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항해는 보름 동안 이어졌다.
순풍이 기가 막히게 불어 줬기에 망정이지 원래대로라면 배로도 20일 넘게 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운명이 그녀를 카비르로 죽어라 밀어 대는 것인지, 순풍은 물론이요 가는 동안 그 흔한 폭풍 한 번 몰아친 적이 없었다.
배는 말 그대로 바다 위를 나는 듯이 달려서 마침내 카비르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확 불어닥치는 뜨거운 공기에 아넬은 숨이 막혔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인데도 이렌시아와는 차원이 다른 더위였다.
다행히 이렌시아처럼 습하지는 않아서 그나마 지쳐 늘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볕에 서 있으면 발바닥을 델 정도로 심각한 열기가 항구를 가득 덮고 있었다.
“뭘 멍청히 서 있느냐! 빨리빨리 움직여!”
노예들을 다루는 감독관이 호통을 치는 바람에 아넬은 다른 노예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아넬은 ‘특별한’ 노예라는 이유로 따로 짐을 부리게 하거나 일을 시키진 않았지만, 말에 태우지 않고 맨발로 흙길을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아넬은 노예들 사이에 섞여 허덕거리면서 길을 걸었다. 본격적인 노예의 삶이 그녀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
다행히 카비르의 수도 마디나는 바다와 가까웠다.
리만이란 항구에서 내려 하루를 걸어가자 도시의 외곽이 나타났는데,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선연한 빛깔에 아넬은 깜짝 놀랐다.
카비르는 화려했다.
아넬은 촌에서 자랐고, 기억이 날 무렵엔 이미 이렌시아에 있었다.
이렌시아는 아주 작은 나라였고 심지어 신전은 그중에서도 오지인 섬에 있었기에 그녀가 아는 도시의 풍경은 신전에 들어오기 전 잠시 거쳤던 이렌시아 수도의 소박한 모습이 전부였다.
“와아아.”
마디나로 들어온 아넬은 저절로 입을 벌렸다.
이렌시아에 비해 카비르는 모든 것이 번쩍거렸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2층 이상이었으며, 그중엔 심지어 4층 높이까지 올린 커다란 건물들도 많았다.
건물들은 대부분 적회색의 흙벽돌로 지어졌지만, 지붕만은 각각 화려한 색깔로 치장해서 그 모습이 마치 보석을 얹은 것처럼 보였다.
카비르 특유의 둥그런 지붕을 얹은 회당 건물들은 모두 은은한 붉은 빛깔을 띤 황금으로 칠해져서 사치의 극치를 자랑했다.
“하여간 촌놈 티를 내요.”
일리파스의 노예들이 낄낄거리면서 그녀를 떠밀었다. 그 바람에 아넬은 도시를 더 구경하지 못하고 바로 황궁으로 향해야 했다.
카비르의 황제가 사는 황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요새였다.
궁을 둘러싼 높다란 성벽은 성문을 걸어 잠그면 밖에선 절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철의 장벽이 됐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성벽이 앞을 막고 있고, 그 성벽을 지나가야 비로소 황제가 사는 본궁이 나온다.
일리파스의 궁은 본성과 외벽 사이에 있는 황자들의 궁들 사이에 있었다.
카비르는 황자들이 본성에 함께 살지 않고, 각자의 궁을 받아 따로 살고 있었다. 말이 ‘따로’지 사실상 지척이라 황제의 호출이 있거나 연회가 열릴 때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궁을 따로 갖고 있다는 건 중요한 변별점이었다.
황제가 만든 수많은 황자와 황녀들 중에서 궁을 따로 가질 정도로 세력을 갖춘 자는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일리파스의 궁은 그 황자들의 궁 중에서도 제법 컸고, 아넬은 끝없이 이어진 회랑과 열주들을 보면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느라 바빴다.
“눈 똑바로 떠라, 촌놈아. 여긴 이렌시아와 달라서 눈 뜨고도 코를 베이는 곳이란다.”
“아무렴. 이곳은 노예 대접이 극악이라, 실수라도 하면 다리를 잘리고 팔을 잘리지.”
“차라리 그 정도면 좋게? 황제의 무덤 공사장으로 보내지면 완전 죽음이지.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지옥이라더라.”
현 카비르 황제는 아직 살아 있으면서 자신이 묻힐 거대한 무덤을 축조 중이라 했다.
노예 중에서도 죄지은 자들이 그리로 보내진다는데, 살벌한 협박에 아넬은 겁먹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아넬이 이렌시아 출신이란 걸 아는 노예들은 툭하면 그녀를 놀렸다.
지금도 아넬이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그녀의 어깨를 밀고 뒤에서 다리를 걷어차면서 지저분한 말들을 지껄여 댔다.
이렌시아에서는 상상도 못 한 대접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황자궁으로 들어온 아넬은 그녀를 노예 시장에서 사 온 장본인인 마카르에게 불려갔다.
이제는 자레스의 호위병이 아니라 일리파스의 참모가 됐으므로 목덜미가 더욱 빳빳해진 그가 아넬의 어깨를 지휘봉으로 콕콕 찌르며 일갈했다.
