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처소로 돌아온 아넬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자신의 손을 비춰 봤다.
맨눈으로 봐도 손에서 팔뚝에 이르는 부위의 색이 옅게 빠져 있었다. 보통은 드러난 부위가 더 그을려야 하는데 팔뚝만 하얗게 변했으니 누가 봐도 이상한 걸 눈치챌 터다.
“어떻게 하지?”
아넬은 일단 겨우 두 벌 받아 온 셔츠를 찢어 두 손을 감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감출 수는 없다.
카비르에도 염색초가 있긴 할 거다. 문제는 그걸 어디서 구하냐는 건데, 퀴나에나 자레스에게 부탁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른 노예들한테 알아보려니 그녀는 사방에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였다.
‘혹시?’
그나마 얼굴과 이름을 아는 게 사브뿐이었다. 주저하며 주방 어미에게 찾아간 아넬이 사브에 대해 묻자 주방 어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걘 앓아누웠다. 쓸모도 없는 게 드러누워서 밥이나 축내고 있어.”
“감기가 심해진 건가요?”
“그건 몰라. 전염병일지도 몰라서 노예장이 지금 사브를 격리소로 보낼까 하더라.”
이렌시아에서 격리소로 가는 건 사실상 방치였는데 카비르라고 다를 것 같진 않았다. 병이 심해져도 돌봐주지 않으니 격리소에 버려지면 죽는다고 봐야 했다.
“그런….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어쩔 수 없지. 윗전들이야 쓰고 버리는 노예한테 신경이나 쓰겠니?”
“약을 쓰면 되지 않나요?”
“약초처럼 귀한 걸 우리 같은 것에게 주겠냔 말이야. 너도 생각이 있다면 사브를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건 진짜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그녀의 곁에서 숨을 쉬고, 그녀가 성력을 나눠 줬던 어린아이를 아넬은 외면할 수 없었다.
아넬은 주방 어미에게 물어 노예들이 사는 건물로 향했다. 거기엔 사브의 형인 샤이크가 있었는데, 샤이크는 처음 보는 아넬을 경계했으나 사브를 고쳐 주겠다는 말에 의심을 풀었다.
신전 노예로 일하면서 약초를 많이 접했다는 말에 넘어온 것이다.
“동생을 만나긴 힘들 거야. 하지만 지하실의 문지기랑 아는 사이니까 문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해 줄지도 몰라.”
문지기의 허락을 얻어 지하실로 내려가자 사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는 나오지 못하도록 밖으로 잠근 문 안에 갇혀 있었다.
아넬이 부르자 땀투성이가 된 몸으로 창에 쇠창살이 끼워진 문 쪽으로 기어 왔는데, 아넬은 사브의 얼굴에 돋아난 붉은 반점을 보고 바로 아이의 병이 뭔지 알아챘다.
“이건 홍역이에요.”
“홍역이라고? 어릴 때 앓는 그 열병?”
“맞아요. 잘만 치료하면 죽을병이 아니라고요. 이미 홍역을 앓은 사람에겐 전염도 안 돼요.”
“나도 알아. 하지만 앓지 않은 사람에겐 무서운 병이라고. 그런 걸 무슨 수로 치료를 해?”
“이렌시아에선 말린 일라 풀을 갈아 먹여요. 혹시 여기 일라 풀이 있나요? 공용어로는 일라라스라고 하는데.”
“나는 잘 몰라. 설사 있다고 해도 우리 같은 노예들에게 나눠 주지는 않을 거야.”
체념한 듯 샤이크가 한숨을 쉬었다. 동생을 사랑하긴 했지만,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너무나 많았다.
노예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죽지 않길 바라면서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신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아요.”
아넬은 무겁게 속삭였다. 그가 아는 신 메타는 사람들을 살리라고 성력을 그녀에게 불어넣어 줬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사브와 그녀를 마주치게 한 것도 어쩌면 메타의 인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넬은 사브를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가 약초를 구해 볼게요.”
“약초 창고라도 털려고? 거긴 항상 감시병이 지키고 있어.”
“정제된 것만 약효가 있는 건 아니에요. 나는 성녀님을 모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약초나 의술에 대해서 약간은 알아요.”
“의원이라도 된단 말이야?”
“일단 나를 아무 데나 풀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그중에 약초가 있을지도 몰라요. 이렌시아의 약초가 카비르에선 잡초일 수도 있으니까요.”
샤이크의 눈에 살짝 희망이 어렸다. 성녀를 직접 모셨다니, 하찮게 여겼던 이렌시아 출신 소년이 갑자기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풀이라면야 지혈초 밭에 아주 많이 있긴 하지.”
“지혈초 밭이라고요? 여긴 지혈초를 밭에서 키워요?”
말린 지혈초 풀을 붙이면 아주 심한 출혈도 막아 준다. 이렌시아에서도 귀한 것이었는데, 이 카비르에선 밭에서 키우나 보다.
“거기도 파수꾼이 지키고 있어서 노예들은 얼씬도 못 하지만, 그 근처까지 가는 건 괜찮을 거야. 지혈초는 벌레를 많이 끌어들이는 성질이 있어서 밭 근처에 풀이 많이 자라거든.”
