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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07)화 (207/214)

207화 

서로의 숨이 서로의 입술에 내려앉으려는 그 순간, 벨루카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산통을 깼다.

- 나 여기 있다고!! 이런 음흉하고 포악한 남자 인간 같으니라고!

달아올랐던 공기가 순식간에 제 온도를 찾았다.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질 뻔했는지를 깨달은 록사나의 얼굴이 봉숭아물이 든 것처럼 벌게졌다.

방해꾼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살짝 물리며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록사나의 이마에 말캉한 것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가 재빠르게 도망을 쳤다.

열기와 아쉬움을 견디지 못한 아스테리온이 기어이 작은 흔적을 남긴 것이다.

‘어?’

록사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야 되는데 입만 벙긋거렸다.

- 이게 진짜!

벨루카가 발을 쿵 하고 구르며 성을 잔뜩 냈다.

‘오늘 저 방해꾼을 떼어 놓고 왔어야 했는데!’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눈물을 가득 머금었다.

후회해 봤자 때는 이미 늦었고, 벨루카가 그렇게 좋아하는 케이크도 이제는 약발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서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 너 저리 가, 당장 저리 가라고!

“알았다, 하아.”

숫제 치한 취급까지 해 가며 벨루카가 그의 몸을 저 멀리 밀어냈다. 기어이 록사나의 옆을 차지하고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단단히 감추었다.

한껏 치켜뜬 눈은 그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기세였다.

결국 아스테리온은 두어 발 물러서며 두 손을 들어 올려 항복을 선언했다. 록사나의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 * *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록사나가 남작저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맞이한 아이린이 집무실로 향하는 내내 따라붙었다.

“록사나 님, 얼굴이 엄청 빨갛게 달아올랐어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 아픈 거 아니야.”

“설마, 여름 감기에 걸리시고는 숨기는 거 아니에요? 요즘 너무 무리를 하셔서…….”

“아이린, 정말 나 하나도 안 아파. 날이 더워서 그런 거야. 좀 서둘러서 오기도 했고.”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했다. 실제로 아픈 곳은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공작 성에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어요? 별일 없으셨고요? 왜 공작님이랑 같이 안 오시고 혼자 오셨어요?”

꼬치꼬치 캐묻자, 그녀는 속으로 뜨끔했다. 얼굴에 열이 더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얘가 원래 이렇게 집요했던가?’

계속 놔두었다가는 곤란해질 수 있었다. 질문할 틈을 차단해야 했다.

록사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나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해. 목이 엄청 마르네.”

“네, 얼음 많이 챙겨서 금방 가져갈게요. 먼저 가 계세요.”

예상보다 쉽게 아이린이 떨어져 나갔다.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록사나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다시피 했다. 집무실로 발길을 재촉했다.

‘으아악, 미치겠다!’

만약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면 이불을 빵빵 걷어찼을 것이다. 록사나는 캠든 성에서 벌어질 뻔했었던 일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서류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한쪽으로 점점 기우는 것을 느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니, 어찌해 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미 위에서 아래로 거세게 흐르는 물줄기를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앞으로 그를 볼 때마다 얼굴이 자꾸 붉어진다면 그 자리를 벗어나 가라앉히면 그만이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과 횟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어떡하지? 예전과 같은 일방적인 관계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아.’

그의 마음이 변했다는 걸 알지만 사람 마음이란 알 수 없고, 때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 마음이기에 시소를 타는 기분이었다. 오르락내리락. 마냥 아래도, 위도 없다.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 정립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지금은 그 일들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사치였다.

‘우선은 그냥 시간에 맡기자.’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을 때쯤 아이린이 그녀가 있는 집무실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내왔다. 유리잔을 들어 그걸 쭉 마시니 막혀 있던 것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살 것 같다.”

“갈증이 많이 나셨던 모양이에요.”

“응, 덕분에 속이 시원해.”

“천천히 드시면서 이것 좀 보세요.”

아이린이 알렉시스에서 나온 의류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VVIP도 받을 수 없는 록사나만을 위한 전용 카탈로그였다.

“바빠서 시간도 안 나는데 일일이 의상실 방문하지 않아도 돼서 여러모로 편하네.”

“가지고 계신 드레스 중에서 아무거나 입고 가실 예정이었던 것은 아니셨겠죠? 휴, 이거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절대 아니야, 아이린.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내서 새 드레스를 장만했을 거야. 돈도 많은데 쌓아 뒀다가 뭐 해.”

정곡을 찔려 속으로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네, 그러셨을 거예요. 이거 어떠세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아이린은 너그러운 보좌관의 마음을 발휘해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었다.

록사나는 아이린의 추천을 받은 것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릴 법한 드레스를 세 벌 고르며 여름 무도회 준비 지옥에서 벗어났다.

