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알렉의 사과를 록사나가 받아들였다. 그때였다. 렌시아의 몸에서 하얀 빛이 조금씩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이 저절로 확 커졌다.
다들 다시 입을 꾹 다문 채 렌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빛은 점점 강해졌다.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는 렌시아의 몸에 얇은 막 같은 것이 생성되었다.
막의 색깔은 흰색과 흙색, 짙은 회색을 오가며 수시로 변화했다. 렌시아의 몸에 흡수된 약들을 해독하는 있는 과정으로 보였다.
렌시아가 또다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닐까 염려되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냥 잠든 사람처럼 표정이 몹시 평온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몸을 감쌌던 막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렌시아의 몸이 온전히 드러났다. 제 나이 또래보다 한참 작지만 어린아이의 몸이었다. 틀림없었다.
“아!”
록사나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사히 성공했다는 감동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이불 밖으로 드러난 렌시아의 얼굴과 팔, 손을 차례대로 연신 살폈다.
“처음 봤을 때는 엄청 마르고 앙상했었는데 지금은 …….”
마커스 경이 젖은 눈가를 스윽 훔쳤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남작저에 온 이후부터 잘 먹어서인지 렌시아는 제법 몸에 살이 붙어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다른 이들도 서로 손을 맞잡거나 활짝 웃으며 기쁨을 한껏 만끽했다.
렌시아는 며칠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는지 혹시라도 탈이 날까 싶은 어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고 싶은 음식을 양껏 먹었다.
렌시아의 협조와 희생으로 흙색 약의 해독제 효과를 확인한 록사나와 알렉은 다시 합심하여 많은 약의 해독제를 만들어 냈다.
그중 일부는 상비하고, 나머지는 기사들에게 휴대할 수 있도록 일정 분량씩 배급했다.
렌시아와 같은 상황에 놓인 자를 구하고 며칠 뒤 진행될 구출 작전 시에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조치였다.
* * *
“록사나, 오랜만이에요.”
“테오도르 황자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테오도르가 울먹이며 록사나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그 반동으로 인해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재빠르게 중심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와, 저 모르게 언제 이렇게 크셨어요?”
“제 나이 때 이 정도 크는 건 당연한걸요.”
그녀와 눈높이가 같아진 소년을 보며 진심 어린 감탄을 쏟아 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크면 발뒤꿈치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록사나가 그의 결 좋은 은발을 쓰다듬어 주자, 눈물이 쏙 들어간 테오도르가 헤벌쭉 웃었다.
“울다가 웃으시면 엉덩이에 털 나요.”
“건강한 록사나를 볼 수 있다면 그래도 좋아요.”
록사나가 풋 웃었다.
“진심이에요!”
“네, 감사해요.”
테오도르는 그녀가 깨어난 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으니 감정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고마워요. 제 통나무집에 게이트를 설치해 줘서요.”
“천만에요.”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근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황실에서 지내시기에는 어떠세요?”
“좋아요. 리키 경이 제 호위 기사가 된 뒤부터는 절 대놓고 괴롭히지 못해요. 검술도 당당히 배울 수 있고요.”
“정말 잘되었어요. 다행이기도 하고요. 리키 경이 황자님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그녀가 쓰러졌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테오도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데요, 록사나.”
“네, 황자님. 말씀하세요.”
“황궁 여름 무도회에 참석할 예정이에요?”
“아마도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왜 물어보세요? 만약 뭔가 마음에 걸리거나 고민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테오도르의 어두운 얼굴을 본 록사나가 멍석을 깔아 주었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요. 가능하면 황태자 전하하고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록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오도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곧바로 반응을 보이자 용기를 얻은 테오도르가 어제 직접 목격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제 황궁에서 회의가 있었어요. 회의가 끝나고 로웰 후작과 황태자 전하가 짧게 대화를 나누는 걸 봤는데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들릴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어요.”
테오도르가 숨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후작이 떠나고 황태자 전하가 자신의 궁으로 향하면서 중얼거리는 말을 우연히 들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중요한 내용임을 직감한 록사나가 물었다.
“앞말은 잘 듣지 못했는데… 정령사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라고 했어요.”
“정말 황태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록사나가 화들짝 놀랐다. 테오도르의 말을 믿지 못해서 되물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정령사의 존재 여부를 놓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잡아야 한다고 말하다니! 분명 정령사가 누구인지 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만큼이나 테오도르의 눈도 흔들렸다.
“네, 저도 듣고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혹시 황태자 전하가 록사나가 진짜 정령사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제 생각도 그래요.”
