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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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녁이 되자 의원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붕대를 풀고 자레스의 상처를 살피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회복이 무척 빠르십니다, 황자 전하. 치료하는 보람이 느껴지는군요.”

‘치료를 한 게 뭐 있다고.’

무칼라스의 보고로는 의원이 한 일이라고는 진통제를 먹이고 약초를 갈아 바른 것밖에 없다고 했다.

자레스는 의원의 능력을 의심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의원은 신이 나서 상처 위에 새 약초를 덧댄 뒤 붕대를 갈았다.

“칼날이 들어가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얕게 찔린 모양입니다. 천만다행이지요. 이 정도 부상이면 한 일주일 정도면 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일주일이라?”

“흉터가 아무는 데 걸리는 시간 정도지요. 무리하면 좋을 것 없지만, 지금도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 상처가 덧나면 큰일이니, 모쪼록 안정을 취하도록 하세요.”

“…그렇군.”

의원이 뭐라고 더 떠들어 대려는 걸 자레스가 막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가 아쉬워하며 방을 나가자 자레스는 침상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그가 문득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성녀는 모두 여자인데, 남자인 그 녀석이 성녀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의심을 지우기엔 아무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이성은 필요 없는 관심을 치우라고 외쳤지만, 본능은 자꾸 아넬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를 지금까지 살아 있게 만들어 준 본능의 경고를 자레스는 무시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자레스가 곧 침상 옆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무칼라스!”

***

배를 나가기 위해 선교 쪽으로 걸어가는 의원은 새삼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불렀다.

성녀가 지배하는 이 섬에선 의원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다.

물론 성녀는 섬에 거주하는 서민이나 노예를 치료해 주지 않았지만, 그저 성녀가 사는 섬이란 이유만으로 거주민들은 성녀만 숭상하고 의원은 성녀의 찌꺼기쯤으로 취급했다.

정작 그들을 치료하는 건 의원인데도.

게다가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이 섬에서 이만큼 깊은 검상을 입은 부상자를 돌본 것 역시 그에겐 좋은 경험이 되는 일이었다.

“의원님. 나가시는 길인가요?”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돌아보니 자레스의 시중을 드는 예쁘장한 남자 노예가 뒤에 따라와 있었다.

“그렇다만, 무슨 일이냐? 할 말이 있는 표정이구나?”

“괜찮으시면 다음에 오실 때 라라나무 잎을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항해 중에 황자께서 열이 나면 쓰려고 해요.”

“오, 라라나무 잎을 아는 걸 보니 너도 의술 공부를 좀 한 모양이로구나. 카비르에선 노예에게도 그런 공부를 시키게 하나 보지?”

“…전 카비르인이 아니라 이렌시아인입니다.”

“뭐라?”

“다음에 오실 때 이 약초를 좀 구해다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넬이 무명 손수건을 내밀었고, 떠밀 듯 의원에게 그를 넘기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원, 참. 이상한 녀석일세.”

손수건에는 약초의 이름이 여럿 적혀 있었다. 힐끗 봐선 정말 약초의 명단으로 보일 목록이었다.

하지만 의원이 함선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놨을 때,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글자가 나타났다.

“도와…달라고?”

깊게 팬 의원의 눈이 눈가를 감싼 주름을 뚫을 듯이 커졌다.

***

며칠 후 또 의원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구가 들은 작은 가방이 아니라 바퀴가 달린 이상한 나무 상자를 끌고 왔다.

의원의 배를 지나 거의 가슴팍까지 닿는 높이였는데, 그걸 자레스의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의원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훈욕기올시다, 황자 전하.”

“뭐 하는 물건인가?”

“뜨거운 김을 쐐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지요. 이렌시아에선 하초에 부상을 입거나 부인병이 있는 환자에게 이 훈욕기를 써서 치료를 돕는답니다. 황자 전하께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썩 유쾌해 보이는 물건은 아니군그래.”

나무 상자 한쪽엔 손잡이로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었다. 의원이 그를 열자 상자 안이 보였는데, 바닥에 여러 개의 널이 대어져 있고 벽 쪽에는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 바닥에 불에 달군 돌을 놓아서 거기서 솟구치는 열기를 쬐는 겁니다. 발바닥이 닿으면 델 수 있으니 이 의자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셔야 합니다.”

“정말 도움이 되긴 하는 건가?”

“안 한 것보단 훨씬 나으실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전하. 곧 출항한다고 들었는데, 훈욕으로 하초의 기운을 다스려 두면 오랜 항해 기간 동안에 기운을 보하는 데도 좋을 것입니다.”

“알았다.”