“일리파스 황자님께서 특별히 널 주목하고 계신다. 그러니 조만간 네 쓸모를 증명해야겠지?”
아넬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음흉하게 웃으며 다른 노예에게 명했다.
“기왕이면 때깔이 고와야 써먹는 맛이 있지. 이놈을 깨끗이 씻겨 와라.”
일리파스 황자의 궁은 가로로 길었다.
한참을 걸어야 빈객들이 쓰는 공간이 끝나고 노예들의 처소가 나왔다. 넓은 마당을 가로지르자 2층짜리 낡은 건물이 나왔는데 그곳이 노예들의 숙소였다.
아넬을 데리고 온 젊은 노예는 그 건물을 돌아 뒤쪽으로 갔다.
뒷마당에 얕은 샘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닥이 막혀 있었고, 대신 아래쪽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배관이 있었다.
수로와 연결돼 있어서 거기서 물을 끌어다 쓰는 것 같았다.
‘카비르는 수도의 도시라더니. 확실히 이렌시아보다 한 수 위구나.’
도시 전부에 깔린 건 아니었지만, 카비르 황궁엔 숱한 수로가 설치돼 있어서 멀리 우물까지 가지 않아도 물을 길어다 쓸 수 있었다.
카비르 특유의 정교한 정원에는 반드시 수반과 연못이 필요했는데, 그를 꾸미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었다.
비록 노예들의 숙소지만 그 발달한 수로 문화 덕분에 더러운 구정물이나 힘들게 길어오는 우물물 대신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씻어라.”
그녀를 데려온 노예가 턱짓으로 샘을 가리켰다.
“여, 여기서요?”
아넬은 반문했다. 오랜만에 몸을 씻을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사방이 탁 트인 야외에서 벌거벗고 씻으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럼 뭐, 노예한테 내실의 욕탕이라도 내줄 줄 알았냐? 이놈 참 웃기는 놈일세?”
지금 그녀의 처지에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넬은 어쩔 수 없이 애원했다.
“그, 그럼 혼자 씻게 해 주세요.”
“허, 사내놈끼리 가릴 건 또 뭐야? 보면 볼수록 이상한 놈이네?”
계속 부탁하면 오히려 의심만 더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노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되물었다.
“아, 혹시 너… 거시기가 작은 거 아니냐?”
몸은 아직 덜 자랐어도 아넬은 여자였다. 있지도 않은 부위를 거론하며 짓궂게 묻자 수치심에 아넬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정곡을 찔린 거로 해석했는지, 노예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알았다, 알았어. 혼자 마음껏 씻으세요, 촌놈아.”
사내 취급받는 것도 모자라 이젠 거시기 작은놈 취급까지 받게 됐다. 대체 제 신세가 어디까지 전락하려는 건지 몰라 아넬은 한숨을 쉬었다.
***
아넬은 노예가 건네준 새 옷을 갈아입고 일리파스 앞에 섰다.
새것이라고 해 봤자 이렌시아에서 걸쳤던 것과 비슷한 셔츠와 품이 넓은 바지로 갈아입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몸을 씻고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배에서 보던 모습과는 제법 달랐다.
“확실히 예쁘장하네.”
일리파스가 금빛에 가까운 눈으로 아넬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자레스도 어렸을 땐 이렇게 예뻤다던데, 그래서 그쪽으로 취미가 생긴 건가?”
이상하게 그 말에 명치께에 뭔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자레스 황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말해 놓고 자기가 놀랐다. 아넬은 더 말을 이으려다 말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왜 그를 변호하고 있는 거지?’
빈말로라도 자레스가 친절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든 적도 있었고 짓궂은 장난을 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넬의 성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남자란 걸 안 뒤로는 그녀를 멀리하려 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그와 아넬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게 그의 남색 취향을 증명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째서 자레스가 사내로 알려져 있는 자신에게서 흥미를 거두지 못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지 아닌지는 너를 끌고 가면 알겠지.”
일리파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아냐? 이 카비르에서 남색은 사형이다. 귀족이나 황족들이야 뒤로는 다 하지만, 뒤에서야 어쨌든 들키면 사형이라고.”
“…….”
“아, 난 당연히 그쪽 취향은 아니야. 세상에 미쳤지. 예쁜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사내자식을 왜 탐해? 변태 같은 놈들!”
카비르어로 심한 욕설을 내뱉은 일리파스가 다시 히죽 웃었다.
“네가 모시던 그 황자가 어떤 인간인지는 이제부터 확인해 보자고. 꽤 재미있을 거야.”
야비한 웃음을 흘리는 그에게서 불길한 냄새가 났다. 폭력과 흉포함 그리고 오만함.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도망쳐 나온 자레스와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아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
일리파스 황자까지 돌아오자 카비르 황궁에선 황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황자궁을 받은 자들만 모이는 이른바 ‘진짜’ 황자들의 모임이었기에, 그에 참가할 수 있는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궁을 받은 황자들의 수가 결코 적은 건 아니었으나 20여 명이 넘는 황자들 중 치열한 살육전 끝에 살아남은 이는 고작 여덟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여섯 명이 참석하였는데, 장황자인 유가, 6황자인 일리파스, 18황자인 스에반과 16황자인 자레스였다.
