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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13)화 (213/214)

213화 

모든 귀족들을 대표하여 아스테리온이 나섰다.

“대신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황제는 아랫사람인 아스테리온에게 어느 순간부터 꼬박꼬박 공대를 했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시늉을 했다.

평생을 떠받들어졌고 만인의 위에 군림하던 그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시궁창에 처박힌 자신과 황실의 처지를 비관만 하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황제인 그와 귀족들의 손에 달린 목숨들을 어떻게든 보존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즉 황제인 그에게는 핏줄들이, 귀족들에게는 황제를 포함한 모든 황족들의 목숨과 목숨 줄이 말의 고삐처럼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테리온과 귀족들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황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냥은 아니었다.

“첫 번째 조건은 이번 비공개 사형 집행에 모든 황족들은 필히 참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성년의 어린 황족도 예외는 없습니다.”

비공개 집행이라는 말에 잠시 표정이 밝아졌던 황제의 얼굴이 금세 파랗게 질렸다.

리온 제국의 상징인 클라우드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황실의 권위와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려는 조치임에 틀림없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에게 경고를 보내면서 경각심을 심어 주려는 의도임을 깨달았다.

“왜요? 못 하시겠습니까?”

“아, 아니오. 내 반드시 그리하겠소.”

“두 번째는 앞으로 황태자를 임명할 때 귀족회가 폐하와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황제는 황실이 귀족들의 마리오네트로 전락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저어되었다.

“황태자를 선발할 때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황제가 입도 벙긋 못 하고 침음을 삼켰다.

“일종의 시험을 통해 그 자격을 검증하는 절차를 치를 겁니다. 굳건한 리온 제국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이가 황좌에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소. 그리하리다.”

도노반을 황태자의 자리에 기어이 앉힌 황제의 독단적인 실수를 비틀어 꼬집으며 자격 미달인 자가 황태자가 되어 벌인 이번 사태를 콕 집어서 이야기하니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마지막은 조사단을 구성하여 황실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는 것에 동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라는 미명 아래 기어이 황실의 손발을 묶겠다는 뜻이었다.

“뭐라?! 감사라니, 그럴 수는 없네!!”

황제가 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는 뒤통수가 너무 얼얼했다. 하나라도 덜 빼앗기기 위해 방금 전까지 한참 동안 고분고분하게 굴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순식간에 뒤집어 버렸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매번 감사를 진행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사건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니 확실하게 조사를 해 황실의 안정을 꾀하고자 함입니다.”

황제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카일라니 공작의 말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했다. 숨은 속뜻이 있었다. 이번과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언제든지 황실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겠다는 의미였다.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귀족들은 아스테리온을 영웅처럼 우러러보았고, 황제는 어디 뉘 집 개처럼 쳐다보았다.

승패는 진즉에 기울었다.

“알겠소. 세 가지 조건 모두 받아들이오.”

자포자기한 황제가 패배를 선언했다. 그가 앉아 있는 황좌와 황실을 지킬 만한 온전하게 명분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절절히 통감했다.

황제는 그나마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황좌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황족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며 이를 위안 삼았다.

* * *

아스테리온이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탄생목을 살피는 록사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제 예상보다 처형 날짜가 빨리 잡혔네요.”

바로 내일이었다. 클라우드와 로웰 후작에게는 오늘이 살아 숨 쉬는 마지막 밤이 되는 것이다.

“응. 계속 오래 질질 끌었다가는 이 일을 점점 더 덮기 힘들어질 테니까, 황제로서는 미룰 이유가 없지. 그리고 귀족들 입장에서는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황제와 황족들의 약점을 단단히 틀어쥐게 되었으니 그걸 날리고 싶지 않아서 하자는 대로 다 따라 하더군.”

“이게 웬 팬케이크냐 싶었겠네요.”

“그렇지. 어쨌든 덕분에 큰일들은 생각보다 금방 마무리될 거 같아.”

탄생목 열매와 검은 구슬들을 모두 확인한 록사나가 몸을 빙글 돌려 옆에 놓인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 위에는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한 샤일리가 반듯한 누워 있었다. 그의 목에는 정령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녀가 침대에 걸터앉아 샤일리의 연하늘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아스테리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살짝 힘을 주었다.

그의 질투를 대번에 눈치챈 록사나가 방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그래요? 당신도 머리 쓰다듬어 줘요?”

“응. 나는 더 많이. 최소 두 배로.”

아스테리온이 침대 곁에 주저앉으며 곧바로 제 머리를 그녀에게도 디밀었다.