그렇게 말하며 자레스가 아넬 쪽을 돌아봤다.

의원이 오기 전에 미리 들어와 대기하고 있던 아넬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주춤거렸는데, 그 모습에 또 악의와 혐오감이 함께 치솟았다.

악의는 아넬을 향한 것이었고, 혐오감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데 이번엔 악의 쪽이 이겼다.

“내 옷을 벗겨라, 파이디.”

아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랐지만, 반쯤은 예상한 듯했다.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게 자레스나 아넬이나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넬은 물러나는 대신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며칠 전처럼 그의 상의를 벗기기 위해 옷깃에 손을 대려고 하자 자레스가 비웃었다.

“훈기를 쫴야 할 곳은 아래쪽일 텐데? 위쪽만 벗겨서 뭐 하려는 거냐?”

그가 이죽거리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아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이번엔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이 벌게졌는데, 이어서 자레스가 카프탄 자락을 벗어 머리 위쪽으로 던져 버리자, 아예 붉은색을 지나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내가 벗은 걸 처음 보나?”

처음 봤다. 그래서 기절할 것 같았다.

잘 짜인 단단한 근육이 가득 찬 상반신은 아래로 갈수록 가파르게 좁아졌다.

그러다 허벅지에 이르러선 기둥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그 다리 사이에 그녀가 봐선 안 될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

시선이 거기 닿기 직전에 아넬이 얼른 눈길을 미끄러뜨렸다.

그녀가 들고 있던 수건을 떨어뜨렸고, 아넬은 그걸 주우려는 것처럼 얼른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일부러 떨어뜨렸군.’

자레스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바닥을 더듬고 있는 아넬의 목덜미가 얼룩덜룩 붉어져 있었다. 당황했다는 건 그 피부가 아니라, 휘청거리는 무릎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 놀려 볼까 싶기도 했지만, 여기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자꾸 아넬에게만 향한 이 악랄한 장난기가 불편해지기도 했기에 자레스는 훈욕기의 문을 열고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

그제야 아넬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자레스의 하체가 훈욕 통으로 가려진 걸 확인한 아넬이 간신히 시선을 들며 자레스에게 말했다.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전하.”

“아니. 내가 훈욕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아까 가져다 둔 새 옷을 갈아입히도록.”

“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눈을 감지 않는 이상 자레스의 알몸을 봐야만 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레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고, 잔혹한 웃음이 한동안 그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겉으론 태연해 보였지만, 그의 안에서 작고 색깔이 전혀 다른 감정들이 불꽃을 일으키며 충돌하고 있었다.

계속 아넬을 곁에 두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 반대로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이 섞여 들면서 복잡한 빛깔로 변하고 있어서, 스스로도 그의 마음이 어떤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게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가라. 볼일이 있으면 그때 부르겠다.”

무슨 변덕인지 갑자기 자레스가 마음을 바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넬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얼른 자리를 떴다.

“시중 노예를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황자 전하.”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의원이 느릿하게 말을 걸자, 자레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낀다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부러 놀리시는 게 꽤 호의를 가지신 듯 보였습니다. 괴롭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귀여워하는 것 같달까. 허허, 늙어서 이상한 촉이 발달한 걸까요?”

이번엔 정말로 놀랐기 때문에 자레스의 안색이 변했다.

***

훈욕은 30분쯤 뒤에 끝났다.

의원이 몰고 들어갔던 훈욕기를 끌고 나왔을 때, 아넬은 방 앞에 서 있었다.

자레스가 부르면 바로 달려가기 위해서였는데, 그 곁에는 아넬뿐만 아니라 수비병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암살자들의 기습과 부관의 배신이 있었던 후로 경비는 더 엄중해졌다.

그 와중에 의원이 아넬을 손짓해 불렀다.

“이거 바퀴가 삐그덕대는구먼.”

“사람을 불러 고쳐 드릴까요?”

“아니야. 고칠 거면 마을 공방에 가져가야지, 뱃사람들이 손댈 건 못 돼. 어쨌든 늙은이가 밀고 가기엔 힘겨우니 자네가 좀 밀어 주지 않겠나?”

“저는….”

“멀리 안 가도 되네. 요 선장실을 돌아나가는 곳까지만 밀어 줘도 돼. 요 앞길에 요철이 어찌나 많은지 말이야, 이 훈욕기를 가지고 올 때도 고생했다네.”

아넬이 경비병들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다는 뜻으로 경비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넬은 배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이 배 안에서의 움직임까지 일일이 통제할 필요는 없었다.

허락을 받은 아넬이 노인을 대신해 훈욕기의 손잡이를 밀고 굴리기 시작했다.