나머지 어린 황자들이 두 명 더 끼었으나 이미 장성한 황자들이 대화에 끼워 주질 않아 저희들끼리 한구석에 모여 있다가 이윽고 물러간 지 한참이었다.
술이 한 순배 돌았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한 번도 친해 본 적이 없던 형제들은 겉도는 대화를 주고받고 독설과 비아냥으로 서로를 찌르다 이윽고 지쳐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유가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후궁 라키사가 낳은 아이의 명명식이 있다.”
카비르에서는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이 되기 전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첫 생일을 맞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인데, 그만큼 명명식은 중요한 것으로 아이의 무사한 성장을 축하하기 위해 의미 있는 선물을 보내는 관습이 있다.
라키사는 카비르 황제가 요즘 들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었으니, 그녀가 낳은 아이에겐 좋으나 싫으나 무수한 선물이 쌓일 것이었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카비르인의 특성상 황자들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선물을 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라키사는 입과 몸이 둘 다 빠르니, 선물에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거야.”
“라키사의 눈 밖에 났다간 부황께 일러바칠 거라는 말을 참 돌려서도 합니다. 아무렴요, 그년… 아니, 그분은 입과 몸뿐만이 아니라 허리 아래쪽은 더욱더 빠른 분이지요.”
“품위 없는 말이구나, 스에반.”
“아이코, 실언했습니다, 형님.”
일리파스는 실언을 빙자한 스에반의 비아냥이 재밌어서 껄껄 웃었지만 자레스는 얼음 같은 얼굴로 그저 침묵했다.
그러는 동안 스에반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저는 라키사의 아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이미 준비했습니다. 2대륙에서 만든 진귀한 장난감 수레인데 말입니다, 후미에 화약을 잰 통을 달아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앞으로 슝! 하고 달려가지요. 양옆에도 작은 화약을 매달아 놨는데, 이걸 터뜨리면 방향 전환도 할 수 있답니다.”
“너무 빨리 달려서 어디 처박기라도 하면 라키사가 참으로 좋아하겠구나.”
유가가 독설을 뿌리자, 일리파스가 웃음을 거두고 외쳤다.
“저도 이미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형님. 그것도 스에반의 것처럼 위험한 게 아니라 아주 의미가 깊은 것으로요.”
“큰소리를 치는 걸 보니 정말 대단한 걸 준비했나 보구나.”
“그럼요. 해서 말인데, 라키사의 아들에게 보낼 선물을 미리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보고 평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굳이?”
선물을 미리 공개하는 건 약점을 잡히는 일이다. 먼저 공개된 선물에 맞춰 그보다 더 값진 선물을 바치거나, 그 의미를 깎아내리는 선물을 할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불리했다.
그런데 일리파스가 제 발로 먼저 보이겠다 하니, 유가와 스에반은 물론이고 자레스 역시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금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보시면 아주 놀랄 것입니다.”
그와 함께 일리파스가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에게 명을 내렸다.
이윽고 노예 두 명이 들것을 메고 들어왔다. 들것 위에는 뚜껑이 달린 커다란 대바구니가 얹혀 있었는데, 노예들이 대바구니를 연회장 한복판에 내려놓더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보십시오, 형님들. 이렌시아에서 온 귀한 물건이랍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일리파스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것을 끄집어냈다.
바구니에서 나온 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등 뒤로 팔이 묶여 있었는데, 자레스는 곧바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일리파스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자그마한 키에 왜소한 몸집. 약간은 자라난 짧은 금발에 초록빛의 눈.
자레스의 가슴 한복판에 맺혀 있던 얼음덩어리가 쩍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대바구니에서 끌려 나온 아넬을 본 황자들이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별 볼 일 없는 노예였다. 소년치고는 얼굴이 예쁘장하긴 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대단한 미모라고 하긴 어려웠다.
“이게 선물이란 말이냐.”
유가가 피식 웃었다. 다른 황자들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인가 싶어 주변을 빙 둘러서 봤을 때 문득 유가의 시선이 자레스에게 꽂혔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영민한 유가에게는 그 틈이 보였다.
같은 형제들 앞에선 절대로 벗는 법이 없는 철가면에 금이 가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차가운 시선이 방금 대바구니에서 굴러 나온 소년 노예에게 꽂혀 있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약삭빠른 스에반 역시를 그를 눈치챘다. 다만 유가처럼 티를 내놓고 빤히 관찰하진 못하고 곁눈질로만 봤는데, 그는 곧 일리파스 역시 자레스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건 라키사의 아들이 아니라 자레스에게 보이려는 거로구나.’
유가 역시 그를 짐작했다.
그가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으면서 말했다.
“자레스는 일리파스의 선물이 마음에 드는가 보구나.”
유가가 부드럽게 웃으며 일리파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리파스. 아직 라키사의 아들에게 선물을 한 게 아니니, 이참에 저 선물을 자레스에게 넘기면 어떻겠느냐?”