“그리로 가 봐요!”
사실 아넬은 정말 약초를 찾아낼 생각은 없었다. 성력을 그냥 불어넣어 줄 수는 없으니 눈속임을 하려는 것이다.
지혈초 밭은 황자궁을 나와 황궁으로 가는 길목 쪽에 있었다. 그리로 향하자 과연 포석을 깐 길이 사라지면서 잡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풀을 발견하자마자 아넬은 멈춰 서서 그를 들여다보는 척했다.
눈에 익숙한 풀이 있었다. 리산이라 불리는 풀이었는데, 너무 흔해서 잡초 취급을 받았지만 모아서 달여 마시면 부인과 질병에 효과가 있다. 한 움큼을 잡아 뜯어낸 아넬이 외쳤다.
“찾았어요!”
아무렇게나 외친 아넬이 흙만 대충 털어 낸 뒤 다시 지하실로 향했다. 오는 길에 우물에서 풀을 씻었는데, 그걸 찢어서 문까지 기어온 사브의 입에 털어 넣어줬다.
그리고는 눈치채이지 않게 조심해서 벌어진 사브의 입에 자신의 성력을 살짝 불어넣었다.
“효과가 있나 봐!”
리산 풀이 아니라 성력의 효과였지만 어쨌든 지켜보는 동안에 반점이 빠르게 사라졌다. 완치가 될 정도로 성력을 준 게 아니라, 일단 그 정도에서 멈췄지만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젠 시간이 치료해 줄 거예요.”
문에서 물러나면서 그렇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샤이크가 무릎을 꿇었다.
“고맙다, 파이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그 역시 초조했었던 것 같다. 샤이크가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카비르에선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않으면 신의 저주를 받는다고 믿어. 카비르인으로서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문득 그의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것도 기회가 아닐까?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아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혹시 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줄게.”
“염색초를 구할 수 없을까요?”
“염색초? 천 물들일 때 쓰는 거?”
“맞아요. 갈색으로 물들이는 거로요.”
그건 흔하디흔한 거였고, 황자궁 바깥에 있는 염색방에 가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샤이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별거라고…. 내가 이 궁 안 지리는 빠삭한 놈이야. 바로 훔쳐다 줄게!”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름 없는 풀과 같던 샤이크와 사브 역시 운명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고, 그들은 어김없이 정해진 수순을 밟아 한 발짝씩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
카비르인들은 음료수를 좋아한다.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차, 더위를 씻어 내는 시원한 과즙, 이열치열로 갈증을 다스리는 커피 같은 것들이 노점과 찻집, 카베(일종의 카페)에서 팔려 나갔다.
그중에 카베는 요즘 특히 유행 중이었다.
해상무역이 번성하면서 아와드에서 질 좋은 원두들이 대량으로 들어왔고, 카베 주인장이 그것들을 구수한 맛이 나도록 볶아 내고 분쇄한 뒤 가루를 주전자에 넣고 끓여 냈다.
쓰면 쓴 대로, 설탕 결정을 넣어 달콤하게 만들면 그것대로 맛있어서 카비르에선 집에서는 물론이고 커피 맛이 좋기로 유명한 카베를 찾아 커피를 즐겼다.
자레스가 찾아간 카베는 그중에서도 가족 단위 손님들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남녀가 엄격하게 분리된 카비르는 찻집도 여성용과 남성용이 구분돼 있었다. 젊은 남녀가 함께 가는 카베도 있긴 했지만, 그런 곳을 찾는 남녀는 정숙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에 비해 가족 손님들이 찾는 카베는 가족이기만 하면 남녀가 함께 자리해도 비난을 받지 않았다.
비록 자레스는 혼자였지만, 그가 나타나자 자레스를 알아본 카베 주인이 정중하게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카베 안쪽에는 정원이 있었다. 과일나무와 향기로운 꽃나무가 심어진 정원 곳곳에 문이 없고 지붕도 없는 작은 방들이 있었다.
그 방마다 쿠션이 쌓인 장의자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손님들이 모여 앉아 물담배와 커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자레스가 찾아든 곳은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었다. 독채가 아니라 짧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방이 붙어 있었다.
머릿수가 많은 가족을 받기 위해 마련한 곳이지만, 지금은 이 넓은 방을 자레스 혼자만 차지하고 있었다.
“커피. 설탕은 넣지 말고, 진하게.”
“알겠습니다.”
카베기(커피를 전담하는 하인)에게 주문을 하자, 그가 곧 손잡이가 긴 구리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그 안에 담긴 진한 커피를 도자기 잔에 따라 냈다.
어디선가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우드의 둥당거리는 음률이 울려 퍼졌지만, 다행히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적당한 높이의 음악은 카베 안 곳곳에서 나누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가리기에 좋았다. 자레스는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 음악을 들으며 그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인기척이 들려왔다.
점원이 안내해 온 듯, 여자 손님 둘이 자레스가 앉은 옆방으로 들어왔다. 주문에 따라 차와 과일을 내왔지만 옆방에선 여자들끼리 흔히 주고받는 수다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한동안 숨죽인 대화가 오고 가는 듯하더니 이내 발소리가 들리고 한 명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거기 계신가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에선 벽 때문에 그 너머에 앉아 있는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청량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자의 인상이 그려진다.
