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넬은 노예에게 끌려 자레스의 궁으로 왔다.
이미 어두워진 뒤였기에 그의 궁을 살펴볼 수 없었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이미 자레스는 먼저 사라졌기에 아넬은 노예의 뒤를 따라 휘청휘청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열주가 늘어선 복도가 나타났다. 벽에는 횃불이 열 걸음마다 걸려 있어서 무척 환했는데, 그중 한 곳의 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나와 있는 자를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소녀 노예.”
“…소, 소년입니다.”
철렁했지만 얼른 정정하자, 무칼라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들어와라.”
멈칫거리며 들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철저하게 카비르 풍으로 꾸며진 곳으로, 벽에는 휘장과 커튼이 쳐져 있고, 방 전체에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 위에 푹신한 쿠션이 쌓인 장의자가 원형으로 빙 둘러 놓여 있어 아무 데나 앉으면 편히 기댈 수 있게 돼 있었다.
장의자들 중 하나에 자레스가 아무렇게나 기대 있었다. 아넬이 무칼라스에게 끌려 들어오자 그가 귀찮다는 눈으로 아넬을 노려봤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아넬도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서 있자, 자레스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왜 지긋지긋할 정도로 따라다니는 거지?”
아넬이야말로 의문이었다. 노예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어째서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황자님 곁에 돌아오는군요.”
“쯧!”
자레스가 세차게 혀를 찼다.
사실 그 질문은 자신에게 해야 했다. 아넬을 정말로 떨궈 낼 생각이었으면, 그녀가 일리파스에게 끌려 나왔을 때 못 본 척해야 했다.
격투 노예에게 맞아 죽든 말든, 한낱 소년 노예 따위에게 관심을 끄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그렇기에 아넬을 마냥 탓할 수도 없었다.
따라다니는 건 아넬이 아니었다. 결국은 아넬을 끊어 내지 못하는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자레스는 더욱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너에 대한 처결은 나중에 내리겠다. 어쨌든 일단 내 수중에 떨어졌으니, 오늘 밤은 내 궁에 머물도록 해.”
“노예들의 처소로 보낼까, 전하?”
무칼라스의 물음에 자레스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예들에게 보내기엔 밤이 너무 늦었다. 그냥 내 방에서 자도록.”
당황한 아넬이 서둘러 외쳤다.
“아, 아닙니다! 전하의 방에 머물다니 당치 않습니다. 노예들의 처소로 가겠습니다!”
“왜? 아직도 내가 무서워서 그러나? 내가 자다가 널 덮치기라도 할까 봐?”
정말 그게 무섭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여기서까지 자레스가 그녀를 같은 방에 머물게 하려는지 알 수 없어 일단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이렌시아가 아니야, 파이디. 너처럼 예쁜 노예는 같은 남자 노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는 수가 있다.”
“……!”
“여기 아무 데서나 웅크리고 자든, 아니면 네 말대로 노예 처소로 가든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피곤해서 이만 자야겠다.”
“편히 주무시도록 황소를 드리겠다, 전하.”
“황소가 아니라 향초다, 무칼라스. 그리고 오늘 밤은 필요 없어.”
무칼라스를 내보낸 자레스가 신발을 벗더니 그대로 침대에 올라갔다.
그 와중에도 환도를 침대 곁에 두는 건 잊지 않았는데, 그 습관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자레스의 곁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자레스 황자와 함께 있는 게 안심이 되다니.’
아넬은 우두커니 선 채 등을 돌리고 누운 자레스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이 카비르에서는 자레스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동시에 가장 큰 불안이기도 했다.
여전히 그가 두려웠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를 벗어나면 그녀의 목숨은 더욱 위험해진다.
이미 카비르에서 노예의 대우가 어떤 건지 알아 버린 이상, 그리고 황자들이 아넬을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한 지금엔 자레스의 곁이 오히려 제일 안전했다.
이 모순이 유난히 쓰게 다가왔다.
아넬이 주춤거리며 구석으로 다가갔다.
차마 자레스가 쓰는 장의자에 누울 용기가 없어서 방 한편에 놓아둔 등불 아래 맨바닥에 몸을 눕혔는데, 그러고 나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이 몰려왔다.
깜박이는 눈을 비비던 아넬이 시선을 돌려 이제는 잠이 든 듯한 자레스 쪽을 쳐다봤다.
안도하는 마음이 반,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구했을까.’
노예로 팔아 버릴 때는 언제고, 정작 그 앞에 나타나자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워서 그녀를 구해 줬다.
그녀를 팔아넘긴 건 원망스러웠지만, 원래 노예를 팔든 죽이든 주인의 소관이란 걸 생각하면 딱히 자레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넬이 노예를 자처한 게 실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자레스는 아넬에게 할 만큼 했던 셈이었다.
도망치려던 걸 즉결 처형하지 않고 그냥 팔아 버리는 것으로 대신했고, 심지어 카비르에 나타나자 결투를 벌여 다시 데려왔다.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은 그에게 고마웠다.
‘잘 때는 그리 무서운 것 같지 않은데….’
