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95)화 (195/214)

195화 

“그게 학대나 가정불화를 겪어서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화목한 가정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왜?”

아이린이 그 이유를 말하며 록사나의 궁금증을 친절하게 하나씩 풀어 주었다.

“납치된 후 협박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도망치면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고요. 거기다가 자신이 이대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가 안 좋은 일들을 당할 거라고 하면서 어찌나 울고불고하던지.”

아이린이 잠시 말을 멈췄다. 목이 마를 그녀를 위해 록사나가 물이 담긴 컵을 건네자, 아이린이 그것을 달게 받아 마셨다.

시원하게 한 잔을 쭉 비운 그녀가 탁자 위에 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제발 가족들이 무사하게 도와 달라고 해서 오전에 마르셀 경이 기사 몇 명과 마차를 타고 부모가 살고 있다는 동네로 갔어요. 아마 앞으로 한두 시간 뒤에 돌아올 거예요.”

“잘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록사나가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 면담은 언제쯤 하실 예정이세요?”

“아이의 가족들이 도착하고 그들끼리 서로 시간을 같이 보낸 이후에 만나 보는 게 좋겠어.”

“네, 그럼 빠르면 저녁 식사 한 시간 전쯤으로 잡아 놓을게요.”

“그래. 참, 아직 벨루카에게서는 연락 없었지?”

캠든 영지에서 카일라니 공작 성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 3일 정도가 걸린다. 이제 벨루카가 그곳으로 떠난 지 채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록사나는 조바심이 나서 저도 모르게 묻지 않을 수가 없어서 꺼낸 질문이었다.

‘지혜의 방에서 하루라도 빨리 정령의 힘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녀가 잔뜩 가지고 있는 이세계의 지식들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세계는 정령의 힘이나 그 비슷한 것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록사나가 한숨을 푹 내쉬려고 하는데, 아이린이 씩 웃으면서 내내 꼭꼭 숨겨 두었던 사실을 고백해 왔다.

“웬걸요. 벌써 공작 성에 도착하셔서 게이트 설치까지 모두 완료하셨답니다!”

“정말?! 그게 사실이야?”

록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모두 사실이에요. 설마 제가 이런 일로 어디 거짓말을 하거나 장난을 칠 사람인가요.”

아이린이 잔뜩 흥분한 록사나를 소파에 다시 앉혔다. 록사나가 대번에 눈을 치켜떴다.

“그런 사람이 내내 꾹 입을 닫고 있다가 내가 물어보니까 그제야 진실을 고백하다니 참으로 믿음이 가네. 안 그래?”

“뵙자마자 바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애타게 기다리셨던 중요한 소식인데 말이에요.”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록사나 님.”

록사나의 지적에 아이린이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노련하게 변명 한 조각을 덧붙였다.

“그런데요, 이 소식을 저도 이 방에 들어오기 직전에 알았어요. 일부러 먼저 말씀 안 드린 건 마지막에 짜잔 하고 이벤트처럼 놀라게 해 드리려고 했단 말이에요. 어차피 앞서 했던 보고들보다 먼저 말씀드렸다면 정신이 그쪽에 팔리셔서 나머지 내용은 귀로 들으시는지 코로 들으시는지 모르셨을걸요?”

아이린의 밉지 않고 설득력 있는 변명과 애교에 뾰로통해져 있던 록사나의 기분이 금방 풀렸다.

“역시 내가 현명한 보좌관을 뒀어.”

록사나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그렇죠?! 자, 그럼 웬만한 보고는 끝났으니 바로 가 보실까…요?”

끝으로 갈수록 아이린의 말이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록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지금 당장은 어렵겠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팔 한쪽을 들어 올리고, 얼굴 한쪽을 쓱 쓸어내린 록사나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는 절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최소한의 세안도 하지 않은 상태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 그래. 이 상태로는 무리겠다.”

록사나가 힘없이 터벅터벅 침실로 들어가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 뒤의 단장과 준비는 거의 빛의 속도로 이루어졌다.

록사나가 완벽하게 옷까지 제대로 챙겨 입고, 수수하기는 하지만 화장까지 하고 나오자, 아이린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오늘 기록을 세우신 것 같아요.”

“훗, 이런 것쯤이야.”

길게 늘어뜨린 한쪽 머리를 손으로 쳐올리며 록사나가 별것 아니라는 듯 잘난 체를 했다.

풋. 한없이 귀여워 보이는 록사나의 행동 하나에 아이린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 그럼. 지금 가실까요?”

록사나의 눈 흘김을 받으며 아이린이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두 사람은 집무실 맞은편 임시 게이트 방으로 향했다.

무거운 짐을 한 꺼풀 벗어 낸 듯 록사나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워져 있었다.

* * *

- 록사나!

록사나가 게이트 방 안으로 들어서자, 주둥이에 하얀 크림을 잔뜩 묻힌 벨루카가 꼬리를 붕붕 흔들며 그녀를 반겼다.

“정말 잘했어, 벨루카.”

록사나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벨루카의 입가를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카일라니 공작 성에 게이트를 빠르게 설치하고 돌아온 것에 대한 소소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 헤헤, 응.

