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레스의 방에서 나온 아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늘은 안전하니 다행이지만 자꾸 자레스에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신경쓰였다.
이런 식으로 굴면 누구라도 의심할 것이다.
몸은 남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하는 짓은 여자다. 아무리 감추려 해 봤자 자연스럽게 들통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이면 나는 여기 없을 테니까….’
탈출이 성공할 거라고, 그래서 자레스와는 헤어지게 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시 붙잡혀 신전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꾸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바꾸기 위해선 하루라도 빨리 자레스에게서 도망쳐야만 했다.
문득 상갑판 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방을 돌아 뱃머리 쪽으로 가자, 이윽고 거기에 여러 명의 병사와 선원들이 모여서 술과 음식을 나눠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얼핏 경계가 느슨한 것 같아 보였지만, 뱃전에는 여전히 서너 명의 병사들이 서서 감시의 눈길을 뿌리고 있었다.
특히 부두와 연결된 쪽에는 네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 있어서, 부두 쪽으로는 나갈 엄두도 못 내게 막고 있었다.
“여어, 파이디!”
방울 소리를 들은 병사들 몇몇이 아넬 쪽을 돌아봤다. 그들에게 아넬은 별 볼 일 없는 노예 소년일 뿐이었기에 별달리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실 아넬만 탈출이 절실했을 뿐, 병사나 선원들은 아넬이 도망을 치든 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와서 한잔 들어! 귀향 기념이다!”
“아뇨.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아, 아직 어려서 그런가? 카비르에선 어리거나 늙거나 마시고 싶으면 마신다만, 이렌시아는 성녀님의 땅이라서 역시 다른가 보지?”
선원들이 킬킬거리고 웃어 댔다. 성녀를 두고 저속한 농담 몇 마디가 오고 가다가 문득 대화의 화살이 아넬에게로 돌아왔다.
“저 녀석도 크면 잘생겨지긴 할 거야. 몸은 빈약하지만 그래도 얼굴은 예쁘장하잖아?”
“아니, 잘생기기보단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사내 녀석이 예뻐 봤자 뭐해? 오히려 비참하게 살 가능성만 높아진다고. 우리 황자님만 해도 말이야….”
“아, 쉿!”
화제가 위험한 쪽으로 흐르자 나이 많은 선원 한 명이 재빨리 주의를 줬다.
시선을 돌려보니 뱃전에 선 병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입에 올리면 안 되는 화제인 게 분명했는데, 아넬은 그게 뭔지 짐작이 갔다.
노예 출신 황자.
그런데 아름답기까지 했다면 어떤 일을 당했을지 뻔했다. 신전 노예는 노예 중에서도 대접을 잘 받는 쪽에 속하기에 아넬은 신전 밖 노예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몰랐다.
하지만 선원들의 대화가 맞다면…. 자레스는 아마 그녀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처참하게 살았을 것이다.
불현듯 동정심이 불쑥 일어났지만, 아넬은 낯선 감정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가 어떤 과거를 지녔든, 그가 미래에 아넬에게 저지를 짓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한다.
아넬을 거침없이 유린해 오던 그는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그의 밑에서 아넬은 성녀도 신의 대리자도 아니었다. 그저 힘없는 여자였고, 약하기에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손쉬운 먹이였다.
그날을 떠올리자 몸에 새겨진 고통과 함께 분노가 스미듯 치솟아 올라왔다.
‘만나선 안 되는 운명이었어.’
아넬은 선원들의 침소로 내려가는 척, 뚜껑 문을 열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침소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내일이 출항이니, 한동안 못 누릴 유희를 위해 부두를 헤매고 있으리라.
아넬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곧 앞섶에 넣어 뒀던 포도알을 꺼냈다.
투명한 속살 안에는 서너 개의 작은 씨앗이 들어 있었다. 아넬은 포도알에서 씨앗을 발라낸 뒤, 그 작은 씨앗을 목에 채워진 자물쇠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포도 씨앗에 성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라나라!’
모든 생명을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로 되돌리거나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성력의 근본이다.
이미 상처 난 생명을 되돌리는 데는 많은 힘이 들지만, 식물처럼 외부의 손길에 의해 쉽게 생명력이 조정되는 것을 성장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힘을 집중하자 곧 밀어 넣은 씨앗 안에서 포도 덩굴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작고 여리지만 기어코 바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힘을 더욱 가하자 곧 덩굴이 굵은 나뭇가지로 바뀌면서 자물쇠를 부수며 튀어나왔다.
쇳덩어리가 비틀리는 약한 소음과 함께 자물쇠가 떨어져 나갔다.
‘됐다!’
단단한 자물쇠였지만 생각보다 쉽게 부서졌다. 자물쇠를 떼어 내자 방울 달린 줄이 풀렸고, 아넬은 그 줄을 한구석에 치워 둔 채 살금살금 뱃전으로 기어갔다.
병사들은 여전히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한 부두로 연결된 다리로 튀어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역시 바다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물소리가 나면 바로 쫓아오겠지?’
아넬은 주변을 돌아봤다. 화물칸으로 내려가면 짐을 묶는 밧줄들이 있었다.
선원들의 처소로 내려가는 뚜껑 문 옆에 난간이 붙어 있으니 밧줄을 거기다 묶고 자신의 몸을 연결한 뒤 난간을 넘어가면 될 것 같았다.
수면에 다다라서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으리라.
아넬은 그렇게 작정하며 뱃전으로 다가갔고, 수면 위로 솟은 배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넬의 눈이 커졌다.
배의 아래쪽에 시커먼 형체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형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배의 뒷부분에도 새카만 형체가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것들이 곧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넬이 발견한 그림자도 그랬다. 그것이 잽싸게 기어 올라오더니 곧바로 뱃전을 타 넘으며 갑판 위로 뛰어내렸다.