똑바로 누운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진다. 어쩐지 오늘은 그가 그녀를 내버려 둘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예감이 아니더라도, 정말 죽을 만큼 피곤했기에 아넬은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
아넬은 신전에 있었다.
성녀의 늘어지는 흰옷을 입고 있었고, 밝은 햇살이 가득 들어찬 기도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메타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들어왔다. 나타나는 기색도 없이.
돌아보자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덮쳐 왔다.
장면이 바뀌면서 아넬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커먼 것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게 기도실을 덮쳤던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둠이 하나로 응축되면서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자레스 황자!’
아넬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회귀하기 전의 시간인 모양이다. 자레스가 그녀를 파괴하고 잔인하게 짓밟던 순간.
아넬은 침대 위에 있었고, 그녀의 위에는 자레스가 있었다. 그가 아넬의 몸 양옆에 손을 짚은 채 몸을 겹치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잔인한 웃음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자레스는 하체를 그녀에게 밀착하고 있었고, 다리 사이에 불거진 거대한 덩어리가 그녀의 아랫도리에 맞닿아 있었다.
아넬은 그 와중에도 그것이 자기 안에 들어오던 것을 떠올리고는 공포에 질려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지만, 입이 막힌 것처럼 아무것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자레스가 그녀의 몸 위로 상반신을 기울이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넬.’
‘헉!’
들어 본 적 없는 울림이었다. 전생의 자레스는, 카비르 황제는 이렇게 진득함이 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적이 없었다.
끔찍한 파괴자. 잔인한 지배자. 하지만 지금 그녀를 점령한 자레스의 목소리는, 그 표정은 전생의 것과 달랐다.
‘아넬. 아넬…, 나를 봐.’
그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그는 그림자로만 보였고 목소리만 들렸지만, 그 목소리가 다정하다는 생각을 한순간, 그 그림자가 느닷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이어서 젖가슴을 부드럽게 한 손안에 움켜쥐더니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젖가슴을 감싼 채 부드럽게 움직이자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언젠가 한 번 그녀를 찢어 놨던 고통 대신 이상한 감각이 아넬의 몸에 스며들었다.
새가 날갯짓하는 듯한 작은 허덕임이 커지더니, 그게 점점 커지면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레스의 신형이 뚜렷해졌다. 그림자 같던 것이 점점 옅어지더니, 그의 얼굴이 확실히 드러났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레스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아넬은 이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지금 그녀와 몸을 겹친 그가 카비르의 황제 자레스인지, 아니면 현실의 자레스 황자인지 혼란스러웠고 아넬은 저도 모르게 그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넬은 꿈에서 깨어났다.
“헉!”
눈을 뜬 순간 아넬은 꿈에서보다 더 놀랐다.
드러누운 그녀 위에 자레스가 있었고,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꿈에서처럼 그 자레스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뺨에 닿기 직전 멈췄던 모양이다. 자레스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그녀의 손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슥 비켜서며, 손을 쳐 냈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몸부림을 쳐 대는 거지?”
그제야 아넬은 꿈에서 현실로 완전히 돌아왔다. 여기가 신전이 아니라 자레스의 궁이란 걸 깨달았고, 그러자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아래 누워 있지 않았다. 어느새 옮겨진 건지 쿠션 위에 누워 있었는데, 그제야 아넬은 누군가 그녀를 안아 이리로 옮겼다는 걸 알아챘다.
‘보나마나 자레스 황자겠지.’
안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덮쳐 왔다. 안도감을 느꼈다는 것에 더 혼란스러워져서 아넬은 벌게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아침이다, 게으른 노예 놈아. 네 밥값을 해라.”
“제가 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시중 노예에게 식사를 가져오라고 해라. 그리고 너는 세수할 물을 가져와.”
이제는 이런 명령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잠시나마 그를 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아넬은 재빨리 그의 방을 나왔다.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문득 꿈속에서 그녀를 안고 있던 자레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정했던 목소리. 열기가 배어 있는 몸짓.
그녀의 몸에 스며들던 이상한 감각이 떠오르면서 아넬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미쳤어!’
전생에서의 경험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어젯밤 꿈속에서의 자레스는 이전과 달랐고, 몸을 적시던 감각 역시 처음 겪는 것이었다.
아무리 아넬이 남녀의 관계를 잘 모른다 해도, 그게 희열에 가깝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볼을 뜨겁게 달궜다.
***
자레스를 피해 다니고 싶은 게 아넬의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다행히도 자레스는 아넬에게 세숫물을 받은 뒤 얼마 안 돼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황의 부름이 있었다. 대충 왜 불렀는지 짐작은 갔다. 자레스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본궁으로 들어갔다.
돔이 겨우 4개 정도밖에 없는 황자궁에 비해 본궁의 돔은 12개나 된다. 하나같이 황금으로 외관을 치장했으며, 돔 지붕 사이에는 사원과 기도실의 첨탑이 솟아 있었다.
