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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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곤하다는 말로 시녀들을 모두 내보낸 뒤, 아넬은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전신 거울에 비춰 봤다.

예쁘장하긴 하지만 아직 2차 성징이 채 나타나지 않은 몸이었다.

아직 성년을 맞이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이가 덜 차서라고 하기엔 그 나이 또래에 비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성장이 늦었다.

젖가슴도 마찬가지였다. 그 나이면 이미 적당히 튀어나왔어야 할 텐데, 아넬의 가슴은 소년의 것처럼 판판했다.

‘계속 성력을 제어당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몸이 성년이 되자 완전히 달라졌지.’

성녀는 성인이 되는 스무 살 전에는 개화 전이라고 일컬어지며, 성녀 대신 에포메니란 호칭으로 불린다.

스무 살을 넘겨 성녀로 인정받게 되면 전 세계에서 사절이 와서 새 성녀를 배례하게 되는데, 성녀는 그때야 비로소 성인으로서 개화한다.

소년 같았던 몸은 급격하게 성장해서 완연한 여인의 것이 된다. 키는 갑자기 커지고, 가슴이 나오며 외모는 아름다워진다.

물론 어느 정도 미모가 있어야 외모도 더욱 뛰어나게 변화하는데, 아넬은 원래도 고운 얼굴이었기에 성녀로 개화했을 때는 사람들이 보자마자 찬탄을 내뱉을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배례식에 온 카비르 황태자…. 그가 그 얼굴에 빠져서 나를 약탈하러 왔지.’

아넬이 이대로 자라 성녀가 되면 카비르 황태자를 만나는 걸 피할 수 없게 된다.

성녀는 절대 신전에서 나갈 수 없는 운명이니, 성녀가 되는 순간 카비르의 황태자를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전에 남아 있으면, 결국 같은 운명이 되풀이되겠지.’

빛 속에서 사라진 세계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전, 그녀를 무참히 짓밟던 카비르 황태자, 아니 그때는 카비르 황제가 됐던 남자의 모습도.

한 마리 짐승이 돼 그녀를 겁탈하던 사내의 얼굴을,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자 이가 덜덜 떨렸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모두 사라지는 일도 벌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자.”

아넬은 결심했다.

성년이 가까워질수록 감시는 더욱 심해질 터, 배례식에서 카비르 황태자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도망쳐야 했다.

성녀가 되기를 거부하고, 이 신전을 빠져나가는 것. 그래서 미래의 카비르 황제와 만날 일도 없게 하는 것.

세계가 파멸하는 걸 막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

그 후 일주일 동안, 아넬은 아프다는 핑계로 방에 틀어박혔다.

원래는 미래의 성녀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아프다는데야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쓰러져서 한참 있다 깨어나기까지 했으니, 교육 담당 시녀들은 아넬이 얼른 나아서 차대 성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길 기대하며 묵묵히 기다렸다.

그 일주일 동안 아넬은 몰래 탈출로를 찾았다.

낮에는 아프다며 방에 숨어 있었지만, 모두 잠이 든 밤에는 자기 방에서 나와 신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나 살폈는데, 생각보다 그럴 만한 경로가 보이지 않았다.

“쉽지 않겠구나.”

신전의 곳곳을 뒤진 결과, 아넬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

신전은 접근이 쉽지 않도록 이렌시아 본토에서 떨어진 작은 섬 위에 건설돼 있었다. 출입구는 중정 밖에 있는 정문 하나밖에 없는데, 신전의 외부에 해당하는 그곳은 신전 수비병들이 경비하고 있어서 그리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아넬이 주의 깊게 살핀 결과, 그녀는 밖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했다.

‘배수로로 나가면 되겠다!’

어린 시절부터 신전에 살았던 그녀였기에 신전의 구조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작은 곳까지 은밀히 살펴보다 찾아낸 곳이 바로 배수로였다.

섬이라는 특징 때문에, 신전 지하에 있는 배수로는 바다와 연결돼 있었다. 그 배수로가 섬 뒤쪽으로 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배수로로 기어 나가면 바다를 지나 신전을 출입하는 배들이 묶여 있는 부두까지 헤엄쳐 갈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의 탐색을 끝낸 아넬은 탈출로를 발견한 바로 그날,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

달이 구름에 가려 사방이 어두운 밤이었다.

아넬은 자신의 방,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전부 벗어 버렸다. 아직 성징이 나타나기 전의 덜 성숙한 몸이 드러났다.

