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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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헉!”

아넬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회귀한 뒤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악몽이었다. 자레스가 자신을 덮치고, 세계가 무너지는 파멸의 순간이 토막 난 기억처럼 끊어진 채 되풀이되는 그런 악몽.

아넬은 자신이 아직도 전생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한참을 숨을 몰아쉬었다.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아넬은 자신이 회귀한 뒤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신전을 도망 나왔고, 지금은 자레스의 배에 갇혀 있다. 단 이틀 동안에 지난 삶을 한꺼번에 축약한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걸, 아넬은 절감했다.

어젯밤 먹은 독초의 효과 때문에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익을 것처럼 느껴졌고, 혀와 기도도 부어서 숨 쉬기가 어려웠다.

‘…치유력을 써 볼까?’

너무 힘든 나머지 아넬은 그런 유혹에 빠졌다. 기도의 붓기만 가라앉아도 한결 편안한 것 같았다. 눈치채지 않게 조금만 쓰면 아무도 못 알아보지 않을까?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더 나빠지진 않을 거야. 갑자기 상태가 좋아지면 황자가 의심할지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낫기를 기다리자.’

벽에 기대고 앉아 숨을 몰아쉬자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아넬의 머릿속에 자레스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문득 어떤 직감이 그녀를 스친 것이다.

‘혹시 전생에도 자레스 황자가 신전에 들어온 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아넬은 배례식 전에 자레스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성년의 의식을 치른 뒤 찾아온 배례식 날에 마주친 카비르 황태자 자레스의 눈이 유달리 위험해 보였던 건 생각이 났다.

***

“카비르의 자레스 황태자입니다.”

수석 시녀 블로자가 그의 이름을 외치자 자레스는 보좌에 앉은 아넬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성년식을 맞이한 뒤 처음 치르는 배례식에는 아르드 각지의 권력자, 지배자들이 찾아온다.

성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성녀의 치유로 늙고 노쇠한 자신들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배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병든 자들이었는데, 자레스는 참가자 중에 유일한 젊은 사내였다.

자레스가 다가오자, 갑자기 코끝에 훅 풍겨 오는 수컷의 냄새에 아넬은 살짝 당황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렌시아의 성녀여.”

“그대를 뵙습니다, 카비르 황태자여. 메타의 자비가 당신의 머리 위에 있기를.”

아넬은 습관적으로 성력을 베풀기 위해 허리를 숙인 그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때 자레스가 갑자기 눈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선뜩한 눈빛에 갑자기 뱃속이 오그라들었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포식자의 것처럼 탐욕스러운 시선이었다. 그 눈길이 그녀의 얼굴 위를 맴돌다 전신을 한 바퀴 훑고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저는 젊고 몸도 건강합니다. 치유의 힘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형제를 죽이고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흉포한 남자라고 들었다. 황제를 대신해 이 자리에 올 정도로 이미 카비르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아르드에서 가장 강한 힘을 자랑하는 제국의 지배자.

그렇기에 아넬은 이어지는 자레스의 요구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치유를 받는 대신, 성녀를 존경하는 의미로 손등에 입을 맞추게 해 주십시오.”

“……!”

성녀의 손등에 키스하는 건 별스러운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에서 찾아온 많은 권력자들은, 뒤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겉으로는 성녀를 존경하는 척하면서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최고의 숭배를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왜 별다를 게 없는 손등 키스를 요구하는 그의 눈길이 이리도 위험해 보이는 걸까?

그의 시선에 꽂힌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처음 그와 눈길을 마주쳤을 때부터 자레스는 꼬챙이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놓고 있었다.

성녀를 대하는 눈빛이 아니라 여자를 대하는 수컷의 눈빛이었다. 아넬은 성년이 될 때까지 젊은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기에, 자레스의 그런 시선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싫으십니까?”

자레스가 문득 불렀기에 아넬은 부정적인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마치 그에 의해 마비되고, 그에 의해 각성된 것 같았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넬은 마지못해 자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촉, 하고 그의 입술이 아넬의 손등에 와 닿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자레스가 그 순간 혀를 내밀었고, 그는 아넬의 손등을 길게 핥아 올리며 치뜬 눈으로 아넬의 반응을 지켜봤다.

이상한 감각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당황스러워서 손을 빼려는데, 그 순간 아넬과 자레스의 눈길이 마주쳤다.

욕망하는 눈길이었다. 그녀의 몸을 욕정 어린 눈으로 훑고, 잡아먹을 것처럼 아넬의 입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금 입술을 대고 있는 것이 그녀의 손이 아니라 입술이기를 바라는 듯했고, 한입에 그녀를 삼키고, 성녀가 자신의 것임을 선언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지독한 소유욕이 밴 그 눈빛에 아넬은 마치 박제된 것처럼 몸이 굳었다.