중앙에 있는 황제궁 뒤로는 여인들이 사는 내궁이 있고, 황제궁 주변으로는 근위 보병들이 주둔하는 병사(兵舍)와 궁성학교, 마사(馬舍), 시중 노예들이 거처하는 건물 같은 것이 모여 있었다.
본궁 자체만으로 하나의 마을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규모였다.
중앙에 있는 황제궁은 황제가 거하는 궁인만큼, 다른 건물보다 훨씬 더 높게 우뚝 서 있었다.
다른 돔 건물의 지붕은 황금으로 칠해졌으나, 황제궁의 지붕은 그에 더해 오팔과 사파이어, 자수정 같은 유색 보석들이 아낌없이 박혀 있었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진귀한 보물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로, 이는 제국의 부요함과 건국 이래 한 번도 황궁 함락을 허락하지 않은 막강한 역사의 상징이기도 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바마마.”
부황을 아바마마로 부를 수 있게 된 지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호칭이 자레스에게나 부황에게나 익숙지 않고 어색했다.
이미 50살이 넘은 부황에게는 아직도 노예로 남아 있는 황자와 황녀들이 수두룩했기에, 딱히 자레스에게 더 부성애를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군공이 뛰어나 아들로 인정했을 뿐, 황제에게는 자레스는 여전히 재주가 뛰어난 노예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특별히 다른 아들을 더 아끼는 것도 아니다.
아직 황위에 대한 미련과 소유욕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 그에게 황자들은 그의 옥좌를 위협하는 라이벌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황제가 무심함 속에 살얼음 같은 적의를 담은 눈으로 자레스를 훑어보다 이윽고 배까지 늘어뜨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몹쓸 참소가 들어왔다.”
노예가 두루마리를 담은 황금 쟁반을 올리자, 황제가 그를 들어 자레스의 앞에 던졌다.
풀어 보라는 명이었으나, 어차피 펼쳐 봤자 그것은 황제의 서경사가 옮겨 적은 것이라 참소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제가 남색을 즐긴다는 내용이군요.”
대충 살펴본 자레스가 피식 웃었다. 이미 예상한지라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감출 생각도 없이 바로 고발한 걸 보니, 이 단순한 행각은 분명히 일리파스의 짓이다.
“거짓이란 뜻이냐.”
“일고할 가치도 없습니다.”
“참소를 올린 자는 네가 이렌시아에서 데려온 노예와 한방을 쓰고 밤을 즐긴다고 상세한 증좌까지 댔다.”
“시중 노예를 같은 방에 재우는 건 별다른 일도 아닙니다. 밤을 보냈다고 하는데, 누가 그걸 본 증인이라도 있습니까?”
“증인은 없다.”
“있다 하여도 그가 진짜 증인인지, 가짜 증인인지는 어찌 증명할 거랍니까? 카비르 황궁에는 저 하나 제거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저 말고 다른 황자도 마찬가지고요.”
“흐음. 그건 그렇지.”
그래서 참소를 보고도 콧방귀만 뀌었다.
이 황궁에서 증인은 아무 소용이 없다. 민간에서면 모를까, 황궁에선 증인들을 셋 이상 대질하여 모두의 증언이 한결같은 경우가 아니면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굳이 꼬투리를 잡아 상소까지 올린 건 자레스를 황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황제의 눈 밖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카비르에서 동성애자는 사형이다.”
“알고 있습니다, 아바마마.”
“메타가 주신 씨를 번식이 아닌 것에 쓰는 것은 큰 죄니라. 이는 너도 알고 있겠지?”
“충분히 체감하여 알고 있습니다. 하여 제가 남색을 즐기는 자도, 강요하는 자도 모두 찢어 죽일 정도로 미워합니다.”
체감하였다는 말에 힘이 실렸다. 그 의미를 알기에 황제는 화제를 돌렸다.
“요즘 동부 국경이 시끄럽다더구나.”
“3대륙인들이 바다를 넘어와 자주 출몰한다고 들었습니다.”
“3대륙의 해적 놈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3대륙 동북쪽에서 괴물 새들이 날아와 왕궁까지 덮친다지?”
이 아르드엔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땅이 태초의 대지진에 의해 일곱 개의 조각으로 나뉘었고, 그중 주변 여섯 개의 조각을 합친 것만큼 큰 중심 대륙에 사람이 살게 됐다.
세계를 구성하는 나머지 여섯 개의 조각은 동서남북, 극북과 극남에 퍼져 있고, 각각 사람과 다른 이형(異形)의 괴물들이 몰려 살았다.
사람이 사는 중심 대륙 역시 크고 작은 지진으로 다시 여러 대륙으로 갈라져 일곱 개의 조각이 됐다.
카비르가 자리한 제1대륙 건너편에 있는 제3대륙은 요즘 그 동북쪽에 있는 새들의 섬 타이르에서 날아온 괴물 새들 때문에 주민들이 점점 카비르와 면한 해안가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해적으로 변한 3대륙인들이 넘어오니 이로 인해 카비르의 동쪽 국경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동쪽 국경의 소란을 잠재울 겸 거기서 잠시 머리를 식히는 건 어떠냐?”
