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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05)화 (205/214)

205화 

바닥에 나뒹구는 쇠창살을 본 이종족들의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때부터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저기에서 긴 쇠창살이 나뒹굴었다. 그 소리를 듣고 그제야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은 문에 달린 열쇠만 파괴해도 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다소 번거롭더라도 쇠창살을 남김없이 일일이 베어 냈다.

한 공간 안에는 몸을 누일 자리도 없이 많은 인원이 갇혀 있었고, 좁은 문 하나를 열고 한 명씩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아스테리온이 뭐라고 신호를 주기도 전에 감옥 안으로 들어가 이종족들을 이동시킬 준비를 했다. 다가가자 그들은 잔뜩 경계를 하며 한쪽 구석으로 몰려갔다.

그때 마커스 경이 좌우 양쪽으로 배치된 감방의 통로를 지나가며 입을 열었다.

말을 함과 동시에 마커스 경이 자신의 옆에 있는 바람의 늑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그래야 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지금부터 안전한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을 할 테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를 믿기 힘들다면 여기 있는 늑대를 한번 보십시오.”

시력이 멀쩡한 이들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령?!”

“오래전에 다 사라졌는데 어떻게……?”

“진짜 정령이 맞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어떤 이들은 자신의 눈을 연신 비볐다. 하지만 늑대의 모습은 환영이 아니라는 듯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행된 실험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이제는 실험에 쓰일 정령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멀쩡한 정령이라니!

바람의 늑대는 록사나가 정령의 힘으로 빚어낸 생물이라서 엄밀히 따지면 정령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종족들은 그 사실을 몰랐고, 늑대가 정령의 힘을 품고 있으니 진짜 정령처럼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눈에 하나둘씩 생기가 돌기 시작하며 경외심이 어렸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남자가 동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의 팔과 얼굴 일부에는 생선 비늘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우두머리는 우두머리를 알아보는 법이다. 남자는 성치 않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기어가더니 아스테리온의 앞에서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한껏 들고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아스테리온은 곧바로 몸을 낮춰 상대방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당신들을 믿겠습니다. 제발 저희를 이 지옥에서 꺼내 주십시오!”

남자가 머리를 숙이자, 다른 이종족들도 몸을 낮추며 고개를 숙였다.

“모두 고개를 들도록 해.”

묵직하고 힘 있는 음성이 이종족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아스테리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지금부터 거동이 가능한 자들은 기사들의 지시를 따르며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해.”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스테리온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우리가 알아서 데리고 나갈 테니 걱정하고.”

그제야 남자의 눈에서 불안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 갇혀 있는 아이들도 구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디에 있는지 제가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남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다. 지금 아이들 쪽에서도 구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기어이 안도의 눈물을 보였다. 가슴 위에 묵직하게 얹어져 있던 돌 하나가 사라졌다.

마커스 경이 거동이 불편한 그 남자를 번쩍 안아 들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자, 빨리들 움직입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 말을 신호로 이종족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철창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서둘러 감방을 우르르 빠져나왔다.

그 뒤부터 구출 작업은 물 흐르듯 순조롭게 이어졌다. 다른 두 개의 통로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패턴으로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기사들은 마지막 마무리까지 최선을 다하며 꼼꼼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모든 이종족들을 구출해서 캠든 영지의 다이아몬드 동굴로 넘어왔을 때는 동쪽 하늘에서부터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이종족들 거의 대부분이 난생처음 보는 새벽하늘이었다. 그들은 벅차오르는 감정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이들과 어른이 뒤섞여 서로를 얼싸 부둥켜안았다. 그들은 재회와 탈출의 기쁨을 나누었다.

탁한 공기가 아닌 맑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폐가 풍선처럼 한계까지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록사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어느덧 그녀의 두 눈에도 이슬이 몽글몽글 맺혔다.

아스테리온이 은근슬쩍 록사나의 몸을 끌어당겨 제 품 안에 단단히 가두었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의 눈가가 짓무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 떨어져, 음흉한 남자 인간!

샘이 난 벨루카가 두 사람 사이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스테리온을 록사나에게서 떼어 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키얀 역시 두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노려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눈물 바람이 일었다. 기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서둘러 캠든 성으로 가야 합니다.”

