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14)화 (214/214)

214화 

* * *

이종족의 납치 및 감금, 비인륜적인 실험을 자행하고, 수도에서 일어난 키메라 습격 사건의 배후에 흑마법사들과 손잡은 로웰 후작이 벌인 짓이라는 것이 제국 전역에 알려졌다.

영원한 젊음과 삶을 꿈꿔 왔던 리온 제국의 대제 클라우드 마르퀴스라는 화려한 존재는 철저히 감춰지고 지워졌다.

그는 한낱 로웰 후작의 수하 중 하나로 전락해 역사에 기록되는 수모를 당했고, 이로써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며 역사에서 퇴장당했다.

사람들은 로웰 후작의 만행에 분노하고 경악했다. 더군다나 일국의 황태자였던 자가 이 일에 가담했었다는 사실은 무능한 황제와 황실에 대한 불평불만과 분노를 더욱 키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종족들을 무사히 구출하고, 키메라를 훌륭하게 막아 낸 카일라니 공작과 그 기사단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제국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을 것이다.

정령 왕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소식도 전해지며 이야깃거리에 기름을 더 부었다. 이는 다행스럽게도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 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정령 왕과 정령의 이야기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좋아했다. 정령 왕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땅에는 자연재해가 적고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덕분에 정령 왕의 후예인 테오도르 황자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제국민들은 평면이나 귀족 할 것 없이 테오도르 황자를 새로운 황태자로 세워야 한다며 거의 매일같이 한목소리를 냈다.

한편 테오도르는 정령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달려야만 했다. 그에게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모든 것이 거북하고 곤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록사나가 테오도르를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황제와 귀족들은 강력하게 거부하며 반발했다. 그를 가진 자가 앞으로 황궁의 권력을 쥘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카일라니 공작의 서슬 퍼런 눈빛과 록사나가 펼친 정령술을 보고는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가 찍소리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하여 테오도르는 바로 그날, 록사나와 아스테리온를 따라 황궁에서 나올 수 있었다.

늘 황궁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황궁의 정문을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나서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후 그는 아벨리오 남작저에서 록사나, 벨루카와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놓았고, 벨루카는 그의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오늘은 정령의 탄생목과 정령들, 샤일리를 살피기 위해 공작 성을 방문한 록사나를 따라왔다.

두 사람은 잠에 든 샤일리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침대가 워낙 커서 자리는 충분했다.

테오도르는 요즘 들어서 머릿속을 맴도는 의심 하나 때문에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록사나, 내가 정말 정령 왕의 후손이 맞을까요?”

“아마도 맞을걸.”

그녀가 반쯤 놀리는 말투로 대답하자, 테오도르의 얼굴이 대번에 울상이 되었다.

“역시 저는 정령 왕의 후손이 아닌 게 틀림없어요. 정령술을 조금도 하지 못하잖아요.”

“테오도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사람마다 첫 정령술을 발휘하는 시기는 천차만별이야.”

“록사나는 두 살 때부터 힘을 다뤘다면서요.”

“그야 나는 워낙 어릴 때부터 내 어머니가 정령술을 사용하시는 걸 옆에서 봐 왔었으니까.”

소년의 축 처진 어깨를 록사나가 다독여 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만큼 테오도르에게는 심각한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벨루카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테오도르를 확 덮쳤다. 혀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핥았다.

“하하. 간지러워, 벨루카.”

- 테오, 우리 지금 당장 캠든 성으로 가야 해.

“무슨 일인데?”

- 니아가 새로운 케이크를 개발했는데 엄청 맛있대. 뭐라더라? 아! 아이스크림 케이크. 우리 빨리 가서 아이스크림 케이크 먹자.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해.”

테오도르가 벨루카의 두꺼운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제야 벨루카가 얼굴 핥는 걸 멈췄다.

마음이 급했던 벨루카는 록사나에게 인사도 없이 테오도르만 등에 태운 채 쌩하니 사라졌다.

그 뒤에 대고 록사나가 속으로 투덜댔다.

‘테오, 네가 벨루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령 왕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증거야.’

전에도 여러 번 해 준 말이었다. 그녀의 다른 말은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이 말은 긴가민가했다.

‘이제는 모르겠다. 결국 시간이 약이지.’

록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잠에서 깬 샤일리의 연하늘빛 눈과 딱 마주쳤다.

“잘 잤어, 샤일리?”

- 응. 아마 테오는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스테리온과 키얀이 벨루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하는 걸 거야.

“맞아. 그 말도 했었는데 정령과의 대화 능력은 정령술과 별개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게 그건데.”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탄생목에 있던 정령들이 포르르 날아와 재잘대며 두 사람 주위를 날아다녔다. 샤일리가 한 정령을 가리켰다.

- 어, 이 애는 내가 잠든 사이에 깨어났나 봐.

“응, 이 아이도, 저 아이도.”

새롭게 봉인에서 풀려난 정령들을 알려 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깨어나는 정령들은 늘어났다.

샤일리 또한 눈을 뜬 지 불과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약해진 상태여서 대부분 잠에 빠져 있어야 했지만, 깨어 있는 시간이 차츰 늘어 갔다.

- 그런데 아스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록사나 바늘, 저기 네 실 왔다.

