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98)화 (198/214)

198화 

덜 익은 사과 같던 연녹색 열매는 족족 짧게 빛을 내뿜다가 투명하게 변했다. 세 사람은 그 모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맺힌 열매가 많지 않아 그녀의 일은 금방 끝났다.

“록사나 님, 그럼 이 정령님들은 언제 깨어나십니까?”

에이글이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잠들어 있는 아기 정령들이 놀랄까 봐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다만 인간들처럼 일정한 기간이 정해진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가진 힘이나 특성에 따라 다들 제각각이라고 하더라고요. 정령 왕도 더러 탄생목에서 태어난다고도 해요.”

“그럼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군요.”

알렉이 투명한 열매 하나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안에 든 아기 정령이 몸을 살짝 꿈틀거리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두 사람에 비해 내내 조용히 있던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었다.

“탄생목이 정령계가 아닌 여기에 계속 있어도 괜찮을까? 정령이나 탄생목이 더 자라려면 인간계보다는 정령계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여기 결계 덕분에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정령계로 옮기는 게 맞긴 할 거예요. 정령계가 원상 복귀 된 다음에요.”

록사나가 탄생목 주변의 결계를 살피며 말했다.

탄생목이 이곳에 옮겨졌다는 것 자체가 정령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상기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 짐작인데 정령계를 원상 복귀하는 방법은 어딘가에 있을 사라진 정령들을 찾는 거 아닐까 싶어요.”

“틀림없이 로웰 후작과 관련이 있겠군.”

아스테리온이 벨루카를 얻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 록사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죠. 우선 정령의 힘과 관련된 자료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요.”

지혜의 방에 온 원래 목적을 상기하며 그녀가 탄생목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애써 뒤로 물렸다.

이후 네 사람은 탄생목 결계를 벗어났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료 찾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자료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바로 아벨리오 가문과 관련된 자료였다.

* * *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클라우드 님.”

“오랜만이군, 진저.”

로웰 후작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하자, 클라우드가 쇳소리를 내며 화답했다. 그가 로웰 후작의 꿈틀거리는 눈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로웰 후작은 진저라는 자신의 이름을 몹시도 싫어했다. 클라우드가 로웰 후작이 못마땅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부르곤 했기 때문이다.

로웰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클라우드는 단단한 바위 속에 거의 모든 온몸이 파묻힌 채였다. 손의 일부와 툭툭 핏줄이 과도하게 불거진 얼굴만이 드러나 있었다.

불빛에 비춰진 오른쪽 눈은 보랏빛이었고, 왼쪽 눈은 평범한 갈색으로 오드 아이였다.

로웰 후작은 기괴한 그 모습이 익숙한 듯이 이에 대해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뵈었지요? 죄송합니다. 적적해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 여러 가지로 일이 바빠서 찾아뵐 틈이 없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얼굴 한번 안 비쳤는지 궁금하군.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말이야.”

클라우드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있는 곳은 로웰 후작의 집무실에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말입니다.”

로웰 후작이 고개를 한껏 조아리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클라우드는 더 이상 어떤 재촉도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로웰 후작은 날카롭게 저며 오는 감각에 숨이 턱 막혀 왔다. 그의 주인은 대체적으로 인자로운 편이었지만 때때로 지금과 같이 그를 압박하곤 했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만이 빠르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로웰 후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정신을 가다듬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검은 약은 완성되었습니다. 흙색 약 역시 거의 완성 단계입니다. 실험도 막바지에 이른 상태인데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

클라우드의 한쪽 눈썹이 삐딱해졌다.

“얼마 전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최근 벌어졌던 저택 내 이종족 탈출 사건을 시작으로 며칠 전 있었던 실험체의 증발까지 그가 모두 보고를 마쳤을 때, 괴성이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라고?!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이, 그걸 말이라고 해!”

클라우드의 손에서 뻗어 나간 검은 줄기가 로웰 후작의 몸을 덮쳤다. 순식간에 로웰 후작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클라우드는 씩씩거리며 지렁이처럼 바르작거리는 몸을 노려보았다. 쉽게 분노가 멈추지 않았다.

고지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요즘 들어 벌어지는 사건들이 그의 심기를 자꾸 건드렸고, 불안을 키워 갔다.

한참 후, 로웰 후작이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클라우드 님.”

“그래, 한참 부족해. 진저 네게 몹시 실망했다. 내 너를 믿고 있었는데 말이야.”

끝날 줄 모르는 그의 질책에 로웰 후작의 고개는 더욱 수그러졌다. 평소의 당당하고 꼿꼿하던 그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클라우드는 어릴 적 죽어 가던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고, 사생아에 불과했던 그를 후작으로 만들어 준 제 평생의 은인이었다.

