악행을 고칠 기회도 놓쳐서 악투는 구제불능의 쓰레기가 됐다.
“살해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두시렵니까?”
다시 한번 퀴나에가 묻자 자레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이윽고 천천히 내뱉었다.
“내버려 둬.”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카에티 님께 보내라 한 게 저긴 합니다만, 그래도 파이디가 살해당하는 건….”
“이제 그놈의 주인은 카에티다. 내 소관이 아니야.”
잠시 말을 끊은 자레스가 다시 말했다.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말을 마친 자레스가 도로 침대로 가더니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까?’
감정이 없는 목소리를 들으면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이번엔 정말로 독하게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퀴나에는 절을 하고 물러났다.
그가 사라진 뒤 자레스는 한동안 침대에 누운 채 멀거니 천장만 바라봤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일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던 자레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퀴나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자 문이 열리면서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퀴나에가 나타났다.
“말을 가져와!”
“이미 대령해 놨어요.”
퀴나에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
자레스는 폭풍처럼 우스라 족장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달려 나와 그를 맞았지만, 자레스는 족장에게 안내하겠다는 하인들을 무시하고 외쳤다.
“악투의 처소가 어디냐?”
“그건 왜, 왜 물으십니까?”
그러자 자레스가 칼을 빼 들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안내해라!”
사색이 된 하인이 앞장섰다. 그를 쫓아 저택의 외진 곳으로 달려가자 악투가 사는 건물 뒤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넬의 목소리였다. 그 뒤부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레스가 칼을 빼 든 채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려가자, 무성한 다와 덤불 위로 쓰러져 있는 아넬과 그 위에 올라탄 악투의 모습이 보였다.
막 바지를 벗기기 직전인 악투와, 그 아래에 깔린 아넬을 본 순간 자레스는 문자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어째서인지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레스가 악투에게 달려들며 칼을 휘둘렀다.
“어, 어억!”
그 와중에도 자레스를 발견한 악투가 용케 몸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덩굴에 걸리며 자빠졌고, 악투는 죽을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빌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흐린 머리로도 자레스가 격분했다는 건 알겠다. 희미한 이성이 그 이유가 아넬이란 걸 짚고 있었다.
“일어나라, 악투. 사내답게 덤벼!”
자레스가 칼을 버렸다. 그리고 격투 자세를 취하자 악투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나마 칼이 없으니 승산이 없지는 않다고 봤기에, 악투가 괴성을 지르며 자레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건 오산이었다.
가볍게 몸을 틀어 악투의 주먹을 피한 자레스가 그의 다리를 걷어차며 그대로 덤불 위로 쓰러뜨렸다.
“크아악!”
귀하게만 자란 악투는 자레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자레스는 악투를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팼다.
***
“이건 우리 부족에 대한 모욕이오! 우스라는 감히 이대로 넘길 수 없소!”
그날 저녁으로 찾아온 우스라의 후계자는 서슬 퍼렇게 외쳤다.
일찌감치 내쳐진 악투 대신 계승자가 된 자로, 카에티의 둘째 오라비 제임이었다. 귀찮다는 태도로 그를 맞이한 자레스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보상으로 100명의 노예와, 100만 디하브를 보내겠소.”
“그걸로 입막음을 하겠다는 겁니까? 우스라의 명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오!”
“명예라? 그걸 아는 자들이 내가 예물로 보낸 노예를 그런 취급을 해?”
자레스가 그리 묻자 이번엔 제임의 말문이 막혔다.
“혼인 선물로 보낸 놈이었소. 그런데 그런 녀석을 신부가 아니라 남에게 보낸 것부터 이미 내 위신을 떨어뜨린 짓이었어. 그렇지 않은가?”
“그건….”
“심지어 내가 주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신부 측에서 달라고 목록에 적어 보내기까지 했소. 그런데 자기들이 달라고 한 녀석을 남색가에 정신병자로 이름난 쓰레기 놈에게 노리개로 넘겼지. 이거야말로 나를 모욕하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짓이 아니란 말인가?”
할 말이 없어 제임이 식은땀을 흘렸다.
카에티에게 일어난 일을 들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냥 이 일을 덮고자 했다. 하지만 카에티가 고집을 부려 찾아왔더니 결국 엄중한 항의만 듣게 됐다.
“그런데도 나는 혼사를 물리는 대신 오히려 더 많은 노예와 재물을 보내 이 일을 덮어 주려 했소. 대답해 보시오, 제임. 내가 지금 비난받을 짓을 한 거요?”