가슴은 소년처럼 납작하지만, 아래쪽은 여자의 것이었다. 하지만 하체만 잘 가린다면 얼핏 봐선 신전에서 일하는 소년 노예처럼 보일 것이다.

완벽한 변장을 위해 아넬은 염색초를 빻아 낸 즙을 몸 전체에 발랐다.

흰옷을 갈색으로 염색할 때 쓰는 즙이었는데, 이 즙이 손에 물들면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염색을 맡은 노예들의 손이 항상 갈색으로 물들어 있는 걸 봤는데,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제 피부색으로 돌아오지만 염색 일을 계속하는 한 갈색으로 물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아넬은 유난히 흰 자신의 피부를 가리기 위해 염색초 즙을 온몸에 펴 바르고 즙이 스며들기를 기다렸다.

다음은 머리에 손댈 차례였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지만 여자처럼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아넬은 주저하지 않고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싹둑싹둑 잘라 냈다.

“…진짜 노예 같구나.”

미리 신전 노예들이 머무는 방에 몰래 들어가서 훔쳐 온 노예의 옷까지 걸치자 아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강이까지 오는 간편한 바지에, 위에는 소매가 짧은 셔츠. 거기다 머리까지 삭발에 가까울 정도로 짧게 깎아 버리자,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손색없는 노예의 것으로 바뀌었다.

약간의 돈이 든 가죽 주머니 두 개를 허리춤에 묶은 아넬은 곧 과일을 담은 나무 쟁반을 들고 신전의 지하로 내려갔다.

신전 안은 성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에, 수비병이 없었다.

물론 층층마다 신전 노예들이 지키고 있긴 했지만, 마치 심부름하는 것처럼 과일 쟁반을 손에 든 아넬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지나친 사람들 모두 아넬을 그저 소년 노예로 생각한 것이다.

아넬은 별다른 위험 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신전의 지하엔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부엌이 있었다. 모두가 잠이 든 까닭에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리로 들어간 아넬은 부엌 끝 쪽에 있는 격자로 된 쇠뚜껑을 열었다.

그 밑으로 배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부엌에서 쓰고 남은 더러운 물들을 이 배수로를 통해 바다로 흘려보냈는데, 이곳이 바로 아넬이 찾아낸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넬은 곧 그 배수로로 뛰어들었다.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다행히 물을 쓰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에 오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오수를 흘려보낸 배수로 벽에서는 냄새가 진동했다.

성녀로 인정받은 뒤, 기억이 나지 않은 시절부터 귀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아넬에게는 낯선 공간이었다.

구역질을 참으며 얼마를 기었을까, 마침내 배수로가 끝나면서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후우우.”

배수로 구멍에서 얼굴을 내민 아넬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아넬은 곧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챘다.

신전에선 지하이지만, 실제로는 섬의 뒷면, 바다 쪽으로 난 절벽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배수로 끝에서 몸을 반쯤 빼고 주위를 살펴보니, 배수로 공사를 위해 절벽을 파서 만들어 둔 동굴이 나타났는데, 동굴의 입구는 배수로 끝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다.

아넬은 배수로에서 몸을 빼서 동굴 입구로 나왔다.

동굴 왼쪽으론 절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 길이 있었다. 배수로 관리를 위해 만들어 둔 것 같았는데, 그 위로 올라가면 신전의 중정으로 나가게 되니 그 길로 가면 안 됐다.

동굴의 오른쪽으론 절벽을 따라 빙 돌아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공사를 하다 말고 그대로 방치해 둔 상태였다.

원래는 신전이 습격당할 경우를 대비해, 바다로 대피하기 위해 만들어 둔 길이었다.

하지만 메타의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신전이 습격당한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공사는 흐지부지 중단됐고 그대로 방치됐다.

아넬은 그 가파른 대피로를 따라 내려갔다. 겨우 사람 하나 지날 수 있는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마침내는 절벽과 바다의 중간쯤 되는 높이에서 길이 끝났다.

“메타시여. 용기를 주소서.”

성인 남자 두 명 정도쯤 되는 높이 아래 시커먼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아넬은 잠시 기도했고,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잠시 바닷물 속에 잠겼던 아넬의 모습이 곧 가죽 주머니와 함께 떠올랐다.

이때를 위해서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이었다. 가죽 주머니엔 돈도 들어 있었지만, 물도 들어 있었다.

물이 가득 든 주머니가 부표(浮標. 물 위에 띄워 표적으로 삼는 물건)처럼 떠오르면서 아넬도 함께 물 위에 뜨게 만들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아넬에겐 생명줄 같은 물건이었다.

