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록사나, 괜찮아?”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런!’
어릴 적에 당한 마차 사고가 떠오른 것 같았다.
록사나가 아무리 강한 정령사라고 해도 지금처럼 트라우마에 빠진 상태에서는 스스로를 보호할 최소한의 힘조차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뺨을 한 손으로 연신 쓸어내리며 진정을 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다.
“록사나, 괜찮아! 나를 봐. 내가 당신을 지켜 줄게. 제발 나를 믿어 줘. 당신 몸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할게.”
피부에 닿아 오는 따스한 온기에 록사나가 잃었던 초점을 서서히 되찾아 갔다.
“아스, 테리온?”
“응, 나야.”
아스테리온이 으스러질 듯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새파랗게 질려 있던 그녀를 본 순간 그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었다.
록사나가 제 곁을 당장에라도 떠날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두려움의 진정한 힘을 다시 한번 강제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마차 밖에서는 고함 소리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에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오로지 록사나와 단둘뿐인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린 록사나가 그의 팔을 건드리자 아스테리온이 팔의 힘을 풀어냈다. 여전히 그녀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는데,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우리 마차 밖으로 나가서 알아봐요.”
“괜찮겠어?”
아스테리온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를 최대한 안전한 곳에 두고 움직이고 싶었다. 그가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강한 무언가와 부딪친 마차의 문 한쪽은 처참하게 부서져서 덜컹거렸고, 뻥 뚫려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당신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안전…….”
그의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 록사나가 손안에 힘을 끌어모은 채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록사나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말은 두 사람이 부부가 되기도 전부터 그가 그녀에게 강조하듯 입버릇처럼 자주 하던 말 중 하나였다.
이제 그녀에게는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만한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설령 가진 힘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고 가만히 앉아서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싶지 않았다. 매번 쓰러질지언정 그녀의 두 발로 당당히 나아가 적을 상대하고 싶었다.
한낮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에메랄드빛 두 눈을 마주한 아스테리온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같이 나가자.”
그가 록사나를 안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아스테리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그가 그녀의 몸을 땅 위로 내려 주었다.
두 사람의 눈에 바깥의 살벌한 풍경에 고스란히 담겼다. 어이가 없어서 잠시 동안 말을 잊었다.
마차 사고를 일으키고 기사들과 싸움을 벌이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키메라였다.
이종족 키메라. 어느 하나도 모습이 똑같지 않았다. 곰의 날카로운 발톱과 독수리 날개가 조합되어 있는가 하면, 원숭이 얼굴을 지닌 거미의 몸체에 전갈의 꼬리가 달려 있는 것도 있었다.
어떤 키메라는 사자 머리에 뱀의 하체를 지닌 채 바닥을 기어 다녔다. 참으로 다양했고, 모두 이지를 잃은 상태였다.
“참 할 말 없게 만드네.”
“로웰 후작의 짓이 틀림없어요.”
반갑지 않은 선물을 한가득 받게 된 아스테리온이 검을 검집에서 꺼내 들었다.
‘그나마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다행이군.’
그들이 공격을 받은 지역은 수도 중심부에서 벗어난 숲 근처로 주변에 민가가 거의 없었다.
사자 머리가 휘두르는 꼬리에 얻어맞기 직전인 기사를 발견한 아스테리온이 검에 짙은 오러를 피워 내며 아래로 내리그었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뱀 꼬리가 자로 잰 듯 깔끔하고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 크악!!
사자 머리가 떠나갈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한껏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땅바닥 위로 질질 흘러내렸다. 그 침에 닿은 주변의 생물과 무생물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사자 머리가 눈을 번뜩이며 아스테리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몇 초 뒤 맞이할 처참한 운명 같은 건 하나도 모른 채로 말이다.
록사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람의 늑대를 만들어 내 밀리는 기사들을 돕게 했고, 직접 힘을 휘두르며 키메라를 제거했다.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검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대지를 축축하게 적셨다.
살갗을 베어 내고 뼈를 가르는 것은 록사나로서도 처음 해 보는 것이었다.
정령술을 상용하기에 그녀가 직접 칼을 들고 적을 쓰러뜨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쩍 갈라진 피부와 잘린 신체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모습은 그녀의 눈을 괴롭혔다.
게다가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혈 향에 시시때때로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록사나는 그저 묵묵히 버텨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과 최상급 정령사인 록사나의 기세에 키메라들이 수세에 밀렸다.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다들 여기서 마무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때쯤 아스테리온이 마지막 키메라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이변이 발생했다.
“저, 저길 좀 보십시오.”
기사 한 명이 손가락을 들어 숲 안쪽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나무가 흔들렸다. 결코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숲이 요동쳤고, 나무가 쓰러져 갔다.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록사나가 숲 안쪽으로 쏘아 보낸 바람 한 줄기가 빠르게 되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키메라예요. 모두 대비하세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상대했던 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키메라가 몰려오고 있다는 걸 다들 짐작했다.