“거, 무슨 말씀입니까? 라키사가 그 사실을 알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텐데? 내 동생이 저렇게 간절한 눈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내 마음이 안타깝구나. 너에게 아름다운 여자 노예 다섯을 보낼 테니 저 선물은 자레스에게 보내 주렴.”
“싫다고요! 제가 선물을 누구에게 하든 형님은 상관하지 말아요!”
서로 의도를 가진 대화를 나누면서도 일리파스와 유가의 눈은 자레스에게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아넬도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카비르의 장황자 유가.
카비르는 황제가 죽기 직전에야 후계자가 될 황태자를 지명하는데, 카비르에서도 가장 세력 있는 부족 출신인 어머니를 두고 있는 유가는 원래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였다.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비슷한 경로를 거쳐 성장한 자레스와 치열한 황위 다툼을 벌였고, 저 잔혹한 자레스를 상대로 끝까지 버틴 것도 유가였다.
세평에 의하면 자레스는 잔인하고 유가는 냉혹하다 했다. 머리가 좋고, 계략에 능하고, 정면 승부보다는 뒤에서 덫을 놓고 이간질을 하며 세력을 갈라놓는다.
여러모로 자레스와는 정반대 타입이었다.
그런 세평을 이미 들어서인지 아넬은 마치 여자를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서도 경탄이 나오기보다는 거부감부터 들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레스는 겉보기엔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흔들린 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일리파스와 유가가 설전을 벌이는 걸 보면서도 침묵했다.
동요하는 기색은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안 보는 척 그를 관찰하던 유가는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의심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다. 자레스는 자기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녀석이다.
그렇기에 고난을 감내하며 몸을 숙이고 있다가 기어코 황자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이기에, 유가는 그의 심경을 확인하기 위해 자레스와는 비할 데 없이 단순한 일리파스부터 공략했다.
유가가 쥘부채를 아넬 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이런 놈이 갓난아이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국으로 끓여 먹든, 구워 먹든 라키사가 알아서 하겠지요.”
“오라, 알겠다. 이제 보니 아이가 아니라 라키사를 위한 선물이었나 보군? 이렇게 예쁜 사내아이를 보내다니, 부황께서 참으로 좋아하시겠구나.”
“그건…!”
“과연 일리파스 형님다운 선물이군요.”
스에반까지 가세해 이죽거리자 일리파스의 얼굴빛이 변했다. 물론 진짜 라키사에게 보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생각이 깊지 못했다는 건 확실했다.
궁지에 몰린 일리파스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눈가엔 난폭한 기운이 서렸다.
그때까지 팔다리가 묶인 채 그의 발치에 웅크리고 있던 아넬을 돌아본 일리파스가 고함을 질렀다.
“이봐, 너!”
아넬이 움찔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아무 재주나 선보여 봐! 네 가치를 증명하라고!”
“저, 저는 노예라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너는 예쁜 얼굴과 엉덩이를 빼고는 가진 게 없다는 거로군?”
그녀는 몰랐지만,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던 자레스의 손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기에, 일리파스는 이제 자레스도 잊은 채 아넬에게 화풀이를 해 댔다.
“그럼 여기서 네 쓸모를 찾아야겠구나. 이봐, 노예!”
일리파스가 시립하고 있던 시종을 다시 불렀다.
“메살리를 불러와!”
‘무슨 생각이지?’
아넬은 물론이고 모두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살리란 자가 불려왔다. 키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자였고, 몸집 역시 컸다.
박박 깎은 머리를 보아하니 그 역시 노예인 것 같았는데, 일리파스가 그를 황자들 앞에 세우며 외쳤다.
“형님들, 재밌는 여흥을 보여 드릴 테니 기대해 주십시오!”
스에반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 물었다.
“무슨 생각입니까, 형님?”
“말 그대로 여흥이다, 여흥. 재밌는 구경을 보여 줄 테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레스 쪽을 힐끗 쳐다봤지만, 여전히 자레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일리파스도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야들야들한 놈과 제가 데리고 있는 격투 노예를 싸워 보게 할 생각입니다. 노예 격투는 다들 즐기는 여흥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황자들이 흥미를 보였다. 오히려 당황한 건 아넬이었다.
한눈에 봐도 메살리란 상대는 힘이 세 보였다. 격투 노예로 살아왔을 정도면 싸움 기술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뛰어날 텐데, 아넬은 덩치는 물론이고 힘도 약했고 심지어 여자였다.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흠. 상대가 돼야 재미가 있지. 누가 봐도 이 어린 노예 놈이 질 게 뻔하지 않느냐.”
“제가 재미가 있도록 꾸며 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일리파스의 시종 노예가 쟁반에 든 것을 바쳤다.
쟁반에 놓인 건 단검이었다. 카비르 양식으로 그 끝이 휘어 있었는데, 일리파스가 화려하게 세공된 검집에서 단검을 빼더니 사람들에게 보여 줬다.