자레스가 신전에 잠입할 때처럼 새카만 옷으로 몸을 가린 자였다.
“누구….”
아넬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그자가 허리에 찬 칼을 빼 들더니 아넬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
성력을 집중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건 처음이었기에 아넬은 일단 몸부터 굳었다.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던 아넬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잠입자가 그런 아넬을 향해 칼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커억!”
아넬을 공격하느라 전방이 비어 있던 잠입자는 그대로 칼날을 맞았다. 목과 어깨 사이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그가 쓰러졌다.
“허, 어어어어…?”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뒤로 젖히자 대체 언제 나타난 건지, 그녀의 뒤에 자레스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환도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핏방울이 아넬의 이마 위로 떨어지면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갑자기 소름이 확 끼쳤다.
막 비명을 지를 찰나, 뱃전에 올라온 서너 명의 잠입자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그들이 노리는 상대가 누군지는 안 물어봐도 뻔했다.
자레스 역시 짐작했는지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냈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레스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물어볼 것도 없겠군. 유가지?”
유가 황자. 사실상 유력한 황태자 후보이며 차대 카비르 황제라 간주되는 남자.
그 황자는 황태자가 된 뒤 결국 자레스에게 제거될 테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넬이 신전을 빠져나오고, 도망치는 대신 자레스를 만나면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상한 곳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가 틀어 버린 그 흐름 속에 유가도 들어 있는 걸까? 대체 무엇이 얼마나 변한 걸까.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변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갑자기 머릿속이 엉키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침입자다!”
뱃머리와 선교(船橋. 배의 상갑판에 있는 선루나 갑판실 위로 한층 높게 위치한 구조물. 선장이 지휘하는 장소) 쪽에 있던 경비병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수로 밀리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바다 쪽으로 면한 뱃전 쪽에서도 침입자들이 올라오고 있었고, 순식간에 머릿수가 바뀌었다.
갑판은 순식간에 검은 옷을 걸친 자객들로 뒤덮였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자가 덤벼들었다. 자레스가 아넬을 발로 차 자빠뜨리면서 그를 향해 달려갔다.
횡으로 휘두르는 칼날을 피하면서 그의 배에 칼을 찔러 넣자 자객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두 번째, 세 번째 자객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두 자객은 일부러 시간차를 두고 검을 휘둘렀는데, 한 명을 막아 낸다 해도 다른 한 명이 덮칠 터였다.
그런데 위험한 그 순간, 자레스가 허리춤에서 검 하나를 더 빼 들었다.
‘양손잡이?’
놀란 아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자레스의 허리에 감아 놓은 두꺼운 천 안쪽에 짧은 검 하나가 더 들어 있었다.
자레스가 긴 검으로 오른쪽으로 덤벼드는 자객의 칼을 막아 냈고, 왼손으로는 아직 공격 태세를 갖추지 못한 왼쪽 자객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아악!”
두 번째 사내가 쓰러지자 이번엔 오른쪽 자객에게 발길질을 해서 그를 떨어뜨렸다. 그가 자빠지는 것과 동시에 자레스의 칼이 그의 배를 쑤시고 들어갔다.
모든 일이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고 빠르게 일어났다. 아넬은 그저 커다랗게 뜬 눈으로 자레스가 밀려오는 적들을 차례로 베고, 찌르고, 자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실로 가공할 전투력이었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자객들이 쓰러졌고, 자레스는 침입자들이 흘린 피를 뒤집어쓴 채 힐끔, 아넬을 돌아봤다.
그의 모습이 마치 투귀처럼 보였다. 비슷한 상태로 성탑으로 쳐들어왔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자레스는 그때 품었던 살기의 양이 전혀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베어 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무서운 살의가 몸 전체에 후광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레스 님!”
그때 부관이 달려왔다.
흘끗 돌아보니 이미 갑판 여기저기서 자객들과 경비병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1 대 2거나 2 대 1, 또는 다수와 소수가 붙어 어지러운 난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당장 자레스를 도와주러 올 사람이 부관 말고는 없었다.
“내 뒤에서 싸워라.”
자레스는 그에게 기꺼이 등을 내줬다. 부관이 그의 뒤에 서며 칼을 빼 들었고, 곧 쇄도해 오는 적을 향해 칼을 질러 넣었다.
자레스의 전투력이 더 뛰어났지만 부관의 검 실력도 상당했다. 자레스가 한꺼번에 둘을 상대하는 동안 부관 역시 달려드는 적들을 족족 베어 냈다.
두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어지럽게 칼을 휘둘렀고, 두 사람은 가끔씩 방향을 바꿔 가며 서로의 적들을 상대하기까지 했다.
삽시간에 주변을 둘러싼 적들 대부분이 쓰러졌으며, 자레스는 부관 덕에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칼에 묻은 살점과 피들을 닦아 낼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자레스나 카비르 병사들 모두 침입자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노예 하나쯤 사라져도 모를 것이다. 어디서 칼에 맞아 바다에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겠지.
겨우 숨 한 번 돌릴 정도의 시간, 자레스와 부관이 계속해서 이어질 전투를 위해 잠시 태세를 정비하는 동안 아넬은 엉덩이를 물리며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물러났다.
그때였다. 갑자기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 일어난 일은 자레스가 아넬이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어느새 멀어진 아넬을 발견한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간, 이번엔 아넬의 눈에 자레스의 등 뒤에 서 있던 부관이 그를 향해 돌아서는 게 보였다.
부관이 칼을 반대 방향으로 잡았다. 적이 아니라 자레스를 겨눈 것이었다. 그를 발견한 아넬의 눈이 커지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자레스가 재빨리 옆으로 몸을 젖혔다.
