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 아넬은 다시 갑판으로 올라왔다.
배 위에는 이미 습격대가 꾸려져 있었다. 온통 검은 옷으로 몸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병사들이 옆구리에 긴 환도를 찬 채 아넬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레스는 무리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금으로 만든 칼집을 차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구별할 수 있었다.
아넬이 나타나자 자레스가 얼굴 아래쪽에 천을 둘러쓰며 외쳤다.
“가자.”
작은 배가 내려졌다. 배에 탄 인원은 자레스를 포함해 열 명 정도였다. 인원 중에는 처음 물에 뛰어들어 아넬을 배에 끌어 올렸던 남자도 포함돼 있었다.
아넬을 보자 그가 턱을 가린 옷깃을 치우며 싱긋 웃었는데, 그 웃음이 선량해 보였다.
“같은 노예라고 친하게 지내려는 건가.”
자레스의 핀잔에 아넬은 그 남자 역시 노예란 걸 알아챘다. 자레스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아넬을 배 한복판에 앉히며 인사를 했다.
“나는 에바드라고 해.”
“나는… 파이디입니다.”
신전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었던 소년 노예의 이름을 대자 에바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 공을 세우면 자레스 님이 너를 중하게 쓰실지도 몰라. 나도 그랬거든. 아직 노예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레스 님은 날 신뢰하셔.”
그러니까 너도 최선을 다하라는 표정으로 에바드가 다시 웃었다. 천진해 보이는 그 얼굴은 아직 스물도 안 돼 보였다.
노예의 처지는 아르드의 어딜 가나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카비르는 노예를 혹사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랐다면 에바드 역시 말 못 할 고생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넬은 그런 그를 배신하고, 실패만 안겨 준 채 사라져야 했다.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와 아넬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에바드. 그래도 난 도망쳐야 해.’
그러지 않으면 이 착한 에바드 역시 아르드와 함께 재가 될 것이다. 이 세계를 위해서 아넬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다른 쪽으로 굴려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윽고 자레스가 명령했다.
“배를 섬 뒤쪽으로 몰고 가라!”
어둠 속에서 일행이 탄 배가 빠르게 움직였다.
자레스와 아넬을 제외한 자들이 모두 노를 쥐고 저었기 때문에 속도가 무척 빨랐다. 아넬이 알려 준 대로 은밀하게 배가 섬의 뒤쪽으로 돌아갔고, 그러자 병사 한 명이 횃불을 붙였다.
섬 뒤편이기 때문에 육지 쪽에선 아무도 볼 수 없는 장소였다. 불을 비추자 곧 절벽 위쪽에 만들다 만 계단이 있는 게 보였다.
“신전 노예의 말이 진짜였군.”
자레스가 턱짓을 하자, 뱃머리에 서 있던 병사가 재빨리 절벽으로 뛰어올랐다.
체구가 작지만 덕분에 몸놀림도 가벼운 남자였다. 험한 절벽을 맨손으로 척척 올라간 그가 곧 계단에 도착해서는 절벽 틈 사이에 나무못을 끼워 넣었다.
두 개의 나무못을 박고 거기에 줄사다리를 걸자 나머지는 그 줄사다리를 타고 훨씬 더 수월하게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됐다.
너무나 빠른 그들의 행동력에 아넬은 감탄했다.
아르드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을 탄생시킨 카비르 군의 능력이 새삼 실감이 났다.
“파이디를 끌고 올라가라.”
그때 자레스의 지시가 들려왔기 때문에 아넬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끌려 올라가면 탈출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도망치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커먼 물속을 힐끗 쳐다본 순간, 자레스가 돌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니 그의 손에 밧줄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아넬의 허리에 밧줄을 묶은 자레스가 그 밧줄의 끝을 자신의 허리에 동여맸다. 두 사람의 몸을 연결해 버린 것이다.
아넬은 당황했다.
밧줄을 묶을 줄도 몰랐지만, 하필 묶어도 자레스에게 연결되다니.
이렇게 되면 아넬이 바다에 뛰어들어도 자레스가 함께 끌려오게 되니 도망을 칠 수 없게 된다. 낭패한 아넬의 얼굴이 바다보다 더 새카맣게 변했다.
‘어떡하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병사들이 아넬의 팔목을 홱 잡아끌었다.
얼결에 줄사다리로 밀어 올려지자 아넬은 어쩔 수 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그 뒤로 곧바로 자레스가 뒤따랐다.
형형한 눈빛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 같았다.
도망치려는 속셈을 자레스가 미리 짐작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마침내 한 명만 빼고 모든 인원이 계단 위로 올라왔다. 마지막 한 명도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줄사다리에 배를 묶은 뒤 재빨리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 갈라지는 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배수로가 나옵니다.”
“가자.”