아넬은 가죽 주머니를 앞으로 밀면서 배들이 정박해 있는 부두를 향해 첨벙첨벙 발장구를 쳤다.

기진해서 팔다리에 힘이 완전히 빠질 때쯤 돼서야 아넬은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에서 좀 떨어진 모래톱으로 올라간 아넬이 체력이 다한 나머지 헉헉거리며 모래사장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 힘이 빠져서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신전에선 아침까지는 그녀가 빠져나간 걸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바로 수색을 시작할 터, 아넬은 그전에 어딘가 숨어야 했다.

‘배에 올라타야 해.’

온통 물로 둘러싸인 이 섬을 빠져나갈 길은 섬에 출입하는 배에 숨어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두엔 몇 척의 배가 묶여 있었는데, 배들을 살펴본 아넬은 곧 그중의 한 배에 조심스럽게 기어들어 갔다.

배에는 선원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부두에 있는 술집에 가느라 배를 비운 것 같았는데, 선원들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뭣보다 배 갑판에 짐이 없는 게 아넬의 주의를 끌었다.

섬에 오가는 배들은 대부분 교역선이다.

신전이 섬에 있다 보니 필요한 물품들을 들이기 위해 교역선이 자주 출입했다.

입항 허가를 받은 배들은 갑판 가득히 짐을 가득 싣고 와서 물자를 내려놓고 나가는데, 갑판에 짐이 없다는 것은 곧 출항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었다.

‘짐칸이 비어 있겠지. 거기 숨어 있으면 배가 출항할 때까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을 거야. 다음 항구에 도착하면 기회를 봐서 도망치자.’

갑판 위는 조용했다. 다행히 부두 곳곳에 설치된 등불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사방이 보였기에, 아넬은 그 빛에 의지해 갑판 위를 살피다 이윽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뚜껑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 아넬은 그 순간 깜짝 놀랐다.

아래쪽에 불빛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 불빛 아래 남녀가 포개져 있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헉!”

뚜껑 문을 열 때도 알아채지 못하던 남녀가, 아넬의 비명은 곧바로 알아챘다. 아래쪽에 깔려 있던 남자가 사다리에 걸쳐져 있던 아넬을 알아봤고 바로 고함을 질렀다.

“너, 뭐야!”

아넬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허겁지겁 발을 놀렸지만, 하필 사다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발을 헛디딘 아넬의 몸이 그대로 사다리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자, 달려온 사내가 아넬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사내가 아넬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내와 엉켜 있던 여자가 곧 기둥에 걸어 놓은 등불을 가져왔는데, 그 불빛에 아넬을 비춰 본 사내가 중얼거렸다.

“노예인가? 이 배에 숨어든 걸 보니 도망치려는 거겠지?”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는 노예의 상징이었다. 여자가 등불을 아넬에게로 더 가까이 대더니 말을 덧붙였다.

“나이가 어린 것도 그렇고, 이 근처에서 발견된 걸 보니 아무래도 신전 노예인가 봐요?”

“신전 노예?”

“신전에선 주로 나이 어린 사내아이들을 노예로 부려요. 사내구실 하는 놈들은 귀하신 성녀님 근처에 데려다 놓질 않거든.”

“그래?”

“간도 크지, 그래도 신전 노예면 노예치고는 편한 신세인데, 거길 도망치려고 들어? 너 참 배가 불렀구나?”

여자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내 역시 턱 끝을 쓸면서 내뱉었다.

“괜히 말썽이 나면 곤란한데. 잡아다 신전으로 돌려보내야겠어.”

‘안 돼…!’

그게 아넬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전에 다시 돌아가는 건 피해야 했다.

카비르 황제를 만나지 않기 위해선…,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선!

아넬은 질끈 눈을 감으며 힘을 모았다.

바다를 건너 온 배이니 분명히 식량도 싣고 왔을 것이고, 곡물 부대에서 떨어진 씨앗들이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씨앗을 상상하며, 아넬은 힘을 집중했다.

‘제발, 돼라!’

그 순간 아넬이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아넬이 있던 곳은 선원들이 머무는 생활공간이었고, 그 아래층에 짐칸이 있었다.

그 짐칸 바닥에 선원들이 먹다 남긴 무화과 한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아넬이 힘을 모으자, 그 무화과 조각 안에 남겨져 있던 씨앗이 갑자기 발아하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아넬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려던 선원이 돌연 발바닥을 움켜쥐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바닥 틈새를 뚫고 올라온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선원의 발을 관통해 버린 것이다.