“추방입니까?”
대놓고 묻자 황제가 짐짓 인자한 척 고개를 저었다.
“짐은 너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자 함이다. 공이 크다면 어떤 참소가 들어와도 명성이 그를 누를 것이다.”
논리는 완벽했다. 사실 황제가 가라고 하면 가야 하는 게 황자들의 운명이다. 그나마 권유의 형태라도 띠는 걸 보면 아직 황제가 자레스를 동부로 보낼 결심을 굳히지는 않은 것이다.
시간을 끌면서 그의 마음이 변하길, 그에게 자레스를 동부로 쫓아 보낼 궁리를 불어넣은 게 누구인지를 알아봐야 했다.
“이번에는 형님들께 공을 양보하고 싶습니다. 저와 달리 유가 형님이나 다른 황자들은 전장에서 공을 세운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일리가 있구나.”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비수 같은 말들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허나 너에게 군공마저 없다면 다른 황자들에 비해 무엇이 뛰어나겠느냐? 나의 열여섯 번째 아들아,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것도 지혜이니라.”
황제는 더 강요하지 않았다. 물러가라는 손짓과 함께 자레스는 알현실을 나왔다.
***
자레스를 보낸 뒤 황제는 침소로 향했다.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그의 침소엔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여자와 밤을 보내고자 할 때면 내관을 보내 후궁을 데려오곤 했는데, 오늘 대기하고 있는 여자는 라키사였다.
자레스보다 나이가 어린 그녀가 황제가 나타나자마자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면서 몸을 비볐다.
“자레스 황자에게 참소가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보자마자 그런 이야기부터 하느냐. 라키사, 너도 슬슬 욕심이 늘어 가는구나.”
“정치엔 욕심 없어요. 전 그저 재밌어서 물어보는 거랍니다. 정말 자레스 황자가 남색을 즐기나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황제가 쿠션에 몸을 눕히며 그 옆에 라키사를 앉혔다.
“자레스도 황자들에게 추행을 당했지만, 아무도 참소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한 놈이나 저지른 놈이나,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다. 남색은 별문제가 아니야.”
“그건 맞아요.”
라키사가 화사하게 웃으며 황제의 튀어나온 배를 슬슬 문질렀다.
황제는 속이 좋지 않아 늘 배앓이를 하곤 했는데, 라키사는 그를 위아래로 문질러 주며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특기가 있었다.
라키사가 손을 놀리자, 황제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 아들을 지켜 주세요, 폐하.”
“내가 내 자식을 어찌 버리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라키사. 황위에 멀리 있는 동안은 오히려 누구보다 안전하단다.”
“저도 지켜 주세요, 폐하. 저는 폐하가 없으면 지푸라기처럼 타 버릴 여자랍니다. 제가 카비르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세요, 폐하.”
“그러려면 장성한 황자들을 다 죽이는 수밖에 없겠구나. 황위에 오른 형제 말고 다른 황자들은 다 죽이는 게 전통이니.”
황제가 껄껄 웃었지만, 라키사의 은근한 욕심을 책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 황자들은 견제할 대상도 못 되기에 장성한 황자들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외척이 있으면 모를까, 라키사처럼 뒷배 없는 후궁이 어머니인 경우엔, 차라리 나이가 어려 경쟁이 되지 않는 게 다행인 셈이다.
황태자가 정해지면 경쟁자는 모두 살해되고 경쟁자가 될 자들은 모두 국외로 추방하니, 살고 싶으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제 발로 카비르를 떠나는 게 제일이었다.
일찍이 피임을 시켰는데 어째서 아이를 갖게 됐는지 모를 일이나, 황제가 보기에 라키사나 그의 아들은 이 시기에 태어난 것부터가 황위와는 가장 먼 자리를 자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라키사의 부탁을 그저 앙탈이라 보고 귀여워만 할 뿐, 정말 라키사가 카비르에 남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라키사를 사랑해 주세요, 폐하. 열렬히 사랑해 주세요.”
라키사가 황제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새빨간 그녀의 머리와 그에 어울리는 빨간 입술이 마치 석류처럼 붉어서, 황제는 주저하지 않고 그 입술과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
자레스가 황궁에 있는 동안 아넬은 시종 노예에게 이끌려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복도의 끝에는 부엌이 있었고 그 옆으로 난 출구로 나가면 빨래터와 우물이 자리했다. 그 너머에 노예들의 처소가 있었다.
일리파스 황자궁과 마찬가지로 외따로 떨어진 낡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시종 노예는 출구를 통해 빠끔히 보이는 그 건물로 가는 대신, 부엌 건너편에 있는 작은 문을 가리켰다.
“여기가 네가 쓸 방이다.”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황자님이 노예들의 처소 대신 따로 본채에 방을 마련해 주셨단 말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왜, 왜….”
“낸들 알겠냐. 격투까지 해서 뺏어 온 노예이니 곁에 붙여 놓고 예뻐해 주실 모양이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종 노예의 말투가 심술궂었다.