“이 검엔 맹독이 발라져 있습니다. 운 좋게 저 어린놈이 메살리를 스치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놈은 죽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꽤 재밌는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름 공정한 싸움이구나.”
유가가 그리 말하며 웃자, 스에반이 동조의 의미로 박수를 쳤다. 자레스만이 얼음 같은 침묵을 지켰다.
아넬은 자레스 쪽은 차마 쳐다보지 못한 채, 시종 노예가 건네는 칼을 받았다.
“배려를 한다고 했으니, 재주껏 살아남아 봐라.”
일리파스가 크게 외쳤지만, 아넬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뭐가 배려란 말인가. 걷고 기도하는 것 외에는 몸을 써 본 적이 없는 아넬이었다. 칼을 쥐어 봤자 제대로 휘두를 가능성이 없었다. 오히려 제 칼에 자신에 베여 죽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성력이 있긴 했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쓸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단검 하나로 살아남는 수밖에 없는데 벌써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는 메살리를 보니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아넬은 독이 발라진 단검을 든 채 엉거주춤 불안한 자세로 메살리를 향해 돌아섰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이 이미 얼굴에 드러나 있었고, 메살리는 코웃음을 쳤다.
황자들 역시 벌써 다리가 휘청거리는 아넬을 보고는 이 승부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 일리파스가 왜 이런 재미없는 자리를 마련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는데, 단순한 일리파스이니 꿍꿍이 따위가 있을 리는 없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얼른 메살리가 아넬을 죽여서 피를 뿌리는 장면을 보고 싶어 했다.
“애송이.”
메살리가 아넬의 머리통보다 커다란 주먹을 뿌드득 소리를 내며 움켜쥐었다. 그리고 살기를 풀풀 날리며 아넬을 향해서 한 걸음 다가섰다.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때도 위협적이었지만, 팔을 뻗어 잡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서자 메살리의 체구가 거의 거인처럼 느껴졌다.
아넬이 벌벌 떨며 무기를 앞으로 내밀긴 했지만, 누가 봐도 그건 단검이 아니라 끝만 날카로운 젓가락처럼 보였다.
무기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아넬은 메살리의 상대가 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예상이 맞았다.
기세를 압도하기 위해 메살리가 아넬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아넬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메살리가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오!”
황제들이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일격에 아넬의 머리통이 박살 나는 장면을 보리라 예상했지만, 예상은 한 박자 늦었다.
아넬이 다리가 꼬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바람에 메살리의 주먹이 아넬이 있던 빈자리만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나 힘이 센지,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가고 붕, 하는 소리가 났다. 맞았다면 정말 한 방에 턱뼈가 골절되거나 두개골이 부서져 죽었으리라.
연이어 또 공격이 이어졌다. 단숨에 아넬을 죽이지 못한 걸 치욕스러워한 메살리가 주저앉은 아넬을 향해 주먹을 내려쳤다.
피할 가능성이 없었다. 아넬은 몸을 굴려 옆으로 피신하는 대신 손에 쥔 단검을 내려치는 메살리의 주먹을 향해 질러 넣었다.
“악!”
턱도 없는 시도였다. 메살리는 가볍게 주먹의 방향을 돌렸고, 대신 단검을 쥔 아넬의 팔을 걷어찼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격통과 함께 아넬은 칼을 놓쳤다.
아넬이 오른팔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메살리가 곧바로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발로 차서 멀찍이 치워 버렸다.
“끝이로구나.”
유가가 중얼거렸다.
칼이 있어도 모자랄 판에 무기마저 뺏겼으니 이제 아넬이 살아남을 확률은 0에 가까워졌다. 그 자리에 모인 황자들 모두가 그 사실을 확신했다.
아넬마저 그리 생각하며, 성큼 다가서는 메살리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재미없습니다, 일리파스 형님.”
자레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막 아넬을 죽이기 위해 발을 들었던 메살리가, 자레스가 끼어들자 움찔해서 멈춰 섰다.
그의 주인은 일리파스였지만, 이 여흥의 목적은 재미였다.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메살리가 이겨 봤자 일리파스에게 혹독한 추궁을 당하거나 어디 한두 군데가 잘려 내쳐질 터였다.
노예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갑자기 웬 트집이냐.”
일리파스가 투덜거렸지만, 그 눈에는 신경질보단 호기심이 더 컸다. 걸려들었다는 잔혹한 웃음, 비틀려 올라간 입매에서 승리의 확신이 넘쳐났다.
일리파스를 제외한 유가나 스에반은 아넬과 자레스의 사이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에 아직은 이상함을 알지 못했다.
자레스가 아넬에게 잠깐이나마 흔들렸다는 건 눈치챘지만 설마 그가 아넬 하나 때문에 일리파스에게 트집을 잡고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두 황자는 수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재미없다는 자레스의 평에 먼저 동의했다.
“재미가 없다는 말에는 동감한다.”
“맞습니다. 일리파스 형님, 이래서는 몸집 실한 격투 노예들의 대결보다 재미가 없잖아요. 나름 공정하게 해 주겠다더니, 저 어린 노예가 너무 형편없습니다. 어디서 저런 쓸모없는 것을 데려오셨습니까?”