***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그런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아넬은 벽에 기댄 채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넬은 자레스가 그 배례식의 날 성녀에게 한눈에 반했고, 그래서 황제가 된 이후에 그녀를 약탈하러 쳐들어온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게, 그렇게 급하게 형성되는 거란 말인가.

아넬은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욕망에 약한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성녀를 약탈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르드의 모든 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자신의 제국을 위기에 빠뜨리면서까지 갖고 싶은 치열한 욕망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처음 마주친 날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불사의 몸을 갖기 위해 성녀를 독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은 눈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그녀를 원하는, 수컷의 눈빛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토록 강한 욕망이 처음 보자마자 바로 생겨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만약 배례식에서 날 보기 전에 신전에 숨어든 적이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의 삶에서 자레스가 그를 시도한 걸 보면 전생에서도 같은 짓을 벌이지 않았으리라 볼 수 없었다.

이번엔 아넬이 방해했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지난 삶에선 자레스가 무사히 잠입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전 어딘가에 숨어 아넬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면?

“불가능해.”

잠시 생각하던 아넬이 곧 고개를 저었다.

뭣보다 신전 안에는 외부인이 그렇게 오래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없었고, 황자쯤 되는 사람이 그런 위험을 감내한 채 아넬을 관찰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변장을 하고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성전에선 어린 소년 노예만 부리기에 자레스처럼 성년이 된 사내가 들어왔으면 바로 들켰을 것이다. 역시 가능성이 없었다.

‘그럼 정말 한눈에 반한 건가…. 사내의 욕정은 그렇게 무서운 거란 말인가.’

그때 문 앞으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격자문 너머로 누군가 방을 들여다보는 게 보였고, 곧 문이 열리며 부관이 나타났다.

“자레스 황자님께서 부르신다.”

***

방 안에선 자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걸치던 새카만 비단 셔츠 대신, 오늘은 눈송이처럼 흰 튜닉을 걸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옷깃이 깊게 패여 있었는데, 그 덕분에 그의 근육질로 채워진 가슴과 그을린 피부가 더 돋보였다.

방금 전까지도 잠겨 있던 전생의 기억 때문에 아넬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위축됐다.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하자, 자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이 그럭저럭 돌아왔군.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야?”

“…….”

말수가 적은 이 노예를 향해 자레스는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이렌시아에선 노예들에게 주인의 말에 냉큼 대답해야 한다는 걸 가르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언제 또 수색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약은 수시로 먹어 둬야 할 거다. 아니면 나는 그냥 너를 바다에 집어던지고 네놈이 죽었다고 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겨우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닐 것 같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아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글쎄. 나도 생각 중이다.”

“신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됐으니 저는 이제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는 신전에 들어가는 걸 아주 포기한 건 아니다. 몇 년 후에라도 돌아와서 다시 시도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있긴 있어야 돼.”

“후우.”

아넬은 들리지 않게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쩔 수 없어. 일단은 얌전히 있다가 기회를 봐서 탈출하는 수밖에….’

상황을 보니 자레스가 금방 신전 침입을 강행하진 않을 것 같은데, 한다고 하더라도 다음 역시 침입은 실패할 것이다.

아넬이 빠져나온 배수로는 너무 좁아서, 어린애처럼 체구가 작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었다.

아직 키가 작고 몸집도 얄팍한 아넬이기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 장성한 자레스나 병사들은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날 밤 배수로까지 도착했으면, 아넬은 그 사실이 들통 나며 살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좀 지난 뒤의 일이고, 지금은… 그래, 너에게 할 일을 주겠다.”

그러더니 자레스가 아넬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자레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생각인 거지?’

돌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혹시 시중 노예의 일 중에 잠자리를 덥히는 일도 있는 건가?’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건지, 자레스가 킬킬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사내놈에겐 흥미 없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자레스가 가리킨 곳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였다. 아넬이 거기에 앉자 자레스가 침대 머리맡에 놓인 푹신한 쿠션들 위에 몸을 눕혔다.

“노래나 불러라.”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내가 잠들 때까지 거기서 노래나 불러. 명령이다.”

“…혹시 불면증이 있으십니까?”

이번엔 자레스가 기이한 눈으로 아넬을 쳐다봤다.

볼수록 이상한 녀석이었다. 처음엔 노예치고는 몸가짐이 정갈하다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평범한 노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은 눈치가 빨랐고, 다른 자들보다 머리 쓰는 것도 빨랐다. 어차피 말해 줄 생각이긴 했지만, 이 소년 노예는 노예의 법도도 모른 채 미리 짐작하고 앞서 대처했다.

그건 책사로서는 괜찮은 능력이지만, 노예에겐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죽은 에바드 놈은 원래 노래 때문에 데려온 녀석이었지.”

“에바드가요? …몸놀림이 빠르길래 당연히 전사인 줄 알았어요.”

