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프롤로그 (1/33)

프롤로그

성지는 침략당했다.

카비르의 대군은 평화 조약을 깨고 성지에 쳐들어왔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 지켜져 오던 약속이 하루아침에 박살나고 성지 이렌시아가 짓밟혔다.

신전을 지키던 수비병들은 파도 같은 기세로 밀려온 카비르 군들에게 모두 참살당했다.

전투라고 할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카비르 군은 하나같이 용맹했지만, 그중에 제일 잔혹한 것은 전투의 선두에 선 카비르의 황제였다.

몸소 신전을 밟으러 온 카비르 황제는 신전 수비병들을 도륙했다.

그의 무용은 대단했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수비병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거나, 어디 한 군데씩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급기야 겁을 먹은 수비병들은 칼을 버리고 도망쳤다.

거의 학살 수준의 싸움 끝에 카비르 황제는 수비병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신전의 안마당으로 입성했다.

그 모습은 마치 피에 굶주린 괴물처럼 보였다.

“으아악!”

용기를 내 카비르 황제에게 덤비던 수비병 하나가 황제의 칼에 찔려 그대로 날아갔다. 황제는 신전 기둥에 내동댕이쳐진 병사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척척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죽일 생각도 없었다.

그의 목표는 살육이 아니라 오직 성녀를 데려가는 것뿐이었기에,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수비병들이 그냥 도망치도록 내보낼 작정이었다.

“선발대가 중정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보낸 척후병이 돌아와 카비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이미 신전 바깥을 지키던 수비병들은 죽거나 도망친 뒤였지만, 건물 안에도 사람들은 남아 있을 터였다.

‘성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덤비겠지.’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카비르 황제는 시체들을 뛰어넘어 빠르게 중정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도 최후까지 카비르 군을 저지하던 신전 수비병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성녀는 이 중정을 지나 신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탑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전 노예들과 시녀들이 어쭙잖은 창과 칼을 들고서 성녀를 지키겠답시고 벌벌 떨며 서 있을 것이다.

“큭.”

비웃음과 함께 카비르 황제가 외쳤다.

“카비르 군은 들어라!”

성탑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던 카비르 군사들이 황제의 명령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는 절대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신전으로 가는 동안에 막는 자들은 죽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성녀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게 하지는 마라!”

황제가 공력을 담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에 힘을 줬다.

“성녀가 성력을 발휘하게 하는 자는 모두 끌어내서 죽이겠다!”

***

신전의 중정을 지나 몇 층을 올라가면 성녀가 머무는 성탑이 있었다.

항상 성스러운 정적이 감돌던 그곳이 오늘은 두려움에 찬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녀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신전 수비병이 다 뚫린 지금, 성탑엔 신전 노예들과 연약한 시녀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녀는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할 대상이기에, 그들은 나뭇가지처럼 가는 손에 칼과 창을 든 채 벌벌 떨며 성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녀님만은 지켜야 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성녀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수석 시녀가 결기를 드러내며 외쳤다. 하지만 달아날 길이 없는 이 성탑에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리의 한가운데 앉아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옅은 금발에 초록빛 눈은 마치 에메랄드처럼 선명했고, 신전에서 자란 탓에 햇빛을 보지 못한 피부는 대륙 북부에 있는 아야발 산맥의 눈처럼 희었다.

성녀 아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신의 마지막 흔적.

신의 은총 덕인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겨우 1년 전 스무 살의 나이에 성녀로 개화한 그녀를 세계에선 온 사신들이 축하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카비르의 황태자로 온 지금의 황제가 있었다.

그는 성녀 아넬에게 첫눈에 반했다.

“황제는 나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무의미한 희생을 하느니 차라리 내가 황제에게 가겠습니다. 제발 수비병들도 그냥 달아나라고 명해 주세요.”

하지만 성녀의 명령은 수비병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 결과 카비르 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고, 카비르 군은 거침없이 신전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그건 안 됩니다! 성녀는 어느 한 나라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신의 은총은 온 세계에 골고루 퍼져야 하는 법, 그것이 성스러운 신 메타와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도움을 요청했으니, 탈라사 군이 곧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시간을 끌면…. 앗!”

수석 시녀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엎어진 그녀의 등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촉이 없는 화살이었기에 옷을 관통하지 못하고 둔탁한 상처만 남긴 채 금세 떨어져 나왔다.

늙은 수석 시녀는 그 통증조차 견디지 못해 기절했는데, 그 화살을 쏜 주인공이 곧 무리가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카비르 황제…!”

아넬을 지키던 자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카비르의 악귀.

형제 살해자.

아버지를 죽인 자.

그를 칭하는 호칭은 많았지만, 그중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라면 감히 잊지 못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지옥에서 온 투귀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가 비뚜름한 웃음을 머금으며 내뱉었다.

“오랜만이군, 성녀님.”

경악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처음 그를 만난 배례식이 떠올랐다.

짐승처럼 음험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지금 눈앞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날 느꼈던 위험한 감각이 아넬의 뱃속에서 또다시 꿈틀거렸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넬이 막 성력을 발휘하려는 순간, 그보다 한발 먼저 카비르 황제가 품 안에 넣어 놨던 것을 꺼내 던졌다.

