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빅토리아 로웰의 힘은 정령의 힘과 비슷한 맥락에 해당하는 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당신보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 이제 조금은 이해가 돼. 나도 처음에는 정령의 기운을 아예 읽어 내지 못했었으니까.”
아스테리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한 정령의 힘은 그가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록사나의 옆에 자주 머물게 되면서 그는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게 정령의 힘을 운용해도 그 힘을 어느 정도 느끼고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환상을 다루는 능력치는 어느 정도인지 알아?”
“저도 자세히는 모르고 대략적으로 알아요.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힘을 다룰 수 있는 범위나 시간이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최근 들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아스테리온이 적당하게 우려낸 차를 록사나에게 직접 건네주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지라 그녀가 반갑게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대는 어떻게 빅토리아 로웰의 능력을 알게 된 거야?”
“아, 맞다! 어떻게 알게 된 거냐면요…….”
록사나가 지난 오월 말에 위즐리 공작가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그대가 가진 정령의 힘은 정말 특별해.”
“그 사실을 이제야 알다니, 카일라니 공작님은 보는 눈이 별로이신가 봐요.”
록사나가 한껏 으스댔다. 그녀의 장난기에 아스테리온이 진지하게 응했다.
“맞는 말 같아. 그런데 내 여자 알아보는 눈 하나만은 정말 확실해!”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를 닮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파란 눈에는 진득한 열기와 욕망, 소유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의 진심은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그녀의 시선을 한동안 옭아맸다.
“그, 그게……. 무슨 말을 하다 말았죠? 아, 맞다. 아무튼 위즐리 공작가 파티에서 알 게 된 거예요, 빅토리아 로웰이 가진 환상 능력이요.”
당황한 록사나가 일부러 화제를 은근슬쩍 돌리자, 아스테리온은 이를 너그럽게 눈감아 주었다.
짧은 순간이나마 그녀의 시선을 붙들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함을 느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까.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오래, 더 많이 그녀의 시선을 내게로 붙들어 놓을 거야! 예전처럼.’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의도에 맞춰 그가 대화를 이어 갔다.
“당신의 짐작이라는 건 빅토리아 로웰이 이번 일에 관여를 했다는 거겠네?”
“확실해요! 황궁에서 구출해 온 아이가 성장을 거치지 않은 것은 약을 복용하지 않도록 로웰 영애가 손을 쓰고, 거기에 더해서 아이에게 환상을 걸어 줬을 거예요.”
“일리가 있는 말이야.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놀랍네.”
빅토리아라면 황태자 궁을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도노반의 수족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도 확실히 수월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보자마자 바로 아이로 인식했어. 그런데 리키는 어른이 된 남자가 보인다고 했고. 이건 왜 그렇다고 생각해?”
충분히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지만, 그는 록사나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다.
“힘의 차이 때문인 거 같아요. 당신은 소드 마스터고, 리키 경은 소드 익스퍼드죠.”
잠시 차로 목을 축였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깨뜨릴 수도 있었죠. 그런데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리키 경 같은 실력의 기사라고 하더라도 로웰 영애의 환상을 꿰뚫어 볼 수는 없나 봐요. 볼 수 없으니 힘을 깨뜨리기도 불가능하고요. 당신 생각은요?”
“나도 그대와 같은 생각이야. 상급 정령사와 소드 마스터만이 꿰뚫어 볼 수 있는 환상 능력이라……. 적어도 로웰 영애의 실력이 중급 정령사나 소드 익스퍼드 중급 정도는 된다는 얘기로군.”
“동감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그동안은 로웰 영애의 능력을 대략적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어요.”
록사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로웰 영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었네요.”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가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아이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만약 그 능력이 여기서 더 계속 커지게 된다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어.”
그의 목소리는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건 로웰 영애가 자신의 힘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봐요.”
“적에게 협조하지 않기를 바라야겠군.”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의 연인인 아르얀이 우리 손안에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볼 때 로웰 영애는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해요. 남편인 황태자도요.”
록사나는 빅토리아가 자신의 신변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한정적으로만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네.”
아스테리온이 그다지 악하지는 않은 빅토리아의 성정을 잠시 떠올렸다.
‘그렇다고 선한 성격도 아니긴 하지만.’
어릴 적 옛 친우의 정을 아주 미약하나마 되살리며 아스테리온은 빅토리아가 부디 잘못된 길만은 선택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만약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으로 그녀를 제지해야만 하는 날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잔에 남은 마지막 찻물을 입에 대었다. 이내 둘은 빈 잔을 탁자 위에 각자 내려놓았다.
