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록사나 역시 주위를 살폈다. 눈에 익은 지형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게이트가 설치된 곳은 공작 성 내에 자리한 깊은 후원이었다. 그녀가 자주 지나다녔었던 길목이었기에 익숙했다.
‘정확히는 뒷산과 후원 중간쯤이네. 게이트를 관리하고 이용하기에 아주 적절한 장소야.’
넓은 터 주변으로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서 게이트의 위치를 적절히 가려 주었다.
알렉이 계속 넋을 놓고 있자, 에이글이 커다란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정신 좀 차리시오, 의원 양반.”
알렉은 엄연히 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하지만 작위보다는 직업인 의원으로 많이 불렸고, 에이글 역시 그 호칭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 공작 성이다! 내가 다시 돌아왔어.”
몇 박자 늦게 알렉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감격에 겨운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다.
“아니,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양반이 목청도 참 좋으시오.”
에이글이 한 손으로 자신의 귀를 후볐다.
록사나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스테리온은 가볍게 혀를 찼다.
“누가 보면 몇 년 동안 집 떠나 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줄 알겠어.”
“그것이… 너무 감격에 겨워 저도 모르게 그만 주책을 부렸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알렉이 두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민망함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때 한쪽에 대기한 채 인사드릴 틈을 노리고 있던 부집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아스테리온과 그 일행을 맞이했다.
“공작 각하, 어서 오십시오. 참으로 오랜만에 귀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손님 여러분, 카일라니 공작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기사들과 시종들이 그들의 주군에게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
“그래.”
게이트를 넘어온 자신들을 보고 놀랐음에도 표정을 감추고 있는 부집사와 시종들을 보며 아스테리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다른 말을 했다.
“손님들은 내가 직접 안내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아스테리온이 제 일행을 이끌고는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부집사의 두 눈이 커졌다.
‘각하께서 직접 안내를 하시겠다니……. 뭐가 저렇게 급하시지?!’
전 공작 부인인 록사나가 같이 동행을 했다는 점도 그의 의문을 증폭시켰다.
‘따르지 말라는 말씀은 없으셨으니까…….’
부집사는 아스테리온이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뒤에 이어질 명이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옆에 있던 시종에게 재빠르게 눈짓을 했다.
지명을 받은 시종 한 명이 아스테리온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부집사가 게이트를 지키는 기사들 중 가장 높은 책임자에게 고개를 돌려 눈인사를 건넸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네, 부집사님도요.”
* * *
아스테리온이 일행을 모두 이끌고 간 곳은 본관의 은밀한 곳에 위치한 지혜의 방이었다.
그가 문의 문양 위에 한 손을 올리자, 거대한 문이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양쪽으로 열렸다.
“열쇠도 없이 열 수도 있었다니!”
깜짝 놀란 알렉이 입을 쩍 벌렸다. 그가 이곳을 드나들 때면 늘 칼리드가 동행해서 열쇠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당연히 열쇠가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한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주가 되어야만 지혜의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었나 보군.’
풍문으로 들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알렉이 오랜만에 지혜의 방에 발을 들였다. 그의 뒤에서는 문이 스르륵 저절로 닫혔다.
한편 안으로 들어선 록사나는 고개를 한껏 뒤로 꺾어서 들어 올렸다.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내가 지혜의 방에 다 들어와 보다니.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지만, 외부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들어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가히 지혜의 보고라 할 만하네.’
들어온 문을 제외하고, 지혜의 방은 사방이 책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몇 개의 층을 터서 그 높이가 거의 천장에 닿아 있었다.
“우와, 내 평생 이렇게 많은 책은 처음 봅니다! 제가 대록 이곳저곳을 참 많이 돌아다녀 봤지만 어디를 가도 이런 곳은 못 봤습니다. 제국의 황궁 도서관보다 더 웅장하군요.”
에이글의 말처럼 그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평생을 가도 여기 있는 책들을 다 보기는 힘들 겁니다.”
알렉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가신으로서 그렇게 자랑스럽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자, 이쪽으로 가지. 내 생각으로는 고서적 쪽에서 정령이나 그 힘과 관련된 책들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커.”
무감한 얼굴로 말한 아스테리온이 곧장 앞장서서 뚜벅뚜벅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 사람도 그를 뒤쫓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이상 들떠 있거나 여유를 가지기에는 한시가 급했고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수도 복귀를 서둘러야 했다. 요 근래 들어 렌시아의 부작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불어 넣어 주어서 두통이나 고통은 줄어들었는데, 피부의 노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새로운 문이 나왔고, 그 문을 지나 다시 안쪽으로 향했다.
‘대체 얼마나 큰 거야? 본관에 이 정도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돼!’