“은혜에 보답할 겸, 오늘 황자궁에서 나온 빨래는 네가 도맡아 하도록. 알겠나?”
“…저 혼자요?”
“도와주겠단 놈이 있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과연 노예들이 널 도와줄까? 오자마자 개인 처소까지 받은 데다가, 심지어 타국에서 온 놈을?”
“…….”
“빨래터에 가면 네가 할 일이 쌓여 있을 테니, 얼른 쫓아가거라. 내일 아침까지 빨래가 마르지 않으면, 황자님께서 입을 옷이 없어진다!”
자레스의 곁으로 온 게 결코 행운이 아님을 아넬은 절감했다.
어디를 가든 그녀에겐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그녀가 섣불리 신전을 탈출하면서 시작된 것이었기에, 아넬은 다시 한번 뼈저리게 후회했다.
한편 그사이 황자궁으로 돌아온 자레스가 무칼라스를 불렀다.
“퀴나에는 아직 안 돌아왔나?”
“그는 다리가 두 개뿐이다. 칼리맛 인근에 왔다고 전령새가 알렸다.”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걸린단 뜻인가.”
무칼라스의 보고를 파악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역시 책사로서는 무칼라스보다 퀴나에가 더 쓸모 있었는데, 그는 자레스가 명한 것을 찾기 위해 카비르의 오지로 떠난 상태였다.
아직은 기다려야 했다. 잠시 생각하던 자레스가 다시 명을 내렸다.
“이렌시아로 가는 배편을 알아봐라.”
“다시 성녀를 찾아가나?”
“아니, 노예 파이디를 돌려보낼 거다. 데리고 있어 봤자, 트집만 잡힐 뿐이니. 교역선을 찾아서 그편에 보내도록 해.”
“무칼라스가 알아본다.”
이번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인연이 끊어지기를. 자레스는 바랐다.
하지만 머릿속 한편으로는 어쩐지 이번에도 이 시도가 실패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어서, 자레스는 한층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한 단계 더 강한 방법이 필요했다. 다짐하려는 것처럼 자레스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퀴나에가 돌아오는 대로, 그동안 보류해 놨던 혼사를 다시 진행하겠다.”
그가 동성애자가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넬을 떼어 내고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자레스는 혼인으로 모든 소문을 불식시키고, 황권에 한 발 더 다가갈 힘을 얻기로 결심했다.
***
아넬이 빨래터에 갔을 때, 빨래를 담당하는 노예들은 거의 200여 벌은 돼 보이는 빨래 더미를 남겨 놓은 채 자리를 떠 버렸다.
남아 있는 건 아넬보다 나이가 어린 노예였는데, 아이는 아넬이 나타나자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넌 왜 여기 남아 있니? 빨래는 나 혼자 다 하라고 들었는데?”
“저도 벌을 받는 중이에요. 오늘 식당에서 그릇을 깼거든요.”
“벌인 것치고는 너무 심하구나. 겨우 둘이서 이 많은 빨래를 어떻게 다 하겠니?”
한 명이라도 더 도와주면 고맙긴 하지만, 겨우 열 살 남짓 돼 보이는 어린아이의 손까지 빌리려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적당한 때에 형이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차라리 잘됐네. 어린아이는 푹 쉬어야 해.”
“나더러 어리다 하기엔 그쪽도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데요?”
“…이래 봬도 열다섯이란다.”
사실은 열아홉인데, 거짓말을 하려니 갑자기 우울해졌다.
한때는 성녀였던 그녀가 여기저기서 천덕꾸러기 취급이나 받고, 어린이 취급이나 당하고 있다니.
이렌시아인들이 봤으면 기겁했을 일이다. 그녀를 성녀라 숭배하고 배례하던 열국의 지배자들 역시.
“비누는 어디에 있니?”
“여기선 비누를 쓰지 않아요. 물에 적신 빨래를 저 빨랫돌에 내리치면 돼요. 그러면 때가 떨어져 나가거든요.”
“값비싼 옷감도 그렇게 다루니?”
“보석이 달려 있는 옷들은 여자 노예들이 빨아요. 우리 같은 하급 노예들은 전하의 옷이나 음식엔 손도 대지 못하는걸요.”
자레스가 입을 옷이 없다던 말은 거짓말이었나 보다. 아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빨래터엔 배관을 타고 흘러온 물이 계속해서 고이고 있었다. 고인 물은 더 작은 배관을 통해 하수도로 흘러내려 가는데, 아넬은 곧 무릎 깊이로 물이 고여 있는 빨래터로 들어갔다.
“이름이 뭐니?”
“사브예요.”
“사브. 넌 쉬고 있어.”
“안 돼요. 그러다 주방 어미가 보면 더 심한 벌을 받게 되는걸요.”
“휴우. 그러면 옆에서 같이 하자. 넌 적당히 하는 시늉만 해.”
두 사람의 노역이 시작됐다.
아넬은 빨래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열아홉 해, 아니 21년을 떠받듦만 받아 왔으니 빨래는 고사하고 노역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레스에게 잡히고 일리파스에게 끌려오며 노예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래 봤자 고된 일은 아니었다. 아넬은 사브가 가르쳐 준 대로 물에 적신 빨래를 처덕처덕 내리치기 시작했다.