아스테리온이 기사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 뿔뿔이 흩어져서 싸우다가는 각개 격파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뭉쳐야 했다. 그게 서로를 최대한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모두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숲을 주시했다. 희미했던 땅의 진동이 점점 강해졌다.
록사나가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사방으로 기운을 더 넓게 퍼뜨렸다.
‘어?’
키메라와는 전혀 다른 낯선 기척이 감지되었다. 더 가볍고 민첩한 것이 마치 잘 훈련된 암살자들과 비슷했다.
록사나가 고개를 들어 옆에 선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그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새로운 손님이 왔군.”
“당신도 저쪽은 키메라가 아니라는 거 알죠?”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록사나가 결연한 표정을 짓자, 그의 얼굴이 대번에 사납게 일그러졌다.
“절대 안 돼, 록사나.”
“당신도 지금이 그때라는 거 잘 알잖아요. 이건 기회예요. 지금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어요.”
두 사람은 테오도르가 남작저에 다녀가면서 경고해 준 내용에 대해서 한참 동안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눴었다.
어쩌면 로웰 후작과 도노반이 그녀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뭔가를 얻기 위해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걸 조만간 실행에 옮기리라는 것도.
“그들이 내게서 뭘 원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분명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일 거예요. 그러니까 날 보내 줘요, 아스테리온.”
아스테리온이 신음을 낮게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단단하게 세워진 그의 벽은 언제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의 선택과 말이 옳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머리와 심장이 따로 노는 게 문제였다. 그녀 대신 자신이 납치되었으면 좋겠다.
“록사나, 제발.”
그는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거절당할지라도 달리 그녀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무사히 돌아올게요. 아니, 당신이 나를 무사히 구해 주러 올 거잖아요. 아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켜 주겠다고 마차 안에서 한 맹세는 거짓말이었나요?”
“진심이었어.”
“그러니까 지금은 날 보내 줘요.”
록사나가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푹 찔러 오자, 아스테리온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무릎을 꿇었다. 완벽한 그의 패배였다.
“나는 오늘 반드시 납치당해야만 해요.”
그녀가 손을 들어 아스테리온의 한쪽 뺨을 감쌌다. 그 손을 감싸며 그가 간절하게 매달렸다.
“나 지금 죽을 거 같아.”
“절대 죽지 마요. 이건 명령이에요.”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록사나가 농담을 던졌지만 잔뜩 굳은 그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녀가 다른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직 내가 내준 수수께끼도 풀지 못했잖아요. 반드시 돌아와서 당신이 제시하는 해답을 내 귀로 꼭 듣고 싶어요.”
또 다른 이유를 덧붙이며 쐐기까지 탕탕 박았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로웰 후작과 황태자의 죄를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밝혀내기가 더욱 어려워져요.”
이미 방도 하나를 마련해 두었지만 그 패만을 사용하게 된다면 그저 흠집만 내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사용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적들의 숨통을 조금이라도 조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패는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해야만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었다.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돌려 지천에 조각조각 널린 키메라의 사체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자, 주변을 둘러봐요. 결코 이 일은 덮을 수 없어요. 멍청한 그들이 두 발 벗고 나서며 자진해서 우리를 돕고 있잖아요.”
그녀의 말처럼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황태자와 로웰 후작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 모든 사실을 깨끗하게 숨기기는 어려웠다.
아스테리온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자신의 뺨에 닿아 있는 록사나의 손바닥에 입술을 깊숙이 묻었다가 간신히 떼어 냈다.
“록사나, 절대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제발.”
이 약속이라도 받아 내지 않는다면 속이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타들어 갈 것만 같아.
“약속해요.”
“금방 찾으러 갈게.”
“네,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러 올 때까지 보고 싶어도 꾹 참고 기다릴게요.”
아스테리온이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보고 싶어도 꾹 참고 기다리겠다니. 그 말은 그녀가 자신을 그리워할 거라는, 그녀가 그에게 보내는 암시였다.
어떻게 할 것인지 모든 것이 결정된 순간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서로를 향한 강한 믿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때를 맞춘 듯 키메라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아스테리온과 기사들은 록사나를 보호하는 척하며 키메라를 상대했다.
록사나는 정령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아군에게 공백이 생겨 눈먼 키메라가 나타날 때만 힘을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키메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인원이 훨씬 적은 아스테리온 측의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록사나를 보호하는 데 공백이 발생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연출된 공백이었다.
적들은 바로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은 바로 로웰 후작의 명령을 받은 수하들이었다.
홀로 일행들과의 거리가 한참 떨어지게 된 록사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결국 그녀는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로웰 후작의 수하들에게 사로잡혀 납치당했다.
그즈음 연락과 신고를 받은 카일라니 기사단과 치안대가 급하게 현장에 다다랐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초 단위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모두가 힘을 합했다. 그는 검을 빼 들었고, 키메라를 일망타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