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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97)화 (197/214)

197화 

아스테리온이 두 눈을 살포시 내리감았다. 그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금 전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렸다.

지혜의 방에 존재하는 이 미지의 공간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온몸을 동시에 관통하던 희열과 전율을.

지금도 그의 심장은 속절없이 파르르 떨렸다.

아스테리온이 금빛 속눈썹을 들어 올려 록사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처음부터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다는 듯이.

“나도 여기까지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야.”

마치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동안 들어올 수 없었다는 뉘앙스였다.

“네?!”

“처음이시라니요?”

“주인이 자기 집에서 못 들어가는 곳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답니까?! 이제 보니 공작님은 농담도 참 잘하십니다.”

록사나와 알렉은 순간 당황하며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에이글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타박했다.

“농담 아니야. 어쩌면 그대와 함께라면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아스테리온이 진지한 얼굴로 록사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설마 했었는데, 자신의 가설이 맞아떨어졌다. 기분이 묘하면서도 좋았다.

록사나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아마 내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대도 충분히 납득하게 될 거야.”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세 사람의 눈빛이 대번에 흥미를 띠었다. 그들의 열렬한 눈빛을 받으며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었다.

“카일라니 공작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동화처럼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나도 어릴 때 들었던 거야.”

그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록사나를 비롯한 세 사람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북부에 카일라니 공작 성이 자리를 잡기도 전인 아주 오랜 옛날, 지금은 레드포드라고 불리는 그곳에 한 소년이 살았다.

평소에 몸이 약했던 그 소년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에게 비밀 친구가 한 명 생겼다.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소년을 가엽게 여겼던 정령이 소년에게 처음 말을 걸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정령은 거의 매일 소년의 집 창가에 걸터앉아 자신이 보고 들은 세상의 이야기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이 평소 꿈이었던 소년은 황홀한 눈빛으로 정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소년의 꿈을 들은 정령이 자신과 함께 세상을 여행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소년은 보호자 없이 여행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직 채 열 살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아픈 몸 탓에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령과 소년은 서로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몹시 아쉬워했다.

그날부터 정령은 소년이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기 시작했다. 인간인 의원이 소년의 병명을 모르니 자기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어린 소년은 성인이 될 날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크기였던 정령의 몸도 훌쩍 자랐다.

몸이 자란 만큼 힘도 세진 정령은 그제야 소년이 아픈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소년의 몸 안에서 두 개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소년이 아팠던 것이다.

그 사실을 소년에게 말해 주었고, 두 기운 중 하나인 정령의 기운을 자신이 거두어 가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소년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정령은 소년의 몸 안에 쌓여 있는 정령의 기운을 조금씩 자신의 몸에 흡수했고, 거짓말처럼 소년은 나날이 건강을 되찾아 갔다.

정령은 소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지 않고 아주 조금 남겨 두었다. 소년이 자신을 보고 느끼고 대화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힘을 안배한 것이다. 소년도 당연히 동의했다.

성인이 된 소년은 건강한 청년이 되었다. 이후 그는 정령과 함께 몇 년 동안 세상을 여행하며 어린 날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한 가정을 이루었고, 슬하에 자녀도 두었다. 전보다 자주 놀러 오지는 않았지만 정령은 여전히 그의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잔뜩 겁에 질린 정령이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정령은 가져온 나뭇가지를 그의 집 뒷마당 한쪽 땅에 꽂았다.

자신이 살던 정령계가 위험해져서 나뭇가지를 이곳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말이다.

정령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땅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자라나 나무가 될 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잘 지켜 달라고 그에게 부탁을 했다.

그는 이번에는 자신이 정령의 부탁을 들어줄 차례라고 생각하며 그러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정령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준 소중한 친구였다.

그가 정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무로 자라나게 할 수 있느냐고. 물과 거름을 자주 주고, 햇살을 잘 쐬게 하면 되느냐고.

정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지는 모르지만 이 나뭇가지에 잎을 틔울 만한 강력한 정령사가 나타나 나무로 자라나게 할 거라고. 그러면서 정령은 나뭇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그 주변에 결계를 쳤다.

이것이 그와 정령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도 전혀 자라나지 않는 나뭇가지를 지키기 위해 집터를 확장하고 울타리를 쳤다.

어느덧 머리가 하얗게 샌 그는 자신의 손자들에게 정령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인이 된 소년이 마지막에 눈을 감는 순간에는 나뭇가지와 그 터를 잘 지켜 달라는 유언을 후손들에게 남겼다고 해.”