* * *

여름밤, 화려한 루비 홀의 불빛 아래에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무대 중앙에서는 파트너를 이룬 남녀가 저마다의 춤 실력을 뽐내며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한 쌍의 남녀에게 집중적으로 쏠려 있었다. 그들의 외형과 춤, 의상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리드 아래 한 마리의 우아한 나비가 되어 플로어를 장악했다.

이내 그녀가 아스테리온의 핑그르르 턴을 돌았다. 치맛자락이 물결처럼 펼쳐졌다가 살짝 다물린 꽃봉오리가 되는가 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록사나의 청록색 드레스에 수놓아진 다이아몬드가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며 오늘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었다.

“불편해?”

아스테리온이 제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바짝 붙였다. 그의 숨결이 간지러움을 태우자, 록사나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사람들의 시선에 그녀가 위협을 느꼈다고 오해한 아스테리온이 가녀린 몸을 제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세상의 모진 풍파로부터 그녀를 반드시 지켜 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음, 조금요? 다들 너무 강렬하게 쳐다봐서 화살에 꿰이는 것 같아요.”

“그럼 자리를 옮기자.”

너무 오랜만에 록사나와 추는 춤이었다. 이 밤이 다 새도록 쉬지 않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가 힘든 건 싫었다.

“좋아요, 테라스로 가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충분히 자리를 지켰으니까 이만 돌아가는 건 어때?”

아스테리온은 아까부터 록사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의 시선에 속이 뒤집혔다. 번들거리는 두 눈에는 끈적대는 욕망이 그득 차 있었고, 노골적이어서 몹시 못마땅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어디의 누구 때문에 얼굴이 뚫릴 지경이에요.”

록사나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고 루비 홀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들에게 다가오려고 기회를 엿보던 도노반과 귀족들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황궁 정문을 지나 아벨리오 남작저를 향해 달려갔다.

“기분이 더럽군.”

루비 홀에서의 일을 떠올린 아스테리온이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록사나를 바라보던 도노반과 남자들의 더러운 눈을 파 버리고 싶었다.

아스테리온이 노골적으로 그녀에 대한 소유욕과 질투를 보이자, 록사나가 묘한 눈길로 맞은편에 앉은 그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너무 간지러워. 원래 이런 건가?’

그가 한 자리에 없었다면 자신의 심장이 자리한 가슴 부분을 벅벅 긁었을지도 모른다. 손발까지도 절로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어떻게 하면 세상 모든 남자들의 시선으로부터 록사나를 지켜 낼 수 있을까 한참 동안 진중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치듯 머릿속에 석 달 뒤쯤에 있을 추수절 행사가 떠올랐지만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일이라고 애써 무시했다.

“이제 당분간 황궁에는 갈 일은 없겠군.”

“네, 앞으로 더 바빠질 걸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황실 무도회에 한 번 참석하려면 준비하는 데에만 만만치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지금은 다시 4구역 사업으로 정신이 없지?”

“맞아요, 지금 한창 공사 중이라 살펴보고 결정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록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물론 담당 실무자들에 비하면 최종 결정권자인 저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에요. 하지만 영지 업무와 병행하려고 하니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요.”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건강을 해칠 정도로 너무 무리하지는 마. 만약 그대가 내 말 흘려들으면 두 눈 부릅뜨고 매일 옆에서 감시할 거야.”

록사나의 귀여운 투정에 아스테리온이 피식 웃었다. 감시하겠다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게 내 얼굴에 쓰여 있어요?”

“응. 일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 별보다 더 밝게 빛나서 눈이 부실 정도야.”

“제가 한 미모 하긴 하죠.”

그의 낯간지러운 칭찬에 면역이 안 된 록사나가 애써 태연히 맞받아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그녀보다 한술 더 떴다.

“여기서 더 예뻐지면 안 돼. 그럼 내가 너무 곤란해. 그대를 어디로 납치할지도 몰라. 지금도 당장 그러고 싶어서 엄청 참는 중이거든.”

“놀리지 마요!”

“진짠데. 어떻게 해야 믿지? 안 되겠어. 지금 당장 실천해 보는 수밖에.”

“진짜 그러기만 해 봐요.”

록사나가 눈을 샐쭉거리며 그의 팔을 퍽퍽 내리쳤다. 팔뚝이 얼마나 딴딴한지 아픈 건 오히려 그녀의 손이었다. 마치 무쇠 팔 같았다.

“알았어, 안 할……!!”

그때였다. 말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정거를 하며 뭔가와 강하게 충돌했다.

쾅!

“꺄악.”

그 충격으로 록사나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재빨리 받아 내며 그녀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거의 동시에 자신의 몸으로 록사나의 온몸을 덮었고, 꽉 감싸 안았다. 물 샐 틈 없이 두 사람의 몸이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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