성녀의 힘은 치유력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성력은 치유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평소엔 극도로 아끼던 성력이었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선원이 발바닥에 피를 흘리며 넘어지는 순간, 아넬은 그 틈을 타 사다리 쪽으로 달려갔다.

허둥지둥 뚜껑 문을 밀어 올린 아넬이 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뱃전으로 달려갔다.

방금 전 튀어나온 뚜껑 문 아래쪽에서 선원이 욕설을 내뱉는 게 들려왔다. 어물거리다간 붙잡힐 판이었다.

아넬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뱃전을 넘어 바다로 뛰어내렸다.

하룻밤 동안 벌써 두 번째로 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몸을 뜨게 해 줄 가죽 주머니도 없었고, 의지할 게 하나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몇 번 손발을 저어 앞으로 나갔지만, 곧 몸이 무거워지면서 아넬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제발…! 바로 옆 배에라도 닿을 수 있다면!’

상선 옆에 노가 여러 개 달린 배가 떠 있었다. 수면에 내려진 노를 잡으면 그나마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팔 하나 거리를 남겨 둔 채 아넬은 꼬르륵 물에 잠겼다.

‘안….’

물속에선 성력도 소용없었다.

‘이대로 허망하게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였다. 돌연 수면 위에서 커다란 물결이 일었다.

누군가 물에 뛰어들었다. 건너편 뱃전에 밝혀 놓은 불빛에 그녀를 향해 헤엄쳐 내려오는 신형이 보였다.

새카만 그림자가 아넬의 팔을 낚아채더니 수면 위로 발장구를 치며 올라갔다.

“우웩!”

아넬은 배로 끌어 올려졌다. 그렇게 애타게 닿으려 애썼던, 여러 개의 노가 달린 배였는데 갑판 위로 올라온 아넬은 주위를 살필 틈도 없이 먹은 물부터 게워 냈다.

“도망 노예인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넬은 흠칫 놀랐다.

이렌시아어가 아니라 카비르의 언어였다. 카비르 말이라서 그런가, 어쩐지 목소리도 귀에 익숙한 것 같았다.

아넬은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조타실 앞에 서 있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호위병인 듯, 칼을 찬 여러 명의 병사를 거느린 장신의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여기 있으리라 생각도 못 한 그 얼굴에 아넬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놀랐다.

“여자인 줄 알고 뛰어들라고 했는데, 괜히 구했군.”

‘카비르 황제!’

너무 놀란 나머지 아넬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눈앞에 선 사내는 먹물처럼 짙은 흑발을 가졌다.

2년 뒤처럼 긴 머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어깨를 넘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뒤로 묶었는데, 머리카락 색과 다르게 깊고 푸른 눈이 잔혹한 빛을 띤 채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 거지?’

그녀는 경악한 눈으로 카비르 황제를 쳐다보기만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카비르 황제가 왜 하필 지금 이렌시아에 나타났단 말인가.

아넬이 카비르 황제를 만난 것은 그가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 배례식이 처음이었다. 그전에 그가 이렌시아에 방문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아넬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자레스 황자님.”

‘자레스 황자? 아…, 카비르 황제의 이름인가?’

물에 뛰어들어 아넬을 구했던 남자가 황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카비르 황제는, 황태자는 고사하고 아직 황자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아버지인 황제도 죽이지 않았고, 형을 살해하고 황태자 자리에 오르기도 전이라는 뜻이다.

처음으로 들은 그의 이름이 낯선 반면에, 뇌리에 똑똑히 새겨진 그의 얼굴은 너무나 낯이 익어서 아넬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했다.

그 짐승 같은 눈빛, 마치 꼬챙이처럼 꽂히던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그녀를 덮치던 그 순간…!

“왜 그리 몸을 떨지?”

자레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더니 병사들이 든 횃불에 비친 아넬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넬이 걸친 옷은 물에 푹 젖은 채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가 퍼뜩 놀라며 본능적으로 가슴팍을 가리자, 자레스가 코웃음을 쳤다.

“사내 녀석이 꼭 계집애처럼 구는군.”

그제야 아넬은 자신이 개화 이전의 몸이란 걸 기억해 냈다.

그녀의 나이는 열아홉이었지만, 몸은 열 살 무렵에 머물러 있었다.

여자의 가슴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물에 젖어 달라붙은 옷 아래로 보이는 가슴 선은 소년의 것처럼 납작하기만 했다.

의도한 바이긴 했지만, 자레스나 사람들이 사내로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신전 노예인가 보군.”

