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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04)화 (204/214)

204화 

【 지금은 날 보내 줘요 】

“음,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나?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키얀의 반응에 민망해진 록사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키얀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품에 자신의 몸을 구겨 넣다시피 하며 달갑게 안겨 들었다. 등을 구부리고 그녀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록사나, 정말 매일매일 보고 싶었어요.”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그동안 잘 지냈어?”

록사나가 활짝 웃으면서 키얀의 넓은 등을 토닥거렸다.

“머리도 쓰다듬어 주세요.”

“우리 키얀, 못 본 사이에 어리광이 많이 늘었네.”

록사나가 안 해 줄 것처럼 말하자, 키얀의 목소리가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너무 오랜만이잖아요…….”

마음이 약해진 록사나가 그의 요구대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처음부터 키얀의 부탁을 거절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그의 표정이 그녀의 손길 아래 스르르 풀렸다.

록사나가 포옹을 풀며 고개를 바짝 꺾었다.

“그나저나 우리 키얀 경은 대체 얼마나 더 클 예정이신지?”

“다 클 때까지?”

“그래, 키얀 말이 맞다. 다 클 때까지 커야지. 지금도 엄청 듬직한데 앞으로 얼마나 더 멋있게 자라날지 기대되네.”

그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키얀의 심장은 그 박자에 맞추어 오르락내리락 널을 뛰었다.

“자,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자.”

록사나가 소파에 앉자 키얀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앉으니 넓은 소파가 꽉 차 보였다.

하녀가 준비해 준 차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그동안 못다 나눈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수도 남작저 방문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의 가장 밑에 있어서 못내 서운했던 키얀의 마음은 어느덧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 * *

기실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이아몬드 동굴 안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 모습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 정연했다.

기드온 경이 게이트를 가동시키자 여러 명의 기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굳어 있는 표정이 그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빛을 뿜어내며 게이트가 열렸다.

아스테리온과 벨루카가 게이트의 맨 앞에 섰다. 둘이 자석에 이끌리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두 주먹을 쥔 록사나가 결연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벨루카가 몸을 낮추었다. 록사나가 그 등에 올라탔다.

이내 아스테리온이 기사들과 게이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발한다.”

- 출발!

그가 가장 먼저 게이트로 안으로 발을 들였다.

뒤를 이어 벨루카와 록사나, 기드온 경과 헥터 경이 바짝 따랐다. 다른 이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줄줄이 게이트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종족 실험 시설의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록사나를 태운 벨루카가 기척을 죽이며 곧장 앞장서 나아갔다. 그녀의 뒤를 키얀과 아스테리온이 바짝 쫓았다.

간간이 등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달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수신호로 주변 상황을 알려 주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내 그들의 앞에 세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이용해 순식간에 두 마리의 바람의 늑대를 만들어 냈다. 그녀는 바람의 늑대 각각 한 마리씩을 중앙과 오른쪽 통로 안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일행은 세 팀으로 나뉘어 각각의 통로로 흩어졌다. 사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왼쪽은 벨루카와 록사나가 맡았다. 로사 경과 키얀 등 한 팀을 이룬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중앙은 아스테리온과 마커스 경이, 오른쪽 통로는 기드온 경과 헥터 경, 마르셀 경, 휴고가 주축을 이루어 도맡았다. 그들의 뒤로도 각 팀의 기사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록사나가 정령의 기운을 끌어올려 쫙 퍼트렸다. 왼쪽 통로에 있을 적들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도 벨루카와 대화가 가능해졌다. 바로 전음이라는 능력을 터득한 것이다.

전음은 상대방의 머릿속으로 직접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인데, 지금과 같이 기척을 지우며 임무를 수행할 때 무척이나 유용했다.

이내 록사나가 벨루카에게 전음을 흘려보냈다.

- 어때, 벨루카?

- 다들 픽픽 쓰러지고 있어.

벨루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였다. 빠르게 달리던 벨루카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급정거를 했다. 그 반동으로 인해 그녀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 잠깐만!!

록사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세를 바로잡으며 힘을 한껏 끌어올렸다. 언제라도 재빠르게 공격할 수 있도록 주변의 기척을 탐색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 뭔데 그래, 벨루카?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신경은 온통 바짝 곤두섰다. 연신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녀의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 희미하지만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록사나, 우리는 반드시 저쪽으로 가야 해.

벨루카가 안절부절못하며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시선이 벽 너머로 향했다.

