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이런, 아쉬워서 어쩌나.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때였다. 록사나의 뒤에서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웰 후작.”
“클라우드 님, 첫 번째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녀의 부름을 무시한 로웰 후작이 클라우드에게 가장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수고했다. 이번 일이 성공한 후에 내 너를 크게 쓸 것이다. 원한다면 나라를 하나 세워 주지. 어떠냐?”
“저는 그런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클라우드 님 옆에서 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보필하고 싶습니다.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하하하, 좋다. 허락하마.”
로웰 후작의 대답에 클라우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모습이 한 편의 연극이 따로 없었다.
“이어서 준비하도록.”
클라우드가 록사나를 꼭 집어 바라보았다.
로웰 후작의 뒤에 서 있던 복면을 쓴 수하들이 록사나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곧장 그녀의 팔다리를 우악스럽게 구속했다.
퍽.
누군가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암흑으로 물들어 가는 찰나, 록사나가 샤일리가 묶여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연하늘빛 머리카락이 잔상처럼 맺혔다가 스러져 갔다.
수하 하나가 록사나의 몸을 번쩍 들어 걸머지고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때 다른 자들이 클라우드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갔다.
* * *
웅얼웅얼.
주변을 둘러싼 소음에 록사나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누워 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를 반원 모양으로 둘러싼 채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였다.
록사나가 상체를 일으켜 세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제단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은 돌로 된 제단에는 고대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흑마법사들의 소리가 이어질수록 고대 문자가 새겨진 마법진에서 뿜어내는 검붉은 빛의 세기가 점점 강해졌다.
‘의식을 치르고 있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힘을 빼앗기 위한 의식이었다. 제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록사나가 서둘러 가장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제단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빛을 뿜어내는 고대 문자가 그녀를 구속했기 때문이다.
“헛수고를 했군.”
다시는 듣지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록사나가 고개를 돌려 상대를 노려보았다.
클라우드가 그녀에게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상황에 대해 무척 만족스러워하며 그가 반대편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눈짓했다.
화들짝 놀란 록사나가 외치며 한 손을 뻗었다.
“샤일리!!”
가운데 제단에는 클라우드가 위치해 있었고, 그의 왼쪽에는 샤일리, 그리고 오른쪽에는 록사나가 배치된 상태였다.
세 사람을 감싼 고대 문자가 검붉은 빛을 뿜어내며 몸집을 키워 갔다. 그 순간 그녀의 몸 안에 담겨 있는 정령의 기운이 요동쳤다.
“윽!”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에 록사나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식은땀을 흘렀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샤일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도 정령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힘은 고대 문자가 새겨진 마법진에 의해 고스란히 클라우드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클라우드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순도 높은 정령의 기운을 받아들이자마자, 검게 말라비틀어져 있던 팔다리에서 조금씩 검은색이 사라져 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몸 전체가 정상적인 피부색을 되찾았다.
“으하하하!”
클라우드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록사나는 여전히 정령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역겨운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힘을 맛보기 시작한 클라우드가 눈을 번득이며 흑마법사들을 재촉했다.
“정령은 언제쯤 소환할 수 있지?”
“곧 소환될 것입니다.”
“정령을 소환한다고?”
록사나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며 고통이 엄습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샤일리가 있는 제단의 마법진이 화악 붉은 빛의 기둥을 일으켰다가 수그러들었다. 은빛 늑대가 샤일리 옆에 나타났다.
- 록사나!!
“벨루카!”
- 괜찮아?
벨루카가 그녀를 향해 힘껏 발돋움을 했다. 그러나 마법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킨 벨루카가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리며 마법진에 정령의 힘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클라우드가 짝짝짝 박수를 쳤다.
“와우, 시도는 좋았어. 하지만 이 마법진은 정령 왕도 파훼하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강하지. 그러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때였다.
“그럼 내가 단번에 부숴 주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클라우드가 있는 제단을 향해 푸른 빛줄기가 순식간에 쏘아졌다.
사악.
오러가 깃든 검이 지나간 자리에 새겨져 있던 고대 문자와 제단이 깨졌다. 그 여파로 마법진이 일그러지며 검붉은 빛이 훅 꺼졌다.
“안 돼!!”
클라우드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정령 왕의 힘에도 굳건했던 마법진이 단숨에 파괴되다니! 숫제 넋을 잃었던 흑마법사들의 눈에는 공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그사이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와 벨루카가 있는 제단 역시 차례대로 파괴했다.