경비병들로부터 멀어져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을 무렵에 돌연 의원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 모퉁이를 돌 때, 잠깐 멈춰 서겠네. 그때 훈욕기 안으로 들어가게.”

“……!”

애원이 통했다. 아넬은 바로 깨달았다. 이 훈욕기를 들고 온 것 자체가 아넬을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며칠 전 의원에게 몰래 건네준 손수건에는 아넬이 이렌시아인이라는 것, 모종의 사정 때문에 자레스에게 잡혀 억지로 노예 생활을 하게 됐는데 이대로 배가 출항하면 카비르까지 끌려가야 한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의원은 아넬이 이렌시아 사람이라는 데에 흔들렸고 결국 그녀를 돕기로 결심했다. 금발에 초록빛 눈을 보니 아넬이 이렌시아인이란 건 확실했다.

출항이 바로 내일이라는 것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카비르인들이 이렌시아를 뒤지진 못한다. 하루 정도 아넬을 숨겨 두면 자레스는 포기하고 출항할 테고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될 터였다.

의원은 평화로운 나라인 이렌시아에 살다 보니 성격도 태평했다.

그는 아넬을 딱하게 여겼고, 그에 비해 그녀를 탈출시키는 데 대한 위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긴 이렌시아니 그가 보기엔 배만 빠져나가면 나머지는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의 짐작이 맞기는 맞았다.

여기는 카비르가 아니었고, 아무리 자레스가 황자라 해도 카비르 군이 이렌시아에서 노예 하나 찾겠다고 말썽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노예가 이렌시아 출신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안 들어가고, 뭐하나? 응? 이대로 카비르로 끌려갈 셈이야?”

의원이 재촉하자 아넬이 복잡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짧은 인사 후에 아넬이 재빨리 훈욕기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다행히 모퉁이를 돈 뒤였기 때문에 자레스의 방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했다.

반대로 선창과 연결된 다리 쪽을 지키는 병사들 역시 훈욕기가 가리는 바람에 아넬이 그리로 들어가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의원은 아넬을 태운 훈욕기를 밀며 태연히 다리 쪽으로 향했다.

“여어, 날씨가 좋구려.”

선창 쪽이 가까워지자 경비병의 수가 더 많아졌다. 훈욕기가 무겁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수레를 밀면서 의원은 일부러 경비병에게 농담을 걸었다.

“카비르는 이 이렌시아만큼 날씨가 좋지 않지요? 여긴 가끔 비도 오고, 겨울이 되면 춥고 그렇다오. 사계절은 메타께서 베푼 은총이지요.”

“우리 카비르는 워낙 완벽해서 추운 겨울 같은 건 필요 없소.”

경비병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기분 나쁜 나머지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리는 걸 보면서 의원은 일부러 더 크게 웃었다.

다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뱃전엔 사람들이 편하게 오가도록 판자를 대서 경사로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동산처럼 뾰족하게 솟은 뱃전을 향해 의원이 훈욕기를 몰고 갔지만, 경비들은 올 때도 가지고 들어온 물건이기에 아무도 그를 검사하려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의원에게 시선을 두는 자도 없었다. 의원은 자레스를 치료하기 위해 부른 인물이기 때문에 들어올 때야 위험할지 몰라도 나갈 때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한가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훈욕기를 밀고 선창으로 이어진 다리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도 아무도 그 앞을 막지 않았다.

“거기 의자. 잠깐 기다리라.”

뭉툭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은 건 그때였다.

선뜩한 나머지 뻣뻣해진 몸을 천천히 뒤로 돌리자 바로 지척에 무칼라스가 따라와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부리부리한 다갈색 눈이 훈욕기에 닿아 있었다.

“훈제기를 어디로 가져가나?”

“후, 훈욕기 말입니까? 쓸모를 다했기 때문에 도로 가져가려는 참입니다만.”

“안을 보여라.”

“네?”

“조사할 것이 있다. 문을 닫고 안을 보여라.”

“문을 열라는 말이십니까? 아, 아니,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제가 뭘 했다고요?”

의원이 당황해 말을 더듬는 사이, 훈욕기 안에 숨어 있던 아넬은 일이 어그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레스가 이미 눈치챈 것이었다. 어쩌면 의원에게 접근한 그날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결론을 내린 순간, 아넬은 그대로 훈욕기 문을 밀쳐 열면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어엇!”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바로 앞에 서 있던 의원이 문에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다.

“죄송합니다!”

이젠 더 숨길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빠져나가는 게 급했다. 선창으로 달아나서 경비대로 뛰어갈 것이다.