“그건 그 녀석이 노력해서 배운 것이다. 노래 말고 다른 쪽으로도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체력을 키우고 칼을 배웠지.”

“…….”

“나는 내게 쓸모없는 인간은 쉽게 버린다. 너도 살고 싶다면 네 쓸모를 증명해 봐.”

그 말에 망설이던 아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꼭 그녀의 쓸모를 증명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건 그녀에겐 당연한 일이었기에, 아넬은 별다른 생각 없이 노래를 불렀다.

머릿속을 정화하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무심히 눈을 감으려던 자레스가 놀란 눈으로 퍼뜩 아넬을 쳐다봤다.

“무슨 노래지?”

“성가입니다. 선신 메타를 찬양하는…. 저는 신전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는 노래가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성가는 따분했지만, 아넬의 목소리와 선율이 무척 잘 어울렸기에 자레스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쿠션에 몸을 기댄 채 그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는 웬만한 미희의 노래보다 아름답다더니, 아넬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청아하고, 흐르는 물처럼 깨끗했으며, 천상의 목소리처럼 성스럽기까지 했다. 노래로 사람을 홀릴 수 있다면, 아마 바로 이 녀석이 그런 능력자가 아닐까 싶었다.

불현듯 묘한 느낌이 들어서 자레스는 물끄러미 아넬을 쳐다봤다.

얼굴만 곱상한, 그저 그런 노예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년은 언뜻 언뜻 신비한 빛을 드러낸다.

자레스는 가져 본 적이 없는, 고요한 이성의 불빛. 천한 노예인 주제에 내면에 그런 불이 날름대면서 가끔씩 그에게 희미한 그림자를 던졌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자레스는 노래를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너는 너를 노예로 만든 메타를 증오하지 않는가?”

무슨 의도로 묻는 걸까.

잠시 그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아넬이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가?”

“인간의 운명은 신이 정해 주신 거니, 그 길을 따를 뿐입니다.”

“웃기는군.”

“주어진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노력 역시 메타가 정해 주신 길이라 믿습니다. 메타는 운명의 실을 잣기만 할 뿐, 그것을 짜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노예 처지가 싫어서 도망을 쳐 놓고 운명은 신이 내린 거라 믿는다고?”

“어쩌면 제 운명은 노예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쥔 실꾸리를 쥐고 제 몫의 천을 짜겠습니다.”

“신전 노예라 그런가, 설교도 아주 잘 하는군.”

자레스는 코웃음을 쳤지만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그러는 대신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다시 말했다.

“나는 신을 증오한다.”

“네?”

뜻하지 않은 대답에 아넬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세계를 사랑하는 자비의 신이라? 그렇게 자비로운 신이 왜 비참한 노예들은 구원하지 않지?”

“그건 실을 잣는 게 인간의 몫이라….”

“헛소리. 애초에 신은 왜 인간을 태어나게 해서 비참함을 겪게 하는 건가? 그렇게 착한 신이면 그냥 모두 천국에 보내 주면 되잖아. 메타가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미친놈이거나, 아니면 그냥 무력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아. 차라리 메타와 싸우다 소멸된 악신 칼리크가 더 믿음직스럽다.”

아넬은 그런 말을 뱉어 내며 자신에 차 웃음 짓는 자레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째서 이리도 생각이 비뚤어진 걸까. 진짜 노예로 자랐기 때문에?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힘들게 살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함부로 그의 삶을 무시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레스가 신을 증오할 수는 있어도, 그 신의 오명은 벗겨야 했다.

메타의 존재는 이미 아넬의 눈으로 확인했고, 그의 힘 역시 눈앞에서 보았다. 그 소름 끼치는 힘을 자레스도 알아야 했다.

잠시 생각하던 아넬이 곧 대답했다.

“그래도 메타는 자비로운 신이 맞습니다.”

“어째서지?”

“당장이라도 이 아르드를 파괴할 수 있는데도 내버려 두시니까요. 적어도 이 아르드를 사랑하시기에 그러는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전능하신 신이니 창조와 파괴 역시 모두 그분의 의지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행에도 아르드를 파괴하지 않는 건 메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야말로 불신자로군. 인간의 창조자이자 사랑과 자비의 신인 메타가 아르드를 파괴해? 그런 사고방식은 처음 들어 본다. 성녀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그건… 아닙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차마 직접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의 주관자인 메타가 아르드를 소멸시키다니, 그녀도 지난 삶에서 아르드가 파괴되던 걸 보지 않았다면 미처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레스는 더 말하는 대신 콧방귀를 끼며 쿠션 위로 더 깊이 몸을 박았다.

“노래나 계속해라. 밤새 노래를 멈추지 말도록.”

그의 명령에 아넬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맑고 청명한 선율이 흘러나오자, 자레스는 자세를 바로하며 눈을 감았다.