자레스의 명령에 사람들이 날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레스 역시 빠르게 달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넬도 허덕허덕 뛰어야 했는데, 자레스의 몸놀림이 너무 빨라서 아넬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달려야 했다.
병사들은 그렇다 쳐도 자레스까지 이렇게 민첩한 건 의외였다. 수로 입구에 다다른 그들이 잠깐 멈춰선 동안 아넬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진땀을 흘렸다.
“배수로는 이 동굴 안에 있나?”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자레스가 병사들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기회였다. 그들의 주의가 온통 동굴 쪽으로 향한 그 순간, 아넬은 힘을 집중했다.
아넬은 성탑 위, 꼭대기에 달려 있는 종을 기억해 내려 애를 썼다.
숱하게 바람을 받는 그 지붕엔 아마도 식물의 씨앗들도 많이 날아와 붙어 있을 것이다. 아넬은 그중의 하나가 굵은 뿌리를 내리는 것을 상상하며 힘을 모았다.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면 힘을 집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종탑과 이 배수로는 거리가 있어서 과연 성력이 거기까지 전해질지는 알 수 없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가능성에 모든 걸 거는 수밖에 없었다.
‘메타시여! 힘을 주소서!’
아넬은 힘이 들어 그런 척, 몸을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자레스의 병사들이 막 동굴로 뛰어들려는 순간, 신전 쪽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텅!
뭔가 쇠로 된 거대한 것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첫 번째 소음에 자레스와 카비르 군사들이 일제히 멈춰 섰고, 이어서 더 큰 굉음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신전의 중정 쪽에서 벌통이 터진 것처럼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일어났다. 아마도 신전 문을 지키는 수비병들일 것이다.
“무슨 일이냐! 적의 침입인가?”
오늘은 파도가 잔잔했기에, 목소리는 어둠을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거기에 뭐라 대답하는 병사들의 목소리 역시 수선스럽게 들려왔다. 목소리 속에 긴장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카비르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런 소동이 일어나면 바로 신전 안의 감시가 강화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은밀히 잠입하려던 계획은 이 시점에서 끝난 것이었다.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넬이 낮게 속삭이자 자레스가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하필 신전의 입구를 목전에 둔 시점에 소란이 일어난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만 생각하긴 어려웠다.
자레스는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증거는 전혀 없었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히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종이 떨어졌습니다! 종탑의 종이 떨어졌어요!”
문득 들려온 수비병들의 고함에 자레스는 눈길을 그리로 돌렸다. 그녀의 힘이 닿았다. 의도대로 지붕에 내려앉은 씨앗들 중에 덩굴 종(種)의 씨앗이 있었던 것이다.
발아한 그 씨앗이 큰 덩굴이 돼 종탑을 휘감으며 종을 밀어 떨어뜨렸고, 떨어진 종이 굉음을 일으켜 수비병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멀쩡하던 종이 갑자기 떨어진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수비대장은 곧바로 적의 침입을 의심했다.
“침입자의 짓일지도 모른다! 얼른 성녀님과 에포메니를 대피시켜! 그리고 수비병 인력의 반은 종탑으로 올라가라!”
이어서 또 다른 함성이 들려왔다.
“신전으로 통하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막아라! 혹시 모르니 배수로 쪽으로도 병력을 보내!”
병사들이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어그러진 게 확실했다. 자레스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잠입을 강행하느냐, 아니면 서둘러 배로 도망을 치느냐.
자레스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퇴각해라!”
아넬에 대한 의심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지금은 일단 도망쳐야 할 때였다. 카비르 군사들은 자레스의 명령에 맞춰 왔던 길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자레스가 빠르게 달렸기 때문에, 아넬도 따라가야 했다.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아넬은 다리가 꼬일 것 같았다.
이대로는 넘어져서 자레스에게 질질 끌려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돌연 신전 안마당 쪽으로 이어지는 계단 길 쪽에서 불빛이 나타났다.
“누구…!”
선두에 선 수비병들이 카비르 군을 발견했지만 목소리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일행의 맨 앞에 선 카비르 병사가 표창을 집어던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머리에 표창이 박힌 신전 수비병이 그대로 바다로 떨어졌다.
“선두에 선 자들은 먼저 배로 내려가라!”
자레스가 고함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카비르어가 아니라 대륙 공용어로 외치고 있었다. 출신을 감추려는 것이다.
황자를 보호하지 않고 병사들을 먼저 내려 보내는 게 아넬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카비르 병사들은 두말하지 않고 자레스의 명령에 따랐다.
계단 길은 육박전을 벌이기엔 너무 좁았다. 맨 앞에 선 자들이 싸움을 벌이면 뒤에 선 자들은 꼼짝없이 좁은 길에 갇혀 있어야 했고, 그러면 모두 길에 갇혀 죽게 된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아넬은 자레스의 판단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걸 절감했다.