그리고 의원이 카비르 병사에게 잡혀 있으니 구해 달라고 청하자.

무칼라스가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의 부름에 뱃전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다리 쪽을 막았다.

하지만 아넬의 목표는 애초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다리 쪽이 아니었다. 몸놀림이 가벼운 아넬은 창대로 쳐 내려는 병사들의 몸짓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뱃전 쪽으로 달려갔다.

아넬이 뱃전을 기어 올라갔다. 서툰 동작이었지만 그래도 병사들보단 빨랐다. 아넬은 그대로 눈을 질끈 감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 찰나, 단단한 팔뚝이 튀어나오며 아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꺄아악!”

뛰어내리려던 아넬은 그대로 끌어내려져 갑판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와 함께 살기 서린 칼끝이 아넬의 목덜미를 겨눴다.

“전…하.”

칼자루를 쥔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아넬이 작게 속삭였다.

끝났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 거란 걸, 무시무시한 자레스의 눈길이 말하고 있었다. 그가 눈에서 불길을 쏟아 내며 낮게 외쳤다.

“도망이 습관인가, 파이디?”

무칼라스가 달려와 환도를 꺼내 들었다. 다른 병사들 역시 쫓아와 창끝을 그녀에게 겨눴기에, 아넬은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날랜 남자였어도 불가능했을 텐데, 그녀는 신전에서만 자란 연약한 여자였다.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한 거였다.

오직 운명을 바꿔 보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버텼는데, 이제는 희망이 없었다.

온몸에 맥이 풀리면서 아넬은 쓰러진 채로 눈물을 흘렸다.

“도망 노예는 잡히면 즉결 처형된다는 건 알고 있지? 이렌시아 역시 노예법은 똑같을 텐데?”

“나는 이렌시아의 노예지 카비르의 노예가 아닙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자레스에게서 도망칠 생각만 했다. 잠시나마 자레스가 죽으면 세계의 멸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사고의 방향을 바꿔도 결과는 같았다.

‘자레스 황자 대신 내가 죽으면 되지 않을까?’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만날 운명이라면, 어느 한쪽이 죽으면 된다. 그리고 그게 자레스가 아니라 그녀여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 결론을 내렸으면 좋았을걸. 부질없는 시도를 했다 싶어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죽어도 이렌시아에서 죽겠습니다.”

아넬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자레스의 칼 앞에 목을 늘였다.

너무 지친 나머지 이제는 이대로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러는 순간에도 메타가 나타나 힘을 행하지 않는 걸 보면, 아넬의 죽음으로써 운명을 거스르는 게 메타의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넬은 처연히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오히려 그 순간 망설인 건 자레스였다.

아넬이 태연하게 목을 내민 그때 되레 자레스가 흔들렸다.

머리로는 당연히 즉결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망 노예를 죽이는 건 주인의 권리였고, 노예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도 최대한 잔인하게 처분해야 했다.

괜히 살려 뒀다 이렌시아인을 카비르로 끌고 간다고 소문이 나서 외교 문제로 비화가 되느니, 죽이는 게 더 편했다.

어차피 수색대장이 병든 아넬을 본 바 있으니 병이 더 깊어져서 죽었다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손에 쥔 칼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죽여야 된다는 본능이 앞섰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어떤 직감이 강하게 그의 팔을 짓눌렀다.

이성과 본능이 화산과 얼음처럼 싸워 댔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눈앞에서 보이는 것 같았다. 불을 품은 거대한 섬이 얼어붙은 바다를 갈랐다. 마치 대륙이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빙원을 가르고, 앞을 막아선 불가역의 바다를 가르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끝까지 치달았다.

이 질주를 막을 수 없었다.

뜨거운 본능이 이성을 불태웠고, 마침내 자레스는 떨리는 칼끝을 들어 아래를 향해 찍어 내렸다.

쩌억.

갑판을 채운 바닥 널이 자레스의 칼끝에 갈라졌다. 아슬아슬하게 칼끝을 피한 아넬이 영문을 몰라서 감은 눈을 치떴다.

“이놈을 가둬라.”

햇빛이 너무 셌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레스의 얼굴은 역광에 가려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묵직한 목소리만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시는 내 눈앞에 보이는 일이 없게 하도록.”

그 말만 남긴 채 자레스는 휙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아넬은 무칼라스와 경비병들에게 끌려 원래 가둬졌던 배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갔다.

끌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원 쪽을 돌아봤는데, 다행히 의원은 훈욕기를 뺏기긴 했지만 그대로 배 밖으로 쫓겨나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가 무사한 것 하나는 위안이 됐다.