심술궂은 명령을 내렸지만, 이 노래가 계속될 거라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도 깊은 잠은 이루지 못할 테지만, 반쯤 떠 있는 정신의 한구석에 아넬의 노래가 있다면 무척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에바드 대신 끌고 오길 잘했군.’

뜻밖의 횡재인 셈이다. 자레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자레스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아마도 본인은 깨어 있다 생각했을 테지만, 아넬이 노래 한 곡을 끝냈을 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깊이 잠이 든 것이다.

그럼에도 환도는 가슴 위로 꾹 쥔 상태였다. 자는 동안에도 절대 경계심을 버리지 않는 남자였다. 아넬 역시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노예로 태어나 황자로 인정받았으니…, 위험도 여러 번 겪었겠지.’

굳이 상상력을 보태지 않아도 다른 황자들이 자레스를 그냥 내버려 뒀을 리 없다는 걸 알아챘다.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모두가 경쟁자.

자레스는 아마 숱하게 암살 위험을 겪었을 것이다. 문득 그가 안쓰러워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태자로서 만났을 때나, 신전에 침입해 올 때나, 자레스는 아넬에겐 항상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살기를 벗은 지금은 자레스가 그리 무섭지 않았다.

여전히 냉정하고 잔혹한 사람이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넬에게 욕망을 품고 있진 않았다.

그녀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인 건 변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어렵긴 했지만, 수컷으로서 무섭진 않았다.

아넬은 편견을 씻어 낸 새로운 눈으로 잠들어 있는 자레스를 내려다봤다.

‘잘생겼…구나.’

두려움에 가려 미처 못 보던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길 아래 누운 남자는 확실히 아름다운 남자였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는 사내다워 보였고, 근육질로 꽉 차 있어 야성미가 넘쳤다.

그에 비해 얼굴은 아름다운 쪽에 가까웠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그 사나운 눈길을 피하느라 제대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얌전히 눈을 감고 있으니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나와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도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아넬이 가만히 속삭였다.

***

자레스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항상 반은 깨어 있고, 반은 잠든 가수면의 상태로 잤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날 때는 늘 머리가 무거웠는데 오늘 아침은 좀 달랐다.

잠시 누운 채로 눈을 깜빡이던 자레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 깊이 잠들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문제는 일어난 다음이었다. 아직 총기를 되찾지 못한 눈으로 침대 옆을 돌아보자, 의자 위에 고개를 반쯤 옆으로 기울인 채로 잠들어 있는 아넬이 보인 것이다.

‘엇?’

그 순간 자레스는 눈을 비볐다. 거기 앉아 있는 아넬의 모습 위로 다른 여자가 겹쳐 보였다.

허리까지 오는 옅은 색의 금발머리, 눈처럼 흰 예복을 걸친 여자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 여자는 부른 적이 없었다.

이 배에는 남자들밖에 없기도 했지만, 자레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여자를 들여보냈을 리도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환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돌연 여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노예 소년 파이디의 모습이 나타났다.

‘착각인가?’

자레스는 다시 눈을 비볐다.

역시 파이디였다. 삭발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가 짧고, 피부는 갈색으로 그을린 노예 소년.

방금 전 환각 속에서 봤던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와는 천지차이였다.

잠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그녀를 들여다보던 자레스가 턱을 괴며 생각했다.

‘머리를 기르면 조금 더 예뻐질 순 있겠군. 사내 녀석이지만 지금도 곱게 생긴 얼굴이니까.’

하지만 노예 소년이 곱상한 건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자레스 역시 이처럼 건장해지기 전에는 꽤 예쁜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노예 감독관이 그를 방으로 끌어들여 아랫도리를 더듬었던 적도 있고, 사지가 붙잡힌 채로 폭행을 당할 뻔했던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대신 그들에게 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그대로 몹쓸 짓을 당했거나, 아니면 살해당했을 것이다.

과거를 생각하자 문득 환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자레스가 황자로 인정받은 뒤, 그에게 붙잡혀 와 목이 잘렸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쥐지 않았다면, 자레스는 그들에게 똑같은 모욕을 당했을 것이다.

‘이 녀석도 노예로 살다 보면 나 같은 짓을 당하겠지.’

놓아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연민이란 감정이 그의 강철 같은 가슴속에서 아주 살짝 일어났다.

하지만 잠시 뒤 자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출항 전까지는 머릿수를 채워야 하니까.”

아직은 노예 소년 파이디가 필요했다. 그 뒤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자레스는 곧 침대에서 일어났다.

“헉!”

악몽에서 깨어난 아넬은 퍼뜩 눈을 떴다. 늘 되풀이되는 똑같은 악몽이었는데, 오늘은 끝이 좀 달랐다.

세계가 부서지는 대신,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와 있던 자레스가 끝까지 아넬의 몸을 부쉈다. 몸에 새겨진 지독한 고통이, 마치 방금 전 당한 것처럼 생생했다.

