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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06)화 (206/214)

206화 

“말을 알아듣나 본데. 신기하군.”

“저도 신기해요.”

나무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어 보지 못했다. 물론 보통의 나무가 아니라, 무려 정령의 탄생목이었지만.

벨루카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커다란 몸이 자리를 차지하자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 그것뿐만이 아니야. 탄생목이 여기서 더 자라면 말도 할 수 있다고.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그럼 얼마만큼 자라야 말을 할 수 있어?”

- 조금 더? 아마도……. 미안, 사실 나도 그것까지는 정확하게 몰라.

벨루카가 두 귀를 축 늘어뜨렸다. 록사나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나중에 알게 되면 말해 줘.”

- 응!

금세 기운을 되찾은 벨루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부산스럽게 정령목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록사나가 메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서 풀어내 입구를 열어젖혔다. 가방을 뒤집어 흙바닥에 대고 조심스럽게 털었다. 그러자 작고 검은 구슬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에는 혹시라도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록사나는 어쩔 수 없이 가방을 탈탈 흔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아스테리온이 멀쩡해 보이는 것 하나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록사나와 벨루카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인데요. 이 정도로 많은 정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적어도 탄생목 하나를 통째로 뜯어낸 게 아닐까요.”

“나도 그렇다고 봐. 정령계에 몇 개의 탄생목이 존재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정령계의 생태계를 파괴할 수준인 것 같군.”

록사나가 벨루카를 불러 세웠다.

“벨루카, 이 정령들을 어떻게 하면 살려 낼 수 있을까?”

그녀가 이곳에 굳이 구슬들을 챙겨 가지고 온 이유였다.

벨루카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는 정령계가 아닌 정령사인 록사나의 도움으로 인간계에서 깨어났다. 그만큼 정령계나 정령에 대한 배움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벨루카가 고민을 하자, 부담을 준 건 아닌가 싶어 록사나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모를 수도 있지. 우리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

- 응.

그녀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벨루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스테리온도 거들었다.

“나도 노력하지. 분명 방법이 다른 있을 거야.”

록사나는 이미 멀쩡한 구슬 몇 개에 벨루카를 깨웠던 방법을 여러 번 시도해 봤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 어떤 변화나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최후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탄생목 곁에 구슬들을 두기로 했다. 뾰족한 수가 없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미 깨진 것들은 어쩔 수 없다지만 내가 아는 방법은 안 되고, 다른 방법은 모르니 정말 답답하네요. 그렇다고 다시 탄생목에 열매처럼 다시 매달 수도 없으니.”

“그래도 한번 매달아 볼까?”

“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아스테리온이 손에 쥔 것을 들고 탄생목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나뭇가지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예상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록사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역시 이 방법은 아닌 건가……?”

나지막하게 읊조린 그가 검은 구슬을 거둬들였다. 그때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구슬이 옆에 있던 열매에 닿으며 스쳤다.

화악.

순식간이었다. 작은 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응? 뭐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 방금 뭐야?

벨루카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검은 구슬이 들린 아스테리온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 다시 해 봐요! 방금 했던 것처럼 똑같이요.”

록사나의 재촉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울대가 한 번 출렁였다.

그가 검은 구슬을 아기 정령이 깃든 정상적인 열매 옆에 가져다 댔다. 직접 맞닿게.

화악.

거짓말처럼 아까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손을 떼지 않으니 빛이 지속되는 횟수가 늘어나며 깜박거렸다는 것이다.

“됐어요! 당신은 천재예요.”

- 남자 인간, 진짜 천재야.

그녀와 벨루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록사나가 물개 박수를 치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래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아스테리온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벨루카도 기쁨에 넘쳐 연신 공중제비를 돌았다.

반면에 아스테리온은 얼떨떨했다. 본인이 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 이 방법이 통한다고?!

그 와중에도 그는 록사나가 자신의 목을 오랫동안 끌어안기 편하도록 그녀에게 맞춰서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입꼬리는 씰룩거리며 춤을 추었고, 심장은 간질거렸다.

“우리 다른 것도 해 봐요!”

록사나가 손을 풀며 그에게서 금세 멀어져 갔다. 아스테리온이 낮게 한숨지었다. 이미 떠난 온기가 벌써부터 그리웠다. 미약하게 코끝을 스치는 부드러운 체향을 음미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록사나는 흙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멀쩡한 검은 구슬들을 골라 내기 시작했다. 치마와 옷소매가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가 검은 구슬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일어나다가 몸을 비틀거렸다. 아스테리온이 재빨리 그녀의 몸을 붙잡아 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중심을 바로잡고, 록사나는 탄생목에 매달린 열매 옆에 검은 구슬을 하나씩 가져다 바짝 붙였다.