록사나의 치마폭에 고개를 들이밀고 쓰다듬까지 받는 벨루카를 보며 이미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에이글이 작은 오해를 했다.

‘마음씨도 참 넓으시군. 다 큰 정령이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 먹어도 칭찬을 해 주시다니.’

에이글은 동의를 구하듯 아스테리온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스테리온은 눈에 불을 켜고 벨루카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태울 것처럼.

질투에 눈먼 남자의 살기는 매서웠지만 그 살기를 고스란히 받아 내는 벨루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만큼 록사나를 향한 그들의 집념은 무섭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었다.

‘쯧쯧, 둘 다 중병이야.’

에이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벨루카, 테스트는 다 마쳤지?”

- 물론이야. 아무 이상 없어.

그때 조용히 한쪽에 서 있던 노신사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벨리오 남작님.”

“아, 칼리드.”

게이트와 벨루카에게 정신이 팔려 칼리드의 존재를 그제야 눈치챈 록사나가 깜짝 놀랐다가 이내 얼굴에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게이트 작동 및 연결 테스트를 위해 카일라니 공작 성에서 간택되어 최초로 게이트를 넘어온 인물이 칼리드라는 것을 곧장 깨달았다.

“거의 8개월만인가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누구 때문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칼리드가 그 ‘누구’인 아스테리온을 은근하면서도 원망 어린 시선으로 짧게 바라보다가 록사나에게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었다.

“네?”

의례적인 질문이었는데 뼈 있는 말에 록사나가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깊이 캐물을 새도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아스테리온이 은근슬쩍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바쁘지 않아?”

“아, 맞다.”

그의 말이 하나의 신호탄이 되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상기해 냈다.

“칼리드, 공작 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잠시나마 여기 남작저에서 편히 쉬세요. 공작저와 게이트를 연결하면 원하실 때 그곳으로 넘어가실 수 있게 조치할게요.”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쉬면서 남작저를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책이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십니다.”

칼리드는 그래서 참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늦게 서야 꽁지에 불이 붙은 강아지처럼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누구를 보니 무척이나 속이 다 시원하다는 말을 남몰래 삼켰다.

‘이 늙은이의 말을 그렇게 안 들어 처먹더니 꼴좋습니다, 각하.’

칼리드는 그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는 아스테리온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애써 무시로 일관했다. 때마침 록사나의 대답이 아스테리온의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잘 봤어요. 사람답게 잘 지내고 있어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정도의 별 뜻 없는 말이었다. 아스테리온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입 안이 소태를 문 듯 썼다.

있는 듯 없는 듯 카일라니 공작 성에서 지내며 웃음을 잃은 록사나의 모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

록사나가 벨루카를 돌아보았다.

“벨루카, 너도 좀 쉬었다가 계속해서 게이트 설치를 부탁해.”

- 나 다 쉬었어. 이번에는 어디에다 할까?

벨루카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곧추세웠다.

록사나가 옆에 있는 아이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린이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고, 록사나는 그걸 벨루카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그래? 그럼 우선 수도 공작저와 남작저를 연결하고, 그다음에는 카일라니 공작저와 공작 성, 공작 성과 캠든 성, 캠든 상단…….”

게이트를 설치할 곳의 명단이 줄줄이 이어졌다. 일이 늘었다고 불평하기는커녕 벨루카는 신이 나서 꼬리로 연신 풍차 돌리기를 했다.

그사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알렉이 공작 성으로 넘어가기 위해 부리나케 합류했다.

벨루카에게 필요한 모든 지시를 마친 록사나가 아스테리온과 함께 작동시킨 게이트 앞에 섰다.

정령석 위에는 ‘카일라니 공작 성’이라는 글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하나의 게이트가 여러 곳의 게이트와 연결되면서 목적지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록사나와 벨루카가 추가한 기능이었다.

“이렇게 공작 성으로 가는군요.”

그들의 뒤에 자리한 알렉이 비장하면서도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에이글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굴 게이트를 이용한 이후로 두 번째네.’

너무 오랜만에 게이트를 통과할 생각에 록사나 역시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작 성으로 연결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스치듯 이종족 실험 시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스테리온이 그런 록사나의 한 손을 슬그머니 잡아 왔다. 손을 타고 온기가 전해지자 살짝 주름이 져 있던 미간이 펴졌다. 순간 록사나는 민망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손을 내치지 않았다.

“잘 다녀오세요.”

아이린이 모두를 대표해 배웅 인사를 건넸다.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아스테리온과 함께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에이글이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고, 그의 옷자락을 저도 모르게 움켜쥔 알렉이 뒤따랐다.

네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빛 속으로 사라지자, 게이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 공작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 】

정령석이 발하는 밝은 빛을 통과할 때만 해도 눈이 멀 것만 같았는데 ‘어’ 하는 사이에 알렉의 두 발은 다른 땅을 딛고 서 있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일행이 모두 빠져나오자, 게이트의 빛이 수그러들며 작동을 멈추었다.

바뀐 풍경과 함께 수도보다 낮은 여름의 온도, 익숙한 공기가 공작 성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지만 알렉은 뭔가에 홀린 듯이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호오, 여기가 카일라니 공작 성이군요!”

에이글은 새로운 풍경에 감탄을 쏟아 내며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