하지만 부관의 기습이 한발 더 빨랐다. 자레스가 피했지만, 그의 칼이 자레스의 척추를 뚫으며 깊이 박혔다.
“크아아악!”
끔찍한 통증이 자레스를 덮쳤다. 날카로운 칼이 그의 왼쪽 등을 쑤시고 들어가며 그의 내장을 동강 냈다.
즉사는 면했지만, 죽음에 준하는 부상이었다. 자레스가 부관의 칼을 등에 꽂은 채로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네가….”
배신이다. 언제부터 유가의 영향력이 자레스의 휘하 안까지 스며든 걸까. 자신의 부족함에 어이가 없고, 부관만은 믿었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정신이 아찔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부관이 그렇게 말하며 자레스의 등에 꽂힌 칼을 빼냈다. 이번에야말로 심장을 찔러 한 번에 죽이기 위해 그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넬이 그 사이로 끼어든 것은 순전히 본능이었다. 어떤 계산을 할 새도 없이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마침 그녀의 근처에 아까 자레스가 쓰러뜨렸던 자객이 있었고, 그의 손 근처에 단검이 떨어져 있었다.
아넬이 그 단검을 집어 들고는 고함을 지르며 부관을 향해 던졌다.
물론 그녀가 던진 단검은 부관에게 제대로 맞지 못했다. 부관은 손쉽게 날아오는 단검을 쳐 냈고, 그제야 아넬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그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넬이 저지른 짓은 부관에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자레스에겐 찰나의 틈을 벌어 줬다.
그 짧은 순간 자레스가 초인적인 힘으로 부관의 발등을 검으로 찍었다.
“어어어억!”
부관이 발등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자레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횡으로 그었다.
부관의 다리가 두 동강이 났다. 전투에서 짧은 방심은 큰 후환으로 돌아온다. 부관은 자레스가 다 죽어 간다 생각했으나, 그는 괴물 같은 힘을 발휘해 부관을 쓰러뜨리고야 말았다.
자레스가 배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났다. 부관은 두 다리를 잘리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통증이 지독한지 이미 기절한 뒤였다.
자레스는 이겨 낸 것을 부관은 감히 감당하지 못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자레스가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부관을 해치우긴 했으나 그 역시 부상이 너무 컸다.
부관의 칼이 복부를 뚫었고, 그 칼을 비틀기까지 했으니 그는 아마 성녀의 치료를 받지 않는 한 이대로 죽을 것이다.
안타깝다. 죽기 싫다고 말한 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야망은 이제 꺾이고야 말 터였다.
시야가 새카맣게 변하고 눈앞이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이제 곧 죽을 것이다.
자레스는 그를 직감하며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
“어떡하지?”
아넬이 다가와 자레스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아직 숨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맥박이 지극히 약했다.
아넬은 에포메니였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 대해선 많은 공부를 했다. 그녀가 아는 지식으로는 자레스는 이미 지옥문으로 들어서기 일보 직전이었다.
채 감지 못한 동공은 이미 풀렸으며,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아마 내버려 두면 이대로 죽게 될 것이다.
아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갑판 위를 돌아봤다.
갑판 위에선 난전이 벌어지고 있어서, 정작 카비르 병사들은 자레스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자가 하나도 없었다.
안다고 해도 별 소용없었다. 그들이 달려와 봤자 자레스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오직 성력만이 그를 살릴 수 있었다.
아넬은 망설였다.
자레스가 죽으면 이 지독한 인연의 사슬은 끊어진다.
아넬은 그런 가능성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넬이 도망치지 않아도 자레스가 사라지면 세계의 파멸은 자연스럽게 없는 일이 될 터였다.
아르드를 위해서도, 아넬을 위해서도 자레스는 여기서 죽는 게 나았다.
그런데, 그 간단한 결단을 쉽게 내릴 수가 없었다.
지금 도망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세계는 파멸을 면할 것이며, 아넬은 가뿐한 마음으로 다시 신전에 돌아가면 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조금 어긋난 채로 다시 평온을 찾을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자레스를 그냥 내버려 둔 채 떠날 수 없었다.
“잊지 말거라, 아넬. 생명의 고귀함은 권력이나 재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 수십만의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수백만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어. 우리는 썩은 씨앗과 귀한 나무가 될 씨앗을 구분해 살려야 할 책임이 있단다.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어떤 기로에 서게 될지 성녀가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아넬, 부디 그때가 오면 네 본능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성력을 베풀렴.”
지금이 바로 그 알 수 없는 때라는 것을 아넬은 직감했다. 거대한 태엽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신의 시계가 다음 시간을 향해 움직이는 그런 운명의 순간.
그리고 아넬은 그 시계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지금, 알 수 없는 손길이 그녀를 그리로 이끌고 있었다.
아넬이 저도 모르게 자레스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손끝에 힘을 모았다.
성인이 되기 전엔 절대로 베풀면 안 된다던 힘, 치유의 힘이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기운이 아넬의 손을 타고 자레스의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물처럼 시원하고, 대지의 힘처럼 단단하고 힘찬 것이 상처 난 내장을 훑고 자레스의 몸 전체에 퍼지면서 생명의 기운을 되살렸다.
칼날에 상한 장기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칼이 뚫고 들어간 상처가 벌어진 흉만 남긴 채 반쯤 아물었다.
다 풀려서 흐트러졌던 그의 눈동자가 돌아왔고, 낯빛이 조금 바뀌었다.