총명하고 야무진, 하지만 귀하게 자란 우아한 여자일 것 같다.
“있소.”
“우스라의 딸 카에티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아버지가 용케 독대를 허락했군.”
“제 아버님은 보석은 사는 사람이 직접 봐야 한다고 믿는 분이시거든요.”
“보석이란 그대를 이르는 건가, 아니면 나를 말하는 건가? 선택을 당하는 게 어느 쪽이지?”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진다면야, 선택을 누가 하든 상관없지 않을까요?”
고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재치도 있고, 자신에게 야심이 있다는 걸 숨기지 않는 걸 보니 적어도 그의 앞길에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는 되지 않을 터다.
“타네시로 유학을 다녀왔다던데, 배움이 많이 깊어졌소?”
“타네시는 여자에게도 배움을 허락하는 곳입니다. 덕분에 많은 학문을 섭렵했지만, 카비르로 돌아와서는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다른 거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게 뭐지?”
“여자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 주는 것은 남자라는 거지요. 카비르는 아직 그런 곳입니다.”
현실적인 대답에 자레스가 크게 웃었다. 좋게 말해 시원시원하고 나쁘게 말해 당돌한 여자다.
하지만 자레스는 카에티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얌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남자들을 조종하려고 드는 황궁 여자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혼서를 보내겠소.”
결단을 내린 자레스가 말했다. 어차피 카에티가 타네시로 떠나기 전부터 혼담이 오고 간 터였다. 그녀도 돌아왔고 하니 이제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
“좋은 배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하.”
“나 역시 모자란 남편이 되지 않도록 힘쓰겠소.”
그렇게 간단하게 혼인이 결정됐다.
이것으로 카에티의 부족인 우스라 일족이 자레스에게 힘을 보태게 될 것이고, 자레스가 황제가 되면 우스라 일족은 지방 영주에서 중앙의 황족으로 진출하게 될 터였다.
자레스와 카에티 모두 이 혼사에 만족했다.
“전하, 외람되지만 혼서를 보낼 적에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게 뭐요?”
“혼서와 함께 청혼 예물을 보내시겠지요? 그때 받을 예물을 제가 고르고 싶습니다.”
“당돌한 요청이군.”
청혼 예물은 신부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기에 부끄럽지 않게 보내는 게 예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랑이 고르는 것이지, 신부가 일일이 목록을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라는 것이 따로 있소?”
“무리한 걸 요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청을 들어주시면 저는 물론이고 황자 전하의 명예 역시 드높아질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꼭 받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뭔지 몰라도 카비르의 법도상, 체면 때문에라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카비르에선 다른 건 몰라도 혼인은 남자가 여자의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
“알았소. 원하는 예물 목록은 퀴나에에게 보내도록.”
말을 마친 자레스가 황황히 일어났다.
막 결혼이 결정됐으니 예비 신부의 얼굴을 보고 싶을 만도 하련만, 자레스는 미련 없이 일어나 가버렸다.
당황한 카에티가 정원으로 따라 나왔을 땐 이미 자레스가 카베를 나간 뒤였다.
카에티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온 하녀를 불러 퀴나에에게 전할 예물 목록을 자레스에게 보냈는데, 그 목록이 황자궁에 도착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그에게 전달된 예물 목록을 본 퀴나에가 양피지를 들여다보다 중얼거렸다.
“이거 우스라에서 원하는 게 맞습니까?”
대체로 목록에 있는 건 상식적인 선에서 납득 가능한 것이었지만, 중간에 함정이 있었다. 꼼꼼한 퀴나에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카에티의 하녀를 노려보자, 그녀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카에티 님의 뜻이지요. 황자 전하께서도 허락하셨답니다.”
“전하께서도 응락하셨다고요?”
“물론이지요. 아무렴 예물 목록을 제멋대로 보낼 신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흐음…?”
“부군의 시름을 없애는 게 부인이 할 일이에요. 황자 전하께서도 그걸 아시고 카에티 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셨답니다.”
“그렇다면야, 저도 할 말이 없지만….”
하지만 정말 자레스가 이에 동의한 게 맞을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퀴나에가 의심이 많았지만, 적어도 카에티가 가져가려는 게 자레스의 ‘시름’이라는 데에는 그도 공감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예물이 갖춰지는 대로 연락을 드리지요.”
퀴나에가 선선히 말했다. 카에티의 하녀는 만족스러워하며 돌아갔다.
***
“소문 들었어? 16황자님이 혼인하신다며?”
자레스가 혼인한다는 소식은 황자궁에 빠르게 퍼졌다.
혼인 예물과 함께 혼서가 오갔다는 말이 돌자, 아넬을 둘러싼 시선이 이상해졌다.
안됐다는 눈빛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소하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소문을 들은 아넬은 기분이 묘했다.
‘자레스가 혼인을 한다.’
카비르의 황태자로서 신전에 온 자레스는 그 당시 미혼이었다.
그렇다면 미래가 바뀌는 걸까? 성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혼인까지 하게 된다면 그녀에 대한 집착은 아예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도가 돼야 하는데 묘하게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게 이상했다.