록사나는 한순간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을 벨루카가 감지해 냈다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작전과 달랐기 때문에 구출 과정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었다.

이내 빠르게 마음을 정한 그녀가 바람의 늑대 한 마리를 만들어 내며 상체를 뒤로 돌렸다.

- 로사 경, 작전과 다르지만 저는 잠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서둘러 합류할 테니까 로사 경은 계획대로 움직여 주세요.

전음을 받은 로사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르는 기사들을 이끌고 벨루카를 지나쳐 바람의 늑대가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그 순간 키얀이 자신을 따르려는 기색을 보이자, 록사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빨리 그를 말렸다.

키얀은 마지못해 로사 경과 기사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달려갔다. 록사나를 붙잡으며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벨루카가 한쪽 벽 앞에서 앞발을 들어 휘둘렀다. 그러자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뚫린 구멍 너머로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벨루카가 여전히 록사나를 등에 태운 채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갔다. 곧장 쭉 달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빠르게 달리는 그들의 온몸을 쉴 새 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응? 이건!’

앞으로 나아갈수록 벨루카가 말했던 익숙한 기운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녀도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 여기야!

- ……!!

록사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착한 곳에는 붉은 육망성 표시가 새겨진 작은 구슬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어떤 것은 조각나 깨져 있었고, 더러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녀가 벨루카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발밑에 있는 것들 중 몇 개를 집어 들어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 이건 너와 같은 정령들이구나.

- 맞아. 나처럼 완전하게 태어나지 못한 존재들이야.

록사나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벨루카를 처음 만났을 때와 얼마 전 보았던 정령의 탄생목에 맺힌 열매들을 떠올렸다.

여기에 있는 작은 구슬들은 탄생목에 맺힌 상태에서 강제로 뜯겨 나온 것들이었다.

나무에 열린 과일로 치면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정령 왕이나 최소한 상위 정령이 아니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정령들…….

구슬들은 푸릇푸릇한 연녹색빛을 모두 잃은 채 마치 죽은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록사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이를 꽉 악물었다. 이 사태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탄생목 가지가 카일라니 공작 성에 심겨진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누가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인 것일까. 로웰 후작? 도노반? 아니야, 그들은 그럴 능력이 없어. 분명 또 다른 누군가가 벌인 짓이야.’

그자를 당장 찾아내 일벌백계하고 싶었다.

캠든 영지에서 자신이 납치당했을 때 마주한 육망성 표식을 지니고 있던 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탄생목에서 정령이 깃든 열매를 강제로 분리해 내려면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녀만이 벨루카를 깨울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들은 그저 신체의 한 부분에 정령 열매를 삽입해 이용하는 것이 한계인 것 같았다.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상위 정령들과 정령 왕들, 혹은 정령사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언제나 정령의 탄생을 기뻐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들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록사나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벨루카는 힘을 풀어 구슬들을 한 번에 다 모았다. 깨진 조각은 물론 부스러기 하나조차도 빠뜨리지 않았다.

벨루카가 코끝으로 록사나의 손을 툭툭 건드려 그녀의 상념을 일깨웠다.

-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록사나가 벨루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구슬들을 어깨에 메고 있던 자신의 가방 안에 몽땅 쓸어 담았다.

손가락 한 번 까닥거려 정령의 힘을 발휘하니 많은 구슬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작은 가방은 아공간 주머니였다.

한편 아스테리온과 기드온 경, 로사 경은 각자 맡은 구역에서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이 앞서나가며 적군을 모두 잠재웠기에 피 튀는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구출 작업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었다.

‘적들이 배로 늘었군.’

아스테리온이 지나가는 길마다 쓰러져 있는 적들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작전 시행 한 시간 전에 마지막 보고를 받았었고, 이곳의 감시 인원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것을 사전에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작전 수행에 큰 차질이 빚어질 뻔했다.

이종족들은 난데없이 복면을 쓴 낯선 무리가 등장하자,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다.

“누, 누구……?”

“제발 살려 주세요.”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감옥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숨을 구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더러는 죽음을 바랐다. 아예 의식이 없는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기운을 누그러뜨렸다…….

“너희를 해치려고 온 게 아니다. 그래도 무서우면 뒤로 물러나도록 해.”

몇 명이 억지로 몸을 질질 끌며 움직였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두꺼운 쇠창살이 단숨에 위아래로 잘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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