상선에서 만난 여자와 비슷한 추리 과정을 거친 자레스가 곧 결론을 내렸다.

그 상인처럼 그녀를 신전에 도로 데려가려는 걸까?

지금은 차라리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레스를 피할 수 있다면 신전에 다시 갇히는 한이 있어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 아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에서 도망친 건가?”

“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황…자님.”

아넬이 머리를 조아리자 자레스가 아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성녀…, 아니 에포메니인 걸 알아봤을까?’

불안함에 시선을 피하자, 자레스가 곧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생각에 잠겼다.

“마침 잘 됐다.”

“네?”

얼결에 그를 쳐다보자 자레스가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성녀에게 볼 일이 있어 찾아왔는데, 신전 노예라면 도움이 되겠어.”

그와 함께 자레스가 곁에 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가둬 놔. 필요할 때 꺼내 쓰겠다.”

마치 그녀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말이었다. 저항할 겨를도 없이, 아넬은 그대로 병사들에게 붙잡혀 배 밑바닥으로 끌려갔다.

***

자레스의 배는 아까 올라탔던 상선과 비슷한 구조였다.

뚜껑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가자 선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나타났고, 그 한복판에 있는 또 다른 뚜껑 문을 열자 화물칸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물칸 구석 바닥에 깔린 널 하나를 잡아당기자, 돌연 화물칸 바닥이 갈라지면서 거기서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등불이 걸려 있지 않아서 코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이었다. 공기 순환이 안 된 탓에 곰팡이 냄새가 확 피어올랐는데, 아넬을 끌고 온 병사가 그녀를 밀어 그 안으로 떨어뜨렸다.

“악!”

아넬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함께 병사가 뚜껑 문을 닫았다. 찰칵, 하고 잠기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졌다.

아넬은 그제야 일어나 엉금엉금 기어서 주변을 확인했다. 제 손가락 하나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곳이었지만, 무릎으로 기어가자 곧 벽이 나타났다.

반대쪽으로 기어가니 역시 열 걸음이 안 돼서 또 벽이 나타났다.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공간이었고, 창문 하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짙은 어둠 속에서 아넬은 벽에 기대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카비르 황제, 아니 자레스 황자는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운명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도망치려 했는데, 이러면 오히려 자레스 황자의 품으로 뛰어든 격이잖아.’

그냥 신전에 남아 있었다면 자레스를 만나지 않게 됐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뒤늦게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끔찍한 자기혐오에 빠진 아넬은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 자리에 칼이 있다면 바로 목을 찔러 죽어 버리고 싶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아넬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그게 나았을까? 내가 죽으면 자레스 황자와 만날 일도 영영 없었겠지?’

에포메니나 성녀가 자살한 사례는 역사에 없다. 메타가 준 성력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게 성녀의 의무였기에 스스로 죽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넬은 지금 순수하게 자신에 대한 살의를 느꼈다.

‘키리아 님….’

성녀를 떠올리자 생각이 곧 지금의 성녀에게로 가닿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넬이 아직 정식 성녀가 되지 않은 지금, 전대의 성녀 키리아는 살아 있었다.

전생에선 아넬이 성녀로 개화한 후에 신전을 나갔지만, 개화 전인 현재는 신전의 가장 높은 곳 성탑에 살고 있었다.

‘내가 다음 대 성녀가 되지 않으면 키리아 님은 어떻게 되는 걸까?’

탈출을 결심한 이후로 숱하게 들었던 의문이었다.

성녀의 전통은 천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왔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아넬 역시 어린 시절에 다음 대 성녀로 지목돼 신전에 오게 됐지만, 그 이후로도 성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느 때는 쓰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엄격한 교육을 받았을 뿐, 성녀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모든 교육은 에포메니가 순조롭게 성녀가 됐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신전의 사람들도, 아넬도 당연히 그동안 계속돼 온 역사가 되풀이될 거라 생각했지, 에포메니가 도망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무 살이 되기 전엔 절대 성력을 발휘해선 안 됩니다. 성전을 떠나는 것 역시 안 돼요. 성전을 벗어난 에포메니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세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수석 시녀의 가르침을 떠올리자 눈물이 더 걷잡을 수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넬은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며 곧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세계의 혼란…. 그래도 멸망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넬이 자레스와 엮이는 운명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했을 때, 메타는 그녀의 결심을 지지해 줬다.

그건 즉, 신전을 도망치는 것 역시 용서의 범주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일 터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로소 약간의 희망이 돌아왔다.

‘기회를 봐서 이 배를 탈출하자.’