설령 황태자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졌다. 록사나는 염려 가득한 테오도르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진심 어린 미소를 환하게 지었다.
“제게 정말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아니에요. 난 록사나가 앞으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황태자 전하는 그다지 좋은 분이 아니시니까 혹시 몰라서 말했어요.”
테오도르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이후 두 사람은 무거운 생각들은 잠시 내려놓으며 다시 유쾌한 분위기를 이어 갔다.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떠날 시간이 되자 테오도르의 자수정 빛깔의 눈에서는 미련과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록사나는 그런 그를 겨우 달래서 보냈다. 어느 정도 바쁜 일들이 마무리되면 캠든 영지로 초대하겠다면서 말이다.
전에는 테오도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거의 불가능했었는데, 게이트가 설치되면서 당일치기로나마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 * *
늦은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벨리오 남작저의 대회의실에는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을 주축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록사나 측 사람들과 카일라니 기사단원들, 에이글 용병과 문라이트 상단 고위직들이었다.
“에이글, 내일 밤 그들을 캠든 성으로 이동시키는 데 차질 없이 준비해 주세요. 별문제 없겠죠?”
“별문제 없습니다만…….”
에이글이 말을 흐리자, 록사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그녀가 필요로 했던 모든 게이트 설치가 완료되었다. 그러면서 로웰 후작저에서 구출해 낸 이들을 내일 밤 안가에 설치한 게이트를 통해 그들을 캠든 성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캠든 성으로 넘어간 후에는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고 이종족들을 위한 전용 거주지로 다시 옮겨 갈 예정이었다.
거주지명은 번영과 창조를 뜻하는 크레나타로 정해졌으며, 위치는 전에 알렉산드리아 산맥을 탐사하며 점찍어 둔 곳이었다.
이를 위한 지금까지의 진행에 있어서 별다른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지자, 에이글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무슨 다른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아르얀과 49호가 계속 남겠다고 버텨서요.”
“두 사람이요?”
록사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맞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아르얀은 그냥 수도에 꼭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합니다. 49호 그 친구는 아르얀이 남아 있겠다고 하니까 그를 지켜야 한다고 덩달아 안 움직이겠다고 한 거고요.”
“그럼 두 사람은 제외하고 진행하도록 하세요.”
“네?”
잠시 난감해하던 에이글이 록사나의 빠른 승낙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록사나가 에이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저는 아르얀이 왜 남겠다고 하는 건지 그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가요. 두 사람의 거처는 당장 내일이라도 남작저 별채로 옮겨 주세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 둘만 빼고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에이글이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고민거리가 단숨에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돌린 록사나가 이번에는 캠든과 카일라니 기사단 쪽을 바라보았다.
앞선 것보다 사안이 무겁고 중요하다 보니 그녀의 표정이 전보다 한층 굳어 있었다.
“내일 우리는 그곳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숨이 붙어만 있다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구출해 내야 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부디 각자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마커스 경이 대표로 나섰고, 이종족 시설에 잠입해 임무를 수행할 기사들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며 각오를 다졌다.
최대 전력인 아스테리온과 록사나도 내일 그 일에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기에 많은 인원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작전을 면밀하게 점검하도록 하지.”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며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작전의 효율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인원 배치는 크게 6단계로 나뉘어 진행될 것이다.
침투조는 시설에서의 전투를. 탈출조는 이종족 구출을, 게이트 이동조는 말 그대로 동굴―이종족 시설 게이트 간 구출자들의 이동을 책임진다.
인계조는 다이아몬드 동굴 게이트로 넘어오는 그들을 인계받아 개개인의 상태를 확인하여 위중 상태에 따른 분류 작업을 진행한다.
그 후에 의료 팀에게 이들을 넘길 것이다. 의료 팀은 캠든 성으로 이동 전과 도착까지 이종족들의 치료와 상태를 책임진다.
마지막으로 호위조는 구출자들과 의료 팀을 캠든 성까지 무사히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스테리온을 주축으로 한동안 이종족 구출 작전에 대한 최종 시뮬레이션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록사나는 문라이트 상단주인 휴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고는 엘프였기에 누구보다 이종족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현재로서는 제가 도와 드릴 일이 별로 없군요.”
휴고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기에 딱히 손을 보탤 일이 없었다.
핀이 휴고의 말을 거들었다.
“록사나 님, 추후 저희 쪽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망설이지 마시고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럴게요.”
록사나가 얼음이 다 녹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