끔찍한 기억에 아넬이 제 머리를 짚는데,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원래 앉아 있던 의자가 아니라, 문 쪽에 놓여 있는 장의자에 눕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떡 일어난 아넬이 저도 모르게 걸친 옷을 만졌다. 헤집어진 흔적은 없었다. 셔츠는 여전히 잘 정돈돼 있었고, 바지 역시 내려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넬의 머리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자레스 황자가 날 데려다 눕힌 건가?’

그런 것도 모른 채 깊이 잠들었다는 게 한심하고, 또 그녀의 몸에 자레스가 닿았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는 보잘것없는 노예였을 터다. 그런데 그런 녀석을 발로 걷어차 깨우는 대신, 장의자에 옮겨다 눕히고 나갔다.

두 얼굴을 가진 듯한 모습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사람은 한 가지 모습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지난 생에서 아넬은 자레스의 잔혹한 일면만 보았지만, 그 뒤에는 자신처럼 노예였던 자들에겐 자비를 베푸는 면모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넬은 장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자레스가 생각보다 악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그게 파멸을 막을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자레스는 아무래도 쉽게 그녀를 놓아주진 않을 생각인 것 같은데, 그와 함께 있다가 여자인 걸 들키면 결국 전생과 같은 결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역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아넬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시간, 자레스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자레스에게 알현을 허가한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

정문을 통해 신전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부관과 수하들 몇 명을 거느린 채 신전에 들어온 자레스는 곧 수비대장을 만났다.

“죄송합니다만, 여기서부턴 황자 전하 혼자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기는 두고 가셔야 합니다.”

“알겠다.”

수비대장이 그를 알아보는 기색은 없었다. 자레스는 별 이견 없이 그의 권유에 따랐고, 곧 성탑으로 안내돼 갔다.

계단을 몇 층이나 올라가자, 곧 돌로 된 커다란 문이 열리면서 알현실이 나타났다.

침실 두 개쯤을 합쳐 놓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었는데 그 알현실의 끝에 놓인 보좌에 성녀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카비르의 황자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의 성녀 키리아였다.

자레스는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성녀를 쳐다봤다.

성녀 키리아. 세간에는 그냥 ‘성녀’로만 불리는 여자였지만 자레스는 성녀에 대해 공들여 조사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키리아가 성녀의 의무를 시작한 게 벌써 16년째였다. 스무 살에 성녀가 됐을 테니 지금은 서른여섯 살쯤 됐을 것이다.

하지만 성녀의 나이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외모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보좌에 앉은 키리아는 두터운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심지어 손까지 흰 비단 천으로 꽁꽁 싸매서 자신의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모조리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키리아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감출 수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 주변에서 성가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넓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환한 빛이 키리아의 몸에 부딪히며 반사돼 흰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게 그녀를 더 성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성녀님께 예를 표하십시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자레스는 흘낏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아까는 보지 못했는데, 보좌 근처에 세워진 기둥 그늘 아래에 시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목소리만큼 늙고 깐깐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키리아가 손을 저어 시녀를 말렸다.

“됐습니다. 괜한 허례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습니다.”

“하오나, 성녀님.”

“황자님께선 이리로 가까이 오십시오.”

키리아가 다시 손짓했다.

자레스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키리아에게 다가갔다.

보고 싶다고 청한 건 그였지만, 막상 성녀를 눈앞에 대하니 마치 보석에 달라붙은 한 점 이물질이 된 것 같은 느낌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그의 태생적 성격이었다.

어릴 때부터 학대당하고 일그러진 채로 자라난 그는 천성이 깨끗하고 바른 것을 싫어했다.

그런 것을 마주치면 부수고 짓밟고 싶었고, 마구 더럽혀서 그 고결함을 비웃고 싶어졌다.

어쩌면 자신은 구제받을 수 없는 악의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놈이군.’

성녀의 광휘가 빛날수록 더 기분이 나쁜 게, 만나고 싶어 할 때와 달리 지금은 얼른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대가 적이라면,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었지만 성녀는 그가 겨룰 대상이 아니다. 짓눌러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녀는 마치 그런 마음속까지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다가와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레스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러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카비르의 16황자시라고요.”

가까이서 들으니 더 고상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각국 지배자들의 시녀 정도로만 짐작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성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저야말로 황자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병중이라고 하셔서 만나기를 포기하려던 차입니다. 지금도 불편하신 것을 참고 계신 게 아닙니까?”

아프다 하면 그를 핑계로 재빨리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 메타의 가호로 다 나았습니다.”

알현을 거절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레스 역시 마음이 변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예의를 버리고 키리아를 긁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저는 성녀님께서 저를 만나기 싫어서 핑계를 댄 거라 생각했습니다. 치유의 성녀가 병이라니요.”