“…….”
무례의 순서를 따지고 들면 결국 손가락질당할 건 우스라 쪽이다. 더 항의해 봤자 망신만 당할 게 뻔했기에 제임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가려는 제임을 불러 세운 자레스가 덧붙였다.
“당신 동생에게 전하시오, 제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지만, 또다시 시건방을 떨면 그때는 다음이 없소.”
“…전하겠습니다, 전하.”
“나는 오만한 여자를 싫어하오, 제임.”
잠시 말을 끊은 자레스가 다시 위협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남편의 명예를 깎으려 드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이 카비르엔 아무도 없소.”
제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전하자 우스라 족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마디 내뱉은 게 ‘혼사를 물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란 말이었다.
카에티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오라비의 설명에 카에티는 값비싼 2대륙산 도자기를 집어 던지며 격분했다.
“말도 안 돼요! 그 노예를 감싸 주려고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거라고요!”
“하지만 카에티, 따지고 들면 우리가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잖느냐. …그 노예를 악투 형님에게 보낸 건 무례한 짓이었다.”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요?”
이 고집 센 누이를 말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스라 부족장은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카비르 관습상 네 번째 부인까지 둘 수 있는데도 다른 부인을 맞지 않았다.
그런 아내가 카에티를 낳고 얼마 안 돼 죽은 뒤,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내를 대신하는 귀한 보물이 됐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카에티. 이 기회에 다른 혼처를 찾아보자꾸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파혼을 하잔 말인가요?”
“그래, 너도 봤지만 그 노예 놈과 자레스 황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건 누가 봐도 뻔하지 않느냐.”
“그게 자레스 황자의 흠일지는 몰라도, 그의 미래까지 바꾸지는 않아요.”
카에티가 딱 잘라 말했다.
“자레스를 포기하라고 하면 누구를 택하란 거죠? 제가 일리파스에게 갈까요, 아니면 유가에게 갈까요?”
“유가 황자도 나쁘지 않지 않느냐.”
“아뇨! 유가는 처가의 기세를 빌려야 할 정도로 세력이 약한 자가 아닙니다. 절대 우리 부족의 손을 잡으려 들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유가는 이미 부인이 있습니다. 전 절대 넷째, 다섯째 부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일리파스나 스에반 황자는?”
“둘 다 멍청이입니다. 게다가 일리파스 황자는 몰라도 스에반은 이미 아내가 있잖아요.”
“아니면 나이가 더 어린 황자도 있다.”
“더 어린 황자는 아예 황위에 다가설 기회조차 없지요. 자레스 황자가 가장 유망합니다. 나머지 황자들은 황위에 올라도 우리와 권력을 나눠 가지지 않을 테니, 우리 부족이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선 자레스 황자가 제일 적당합니다.”
그럼 카에티가 욕심을 좀 버려 주면 좋을 텐데, 동생은 그럴 생각도 없는 듯했다.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카에티에게 노예 소년과 남편의 애정을 나눠 가지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혼담은 그대로 진행하겠어요. 일단 내가 안주인이 되면, 그때 가서 그 아이의 처분을 생각해 봐야지요.”
입술을 꼭 깨문 카에티가 중얼거렸다. 절대 살려 두지는 않을 거라고, 카에티는 속으로 다짐했다.
제임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결심을 바로 알아챘고, 그 때문에 동생이 더 두려워졌다. 아무리 봐도 차대 부족장은 우유부단한 그가 아니라, 여동생이 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어째서 우스라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딸이 이리 당찬지.’
아버지가 왜 카에티를 유난히 아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악투 오라버니는 어쩌고 있나요?”
“드러누웠다. 다리도 부러졌고, 두 팔은 아주 작신작신 밟아 놨더구나. 노예들이 간호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헛소리를 하고 있어.”
“헛소리라뇨?”
“파이디란 놈을 쫓아갔는데, 다와 덩굴이 자라나서 형님의 다리를 붙잡았다더라.”
“머릿속까지 마약에 절여졌나 보군요!”
***
“녀석은?”
제임이 돌아간 뒤 자레스가 퀴나에에게 물었다.
“곁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아주 기절한 듯 잠들었다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퀴나에가 차를 올렸다.
2대륙에서 공수해 온 최상급 도자기 잔에 맑은 찻물이 조로록 차자, 자레스는 음미도 하지 않고 찻물을 단숨에 꿀꺽 털어 넣어 버렸다.