단 몇 벌을 끝내기 전에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고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 왔다.
“이곳 노예들은 이런 걸 매일 하니?”
“그럼요. 형이 오기 전엔 빨래 담당 노예들 열 명이서 나눠서 했죠. 지금은 형이랑 저, 둘만 남았고요.”
“…내가 참 믿음직스러웠나 보구나.”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옷 몇 벌을 또 때렸다. 때를 훑어 낸 옷을 사브에게 넘겨주면 사브가 빨랫물에 대충 헹군 다음 타일을 깔아 둔 빨래터 바닥에 던져 놨다.
익숙한 것 같았던 사브도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쉬기 위해 허리를 폈던 아넬이 문득 사브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물었다.
“힘들어서 그러니, 사브?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 아니오…. 게으름 피우다 들키면 안 돼요. 주방 어미가 얼마나 못됐는지 알아요? 때리는 것도 싫지만, 성질이 나면 밥을 안 줘요. 전 그게 더 무서워요.”
“아, 배고픈 건 나도 싫더라.”
피식 웃긴 했지만, 아넬은 지나치지 않고 사브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봤다. 사람의 생명이 약해져 가는 기색은 아넬이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사브는 비록 ‘죽어 갈’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정상은 아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거친 숨결에서 고통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여기에도 크리오 열매가 있을까? 감기에 효과가 있는데.”
“크리… 뭐요?”
“크리오 열매. 가을에 열매를 맺는데, 크기가 손가락 한 마디만 하고 자줏빛이야. 말린 뒤에 잘게 썰어서 차로 끓여 마셔.”
“그런 거 몰라요. 약초가 있다 해도 우리 같은 노예한텐 안 주는 걸요, 뭐.”
사브가 투덜대며 고인 물을 발로 걷어찼다. 태연한 척하지만 열이 높아지는 게 확실히 보였다.
찬물에 오래 발을 담그고 있으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게 확실했다.
조금 고민하던 아넬은 다음 빨래를 건네주는 척하면서 슬쩍 사브의 손목을 잡고 성력을 흘려 넣었다.
“후욱.”
느끼기 힘들 정도로만 힘을 불어넣었는데, 그 정도로도 상태가 조금 좋아진 것 같았다. 사브의 호흡이 조금 더 고르게 변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린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기운을 불어넣어 준 정도는 티가 안 날 것이다. 살짝 앞섶을 살펴본 아넬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지금 기운이 필요한 건 그녀였다. 아직도 한참 남은 빨래 더미를 바라보며 아넬은 자꾸 그녀를 덮치는 현기증을 내리눌렀다.
***
자레스는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뜻밖의 보고를 받았다.
수도 마디나에서 말을 타고도 하루 거리인 칼리맛에 있다던 퀴나에가 그날 저녁 돌아온 것이었다.
카비르 식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뒤 가슴에 손을 대고 예를 표하는 퀴나에 앞에서, 자레스는 머쓱한 얼굴로 선 무칼라스에게 험상궂은 눈길을 날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퀴나에의 유령인가?”
“무칼라스를 너무 원망하지 마셔요. 첩보에 교란을 주려고 제가 좀 흔들어 놓았답니다. 제가 너무 유능한 걸 탓하셔야지요.”
“아군이 아군을 속이면 그거야말로 혼란이다. 언제부터 나까지 속여야 할 대상이 됐던가, 퀴나에?”
“덕분에 명하신 것을 찾아왔잖아요, 전하. 아군까지 속이지 않았다면, 칼리맛이 아니라 저 자발산 아래에서 그것을 뺏겼을 거예요. 이야기가 참 길지만, 많은 일이 있었답니다.”
재빠른 대답에 자레스도 더는 그를 책하지 않았다.
문관이자 책사인 퀴나에가 영리하고 약삭빠른 건 탓할 것이 못 된다. 기색을 보아하니 위기가 있었던 듯한데, 그의 말대로 자레스까지 속이지 않았다면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
퀴나에에게 그 정도 권한은 주었기에 자레스는 이 일을 더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네게 맡길 일이 있다.”
“수고했다는 말 대신, 돌아오자마자 또 임무를 맡기시겠다니 자비롭기도 하시네요. 하지만 다 제가 잘난 탓이니 참아야겠죠?”
“목을 잘리면 그 잘난 입도 나불댈 수 없으니 정도껏 해.”
“아유, 무서워라. 그래서요, 전하? 맡길 일이 뭡니까?”
“이번에 데리고 온 노예가 있다. 이렌시아 출신인데…, 무칼라스에게 인계받아서 이렌시아로 돌려보내도록.”
“아아, 신전에서 데리고 왔다는 그 노예 말입니까?”
“다 알고 있다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군그래.”
연락 매를 통해 이미 사정을 들었나 보다. 정보가 빠른 점이나 헤실거리는 것 같아도 빈틈없는 것은 역시 퀴나에의 장점이다.