“스에반, 이 자식!”
일리파스의 표정이 단숨에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아넬에 대한 공격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어느새 흥분한 것을 자레스가 끼어들었다.
“원한다면 내가 재미를 더해 드리죠. 내가 데리고 있는 격투 노예가 여럿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모두 전쟁 노예였고, 전쟁 노예들끼리 서로 싸우게 해서 최후에 살아남은 다섯 명을 격투 노예로 부리고 있습니다.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죽이고 살아남은 만큼 실력도, 살의도 모두 남다른 녀석들입니다.”
“센 놈과 센 놈의 대결이라니 그거야말로 흔하잖아!”
일리파스가 딴죽을 걸자 유가와 스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노예들이 죽고 살고 하는 경기엔 흥미가 없어졌다.
그보다는 일리파스가 왜 노예들의 경기에 필사적인지, 어째서 저 무감한 자레스가 굳이 일리파스가 벌인 판을 훼방 놓는지 그게 궁금했다.
“내 노예들끼리 어찌 싸우게 하든 내 마음이야. 제삼자는 거기서 구경이나 해라.”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일리파스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다른 황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레스가 돌연 엄청난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내가 메살리와 싸우겠습니다.”
“뭐라고?”
스에반은 물론이고 냉정한 유가마저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며 흥미를 보였다. 황자들을 시중들기 위해 따라와 있던 노예들 역시 귀를 의심하며 자레스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노예 격투는 누구 하나가 죽기 전엔 끝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황자라고 예외가 아닌 것도?”
“물론입니다.”
자레스가 무심하게 대답하자 일리파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다른 황자들 역시 내색하진 않았으나, 내심 기쁘기 짝이 없었다.
자레스는 황자들 중에서도 강력한 라이벌이었으니, 이를 빌미로 자레스를 죽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일리파스 네 생각은 어떠냐?”
“저야 당연히 좋…. 아, 아니, 동생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는 그에 따르겠습니다. 아,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어느새 유가가 두 황자 사이에서 심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레스 대신 묻자 일리파스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메살리가 빈손이니, 자레스도 빈손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 말에 그동안 넋이 나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아넬이 벌떡 일어났다.
“그건 불공평합니다! 화, 황자님과 메살리의 체격이 저리 차이가 나는데 어째서 무기를 주지 않습니까!”
“누가 노예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는가?”
유가가 희한하다는 눈으로 아넬을 쳐다봤다. 그 시선이 날카롭게 그녀를 훑자 아넬이 움찔 굳어 한 걸음 물러났다.
“일리파스, 네 노예니 내가 참견할 수 없다만 나라면 이 노예를 당장 끌어내서 혀를 잘랐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일리파스가 대답하기 전에 자레스가 끼어들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의 말대로 중요한 건 한낱 노예 따위가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 자레스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을 받아들이지요. 맨손으로 싸우겠습니다.”
“전하!”
아넬이 소리를 지르자 이번엔 모든 황자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는 사이구나.’
아넬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레스와 연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자레스가 이 노예를 살리기 위해 싸움에 나섰다는 것도.
“큭.”
유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싶은 건 다른 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잔혹한 자레스가 소년 노예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이건 지나가던 개도 웃을 노릇이었다.
노예를 위해 나선 것도 기가 막힐 판인데, 심지어 남자 노예라니!
“미쳤느냐, 자레스.”
“제가 미쳤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해서 이 격투를 받아들일 겁니까, 말 겁니까? 그것만 말하십시오.”
이게 어떤 기회인데 버릴 것인가. 당연히 일리파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다.”
“좋습니다. 대신 격투에 아무 보상도 없으면 너무 심심하겠지요? 제가 이기면 제 청 하나를 들어주십시오.”
“청이 뭐냐?”
“그건 제가 이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대단한 걸 요구하면 곤란한데? 설마 나를 달라거나 하면….”
“그런 거 아닙니다!”
일리파스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어차피 자레스가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기에, 청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죽은 자는 소원을 말할 수 없는 법이니.
“격투를 시작한다. 둘 중 어느 누가 죽어도 항의할 수 없다는 것을, 메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안 돼!’
메타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알기에 아넬이 절망에 차 눈을 감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자레스와 메살리 둘 다 고개를 끄덕였고, 곧 황자와 노예들이 살의와 환희에 차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넬처럼 덩치 차이가 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메살리의 체구는 자레스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허리는 마치 아름드리 나무둥치처럼 굵었고, 팔 역시 자레스보다 한 뼘은 더 길었다. 무기가 있다면 모를까, 누가 봐도 맨손으로는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게다가 메살리는 수많은 격투 노예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살육자였다.
자레스 역시 노예 출신이긴 하지만, 황자로 살아온 세월이 못지않게 긴 그가 격투 노예와 싸워 이길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을 것이다!’
그를 확신한 유가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모두가 자레스가 죽기를 기다리며 눈을 빛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됐다.
“흐랴아앗!”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메살리가 먼저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힘도 힘이지만, 팔 길이가 긴 게 메살리의 강점이었다.