작은 자루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곧 거기서 흰 연기 같은 일어나 방 안에 확 퍼졌다. 그리고 그를 맡은 사람들은 일제히 어지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넬 역시 머리가 핑 도는 것과 함께 무릎이 휘청거렸다. 성력이 순식간에 몸 안으로 꺼지면서 의식이 사라져 갔다.

“수면…독?”

아넬이 마지막으로 카비르 황제를 쳐다보자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해독제를 마셨지.”

“안….”

머릿속이 흐려지면서 아넬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아넬이 깨어난 곳은 어디인지 모를 건물 안이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곧 카비르 풍의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눈을 돌리자 여러 개의 기둥이 세워진 회랑이 보였고, 그 회랑 너머 테라스로 우중충하게 흐려진 회색 하늘도 보였다.

마치 당장 찢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불길한 구름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구름 사이로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는데, 아넬은 그를 보자마자 불안에 사로잡혔다.

“메타시여….”

“그 이름은 안 부르는 게 좋을 거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넬은 흠칫 놀랐다. 시선을 돌려 보니 침대 오른쪽에 의자가 놓여 있고 거기에 그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악귀, 존속 살해자. 카비르의 황제.

그가 위험한 눈으로 그녀의 몸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자 아넬은 비로소 자신이 알몸인 채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불로 덮여 있긴 했지만, 어깨 위로는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가려진 몸조차도 얇은 이불 아래서 몸 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카비르 황제의 눈이 그녀의 전신을 눈으로 탐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안….”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 주변에서 성력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 카비르 황제가 입을 열었기 때문에 아넬은 성력을 거두고 말았다.

“성력을 발휘하지 마, 아넬. 네가 성력을 쓸 때마다 사람들이 한 명씩 죽게 될 거다.”

그라면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킬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넬은 어쩔 수 없이 요동치던 힘을 안으로 갈무리하면서, 이불을 끌어 올려 제 몸을 덮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대체 그녀의 옷은 왜 벗긴 건지, 누가 벗겨 낸 건지.

그것도 궁금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게 카비르 황제일 거란 예감이 들면서 수치심과 공포가 함께 밀려왔다.

그때 카비르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지금 누가 네 옷을 벗겼는지 궁금해하고 있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속내를 눈치챈 카비르 황제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피부가 아주 부드럽더군. 상상한 대로였어.”

흠칫 놀란 아넬이 시트 아래로 더 깊이 몸을 묻었다.

지금 그의 눈빛은 처음 배례식에서 그를 만났던 날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굶주린 짐승의 것처럼 번뜩이는 그것이 이불을 뚫을 듯이 파고들어 와 아넬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나를 놓아주세요, 카비르 황제.”

아넬이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목적이 이거였는데, 드디어 손에 넣은 성녀를 풀어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성녀는 순결해야 합니다. 성력은 절대 더럽혀져선 안 됩니다.”

“누가 그러던가? 그 잘난 신 메타가?”

“카비르 황제!”

“해방시켜 주지. 너를 옭아맨 포주에게서, 내가 널 풀어 주겠다.”

“앗!”

침대에서 황급히 벗어나려던 몸짓은 단번에 그녀를 막아선 굵은 몸뚱이에 막혔다. 아넬을 침대 위로 자빠뜨린 카비르 황제가 단숨에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피할 겨를도 없었다. 아넬이 그의 어깨를 치다가 마침내 그의 목덜미를 깨물었지만 카비르 황제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하려던 짓을 감행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오자, 아넬은 너무 아픈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보였다.

그녀의 침실 밖,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화살처럼 거대하고 번쩍이는 빛이 빗줄기처럼 지상을 향해 퍼부어졌다. 회색으로 꿈틀거리던 하늘이 흰빛으로 가득 찼다.

‘안 돼…! 메타시여!’

아넬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쏟아진 빛의 화살들이 지상에 부딪혔다.

화살이 내뿜는 빛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번져 나갔다. 반원을 그리며 넓어진 빛들이 보이는 모든 것들을 뒤덮었고, 모든 것들이 그 빛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세계는 멸망했다.

***

아넬은 또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건 오직 사방을 둘러싼 흰빛. 빛 덩어리뿐. 마치 빛의 구 안에 갇힌 것만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거기에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넬의 몸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흰빛에 휘말려 함께 죽은 것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의식이 남아 있는 거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죽은 게 확실한데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했다.

- 아넬이여.

그때 부름이 들려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빛으로 가득 찬 공간 전체에 파동이 일어나면서 아넬은 그 부름을 깨달았다.

그 힘의 느낌은 아넬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항상 신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성스러운 기운, 그것이 그 파동에서 느껴졌다.

“메타시여.”

아넬은 이미 사라져 버린 몸으로 무릎을 꿇었다. 정신적인 조아림이었지만, 그에 흡족했는지 메타가 말을 이었다.

- 너의 껍질은 사라졌다.

“알고 있습니다, 메타시여.”

- 그리고 아르드도 멸망했다.

“메타시여!”

두려운 예감이 들어맞았다.