자레스 황자를 만나긴 했지만, 아직 그가 아넬에게 욕망을 품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아넬을 남자로 알고 있으니, 어쩌면 운명의 수레바퀴는 여기서 새롭게 방향을 틀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할 때 꺼내 쓰겠다고 했으니, 언젠간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때 도망치자.’

배에는 수많은 병사가 있으니, 성력을 발휘해 봤자 아까처럼 수월하게 달아나는 건 무리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자 곧 무거운 잠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새카만 어둠 속. 아넬은 그동안 쌓인 긴장과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쓰러져 잠이 들었다.

***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척에 아넬은 잠에서 깼다.

여전히 어두웠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리 위로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미 아침이 된 듯했다.

‘혹시 자레스 황자가 신전으로 출발하려는 걸까?’

성녀에게 볼 일이 있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도움이 될 것 같다던 아넬을 불러낼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다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로 신전에 들어가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제는 자레스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다시 신전에 갇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한 번 도망을 쳤으니, 아넬을 감시하는 인력이 배로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신전을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신전에 돌아가는 대신 이대로 배를 탈출하는 게 낫지 않을까.

꼬르륵.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에 아넬은 볼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식탐이 있는 체질은 아니지만, 어젯밤부터 체력을 소모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허기가 밀려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무화과 한 조각만 먹었으면….”

어제 성장시켰던 무화과 생각이 간절했다. 손에 잡힐 것처럼 그 향기와 모습이 떠오르자, 배고픔이 더 심해졌다.

신전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 겪어 보는 고난에 아넬은 힘이 빠졌다. 배고픔을 누르려 배를 가린 채 웅크린 아넬이 곧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부디 메타가 그녀의 앞날을 보살펴 주기를. 그리고 세계를 구원해 주기를.

“메타시여, 부디 아르드의 앞날에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그 시간, 자레스는 막 신전에서 돌아온 수하의 보고를 받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신전에 보낸 부관이 돌아왔는데, 그는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성녀가 알현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성녀가 지금 병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알현을 거부한다고 하는데요.”

“핑계로군.”

자레스가 단정했다. 성녀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니 불쾌함이 한가득 밀려왔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새카만 눈썹이 어느 때보다 더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성녀의 힘은 치유력인데 자신의 몸을 치유하지 못한다? 만나기 싫으니까 핑계를 대는 거야.”

“성녀에 대해선 세간에 알려진 게 거의 없어서…. 정말 병에 걸린 걸 수도 있습니다. 성녀의 힘은 워낙 고귀하기 때문에 한 나라의 지배자들에게만 성력을 베풀고, 정작 자신의 병은 약과 의술로 다스린다고 들었습니다.”

“이기적인 놈들이야. 결국 새장에 새를 가둬 놓고 자기들만 그 힘을 독점하려는 것 아닌가. 평생 신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가둬 놓은 주제에, 성녀라고? 차라리 신전 노예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관심 있던 건 현 성녀가 아니라 다음 대 성녀인 에포메니이니까.”

목소리가 너무 크다 싶어 부관이 당황한 눈빛으로 창문 너머를 쳐다봤지만, 자레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 들어간다. 준비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자 전하.”

주먹을 가슴 앞에 대 예를 표한 부관이 곧 자레스의 방을 나갔다.

자레스는 흑표 가죽을 깔아 둔 장의자에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에포메니.

성녀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에포메니는 성녀의 죽음이나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비해 성녀가 개화한 바로 그 직후부터 찾기 시작한다.

성녀가 아르드에 단 한 명이듯, 에포메니도 단 한 명이었다.

알 수 없는 어떤 시험을 거쳐서 성력을 보이는 아이를 찾아내면, 그 아이를 신전에 데려와 철저한 비호 아래 에포메니로 키운다.

그러다 에포메니가 성년이 되면 성녀는 물러나고 에포메니가 다음 대 성녀가 되는 것이다.

“성녀는 다 꺼져 가는 불. 그보다는 곧 피어날 싱싱한 불꽃이 훨씬 낫지.”

지금의 에포메니를 찾아낸 건 16년 전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몇 년 안에 성녀로 개화할 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작아도 머지않아 화려하게 피어날 꽃.

자레스는 그 젊은 꽃을 원했다. 오직 그만이 그 불꽃을 소유할 수 있길 바랐다.

그를 위해서라면 성지를 침범하는 일쯤은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

갑자기 뚜껑 문이 열리고 그리로 날카로운 빛이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아넬은 급하게 눈을 비볐다.