살아났다는 증거로 자레스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죽음 가까이 갔던 탓에 바로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호흡이 돌아온 걸 확인한 아넬은 셔츠 깃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가슴팍을 만져봤다.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서 자레스를 완전히 치유하지는 않았다. 성력을 있는 대로 퍼붓지 않은 탓일까, 아직 그녀의 가슴팍엔 젖 봉오리가 잡히지 않았다.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아넬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면서, 아넬은 주변을 돌아봤다. 병사와 선원들은 아직도 자객들과 붙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마 자레스의 수하들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 검은 옷을 걸친 자객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면 어렵게 살려 놓은 자레스가 치료도 못 받은 채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
아넬은 성력을 더 쓰지 않고 자객들을 몰아낼 방법이 있는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화물칸에 식량을 가득 채웠지. 그중에 몇을 발아시킬까?’
하지만 그랬다간 당장 사람들의 누구 짓인지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이 방법은 아니다.
그때 문득 아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부관의 칼에 찔리는 바람에 자레스가 걸친 허리띠의 일부가 잘려 나가 있었다.
부관이 자레스의 몸에 꽂힌 칼을 꺼내면서 허리띠를 건드린 것 같은데, 그 탓에 헐거워진 허리띠 사이로 길고 검은 통이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나무로 만든 통이었다. 자레스가 쓰러지면서 충격을 받는 바람에 그 통의 주둥이가 갈라져 그 틈으로 새까만 액체가 흘러나와 있었다.
“이건…?”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익숙한 냄새가 났다. 영원의 불의 연료였다. 여러 가지 암석과 기름을 합쳐 제작하는데, 고체화된 것도 있고 액체화된 것도 있다. 이 연료에 불을 붙이면 물로도 꺼지지 않는다.
신전에 잠입하던 날, 신전 수비병들이 바다에 던진 횃불도 이 연료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키리아가 자레스에게 선물이라고 내준 것이었지만, 아넬은 그런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넬은 그것의 용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지체하지 않고 통의 뚜껑을 열었다.
갑판 곳곳에 등불이 걸려 있었다. 선교 밑의 벽에도 등불이 있었는데, 아넬은 싸우고 있는 자들을 뚫고 그리로 달려갔다.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아넬이 벽에 걸린 등불을 바다를 향해 던졌다. 유등이 깨지면서 수면에 불붙은 기름이 흘러나오자, 아넬이 그 불꽃을 향해 연료가 든 통을 던져 넣었다.
그와 함께 펑, 하는 폭음이 터졌고, 불꽃이 배보다 더 높이 치솟았다.
이것은 부두 경비대의 시선을 끌었다.
이렌시아는 성녀가 사는 성스러운 땅이기에 살인이나 나라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금물이었다.
안 그래도 신전에 침입하려는 시도가 있어서 섬 전체의 경계가 더 강화돼 있었는데, 난데없이 선창 쪽에서 커다란 불꽃이 치솟자, 곧바로 부두 경비대가 자레스의 배를 향해 달려왔다.
어느 배인지 수색할 필요도 없었다. 불꽃이 곧바로 표지판 노릇을 해 줬기에 사방에서 뿔피리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젠장!”
자객들 중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일이 어그러진 걸 깨달은 것이다.
“철수하라!”
그의 명령에 곧바로 자객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연달아 수면에서 물보라가 일어났다. 카비르 병사들이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그때 아넬이 고함을 질렀다.
“황자님이 다치셨어요! 의원을 불러 주세요!”
카비르 병사들은 추적을 포기하고 자레스를 향해 달려왔고 곧 아넬의 말대로 자레스가 배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카비르 병사들은 자객들을 쫓아가는 대신, 선창과 이어진 다리 쪽으로 달려가며 이쪽으로 오고 있던 부두 경비대를 불렀다.
“의원! 의원을 불러 주시오! 아니, 가능하면 성녀님을 뵙게 해 주시오!”
***
그러는 동안 바다로 뛰어든 자객들은 능숙하게 헤엄쳐서 섬에서 떨어진 바다 쪽으로 나아갔다.
바다 수영이 능숙한 자들이었다. 섬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는데, 자객들은 모두 그리로 모여들었다.
그들을 태운 배는 또다시 노를 저어 더 먼 바다로 나아갔다. 이렌시아 령을 벗어난 공해상에 화려한 배가 유유히 항해하고 있었다.
작은 배가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그 배가 멈춰 섰고, 작은 배에 올라탔던 자객들은 모조리 그 배로 옮겨 탔다.
30분도 안 돼서 그 배의 선교 위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새는 훈련받은 대로 부지런히 날았다.
다음 섬이 나타났고, 새의 발목에 묶인 쪽지는 다른 새에게로 옮겨져 다시 운반됐다. 몇 마리의 새가 바뀌고, 날짜가 바뀐 끝에 마침내 마지막 전서구가 카비르에 도착했다.
쪽지는 새의 발목에서 풀렸으나, 펼치지는 않은 상태로 은쟁반에 받쳐져 호화로운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주인은 그 방과 마찬가지로 황금빛 자수로 가득한 튜닉을 걸치고 있었다.
섬섬옥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움직여 쪽지를 펼쳤다. 내용을 읽은 그는 얇디얇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흘렸다.
“두 배의 수를 보냈는데, 실패했다고? 명줄이 참 질긴 놈이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사내였다.
어려서부터 노예 생활을 하고 전투에 참가한 탓에 까맣게 그을린 자레스와 달리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머리카락은 북쪽 왕국인 타네시의 피가 섞인 까닭에 눈부신 금발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눈은 타네시의 하늘을 닮은 시린 푸른색. 여자보다 남자들이 그의 얼굴에 홀려 눈을 떼지 못할 그런 미모의 소유자였다.
외모는 천사처럼 아름다우나, 그 속은 뱀의 것처럼 교활하고 복잡했다.
그 역시 1황자와 3황자를 차례로 제거하고 장황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교활함이나 잔혹함이 황자들 사이에서 특별히 더 지독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머지않아 자레스가 그를 짓밟고 올라설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카비르 황제에겐 자식이 많았고, 황제는 그 자식들을 경쟁시키는 동안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즐겼다.