어서 키리아가 그를 욕하며 일어나 쫓아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바람은 곁에 선 시녀에게만 통했을 뿐, 키리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성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자레스가 그동안 들어온 것과 똑같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치유의 힘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때를 위해 아껴야 합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조차 함부로 힘을 베풀 수 없는 겁니다.”

“권력자들을 치유하느라 자기 몸은 치료할 수도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하시는군요.”

시녀 쪽에서 시커멓다 못해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자레스는 그런 눈빛을 한두 해 겪어 본 게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레스 황자. 성력에 대해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 보십시오.”

들어준다는 태도로 거만하게 말하자 키리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성력은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고갈되지요. 나이가 들면 성녀의 육체도 시들고, 신이 남겨 준 성력도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런데 힘이 얼마 남지 않은 그때 고귀한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요? 자레스 황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성녀는 아무에게나 그 힘을 베풀지 않는 겁니다.”

“고귀함의 기준은 누가 판단하는 겁니까?”

자레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서는 예민한 주제였기에, 자레스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천하고 귀한 것은 대체 누가 구분한단 말인가. 메타가 그를 허락한 거라면 신과 싸우고 싶었고, 그 신의 하수인인 성녀와 싸우고도 싶었다.

타고난 반항심이 튀어나와, 성녀를 향한 자레스의 눈빛은 오만하게 이글거렸다.

하지만 성녀 역시 호락호락한 이는 아니었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고요한 목소리로 성녀가 말했다.

“그건 때가 오면 알게 됩니다. 자레스 황자,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생명의 귀함이 권력이나 돈에서 비롯된 게 아니란 겁니다. 우리는 오직 메타가 내린 숙명에 따라 구해야 할 생명을 살리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계속 구르게 만들 뿐입니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생명을 살리는 기준이 권력과 재력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기에는 성녀의 고매한 위엄이 그의 비뚤어진 사고를 막았다.

성녀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직감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때가 오면 알게 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돈이나 힘이 생명을 살리는 기준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고귀한 생명이라는 건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건… 설명하기 힘들군요. 그건 알 수 없는 운명 같은 겁니다. 성녀로 살다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되지요. 이 선택이 운명을 가른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성녀는 그 운명에 따라 자신의 힘을 발휘할 뿐입니다. 자레스 황자, 모쪼록 기억해 주세요. 성녀의 힘에는 눈이 없습니다. 오직 본능에 따라 사람을 구하고 운명을 좇아 나아갑니다. 황자님, 당신이 그러했던 것처럼요.”

역시 모호한 대답이었다. 뭔가 진중한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말장난 같기도 한, 예언자들의 말처럼 두루뭉술한 참언이다.

귀에 새겨 두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어쩐지 막연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그래서 자레스 황자, 애초에 저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고 보니 원래 볼일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볼일이 사실은 에포메니에 대한 일이었고, 성녀 알현은 에포메니를 보여 달라 하기 위한 핑계였기 때문에, 신전에 대한 경비가 강화된 지금에 와서는 입에 올리기가 어려웠다.

자칫하다간 지난 밤 성탑에서 일어난 소동의 장본인이라 의심당할 수도 있으니.

“…사실 근래에 좀 몸이 좋지 않아 성력을 나눠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프시다고 하니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카비르로 돌아갈 수 있도록 출항 허가나 내주십시오.”

그 말에 문득 성녀가 신중한 눈으로 자레스를 들여다봤다. 아까도 그 눈길이 그를 향하긴 했지만 이번엔 그 깊이가 좀 달랐다.

마치 뚫어질 것처럼 날카롭게 들여다보는데, 항상 상대를 압도하는 쪽이었던 자레스로서는 드물게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어지는 말에는 더 그랬다. 돌연 키리아가 물었던 것이다.

“혹시 제가 아니라 에포메니가 궁금하셨던 겁니까?”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걸까?

‘성녀는 남의 속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는 건가?’

정곡을 찔린 자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키리아가 잔잔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운명이 당신을 인도할 겁니다. 때가 되면 당신은 에포메니를 만나게 될 거예요.”

“…….”

“에포메니를 만나거든 모쪼록 아껴 주세요. …그 아이는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아주 연약한 아이랍니다.”

“그럼 다시 한번 이렌시아를 방문해야겠군요. 부디 에포메니께 제 이야기를 잘해 주십시오,”

키리아의 말은 알맹이가 있는 듯, 비어 있었다. 또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레스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태연하게 받아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은근히 비꼬는 말에 키리아는 더 크게 웃을 뿐이었다. 키리아의 웃음소리가 아예 알현실을 다 채울 것처럼 커졌다.

자레스는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녀는 무슨, 사실은 미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돌연 키리아가 웃음을 뚝 그치고 말을 이었다.