록사나는 샤일리에게 뻗었던 손을 거둬 그의 금빛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렸다.

“어휴, 욕심쟁이 공작님.”

손가락 사이사이 부드럽게 휘감기는 금발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닮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참, 내가 내준 수수께끼의 답은 찾았어요?”

그가 몸을 움찔거렸다. 시무룩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직. 요즘 너무 바빠서 제대로 생각할 틈이 없었어.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아스테리온이 그답지 않게 변명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겨우 짬을 내어 며칠 만에 그녀를 만나러 올 수 있었다. 그것도 오가는 시간을 빼면 얼굴을 보는 시간은 채 30분도 안 되었다.

그의 사정을 알고 있는 록사나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심 쓰듯 아량을 베풀었다.

“좋아요, 딱 일주일만 더 연장해 줄게요.”

* * *

아침부터 좀 덥기는 했지만 더없이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칙칙한 분위기가 흐르는 황궁 감옥 뒤의 넓은 공터에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모여 있었다.

황제와 황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엄선된 자들만이 이곳에 자리했다.

모두 사실대로 기록되기는 힘들겠지만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사형 집행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사행 집행인이 죄인들의 죄를 부지런히 읽어 내려갔다. 그들이 저지른 일들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잔인하고 극악무도했으며 그 죄목이 너무 많아 시간이 한참 걸렸다.

록사나가 고개를 돌려 황족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가장 말단인 구석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테오도르가 보였다.

어린아이가 참석하는 자리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 쓰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새 살이 돋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곯을 대로 곯아 있는 고름을 싹 짜내고, 문드러지고 썩은 살은 도려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이번 조치를 지지하는 바였다.

“…해서 죄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 집행인의 최종 선고를 끝으로 한 명씩 처형이 집행되었다. 천하에 다시없을 대역 죄인들의 목이 땅으로 떨어져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처형장 주변에 침묵이 가득 내려앉았다. 내뱉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핏빛 향연에 누군가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구역질을 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맨 마지막으로 클라우드의 목이 떨어졌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심장까지 도려내어졌다.

그것은 곧바로 바닥에 내던져졌다. 몸 밖으로 드러난 심장은 살아 있던 때의 그의 속내처럼 온통 시커멨다.

한 줄기 바람이 스쳤다. 검은 심장이 먼지처럼 바스러지더니 푸른 불꽃이 일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머리와 몸통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먼지 한 톨 남겨서는 안 될 흉악범이라는 듯이 먼지 하나, 연기 한 줄기 흩날리지 않았다. 정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하늘이 노하여 벌을 내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변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난데없이 황제와 황족들이 자리한 곳에서 괴성과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단숨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다들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을 비볐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은발과 자수정 안을 가지고 있었던 황족들의 외모가 모두 갈색 머리와 갈색 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누군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외모가 급변한 황제와 황족들이 서로의 모습을 보고는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한편 개미 똥만큼 남아 있던 황족들에 대한 존중심이 귀족들의 눈과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텅 빈 그 자리에는 대신 무시라는 감정이 비집고 들어갔다.

차갑게 변한 사람들의 눈빛과 경멸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본 황제의 갈색 눈이 선장을 잃은 배처럼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러다가 시선 둘 곳을 찾아 헤매던 그의 시선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이내 황제가 기절초풍하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 댔다.

두려움에 떠는 황제를 본 사람들의 시선 역시 그곳으로 몰렸다.

“아!”

“오, 정령 왕이시여!”

다들 넋을 잃고 한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테오도르 황자의 모습을 보고 모두 아연실색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은발과 자수정 안을 가졌던 황족들 중 오직 단 한 사람, 테오도르만의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과 고귀한 자수정 안에 사람들은 탄성을 쏟아 냈다. 더러는 경이로운 눈으로 소년 황자를 우러러보았다.

반면에 테오도르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소년의 자수정빛 눈이 록사나와 딱 마주쳤다.

록사나는 잔뜩 놀랐던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테오도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바짝 굳어 있던 소년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리며 두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황제를 비롯하여 고위급 귀족들은 은발과 자수정 안을 지닌 테오도르의 존재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 황자는 지고한 정령 왕의 진정한 후손이었던 것이다. 변하지 않은 그의 머리와 눈 색이 그 확실한 증거였다.

황제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위대한 정령 왕의 후손이시여.”

그를 시작으로 모든 황족들과 귀족들이 테오도르의 앞에 너도나도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진정한 정령 왕의 후손을 뵙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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