하지만 그 느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 일이 일어났다. 유가의 내관이 자레스의 궁에 찾아온 것이다.
유가의 궁에선 거세한 아와드인들을 내관으로 부리곤 했는데, 그들은 여자들이 있는 내궁의 일뿐만 아니라 황자궁의 실무를 맡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레스에게 내리는 선물이랍시고 데리고 온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아넬은 빨래에서 해방되는 대신 자레스의 시중을 맡게 됐는데, 아직 염색초를 구하지 못한 탓에 다쳤다는 핑계를 대고 양손에 붕대를 감은 채 일하고 있었다.
밖에 널어놨던 카펫을 거둬서 들어온 아넬의 눈에 알현실에서 마주한 퀴나에와 내관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관은 혼자가 아니었다. 노예인 듯 보이는 소년을 함께 거느리고 왔는데, 내관은 퀴나에에게 인사를 한 뒤 말했다.
“유가 전하의 선물입니다.”
카펫을 내려놓고 다른 볼일을 보는 척 귀를 세우고 있던 아넬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노예를 선물하는 건 이렌시아에서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리고 온 노예를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고, 퀴나에 역시 유가의 의도를 짐작하고는 난처해했다.
“황자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
이건 안 받느니만 못했다. 게다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이런 식의 조롱에 이용하는 건 퀴나에가 좋아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그런가요? 하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반드시 황자께서 받아 주시겠다는 허락을 받아 오라는 명이셨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걸 보니 기필코 이 선물을 떠넘길 모양이다. 그리고 황궁 안에 자레스를 웃음거리로 만들겠지. 속이 탔다.
“그럼 제가 전하께 말씀드릴 테니 이만 가 주십시오. 전하께선 언제 돌아오실지 모릅니다.”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데요. 보십시오. 저기 황자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하필 그때 자레스가 나타났다.
사냥을 간다는 명목으로 마디나 근처로 1박 2일의 여행을 다녀왔는데, 물론 그건 핑계였고 뒤로는 정보 조직의 수장을 만나기 위한 행보였다.
그런데 하필 그가 돌아왔을 때, 유가가 보낸 내관이 선물을 갖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레스는 두 번 물어볼 것도 없이 바로 알현실로 왔다.
그리고 선물을 주고야 말겠다고 고집하는 유가의 내관을 발견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환관이 얼른 한쪽 무릎을 굽히자 자레스가 비딱하니 입술 끝을 올렸다.
당황한 퀴나에와, 약간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넬과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내관의 뒤에 숨은 소년 노예가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소년 노예는 금발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심지어 눈빛까지도 초록색인 게 아마도 이렌시아 출신이거나 북부 타네시인일지도 모르겠다.
명백하게 아넬과 그 사이를 비꼬려는 의도로 보내온 것이다. 아넬 역시 그걸 눈치챘기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받으면 조롱을 자처하는 것이고, 거절해도 비웃음을 사긴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켕기는 것이 있으니 선물을 거절했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형님다운 선물이로군.”
“유가 전하다운 배려이지요.”
자레스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걸 본 퀴나에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저렇게 웃을 때의 자레스는 정말 위험하다. 뭔가 사고를 칠 징조인데…!
“고맙게 받겠다고 전해 드리거라.”
“형제간의 우의가 두터워졌으니 기쁠 따름입니다, 전하. 그럼 물러가겠사옵니다.”
“기다리게. 가기 전에 내가 얼마나 이 선물을 좋아하는지는 보고 가야지.”
“무슨 말씀이신… 헉!”
내관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자레스가 환도를 빼 소년 노예의 복부를 칼로 찔러 버린 것이다.
“아아악!”
소년 노예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넬 역시 같은 크기로 비명을 질렀는데, 그러는 동안 내관은 얼굴빛이 시커메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퀴나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하!”
내관보다 퀴나에가 먼저 외쳤다.
“선물을 이렇게 다루시면 유가 전하에 대한 모욕이 됩니다! 황자 전하와 결투라도 치를 생각입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건 사고다, 퀴나에.”
자레스가 태연하게 받아쳤다.
“내가 칼을 뺐는데, 우연히 그 앞에 이 노예 놈이 있었던 거다. 아주 불행한 사고지.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안 그런가, 내관?”
자레스가 내관을 향해 이죽거렸지만, 아와드 출신의 내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물은 받았으나 그 선물을 부숴 보낸 이를 모욕했다. 누가 봐도 고의였지만, 불행한 사고라고 주장하면 거기다 대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음모를 꾸민 유가의 체면만 사정없이 뭉개졌을 뿐이다.
그 사이에서 아넬만 충격에 빠져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유가가 보낸 내관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물러간 뒤, 자레스 역시 피 묻은 환도를 다시 차고는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칼에 찔린 소년 노예만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뒹굴고 있는 걸 아넬이 얼른 다가가 일으켰다.
“으…. 흐윽. 사, 살려 주세요….”
소년의 신음이 이미 꺼져 가고 있었다. 퀴나에가 달려오긴 했지만, 그 역시 소년이 중상을 입었고 살리기 힘들다는 걸 알아챘기에 안타까운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려 달라고 하잖아요. 퀴나에 님, 도와주세요!”