“왔어요?”

“보고 싶었어, 록사나.”

그는 대뜸 록사나를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샤일리와 정령들이 잔뜩 있었지만 그들의 눈치를 전혀 안 보는 직진남이었다.

- 눈꼴시니까 제발 애정 행각은 우리 없는 다른 데로 가서 해 줄래?

“고맙다, 샤일리. 이 배려는 잊지 않을게.”

샤일리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록사나는 그를 극진히 보살폈고, 그때마다 아스테리온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대놓고 질투했다.

나중에 샤일리가 깨어났을 때, 둘이 서로 앙숙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녀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사람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벨루카랑은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 샤일리와는 안 그러는 것이 참 신기하단 말이야.’

록사나가 생각에 빠진 사이, 아스테리온이 냉큼 그녀를 보쌈했다. 넓은 품 안에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서 지혜의 방을 나섰다.

샤일리와 정령들이 단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 단체로 입을 모아 말했다.

- 아이고, 우리 팔자야.

* * *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가 보면 알아.”

아스테리온이 본관을 벗어나 후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익숙한 풍경과 길이 나오자, 그녀는 설마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나무에 가까워져 갈수록 록사나의 눈이 흔들리며 코끝이 찡해졌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바로 공작 성 내에 있는 록사나의 예전 비밀 장소이자, 유일한 휴식 장소였던 곳이었다.

나무를 끼고 돌자,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잔잔한 노랫소리처럼 귓가에 들려왔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매트 위에 내려 주었다. 그러더니 피크닉 바구니 위에 놓인 꽃다발을 집어 들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름다운 아가씨, 제 꽃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꽃이 너무 예뻐서 받아 주는 거예요.”

록사나가 새침한 표정으로 그의 손에서 꽃다발을 가로챘다. 달맞이꽃이었다.

“저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거절하셨다면 밤새 울 뻔했거든요.”

“제가 누구 살리는 거 잘해요.”

한껏 젠체한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은은한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아스테리온이 그 모습을 그의 눈과 가슴속에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

록사나가 꽃 한 송이를 뽑아내 그의 귓가에 꽂아 주고 한 송이를 더 뽑아 자신의 귓가에 꽂았다.

“이런 건 대체 언제 다 준비한 거예요?”

아스테리온이 피크닉 바구니에서 꺼내는 음식들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구경했다.

‘요즘 겨우 서너 시간밖에 못 잔다고 들었는데.’

그가 샌드위치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계획은 몇 달 전부터 했고, 실행 날짜는 매번 오늘이었는데 계속 미뤄져서 오늘이 되었어.”

“바빠서 언제 시간이 날 줄 몰랐는데 매일매일 준비를 했다는 말이에요?”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록사나는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떨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그녀에게 대령했다.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아직은 따가운 한낮의 햇볕을 막아 주는 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음식을 음미했다.

간간이 솔솔 부는 바람이 붉게 물든 그들의 양 볼을 식혀 주었다. 그 붉음이 그대로 나무로 옮겨 가기라도 한 것같이 가지 끝에 매달린 푸르른 나뭇잎들이 조금씩 울긋불긋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가 긴장된 표정으로 낮게 깔린 그녀의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신중하게 입을 떼었다. 그 전에 그의 목울대가 한 번 출렁거렸다.

“수수께끼 풀었냐고 안 물어봐?”

“이번에도 기간 연장이 필요해요? 피~, 내가 몇 달이나 연장해 줬는데…….”

사랑스러운 투덜거림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많이 봐줘서 고마워. 그런데 이번에는 연장 안 해 줘도 돼. 나도 염치가 있지.”

“혹시 해답 찾았어요?”

록사나의 시선은 흐르는 개울물을 향해 있었다. 아니면 바람 따라 춤추는 야생화 중 하나거나.

“응. 그런데 그대가 원하는 답이 맞는지는 모르겠어.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자신이 없어.”

그제야 록사나가 고개를 들어 아스테리온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안에 그녀가 담겨 있었다.

록사나는 말없이 그를 기다려 주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 몰래 한쪽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올곧게 마주했다.

“나 장가들고 싶어, 그대에게.”

“…정확히 무슨 의미예요?”

“그대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뜻이야. 그대가 있는 곳이 내 집이 되는 거.”

록사나의 두 눈이 흔들렸다. 아스테리온의 파란 눈은 고요한 하늘처럼 변함이 없었다…….

“나 아벨리오 남작 부군이 되고 싶어. 앞으로 내게 우선시되는 건 카일라니 공작이라는 직함이 아니라 남작 부군이야.”

이것이 그가 두 어깨에 짊어진 책임과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버리지 않고 그녀의 곁에 오롯이 설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말은 내가 당신과 결혼해도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온전히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인 채로만 살아도 된다는.”

“맞아. 수수께끼의 답을 내가 잘 찾았을까?”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록사나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정답은…….

“나한테 장가들어요. 정말 잘해 줄게요.”

파란 눈이 출렁이더니 욕심을 드러냈다.

“당장 지금부터 사랑받는 남작 부군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얼마든지요.”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향해 가까워져 갔다. 입술이 맞물렸다. 열기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드디어 같은 길 위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