아넬은 그렇게 감옥에 가둬졌고, 배는 그 즉시 카비르로 출항했다.

***

아넬은 묵묵히 끌려갔다.

자레스가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지도 않았다.

정작 혼란에 사로잡힌 건 자레스였다. 아넬을 가두라고 명령한 뒤, 그는 무칼라스와 다른 참모들을 모두 물리치고 제 방에 틀어박혔다.

편두통이 밀려왔다.

그게 물리적인 고통이라기보다는 좌절로 인한 것이란 걸 자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죽였어야 했다.’

예전 같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목을 잘랐을 것이다.

도망 노예를 즉결 처형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살려 주고 감옥에 가두게 했다. 그런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이미 기강이 심하게 해이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것보다 그의 내부를 사로잡은 혼란이 너무 커서 그것이 자레스를 압도했다.

필요를 알면서도 죽이지 못했다.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아넬을 제 손으로 죽일 자신도 없었고, 그녀가 죽는 걸 눈앞에서 볼 수도 없었다. 그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토록 무력해졌다는 게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그토록 그를 흔들어 놓은 아넬이 두려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큰 혼란이 그를 덮쳤다.

아넬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고작 어린 노예가 그의 칼을 막았고, 그를 자기 불신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자레스는 다른 무엇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아넬이 사내 노예가 아니라 여자였어도, 아마 자레스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황위를 제외한 그 무엇도 그를 흔들어선 안 됐다. 야망이 아닌 것이 그를 채워선 안 됐다.

그런데 그가 외면하고 있던 낯선 감정이 그를 덮쳤다.

그건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었기에 자레스도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연민과 그보다 더 진한 감정 사이에 놓인 어떤 것.

자레스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은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차라리 이렌시아에 남겨 놓고 오는 게 나았을까?’

뒤늦게 자레스가 후회했지만, 이미 배는 카비르를 향해 출발한 뒤였다.

이제는 죽여서 바다로 던져 버리거나 아니면 카비르로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자레스는 이미 그 문제를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방법이 없었다.

언제나 눈앞에 닥치는 위기를 타 넘고, 정면 돌파하면서 성장해 왔다. 하지만 내면의 위협이 자신을 붕괴시킨 건 처음이었다.

난생처음 겪는 좌절에 자레스는 허망한 눈으로 어느새 자신을 감싼 어둠을 바라봤다.

문득 그 어둠이 어린 시절 곧잘 갇히곤 했던 지하 감옥의 그것과 닮았다는 걸, 자레스는 깨달았다.

다시는 그 어둠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제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비참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아넬은 그의 힘을 빼앗는 어둠이었고, 과거였고, 처참한 미래였다.

이마를 짚은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는 결정을 내렸고, 곧 설렁줄을 잡아당겨 무칼라스를 불렀다.

그가 나타나자, 자레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무칼라스에게 명령했다.

“마르파 항구에 기착한다. 거기서 새 용병과 새 배를 구할 것이다.”

“명을 따른다.”

“그리고 또 하나.”

“네, 전하. 말하라.”

“…마르파에 큰 노예 시장이 있는 거로 안다. 노예 파이디를 그 시장에 넘기도록.”

***

배가 멈췄다.

수부들이 노 젓는 소리가 멈췄지만, 한동안 배는 노질 없이도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해수면을 가르며 나아갔다.

배 밑바닥에 갇혀 있어도 배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 배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배 아래에 묵직한 무게가 걸렸다.

하도 오랫동안 배 밑바닥에 갇혀 있었기에, 아넬은 지금 그녀가 내린 결론이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배의 움직임이 멈췄기에, 아넬은 곧 배가 어느 항구에 기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추측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뚜껑 문이 열리면서 경비병 하나가 빠끔히 열린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나와라, 파이디.”

상갑판으로 끌려 나온 아넬은 갑자기 눈을 찌르는 햇빛이 부담스러워 눈을 찌푸렸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시간의 흐름을 알 수가 없었다.

갑판에 나와 있는 일부 병사들의 수염이 더 길어진 것을 보니, 대략 열흘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뭘 두리번거리고 있는 거냐. 걸어라!”

병사 한 명이 그녀를 창대 끝으로 미는 바람에 아넬은 비틀거리며 밀리는 방향으로 걸었다. 자신이 선창과 배를 잇는 다리 쪽으로 밀려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아넬이 눈을 크게 떴다.

“내리…는 겁니까?”

그토록 원하던 하선이었는데 지금은 불안했다.

자레스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풀어 주거나 죽이거나, 어떤 짓을 하든 자레스가 명을 내릴 거라 생각했는데, 심지어 무칼라스조차 주변에 없었다.