그는 심지어 용맹하기까지 했다. 앞에 선 자들이 빠르게 줄사다리로 내려가자마자 자레스가 앞쪽으로 튕기듯 달려 나갔다.
얼결에 아넬 역시 함께 뛰게 됐는데, 마주 오는 신전 수비병들과 부닥친 순간 자레스가 허리에 찬 금빛 환도를 빼 크게 휘둘렀다.
“헉!”
아넬이 깜짝 놀라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선두에 선 수비병의 목이 그대로 잘려 날아갔다.
신전 수비만 담당했을 뿐, 실제로는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병사들이었다. 애초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의 칼놀림 끝에 달려오던 수비병들 서넛이 팔다리가 잘리며 한꺼번에 바다로 떨어졌다. 나머지 두어 명은 몸을 되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신전 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여기 있습니다!”
자레스가 허리춤에 꽂아 놓은 단검집에서 칼을 빼더니 달려가는 수비병의 등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 역시 등에 단검이 꽂힌 채 엎어지자, 자레스가 뒤돌아 명령했다.
“모두 배로 모여라!”
명령을 내린 그가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넬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가야 했다. 몸이 굳어 덜그럭거리는 채로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디자 그녀 때문에 줄사다리 중간에서 발이 묶인 자레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때 머리 위에서 또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계단 길이 신전과 이어지는 지점에 횃불이 점점이 켜지는 게 보였다.
그 횃불 아래로 몰려오는 수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엔 육박전을 택하지 않았다. 밝은 횃불 아래 수비병들이 활을 장전하는 모습을 본 에바드가 소리를 질렀다.
“궁병입니다! 피하십… 억!”
계단 길에 일렬로 늘어선 사내들은 훌륭한 과녁이었다. 시커먼 옷으로 몸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날아온 화살이 에바드의 가슴팍을 꿰뚫으면서 에바드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젠장!”
궁병이 나타난 이상 이대로 있다간 나머지 병사들은 꼬치처럼 꿰여 죽을 수밖에 없었다.
욕설을 내뱉은 자레스가 아넬의 다리를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어깨에 얹고는 그대로 배 위로 뛰어내렸다.
뱃전이 출렁거리며 흔들렸지만, 다행히 먼저 타고 있던 병사들의 몸무게 때문에 뒤집히진 않았다. 자레스가 몸의 중심을 잡으며 병사들에게 외쳤다.
“모두 배 오른쪽으로 옮겨! 배를 뒤집어라!”
카비르 병사들은 민첩했다.
아넬이 영문을 몰라 허둥대는 사이 사람들의 체중이 오른쪽 뱃전으로 몰리면서 작은 조각배가 뒤집혔다.
그 바람에 아넬 역시 자레스와 함께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아…!’
아넬은 시커먼 물속에서 정신없이 허둥댔다. 당황한 나머지 물도 몇 모금 마셨는데, 그때 자레스가 아넬을 이끌고 팔다리를 움직여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결에 그에게 딸린 채 올라가다 보니 누군가 던진 횃불 빛에 그들이 타고 온 배가 뒤집힌 채로 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신전 수비병들이 화살을 쏠 대상을 찾기 위해 횃불을 던진 모양이었다.
‘영원의 불을 가져왔나?’
영원의 불은 신전의 중정 한복판에 피워 놓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그 불은 바닷물 위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그 빛에 물속으로 떨어진 카비르 병사들이 일제히 헤엄쳐서 그 배 아래로 모이고 있는 게 보였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서 돌처럼 굳어 천천히 가라앉는 것도 보였다. 신전 수비병들이 쏜 화살에 맞은 시신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자레스에게 딸려 올라가던 아넬의 시선에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가는 에바드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가린 천이 풀린 탓에 에바드인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자기처럼 공을 세우라며 환하게 웃던 에바드는 가슴팍에 화살을 꽂고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나 때문에….’
그를 보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녀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아도 됐을 사람이었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신전을 탈출하긴 했지만, 과연 그것 말고 방법이 없었을까. 불현듯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아넬의 손끝에 저절로 성력이 모였다. 지금 성력을 발휘한다면, 어쩌면 에바드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레스의 말마따나 성녀의 성력은, 전력을 다하면 죽은 사람까지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에포메니의 성력은 성인이 된 성녀보단 약하지만,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팔을 뻗어 에바드를 붙잡을 수 있다면…!
“성년이 되기 전엔 절대 치유력을 발휘하면 안 됩니다. 성력을 발휘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치유력은 더더욱 안 됩니다!”
거듭 거듭 강조하던 수석 시녀 블로자의 얼굴이 생각나는 바람에 아넬은 멈칫 뻗으려던 손을 멈췄다.
식물을 개화시키는 게 성력이라면, 치유력은 다친 생명을 고치고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시키기까지 하는 것으로, 성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차원의 힘이었다.
