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12)화 (212/214)

212화 

- 록사나, 이거 테오도르가 전해 주랬어.

“이건! 고마워, 벨루카.”

전에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주었던 정령의 목걸이였다. 그것을 받아 든 록사나의 머릿속에 문득 얼마 전 벌어졌었던 일이 떠올랐다.

‘혹시 이번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과 동시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녀는 정령의 목걸이를 샤일리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정령의 목걸이와 샤일리가 공명을 했다. 탄생목에 달린 열매와 검은 구슬에 잠들어 있는 정령이 그랬던 것처럼 빛을 내며 양쪽이 깜박거렸다.

- 검은 반점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록사나가 저도 모르게 기쁨과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아스테리온과 마커스 경 등 주변에 있는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심지어 자신의 처지를 순간 망각한 듯 클라우드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령의 힘을 추출해 내 그것을 안정적으로 자신의 몸 안으로 옮기기 위해서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종국에는 완벽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방법을 완성해 냈다. 그랬는데……. 목걸이를 이용하는 건 그로서도 난생처음 접하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그의 방법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했으며 안정적인 흐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저것만 있으면 돼.’

클라우드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부질없는 희망을 품었다.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아스테리온과 벨루카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 * *

아스테리온은 록사나와 함께 샤일리를 데리고 남작저로 향했다. 그녀가 알렉의 진찰을 받고, 침대에 몸을 누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곁을 내내 지키고 싶었지만 한가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록사나와 이종족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밝히고, 그에 대한 후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전에 먼저 반드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황궁에 들어가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을 때는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한창 단잠에 빠져 있었던 늙은 황제는 잠옷 위에 겨우 가운만 걸친 채 졸음 가득한 눈을 하고서 알현실로 들어섰다.

“꼭두새벽부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카일라니 공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불만에 가득 찬 황제의 얼굴을 보며 아스테리온이 약식으로 인사를 했다.

“결론부터 먼저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 황태자인 도노반 마르퀴스의 체포를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뭐라고?!”

황제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노성을 터뜨렸다. 그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이번에도 아스테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노반 마르퀴스는 로웰 후작 및 클라우드 마르퀴스와 손을 잡고 반역을 꾀하였음은 물론 이종족들을 납치 및 감금하였으며 각종 불법적인 실험에 직간접적으로 자행하고 가담했습니다. 이번 키메라 사건도 그들의 소행입니다.”

쉬지 않고 이어진 보도에 황제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하나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들투성이였다.

뜬금없이 리온 제국의 시황이자 대제인 클라우드 마르퀴스의 이름이 언급되었음에도 이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볼 겨를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아스테리온이 했던 말들 중에서 반역과 키메라라는 단어를 떠올린 황제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바, 반역이라니?!”

황제는 설마라는 가정을 내뱉지 않았고 할 수조차 없었다. 공작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과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증인들과 증거도 있습니다.”

아스테리온은 그동안 벌어졌었던 일들에 대해서 황제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단 록사나가 정령사이고 벨루카가 정령이라는 말은 쏙 빼고, 약간의 각색을 거쳤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황제는 목덜미를 잡으며 게거품을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쓰러지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아스테리온은 황실 기사단과 함께 황태자 궁으로 들이닥쳤다. 황태자 도노반은 하루아침에 죄인 신분이 되어 황실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모함이다! 이건 나를 음해하려는 카일라니 공작의 모함이라고!!”

철창이 굳게 닫히고, 도노반에 대한 심문이 즉시 이루어졌다. 황제 직속인 황실 1기사단 단장과 카일라니 공작가의 트레버, 마커스 경이 함께 문초를 진행했다.

“모함이라니요. 여기 황태자 궁에서 발견한 약들이 떡하니 있는데요.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닌 전하의 침실에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트레버가 두 개의 유리병을 도노반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흙색 약과 검은 약이 든 것이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내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한 손은 되는데 그중에 누가 내 방에 심어 놓은 것이 틀림없다!”

이번에는 황실 1기사 단장이 나섰다.

“전하의 시종들과 궁에서 일하는 이들도 모두 지금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정말 누명을 쓰신 것이라면 밝혀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약과 같은 것이 로웰 후작저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도노반이 순간 눈가를 움찔했다. 이내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내 장인이 나 몰래 내 궁에 그딴 걸 가져다 놓은 것이 틀림없다. 아, 빅토리아가 한 짓일지도 몰라. 로웰 후작의 딸이잖아.”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로웰 후작은 현장 체포되어 빼도 박도 못합니다. 빅토리아 로웰 영애 역시 조사를 받고 있으니 조만간 죄가 있는지 없는지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혀, 현장 체포라니?”