언제 또다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시간을 알 수 없어 잠시 멍하니 열린 문 사이로 그녀를 굽어다 보고 있는 병사를 올려보자, 병사가 곧 사다리를 내렸다.

“나와라. 자레스 황자님께서 부르신다.”

“……!”

아넬은 다시 갑판 위로 올라왔다. 찌르는 듯한 한낮의 햇빛이 눈부셔서 아넬은 잠시 비틀거렸는데, 병사들이 그녀를 배의 끝 쪽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방 안에 자레스가 앉아 있는 걸 본 아넬은 흠칫 놀랐다.

짐승 가죽을 깐 장의자에 앉은 자레스는 몹시 나른한 표정이었다. 무관심한 눈으로 아넬이 끌려들어 오는 것을 보던 그가 손짓해 병사들을 물렸다.

방 안에 둘만 남자 아넬은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다.

신전에 들어온 이래로 아넬이 남자와 둘만 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시녀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끔 노예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열여섯 살 미만의 소년들이었다.

사내 티가 나기만 하면 바로 교체됐기 때문에 아넬은 이렇게 장성한 남자와 만난 적이 아예 없었다.

‘배례식에서 많은 남자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늙거나 병든 자들이었지. 젊은 남자는 카비르 황제 한 명밖에 없었어.’

그런 카비르 황제와도 단둘이 남겨진 건,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의 한순간뿐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밀려가자 아넬은 갑자기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피에 굶주린 짐승.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약탈자.

아넬이 기억하는 자레스의 모습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아넬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간직한 끔찍한 경험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두려운가 보군.”

아넬이 움직이지 않자, 자레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넬은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 자레스의 목 밑만 내려다봤다.

자레스는 카비르 풍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정강이까지 오는 헐렁한 셔츠의 중간에 폭이 넓은 허리띠를 묶은 형태였다. 셔츠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새카만 천으로 만든 것이었고, 목덜미 부근엔 화려한 자수가 수놓여 있었다.

셔츠가 깊게 패어 있어서 날것 그대로인 가슴팍이 보였는데, 문득 눈길이 거기에 가닿자 아넬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내 악명을 들었나 보군. 피를 마시는 황자로 소문나 있다던가?”

침묵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에 아넬이 흠칫 몸을 굳혔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떨고 있는 걸, 자레스는 다른 쪽으로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자레스 황자는 아직 나를 모른다. 어쩌면 그와 이대로 헤어져서 완전히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어.’

아넬은 긴장하지 않으려 애썼다. 태연함을 가장하는 법은 이미 신전에서 많이 배웠다.

지배자들을 대하는 법, 모두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법, 그리고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애매모호한 대화법도.

아넬은 그동안 배웠던 수많은 교육들을 되살렸다. 다행히 몸이 그동안의 학습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아넬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듣던 것보다 더 잘생기셔서 놀랐을 뿐입니다.”

겁에 질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자레스가 잘생긴 건 사실이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날 선 콧대. 그리고 머리색과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깊고 푸른 눈까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남자지만, 한 번 그를 본 여자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한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벌벌 떨기만 하던 아넬이 제대로 대답을 하자 자레스는 약간 놀랐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넬을 쳐다보던 그가 이윽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래 봤자 어린 노예일 뿐이다. 노예란 필요할 때 쓰고, 고장 나면 버리는 소모품이었다. 똑똑해 봤자 쓸 데가 없었다.

“너에게 명령할 게 있다, 노예.”

불복을 인정하지 않는 말투였다. 아넬이 침묵을 지키자 자레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신전 노예들은 나이가 차기 전엔 절대 신전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신전을 빠져나온 걸 보니 탈출로를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어진 말에 아넬은 흠칫 놀랐다.

“나를 그 탈출로로 안내해라.”

성녀에게 볼일이 있다더니, 전생에서처럼 성에 침입해 성녀를 겁탈하기라도 할 생각인가. 아넬은 불현듯 치가 떨렸다.

이 남자의 본성은 전생에서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하긴, 원래 그런 사람이기에 신전까지 침입한 건데, 변하길 바란다는 게 모순이긴 했다.

그러니 아넬이 그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도 했다. 어떻게 빠져나온 곳인데 다시 거기로 돌아가란 말인가.

“저는… 도망 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아넬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번엔 자레스가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너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녀를 노려보던 자레스가 툭 내뱉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거부했다간 바로 목이 떨어질 터다. 아넬은 좋든 싫든 그의 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강제로 끌려가더라도 이유만은 꼭 알고 싶었다. 지금의 성녀는 자레스와 만난 적도 없고, 심지어 젊지도 않았다. 왜 성녀를 억지로라도 만나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성녀 약탈이 취미이기라도 한 건가?’