록사나는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본관이 황궁에 버금갈 정도로 그 규모가 거대하다지만, 그 안에 위치한 이곳의 크기를 봤을 때 도저히 불가능한 면적이었다.
‘지금 지나온 곳들만 따져도 본관의 방 개수가 절반 정도는 줄어야 정상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불가능해! 게다가 느낌이 이상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군.’
록사나의 미간과 눈썹이 여러 번 찌푸려졌다 펴졌다 하는 모습을 발견한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씩 웃었다.
“본관 규모에 비해 지혜의 방이 꽤 크긴 하지.”
세 사람의 시선이 단번에 아스테리온에게로 쏠렸다. 에이글과 알렉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라면 록사나는 에메랄드빛 눈을 반짝였다.
“맞아요! 비정상적으로 크죠. 거기다가…….”
“또 뭐가 이상한가?”
아스테리온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들었다. 알렉과 에이글은 이번에는 록사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여기 여러 번 드나들어 봐서 아는데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습니다.”
알렉이 말하면서도 아스테리온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그가 자신의 말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록사나가 알렉의 말에 그러냐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이글을 쳐다보았다.
“에이글, 여기에서 뭐 느껴지는 것 없어요?”
“무척 넓고 좋군요. 아! 이렇게 책이 많은데 오래되고 퀴퀴한 냄새는 하나도 안 나는 것이 신기합니다. 공작 성의 서고는 최상급의 향수라도 뿌리는 모양입니다. 뭐랄까, 여긴 마친 숲속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량하고 기분 좋은 향이 제 코끝을 스칠 리가 없으니까요.”
감각이 예민한 에이글이 과장되게 코를 킁킁거리면서 주변의 공기를 들이켰다.
“그렇게 좋은 향기가 나요?”
“네. 록사나 님은 안 맡아지십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후각을 지니고 있는 록사나가 그를 따라 코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공기 순환이 잘되나 보다 하는 정도로만 느껴질 뿐, 이게 에이글이 말하는 그 특별한 향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느끼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지금 느끼는 것은 뭐지?”
아스테리온이 질문에 록사나가 긴가민가하며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자신도 딱 한 번 가 보았던 곳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공기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여기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아요.”
“다른 세상 같다고?!”
그녀의 대답에 아스테리온이 깜짝 놀랐다.
“네, 지금으로서는 그 말이 가장 적합한 것 같아요. 굳이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제가 쓰러져서 깨어나지 못했을 때, 제 정신은 오염된 정령계에 가 있었다고 했잖아요?”
록사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확하게 확신은 못 하겠지만… 이곳은 마치 정령계가 오염되지 않았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스테리온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가 잠시 숨을 멈췄다가 길게 내쉬었다.
“그대는 정말 천생 정령사군.”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을…….”
알렉이 아스테리온과 눈을 동그랗게 뜬 록사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그녀가 타고난 정령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 왔군.”
아스테리온이 몇 걸음 더 나아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에 따라 세 사람이 발길을 세우는 것과 발맞춰 그가 몸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아스테리온의 몸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확 밝아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록사나를 비롯한 이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책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공간 속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꿈처럼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엔 책 같은 건 하나도 없었고, 주변이 텅 비어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석재로 이루어진 바닥과는 다르게 동그란 형태를 띤 일정한 넓이의 흙바닥이 존재했다.
“지혜의 방에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이런 공간은 처음 봅니다.”
알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의학 서적을 뒤지기 위해 그는 지혜의 방 곳곳을 누비다시피 했었다. 그의 발자국이 안 새겨진 곳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궁금증을 잘 참지 못하는 에이글은 아예 손가락으로 꼭 집어 가리켰다.
“막대기는 왜 저기에 쓸데없이 꽂아 둔 겁니까?”
그가 지적하기 전부터 록사나와 알렉의 시선도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에이글의 말처럼 막대기 같은 얇은 나뭇가지 하나가 흙바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가지고 놀다가 아무 생각 없이 휙 던졌는데 바닥에 탁 꽂힌 모양새였다.
“내 선조가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고 하더군.”
“무슨 이유요? 여기서 나무를 기르기에는 좀……. 공작님의 그 선조님이라는 분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에이글은 남의 선조를 헐뜯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막혀 있는 천장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온실처럼 천장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면 나무를 키우려고 그랬나 보다, 라고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살아 있는 나무를 옮겨 와도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햇빛을 보지 못해 얼마 안 가 금세 시들시들 말라 죽을 것이 뻔했다.
록사나와 알렉도 입을 꾹 다물고는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에이글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세 사람은 아스테리온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의 선조가 욕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후손인 그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의 지적과 반응이 당연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