“그건 안 돼, 파이디.”
퀴나에도 이 소년이 안됐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온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소년이 그랬다.
“왜 안 됩니까. 이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왜… 왜, 노예라는 이유로 물건처럼 부숩니까!”
“그게 노예의 운명이야. 네가 운이 좋다고 해서 다른 노예들도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아야지.”
퀴나에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아넬은 혼란스러웠다.
비록 걸러진 자들만 그 앞에 설 수 있다고 해도 성녀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생명의 가치는 똑같았고, 장난삼아 살해당해도 괜찮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치료라도 해 주세요. 제발, 퀴나에 님! 지혈초… 그거라도 붙이게 해 주세요!”
“그것도 안 돼, 파이디. 이 아이는 유가가 보낸 노예이니 우리 황궁에서 무사히 살아남지 못해. 어차피 다른 노예들이 죽일 거다. 차라리 지금 죽는 게 황자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거야.”
황궁은 그런 곳이었다. 이익을 위해 생명이 아무렇지 않게 거래되고, 지푸라기처럼 베어져 나갔다.
“이 아이를 끌어내라!”
명을 내린 퀴나에가 알현실을 나갔다.
부하 병사들이 소년을 카펫에 둘둘 말아 질질 끌고 나가자, 넋을 놓은 채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넬이 불현듯 벌떡 일어나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넬이 향한 곳은 며칠 전 들렀던 약초밭이었다. 사브를 위해 리산 풀을 뽑았던 곳, 그 언저리에서 보았던 지혈초 밭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노예를 쫓아가서 성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지만, 갑자기 피가 멈추고 부상이 나으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일단은 출혈을 멈추고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둬야 했다.
하지만 아넬이 그리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곧 밭을 지키는 파수꾼들에게 가로막혔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던 샤이크의 말이 맞았다.
아넬은 잠시 그 주변을 맴돌다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지혈초 씨가 근처에 떨어져 있을지도 몰라.’
식물의 씨는 생각보다 멀리 흩날린다.
벌레를 많이 끌어들이는 성질이라 밭 근처에 잡초도 번성할 정도니, 벌레가 수분을 위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묻히거나 떨어뜨린 지혈초의 씨가 인근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식물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사니까.
물과 양분이 부족해 죽은 듯 땅속에 잠들어 있을 뿐, 그것들은 때를 기다리며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싹을 틔우는 건 아넬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성력도 아니고, 아주 약간만 힘을 불어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한발 물러난 아넬이 병사들이 보지 못하도록 등을 돌려 웅크려 앉은 뒤, 땅속에 힘을 집중했다.
투두둑. 근처에서 식물의 싹이 땅을 뚫고 움을 틔웠다. 대부분은 리산 풀이거나 흔한 잡초였다.
아넬은 장소를 옮겨서 이번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힘을 모았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썩 꺼지라고 했잖아!”
밭을 지키던 병사가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아넬이 물러나지 않자 칼을 빼 들고 저벅저벅 다가왔는데, 바로 그때 아넬의 발아래서 불쑥 풀의 새싹이 튀어나왔다.
‘지혈초!’
밭에 심어진 그 풀이었다. 뭉텅이로 떨어져 있었는지 대여섯 포기가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병사가 다가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려는 순간, 아넬이 극적으로 지혈초를 뽑아 신발 안쪽에 밀어 넣었다.
“죄송합니다.”
아넬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달아났다.
이제 중요한 건 소년을 찾는 거였는데, 도로 자레스의 궁으로 돌아간 아넬은 황자궁 입구에 카펫에 말린 채로 버려져 있는 소년 노예를 발견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는지 카펫이 위아래로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자레스 궁에 있는 나이 든 여자 노예들이 아이의 맥을 살피고 있다가 아넬이 나타나자 껄끄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직 살아 있잖아요. 돕게 해 주세요.”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고는 얼마 못 살아. 벌써 피를 많이 흘렸는걸.”
“불쌍하긴 하지만 어쩌겠니. 노예의 삶이 원래 이런 걸.”
“아니에요! 노예라고 아무 죄 없이 죽어도 되는 건 아니라고요. 메타께선 인간을 분류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공평해서 노예고 왕족이고 황제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몰살해 버렸다.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오르자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넬은 얼른 고개를 저어 잡념을 날렸다.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어요. 그냥 노예로 태어난 것뿐이잖아요. 그게 아무 도움도 못 받고 죽어야 하는 죄는 아니에요!”
“네 마음 씀씀이는 참 고맙다만… 후우, 그래. 상전들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끼리라도 도와줘야지.”
소년 노예가 살아서 자레스의 황궁에서 지내게 됐다면, 아마 노예들이 앞장서서 소년을 괴롭혔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무참히 다친 아이를 보니 동정심이 앞섰다.
중년의 여자 노예가 마음을 바꿔 아넬과 함께 소년 노예 옆에 무릎을 꿇었다.
카펫을 젖히자 온통 피에 젖어 있는 소년의 몸이 나타났는데, 출혈이 너무 심해서 이미 아이의 낯빛이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넬은 서둘러 아이의 바지를 찢어 붕대를 만든 뒤 자상이 난 부위에 몰래 가지고 온 지혈초를 얹고 그 부위를 칭칭 감았다.