‘저, 저 짐승. 하여간 품격이랑은 거리가 멀지.’
그런 자레스를 택한 게 자신이니 할 말도 없다. 한숨을 푹 쉰 퀴나에가 물었다.
“노예 100명에 100만 디하브라. 파이디 놈에게 그런 희생을 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전하?”
자레스도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남자 아래 깔려 있는 아넬을 보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악투가 피떡이 된 뒤였고, 아넬은 기절한 뒤였다.
자레스는 그런 아넬을 들쳐 메고 말을 몰아 달려왔는데, 그녀를 데려다 방에 눕힌 뒤에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인정해야 했다. 이제는 아넬을 보낼 수 없었다. 떨어뜨려 봤자 아넬이 다시 돌아오거나, 아니면 그가 쫓아가게 되니, 이제는 그냥 헛된 노력을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미친 거지.’
아랫배에 고여 있던 용암 같은 열기가, 바로 옆방에 아넬이 있다는 걸 인지한 것만으로도 잠재워졌다.
미칠 노릇이다. 부정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바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넬을 다른 남자에게, 또는 여자에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한 번 선을 끊어 버리고 나니 그의 마음은 아주 제멋대로 움직였고 갇혀 있던 반동만큼 날뛰어 댔다.
악투에게 안겨 있는 아넬을 본 순간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한 번도 남 때문에 흥분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자레스는 제 표정을 감추려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제 손 안쪽에 가려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은 차갑게 내려앉는다. 이제부터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거냐고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지금은 그것밖에 모르겠다.
***
아넬은 다음 날 오전에야 깨어났다. 쭈뼛거리며 방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복도에 앉아 있던 소년 노예가 반색하며 외쳤다.
“파이디 형!”
“사브?”
며칠 사이에 홍역이 나은 사브는 예전보다 더 팔팔해 보였다. 그녀를 치료해 준 게 아넬인 걸 알아서인지 예전보다 더 친근하게 굴었다.
“퀴나에 님이 형을 도와주라고 했어요. 형, 이제부터 모르는 게 있으면 저한테 의논하면 돼요!”
궁금한 것. 제일 궁금한 건 왜 자레스가 그녀를 빼앗아 왔느냐 하는 거였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카에티에게 보낼 때는 언제고, 악투를 두들겨 패면서까지 아넬을 데리고 왔다.
다시 자레스에게 돌아온 게 좋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녀를 쫓아오던 악투의 악귀 같은 모습을 생각하니 돌아온 것이 다행인 게 맞는 것 같다. 적어도 자레스는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으니.
그런데 불현듯 그때 자레스가 그녀에게 키스를 해 오던 감촉이 떠올랐다.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일이 일어나자마자 카에티에게 보내지고, 그러다 또 악투에게 보내지는 바람에 그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는데 다시 자레스에게 돌아오니 기억이 생생하게 그녀를 덮쳤다.
‘자레스는 그 일을 또 저지르고 싶은 건가? 아니… 이미 남자로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또 성욕을 품게 된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카에티에게 보내 놓고서도 뒤늦게 그녀를 뺏으러 온 것이다. 그녀에게 욕정을 풀기 위해.
끔찍했다. 그를 피하기 위해 남장을 했는데도, 다시 그녀를 욕망하게 된다면 그녀가 성별을 감추고 노예의 인생까지 자처한 이유가 없어진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도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괴롭히거나, 노리개로 삼거나, 아니면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들려 보냈다.
사실상 자레스의 곁이 가장 안전했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불안한 곳이기도 했다.
“아, 맞다. 파이디 형, 전에 말했던 그거요!”
문득 사브가 그녀의 잡념을 흐트러뜨렸다.
“그거, 파이디 형이 부탁했던 염색초 말이에요. 샤이크 형이 구해 놨어요.”
“아, 그래…?”
“필요하면 지금 가져다줄까요? 샤이크 형이 한 다발을 훔쳐…, 아, 아니 얻어다 놨거든요.”
“고마워. 그래, 줄 수 있으면 지금 가져다줄래?”
그나마 빠진 염색물이라도 들여 두면 조금 안전해질까. 아넬은 사브가 가져다준 염색초를 물에 풀어 조심스럽게 몸을 씻었다.
갈색 물을 뒤집어쓴 뒤, 몸에 스며들기를 기다려 가며 천천히 말렸다.