그의 뒤를 따른 기사들은 흑마법사를 비롯한 적들을 향해 칼날을 내밀었다. 사방에서 적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그들의 피가 튀었다.
마법진에서 풀려난 벨루카는 신이 나서 클라우드에게 달려들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물어뜯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더러운 걸 함부로 입에 넣으면 안 된다는 록사나의 현명한 가르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신 앞발로 펀치를 날리며 신나게 두들겨 팼다. 뒷발로는 돌려 차기를, 꼬리로는 그의 양 뺨을 찰싹찰싹 휘갈겼다. 그럼에도 쉽사리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아 일으켜 세웠다. 검을 쥐지 않은 손이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록사나, 데리러 왔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그렇지 않아요, 아스테리온. 우리를 제때 구해 주러 와 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에게 한 것처럼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마주한 그의 눈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록사나가 왜 그러느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다쳤잖아.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내가 낸 상처예요. 그리고 이 정도는 약 바르면 금방 나아요.”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말에 반박을 하려던 찰나, 벨루카가 끼어들었다.
“있잖아, 록사나. 이 지지는 어떻게 할까?”
아스테리온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 버려. 아니, 내가 직접 하지.”
“그를 죽이면 안 돼요, 아스테리온. 이 모든 일에 대한 증거로 이보다 확실한 거는 없잖아요.”
록사나의 만류에 그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 그럼 반반으로 하자. 내가 반쯤 죽여 놓을게.
얼마 전 캠든 성 주방장 니아가 개발한 튀김 닭 요리를 맛본 후 벨루카는 반반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고민이 될 때, 반반은 언제나 옳았고 진리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대마법사였으며 리온 제국을 건국한 대제 클라우드 마르퀴스는 벨루카에게 봄날에 먼지 털리듯이 탈탈 털렸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클라우드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의 몸은 늑대 정령의 발아래 으스러질 듯이 짓눌려 있었고, 모든 마법진은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대부분의 수하들이 죽었으며, 로웰 후작을 비롯한 몇몇 흑마법사들은 힘 한번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사로잡혔다.
‘고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게 되다니…….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미 오래전에 자신에게 했어야 할 질문을 그는 때늦은 지금에서야 던졌다.
주변을 어느 정도 정리한 기사들이 클라우드와 그의 수하들의 손과 발에 수갑과 족가를 채웠다.
록사나가 그 광경을 힐끗 바라보며 아스테리온의 부축을 받아 발걸음을 옮겼다.
“구속구야. 저걸 계속 차고 있는 한 힘을 쓰지 못하지. 아, 풀릴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한번 채우면 절대 풀어낼 수 없도록 아예 열쇠를 안 만들었다는군.”
“누가 만들었는데요?”
그녀의 눈이 대번에 동그래졌다. 정령술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구속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걸 만든 사람이 누군지가 더 궁금했다. 정령술과 마법에 능통한 자가 아니고서는 만들기 힘들었을 테니까.
“다음에 꼭 소개시켜 줄게.”
“알았어요.”
샤일리의 곁에 이른 록사나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마커스 경이 샤일리를 옮기려는 듯 그의 상체를 반쯤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낮춰 샤일리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제단이 무너지면서 정령술을 다시 펼칠 수 있게 된 록사나가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에게 기운을 불어넣었으나 미동도 없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기운을 건넸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더 많이, 더 긴 시간 공을 들였다.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혔다.
록사나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녀가 아무리 힘을 쏟아부어도 샤일리의 몸에 있는 검은 얼룩은 클라우드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뜯어말렸다. 벨루카도 한 손 거들었다.
“록사나, 그만해. 그렇게 끝도 없이 계속하다가는 쓰러지고 말 거야. 이자를 반드시 깨우려면 그대 건강도 생각해야 해. 게다가 정령들도 있잖아.”
아스테리온은 샤일리뿐만 아니라, 검은 구슬 안에 갇혀 있는 정령들도 그녀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사실 그는 속으로 샤일리를 엄청 질투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정령이라는 걸 알았지만, 록사나의 관심을 온통 가져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 그래, 록사나. 나도 깨웠으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샤일리도 분명 깨울 수 있을 거야.
결국 록사나가 마지못해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팔이 경련을 일으키듯이 떨렸다.
그걸 본 벨루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받아서 챙겨 온 것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