록사나 일행은 다음 일정을 서둘렀다. 몸이 성한 자들이 한 명도 없었기에 제대로 된 장소에서의 휴식과 치료가 시급했다.

다이아몬드 동굴 내에 있는 게이트는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캠든 성 게이트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마차로 이동해야만 했다.

기사들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여러 대의 마차에 이종족들을 적절히 나누어 태웠다.

마차는 바람의 늑대들이 끌었다. 말보다 몇 배는 빠르게 속도를 내며 목적지인 캠든 성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록사나와 벨루카는 출발하기 전에 모든 마차에 정령의 힘을 덧씌웠다. 그 덕분에 탑승자들은 안정되고 편안한 승차감을 느낄 수 있었고, 멀미를 하는 이들도 없었다.

* * *

아침 해가 산등성이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을 때쯤 여러 대의 마차가 줄줄이 성문을 통과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성내 고용인들이 록사나와 이종족 일행을 맞이했다.

선두에 자리하고 있던 프레드릭과 코델리아가 막 벨루카의 등과 말에서 내리는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참으로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레드릭의 뒤를 이어 코델리아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울먹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한 이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록사나가 코델리아를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보다시피 다들 상태가 몹시 좋지 못해요. 서둘러 치료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부터 그들에게 코델리아의 도움이 가장 절실해요.”

“록사나 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에요. 자리를 먼저 뜨겠습니다.”

코델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두 눈은 결의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이에요.”

록사나의 대답에 코델리아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별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종족들과 관련된 일들은 앞으로 코델리아가 전담해서 진행하기로 사전에 논의되었다.

그녀가 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때를 맞춰서 성내 어린이집은 오늘부터 일주일간의 단기 여름 방학에 들어갔다.

또한 이종족들의 치료가 끝난 후, 그들이 알렉산드리아 산맥에 마련된 거주지 크레나타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코델리아가 도울 예정이었다.

계속해서 이종족들이 별채로 옮겨지고 있었다.

알렉과 피레아는 환자가 입구에 도착하는 대로 그들의 상태에 따라서 쉴 틈 없이 분류 작업을 벌였다. 우선순위에 따라 치료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도 아이들을 안아 옮기며 부지런히 손을 거들었다.

마차가 다 비자, 기사들이 마차를 마구간으로 이동시키며 모든 상황이 얼추 정리되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본관으로 발길을 돌렸고, 구출 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기사들도 각자의 숙소를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반면에 별채에서 치료와 경비 등의 임무를 담당하게 된 사람들의 움직임은 바빠졌다.

길고 길었던 어두운 밤이 무사히 지나가고, 밝은 햇살 아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이후 록사나는 게이트를 통해 수도 남작저와 캠든 성을 바쁘게 오고 가며 이종족들의 건강과 생활을 직접 챙기고 살폈다.

* * *

며칠 뒤, 록사나와 벨루카, 아스테리온이 공작 성의 지혜의 방을 다시 찾았다.

- 우와, 내 동생들 엄청 많다!

정령의 탄생목을 발견한 벨루카가 신이 나서 그 주변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 이것 봐, 록사나. 내 아기 정령들이야! 남자 인간, 내 동생들이라니까!

“그래. 우리 벨루카. 아기 좋아하는구나?”

- 당연하지.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보다 못한 아스테리온이 헤벌쭉 벌어진 벨루카의 입을 손수 닫아 주었다.

- 한 명, 두 명, 세 명…….

벨루카가 본격적으로 탄생목에 열린 아기 정령들을 일일이 세기 시작했다.

“그사이 탄생목이 조금 자란 것 같아요. 열매도 그렇고요.”

“내가 봐도 그래 보여.”

록사나가 손을 뻗어 정령의 기운을 탄생목에게 나누어 주었다. 목이 말랐던 것처럼 탄생목이 그 기운을 쭉쭉 빨아들였다.

그 옆에서 아스테리온은 혹시 무리라도 할까 싶어 언제든지 그녀를 말릴 태세를 취했다.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록사나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때였다. 탄생목이 마치 더 달라는 듯이 웅웅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격한 반응에 록사나가 순간 당황했다가 침착함을 되찾았다.

“나도 더 주고 싶지만 뭐든지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자. 다음에 또 줄게, 알았지?”

그녀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탄생목의 몸통을 토닥거렸다. 그러자 울림이 뚝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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