성력을 발휘한 것도 모자라 치유력까지 끌어내면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멸망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헉!’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레스가 강하게 자맥질을 하며 위로 솟구친 바람에 아넬은 에바드를 스쳐 지나가며 그대로 끌려 올라갔다.
그와 함께 에바드의 몸은 곧 시꺼먼 구렁 속으로 잠겼다. 사라져 가는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넬은 눈물을 삼켰다.
‘미안해…, 미안해요, 에바드.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자레스가 마지막으로 세차게 발을 차면서 아넬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수면이 아니라 뒤집힌 배 아래였다. 이미 바다로 뛰어들었던 부하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배는 그 아래쪽에 공기를 가둬 두고 있었다. 누군가 수면으로 던진 횃불을 가지고 들어왔기에 거기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환히 보였다.
“이게 다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카비르 병사의 수는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마 궁병이 나타나자 죽은 에바드를 제외한 병사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레스의 명에 따라 충실하게 배 안쪽으로 모여들었다. 참으로 일사불란한 부대였다.
“가자.”
인원을 확인한 자레스가 명을 내리자 곧 뱃머리 쪽에 떠 있던 자들이 배를 밀면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아넬은 수영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뱃전을 잡자 떠 있을 수는 있게 됐다. 아넬이 어쩔 수 없이 자레스를 따라 발장구를 치는 동안, 배가 앞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떵, 떵 소리를 내며 뒤집힌 배 위로 화살이 박히고 있었는데, 배가 뒤집히면서 오히려 튼튼한 방패가 됐다는 것을 아넬을 깨달았다.
‘그래서 배를 뒤집었구나.’
자레스는 냉혹한 투귀였지만, 훌륭한 전투 지휘자이기도 했다.
아마 그런 능력 덕에 황위를 찬탈했을 것이고, 신전 수비병들을 참살하며 성탑까지 밀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를 떠올린 아넬은 새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
자레스와 카비르 병사들은 무사히 배로 돌아왔다.
아넬은 도망칠 겨를도 없이 또다시 갑판 위로 끌어 올려졌고,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도끼로 부숴서 썰물에 띄워 멀리 보내 버렸다.
물에 젖은 쥐 꼴이 돼서 갑판 위로 올라오자, 서둘러 달려온 부관이 그들을 맞았다.
그는 자레스의 측근이었는데, 안 그래도 신전 쪽에서 굉음이 들리고 횃불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자 일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직감한 터였다.
“카비르로 출항할까요?”
“아니. 어차피 출항 허가도 안 받았다. 이 상태로 도망치면 범인은 카비르의 황자라고 알리는 꼴밖에 안 돼.”
고개를 가로저은 자레스가 덧붙였다.
“일단 모두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태세를 정리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어.”
말을 마친 자레스가 이번엔 시선을 아넬 쪽으로 돌렸다. 찌르는 듯한 그의 시선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가 아넬을 노려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왜 하필 우리가 잠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종이 떨어졌을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때맞춘 사태였다. 마치 종이 제 몸을 던져서 적의 침입을 알린 것 같지 않은가.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아넬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자, 자레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알아. 마법은 이미 실전됐지. 마법의 힘이라 할 수 있는 건 이제 이 아르드에 성녀밖에 안 남았다.”
이번엔 자레스가 시선을 저 멀리 신전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성녀는 신전에 갇혀 있지. 후계자인 에포메니도.”
그러니까 지금 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어나는 의심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종을 떨어뜨리는 마법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세간에 알려져 있는 성녀의 성력은 오직 치유력뿐이었다.
다친 사람을 고치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며, 때로는 죽은 사람까지 되살린다는 신비한 힘.
하지만 한참 멀어진 곳에 있는 종을 떨어뜨리는 것은 성녀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건 치유력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죽어 있던 종을 되살려서 제 발로 뛰어내리게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며 자레스는 입을 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는, 곁에 둬 보면 알 수 있겠지.”
“저를 풀어 주시는 게 아닌가요?”
아넬이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자레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무시했다.
“노예는 주인이 해방시켜 주지 않는 이상 노예일 뿐이다. 이제 네 주인은 신전에서 나로 바뀌었다.”
“하지만…!”
“내 시중을 들던 노예 에바드가 죽었다. 네가 대신 내 시중을 들어라.”
일체의 반문을 용서치 않는 태도였다. 제 할 말을 다 한 자레스가 곧바로 몸을 돌려 제 방을 향해 척척 걸어갔다.
***
“무슨 속셈이십니까?”
그를 따라 들어온 부관이 물었다.
자레스는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부하들에게는 그리 나쁜 주인이 아니었다.
능력이 없으면 주저하지 않고 버리지만, 그가 인정하고 가까이 두는 자의 직언은 귀 기울여 들었다.
그 증거로, 건방지게 속셈을 따져 묻는 부관의 태도에도 자레스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신전에 다시 들어가진 못하게 됐으니, 저 녀석은 쓸모가 없어졌지 않습니까. 굳이 왜 거두시려는 거지요?”
