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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93)화 (193/214)

193화 

“이렇게 된 거 잠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네, 제 집무실로 가요.”

그가 정중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록사나가 본관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이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 마쳤을 즈음에는 따뜻했던 차가 온기를 잃어서 미적지근해졌다.

록사나가 그 차를 들어서 목을 축이려고 하자, 그가 말렸다. 그러더니 직접 차를 다시 우려서 그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호로록. 따뜻하고 향긋한 차가 그녀의 목 안쪽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녀가 보일 듯 말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자세하고 정확한 전후 과정은 모르겠지만 어떻게 아이의 몸이 멀쩡했던 건지는 대충 알 거 같아요. 짐작이 가는 바가 있거든요.”

“그래? 뭔데?”

아스테리온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록사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록사나가 살짝 볼을 긁적였다. 앞으로 꺼낼 대화의 주제와 상대를 떠올리니 살짝 민망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망설이는 모습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당장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면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당신도 알아 두면 도움이 될 이야기예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사실 이 사람 이야기를 당신에게 직접 꺼내는 건 처음이라서 좀 어색해요.”

“그렇게 말하니까 뭔지 더 궁금해지네.”

“있잖아요……. 빅토리아 로웰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어요?”

“빅토리아 로웰?”

뜻밖의 인물이 거론되자, 아스테리온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이를 포착한 록사나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왜 몸을 떨어요?”

“내, 내가 언제 몸을 떨었다고 그래?”

“그래요, 안 그랬다고 쳐요. 그런데 방금 말은 더듬었어요. 뭐 찔리는 거 있어요?”

“그런 거 아니야.”

록사나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사실 찔리는 거는 많았다.

그와 빅토리아는 어릴 적 놀이 친구였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하지만 자신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 무성한 소문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진실을 바로잡지 않았던 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막상 이제 와서 자신이 빅토리아와 약혼을 했었던 건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소문을 바로잡지 않은 것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고백을 하자니 여러 가지 생각과 자괴감이 들었다.

먼저 록사나는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의 뒤늦은 구구절절한 변명에 불과하기도 했다.

아스테리온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록사나가 두 눈을 새초롬하게 치켜떴다.

“역시 보통 사이가 아니었군요.”

그녀가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아스테리온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치고 그래요?!”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지?”

그가 대번에 수그리며 저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록사나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빅토리아 로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고요.”

“필요한 만큼? 남들보다 조금 더?”

그의 성의 없는 의문형 대답에 록사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인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누구 놀려?!’

그녀는 단단히 뿔이 났다.

연애 초짜인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한참이나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그는 눈치도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라지만 누가 전남편의 애인을 두 사람의 화제에 올리고 싶겠는가.

한때는 록사나도 두 사람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 관계가 틀림없었을 거라고 단단히 오해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이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직접 사실 확인을 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빅토리아와 아르얀의 오래되고 깊은 관계를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뿐이다.

록사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이를 사리물고 다시 한번 물었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남들보다 조금 더 얼마나 아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래요? 그래야 알죠. 만약 이야기하기 곤란하다면 안 해 줘도 괜찮아요!”

마지막 말은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배려하며 했을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는데, 그의 피부에 와닿는 그 의미와 무게가 사뭇 달랐다.

그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했지만 그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아무리 연애에 눈치가 없고 둔감한 그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랑 빅토리아 로웰은 전 황태자인 네이든의 놀이 친구로 황궁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가 몇 살 때였냐면…….”

몹시 당황한 아스테리온의 논리 정연한 언술은 게 눈 감추듯 쏙 사라지고, 그가 시간순으로 이야기를 죽 나열하기 시작했다.

록사나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점점 어이없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아스테리온은 어떻게든 록사나의 화를 풀어야 한다는 일념하에 정작 그녀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이야기가 끊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이어 나갔다.

중요 사건들만 요약을 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다. 그러다가 그와 빅토리아가 약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점에 다다랐다.

이때부터 록사나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뭐야? 별거 없잖아?!’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이 슬슬 풀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입꼬리가 조금씩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푸슬푸슬 막 쪄 낸 감자처럼 따스한 웃음이 입가에 자리 잡았다.