적어도 자식들이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 동안엔 그의 자리는 안전했다. 아마도 유가가 자레스를 제거한다 해도 황제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단지 더 위험한 경쟁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황자를 늘리고, 허수아비들을 조정하면서 이 거대한 체스판에서 그만이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다시 암습을 시도해 볼까요?”
유가의 곁에 서 있던 심복 무르마가 묻자 유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둬라. 자레스는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놈이 아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중에 기습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놈이 어느 항구에 들를지 모르니 변수가 너무 많아. 일단은 놈이 돌아오는 걸 기다려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자레스의 부관은 어찌 됐나?”
“죽은 것 같습니다. 자레스 황자가 그의 다리를 자르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하는데, 죽지 않았다 해도 자레스 황자가 살려 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들여 매수했는데 아쉽군. 어쨌든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놈의 가족은 모두 목을 잘라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내리는 자나 수행하는 자나 감정의 흔들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무르마가 가슴에 손을 대며 예를 표한 뒤 방을 나가자 유가가 쿠션을 잔뜩 쌓아 놓은 의자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30분쯤 전에 들이마신 유피움의 효과가 이제야 핏줄을 타고 퍼지는 것 같았다. 물담배에 유피움을 타서 피우면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구름 위에 올라탄 느낌이 든다.
세계가 제 발밑에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있다는 착각에 황홀감이 넘쳐나게 된다.
유가는 상상 속에서 일어난 자신감에 빠진 채 느른하게 중얼거렸다.
“어서 돌아오거라, 자레스. 이번에 돌아오면… 차라리 이렌시아에 머무르는 게 나았다는 후회가 들게 될 거다. 내가… 성대하게 너를 환영해 주마.”
***
자레스는 사흘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유가가 암습에 실패했다는 밀서를 받은 것과 거의 비슷한 즈음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의 방 침상 곁에 수하들이 침대를 빙 둘러서 있는 게 보였다. 이어서 그의 시야에 늙고 주름진 얼굴이 쑥 들어왔는데, 그가 곧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황자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의 외침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익숙한 그 얼굴들 중에 부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 그제야 자레스가 중얼거렸다.
“…부관은 죽었나?”
“다리가 잘린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 배후를 알아냈어야 했는데, 안타깝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보나마나 유가가 벌인 짓일 테니. 놈은 항상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지.”
씁쓸히 중얼거린 자레스가 벌떡 일어났다. 하복부가 아프긴 했지만, 통증이 죽을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부관의 칼이 등을 뚫고 복부까지 관통해 튀어나온 걸 확인했는데.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지?”
그 말에 침상 곁에 서 있던 낯선 늙은이가 반갑게 입을 열었다.
“실력 있는 의사를 불러온 덕이지요. 아, 제가 제 입으로 실력 있다고 말하는 건 좀 송구스럽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급하게 달려온 덕에 황자님을 용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네가 날 구했다고?”
“그렇습니다!”
늙은 의사는 말이 많은 자였다.
곧 자레스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의사가 얼마나 빨리 달려와 또 어떻게 처치했는지 숱한 수다가 이어지더니 마지막에는 뒤늦게 자레스에 대한 칭찬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황자님이 타고난 체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제 치료가 효험이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배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고도 사흘 만에 깨어나신 것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자레스의 눈에 문득 장의자 옆 그늘진 구석에 앉아 있는 아넬의 모습이 들어왔다.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진 게 또 자고 있는 듯했다.
장의자 앞 테이블에 물이 담긴 대야가 있고 그 안에 수건이 들어 있는 게 보였는데, 굳이 묻지 않아도 아넬 역시 의사와 함께 그를 간호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불현듯 그를 향해 달려들던 부관에게 단검을 던지던 아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참 형편없는 솜씨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아넬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자레스는 그 자리에서 죽었으리라. 빚을 진 셈이다.
“자객들은?”
자레스가 아넬에게 시선을 꽂은 채 묻자, 부하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다 도망쳤습니다. 추적하려 했지만, 황자님의 상태가 너무 위급한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힐난을 당할까 싶어 수하가 얼른 덧붙였다.
“파이디가 불꽃을 일으키는 바람에 부두 경비대가 달려왔습니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자객들이 끈질기게 공격했을 텐데, 폭발 덕에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 파이디 덕분입니다.”
“불꽃을 일으켰다고?”
문득 허리춤에 꽂아 놓았던 키리아의 선물이 생각났다.
영원의 불의 연료라던, 신전에 온 기념품이 될 거라던 선물. 그게 적재적소에서 역할을 해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일이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키리아가 그걸 선물한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때마침 그때 아넬이 잠에서 깨어났다.
자레스가 일어난 걸 발견하고는 잠시 반가운 얼굴을 했다가, 그가 쏘아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곧 겁먹은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영원의 불을 알고 있나?”
자레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여 있던 자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자 아넬이 우물우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자님이 쓰러지면서 허리춤에서 나무통이 굴러 나오길래…. 검은 액체가 흘러나온 걸 보고 영원의 불인 걸 알아봤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신전 노예라면 다 압니다. 신전 곳곳에서 영원의 불을 피우고 있으니까요. 등불마다 연료를 채워 놓는 것도 노예들의 일입니다.”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곧 아넬의 목에 걸린 방울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레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넬을 노려봤다.
“방울은 어디로 갔지?”
“그게… 그, 싸움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다 자물쇠가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풀어졌어요.”
그가 기절한 이후에 일어난 일까지는 자레스도 짐작할 수 없었다.
딱히 논박할 수 없는 변명이었기에 자레스는 아넬을 한참 쏘아보다 이윽고 자신의 아랫배를 만져 봤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이상했다. 그가 쓰러지기 전 느꼈던 부상의 강도와 지금의 상태가 너무 달랐다.
