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그럼 말을 왜 그렇게 해요? 마치 내가 영원히 허수아비 공작 부인으로만 남아 있었어야 하고, 영주는 될 수 없다는 듯이 말이에요.”
“…아!”
아스테리온이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벼락처럼 깨달았다. 자신이 한 말이 그녀에게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켰음을 말이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그의 눈썹이 축 처졌다.
“내 말뜻은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럼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그가 난데없이 얼굴을 붉혔다.
록사나는 어떤 질문도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자신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그의 태도가 익숙해졌을 법도 하건만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낯설었다.
“내 말은, 당신이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다고 하니까……. 재혼은 아예 생각이 없는 거야?”
록사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을 되짚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야? 재혼?’
팔을 들어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한쪽 귀를 후벼 팠다.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다고 하니까 그게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 그럼 문제는…….’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불빛이 확 켜졌다.
아하!
록사나가 악당같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짓궂은 마음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가 다시는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러느니 영원히 영주로 남겠다는 말로 이해한 거군요?”
“응.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다는 건 그대가 나랑 절대 재혼하지 않겠다는 말이잖아.”
풀죽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스테리온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제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눈빛과 신호를 계속해서 보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전 다시 공작 부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요.”
“정, 정말이야? 사실 아니지?”
아스테리온의 잘생긴 눈썹이 처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간절히 믿고 싶었다.
“영주로서 보내는 지금의 제 삶에 무척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서 단순히 누구의 부인이 되어 살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흡사 모든 피가 몸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제발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앞으로 내가 정말 잘할게, 지금보다 더!”
“이러지 말아요.”
그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턱 꿇었다. 그녀의 두 손을 동아줄처럼 붙잡고는 제 뺨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은 덜덜 떨렸다.
‘난 단지 공작 부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지 재혼할 마음이 없다고 한 건 아닌데…….’
록사나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눈이 그렁그렁한 것이 계속 놀리다가는 숫제 울려 버릴 것 같아서 이쯤에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옜다, 선심 썼다.’
그녀가 마주 잡은 아스테리온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가 간절함을 담아 눈을 마주쳐 왔다.
“힌트 줄게요. 저는 좋은 사람 있으면 다시 결혼할 거예요. 아직 창창한 앞날을 두고 혼자 청승 떨면서 살 생각 없어요.”
록사나의 말에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녀가 앞으로 재혼할 생각은 있지만 그 상대가 자신이 될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스테리온은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 내며 이내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상대가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만들면 된다.
“기회를 줘서 고마워, 록사나.”
한껏 애교를 부리는 벨루카처럼 그가 록사나의 작은 두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면서 슬쩍 물어보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그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응?”
“또 힌트를 달라고요? 안 돼요. 이번에는 당신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요.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님은 머리가 엄청 똑똑한 사람이니까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할게.”
아스테리온이 즉각 대답했다. 록사나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그는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 록사나는 이 상황이 몹시 즐거웠다.
그가 뭔가를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한 말 속에는 엄청난 해답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그건 바로, 그대 남편.
‘이번에는 당신 차례예요.’
록사나는 그가 자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원하는 적절한 답이 뭘까?’
아스테리온은 그녀가 내 준 숙제를 풀기 위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수수께끼 같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그를 위해 보물을 숨겨 두고 그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는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수하가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후작님, 이번 달에 올라온 보고서입니다.”
로웰 후작이 손을 내밀었다. 봉투 하나를 받아서 입구를 우악스럽게 뜯어내고는 서류를 꺼내 한 장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는 더러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어 못마땅하다는 신호였다. 수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로웰 후작이 보고서를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얼마 전부터 실험체들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데 자네는 그동안 뭐 들은 거 없어?”
“제가 전해 들은 내용은 후작님께서 아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늘 멍해 있던 실험체들의 눈빛이 가끔씩 생기를 띠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참 애매모호한 보고가 아닐 수 없었다. 이종족 시설에 있는 실험체들은 갖은 실험을 당하며 자연스럽게 희망을 잃어 갔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일이나 사소한 것들을 계기로 잃었던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생을 포기한 눈으로 돌아가고는 했기에 어찌 보면 별것 아닌 변화였다.