그녀 스스로도 이런 자신의 극적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스테리온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네이든의 암살 사건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전략상 약혼을 했었던 거야. 이후 파혼하고 소문을 정정하지 않았던 것은 그게 더 우리 측에 유리했기 때문이고.”

아스테리온이 조심스럽게 록사나의 표정을 살피다가 시폰 케이크처럼 부드러워진 얼굴을 발견하고는 목소리에 점점 힘을 주었다.

내내 당황하던 그의 얼굴에서도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며 서서히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빅토리아 로웰과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어릴 적 놀이 친구, 그게 다야.”

아스테리온이 쐐기를 박듯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떳떳한 자세와 올곧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시선은 록사나에게 단단히 고정된 채였다.

그녀의 화가 조금은 풀린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아스테리온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최후의 변명을 덧붙였다.

“워낙 로웰 후작의 손에 통제된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을 아니까 필요한 만큼 알고,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정도라고 말한 거야.”

“…….”

다른 귀족들은 빅토리아가 금지옥엽으로 자랐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의 내밀한 속사정을 알지 못했고, 오직 만들어진 모습만을 보며 빅토리아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내가 빅토리아 로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이게 전부야.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

“…….”

아스테리온은 마지막까지도 강박 관념처럼 빅토리아를 비키나 빅토리아 대신 빅토리아 로웰이라고 꿋꿋하게 호칭했다.

‘빅토리아와 절대 친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돼! 원래 친하지 않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

어릴 적 놀이 친구라고 하면 으레 다들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네이든을 제외하고는 그 전에도, 지금도 빅토리아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굳이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서로의 필요에 의할 때만 친구인 관계였다. 친구 이하, 아는 사람 이상 그 중간 정도? 조금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아스테리온의 노력이 빛을 발했을까?

록사나는 그가 로웰 후작 영애를 빅토리아 로웰이라고 객관적으로 칭하면서 내내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드러내 놓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못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아스테리온의 시선은 시종일관 제 얼굴에 붙박여 떠날 줄 몰랐다. 이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끼며 록사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좀 부족한 것 같지만 어느 정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어요.”

아스테레온의 얼굴이 태양을 만난 해바라기처럼 단숨에 화악 밝아졌다.

“응, 부족한 설명 들어 줘서 고마워. 언제든 다시 물어보면 열과 성을 다해 대답할게.”

“뭐, 그건 알아서 하세요.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길었어요.”

록사나가 창밖을 가리켰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가 민망해서 자신의 볼을 긁적거렸다.

“음, 그렇긴 했네. 벌써 이렇게나 날이 새다니.”

어느덧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 태양이 고개를 삐죽 내민 시간이었다.

“이거 어쩌지? 지금이라도 좀 자는 게 어때?”

“우리 하던 얘기는 마저 하고 눈 좀 붙이도록 해요. 당신도 내가 왜 빅토리아 로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냐고 물어본 건지 궁금하잖아요. 찜찜하게 뒤로 미뤄 두는 것보다는 지금 듣고 자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할걸요?”

“그대 말이 맞아.”

아스테리온이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그는 록사나의 노여움이 모두 풀려서 기분이 날아갈 것같이 몹시 좋았다. 잠을 안 자고 이 상태로 하룻밤, 아니, 이틀 밤은 더 샐 수 있을 정도였다.

록사나가 자신의 추측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까 당신은 빅토리아 로웰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네요. 확실히요.”

“특별한 능력?”

반문을 하면서도 그는 손을 움직이며 두 번째로 차를 다시 정성스럽게 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환상을 다룰 수 있어요.”

“환상을 다룬다고?!”

아스테리온이 정말 깜짝 놀랐다. 그는 빅토리아를 록사나보다 많은 시간 동안 알아 왔다.

그녀에게 능력이 있었다는 것도 무척 충격이었지만,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능력을 록사나가 알아챘다는 사실에 더 경악했다.

더군다나 그는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반열을 올랐고, 록사나는 정령의 힘을 완전히 잃었다가 최근에서야 정령사로 우뚝 섰다.

그는 록사나의 능력이 결코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정령사로서의 자질과 영주로서의 능력은 자신보다 월등히 높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다만 아스테리온은 자신이 소드 마스터였기에 한때 힘을 잃었었던 록사나보다 빅토리아의 숨겨진 능력을 더 빨리 파악해 내지 못한 일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귀신같이 눈치챈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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