얼결에 선창에 도착하자 거기 기다리고 있던 빨간 수염을 기른 남자가 아넬 쪽으로 다가왔다.

“이렌시아에서 카비르로 돌아가는 배가 맞는지요?”

“맞다. 그대가 투칸인가?”

“그러합니다. 전하의 노예를 맡게 되어, 영광이올시다.”

불길한 예감이 더욱 짙어졌다. 아넬의 몸을 위아래로 훑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투칸의 시선이 한층 능글맞아졌다.

“예쁜 아이로군요.”

투칸이 손을 비비며 계속 물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요?”

“올해 열다섯이다.”

“음, 그 나이치고는 너무 허약해 보이는군요. 하지만, 뭐 이런 취향을 가진 손님도 많으니까, 얼굴만 예쁘면 오히려 꽤 높은 값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몇 푼을 받든 그대가 알아서 하라. 우리는 이 녀석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다.”

그제야 아넬은 무슨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챘다.

그녀는 자레스가 아닌 다른 주인에게 팔린 것이었다.

“새 주인을 만나면, 황자 전하께서 얼마나 관대한 주인인지 알게 될 거다. 시건방진 노예 새끼야.”

병사가 욕설을 내뱉었고 투칸이란 자에게 그녀를 넘기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러자 투칸이 싱글벙글 웃으며 아넬의 손목을 낚아챘다.

“경매에 내놓으면 못해도 금화 열 닢은 받을 수 있겠군.”

아득한 절망이 그녀를 덮쳤다.

자레스를 떠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이건 그녀가 예상한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신의 운명이 자레스의 손에 좌우될 수 있다는 걸 예측하지 못한 게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녀는 진짜 노예가 아니었기에, 주인인 자레스가 그녀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걸 몰랐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에포메니가 노예로 팔려 가게 되다니.’

하지만 그녀가 자처한 운명이었다.

신전을 빠져나온 후 두 번째로, 아넬은 정말로 죽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번엔 그럴 수도 없었다.

아넬은 투칸의 수하들에게 끌려 쇠사슬에 묶였고, 혀를 깨물어 자진하지 못하도록 재갈까지 채워졌다.

그렇게 아넬은 노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며칠 후, 노예 시장으로 끌려 나갔다.

***

노예 시장은 항구에서 가까운 광장에서 열렸다.

광장의 윗머리쯤에 나무로 만든 단이 여러 개 있었고, 동시에 서너 명의 노예들이 그 단 위에 올라가 구경거리가 됐다.

여자 노예들과 힘센 사내 노예들은 이미 아침나절에 열린 경매에서 팔려 나갔고, 아넬은 마지막으로 단 위에 끌려 올라갔다.

아넬이 포함된 노예들은 모두 그녀보다 어린아이들이었다.

피부색이 다양한 소년들이 단상 위에 올라가자, 노예를 사러 온 자들이 마치 품종 좋은 짐승을 고르는 듯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었다.

“아와드에서 온 어린 노예입니다. 아주 부지런하고 힘센 사내로 성장할 겁니다. 투자하는 셈 치고 미리 사 두십시오!”

쌍둥이인 두 명의 어린아이를 앞에 세운 투칸이 목청을 높이며 아이들의 가치를 높였다.

몇 명이 흥미를 보였지만, 아이들이 너무 어린 탓에 밥값만 더 들 것 같다며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칸은 속이 탔다. 그 뒤로 몇 명을 더 올려 보냈지만, 투칸이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헐값에 팔리거나 아니면 아예 팔리지 않았다.

이제 아넬에게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투칸이 직접 아넬을 단상으로 끌고 올라가서 그녀를 사람들 앞에 세우고 외쳤다.

“이렌시아에서 온 노예입니다. 이 근방에서는 구하기 힘든 녀석입니다!”

이번엔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마르파는 이렌시아와 카비르 사이에 있는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양한 대륙,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미에 대한 기준은 어느 정도 일관적이었기 때문에, 단상에 올라온 아넬의 외모에 모두 관심을 기울였다.

“몸집은 작지만 얼굴이 아주 예쁘장하지요. 낮에 쓰는 힘은 부실할지 몰라도, 침대를 데우는 일은 아주 잘할 거예요. 이쪽 취향을 즐기시는 분에게는 안성맞춤입니다!”

노골적인 말에 아넬이 얼굴을 붉혔지만, 손님들은 그의 농담 섞인 진담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카비르인과 피부가 하얀 타네시인 하나가 아넬을 위아래로 쭉 훑어봤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금화 한 닢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투칸은 자신이 있었다. 배짱 좋게 높은 가격을 제시하자, 곧바로 타네시인 하나가 외쳤다.