평범한 사내는 팔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면 상대는 거기 맞아 죽거나, 몸을 굴려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후자일 경우 메살리는 상대가 몸을 날리는 것까지 예상해 바로 그를 걷어차 갈비뼈를 부러뜨리거나 내장을 터뜨려 죽이곤 했다.
아넬의 경우는 피하거나 맞는 대신 겁을 먹고 주저앉아 버리는 바람에 바로 죽이질 못했을 뿐, 자레스처럼 싸움을 아는 남자는 반드시 그가 예상한 범위 안에서 움직일 거라 믿었다.
일격에 죽이지 못할 거란 건 예측했다. 자레스는 몸을 뒤로 젖혀 주먹을 피했고, 그의 몸놀림을 계산한 메살리는 자레스가 움직일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기 위해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어느 쪽이든 자레스가 붙잡히면 그는 죽는다. 그를 확신한 일리파스가 외쳤다.
“죽여라, 메살리!”
하지만 자레스는 모두의 예상을 깼다. 그는 옆으로 몸을 날리는 대신 갑자기 메살리의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피하지 않고 오히려 사정거리 안으로 달려들자 메살리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발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전에 자레스가 그의 턱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억!”
메살리가 비명과 함께 한 걸음 물러났다.
자레스의 힘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자레스는 황실 안에서 귀하게만 자라 온 황자들과 달랐다.
노예로 태어났으며, 노예로 자랐고, 종국에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피 튀기는 전장에 뛰어들어 죽고 또 죽이면서 목숨을 이어 왔다.
그렇게 쌓은 무력이기에, 전력을 담아 휘두른 주먹에 맞은 상대가 일격에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메살리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급소인 광대뼈와 턱 사이를 정통으로 맞았지만, 메살리는 턱이 틀어진 상태로도 기절하지 않고 버텼다.
다리를 뒤로 뻗어 몸을 지탱한 그가 괴물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자레스를 노려봤다.
“힘내라, 메살리!”
스에반이 외쳤고, 뒤에 선 노예들 역시 황자들의 편을 들어 모두 메살리를 응원했다. 그에 힘을 얻었는지, 한 걸음 물러났던 메살리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자레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덩치에 비해 엄청나게 빠른 몸놀림이었다.
이번에는 자레스가 미처 피하지 못했고, 허리를 잡힌 자레스가 메살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힘으로는 메살리에게 달렸기 때문에 자레스가 곧 그에게 깔렸다. 그가 자레스를 타고 앉아 몸을 일으키자 일리파스가 외쳤다.
“머리를 부숴!”
다른 황자와 노예들도 고함을 지르는 가운데 유가는 쥘부채 뒤에서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아넬만 공포에 차 비명을 질렀다.
“전하!”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진 걸까. 그 순간 자레스가 몸을 비틀었다.
메살리가 그의 머리를 노리고 주먹을 내려쳤지만 겨냥이 빗나갔다. 그와 동시에 자레스가 그의 팔에 매달렸고, 반동을 이용해 상반신을 일으키며 메살리의 코를 들이받았다.
“끄으아악!”
메살리가 휘청거리자, 그 틈을 타 자레스가 그를 밀어내며 메살리에게서 벗어났다.
“과연, 노예 출신답구나. 품위고 뭐고 없어.”
유가가 이죽거렸으나, 이번엔 일리파스가 동의하지 않았다.
“살고 죽는 데 품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일리파스가 툭 내뱉었다. 그 역시 자레스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품위를 지키면서 싸우라고 강요할 생각까진 없었다.
유가와 달리 일리파스는 부대를 끌고 전장에서 싸워 본 경험이 있었다.
자레스처럼 직접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목숨을 건 싸움 앞에서 세 치 혀가 얼마나 쓸모없는지는 알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두 번이나 연속해서 자레스에게 공격을 허용한 메살리는 이제 힘을 믿고 섣불리 덤비지 않았다.
예상과 다르게 자레스는 완력이 약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개싸움도 마다치 않았다. 메살리는 그래 봤자 방구석 황자로 생각했던 자레스에 대한 편견을 수정했다.
이제부터는 그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싸워야 했다.
한편 자레스는 태연한 척 호흡을 고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긴장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두 번이나 그의 급소를 공격했는데도 메살리는 쓰러지지 않았다.
검이 아니라 주먹으로 하는 싸움은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데, 격투가 길어지면 힘으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그가 점점 불리해질 게 뻔했다.
대결을 빨리 끝내야 했다.
메살리 역시 조금씩 살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걸 보니 이번 일전에 승부를 걸 모양이었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을 많이 해 본 자레스는 그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자레스는 짐승처럼 허리를 숙이며 흉포한 기세를 날리는 메살리를 보며 언젠가 노예로서 참여했던 전투를 떠올렸다.
카비르보다 남쪽에 있는 다크신 왕국과의 전투에서 자레스는 다크신의 암습에 맞서 싸우다 부대에서 낙오됐었다.