아넬이 용기를 내서 다시 물었다.

“신전엔… 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혹시 성녀님을 억지로 겁… 아니, 만나시려는 겁니까?”

“내가 답을 해야 하나?”

자레스가 오만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곧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목표를 알아야 너도 길을 알려 주기 쉽겠지. 내 볼일은 성녀를 만나는 게 아니다. 내 목적은 에포메니를 납치하는 것이다.”

‘나를?’

하마터면 소리 내 말할 뻔한 걸, 아넬은 억지로 목소리를 삼켰다.

현재의 에포메니는 아넬이었다. 하지만 성녀를 만나려는 자는 많아도 아직 능력이 개화하지 않은 에포메니를 보려는 자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고, 그럴 수도 없었다. 에포메니는 성녀보다 훨씬 더 비밀리에 보호되고 있었기에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가 와도 성녀가 되기 전의 에포메니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 그분을 납치해서 뭘 어쩌시려고요?”

“나도 모른다.”

“네?”

어이없는 대답에 아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몰라.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에포메니를 납치하면 현 성녀는 어떻게 될까? 에포메니가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죽게 되는 걸까?”

“네?”

“아니면 성녀가 살아 있는 한 에포메니는 성녀가 되지 못하는 걸까?”

아넬 역시 그건 몰랐다. 아무도 그런 건 가르쳐 주지 않았고, 전생의 아넬은 정해진 대로 성녀가 돼서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맞게 됐을 뿐이다.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싶다. 그러다 만약 에포메니가 다음 대 성녀가 되면, 나 혼자 성녀를 독차지하게 되는 셈이니 그것도 좋고.”

“하지만… 그러면 아르드의 모든 나라와 적이 됩니다. 성녀를 누군가 독차지하는 건 세계의 균형을 깨는 일, 카비르를 제외한 나라들이 동맹을 맺고 카비르에 쳐들어 올 겁니다.”

그렇기에 성녀를 지키기 위해 각국의 왕과 황제들이 협력해서 신전 수비병들을 보내왔다.

이해관계에 따라 보내진 연합 병력의 비호 아래 신전은 유사 이래 쭉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적의 같은 건 자레스에겐 별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레스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본심을 토해 냈다.

“상관없다. 성녀가 있으면 어차피 나는 불사에 가까운 몸이 되는 거잖아? 성녀는 전력을 다하면 죽은 사람까지 살릴 수 있다고 들었다. 성녀를 곁에 끼고 있으면 나는 죽지 않는 몸이 된다는 뜻이지.”

잠시 말을 끊은 자레스가 얼음 같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죽지 않는 몸으로 전 세계를 제패하겠다.”

‘무서운 남자…!’

자레스의 야망은 실로 거대하고도 대담한 것이었다. 문제는 자레스의 기대가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레스는 훌륭한 지휘관이자 전략가이기도 했고,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카비르를 장악했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에도 이미 맹수와 같은 용맹과 지략으로 유명했는데, 그런 그가 불사의 육체까지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욕망이 허풍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전생의 자레스도 그런 야망을 품고 신전에 쳐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넬은 얼어붙었다.

정작 그 에포메니가 바로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을 자레스는 모르고 있었다. 겁이 나는 한편으로 허탈하기도 했다.

‘에포메니를 납치하기 위해, 에포메니가 가야 하다니.’

이 기가 막한 모순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 이제 말해 봐. 너는 어떤 방법으로 신전을 탈출했지?”

“저는….”

머뭇거리던 아넬이 결국 실토했다.

도망을 치기 위해선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일단 안내를 하는 척하다 중간에 기회를 봐서 바다로 뛰어들든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전 지하에 있는 배수로를 타고 도망 나왔습니다. 신전의 배수로는 섬 뒤의 절벽으로 연결돼 있어요. 거기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부두로 탈출했습니다.”

“제법이군.”

자레스가 감탄한 눈으로 아넬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넬에 대한 그의 점수가 조금 더 올라갔지만, 그렇다고 아넬이 쓰고 버리는 패인 게 변한 건 아니었다.

아넬은 저녁에 데리고 나오라는 지시와 함께 다시 병사들에게 끌려 나왔다.

그리고 약간의 물과 거친 빵과 함께 어젯밤 갇혔던 비밀 공간에 처넣어졌는데, 그제야 아넬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비밀 공간은 에포메니를 숨기기 위해 마련된 곳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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