“놈의 쓸모는 내가 정해.”
머리에 넣어 둔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세우기 전에 아넬이 보인 행동이 그를 몹시도 거슬리게 만들었다.
아넬은 물속에서 에바드를 구하려는 것처럼 간절하게 손을 뻗었었다. 그 모습에 자레스는 그녀와 자신을 연결한 끈을 잘라 내고 아넬을 버리려던 계획을 결국 수정하고 말았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동정심은 절대 금물인 걸 알고 있었다. 싸구려 연민은 수명을 단축하는 최악의 짓이다.
하지만 위험을 알면서도 끝까지 에바드를 놓지 못한 아넬의 반응은 자레스의 신경을 건드렸다.
좋은 쪽과 안 좋은 쪽, 양쪽으로 다.
“에포메니가 신전에 있는 건 맞나?”
“에포메니에 대해선 워낙 극비리에 지켜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성녀는 거의 매일 접견자를 알현하지만, 에포메니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알 수 없다라….”
“에포메니가 신전 밖에 있는지, 애초에 있기는 한 건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녀와 에포메니에 대해서 알려진 게 너무 없어. 후계자를 어떻게 찾아내는지도 정확히 모르니….”
“매년 전 세계의 여아들 중에 시험을 거쳐서 합격한 자를 신전에 데려온다고 하더군요. 제가 조사한 바로는 치유력을 가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아이를 일부러 다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끔찍한 짓이로군.”
“치유의 힘이 있으면 아이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죠. 말귀를 알아듣는 나이가 되면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있고, 반대로 너무 어리면 성력이 모자라 치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세 살 전후에 시험을 거친다고 합니다.”
“상처를 입히기엔 너무 어린 나이군.”
“그렇죠. 치유력을 발휘한 여아를 신전에 데려가 에포메니로 삼고 키우는 겁니다. 그러다 성년이 되면, 배례식에서 인사를 하고 처음으로 성력을 베푼다고 들었습니다.”
“말이 배례식이지, 결국은 성녀를 독차지하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꼭꼭 숨겨 놨다가 배례식이랍시고 세계의 권력자들이 죄다 찾아왔을 때 차례로 치유력을 베풀지. 그 뒤로도 성녀의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죄다 힘 있고 돈 있는 자들뿐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수명과 건강까지 독차지하다니, 메타께서는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신랄하게 비꼬는 말에 부관은 입을 다물었다. 누가 들으면 좋을 것 없는 말이었지만, 자레스는 듣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레스는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지금의 에포메니가 발견된 게 16년 전이니, 계산대로라면 지금은 열아홉이 됐겠군.”
“그럴 겁니다. 발견됐을 때 세 살이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듣자 이상하게도 자레스의 머리에 아넬이 떠올랐다.
곱상하게 생긴 노예 소년.
혹시 여자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갑판에 끌어 올려졌을 때 물에 젖어 윤곽이 드러난 가슴팍은 납작하기만 했었다. 도저히 여자라고 볼 수 없는 몸매였다.
게다가 열아홉이라고 하기엔 체구도 너무 작았다. 잘해야 열두어 살 정도로 보였는데, 에포메니로 의심하기엔 나이도 맞지 않고 성별도 맞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일어났던 의심은 곧 스러졌다. 하지만 생각이 난 김에 자레스는 그녀를 부르기로 했다.
부관의 명령을 전달받은 아넬이 잠시 뒤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아넬은 이미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는데, 방으로 들어온 아넬의 목에는 이상한 것이 채워져 있었다.
자레스는 아넬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것을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아넬은 술과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자레스의 명령에 방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들렸다.
아넬의 목에 채워 놓은 방울이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였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채운 것인데, 과연 아넬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방울 소리가 나서, 꽤 떨어진 곳에서도 그녀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효율은 그렇다 쳐도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마치 고양이에게 방울을 건 듯한 모습이라, 쳐다보는 자레스도 설핏 웃음을 흘렸다.
아넬 역시 치욕스러운지, 그의 웃음에 움찔 몸을 떨었다.
“가까이 와라.”
그의 명령에 아넬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장의자 앞에 놓인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나가려는데, 자레스가 그녀를 불렀다.
“술을 따라라.”
머뭇거리던 아넬이 곧 명령대로 그가 내민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과일주인지 냄새는 향기로웠다. 술잔이 차자 자레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마셔라.”
독을 탔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인 걸까?
부질없는 의심이란 걸 증명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아넬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도 없었다.
“저는… 아직 어려서 술을 못 마십니다.”
“몇 살인가?”
“열…다섯입니다.”
열아홉이라 말하려던 걸 재빨리 바꿔 말했다. 하지만 그 나이도 자레스가 보기엔 적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 나이치고는 너무 덜 자랐군. 못 먹고 자라서인가?”