“그건 지혈초 아니니? 그걸 어떻게 손에 넣었어?”
“쉿, 비밀로 해 주세요.”
낮게 속삭인 아넬이 피를 멈추기 위해 힘껏 상처 부위를 눌렀다. 그러면서 남몰래 성력을 흘려 넣자 곧 꿀렁거리며 흘러나오던 피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지혈초의 효과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넬의 힘이 더 컸다. 지금 모두 치료해선 안 됐다. 간신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고쳐야 했다.
아넬은 성력이 너무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계속해서 힘을 보탰고, 소년의 안색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숨이 돌아왔어!”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노예가 외쳤다. 성력 때문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지혈초 덕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노예가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제 처소에 데려다 놓아도 될까요? 병간호도 제가 하겠습니다.”
“그건…. 황자 전하께서 아시면 화를 내실지도 모르는데? 내다 버리라고 했던 놈이 살아 있는 걸 보면 좋아하지 않으실지도 몰라.”
다행히 이번에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샤이크!”
궁 안 지리에 빠삭한 샤이크라면 소년 노예 한 명쯤 숨길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을 것이다.
***
샤이크에게 소년 노예를 부탁하고 처소로 돌아온 아넬은 다시 불안에 사로잡혔다.
소년 노예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자레스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변화였다.
‘몸이 자랐어!’
바지가 짧아진 걸 보니 자레스를 살렸을 때처럼 손가락 한 마디쯤은 성장한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가슴팍을 짚어 보니 아직 판판하긴 했지만, 이대로 성장이 진행되면 언제 여자의 성징이 나타날지 몰랐다.
‘내가 여자인 걸 알게 되면 자레스는 어떻게 나올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이제까진 그게 제일 무서웠고, 들키지 않기 위해 늘 달아날 생각만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의 반응이 궁금해지다니, 이상한 일이다.
‘성력을 쓰지 않으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 몸을 유지하는 걸까?’
그런 의문도 들었다. 자려고 드러눕긴 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자꾸 번갈아 가며 괴롭혀 대서 아넬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처소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고함을 쳤다.
“나와라, 파이디!”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아넬이 벌떡 일어나자, 지혈초 밭을 지키던 파수꾼이 안으로 밀치고 들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더러운 도둑놈! 노예 놈이 감히 귀한 지혈초를 훔치다니!”
직접 훔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낸 걸까?
답이 금방 나왔다. 숨겨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중년의 여자 노예가 고자질한 것이다.
‘같은 노예끼리 도와야 한다더니.’
배신감에 입이 썼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지금 사치에 불과했다. 억센 손들이 그녀를 끌어냈고, 아넬은 순식간에 황자궁 앞마당에 내동댕이쳐졌다.
“카비르에서 도둑은 즉결 처분이다!”
“훔친 게 아닙니다. 저는 지혈초 밭엔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밭지기 님도 그걸 봤잖아요!”
아넬이 급하게 변명하자 파수꾼이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얼른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네가 언제 밭에 들어가 도둑질을 했을지 내가 알 게 뭐냐? 중요한 건 네놈이 지혈초를 갖고 있었다는 거지. 훔치지 않고서야 네가 무슨 수로 그걸 손에 넣느냐?”
공방이 일어나는 동안, 갑자기 벌어진 소란에 노예와 고용인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필 소동의 주인공이 한참 궁을 시끄럽게 했던 아넬이라, 모두의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또 저놈이야?”
개중 몇몇은 피곤하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퀴나에에게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자레스는 퀴나에의 방문을 받았다. 무릎을 꿇으며 마당에서 일어나고 있을 알리자, 자레스 역시 지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파이디 놈에게 매질을 하겠다더냐?”
“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카비르에서 도둑은 팔을 자릅니다.”
“자업자득이로군.”
자레스가 툭 내뱉자 퀴나에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짜증스러운 얼굴이긴 했지만, 자레스는 분노하진 않았다.
예전의 그라면 유가가 보낸 노예를 살려 줬다는 것만으로도 아넬의 목을 쳤을 텐데, 자레스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무칼라스와 달리 눈치가 빠른 퀴나에는, 그것만으로도 아넬에 대한 그의 감정이 다르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냥 내버려 둘까요?”
자레스는 침묵했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 아넬의 팔은 기어코 잘릴지도 모른다. 평정을 길게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자레스는 결국 침묵을 깨고 긴 한숨을 내쉬며 명했다.
“파이디와 그 파수꾼 놈을 데려와. 그리고 무칼라스도.”
아넬과 파수꾼이 불려왔다.
파수꾼은 자레스 앞에 불려오게 되자 몹시 당황했지만, 아넬이 지혈초 도둑이라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증인이 있습니다, 전하. 그 소년 노예에게 지혈초를 붙여 줬답니다. 훔치지 않고서야 그 귀한 지혈초를 어떻게 이놈이 갖고 있었겠습니까?”
자레스가 그녀를 쳐다보자 아넬이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아넬은 거짓말이 서툴렀으니, 아마 그녀가 훔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혈초는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거기에는 자레스도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지혈초를 가져오라 했다.”