아스테리온이 초대 카일라니 공작가의 시조 격인 먼 선조의 이야기를 끝맺었다.

록사나가 신기한 듯 따뜻한 눈빛으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정령이 남긴 게 이 나뭇가지라는 말이군요. 정령과 소년의 이야기는 동화처럼 후손들에게 계속 전해졌을 거고, 당신도 그 후손 중 하나고요.”

“맞아. 그래서 지혜의 방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그대가 말했을 때 이야기가 떠올랐어. 어쩌면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록사나가 박수를 짝 쳤다. 아스테리온을 비롯한 알렉과 에이글이 대번에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령사도 아닌데 벨루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잖아요. 당신 몸에 미약하게나마 정령의 기운이 전해져 내려와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일리가 있군.”

아스테리온의 대답에 다들 수긍했다.

“각하, 아까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고 하셨는데 그동안 각하뿐만 아니라 다른 선대분들께서도 이곳에 들어와 본 적이 없으십니까?”

알렉이 의문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아주 옛날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래.”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날수록 몸속에 흐르는 정령의 기운이 약해지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혜의 방 내부에 이곳이 자리하기까지는 출입이 가능했을 테니까요.”

알렉의 말에 에이글이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일정한 정령의 기운 이상을 지니고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 곳인가 봅니다. 게다가 저희가 오늘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록사나 님 덕분이고요.”

당사자를 제외하고 다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들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혹시 그 강력한 정령사가…….”

나뭇가지에 잎을 틔울 존재가 나타날 거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알렉이 말끝을 흐렸다.

그때 록사나가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나뭇가지로 다가갔다. 발밑에 딱딱한 대리석이 아닌 폭신한 흙을 느끼며 걷던 그녀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앙상하고 메마른 나뭇가지에 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힘이 나뭇가지에 가 닿았다. 그 순간 나뭇가지가 정령의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두 사람이 탄성을 내뱉었다.

“오오!”

아스테리온의 두 눈도 커다래졌다.

한참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이 나뭇가지는 록사나의 힘을 쭉쭉 빨아들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흙 속에서는 뿌리가 쭉쭉 뻗어 나가며 땅이 들썩였고, 나뭇가지가 잔가지를 치며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맙소사! 사실이었어.”

에이글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편 록사나는 그리운 감정을 느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야.’

조금씩 탈력감이 들기는 했지만 모순되게도 한낱 나뭇가지가 나무가 되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어느덧 나무는 그녀의 키보다 훌쩍 더 커져 가지 가득 잎을 틔웠다.

한꺼번에 많은 힘을 쏟아부은 록사나가 휘청거렸다. 그 순간 나무에게 전달되던 힘도 뚝 끊겼다. 아스테리온이 곧장 그녀의 몸을 받치며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아 지탱했다.

“나무님이 이제 성장을 끝낸 것 같습니다.”

알렉이 경이로운 눈으로 푸르른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때 뭔가를 발견한 에이글이 손을 들어 나무 한쪽을 가리켰다.

“저걸 좀 보십시오!”

나뭇가지 사이에 몇 개의 연녹색 열매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그걸 발견한 록사나가 몸을 비틀며 아스테리온의 품에서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곳의 동그란 열매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신기하게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해당 나뭇가지가 그녀에게로 자연스럽게 휘어졌다. 마치 주인에게 고개를 들이미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그녀의 손끝이 열매를 톡 건드렸다. 화악 작은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열매가 투명하게 변했습니다.”

에이글이 열매에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들여다보고는 두 눈을 크게 홉떴다.

“여기 좀 보십시오, 안에 뭔가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새로운 존재를 눈치챈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령.”

세 사람이 또 한 번 놀랐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가장 덤덤했고, 에이글은 입을 쩍 벌렸다. 알렉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정령이라고요?”

“허허허, 이것 참 놀람의 연속이로군요. 대체 이 나무의 정체는 뭘까요?”

“내 짐작이 맞다면 이건 분명 정령계에 존재한다는 탄생목이에요.”

“탄생목?! 정령이 태어나는 나무라는 말이야?”

“맞아요. 당신이 어릴 적에 동화를 들었듯이 저도 부모님께 많은 동화를 들으며 자랐어요. 특히 정령과 관련된 동화를요.”

록사나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정령계에서는 정령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태어난다고 해요. 주로 꽃이나 나무에서 태어나는데 그중에서도 탄생목에 열매처럼 맺혀 태어나는 정령들은 가장 순수하고 강한 기운을 가진 최상위 정령들이라고 해요.”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나무에 맺힌 열매에 일일이 자신의 기운을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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