한나절쯤 지나며 완전히 물이 들 것이다. 그때까지는 지금까지처럼 물이 빠진 팔 쪽엔 천을 감아 숨겨야 했다.
‘이젠 또 어떻게 하지? 자레스 황자에게 부탁해서 또 다른 나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해야 하나?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녀가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하다못해 사브가 잠깐 염색초를 가져다준 것 말고는 불러내는 사람도 없었다.
곁방은 1층에 있던 노예 처소와 다르게 더 넓고 개인 침대에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 손님방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는데, 사실 그 용도가 맞았다.
단지 창이 없어 어두운 것만 불편했는데, 불을 켤 줄 모르는 아넬은 등불이 놓여 있는데도 거기에 손을 댈 생각은 못 했다.
의자에 기댄 아넬은 곁방의 문이 언제 열릴지 몰라 불안해하다, 이윽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번쩍 눈을 떴는데, 쳐다보니 퀴나에가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퀴, 퀴나에 님.”
어째선지 퀴나에가 그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빛에 드러난 아넬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가 툭 내뱉었다.
“그 인간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네?”
“아무것도 아니다. 황자 전하께서 부르시니 얼른 가 보렴.”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얼른 나오긴 했지만, 막상 또 자레스에게 가려니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넬은 망설이면서 자레스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황자님.”
자레스는 장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자레스의 방은 남쪽과 서쪽에 각각 창이 있어 불을 켜지 않아도 밝았는데, 그 빛에 드러난 아넬을 보자마자 자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너 대체 꼴이….”
“무, 무슨 소리신지?”
“네 몸이 지금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단 말이야?”
뒤늦게 따라 들어온 퀴나에가 그제야 아넬을 제대로 봤다. 그 역시 눈을 크게 떴고, 이어서 폭소를 터뜨리며 그 자리에 엎어졌다.
“푸하하하핫, 보, 보라색, 보라색이야, 세상에! 몸이 보라색이 됐어!”
“네?”
아넬이 깜짝 놀라 제 팔다리를 봤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피부색은 사람의 색이 아니었다.
“이, 이게 뭐…. 아앗!”
바지를 걷자 그 아래로 드러난 피부색 역시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보랏빛으로 물든 피부가 이젠 검붉은색으로 변해 갔다.
“푸하하핫, 가, 가지다! 인간 가지다!”
퀴나에의 목소리가 궁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살다 살다 성녀가 가지 취급을 받다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아예 석탄 토막이 됐고, 너무 창피해서 눈물까지 찔끔 났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아, 혹시 그 염색초 때문에?’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갈색 옷으로 물들이는 염색초인 걸 확인했다고 했는데?
‘이 풀로 옷을 염색한 걸 확인하고 가져왔다고 했는데, 왜…. 아!’
하지만 아넬은 더 추리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자레스가 어깨를 들썩거리다 못해 결국 고개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으하하하하핫!”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웃음이 폭발했다. 압축됐던 공기가 터져 나가고 그 자리에 번쩍거리는 빛이 꽃가루처럼 흩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퀴나에도 살짝 놀라긴 했지만 아넬의 놀람은 더욱 컸다. 심장이 제멋대로 춤을 추고, 머릿속이 따끈따끈 익어 버리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돌연 자레스가 웃음을 뚝 멈추면서 그녀를 노려봤다. 아넬도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자레스가 묻자 왜인지를 깨달았다.
“…황자님이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봐서 그래요.”
말하고 나니 이번에도 자레스는 갑자기 알 수 없는 표정을 했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싸늘하게 그녀를 쳐다보더니 툭 내뱉었다.
“나가라.”
또 뭐가 그의 심경을 건드린 걸까. 나가라고 하니 고맙기는 한데, 이 변덕스러운 황자에게 살짝 원망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그녀가 나간 뒤, 자레스가 손가락을 까닥여서 퀴나에를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파이디 녀석, 왜 저런 몸이 된 거지?”
“글쎄요, 악투가 가지를 잔뜩 먹인 모양이죠.”
“확인해 봐.”
“이젠 하다하다 노예 놈 피부 관리까지 시키실 생각이세요? 아이고, 내 팔자야아!”
“갈색이던 몸이 보라색으로 바뀐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저놈은 일부러 제 살색을 바꾼 거다.”
세상에 제 몸을 보라색으로 물들일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실제로 아넬도 달라진 제 몸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보라색 물이 든 건 제 뜻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버리기엔 아넬의 몸은 빈틈없이 곱게도 물들었다. 실수가 아니라 신경 써서 색을 입혔다는 증거다.