“귀찮은 일은 언제나 제 몫이죠. 후우.”
“떠들어 댈 거면 유가에게 가. 자레스에게서 도망쳐 왔다고 하면 아주 환영해 줄 거야. 아니면 일리파스에게 가든가.”
“싫어요. 뱀 같은 놈도 싫지만, 멍청한 놈은 더 싫다고요.”
경멸스러운 표정을 잠깐 떠올린 그가 말을 이었다.
“날 때부터 황자로 태어난 놈들은 제 진가를 못 알아본다고요. 저는 저를 제대로 대접해 주는 사람이 좋아요.”
“노예 출신 황자란 말을 정성스럽게 돌려서 하는군. 할 말은 다 했으니, 물러가도록.”
“자세한 보고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귀하신 전하.”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퀴나에가 그대로 물러갔다.
사실 퀴나에는 자레스가 이렌시아 출신 노예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자레스가 남색 행각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면, 그런 오해는 못 할 것이다.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알아도 마찬가지다.
그런 성격인데도 남자 주제에 지나치게 여성스러워서 모두가 꺼리는 자신을 책사로 받아 준 걸 보면, 그가 남자에게 정말 관심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더 나는 걸 알면서도 내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독설을 내뱉고 무례를 서슴지 않았지만 퀴나에는 진심으로 자레스에게 충성했다.
그렇기에 소문난 그 이렌시아 출신 노예를 데려오라 명했을 때에는, 자레스에게 흠만 되는 게 뻔한 그 노예를 가차 없이 대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아넬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고 갔던 시중 노예는 잠시 후 돌아와서 엉뚱한 사실을 알렸다.
“파이디가 쓰러졌습니다요, 나리.”
“뭐라고?”
“처소로 녀석을 데리러 갔는데, 방에 기절해 있는 걸 발견 했다네요. 당장 데리고 올 형편이 아니라서, 일단 각성향을 맡게 해서 정신을 차리게 했답니다요.”
“왜 쓰러졌는데? 병이라도 걸렸단 말이야?”
“그건 아니고, 어… 노예의 일이 좀 힘들었던 모양입니다요. 이렌시아에선 편하게 살았나 보죠?”
“같은 노예인데 카비르에선 기절할 정도로 힘들고 말이지, 응?”
안 봐도 알 것 같다. 일리파스 황자 밑에서도 버텼던 놈이 자레스에게 와서는 하루도 안 돼서 쓰러진 걸 보니 노예들이 작당을 하고 괴롭힌 것이다.
“그 애를 이리로 데리고 와.”
“그, 그럴 필요 없습니다요, 나리. 제가 아랫것들한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곰이 꿀을 끊지! 내가 너희들 말을 믿을 것 같아? 긴말하지 말고 명대로 해!”
자레스가 굳이 무칼라스가 아닌 그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를 알 것 같다. 사람 말을 하는 그 코끼리는 이렇게 세심한 일에는 못 쓴다.
잠시 어찌할까 궁리하던 퀴나에는 결론을 내렸다.
퀴나에 선에서 정리를 해 봤자, 그들은 다시 아넬을 괴롭힐 게 틀림없다. 이건 자레스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퀴나에는 그 길로 자레스에게 찾아갔고, 여행의 수확물을 알리는 보고에 뒤이어 아넬에 관한 일을 알렸다.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고?”
“지금은 각성향을 맡게 하고 푹 쉬게 해서 정신을 차렸답니다. …이렌시아로 돌려보내기 전까진 계속 말썽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 봤자 소용없다, 이 말이지?”
“노예들에겐 노예들의 사회가 있으니까요. 튀는 놈들은 어디서나 정을 맞기 마련이죠. 어정쩡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예뻐하려거든 차라리 대놓고 예뻐하세요.”
잠시 침묵하던 자레스가 이윽고 한숨과 함께 명을 내렸다.
“놈을 데려와라.”
어차피 머지않아 그는 결혼할 거고, 아넬은 이렌시아로 돌아갈 것이다. 굳이 그때까지 외면해서 나중에 죄책감을 갖게 될 필요는 없었다.
아넬이 자레스 앞으로 끌려왔다.
단 하룻밤 사이에 눈이 퀭해지고 얼굴은 여위었다.
황자궁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로 사람을 말릴 수 있다니, 노예들의 솜씨가 황자들보다 낫다는 데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퀴나에와 아넬은 잠깐 동안 서로를 바라봤고 각자 새로운 인상을 갖게 됐다.
“과연 예쁜 아이네요.”
퀴나에가 중얼거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쁘장하긴 하지만 어쨌든 남자애였다. 겨우 이 정도 외모에 자레스가 넘어갔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답지 않게 품위가 있긴 해. 신전 노예 출신이라 그런 건가?’
반대로 아넬은 처음 만난 퀴나에를 보고 남다른 인상을 받았다.
퀴나에 역시 남자였지만 말투도 여성스러웠고, 어조는 높았으며 툭하면 입을 가리고 미소를 짓는 게 얼핏 보면 이쪽이야말로 오해받기 딱 좋은 태도였다.