해 뜨기를 기다려 부대로 복귀하려 할 때 하필 운 나쁘게 다크신의 코끼리 병사와 맞닥뜨렸다.
다크신의 코끼리 부대는 살상력이 높기로 악명이 높았다.
마치 코끼리와 한 몸이 된 듯, 짐승을 날뛰게 하여서 적병을 밟아 죽이거나 기다란 코로 감아서 집어던지게 했다.
한 번 흥분한 코끼리는 웬만한 고통에도 꿈쩍하지 않았기에, 그를 상대하는 병사들은 맥없이 짓밟히고 내장이 터지거나 머리가 터져 뭉개졌었다.
자레스는 그런 코끼리 앞에 내던져졌었다. 머리가 아득해지는 공포, 빤히 그를 향해 달려오는 상대를 보면서도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던 그 상황은 지금과 같았다.
코끼리만큼은 아니지만 흡사 거인을 방불케 하는 거구의 상대. 그런 자를 이기려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때도 그랬었지.’
본능으로 움직였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코끼리를 보며 도망치는 것보다는 달려들어야 산다는 걸 깨달았었다.
그래서 몸을 돌려 달아나는 대신, 자레스는 저를 내리치려는 코끼리의 코에 매달렸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그를 뿌리치려는 코끼리의 머리 위로 뛰어내려, 등에 앉은 병사의 목을 단숨에 찔렀다.
“흐랴아아앗!”
그때의 코끼리처럼, 메살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기다란 팔이 그를 향해 뻗어 오는 순간, 자레스는 코끼리에게 달려들었던 것과 똑같이 몸을 날렸다.
그의 뻗은 팔을 붙잡고 그를 지지대 삼아 원을 그리며 몸을 돌린 자레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메살리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헉!”
“저런!”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메살리가 자레스를 떨구어 내려 그의 허벅지를 붙잡으려 할 때, 자레스가 그의 목을 두 팔로 붙잡고 어기찬 힘으로 돌려 버렸다.
메살리의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그의 눈이 뒤집어졌다.
바로 죽은 건 아니었다. 목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메살리는 자레스를 뿌리치기 위해 그의 허벅지를 세차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자레스는 몸부림치는 코끼리의 목덜미에 칼을 꽂은 채 버텼던 것처럼, 끈질기게 그의 어깨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휘청거리던 메살리의 몸에서 이내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죽어 가는 코끼리처럼 무너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 직후에야 자레스가 달라붙은 메살리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일어났다.
“크륵.”
메살리의 몸이 한 번 들썩거렸다. 그의 입가에 거품이 흘러내리더니, 그를 마지막으로 메살리의 몸에서 생명의 징후가 사라졌다.
“허어.”
스에반이 기가 막혀 탄식을 토해 냈다. 모두가 놀랐다. 유가는 부채 뒤에서 굳었고, 일리파스는 당황해서 차마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다. 수백 명의 격투가들을 죽이고 일인자로 선 메살리가 황자의 손에 죽었다. 상상하지 못한 사태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만 보았다.
“제가 이겼습니다, 형님.”
일리파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억지를 부릴 수 없는 현실에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어쩔 수 없이 웃었다.
“그렇군.”
“그럼 약속대로 청을 하나 들어주시지요.”
“원하는 게 뭐냐. 내 내실에 있는 여자들을 전부 내놓으란 것만 아니면 들어주지.”
“여자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가 아넬 쪽을 흘깃 쳐다보더니 조용히 내뱉었다.
“저 어린 노예를 원합니다.”
좌중에 정적이 흘렀다. 이미 반쯤은 예감했지만, 그걸 자레스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아넬도 아연했고, 다른 형제들은 더욱 그러했다.
스에반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가를 쳐다보자, 유가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눈을 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를 발견한 일리파스 역시 결국은 키들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우야, 설마 노예 하나를 얻겠다고 목숨을 건 건 아니겠지?”
입 밖에 꺼내 말하지 않았을 뿐, 모두 이유는 그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비웃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자레스는 그들의 예상을 깨고 차갑게 외쳤다.
“아니오. 일리파스 형님의 코를 깨 줬으니, 그 증거로 노예 한 놈쯤 얻어 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 생각한 것뿐입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일리파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거기다 대고 자레스가 한 방을 더 먹였다.
“나는 저놈을 보면서 형님의 깨진 코를 떠올릴 겁니다.”
진 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일리파스가 다혈질이긴 했지만 이미 결정된 승부에 토를 달 수는 없었기에, 붉으락푸르락 얼굴빛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다가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데려가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레스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자레스가 데리고 온 시종 노예가 아넬을 잡아끌며 그 뒤를 따라갔고, 모임은 그대로 파했다.
하지만 이 모임과 일리파스의 도발이 아주 쓸모가 없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은 자레스가 아넬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챘다.
그의 핑계가 훌륭하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황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 노예가 어디서 왔는지, 어째서 자레스와 아는 사이인지 사연을 알아내라.”
자기 궁으로 돌아온 유가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고, 다른 황자들 역시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단 하룻밤 만에 황궁 곳곳에 아넬과 자레스에 대한 소문이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