“…혹시 다른 색으로 물들이려다 엉뚱한 색이 돼 버린 걸까요?”
“그걸 확인해 보란 말이다.”
자레스는 그냥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고, 퀴나에는 또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단 며칠 동안에 눈 밑 주름이 깊어졌다.
“그 꼴로 어딜 나돌아 다니니? 넌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어.”
퀴나에가 그렇게 말해 준 덕분에 아넬은 콕 박혀 있을 수 있었다. 노예 주제에 놀고먹으려니 눈치가 보였지만 이 모습으로 돌아다닐 순 없었다.
사브가 등불을 켜 준 덕에 몸을 비춰 봤는데, 이건 영락없이 가지였다. 놀려도 할 말이 없다.
“미안해요, 파이디 형. 샤이크 형이 갈색 염색초인 줄 알고 가져왔는데, 알고 보니 갈색으로 물들었다가 마지막엔 보라색으로 변하는 염색초래요.”
“뭐라고?”
“아니, 그게 실수한 건 맞지만… 파이디 형이 설마 그걸로 몸을 물들일 줄은 몰랐죠.”
그렇게 변명하니 오히려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걸로 목욕은 왜 한 거예요?”
“피, 피부병이 있어서 그런 거야.”
“아, 피부병에는 염색초로 목욕을 하면 돼요? 좋은 거 알았다!”
“아, 아니야! 내가 특이 체질이라서 그래. 절대로 따라 하지 마!”
사브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궁중 사람들이 보라색이 돼 걸어 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목욕물 갖다 드릴까요?”
“내, 내가 길어 올게!”
“퀴나에 님이 될수록 형이 돌아다니게 하지 말랬어요. 황자님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창피해서 얼굴에 불이 난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브와 샤이크가 목욕물을 길어다 줬고, 아넬은 사람들이 잠들 때를 기다려 몸을 씻었다.
‘갈색 물이 한 달 넘게 걸려 빠졌는데, 보라색 물은 언제 빠지지?’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닐 걸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니, 오히려 잘 된 건가? 자레스 황자도 이런 모습으론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할 거야. 그러면 숨어 있을 수 있고… 그사이에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고. 아, 차라리 그러면 좋겠어.’
아넬은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아넬에게 곁방을 주면서, 방의 잠금장치는 떼 버렸다. 자기 처지를 잊고 깊이 잠들어 있던 아넬이 깜짝 놀라 일어나자, 문을 밀고 들어온 무칼라스가 그녀를 불러냈다.
“환자 전하가 부르신다.”
“황자님이 부르신다는 거죠?”
환자와 황자의 차이를 새기느라 무칼라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동안 아넬은 어제 길어 온 우물물로 대충 입과 얼굴을 씻은 다음 복도로 나갔다.
몰랐는데 이미 날이 훤히 밝은 뒤였다.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자각에 아넬은 참담한 심경이 됐다.
사자 굴에 들어와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니. 너무 오래 붙어 있다 보니 이젠 무섬증도 없어진 듯하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넬이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 돌연 방 안에 있던 퀴나에와 자레스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도 보라색이라 그런 건가?’
부끄러워진 아넬이 팔을 들어 제 피부의 농도를 확인했다. 그 순간 아넬 역시 깜짝 놀라 경직되고 말았다.
피부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살빛은 보라색이 아니라 원래의 눈부신 흰빛으로 변해 있었다.
‘갑자기 왜?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너… 노예가 맞니?”
퀴나에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자레스 역시 마찬가지 의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증 이전에 갑자기 달라진 아넬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원래의 흰 피부로 돌아온 아넬의 모습은 본래 갖고 있던 금발과 녹색의 눈과 어울려 경이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피부빛 하나로 사람의 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짧은 머리와 갈색의 피부는 그녀를 노예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흰 피부로 바뀌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고귀한 출신처럼 보였다.
은연중에 그녀에게 배어 있던 우아함이 갑자기 이해가 갔다.
아넬은 노예가 아니었다. 뙤약볕에 노출돼 거친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노예는 이런 곱고 흰 피부를, 그와 같은 품격을 가질 수가 없었다.
“넌 누구지?”
“노, 노예 파이디입니다.”
“넌 노예가 아니야.”
자레스가 무겁게 속삭였다.
“왜 여태 정체를 숨긴 거냐? 넌 도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