“…….”
“어쩌다 신전 노예가 됐지?”
“태어날 때부터 신전 노예였습니다. 딱히 사연이랄 건 없습니다.”
“신전 안에 여자 노예도 있나 보군. 너는 여자 노예가 낳은 아들인 거고.”
“그렇습니다.”
“나도 노예였다.”
“네?”
갑자기 들려온 말에 아넬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딸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자레스가 웃음을 흘렸다.
“여자 노예와 카비르의 현 황제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카비르에선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기 때문에, 나는 황자가 아니라 노예 취급을 받아야 했지. 미리 덧붙이지만 카비르 황궁엔 나 같은 자가 한두 명이 아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아넬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카비르의 황자, 나아가서는 황제가 될 이 남자가 노예였다니, 상상도 못 했다.
위화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묘한 동정심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나를 겁탈한 게 용서되는 건 아니야.’
물론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오늘 저녁 일어난 사건만 봐도 자레스가 냉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그의 칼 앞에서 짚단처럼 베어져 넘어가던 병사들이 생각나자 동정심은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노예의 삶은 비참하지. 매를 맞는 건 부지기수였고, 툭하면 귀족 어머니를 둔 황자들에게 불려가 모욕을 당해야 했다. 노예가 뭔가를 소유하는 건 사치라면서 걸친 옷가지를 뺏기고 알몸으로 내팽개쳐지기도 했지. 어쩔 땐 노예답게 행동하라며 목에 사슬을 건 채 개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도 했지.”
이렌시아 역시 노예가 있긴 했지만, 카비르처럼 끔찍하게 살지는 않았다. 물론 도망치다 잡히면 처벌을 받긴 했지만,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 일한다는 것만 빼고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결혼도 자유로웠고, 어떤 노예들은 상인을 도와 일하며 재산을 모으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자레스가 겪은 것과 같은 일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가 어떻게 황자가 된 걸까, 궁금한 얼굴이군.”
자레스가 정곡을 찌르자 아넬은 그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봤다.
남의 속을 꿰뚫는 남자였다. 그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내장을 훑어 내리는 것 같아 불편했다.
“대답을 듣고 싶으면 술을 마셔라.”
자레스가 잔을 들며 강권했지만 아넬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건방진 노예로군. 카비르였다면 바로 혀가 잘렸을 텐데, 신전은 노예들에게 특별히 자비로운가 보군.”
심장이 뜨끔했다. 아넬은 노예는 고사하고 가난하게 살아 본 기억조차 없었다.
늘 귀한 대접을 받았고 보물처럼 아껴 가며 키워졌기에, 노예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게 건방진 행동이란 걸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자레스는 의외로 더 권하지 않았다. 그가 벌컥 술을 들이켜더니 입가에 흐르는 술을 닦으며 말했다.
“그대로 살면 비참한 일생을 살았을 테지. 하지만 나는 그러기 싫었다. 그래서 노예 부대에 참가했어. 거기서 미친 듯이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그 덕분에 나는 부대장이 됐고, 부황의 눈에 띄게 됐지. 그리고 지난 전쟁에서 적장의 목을 벤 덕분에 나는 드디어 황자로 인정받게 됐다.”
그가 또 술 한 잔을 마셨다. 이번엔 자기가 따르고 자기가 마시더니 곧 쓰게 중얼거렸다.
“많이도 죽였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용맹하고 잔혹한 남자도 죽는 건 싫을까?
‘불사의 몸이 되고 싶다는 것도, 죽기 싫어서였을까?’
인간이라면 당연한 욕망이긴 했지만, 새삼 그가 달리 보였다. 지난 삶에서의 그는 그저 피에 미친 짐승처럼 보였는데, 적어도 지금 눈앞에 있는 자레스는 사람처럼 보였다.
비참한 과거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인간. 그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죠.”
“아니,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야. 내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이대로 끝나는 게 싫은 거다. 나는 침대 위에서 여자와 함께 있다 죽는 게 아니면, 어떤 죽음도 곱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 말에 아넬이 흠칫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전생에 그가 그렇게 죽었다는 걸 알면 자레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도 마셔라.”
다시 한번 자레스가 술을 권했다. 하지만 아넬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노예가 감히 주인과 함께 술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큭, 듣기 좋게 말하지만 결국 거절이군. 그런데, 술을 안 마시면 네가 힘들 텐데?”
“네?”
“지금부터 내가 네 옷을 벗길 거거든. 수치스러울 텐데, 술이라도 잔뜩 마셔 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에 아넬이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레스가 그녀의 손목을 휙 낚아챘고 이어서 그녀를 번쩍 들어 구석으로 갔다.
방 한쪽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를 걷자 바로 넓고 호화로운 침대가 나타났다. 자레스가 아넬을 그 위에 내동댕이쳤다.
