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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03)화 (203/214)

203화 

“아무리 해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여전히 그의 눈에서는 아쉬움과 미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도 잘 알았다.

그사이 핀이 재빨리 게이트를 가동시켰다.

“그럼 저 출발할게요.”

“조심히 가거라.”

바이올렛이 게이트에 오르자 휴고가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훔치면서 한 손을 흔들었다.

환송을 나와 있던 문라이트 상단 식구들도 바이올렛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바이올렛, 나중에 캠든 성에서 보자.”

“네, 록사나 님.”

록사나의 눈짓을 신호로 바이올렛이 게이트를 타고 캠든 성으로 넘어갔다.

순식간에 바이올렛의 모습이 사라지자, 휴고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내가 따라갈 것을 그랬어. 이놈의 상단주 자리를 내려놓든지 해야지…….”

“네네,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런데 저 언제쯤 승진하면 되나요, 오늘, 내일? 아니면 지금? 제 생각에는 지금이 딱 좋네요!”

부상단주인 프리다가 휴고를 일으켜 세우며 히죽 웃었다.

“흥, 어림도 없어. 문라이트 상단은 우리 귀여운 손녀 바이올렛에게 물려줄 거야.”

휴고가 그녀의 손을 냉큼 뿌리쳤다. 그녀를 노려보면서 먼지 묻은 옷자락을 탁탁 털었다. 마치 그녀를 탈탈 털어 내듯이.

프리다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암요, 암요. 그나저나 저는 만년 2인자 신세를 면치 못하겠군요. 아이고, 내 팔자야. 뼛골 빠지게 일해 봤자 말짱 황이라니까. 그러니까 매년 월급이나 두둑하게 인상해 주세요. 그러면 바이올렛 자리 넘보지 않을게요. 아셨죠?”

“하는 거 봐서.”

휴고와 프리다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바이올렛이 캠든 성으로 무사히 넘어갔다는 신호를 받았다.

프리다와 핀이 상단 식구들을 이끌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휴고, 우리도 움직여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록사나는 그와 함께 게이트를 타고 아벨리오 남작저로 넘어왔다.

오늘 밤 진행하는 이종족 구출 작전에 휴고도 합류하기로 했다. 구출된 자들 중에 엘프족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 * *

도노반이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의 침실과 연결된 비밀 통로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온통 어두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마력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그 마력 등이 하나둘씩 켜지면서 통로를 밝혀 주었다. 덕분에 그가 이동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고도의 집약된 기술로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사방에 쳐진 거미줄이 이곳이 오랫동안 잊혔던 통로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 비밀 통로는 오직 한 곳으로만 연결되어 있었기에 길을 헤맬 염려가 전혀 없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도노반이 벽에 미세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눌렀다. 이어서 벽을 밀자, 그 벽이 회전문처럼 돌아가며 길을 터 주었다.

“이곳에 오랜만에 오는군.”

도노반이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가 책장으로 다가가 책 하나를 꺼내 들고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 표지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탄 듯 여기저기 닳아 있었다.

그가 단번에 본인이 원하는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더니 글자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나는 역시 운이 좋단 말이야.”

자신이 이곳을 발견하게 된 경위와 손에 쥔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그가 연신 히죽거렸다.

그가 황궁 서고의 구석진 곳에서 있는 책 사이에 끼어 있는 오래된 지도 하나를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냥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늘 외톨이 신세였기에 모험 삼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서 황궁을 탐사했었다. 지도에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자라면서 비밀 공간을 찾는 횟수가 뜸해졌고, 그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갈 때쯤이었다.

배다른 동생인, 그때 당시에는 황태자였던 네이든의 침실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그때 그는 이 비밀 공간으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하며 비밀 공간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손에 쥔 책까지 얻게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의 기쁨이 지금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황제가 되고 나서야 두 모자는 궁에 겨우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황제의 아낌없는 총애를 받았음에도 힘없는 후궁은 언제나 질시와 멸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소생인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복형제들과 다른 후궁들에게 괄시를 당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꿈에 부풀었던 어린 소년의 황궁 생활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의 첫아들이라는 것밖에는 가진 힘이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는 입버릇처럼 첫아들인 네가 황족의 특징인 은발과 자수정 안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하고 자주 한숨을 지었다.