도노반의 얼굴이 대번에 흙빛이 되었다.

트레버가 친절하게 로웰 후작이 벌였던 일들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물론 도노반이 알 필요 없는 알맹이들은 쏙쏙 빼고 말이다.

트레버의 말이 다 끝나자, 반쯤 정신을 놓은 도노반이 중얼거렸다.

“다 끝났군.”

황실 1기사단 단장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렸다. 그는 도노반이 직접 이 일에 가담하지 않고 그저 장인인 로웰 후자에게 일방적으로 이용당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작은 기대마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다음 대 황제의 자리에서 가장 가까웠던 이의 민낯을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세간에서 리온 제국에 망조가 든 게 틀림없다고 떠들어 대는 게 무지몽매한 이들의 편협한 식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한낱 필부와 다를 바가 없었군. 이렇게 음흉하고 모자란 자를 다음 대 황제로 모실 생각을 했으니 말이야.’

황실 1기사단장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 *

“황제 폐하, 큰일 났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실 2기사단의 부단장이 사전에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의 옷차림과 머리는 산발이었고, 제복 곳곳에는 핏자국으로 보이는 것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로웰 후작 일당이 벌여 온 일에 대한 처리와 처벌을 논의하기 위해 모여 있던 귀족들과 아스테리온, 황제의 시선이 그에게로 단숨에 쏠렸다.

황실 2기사단 부단장이 회의실에 들어서기 방금 전에 도노반의 황태자 직위를 박탈하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황자로 격하된 것이다.

황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물었다.

“도노반 황자가 왜?”

“폭주를 일으키셨습니다!”

“폭주라니, 자세히 말해 보십시오.”

아스테리온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기감을 넓히자, 황궁 감옥 근처 궁에서 탁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몰래 몸에 지니고 있던 약을 복용하시고 지하 감옥을 탈출하셨습니다. 얼마 안 가 몸이 기형적으로 변했고, 폭주하여 주변은 물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기사들이 막고 있습니다만 제압이 쉽지 않습니다.”

그가 난감한 얼굴로 황제와 아스테리온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 뒤에 이어지지 못한 행간을 읽어 낸 황제가 두 눈이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어 명을 내렸다.

“제압하기 어렵다면… 죽여도 좋다.”

황제의 침중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도노반의 죄에 대한 증거와 증인이 명명백백하여 황제임에도 그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간 저지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처치 곤란할 정도로 얼렁뚱땅 넘길 수 있는 사안들이 아니었다.

또한 그 하나하나가 황실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렸다. 더군다나 그간 황실이 꼭꼭 숨겨 왔던 추악한 민낯을 들쑤시는 일이었고, 황실을 존폐 위기라는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첫아들에 대한 애틋함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배신감과 치욕, 씁쓸함만이 남아 가슴을 채웠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고맙소, 카일라니 공작.”

회의실을 나서는 아스테리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그가 제발 황실의 치부를 끝까지 입 다물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얼마 안 가 황제의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스테리온이 아닌 그의 아들 도노반과 대제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머나먼 선조 클라우드 마르퀴스 덕분이었다. 900년 넘게 굳건했던 황실의 기둥은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휘청거렸다.

검은 약과 흙색 약을 과다 복용한 도노반은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강력한 육체의 힘과 은발, 선명한 빛깔의 자수정 안을 갖게 되었다.

그 대가로 그는 이지를 잃고 폭주했다. 그의 몸은 기이하게 부풀어 올라 덩치가 두 배 이상 커졌으며 피부 위로 심줄이 툭툭 불거졌다.

어찌나 힘이 센지 난다 긴다 하는 황실의 기사들이 단체로 달려들어 제압하려 했으나 도리어 무더기로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아스테리온이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그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칼날 아래 도노반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육체는 흉측해진 피부를 가진 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채 한 시간 전까지도 지고한 위치에 자리한 황태자였던 이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클라우드와 로웰 후작. 흑마법사와 그 수하들의 처분 역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재판 결과는 당연히 모두 사형이었다.

황제는 이 모든 사실이 제국민들에게 낱낱이 공개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꺼렸다.

그는 충격에 빠진 제국민들 사이에 혼란을 야기하며 민심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리온 제국이 주변 국가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고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했다.

이 모든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대역 죄인들의 사형 집행을 비공개로 진행해야 하며, 사건에 대한 전말을 반드시 적당한 정도의 선에서만 공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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