그런 클라우드를 실망스럽게 만든 자신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겨우 화를 누그러뜨린 클라우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에서 풀려날 날이 코앞이다. 아직은 우리의 존재를 다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 대체 요즘 일을 왜 그르치는 거야.”

“송구합니다.”

“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니, 대체 뭐가 문제야? 짐작 가는 것이 전혀 없어?”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합니다.”

“그놈이 누구야?”

“카일라니 공작입니다. 그리고… 그의 전처가 수상합니다.”

“전처라면 아벨리오 남작?”

카일라니 공작이 작년에 이혼했고, 그의 전처가 아벨리오 남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클라우드가 되물었다.

“네. 원래부터 저와 카일라니 공작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의 전처가 수도에 올라온 시기부터 저희 쪽에 안 좋은 일들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가 들은 소문들이 자꾸 거슬립니다. 스치듯 몇 번 마주쳤을 때도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어떤 소문?”

로웰 후작이 캠든 영지 중 한 곳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목격되었다는 기이한 현상과 수도 4구역 출신의 범죄자가 감옥에서 떠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것은 뒷조사를 벌이다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었다.

“사람의 말을 듣는 늑대가 나타나서 공격을 했다고?”

“네. 늑대도 범상치 않았지만 그 늑대를 부리는 여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힘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클라우드의 두 눈이 확 커지더니 즐거운 기색을 드러내며 번들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 혹시 정령사? 그럼 그 늑대는 정령일 수도 있겠군.”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정령사라니! 이거 아주 재미있게 되었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사람처럼 클라우드가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적셨다.

대륙에서 사라진 정령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 그를 몹시 흥분시켰다. 정령사가 사라지게 된 것은 그의 공이 지대했지만 그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의 분노에 로웰 후작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우드 님이 화를 내실 때는 역시 버겁군.’

사실 이상한 힘을 사용한 여자가 확실히 록사나인지는 불분명했다. 다만 그녀가 4구역 사업을 한창 진행 중이었고, 저택 내 이종족 실험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한 것은 정령사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아스테리온이 소드 마스터이기는 하지만 소리 소문 없이 그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분명 그를 도운 자가 있을 것이고, 그게 정령사라고 로웰 후작은 확신했다.

클라우드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로웰 후작의 상념을 깨웠다.

“그 여자를 어떻게든 내 앞에 데려와. 최대한 빨리!”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웰 후작이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고는 입구에 있는 게이트를 이용해 동굴을 떠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라우드의 시선이 자신의 맞은편 쪽으로 향했다.

연하늘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한 남자가 그처럼 바위 속에 몸이 구속되어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지만 눈동자 또한 머리카락 색과 같다는 걸 클라우드는 잘 알았다.

“샤일리, 네 친구를 만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은데 기분이 어때?”

클라우드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곧 있으면 나 여기에서 풀려날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몹시 즐거웠다. 몸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을 거다.

이곳에 갇힌 지 500년이 넘어가는 어느 순간부터는 날짜 세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8~900년쯤 되었겠지. 그럼 내 나이가 1,000살이 좀 넘었나?’

그만큼 기나긴 시간을 이 지긋지긋한 동굴에만 갇혀 지냈다.

자신을 돌봐 주는 수족들이 몇 있었지만 지루함에 미쳐 가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쯤 어린 로웰 후작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의 계획이 보다 더 빠르게 진척되었다.

12년 전에는 샤일리라는 정령 말동무도 생겼다. 비록 대답이나 대꾸를 잘해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샤일리는 그에게 많은 힘을 빼앗기며 지금은 눈을 뜨지 못했다.

클라우드가 샤일리의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이 동굴 벽에 한가득 박혀 있었다. 그것은 켜 놓은 등불의 빛을 받아 스산스럽게 반짝거렸다.

“내 너희들의 공을 기억하마.”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클라우드가 자신의 먼 과거를 회상했다.

* * *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지만 머리를 쓰는 재주만큼은 비상했다.

야망도 컸기에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욕심이 많은 만큼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가 바라는 세계인 위로 올라가는 건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어느 세력가의 가신 비슷한 것이 되는 것이 다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악착같이 자신을 고용한 이의 명을 따르며 수행했다.

하늘이 그의 정성에 응답한 것일까.

어느 날부터 그에 주변에는 이종족이나 정령사, 마법사 등 한 능력 하는 실력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들과 인연을 맺으며 적들을 물리쳤다.

나날이 그의 위상은 올라갔고, 상관의 두터운 신임은 덤이었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그가 비상한 머리 회전만으로 이룩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다. 정령사가 될 소질도, 마법사가 될 만한 마력도 없는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