“황궁에서 데려온 아이는 자고 일어난 다음에 보러 가는 것이 어때?”
“그러지 않아도 너무 졸려서 그렇게 하려고요. 당신은 안 졸려요?”
록사나가 하품을 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졸려, 나도 눈 좀 붙여야겠어.”
기분 좋게 콩닥콩닥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제대로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테리온은 설레어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를 록사나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그녀는 분명 조금이라도 자야 한다며 그에게 다정하면서도 폭풍 같은 잔소리를 퍼부을 것이다.
종달새 같은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잔소리는 생각만으로도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자신을 마중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날을 꼴딱 새운 그녀가 여기에서 더 이상 무리를 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욕심이 나더라도 말이다.
“그럼 우리 이제 그만 일어나요.”
아스테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커다란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록사나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그녀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러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 앞에 서서 문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고용인들이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자, 아스테리온은 마지못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자신이 잘 손님방으로 터벅터벅 향했다.
* * *
록사나는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났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전담 시녀 앤이 씩씩하게 노크를 하고는 허락이 떨어지자, 총총 걸어 들어와서 물었다.
“록사나 님, 식사를 바로 준비할까요?”
“간단하게 샌드위치랑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 방으로 올려 주렴.”
“네, 바로 준비해서 가져오겠습니다.”
앤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잠시 더 멍한 상태로 앉아 있던 록사나가 비척거리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침실 문을 열고 나가자 방에 딸린 응접실이 바로 나왔다. 그녀는 소파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에고고. 나도 이제 나이를 먹나 보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달라졌다.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록사나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했다. 명상 호흡을 하듯이 정령의 기운을 혈관을 따라 운용하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 살 것 같다. 내가 정령사여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진즉에 뻗었어.”
록사나가 혼자 열심히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똑똑똑 노크를 해 왔다.
“들어와도 돼.”
“안녕히 주무셨어요, 록사나 님.”
그녀의 예상대로 아이린이었다. 카트를 밀고 오는 아이린을 보며 록사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앤의 일을 뺏었구나.’
그녀가 방에서 식사를 하는 날에는 아이린이 아침 보고를 겸하며 앤이 운반해 오는 식사 카트를 강탈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는 했다.
‘다행스럽게도 서로 일을 뺏고 뺏기는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지…….’
어느새 탁자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메리카노가 단정하게 세팅되었다.
“어서 드세요.”
“응, 너무 배고파서 우선 먹고 씻어야겠어. 그런데 아이린은 점심 먹었어?”
“네, 저는 누구와는 다르게 날을 꼬박 새우거나 아침을 건너뛰지도 않고,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 중간중간 간식까지 아주 야무지게 챙겨 먹는 사람이라서요.”
아이린의 타박에도 록사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공격했다.
“뭐야, 이미 점심 먹었다는 말을 왜 그렇게 길게 해? 나니까 알아듣지,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들 한마디씩 할 거야.”
“네, 록사나 님은 언제나 제 충언에 적어도 네 마디 이상 첨언을 꼭 하시죠.”
“피식, 잘 아네.”
록사나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캬~, 좋다. 커피를 마시니까 정말 살 것 같아. 잠도 확 깨고 말이야.”
“다행이네요. 샌드위치도 같이 편하게 드세요.”
아이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록사나가 샌드위치 한 쪽을 손에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응, 이야기해.”
입에 음식물을 담은 상태에서 록사나가 웅얼거렸고, 아이린이 본격적으로 아침 보고를 시작했다. 정오 보고까지 포함해서.
영지, 상단, 수도 4구역 개발 건, 상품과 마도구의 개발, 현재 남작저에 딸린 고용인들과 손님들 상황과 관련해서 각종 업무에 대한 내용이 아이린이 입에서 쉼 없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오늘 새벽에 황궁에서 데려온 아이는 현재 식사 잘하고 별채의 방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신변 조사 결과 황궁에는 납치를 당해 들어가게 되었고, 부모님은 양친 모두 있으나 돌아가는 것을 상당히 꺼려 하고 있습니다.”
록사나는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자마자 거의 꿀떡 삼켰다가 목이 막혀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다행히도 커피가 식어 있었다.
“부모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안 좋은 가정들이 떠올랐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는 학대를 당했거나 가정불화를 들 수 있지.’
록사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눈치챈 아이린이 서둘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