“아아악!”
“반항하면 다친다, 노예.”
자레스가 그녀를 제압하며 허리춤을 꾹 눌렀다. 아넬은 그 아래서 버둥거렸다.
그녀의 위로 올라오던 자레스의 몸집이 끔찍할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녀의 세계가 조각났던 기억, 전신을 관통하던 지독한 통증.
차가운 눈초리는 그날의 것과 좀 달랐지만, 아넬은 그걸 구분할 여력이 없었다. 아넬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자레스는 손쉽게 아넬의 팔목을 붙들어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겨우 한 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가느다란 팔목이었다.
어렵지 않게 아넬을 제압한 그가 나머지 한 손으로 아넬의 셔츠 자락을 끌어올렸다.
셔츠가 쭉 찢어지면서 곧바로 가슴이 드러났다.
“이런.”
자레스는 실망감에 혀를 찼다.
셔츠 아래로 드러난 가슴은 그와 마찬가지로 납작했다. 근육이 조각처럼 잘 짜여 있는 자레스와 달리 허약하기 짝이 없는 가슴팍이었지만, 어쨌든 그 몸에 여자의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 오해였나.’
물론 완전히 확인을 하려면 하의도 벗겨야 했다. 사내의 몸을 더듬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그는 의문을 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레스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서슴없이 아넬의 바지춤에 손을 댔다.
“제발….”
그런데 그때, 마치 체념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아넬이 속삭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얼결에 손길을 멈추자 아넬이 초록빛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그만둬 주세요. 부탁입니다….”
이상했다.
믿을 수 없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혈귀로 불리던 자레스가 그 눈물에 흔들렸다.
울면서 비는 아넬의 얼굴 위로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 역시 노예였을 적에는 숱하게 매를 맞으며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했었다.
등이 터지도록 채찍질을 당하며 이를 악물었었고, 그러다 견디다 못해 애원하면 황자들은 자레스를 비웃고 그의 등을 짓밟으며 더 울어 보라고 채근했었다.
새삼스럽게 비참했던 그 옛날의 모습과 아넬의 얼굴이 겹쳐 보이면서, 돌덩이 같았던 자레스의 심장이 약간이나마 움직였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군.”
자레스가 혀를 차며 아넬의 허리춤에서 손을 뗐다. 열다섯이라면 이미 여자의 특징이 드러났어야 했다. 굳이 바지까지 벗기지 않아도 아넬이 남자인 건 확실했다.
“사내놈에겐 관심 없다. 나가라.”
흥미가 떨어졌는지, 자레스가 눈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턱짓을 했다. 부들부들 떨던 아넬이 억지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괜한 짓을 벌였다.
아넬이 나간 뒤, 자레스는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우며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상력이 너무 풍부했다는 생각에 자신을 향한 혐오감이 일어났다.
“나이를 속인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긴 했다. 하지만 실제 나이가 더 어리다면 모를까, 지금 열아홉일 에포메니의 외모와는 한참 떨어진 것이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아넬을 에포메니라 의심할 근거가 희박했다.
하필 신전에 잠입하려 할 때 종이 떨어진 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다. 세상엔 우연이 숱하게 일어나지 않는가.
겨우 그걸로 멀쩡한 사내자식을 에포메니라 의심하는 건 제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그만두자.”
자레스는 아넬에게 신경 쓰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다. 조금 뒤척거리던 자레스는 이내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잠들기 직전, 환도를 손이 닿는 위치에 올려 두는 건 잊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부관이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황자 전하. 신전 경비대가 몰려왔는데, 배를 수색하겠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예측을 한 바였기에, 부관의 보고에도 자레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수색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습격을 당한 어젯밤 즉각 나섰어야 했는데, 신전 경비대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껏 뒤지라고 해.”
이미 증거는 모두 처리했다. 배는 도끼로 부숴서 모두 버린 터, 아마도 지금은 썰물을 따라 섬 주변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자레스의 허락이 내려지자 곧 수색대원들이 배로 올라왔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수색대장이 자레스에게 인사했고, 곧 사정을 설명했다.
“어젯밤 신전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들었다. 신전 쪽이 떠들썩하기에 부하들을 내보내서 사정을 수소문한 참이야. 아마 수색대장은 내가 범인이라 생각한 모양이군.”
싸늘한 눈빛에 수색대장이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자레스의 눈길은 사람을 위협하는 힘이 있었다. 쳐다보고 있으면 저절로 기가 죽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신전에서 명이 떨어졌기에…. 부디 협조해 주십시오.”
수색하러 온 사람이 오히려 애걸하는 모양새였다. 자레스는 내심 그의 무능을 비웃으며,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반대쪽 뱃전으로 가서 섰다.
수색대장은 되레 자레스와 카비르 병사들의 눈치를 보며 배 안으로 들어섰다.