양손이 모자라서 결국에는 아예 정령의 기운을 일으켰다. 그 힘을 이용해 하나의 열매 옆에 검은 구슬 하나씩을 짝지어 매달아 놓았다.

아스테리온과 벨루카도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녀의 옆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무 전체에 작은 전마석 등과 보석을 엮어서 매달아 놓은 듯 빛이 반짝반짝 깜박거리며 장관을 이루었다.

마치 꼬마전구를 전체에 두르고 불을 켠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됐어요.”

- 와, 멋지다!

“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록사나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감각에 겨워 그녀의 두 손이 기도하듯이 저절로 모아졌다.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의 입으로 파리가 들어갈 기세였다. 벨루카가 앞발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 그의 입을 닫아 주었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정령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을 한 록사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스테리온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정면에 위치한 탄생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편 벨루카는 쭉 뻗은 아스테리온의 허벅지에 턱을 척 올려놓고 팔자 좋게 엎드려 있었다.

원래는 록사나의 다리에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너무나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남자 인간의 허벅지는 무척 두껍고 튼튼했기에 무거운 자신의 머리 전체를 얹어 놓아도 그 무게에 짓눌리거나 행여 멍이 들까 봐 염려하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아스테리온. 당신 덕분에 오래전 탄생목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간 정령들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반쪽짜리 방법인데……. 아직 정확한 방법인지는 확실히 알 수도 없고 말이야.”

아스테리온이 멋쩍어했다. 록사나가 고개를 기댄 자신의 왼쪽 어깨가 계속 의식이 되었다. 솜털이 내려앉은 것 같은 무게감이었다.

‘어떻게 해야 머리를 살찌울 수 있지?’

다시 그녀의 남편이 되기 위한, 그녀가 내준 수수께끼도 아직 다 풀지 못했는데 큰 고민이 하나 더 생겨 버렸다.

그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록사나가 피식 웃었다.

“우리 공작님은 절반의 성공을 거둬 놓고도 참으로 겸손하시네요. 벌써 절반씩이나 성공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나머지 절반만 성공하면 돼요. 나는 계속 실패만 했는데.”

“실패라니, 무슨 소리야. 그대가 만약 이것들을 챙겨 오지 않았다면 실마리 같은 건 아예 찾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절반의 성공은 당신 덕이야.”

- 이번에는 남자 인간의 말이 맞아.

벨루카가 말하는 뉘앙스가 좀 이상했지만 아스테리온은 지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록사나는 벨루카까지 나서서 그녀의 공이라고 띄워 주자, 얼굴에 금칠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화제를 살짝 돌렸다.

“둘을 붙여 놓으면 아기 정령 열매가 검은 구슬 안에 잠들어 있는 정령에게 힘을 나누어 주는 것 같아요. 빛이 계속 깜박거리는 것이 그래 보여요.”

“응. 어느 정도로 힘을 얻으면 스스로 깨어나거나 아니면 그대가 깨울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좀 많이 걸려도 괜찮으니까 그저 무사하기만 바라요.”

부스러기 형태로 바닥에 흩어져 있는 깨진 조각들을 바라보는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눈이 슬픔에 깊이 잠겼다.

그 마음을 느낀 아스테리온이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많이 슬프고 안타까운 거 알아. 당신이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 좋겠어. 대신에 저렇게 만든 자들을 찾고 대가를 치르게 하는 데 한 팔, 아니, 두 팔 거들게. 두 다리도.”

“어머, 당신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요?”

미소를 되찾은 록사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두근두근. 누구의 심장 소리일까.

품 안에 안긴 가녀린 몸, 밤하늘보다 더 고운 머릿결, 뽀얀 얼굴과 동그란 이마가 강력하게 유혹의 손길을 뻗어 왔다. 얼마나 부드러울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어서 한번 만져 보라고.

봄과 여름으로 넘어가는 나뭇잎을 닮은 아름다운 눈과 오뚝 솟아오른 앙증맞은 코는 그의 파란 눈을 옭아맨 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붉은빛이 도는 입술에 다다르자, 갈증을 참지 못한 그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그의 온몸을 태울 듯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불길이 불쑥불쑥 치솟아 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스테리온은 이 불길이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와 수많은 밤을 보낼 때도 쉽사리 해소되지 않던 목마름이었다.

그의 애끓는 마음을 그녀는 알까.

아스테리온은 그녀가 아주 조금이라도 그와 같은 마음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개가 아래로 향하며 그녀에게로 점점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붉은 입술에 내려앉았다.

록사나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주변 공기가 달아오르며 두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아래로 서서히 내리감기며 그가 바라마지 않는 계절을 숨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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