“아니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자레스 황자. 에포메니를 찾아오지 마세요. 그녀가 당신을 찾아갈 거니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알현 시간이 끝났습니다, 황자님. 항만 관리에게 말해 출항 허가를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의 가호가 당신 앞을 비추기를. 자레스 황자, 안녕히 가세요.”

마치 칼로 밧줄을 자르는 것처럼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자애로운 모습과는 영 딴판인.

자레스가 얼떨떨해하며 일어나자, 마지막으로 키리아가 덧붙였다.

“황자님,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신전의 노예장에게 황자님께 드릴 선물을 맡겨 놓았습니다. 신전에 들른 기념 선물이라 치고 그걸 받아 가세요.”

그 말과 함께 자레스는 황망하게 알현실 밖으로 밀려났다.

***

자레스가 배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 해가 해수면 위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던 부관이 자레스가 배로 들어서자 바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성녀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래.”

“어떤 분이시던가요? 알현을 거절하다 갑자기 부른 이유는 뭐랍니까?”

수선스러운 질문에 자레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부관을 돌아봤다.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지?”

“네? 전하, 혹시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부관이 자레스가 겪는 일에 이런저런 호기심을 드러낸 건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부관의 임무가 자레스를 모시는 일인 걸 생각하면, 그가 벌이는 모든 일을 알아 둬야 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관의 부산한 질문이 짜증스러웠다.

자비로운 얼굴로 사람 속을 들여다보던 성녀.

무력하게 그 시선 아래 해부당하던 느낌.

그 모든 게 뒤엉켜서 불쾌함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 마치 성녀에게 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자레스는 자기감정을 제어하고 숨기려 애썼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녀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성녀가요? 위엄 있고 지혜로운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나도 모르겠어. 늙어서…, 아니 성력을 너무 써서 치매가 온 건지도 몰라. 하여튼 엉뚱한 말만 지껄여 댔어. 성력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 함부로 나눠 줄 수가 없다더군. 그게 다다.”

“그런가요….”

“출항 허가는 받아 뒀다. 여기 더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으니, 내일 아침 해가 밝는 대로 출항한다.”

부관이 명을 받들겠다는 뜻으로 허리를 숙였다. 자레스가 그를 끝으로 몸을 돌렸을 때, 문득 그의 귀 끝에 걸리는 소리가 있었다.

딸랑.

작은 방울 소리.

시선을 들어 보니 조타실로 올라가는 계단 쪽에 아넬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눈길이 마주치자 아넬이 흠칫 놀란 얼굴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방울을 딸랑거리며 조타실로 올라가 버리는 아넬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가 채우라 지시한 방울이건만, 그게 확실히 제 역할을 하는 게 어째선지 재미있다.

자레스는 선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는 자그마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헉….”

아넬은 덩치 큰 키잡이 뒤에 숨어 자레스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가 왜 자꾸 그녀를 쏘아보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그냥 눈길이 마주친 건가 싶어서 조타실로 도망쳐 올라왔는데, 그는 아넬이 시선을 피한 뒤에도 계속해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최대한 숨는 수밖에 없었다. 뭔가 찾을 거라도 있는 양, 키잡이 뒤에 숨어 그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숨기고 있노라니 어느 순간 자레스는 사라졌다.

그제야 아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새벽, 자레스가 그녀를 장의자에 안아다 눕힌 걸 깨달은 뒤로는 부쩍 그와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원래도 그가 무서웠지만,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몸의 접촉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더 겁이 났다.

현재 그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몸이다. 하지만 몸이 계속 닿는다면 언젠간 그녀가 여자란 걸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여기 더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으니, 내일 아침 해가 밝는 대로 출항한다.”

자레스의 말대로라면 배는 내일이면 카비르로 출항할 텐데. 대해로 나가면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오늘 밤, 탈출해야 했다.

아넬은 신중하게 선원들이 배에 물자를 옮기는 걸 지켜봤다.

아마 식량과 물자를 다 채우면 배는 카비르를 향해 빠르게 달릴 터다. 대량의 물자가 들어오는 걸 보면, 카비르로 가는 동안 다른 항구에 기착하지 않을 속셈인 것 같았다.

“어이, 파이디! 너도 와서 좀 도와라!”

“알겠습니다.”

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누군가 아넬을 불렀다. 아넬은 군소리하지 않고 달려가서 뱃전에 올려놓은 짐을 들었는데, 아넬은 거기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포도 상자였다. 대충 널빤지를 둘러 만든 나무 상자 안에 포도가 잔뜩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넬은 포도 상자를 들고 화물칸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는 틈을 타 포도알 몇 개를 따서 옷섶 안에 집어넣었다.

아마 누군가 봤다 해도 그리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행동이었다.

***

해는 지고 빠르게 밤이 찾아왔다.

자레스가 또 그녀를 부른다는 병사의 말에 아넬은 선원들의 침소를 빠져나와 그의 방으로 갔다.