그러니 이유를 만들어 주는 수밖에.
“화, 황자 전하께서요?”
파수꾼은 물론이고 퀴나에와 아넬, 그리고 무칼라스까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숨기며 자레스가 계속 말했다.
“내가 칼에 베여 다쳤다. 그래서 파이디 놈에게 지혈초를 가져오라고 했어. 내 명을 받고 한 일인데, 그게 잘못이냐?”
“하, 하지만….”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던 파수꾼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 전하께서는 머, 멀쩡해 보이시는데요?”
“그래 보이나?”
빙글 웃은 자레스가 갑자기 일어나 파수꾼에게 다가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아까 아넬의 팔을 자르겠다고 휘둘러 대던 칼이 꽂혀 있었다.
돌연 그를 빼든 자레스가 그 칼로 자신의 팔뚝을 벴다.
“헉, 전하!”
깊이 벤 건 아니었지만, 금세 그의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일을 저지르는 걸까. 퀴나에와 아넬 역시 깜짝 놀랐지만, 파수꾼은 아예 사색이 돼 그 자리에 엎드렸다.
“나는 지혈초 밭의 파수꾼 놈이 잘못 꺼낸 칼에 다쳤다. 그래서 파이디에게 지혈초를 가져오라고 시켰지.”
“그, 그런…!”
앞뒤가 완전히 바뀐 거짓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거짓말을 한 당사자가 자레스란 거였고, 파수꾼은 힘이 없다는 거였다.
“마침 여기에 증인이 세 명이군. 증인이 셋 이상이면 증언을 인정하는 카비르의 관습을 잘 알고 있겠지? 자, 황자를 다치게 한 죄를 지겠는가, 아니면 그냥 지혈초 몇 장쯤 그냥 넘어갈 텐가?”
억지다. 하지만 파수꾼에겐 그걸 뒤집을 힘이 없었다.
때맞춰 무뚝뚝한데다 눈치가 없는 무칼라스까지 나섰다.
“내가 봤다. 파수꾼 놈이 전하에게 칼을 휘둘렀다!”
무칼라스도 이럴 땐 참 카비르어를 잘했다. 퀴나에의 말마따나 정말 평소엔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도 모른다.
자레스의 말마따나 증인은 세 명이었다. 그들 모두 그의 사람이긴 했지만, 문제는 자레스가 다른 증인이라고 만들어 내지 못하겠냐는 거다.
황자 간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상전과 아랫것의 다툼은 싸움이 아니라 횡포에 해당했다.
파수꾼은 부들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억울한 사건이 끝났다.
파수꾼이 물러난 뒤, 퀴나에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이 나가려 할 때 돌연 자레스가 입을 열었다.
“파이디. 너는 여기 남도록.”
무칼라스와 퀴나에가 서로 눈치를 보다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 아넬만 혼자 남아 머뭇거렸다.
자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넬 앞에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노한 걸 억지로 누르는 눈치였다. 그를 겪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레스는 화가 날수록 웃는다. 하지만 정말로 격분했을 땐 아예 말이 없어진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돌연 우뚝 선 자레스가 꽉 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누굴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아넬이 대답하지 못하자, 자레스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신물이 나는 듯했다.
“피를…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이 와중에도 그게 신경 쓰였다. 아넬이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자레스가 아넬 앞으로 성큼 다가오며 외쳤다.
“누구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나?”
“저, 저 때문입니다. 죄송….”
“말해 봐, 파이디! 겨우 노예 놈 하나 때문에 네 팔을 걸어? 대체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거냐? 네가 그런 짓을 저질러 봤자, 너만 위험해질 뿐이야!”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친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황자님이 다쳤….”
하마터면 자레스가 다쳤을 때도 그랬다는 말을 할 뻔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레스가 무섭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지 않아! 목숨을 걸 거면 노예 놈이 아니라, 네게 이득이 될 자를 위해 걸란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노예도 생명입니다! 메타께선 황족도 노예도, 같은 손으로 빚어내십니다!”
“헛소리!”
하지만 그렇게 외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옛 기억이 떠올랐다.
단지 노예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짓밟혔던 나날들. 그때는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황족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그는 한갓 노예였을 뿐이고 그런 이유로 벌레 취급을 받았다.
그가 힘을 얻고 황자로 인정받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그 지옥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메타의 손 같은 건 없다! 강한 자만이 살아날 이유가 있는 거다! 신의 자비가 있었다면, 나는…!”
그런 비참한 일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메타의 구원 같은 건 믿지 않기로 했다. 원망하지도 않기로 했다. 스스로 강해져서 고스란히 되갚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 조그만 노예의 설교가 그를 후려쳤다.
잊으려 애썼던 과거들이 자꾸 돌아와 그를 짓밟았고, 그의 나약함을, 비참함을 자꾸 확인시키려 들었다.
그런데 건방진 노예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도 모른 채 오히려 그를 가르치려 들었다.
“풀뿌리가 바위를 뚫고, 벌레가 모든 생명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들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메타가 주신 생명엔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닥쳐!”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것에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요!”