“다섯 닢!”

지금까지 판 다른 노예들을 다 합한 것보다 높은 값이었다. 투칸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가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투칸은 은근히 카비르인 쪽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더 내실 분 없습니까? 이놈은 이렌시아에서도 신전 노예로 일하던 놈입니다. 신전 노예를 품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오호, 신전 노예라?”

신전 노예가 시장에 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죄를 지어서 쫓겨난 게 아니면 시장에 나오질 않았는데, 그런 노예라 하니 카비르인은 물론이고 다른 자들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투칸은 더욱더 신이 났다.

“이놈의 얼굴을 보십시오. 여자처럼 곱상하지 않습니까? 이놈을 성녀님 대신으로…, 아니올시다. 성녀님은 이미 나이가 들었으니, 후계자인 에포메니라 상상을 하고 안아도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는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으하하하. 상상력이 풍부한 자로구나.”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진짜 에포메니인 아넬로서는 끔찍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노릇이었다.

자신이 진짜 에포메니인 걸 알면 저자가 어떤 얼굴을 할지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했다.

차라리 에포메니인 걸 밝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꼼짝없이 신전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면 언젠가 자레스를 만나게 될 터였다.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에포메니인 걸 밝혔다가 세계의 멸망을 맞게 될 것인가.

그녀의 인생과 세계의 파멸 앞에서 아넬은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금화 열 닢 내겠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몸값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더 올리고 있었고, 급기야 금화 스무 닢까지 올라갔다.

아넬은 깜짝 놀라서 막 손을 든 타네시인을 쳐다봤다.

“스무 닢! 더 내실 분 없습니까?”

금화 스무 닢이면 그럴듯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는지, 더 값을 올리는 자가 없었고 마지막 몸값을 제시한 타네시인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투칸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놈의 몸을 좀 보십시오. 비록 그을렸지만 피부가 아주 곱고 허리는 야들야들합니다. 이렌시아의 노예라 사내 녀석도 고운 게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투칸이 아넬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상의가 찢겨져 나가면서 아넬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참으로 빈약하구만!”

누군가 외쳤다. 이미 자레스 앞에서 옷이 벗겨진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몸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진짜 노예도 아니었고, 진짜 사내도 아니었다. 아직 성징이 덜 드러났을 뿐, 여자였다. 심지어 성녀의 후계자로 자라났기에 모욕을 당해 본 적도 없었다.

너무나 지독한 수치심에 아넬은 기절할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투칸은 아넬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노예를 벌거벗겨 전시하는 건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었다.

노예는 짐승이자 상품이었고, 상품의 상태를 확인해 주는 건 판매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이번엔 하체를 보겠습니다. 깔고 눕는 게 아니라, 깔리는 걸 좋아하시는 쪽이라면 하초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인 와중에도 아넬이 그를 막으려 버둥거렸다. 바지까지 찢겨 나가면 아넬이 여자인 게 들통 난다.

발각 이전에 그런 수모까지 견딜 수는 없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군중 속에서 터번을 두른 남자가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마흔다섯 닢 내겠소!”

“오오!”

갑자기 몸값이 배로 올라갔다. 사람들도 깜짝 놀라 값을 부른 자를 쳐다봤는데, 아넬은 문득 손을 든 사내의 얼굴이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 역시 아넬이 자신을 알아봤다는 걸 알아챘는지, 히죽 웃었다.

‘죽은 게 아니었나?’

암살자들의 기습이 있었을 때 사라진 호위병이었다. 살해당해서 물에 던져진 거로 알았는데 살아 있었다.

아넬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는 동안 투칸은 다시 한번 목청을 돋우며 고객을 불렀다.

“마흔다섯 닢! 더 내실 분 없습니까? 이 노예의 가치를 알아보는 분이 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값을 높이는 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만하면 이익을 볼 만큼 봤기에, 투칸은 손을 비비며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마흔다섯 닢에 팔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님!”

***

아넬은 손을 묶인 채 마치 짐승처럼 끌려서 항구로 향했다.

항구 근처엔 선원들을 상대하는 선술집과 바닷바람에 삭은 낡은 집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복잡한 골목길을 빙빙 돌자 아넬은 곧 방향 감각을 잃었고, 이곳이 항구 근처 어디쯤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됐다.

그러다 골목의 끝에서 낡은 창고 하나가 나타났다. 한때는 자레스의 호위병이었던 자는 아넬을 끌고 그 창고의 문을 두드렸다.

