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사전에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내일 오전에 바이올렛을 캠든 영지로 미리 내려보내는 것은 어떨까 해요.”
“내일 오전 말입니까?”
휴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부터 손녀의 안전을 위해 캠든으로 내려보내려고 록사나와 사전에 약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채 하루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손녀를 떠나보내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며칠의 말미는 주어질 줄 알았다.
“일을 진행하게 되면서 저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씀드리게 될 줄 몰랐어요.”
록사나가 미안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제안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이종족들을 탈출시킨 이후에는 로웰 후작 측과 여러모로 많이 시끄러워질 수 있어요. 만약 이런 상황에서 바이올렛이 수도에 남아 있게 된다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서두르게 되었어요.”
“그럴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시끄러운 때일수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안전하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휴고의 얼굴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아쉬움 한 자락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록사나의 제안은 일견 타당했다. 쿼터기는 하지만 바이올렛의 몸에도 이종족의 피가 흘렀다. 까딱하다가는 잘못 걸려 안 좋은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록사나가 낙심하는 휴고에게 위로를 건넸다.
“게이트가 있으니까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만나실 수 있으세요.”
순식간에 휴고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의 말처럼 게이트를 이용하면 몇 분도 안 걸려 순식간에 캠든 성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제가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희 문라이트 상단에도 귀한 게이트를 설치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게다가 록사나는 지금 현재 캠든 성과 연결한 것 말고도 추후 문라이트가 원하는 곳 두 군데에 추가로 게이트를 더 설치해 준다고 약속까지 해 주었다.
그야말로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별말씀을요. 모쪼록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요.”
문라이트는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던 시절부터 오랫동안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그랬기에 아무리 게이트 하나 설치하는 데 억만금이 든다고 하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록사나 님, 너무 겸손하신데요. 아벨리오 남작저까지 올 필요도 없이 문라이트 상단에서 캠든까지 직접 오갈 수 있는 게이트라니!”
핀이 여러 마디 거들자, 휴고가 그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하지만 핀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동 비용도 한 푼 안 들고, 시간은 엄청 빠르게 단축되고! 아무리 어마어마한 비용을 청구하셔도 상단주님께서는 기꺼이 그 금액을 다 지불하실걸요.”
정말 록사나가 원한다면 지불할 의향이 만만했지만 손녀가 생긴 뒤로는 굳이 쓰지 않아도 돈에 대해서는 구두쇠처럼 구는 휴고였다.
휴고의 속셈을 눈치챈 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록사나에게 고자질을 했다.
“요즘 저희 상단주님은 동전 하나 쓰는 것도 어찌나 꼬치꼬치 따지시는지 얄짤없다니까요.”
“우리 바이올렛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록사나가 기분 좋은 눈웃음을 지었다.
아스테리온이 주관한 이종족 구출 작전 회의가 마무리되고 다른 사항으로 넘어가자, 이내 세 사람도 그들과 다시 합류했다.
회의실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진지함과 엄중함, 더러는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그 가운데 다양한 상황을 가정한 향후 대책 회의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처럼 마지막까지 잘해 봅시다.”
아스테리온의 발화를 마지막으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서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수상한 움직임은 남작저 외부에서 포착할 수 없었다. 건물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본관 내부에 있는 게이트를 이용해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 * *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두 사람 앞에는 차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드디어 내일이네요.”
“기분이 어때?”
“두렵고 떨려요. 성공할 거라고 믿고 있지만 그거와는 별개로요.”
“나도 그래.”
아스테리온은 속이 탔다. 그가 찻잔을 들어서 목을 축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슴이 메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록사나와는 다르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불안감을 애써 달랬다.
록사나를 꽁꽁 감춰 두고 안전한 곳에만 머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그 자신이 잘 알았다.
어느새 록사나는 커다란 날개를 달고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대로.
그런 그녀를 어떻게 자신이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녀는 스스로 이겨 내고자 노력하고 즐긴다. 웃는 날은 더 많아졌다.
문득 아버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네 어머니가 행복하면 나는 다 괜찮다.’
그는 뒤늦게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록사나가 행복하면 덩달아 그 자신까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짝사랑이라도 괜찮았다.