세계를 뜻하는 ‘아르드’란 말이 나오자 아넬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때문에…? 제가 성스러움을 잃어서 그리하신 겁니까?”

- 아르드는 메타의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 그리고 그곳에 너를 새로이 태어나게 할 것이다.

“메타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녀로 인해 온 세계가 멸망당했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 빛 속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도, 사랑하는 연인들도, 나이 들어 몸이 약한 자들까지 모두 삼켜졌을 것이다.

그녀로 인해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어이없이 죽어선 안 됐다. 죄 없는 자들이, 오직 아넬이 ‘성스러움’을 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독한 죄의식에 몸서리가 쳐졌다. 차라리 그녀가 의식마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고 그 대신 세계가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타가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면 사라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다 해도 아르드가 소멸된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넬은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다.

아넬은 정신적으로 무릎을 꿇은 채 메타에게 애원했다.

“저에게, 아니 아르드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 다시 한번? 그게 무슨 뜻이지?

“메타시여. 당신의 성스러운 힘을 발휘해 저를 과거로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똑같은 운명을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르드의 주민을 살리겠습니다.”

- 기회를 달라….

“아르드의 주민들에겐 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저와… 카비르의 황제가 만난 탓,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저는 그 운명에서 빠져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죄 없는 아르드의 주민들을 다시 살려 주십시오.”

메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한한 사고가 짧은 시간 안에 반복됐다. 그러다 메타가 말했다.

- 나는 생명을 창조하지만, 그들을 제어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메타는 운명의 실을 잣기만 할 뿐, 그것을 짜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이번엔 막아 보이겠습니다. 부디 지금 이 의식 그대로 저를 되살려 주십시오. 제가 아르드의 운명을 바꾸겠습니다.”

-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신인 내게도 벅찬 일이다. 내가 정한 생명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니….

망설이는 것처럼 신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메타가 의지를 굽히지 않으면 아르드는 이대로 사라진다. 아넬이 애가 타서 한 번 더 매달리려 할 때 돌연, 메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좋다.

“메타시여!”

- 너와 아르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이번엔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지난 삶에서 펼쳐진 운명의 그물에서 벗어나 보거라.

“감사합니다…. 메타시여.”

-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나는 그대로 아르드를 소멸시킬 것이다…. 기억하거라,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메타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흰빛의 공간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고 뭉쳐지더니, 아넬의 의식이 튕기듯 그 점에서 밀려났다.

의식이 쏘아진 화살처럼 공간 속으로 날려갔다.

방금 전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흰 공간 대신 별로 가득 찬 새카만 하늘이 주변을 채우더니 이내 별들이 긴 궤적을 그리면서 뒤로 날아갔다.

‘되돌아가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허공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날아가던 그녀의 의식이 갑자기 어딘가에 쩔꺽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넬은 눈을 떴다.

“에포메니!”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자갈처럼 콱 들이박혔다. 아직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곧 목소리의 주인이 눈에 들어왔다.

수석 시녀였던 여자였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 눈에 익었다.

“블로자 님.”

“정신이 드십니까, 에포메니. 갑자기 쓰러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에포메니는 다음 대 성녀를 뜻하는 이렌시아어였다. 그러니까 지금 아넬은 아직 성녀가 아니라 후계자란 의미였다.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온 건가?’

그 증거로 아넬은 에포메니일 적 지내던 성탑 근처의 방에 누워 있었다. 그리 크진 않지만 다음 대 성녀의 방답게 제법 호화로운 방이었다.

아넬이 갑자기 일어나 감개무량한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자 수석 시녀와 시녀들 모두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살아 있다. 그녀도 수석 시녀도, 빛 덩어리 속에서 사라져 간 시녀들도 모두 살아 있었다.

“블로자 님. 지금이 몇 년도인가요?”

아넬이 돌연 묻자 수석 시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 대답했다.

“메타의 시간으로 1,524번째가 되는 해입니다.”

“그럼… 2년 전?”

“2년 전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빨리 얼버무린 아넬이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아르드가 멸망했을 당시, 아넬은 스물한 살이었다.

2년 전이면 그녀가 아직 열아홉일 때다. 성년을 맞기 전이고, 정식으로 성녀가 되기 전이란 뜻이었다.

메타가 정말 그녀를 회귀시켜 준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때로 돌려보낸 거지?’

그냥 우연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한계가 여기까지인지도 몰랐다.

아넬은 상념을 지우고 수석 시녀에게 부탁했다.

“블로자 님, 거울을 가져와 주세요.”

아넬의 부탁에 시녀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성녀가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히기라도 한 것 같다는 눈빛을 교환하며, 시녀 중 하나가 얼른 옆방에 있던 커다란 거울을 들고 왔다.

거울은 아넬의 키만큼 커다랬다. 반반하게 잘 가공된 거울에 비친 아넬의 몸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키는 거의 머리 하나가 작아졌고 가슴팍은 납작한, 사내아이 같은 모습이 됐다.

덩치 역시 열두어 살짜리만큼 작아져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와 초록색 눈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개화 이전으로 돌아왔구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 보던 아넬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시녀들은 두 번째로 서로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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