‘분명히 부관 놈의 칼이 내 복부를 휘젓고 나왔는데? 그냥 관통상이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나았을 리가 없어.’
무사히 깨어난 건 다행이긴 했지만, 이건 분명히 수상했다.
자레스도 무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많았기에 부관의 칼이 얼마나 깊은 부상을 입혔는지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경험대로라면 자신은 이미 죽어 있어야 했다.
부관은 고작 다리를 잘린 것 때문에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자레스는 등허리부터 복부를 관통당했으니, 부상뿐만이 아니라 척수를 손상당한 것만으로도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어디 한 군데가 마비됐어야 맞았지만, 자레스가 몸을 움직여 보니 움직일 수 없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이건 의사가 빨리 왔거나, 자레스의 체력이 대단한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력…?’
그거라면 가능하다. 자레스가 시선을 돌려 수하를 바라봤다.
“혹시 성녀님이 나를 치료했나?”
그의 물음에 수하의 얼굴이 흐려졌다. 거짓말을 해 봤자 곧 알아낼 테고, 뭣보다 체면을 생각해서 헛된 말을 고하기엔 자레스가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게… 성녀님께 치료를 요청하긴 했지만, 그분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어이가 없어 자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는 안 만나도 된다는 걸 억지로 불러들여서 이상한 선물을 안기더니, 정작 필요할 때는 치료를 거절해?”
“그게, 성녀님의 병이 갑자기 깊어지셨다는 핑계를 대셔서,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치유의 힘을 베푸는 건 성녀님이시기 때문에….”
성녀가 권세가 약한 자의 치료를 거부한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대대로 성녀는 그렇게 차별적으로 힘을 베풀어 왔고, 오히려 그런 성녀의 행위는 찾아오는 자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시험하는 기회가 됐기 때문에, 권력자들 스스로 그와 같은 차별을 반겼다.
그래도 키리아를 만났을 때는 그런 속물근성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자레스는 성녀를 향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아넬은 어색한 태도로 그런 대화가 오가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레스가 깨어난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가 성녀님을 욕하니 그걸 견디는 건 또 힘들었다.
키리아가 자레스의 치료를 거부한 건 아넬도 뜻밖이었다.
자레스는 키리아를 두고 썩어 빠진 여자라고 욕하고 있었지만, 아넬이 아는 한 키리아는 찾아오는 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항상 성력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미 입구에서부터 선별된 까닭에 신전에 들어오는 자들 모두 상당히 신분이 높은 자이긴 했지만, 적어도 당장 목숨이 위험한 환자를 거절할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카비르의 황자쯤 되면 이미 그 상당한 신분에 해당하는 자, 신전에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그분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계신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직감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흐름이,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넬은 막연하게나마 그 움직임이 자신이 자레스를 살려 준 것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키리아는 아넬의 충동으로 시작된 그 흐름에 자신을 밀어 넣은 것이다.
‘어쩌면 자레스 황자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인지도 몰라.’
세상에 이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키리아는 말했었다. 살아 있는 생명엔 모두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아넬이 자레스를 살린 데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레스는 아넬에게 욕망을 품지만 않으면 아르드를 위해 더 큰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나마 남아 있던 후회가 조금은 사라졌다. 아넬은 내심 안도하면서 자레스의 눈치를 살폈다.
자레스는 아직도 수하들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유가의 암습을 피해 어떻게 귀국할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 있었는데, 아넬에게 잠시나마 향했던 시선은 이미 거둔 뒤였다.
아넬은 그들의 주의를 피해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자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이디.”
아넬이 깜짝 놀라 돌아서자, 자레스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자레스가 아넬을 쳐다보자 수하들도 얼결에 시선을 돌렸는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가 커진 것 같다?”
“……!”
그랬었나?
성징이 나타났는지 아닌지만 신경 쓰느라 다른 쪽으로 모습이 변한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애초에 자기 키를 주의 깊게 잴 리도 없었고, 그건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찮은 노예 소년이 얼마나 자랐는지 세심하게 살필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아넬은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자레스가 더는 따져 묻지 않았기에, 아넬은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재빨리 물러났다.
“파이디에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습니까, 황자님?”
“아니…, 그냥 문득 보니 키가 갑자기 자라 있는 게 눈에 띄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였다.
“암습이 있기 전만 해도 녀석이 일어났을 땐 장의자 등받이에서 머리 하나 정도만 솟구친 키였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어. 적어도 엄지손가락만큼은 더 커졌다.”
“그럴 리가….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자신의 눈썰미를 의심하는 거냐는 눈으로 자레스가 쏘아보자 수하가 어름어름 중얼거렸다.
속으로는 노예 놈의 키 따위야 그리 주의 깊게 봤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자레스의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 그,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원래 파이디 또래의 아이들은 며칠 만에 훅 커지기도 합니다. 사춘기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는 법이지요.”
“그런가?”
수하의 말이 맞았다. 뭣보다 아넬의 키는 그의 눈짐작이었을 뿐 정확한 건 아니었다.
자레스는 자신의 예리한 본능을 믿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춘기 소년의 키에까지 그 본능을 나누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꿈틀거리는 이 이상한 직감은 무엇일까.
도망친 신전 노예를 이 배에 잡아 둔 이후부터 계속해서 수상한 일들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침입을 예상한 것처럼 신전에서 일어난 소동,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키리아, 그리고 예상보다 얕은 부상.
‘의사의 능력이 좋았다고? 아니야. 이건 성력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의식을 잃고 있던 와중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의 예리한 감각은 그 수수께끼의 중심에 노예 소년 파이디가 있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확언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납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풀지 않고 덮고 넘어가기엔 자레스가 너무 의심이 많았다.