안 그래도 남자들 사이에서 자는 게 불편하다 못해 두려운 참이었다. 그런 마당에 자레스가 그녀를 부르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며 아넬은 자레스의 방으로 들어섰다.

“앉아라.”

자레스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어젯밤처럼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아넬이 노래를 부르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레스가 손짓을 하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노래는 필요 없다. 네 노래를 들으면 너무 깊이 잠들어서 위험해.”

‘그럼 나를 왜 부른 거지?’

사실 노래로 그를 잠재우고 달아날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곤란해진다. 두려움이 어린 눈빛을 다른 각도로 해석했는지 자레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또 옷을 벗길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럼 무슨 일을 시키실 건지….”

용건이 없으면 나가겠다는 말을 돌려서 하자 자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성녀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다.”

“네?”

“신전에서 살았으니, 성녀 키리아에 대해 남들보단 더 많이 알겠지. 네가 아는 모든 걸 다 얘기해 다오.”

“저는… 노예일 뿐이라 성녀님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성녀님에 대한 건 모시는 시녀들이나 알지, 저 같은 노예가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흐음, 그러면 널 살려 둘 이유가 없군. 네 노래는 능력이 너무 과해서 오히려 해가 되고. 어차피 출항 허가도 받아 뒀겠다, 더는 수색을 당하지도 않을 테니, 배가 출항하는 대로 널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게 낫겠어. 그럼 적어도 식량이 축나는 건 막겠지.”

냉정한 인간. 쓸모없는 수하는 가차 없이 버린다더니 또 그녀에게 가치를 증명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성력 하나뿐, 그런데 그것은 자레스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내보여선 안 될 것이었다.

“할 말이 없는가 보군.”

“…….”

“그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오늘 밤, 내 옆에서 자라.”

“네?”

이번엔 진짜 아넬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냥 남자 옆에서 자는 것도 무서운데 자레스의 침상에 함께 눕는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뭘 그리 겁을 먹지?”

“하지만… 사내에겐 관심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지금도 변함은 없다.”

‘그런데 왜?’

눈빛에 서린 의문을 알아챈 자레스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날이 추워져서 침상이나 덥힐까 했는데, 네 반응을 보니 점점 재밌어지는군.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내가 널 덮치기라도 할까 봐서?”

“아닙….”

하지만 부정하려던 아넬은 이어지는 말에 칼에 찔린 것처럼 놀랐다.

“이건 마치 여자 같은 반응이 아닌가.”

아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오히려 더 펄펄 뛰며 화를 내야 할 텐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말문이 막힌 아넬의 얼굴이 귀 끝부터 붉어지기 시작했다. 의외의 반응에 오히려 놀란 건 자레스였다.

맹세코 사내에겐 추호도 관심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어린 남자의 이 낯선 반응은 묘하게도 그의 흥미를 끌었다.

정말로 수줍어하는 여자 같았다.

무심코 말을 던져 놓고서야, 자레스는 아넬의 반응이 제 말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묘한 건 그것이 그에게 잔인한 즐거움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아넬이 펄쩍 뛰는 게 재미있었고, 정색을 하는 게 우스웠다. 그는 이 유치한 유희가 즐거워졌다.

하지만 아넬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난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잠드는 것도 무서운데 그의 곁에서 함께 잔다고?

피하는 수밖에 없다. 아넬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도발하기로 결심했다.

“…왜 하필 접니까?”

“무슨 뜻이지?”

“사람을 믿지 못해서 자는 동안에도 칼을 놓지 않는 분이시잖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본 지 며칠 되지도 않는 저를 침대에 들이시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겁이 납니다.”

“내가 남색 취미라도 있는 줄 아는 건가.”

자레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에게 그런 취미가 없기에, 그쪽으로는 생각도 안 해 봤는데 문득 아넬의 외모를 보니 그런 걱정을 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너 같은 놈 정도면 칼이 없어도 한 손으로 눌러 죽일 수 있다. 너를 불러들인 건 그 이유뿐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레스가 덧붙였다.

“그런데… 네 그 눈빛을 보니 그럴 생각이 없어지는군. 내가 왜 네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해 줘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예?”

“노예가 감히 주인에게 질문을 하고 토를 달다니, 눈알이 뽑히고 싶어 안달이 나나 보군.”

“…죄송합니다.”

갑자기 오싹해졌다. 생각이 짧았다.

노예로 살아 본 적이 없었기에 실감하지 못했는데, 노예란 물건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소용이 없어지면 버리고, 마음에 안 들면 죽인다. 자신은 그런 존재를 자처한 것이었다.

“나가라. 눈알을 뽑더라도 일단 바다로 나가서 뽑을 테니까. 출항 전에 말썽이 나는 건 귀찮아.”

손사래를 치며 자레스가 몸을 돌려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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