아넬의 반박에 분노가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이성이 사라졌고, 그 순간 자레스는 아넬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아넬이 의자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 위로 나자빠졌다.
널브러진 그녀를 보는 순간 갑자기 자레스의 이성을 지탱하고 있던 끈이 끊어져 나갔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손으로 집어 던질 수 있는 그녀의 연약함에 야수의 본성이 끓어올랐다. 버릇없는 노예를 길들이고 그에게 완전히 복종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자레스가 일어나려 애쓰는 아넬의 팔을 잡아 누르면서 으르렁거렸다.
“어차피 소문난 거, 진짜로 만드는 것도 괜찮겠지.”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변했다.
장난으로 그녀를 놀리던 때와 달랐다. 그녀가 여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억지로 옷을 찢던 그날과도 달랐다.
지금 그의 눈은 수컷의 것이었고, 그녀를 욕정하고 있었다.
“전하!”
자레스가 아넬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당긴 그가, 아넬의 입술을 짓눌렀다.
“흡!”
숨이 막혔다. 시야가 깜깜해지고, 호흡이 달리면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멍해 있는 동안, 아넬은 무방비로 파헤쳐졌다.
자레스의 키스는 거칠었다. 아예 그녀의 얼굴을 움켜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못 박은 그가 얼굴을 비틀면서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입안을 가득 채운 그의 것에, 아넬은 조금씩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 건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안 돼!’
마음은 밀어냈지만, 몸은 그러지 못했다. 마비된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폭력이었다. 그녀를 짓밟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건만 도중에 그것이 바뀌었다. 그녀와 입술을 겹친 순간, 자레스의 흉포함이 아니라 다른 욕망에 불이 붙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선 이성의 등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것이 그를 막지 못했고, 입술을 떼지 못하고 더 깊이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상한 감정이 그를 스쳤다.
마치 기억 속에 드리워진 커튼이 열어젖혀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어떤 감정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자레스는 지금 그를 사로잡은 열기를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
생각이 토막토막 끊어졌다. 실마리를 찾아가기엔 마음이 너무 급했고, 자레스는 아예 아넬을 쿠션 의자에 내리누르며 그녀를 덮쳤다.
바로 그때 퀴나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세요, 전하.”
퍼뜩 정신이 들었다.
놀라 몸을 떼자 퀴나에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그나마 무칼라스까지 들어오지 않은 건 다행이라 해야 할까.
퀴나에를 보자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제야 그 아래 짓눌려 엉망으로 울고 있는 아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쳤구나!’
뒤늦게 수치심이 밀려왔다.
미친 게 틀림없다. 여자라면 모를까 남자에게 키스를 하다니, 심지어 이성을 잃다니! 칼이 있다면 지금 제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엔 제압하려는 의도였지만 중간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명백하게 아넬에게 홀렸었다. 몸이 아니라 정신이 그녀에게 매혹당했다.
털썩 주저앉으며 쓰디쓰게 손짓을 하자 아넬이 얼른 도망쳤다. 그러자 퀴나에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파이디를 카에티 님에게 주세요, 전하.”
“그게 무슨 말이지?”
“카에티 님께서 보낸 예물 목록에 파이디가 있었습니다. 원한다고 하니, 그냥 줘 버리십시오, 전하. 추문을 벗어날 길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카에티가 무슨 의도로 아넬을 목록에 올렸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신랑에게 달라붙은 벌레를 쫓아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예전 같으면 무시했을 말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카에티가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에 자레스는 혼란에 빠졌다.
“왜 그래야 하지? 원래 계획대로 이렌시아로 돌려보내는 방법도 있다.”
“그러면 결국 노예에게 휘둘린다는 말을 듣게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파이디를 피하려고 이렌시아로 돌려보냈다고 수군대겠지요.”
“노예 하나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이냐!”
“뭐라 해도 상관은 없죠. 하지만 평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전하를 비웃고 한심하게 여길 텐데, 죽이지 않을 거면 차라리 파이디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 버리세요.”
퀴나에가 각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도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하찮은 노예가 아니라 자레스를 위해 일해야 했다.
“노예에게 걸맞은 처우를 해 주십시오. 그 아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노예라서 마음대로 다룬 거로 만드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납득할 겁니다.”
“……!”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던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그를 뒤흔들었다. 바로 부정하지 못한 게 그 증거였다.
좋아한다는 구체적인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아넬에게로 향한 마음이 그를 흔들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느새 마음이 자라 있었다. 그와 다르게 굴욕에도 뭉그러지지 않는 아넬의 온정에, 비참함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지혜와 인간애에 어느새 매료돼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그를 깨달았기에 노예로 팔아 버렸는데, 피하려고 애썼던 감정은 이렇게 다시 돌아와 더 큰 부피로 성장했다. 자레스는 이제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전하, 제발 야심을 꺾지 마십시오. 원하는 길을 끝까지 걸어가세요!”
간절한 퀴나에의 조언에 자레스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잘라 내도 칡넝쿨처럼 자라나는 이 마음을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끊어 내야 했다.
“알았다.”
자레스가 무겁게 명을 내렸다.
“파이디를 다른 노예 열한 명과 함께 우스라 부족장의 저택으로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