아넬이 방을 나간 뒤, 자레스는 입을 다문 채 수하들이 암습에 대비해 새로운 용병을 모집하겠다고 의논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레스가 손짓을 해 의사를 내보내도록 했다. 의사는 조속한 처치를 위해 배에 머물고 있었는데, 자레스는 저녁에 다시 부르겠다는 명을 내린 뒤 이윽고 수하들을 가까이 불렀다.
“무칼라스. 이제 지휘는 네가 맡는다.”
“여, 영광이다, 황자 전하.”
과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믿었던 부관이 자신을 배신했다. 이제 자레스가 믿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자레스는 기뻐하는 무칼라스의 새까만 얼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무칼라스는 7대륙 출신이었다. 카비르 제국과 7대륙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를 건너면 카비르 제국의 식민지가 있는데, 그 나라는 피부가 검은 아와드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식민지 출신답게 무칼라스는 거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거로 신분 상승을 꿈꿨다. 그런 의미에서는 배신자인 부관보다 더 믿을 만할지도 모른다.
무칼라스의 말대로 다음 항구에서 새 용병과 선원을 모집해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카비르에 남겨 둔 정예부대 일부를 중간 기착지까지 불러와야 했다. 그래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 터다.
“남은 인원은 얼마나 되지?”
“죽은 자가 팔 명이고 부상자가 열두 명이다. 전부 62명이 낳았다.”
“남았다는 말이겠지.”
무칼라스는 아직 카비르어가 서툴렀다. 공용어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그의 보고를 파악하려면 머리를 좀 써야 했다.
“죽은 자가 생각보다 많군.”
“암사자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사라진 병사도 몇 명 있어서 그들도 죽은 거로 쳤다.”
“암사자가 아니고 암살자. 그리고 사라진 병사가 있다고?”
“물에서 목욕했거나 아니면 도망간 것 같다.”
“물에 빠졌다, 이 말인가? 살해당해서 던져졌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아니면… 유가의 부하들과 함께 도망쳤거나.”
사라진 병사들이 모두 유가의 첩자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입맛이 썼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새 배를 수배해라. 항적을 세탁할 수 있는 배로 구해서 마르파 항구에 대기시켜 놓도록. 카비르로 돌아갈 때는 그 배를 타고 간다.”
“명을 좋겠다.”
수하들을 모두 내보낸 그가 이윽고 시종을 부르는 끈을 당겼다. 밖에서 종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넬이 나타났다.
그녀가 겁먹은 눈으로 주춤주춤 들어오자 자레스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명을 내렸다.
“몸을 닦아야겠다. 뜨거운 물과 수건을 준비해 와라.”
아넬이 곧 그가 지시한 것들을 들고 나타났다. 침대 옆엔 의사가 자레스의 처치를 위해 놓아둔 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거기에 대야와 수건을 놓자 자레스가 다시 말했다.
“옷을 벗기고, 내 몸을 닦아라.”
“네?”
아넬이 당황해서 반문하자 자레스가 침대 위로 몸을 눕히며 중얼거렸다.
“뭘 그리 놀라지? 주인의 시중을 드는 건 노예가 해야 할 일이 아니냐.”
그리고 또다시 짓궂게 덧붙였다.
“설마 내 몸을 보는 게 흥분돼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 저, 저는…. 아, 아닙니다. 저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넬이 드물게 허둥댔다.
흥분되기는커녕 부끄러웠다. 사내를 가까이서 접한 적도 없는데, 옷을 벗기고 알몸을 닦으라니!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에게 안기기는 했어도, 그의 몸까지 보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아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느린 손은 채찍질을 해야 움직일 테냐?”
자레스가 입술 끝을 삐딱하게 올린 채 짓궂게 속삭였다.
대체 왜 이 어린 노예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몸을 닦으라는 말에 마치 계집애처럼 당황하는 게 웃겼고, 그러자 두려워하는 게 뻔한데도 아넬에게 시중을 강요하고 싶어졌다. 이전에는 느껴 본 적 없던 장난기였다.
“무칼라스!”
새로 부관이 된 자의 이름을 부르자, 정말 채찍을 가져오게 하려는 거라 여긴 아넬이 겁을 먹고 다가왔다.
“오, 옷을 벗기겠습니다.”
긴장한 나머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은 뜨거운데 손끝은 차가워져서 마치 손 대신 얼음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자레스는 즐기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가 서툰 손길로 그가 걸친 카프탄의 목둘레를 건드리는 걸 지켜봤다.
카프탄은 원래 위아래가 하나로 이어진 옷이라 벗기려면 모두 벗어야 했다. 하지만 자레스의 카프탄은 가슴팍이 깊이 파여 있어서 어깨부터 벗기면 상반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자레스가 긴 소매에서 팔을 빼 줘야 했는데, 그는 무슨 생각인지 아넬이 목깃을 잡아당기는데도 가만히 있기만 할 뿐 움직임이 없었다.
“저기… 파, 팔을 빼 주셔야 합니다.”
“나는 부상 때문에 팔을 들 수가 없다.”
“네?”
아까 보니 잘만 움직이더니만, 갑자기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다.
자레스는 마치 끈이 풀린 인형처럼 멀뚱멀뚱 눈을 굴리고만 있었다.
“재주껏 소매를 벗겨 봐.”
그러기 위해선 자레스의 가슴팍 쪽에서 손을 집어넣어 그의 팔을 잡아 직접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에 직접 손을 대야 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빨개졌던 얼굴이 횃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서 하지 않고 뭐하나? 기어이 채찍을 가져와야, 노예의 소임을 다할 건가?”
다시 한번 자레스가 재촉해서 아넬은 어쩔 수 없이 자레스의 가슴팍에 손을 댔다.