하지만 이런 작은 변화들을 놓치게 되면 일을 그르칠 수가 있기에 늘 그들을 철저히 감시하며 관리해 왔다.
수하가 후작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후작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에 낀 굵은 인장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에 수하는 입을 꾹 다물고 후작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부동자세로 자리를 지켰다.
“다른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저 그것들의 상태가 좀 묘한 것뿐입니다.”
후작은 얼마 전 당했던 기습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무르익어 가며 거의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다.
더 이상 뼈아픈 실책이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곳의 관리 인원을 배로 늘려.”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폐기시킬 것들이긴 했지만 여기서 더 틈을 만들어서는 곤란했다. 이제는 신경을 분산시킬 때가 아니라 한곳에 집중할 때였다.
열매를 거둘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저번에 말한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가고 있어?”
“명만 내려 주신다면 바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로웰 후작이 간만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 하지만 아직은 성급히 움직일 때가 아니야. 때가 되면 말해 줄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수하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로웰 후작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여자는 요즘 어떻게 지내?”
“여전히 남작저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캠든 상단주나 다른 측근들이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아픈 몸이 덜 회복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외출을 자제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해?”
“네? 그것이 워낙 감시가 심한지라 저택 외부에서만 관찰한 것입니다. 사실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수시로 기사단이 주변을 순찰하는지라…….”
수하의 말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로웰 후작이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대번에 역정을 내면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럼 아직도 내부에 우리 쪽 사람을 한 명도 심지 못했다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초기에 고용한 인원만으로 저택을 꾸려 가고 있고, 추가 고용인들을 거의 뽑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 명 뽑을 때도 따로 공고를 내지 않고 사적인 친분을 이용해서 채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철저합니다.”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수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전임자가 어떤 꼴을 당하고 제거되었는지 알기에 두려웠다.
“카일라니 공작의 입김이 작용한 게 틀림없다. 좋다고 이혼할 때는 언제고, 혹시라도 엉뚱한 승냥이가 채 갈까 봐 단단히 안달이 난 게야.”
철옹성보다 더 높다는 카일라니 공작 성에도 첩자들을 심었었다. 그런데 일개 남작저가 그보다 더하니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계속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 최소한 한 명이라도 안으로 들여보내야 제대로 된 정보를 빼 올 수 있으니까 말이야.”
“네, 후작님.”
수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웰 후작은 록사나를 외부로 끌어내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록사나를 밖으로 끌어내야만 납치를 하든 말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바깥출입을 하겠지.’
곧 있으면 황궁에서 여름 무도회가 열린다.
‘정 안 되면 그때 실행에 옮기는 걸로 계획을 변경해야겠군.’
카일라니 공작이 가장 큰 변수였지만 그의 시선을 돌리면 둘을 쉽게 떼어 낼 수 있었다.
* * *
“바이올렛, 조심히 가거라. 그곳에서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있어야 한다. 이 할아비 염려는 하지 말고. 내 자주자주 놀러 가마.”
“네, 할아버지.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식사 거르지 마시고요.”
“오냐, 오냐. 예쁜 내 새끼.”
휴고가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손녀를 붙들고 눈물 바람을 했다. 바이올렛은 그런 자신의 할아버지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체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록사나가 속으로 연신 혀를 찼다.
휴고는 젊은 사내의 외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절대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조손 간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어린 여동생이 나이 차 많이 나는 오빠를 달래는 모습으로 보이겠지.’
그동안 록사나가 보아 온 휴고는 나이를 안 먹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외모만 크게 변하지 않았을 뿐 그도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아마도 뒤늦게나마 존재를 알게 되고 찾은 바이올렛 덕분이겠지. 그나저나 저 눈물 바람은 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야?’
유난이라고 생각하며 록사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에 자리해 있는 다른 이들도 얼굴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록사나가 나섰다.
“휴고, 인사는 충분히 나누신 것 같아요. 이제 그만 바이올렛을 보내 주세요. 안 그러면 아무리 게이트를 이용한다고 해도 해가 떨어진 다음에나 캠든 성에 도착하겠어요.”
“저 때문에 늦어졌네요. 죄송해요.”
바이올렛이 예의 바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휴고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뒤로 한발 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