도노반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평민 후궁 소생이지만 황족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녔다면 황족들의 눈총을 받을 일이 덜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도노반은 할 수만 있다면 은발에 자수정 안을 반드시 갖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그랬는데 말이지. 이런 방법이 있었을 줄 그 누가 알았겠어.”

도노반이 손에 든 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리온 제국의 시조인 클라우드 마르퀴스 대제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일반적인 일대기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비밀까지 말이다.

“역사에 다시는 없을 위대한 시조로 알려진 클라우드 대제가 정령 왕을 죽이고서 대마법사가 되었다니. 게다가 그 영향으로 은발과 자수정 안을 가지게 되었지.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물론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다들 깜짝 놀라 나자빠질 것이다. 황족의 특징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니.

비록 거짓으로 쌓아 올린 명성이라고 해도 도노반은 클라우드 대제가 가졌었던 힘과 외모를 고스란히 얻고 싶었다.

하늘이 그의 염원을 들어주기라도 하듯이 이 책에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그래서 도노반은 어떤 보물보다도 귀한 책을 발견한 그날 비밀 공간에서 가지고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무슨 고대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인지 책을 들고서는 비밀 공간을 단 한 발자국도 나설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야 했다. 이후 그날 이후부터 어쩔 수 없이 두고 온 그 책이 눈앞에서 매일 아른거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책을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모두 밝히고 상의할 수도 없어도 혼자서 끙끙 속을 앓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미한 황자 신분으로는 감히 황태자의 침실을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비밀 공간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없으니 더욱 애가 바짝 탔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네이든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그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마음껏 비밀 공간에 드나들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황태자의 침실을 차지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도노반은 독기를 품고 계획을 짰다. 결국 그는 네이든을 죽음으로 몰아내고 다른 이복형제들을 물리치면서 당당히 황태자의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장인인 로웰 후작의 공이 지대했다. 지금도 그의 장인은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주고 있었다.

그가 건네준 검은 약을 꾸준히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체력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몸 안에 많은 힘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모두 조금만 기다리라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 주지.”

고지가 멀지 않았다. 곧 있으면 외모까지 완벽한 핏줄로 거듭나리라.

단꿈에 부푼 도노반이 유유히 비밀 통로를 빠져나왔다. 책을 원래의 책장에 곱게 꽂아 둔 채로.

* * *

“어서 와, 키얀.”

“오랜만입니다, 아이린.”

남작저를 방문한 키얀을 아이린이 게이트 앞에서 반갑게 맞이했다. 이내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내렸다.

“뭐야. 내가 누나인 건 맞지만 말투가 완전 싹 변했네. 키도 엄청 자랐고.”

수도로 향하는 5월 초에 키얀을 마지막으로 봤었다. 그때도 그녀보다 키가 한참이나 컸었지만, 지금은 더 고개를 꺾고 올려다봐야 했다.

“저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아이린은 어떻게 키가 한 톨도 안 자랐네요.”

“뭐야?! 너 지금 나 키 작다고 무시하는 거야?”

“하나도 안 자란 게 정말 신기해서요.”

평범한 인간의 나이 열여섯 살이면 한창 키가 자라날 때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진지한 얼굴을 한 키얀을 본 아이린은 김이 푸스스 빠지며 단번에 전의를 상실했다. 대신 소소한 보수를 감행했다.

“덩치가 커졌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란다.”

아이린이 피식 웃으며 훈계하듯이 말하자, 키얀이 대번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점이 그가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아 그녀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누나한테 기어오르려면 아직 멀었다.’

잠시 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키얀이 눈을 굴리며 조바심을 잔뜩 냈다.

“록사나 님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

“집무실에 계셔. 따라와, 바로 안내해 줄게.”

아이린이 몸을 돌려 앞장서 갔다.

그 뒤를 키얀이 따랐다. 그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아이린의 작은 보폭에 맞춰 걸으려니 애가 탔다. 그가 록사나를 못 본 지 두 달이나 되었다.

집무실 앞에 다다르자, 아이린이 노크를 했다.

“록사나 님, 키얀 왔어요.”

“들어와.”

허락이 바로 떨어졌다. 아이린이 문을 열자마자 키얀이 그 사이를 비집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에서 아이린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키얀, 어서 오렴.”

“…….”

록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반면에 드디어 그녀를 마주하게 된 키얀은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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