그에게 밀착되면서 머리 위로 자레스의 뜨거운 숨결이 불어닥치는 게 느껴졌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긴장한 아넬의 몸이 더 딱딱해졌는데, 그 와중에 손끝에 닿은 자레스의 가슴팍은 그녀의 몸보다 훨씬 단단한 게 느껴졌다.
‘이게 남자의 가슴인가?’
이성의 맨살에 손을 댄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뒤늦게 접한 그것은 생각보다 굳건했다.
소매 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의 팔뚝을 잡자 핏줄이 울뚝불뚝 솟은 단단한 팔의 부피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자 안 그래도 붉게 달아오른 귀에서 마치 끓는 주전자처럼 김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메타시여!’
이건 미지의 세계에 처음 접한 두려움과 호기심일 뿐이다.
그렇게 세뇌하며 아넬은 신의 이름을 불렀다. 잠깐이나마 일렁인 그녀의 가슴이 제발 설렘이 아니라 울렁임이기를, 아넬은 간절히 기도했다.
“옷 벗기는 데 천년이 걸리겠군.”
“죄, 죄송합니다….”
간신히 양쪽 팔을 빼내자 비로소 카프탄을 허리춤까지 끌어내릴 수 있게 됐다. 그러자 드러난 자레스의 몸에 아넬은 깜짝 놀랐다.
“황자의 몸치고는 흉터가 많지?”
자레스가 이죽거렸다.
그의 말대로 그의 몸에는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칼에 베인 것 같은 길고 날카로운 것부터 채찍질을 당한 듯한 자국도 많았다.
몸 전체에 빼곡하게 가득 찬 흉터 때문에 상처 없는 맨살을 찾아내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거기에 하나가 더해졌군.”
자레스가 아랫배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부관이 등부터 찌른 상처가 아랫배까지 나 있었다.
아넬의 치유력 덕분에 부상의 크기에 비하면 흉터가 작은 편이었지만 흉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넬은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가슴팍 위쪽을 문지르고 땀과 먼지를 닦아 냈다.
오래된 흉터 위를 지나는 그녀의 손길이 사뭇 떨렸다.
“이게 노예의 삶이다.”
“…….”
“이렌시아에선 편하게 지냈을지 모르겠지만 카비르에선 아니지. 너 역시 나 같은 몸을 갖게 될 거다.”
“저를 이토록 심하게 때리실 거란 말이십니까? 황자 전하께선 그렇게 잔인한 분이신가요?”
아넬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러자 그 순간 자레스의 볼살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노예 주제에 감히 주인을 비난하는 거냐?”
그건 자레스에게 매질을 가한 황자들을 질책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에둘러 자레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기도 했다.
네 몸도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는 위협을 가하는 그 역시 노예 출신이 아니던가. 그의 귀에는 출신을 잊은 오만함이라는 비난으로 들렸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 자레스가 돌연 아넬의 팔을 휙 끌어당겼다.
“아…!”
버티려 애를 썼지만, 아넬은 맥없이 자레스 쪽으로 끌려왔고 침상 위로 엎어졌다. 그러자 자레스가 그녀의 몸을 뒤집으며 아넬의 목을 한 손으로 내리눌렀다.
“죽고 싶은가 보구나.”
“으, 으우욱.”
“내 자비가 너무 컸나 보군. 너무 오래 살려 뒀더니, 간이 배보다 커진 건가? 파이디, 너는 에포메니의 노예였지, 에포메니가 아니다! 주제넘게 입을 놀렸다간, 그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거야!”
사실 그녀가 에포메니인 걸 알면 그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질까. 자레스의 손에 목을 졸려 버둥거리면서도, 아넬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자레스의 악력에 눌리면서 점점 호흡이 버거워졌다.
눈앞이 아득하게 변하면서 저절로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초록빛 눈이 물기로 가득 찼고, 혈류가 몰리면서 더 짙은 암녹색으로 변했다. 잠시나마 버둥거리긴 했지만, 아넬은 마치 체념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 얼굴에 갑자기 흔들렸다. 붉은빛을 지나 점차 하얗게 질려 가는 그 입술에 갑자기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갑자기 세차게 일어난 욕구에 놀란 자레스가 얼결에 손을 놓으며 아넬에게서 물러났다.
그에게서 풀려난 아넬이 침상 위를 구르며 기침을 했고, 그러다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자레스를 쳐다봤다.
‘왜…?’
‘왜…?’
의미가 다르지만 방향은 같은 물음이 자레스에게로 향했다.
아넬은 그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궁금한 것이었지만, 자레스는 왜 자신이 사내 노예에게 이상한 충동을 품었는지를 몰라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것이었다.
여전히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아넬의 눈에 또다시 채우지 못한 욕망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아넬을 쓰러뜨리고 싶었다. 목덜미를 물어뜯고 피가 나올 정도로 강하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제 모습을 향한 끔찍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이해할 수 없는 양가감정이 그의 안에서 격렬하게 부딪혔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비뚤어진 충동에 자레스는 제 이마를 짚으면서 비틀거렸다.
“나가라.”
아넬이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변덕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여전히 굳은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하자, 자레스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나가라고! 목 졸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나가!”
그 말에 아넬은 간신히 일어나 휘청거리며 문밖으로 나갔다. 타박거리는 급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자레스는 침상 위에 풀썩 쓰러지며 거친 한숨을 토해 냈다.
목을 조르고 싶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끔찍한 충동을 떠올린 제 머리를 잘라 내고 싶었고, 사내에게 반응한 제 분신을 떼어 내 버리고도 싶었다.
수치심과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증오가 맹렬하게 일어나 방향을 잃은 채 사방을 찔러 대고 있었다.
‘위험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아름다운 여자도, 원래 목표로 했던 에포메니도 아닌 일개 노예 소년이란 게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