이제는 자신이 그녀를 차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녀가 행복한 것이 최우선이었다.
아스테리온이 고즈넉한 침묵을 깼다.
“록사나, 앞으로 그대의 꿈이나 목표는 뭐야?”
“제 목표요?”
록사나가 봄날의 싱그러운 나뭇잎 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그녀가 약간의 쉼표를 두고 입을 열었다.
“제 꿈은 영주가 되는 거예요.”
“이미 영주잖아?!”
흘러나온 것은 아스테리온이 기대하거나 예상했던 대답이 전혀 아니었다. 그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생각을 읽어 낸 록사나가 피식 웃었다.
“당신 말처럼 이미 저는 영주죠. 하지만 제가 과연 진정한 영주일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의 말은 알 듯 말 듯 했다. 곧바로 아스테리온의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록사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때요? 본인이 진정한 영주라고 생각해요?”
“응.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게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레드포드 령의 진정한 영주라고 생각해.”
“그 자신감의 근거는 뭐예요?”
“영지 내 정책을 바꾸거나 실행할 때는 그것이 우리 영지와 영지민들에게 유익한 일인지를 가장 최우선적으로 생각해. 실제로도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영지민들도 나를 나름 괜찮은 영주로 생각하는 것 같고.”
아스테리온이 검지로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본인에 대한 평가가 참 야박하시네요. 레드포드 령의 영지민들은 영주인 카일라니 공작님을 엄청 존경해요.”
“그런가.”
칭찬이 쏟아지자, 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록사나가 직접 대놓고 해 주는 칭찬이라니. 꿈만 같고 꿀처럼 달았다.
록사나는 10년 동안 레드포드 령에서 살면서 그 옆에서 직접 그가 영지를 다스리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제대로 된 영주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물론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찻물과 함께 이 한 문장을 꿀꺽 삼켰다. 영주민조차 만만하게 보는 영주는 동네방네 호구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신 같은 영주는 드물어요. 다들 자기 잇속 챙기느라 바쁘죠.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해요?”
“영주니까. 영주는 영지민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살피고 돌보아야 할 집안의 가장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스테리온이 짓궂은 눈빛을 했다.
“그래서 그대도 나 같은 영주님이 되고 싶다는 거야?”
“거의 비슷해요.”
“그래? 그럼 다른 건 또 뭔데?”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어떤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그 자리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아스테리온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녀가 말하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
“당신을 책망하려고 꺼낸 말이 결코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굴 좀 펴요.”
록사나가 검지를 뻗어 주름진 그의 미간을 누르자, 아스테리온이 굳어 있던 표정을 애써 풀었다. 하지만 그의 죄스런 마음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가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이혼을 결정할 때 앞으로 공작 부인이 아니면 나는 대체 뭘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 한참 고민했었어요. 정 안 되면 가게 하나 차려서 장사나 하려고 했어요. 그때 마침 당신이 내게 작위를 찾아 돌려주었죠.”
록사나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아스테리온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할 일을 찾았고 결심했어요.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다고요. 허수아비가 아닌 진정한 영주 말이에요.”
그녀의 말을 다 들은 아스테리온은 번개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온몸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아스테리온의 파란 눈이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록사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충격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사이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아스테리온이 말을 더듬거렸다.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사, 사실이야?”
자신의 입으로 확인 사살을 받는 것 같아 아스테리온은 다시 충격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어진 록사나의 대답이 화살이 되어 그의 심장을 푹 찔렀다. 아주 깊숙하게.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네, 사실이에요. 제가 진정한 영주로 거듭나는 데 문제라도 있어요?”
“…….”
아스테리온은 무슨 말을 먼저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록사나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도 영주가 여자인 게 못마땅한 건가?’
만약 그가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면 번거롭게 처가의 남작 위를 되찾아서 자신에게 위자료 중 하나로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아스테리온이 속 좁은 귀족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그가 보여 주는 말과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다시 이어지는 록사나의 날카로운 반응에 아스테리온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캠든 영지 말아먹을까 봐 그래요?”
“아니야! 무슨 그런 말을 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을 앉혀도 그대만큼 해내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제야 그녀의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확 풀어졌다. 여전히 미심쩍은 감정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