생긴 것도 곱상했기에 남자보다 더 고운 그의 모습이 아넬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누가 너한테 일거리를 몰아줬지?”
자레스가 묻자 아넬은 대답을 피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말해 봤자 더 따돌림만 당할 거란 눈치 정도는 있었다. 덧붙여 자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도 싫었다.
“전하, 이 아이는 겨우 어제 왔을 뿐인데, 누가 누군지 알기나 하겠어요? 게다가 범인을 찾아내려면 황자궁의 노예 전부를 족쳐야 할 거예요. 셈을 못 하시진 않으니까 뭐가 손해고, 이득인지 잘 아시겠지요?”
“날 가르치려 들지 마라, 퀴나에. 노예들의 일은 주인인 내가 정하는 것이지, 노예들의 몫이 아니야.”
“그래서, 파이디의 역할은 뭔가요? 몸도 약해, 손에 물도 못 묻혀. 황자궁 어디 화병에 꽂아 두고 장식으로 쓰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노래나 불러라, 파이디.”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 재주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으니, 노래라도 불러 보란 말이다. 아니면 퀴나에의 말대로 화병에나 꽂아 두겠다.”
“부르겠습니다.”
얼른 대답한 아넬이 자세를 바로 하고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렌시아어가 아니라 공용어로 된 성가였는데, 청아한 선율이 흘러나오자 쿠션에 기대앉아 있던 퀴나에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크게 떴다.
메타는 위대하시네.
신실한 메타 외에 다른 신은 없으니,
인간의 입은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있도다.
말하는 목소리도 고운 편이긴 했지만, 노래하는 목소리는 또 달랐다.
변성기 전의 소년, 아니 사실은 원래 아넬의 것인 가늘고 깨끗한 목소리가 돌 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유려한 물줄기처럼 흘러나왔다.
그건 무감한 자레스도, 무심한 퀴나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잠시만요! 이건 여럿이 듣게 해야 해요!”
갑자기 퀴나에가 외쳤다. 그리고 무칼라스를 불러오게 했다. 처소의 문을 열고 노예들이 모이게 했고, 거기서 다시 아넬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성가 몇 곡을 부르고 나자 믿음이 깊은 노예들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무칼라스는 아예 눈을 감고 곡을 음미하다, 나중에야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네 목소리가 위대하다.”
“쉿,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신전의 신관들이 횃불을 들고 찾아와.”
주의를 준 퀴나에가 곧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퀴나에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노예들에게도 듣게 했으니, 곧 황궁에 소문이 퍼질 거예요. 황자들이야 안 믿겠지만, 훌륭한 노래 실력 때문에 아낀다고 해 두면 그럭저럭 핑계는 되지요.”
“그 정도로 뛰어난가?”
“하급 노예들도 파이디의 노래를 들었으니, 자기들과 급이 다르다는 건 인정할 거고요. 적어도 엉덩이밖에 없는 노예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노골적인 평가에 아넬의 얼굴이 붉어졌다.
기뻐해야 할지, 불쾌하게 여겨야 할지 몰라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그 순간 배 위로 마주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이 흐릿한 갈색으로 변한 게 보였다.
“헉!”
아넬이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지르자, 자레스가 그녀를 쳐다봤다.
거의 동시에 아넬이 뒷짐을 지는 척 손을 등 뒤로 감췄지만, 자레스는 수상한 기색을 발견한 것처럼 한동안 아넬을 쳐다봤다.
‘봤을까?’
식은땀을 흘리며 그 시선을 외면하는 동안 아넬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염색을 한 지 오래됐지.’
신전에서 염색초로 몸을 갈색으로 물들인 게 거의 두 달 전이었다.
안 그래도 색이 빠질 때가 됐는데, 심지어 어제 빨래를 하느라 오랫동안 물에 손을 담갔으니 손부터 염색이 빠진 것이다.
아넬이 등 뒤로 손을 감춘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여기 있으면 언제 손의 색깔이 바뀐 걸 눈치챌지도 몰랐다. 이쪽을 향해 계속 시선을 박고 있는 자레스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아넬이 애원했다.
“무, 물러가도 될까요?”
무슨 생각인지 자레스는 한동안 대답을 안 하다가 이윽고 마지못한 듯 허락했다. 아넬은 손이 보이지 않도록 재빨리 앞으로 손을 옮기며 몸을 돌렸고, 얼른 자레스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뭔가 또 꿍꿍이가 생겼군.”
아넬이 빠져나간 문을 보며 자레스가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세요, 전하?”
“아무것도 아니다. 무칼라스.”
“네, 황자.”
“파이디를 계속해서 주시하도록. 내 손으로 돌려보내기 전에는 말썽 피우지 않도록, 병사들에게도 계속 감시하라고 전해라.”
“명을 받든다.”
무칼라스가 읍하고 나간 뒤 퀴나에가 투덜거렸다.
“저 자식은 카비르어를 아는 게 틀림없어요.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황자님에게 반말 까는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