“황자의 방과 선원들 거주처, 그리고 화물칸까지 샅샅이 뒤져라.”
명을 내린 수색대장은 어젯밤 신전의 수석 시녀가 극비리에 그에게 전한 말을 상기했다.
“에포메니께서 사라졌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에포메니가 사라진 건 사실 이틀 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전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일단 비밀에 부치고 있었는데, 그 희망이 사라졌다고 했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에포메니는 신전을 빠져나간 것 같다고 했다.
신전에 침입한 자들을 찾겠다는 건 사실 핑계였다. 오늘의 수색은 사실 침입자가 아니라 사라진 아넬을 찾기 위한 거였다.
‘지난 며칠 동안 섬을 빠져나간 배가 없으니, 에포메니는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섬 안은 구석구석 이 잡듯이 뒤졌으니, 이제 남은 건 외부에서 들어온 배들뿐….’
수색대장은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에포메니의 실종과 어젯밤 습격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든 것이다.
‘혹시 성녀가 침입자들에게 납치된 게 아닐까?’
성녀가 사라진 건 이틀 전이지만, 바로 그 직후에 침입자가 나타난 걸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힘들었다.
심지어 어젯밤 침입자들이 나타나자 종탑 지붕에서 덩굴이 뻗어 나와 종을 떨어뜨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건 성력의 흔적이었는데, 성력이 발휘된 걸 보면 지난밤까진 에포메니가 신전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침입자들이 에포메니를 납치한 게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배에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화물칸에서 나온 수색병들이 수상한 흔적은 없다고 보고했고, 자레스의 방을 뒤진 자들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냈다.
“만족할 만큼 다 뒤졌나?”
자레스가 이죽거리자 수색대장은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증거가 없는 데야 할 말이 없었다. 뒤지기를 포기한 수색대장은 마지막으로 배의 선원 명부를 받아 들었다.
수색대장은 담이 작긴 해도 아주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수색대장이 선원 명부에서 용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입항할 때 신고한 인원에서 한 명이 비는데요?”
그 말에 자레스가 부관과 시선을 교환했다. 보이는 것처럼 못난 작자는 아닌가 보다.
섬으로 들어오는 모든 배는 들어올 때와 나갈 때 모두 각각 입항과 출항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그때 반드시 배에 타고 있는 인원 숫자와 이름을 적어야 했다.
하지만 자레스의 배는 어젯밤 에바드가 죽었기 때문에 한 명이 빌 수밖에 없었다.
이때를 위해 준비해 둔 게 있었다. 자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을 내렸다.
“안내해 줘라.”
자레스의 말에 곧 부관이 수색대장을 뱃머리 쪽으로 데리고 갔다.
조타실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작은 골방이 있었는데, 그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그래서 수색병들도 그 방은 들어가지 못했었는데, 부관이 그 방의 문을 열었다.
열기가 훅 얼굴을 덮쳤다. 시큼한 땀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나자, 들어가려던 수색대장이 우뚝 멈춰 섰다.
“이 녀석이 이 방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이 비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녀석은 원인 모를 열병에 걸려서 앓아누웠어요. 이름은 에바드입니다.”
“…들여다봐도 되겠습니까?”
“수만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혹시 에포메니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수색대장은 고집을 피웠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부관이 어깨를 추썩거렸다.
“전염병일지도 모르는데도요? 우리도 전염될까 봐 지금 저 녀석을 바다에 던질까 말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럼 멀리서 얼굴만 확인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병이 옮아도 저는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며 부관이 한 걸음 물러났다.
수색대장이 직접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곧 컴컴한 구석에 누워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이불도 없이 물병만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는데, 병이 든 게 정말인지 온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한 상태였다.
강제로 독초를 먹은 뒤였다. 먹으면 몸이 퉁퉁 붓고 얼굴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는 풀이었는데, 자레스의 명령에 억지로 독초를 삼킨 아넬은 지금 이와 같은 상태가 됐다.
눈과 얼굴 전체가 부어서 곱상한 외모를 알아볼 수 없었고, 몸 여기저기엔 정말 병에 걸린 사람처럼 붉은 반점이 덮여 있었다.
혹시 에바드의 얼굴을 본 자가 있을까 봐 그런 짓을 저지른 거였지만, 본의 아니게 아넬의 본래 얼굴까지 가리게 됐다.
블로자가 보여 준 에포메니의 초상화와는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를 보나,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를 보나 아무리 봐도 노예 소년으로 보였기에 수색대장은 더 다가가기를 포기하고 바로 방을 나와 버렸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수색병들이 도망치듯 배를 나가는 걸 자레스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다.
“돌아가면 꼭 손을 씻으십시오! 카비르에선 손 씻는 걸 아주 중요하게 여긴답니다!”
부관이 비꼬듯 외치는 걸 뒤로한 채, 수색병들은 빠른 걸음으로 다음 배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