세 번을 두드리고, 이어서 두 번, 두 번을 나눠서 치는 걸 보니 암호인 것 같았다. 신원을 확인했는지 곧 창고 문이 열렸고, 아넬은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건 또 뭐야.”

창고는 겉은 낡았지만 안은 그렇지 않았다.

벽마다 짐승의 모피를 걸어서 외풍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았고, 바닥에도 두툼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의 끝에는 표범 가죽을 깐 고급스러운 장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의자에 한눈에 봐도 신분이 높은 걸 알 수 있는 사내가 몸을 길게 늘인 채 앉아 있었다.

“황자 전하.”

호위병이 무릎을 꿇고 절했다. 아넬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서서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그러자 황자라 불린 자가 천천히 일어나 아넬 쪽으로 다가와 섰다.

카비르어를 쓰는 걸 보니 이자 역시 카비르인이다. 그런데 황자라니.

‘자레스의 형제인가?’

바로 그런 추측이 떠올랐다. 자레스에게는 현재 장황자인 유가 외에도 이복형제와 남매가 수없이 많다.

그리고 하나같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황녀는 몰라도 황자라면 자레스와 황위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일 게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유가 말고도 그 황자들이 자레스의 수하들 사이에 침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호위병도 그런 첩자들 중 하나였을 터다.

“노예인가?”

“네, 전하. 충분히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사 왔습니다.”

“내가 하찮은 노예나 사 오라고 자금을 내준 건 아닌데? 이봐, 마카르. 나는 뭐 황금을 바다에서 퍼 올리는 줄 아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일리파스 전하.”

6황자 일리파스는 성질이 매우 급했다.

단순해서 다루기 쉬운 건 좋았지만, 한번 흥분하면 말리기도 어렵다. 이상한 오해를 하기 전에 얼른 이유를 알려 주는 게 나았다.

“자레스 황자가 곁에 두고 아끼던 노예입니다. 노예 시장에 나왔기에 알아보고 사 온 것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일리파스의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제야 아넬을 유심히 들여다봤는데 그 눈은 특이하게도 금색을 띤 갈색이었다.

머리카락 역시 금발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갈색 머리였는데, 그에 비해 어두운 피부색 때문에 머리카락과 눈 색깔이 더 눈에 띄었다.

자레스처럼 키가 무척 컸지만, 어깨는 더 넓어서 마치 커다란 벽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넬은 다른 의미로 그에게 위압감을 느꼈다.

“유가의 기습이 있었을 적에, 이 노예가 영원의 불을 던져서 놈들을 퇴치했습니다. 똑똑한 놈이니 곁에 두면 써먹을 구석이 있을 겁니다.”

“노예가 똑똑해서 뭐 하게?”

“하지만 자레스 황자의 약점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배 안에 남겨 놓은 첩자를 통해 보고받은 건데, 이놈이 무려 배에서 도망을 치려다가 황자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도 황자가 즉결 처형을 하지 않고 그냥 팔아 치웠다 합니다.”

“그놈의 성격에 죽이지 않고 팔기만 했다? 노예에게 그만한 자비를 베풀다니, 이거 카비르 제국이 망할 징조로군.”

“그만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마카르가 히죽 웃었고, 뜻을 알아들은 일리파스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데리고 있으면 자레스 황자의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카비르로 끌고 가 보지요.”

“괜히 밥만 축내는 게 아닐까?”

“상관없습니다. 이만한 얼굴이면 황녀님이나, 다른 황자에게 바쳐도 뇌물로서 충분합니다. 어쨌든 금화 쉰 닢 정도의 가치는 할 것입니다.”

이미 일리파스가 넘어온 걸 안 마카르가 어느새 값을 불려 이득을 가로챘다.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기에, 일리파스는 턱 끝을 쓸며 아넬을 들여다봤다.

“자레스의 약점이라….”

“화, 황자 전하.”

애원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다면 써먹어 볼 만하지. 카비르로 끌고 가면 더 높은 값에 다른 황자에게 넘길 수도 있겠다. 안 되면 유가 형님한테 떠넘겨도 좋고. 그 뱀 같은 놈이라면 나보다 이 녀석을 더 잘 써먹을 수 있겠지.”

“맞습니다, 전하.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좋다.”

아넬의 의사는 아무 힘이 없었다. 에포메니인 걸 밝힐 수 없는 이상, 그녀는 노예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일리파스가 그녀의 생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 나침반의 바늘은 다시 한번 카비르와 자레스를 향해 있었다.

“이놈을 카비르로 데리고 간다!”

이 지긋지긋한 운명의 장난에 아넬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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